역사, 비극의 데자뷔
어릴 땐 역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국사란 딱딱한 벽돌 같아서, 시험을 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 정도였다. 국사를 배우며 감동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저 그랬구나 였다. 내가 문제였던 것인지 역사교사들이 문제였던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역사가 소설처럼 점점 흥미롭게 다가왔다. 우선 어떤 일생도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다가왔다. 시대를 넘어서는 개인은 없었다. 시대를 초월한 것 같은 예수도 유대교와 로마 식민지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고, 석가도 우파니샤드와 힌두교의 전통 속에 깨달음을 얻었다.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냄으로써 시대를 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 사건도 객관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 속에 선택되고 특별한 관점으로 해석되어진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역사적 해석과 역사적 사건은 함께 변화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건은 언제나 해석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결국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팩션인 셈이다.
역사엔 영광보다 슬픔이 많다. 역사의 비극은 데자뷔처럼 반복된다. 문제는 역사의 비극이 개인의 극단적인 비극들을 한꺼번에 발생시키기 때문에 더 처참하고 공포스럽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이란, 레바논 등 중동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은 2차 대전 독일과 뭐가 다를까?
조선과 한국사도 그렇다. 외세에 의한 침략전쟁이었던 임진왜란 정유재란 60년 뒤 병자호란이 다시 일어난다. 임진-정유재란으로 사망하고 납치된 조선인이 50만은 넘는다. 다시는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유성룡은 『징비록』의 명저를 남겼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분밖에 몰랐다. 최명길은 병자호란으로 50만의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가 노예로 팔려갔다고 기록했다. 왜 왕과 위정자들은 국가적 비극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까? 왜 우리는 왕과 위정자들에게 책임을 물지 않았을까? 왕도정치에 속았기 때문이다.
현대사에는 두 개의 내전에 의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다. 동학혁명과 60여 년 뒤 찾아온 6.25가 그렇다. 내전 상황의 전투보다 보복에 의한 학살에 의한 희생이 더 많았다. 각각 30만의 한국인이 계급과 좌우 내전으로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동학혁명이 반란에서 운동으로, 다시 혁명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 2004년이다. 110년 동안 동학은 민족적 트라우마와 한으로 남았다. 6.25에도 동족상잔의 비극이 반복되었다. 더 치열하게. 하지만 우리가 동학혁명을 혁명이라 말하는 순간 과거의 역사도 즉시 달라진다. 달라져야 한다.
동학은 분명 종교적 성격이 강했지만, 농민과 천민들의 농민혁명과 만나며 새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비록 그것이 지배계급과 외세의 결탁에 의해 좌절했지만. 6.25도 마찬가지다.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국가 설립이 가능했지만, 역시 외세와 결탁한 좌우익의 대립으로 좌절되었다. 백성과 국민은 역사의 장기판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임진정유전쟁과 동학혁명의 비극을 제대로 기억하고 평가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60년 뒤 외전과 내전을 다시 겪게 되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사건은 되풀이 된다. 역사 속에서 사건은 무의식적으로 학습되고 되풀이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벌어지면 두 번 세 번 다시 벌어진다. 때문에 비극적 사건을 겪은 뒤에는 치열하게 기억하고 평가하고 끊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선조가 명나라 군대에 의존한 뒤로 조선과 한국의 위정자들은 위험만 닥치면 외세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위정자들은 말로만 백성을 사랑하고, 국민이 주인이지, 백성과 국민을 외세보다 믿거나 존중하지 않았다.
비극의 데자뷔를 끊기 위해 비극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