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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낯선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어떤 무늬를 그릴까
-이질적이지만 낯설지는 않은 세상을 그린 소설 두 편을 읽다
임종욱
◉이민자의 삶,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수키 김의 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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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외여행을 자주 해보지는 못했다. 여행이란 내게는 사치 품목이었다. 처음 외국을 나가본 게 30대를 훌쩍 넘어서였다. 그나마 가본 외국이라야 아시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을 다녀본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소설을 쓰기 위한 답사나 학회 행사 때문에 다녀온 것이지 관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은 북경과 연변, 곡부曲阜, 황산黃山, 남경南京 정도를 가봤고, 일본이라면 교토와 도쿄, 후쿠오카, 사가, 나가사키 정도다. 미국에는 딱 한 번 가봤는데, 본토라면 바닷가도 가보지 못하고 그저 하와이를 한 번 다녀왔을 뿐이다.
어쨌든 요즘은 해외여행이 더 이상 자랑거리도 못 된다. 제주도 가는 것보다 동남아로 가는 것이 경비가 덜 들 정도라니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참 좋아졌다.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외국물 한 번 먹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뻐길 만한 일이었다. 양담배며 바나나, 파인애플 따위는 금단의 기호품이자 꿈의 과일들이었다. 귤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가장 흔하고 싼 과일이 바나나가 된 것을 생각하면 정말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80년대 이전까지 외국에 가는 일은 외교관이거나 특파원, 고위 공무원 등이 아니면 꿈도 꾸기 어려웠다. 특히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간 가장 큰 이유는 ‘이민’ 때문이었다. 고국에서의 생활을 모두 접고 외국에 나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 지금은 이민자 수도 줄어들고 이민 이후의 삶이 그리 비참한 것도 아니지만, 당시의 이민이란 죽지 못해 살아보려고 하는 마지막 안간힘이자 버둥거림이었다.
우리나라 이민의 역사는 조선시대 말기(구한국시대)에 하와이나 멕시코로 갔던 노동 이민이 최초라고 한다. 또 북간도나 연해주 쪽으로도 이민을 갔는데, 이쪽은 불법 이민에 가까웠다. 이후 식민지 시대 때 일본으로 강제징용이 되어 끌려 간 (빌어먹을) 이민도 있었고, 60년대에는 광부나 간호사들이 독일로 취업 이민을 가기도 했다. 그밖에 이민은 아니지만 고아들이 해외 입양으로 세계 곳곳(대개는 선진국이지만)에 발을 디뎠다. 어디를 가든 결국 행복한 장밋빛 꿈을 그리며 떠난 발걸음은 아니었다.
이렇게 떠난 그들이 새로운 정착지에서 겪은 고충과 투쟁의 역정은 대개 슬픔과 고통의 가시밭길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도 여러 편 나왔다. 김영하의 검은 꽃(문학동네)은 멕시코 이민의 이면사를 다뤘고, 안수길의 북간도는 중국 이주사의 한 단면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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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잘 따져보면 우리 민족의 해외여행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북쪽에서 대륙을 통해 내려온 경우와 남쪽에서 바다를 건너 온 두 가지 경우로 요약된다. 농경으로 버틴 민족이라 한 번 땅을 밟게 되자 외국으로는 아예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여행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아주 먼 과거는 모르겠지만, 삼국시대가 끝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遺民들이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중국을 통해 불교가 들어오자 승려들의 구법求法 여행도 빈번해졌다. 혜초慧超 같은 분은 저 멀리 인도까지 찾아가 부처님의 자취와 가르침을 보고 들었다. 그래서 남긴 책이 우리가 잘 아는 왕오천축국전이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의 해외 체험을 글로 남긴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물론 이전에도 있었는데 지금 전하는 것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승려들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이우성 선생은 발해가 있었으니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선생의 말에 동의하지만 아직 입에 올리려니 뭔가 어색하다. 이 용어가 빨리 정착되면 좋겠다.)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때도 부지런히 중국으로 불교를 공부하러 떠났다. 왕자의 신분으로 중국을 다녀온 대각국사 의천義天 같은 분이 있을 정도다.
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때는 해외무역도 활발해서 중국에 ‘신라방’과 같은 집단 거주지가 형성될 정도였다. 지금으로 보면 ‘코리아타운’이 그 당시에 건설된 셈이다.
고려 후기가 되면서 고려가 중국 원나라의 속국 비슷한 신세로 떨어지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원나라 여행이 활발해졌다. 이때는 승려들도 움직였지만, 이른바 신진 사대부들의 유학이 특히 잦아졌다. 그들은 원나라에 들어가 당시로서는 선진 학문인 성리학을 배워 돌아와 이 땅에 퍼뜨렸다.(성리학은 이 땅에 공보다는 과를 많이 남겨 입에 올리려고만 해도 짜증이 난다.)
물론 이전에도 학자들의 중국 유학이 없지는 않았다. 신라 말기에는 당나라로 건너가 그곳에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인물도 다수 나왔다. 최치원崔致遠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원나라 때도 빈공과가 있어 더욱 많은 학자들이 그곳에 가 합격했다. 중국어에도 능통했던 이제현李齊賢이 있었고, 이곡李穀과 이색李穡 부자는 연이어 빈공과에 합격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민족의 해외 이주사도 장구한 흐름과 변천을 겪어 왔다.
이런 이주의 발걸음은 조선시대로 들어오더니 딱 끊어지고 말았다. 공식적으로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은 개국 때부터 쇄국 정책을 폈다. 자국민이 외국에 나가는 것에 치를 떨고 진절머리를 쳤다. 중국을 코앞에 두고 말발굽을 돌린 ‘위화도회군’으로 개국의 물꼬를 튼 왕조답게 조선은 자국민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몹시 꺼린 것 같다.
조선시대 때 외국 여행은 사신의 왕래가 거의 전부였다. 일진이 안 좋아 배를 타고 가다 태풍으로 좌초하는 바람에 표류해서 외국을 떠돈 예는 있지만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그 때문인지 조천사든 연행사든 통신사든 표류한 탓이든 한 번 외국에 나갔다 오면 그들이 가장 먼저 내놓은 것이 여행기였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나 최부崔溥의 표해록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를 표방했지만, 학자나 학생들이 중국에 가서 성리학을 공부했다는 소문은 들어보지 못했다. 조선시대 때 외국가기란 임금부터 천민까지 모두 공평하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자임했으니 외국 나가봤자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청나라 때는 그렇다 쳐도 명나라 때도 유학은 없었다.), 심하게 말하면 조선조 선비들에게는 구도求道 정신이 결여되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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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부터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해외 이주가 잦아지자 그곳에 정착해 그 나라 언어로 또는 우리말로 자신들의 체험과 고향에 대한 추억을 문학작품으로 남기는 예도 심심찮게 나오게 되었다. 압록강을 흐른다를 쓴 이미륵은 독일서 작가로 활동했고, 순교자를 쓴 김은국은 미국에서 영어로 작품을 발표했다. 윤이상은 독일에서 작곡가로 명성을 드날렸다. 가장 많은 해외 동포가 사는 일본의 경우는 훨씬 사례가 많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이 땅에서 청년기까지 보내고 이주한 것이지만, 세월이 쌓이자 어렸을 때 건너가거나 아예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들도 작가가 되어 글을 썼다. 그들은 꼭 문학만이 아니라 영화나 그림,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조금씩 주류 사회로 편입되어 갔던 것이다.
통역사(2005, 황금가지)란 소설로 미국 문단에 등장한 수키 김은 서울서 태어나 열세 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간 여성이다. 어린 시절 이민을 갔다면 이른바 이민 1.5세대인 셈이다. 이름을 보건대 한국 이름은 ‘김숙희’이겠다.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과 영국의 런던 대학에서 동양학을 공부했다고 하니 공부도 썩 잘했던 모양이다.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 들어가 이 소설의 영어판을 조금 읽어봤는데, 문외한인 내게도 유려하게 구사된 잘 쓴 영어로 보였다. 이 작품으로 몇 개의 문학상 후보에도 올랐고, 실제 문학상도 수상했으니 이 소설이 기본이 잘 갖춰진 작품임은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다.
가장 길게 외국에서 체류한 기간이 고작 열흘 정도인 나로서는 이들 이민자들의 신산했던 경험이나 말 못할 고민이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자 우리에 들어간 토끼처럼 그들의 삶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분투, 외로움의 연속이라는 사실이다. 가난한 모국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해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받는 차별대우와 위화감, 멸시를 그들도 고스란히 받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해외 이민자 보호에 무관심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상대적 고통은 더 크겠다.
내게는 동생이 셋 있는데,(다 남자다.) 그 중 셋째가 지금 뉴질랜드에 가 살고 있다. 7·8년 전에 갔는데, 영주권을 얻으려고 정말 고생이 많았다. 이것이 없어서 외국인 대우를 받아 취업이나 거주에 여러 가지로 차별과 장애를 겪었다. 신원도 불확실했고, 생활비도 더 많이 부담해야 했다. 악전고투 끝에 영주권을 받았지만, 여전히 불편한 점은 많은 모양이다. 뉴질랜드가 지상의 낙원이요 꿈의 세상이라 말하지만, 정말 ‘꿈’의 세상일 뿐이다. 그러니 외국에 나가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대강 감은 잡힌다.
통역사는 작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성인 ‘수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녀는 지금 30대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직업은 통역사다. 한국 문화를 집요하게 고집했던 부모님 덕에 우리말을 잃어버리지 않아 미국 법원에서 (피해자든 가해자든 혐의자든) 영어를 모르는 한국인들의 진술을 통역하면서 살고 있다.
그녀의 부모님은 5년 전에 자신들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알 수 없는 인물에게 총격을 받아 모두 숨졌고, 유일한 핏줄인 언니 ‘그레이스’와는 절연한 채 홀로 지낸다.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고, 언니와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대학 시절 유부남 교수와 정을 통하고 집을 뛰쳐나간 수지는 부모님의 장례 때 언니를 잠깐 보고는 외톨이로 살고 있다. ‘양갈보’라는 욕을 먹으면서 부모님과 의절한 그녀는 지금도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더욱이 지금도 그녀는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유부남 미국인 사업가와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인 남성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미국인, 그것도 유부남과의 어정쩡한 관계를 지속하는 그녀의 일상은 일면 이민자들의 뿌리 내리지 못한 삶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정신적 무국적자’의 실상이 그녀의 삶에서 겹쳐지는 것이다.
한국인 피의자들의 진술을 통역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우연히 부모님의 피살과 관련되는 단서를 접하게 된다. 나이 서른을 앞두고도 여전히 미성숙한 삶을 사는 그녀는 부모님 살해의 진실을 찾는 일이 미숙에서 성숙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관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생일 직전마다 아이리스 꽃다발이 배달되고 시도 때도 없이 네 번 울리고 끊어지는 전화로 고통을 받는다.
이 소설은 넓게 보면 부모님의 살해범을 쫓는 한 여성의 행로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되짚어나가는 추리소설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 장년이 되어 이민을 온 세대들의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부모 세대와의 문화적, 가정적인 알력으로 고민하는 후발 세대들의 충돌이 정교하게 짜여 있다. 잘못 감긴 실타래처럼 얽인 미궁 속을 헤쳐 나가는 그녀에게 진실은 희망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다.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욕망과 그 진실을 아는 것이 더 끔찍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폭주기관차처럼 그녀의 내면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늪으로 빠져드는 짐승처럼 추적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다.
결국 그녀는 부모님의 살해와 관련된, 그리고 행방이 묘연해진 언니 그레이스와 관련된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 진실로 마음이 후련해지기 보다는 그녀에게 더욱 큰 고통과 번민을 가져다주었다. 그 무서운 진실을 멍에처럼 등에 지고 그녀는 다시 새롭게 맞는 30대의 이민자의 삶을 시작하고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아직 세상에는 계속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으며, 언제 그쳐 땅이 마르고 굳을 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다. 이렇게 한 치 앞도 분간이 가지 않는 악천후의 삶이 바로 이민자의 삶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런 삶이 이민 1세대이건 2세대이건 3세대이건 1.5세대이건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이민자라면 모두 지고 살아야 하는 숙명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직업인 ‘통역사’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통역사는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들은 별개의 두 문화와 언어에 모두 정통하다. 그러므로 이질적인 문화의 세례를 받은 계층이나 민족 사이에서 그들은 가교로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한편 통역사는 이도 저도 아닌 중립 지대에 존재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양편을 다 알지만 다 모르는 모순 속에 놓여 있다. 양자를 다 이해한다고 하지만 어느 쪽도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들은 양자 모두에게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중간에 낀 사람에게 정체성의 혼란은 당연하다. 스스로 1.5세대를 자처하는 주인공과 그녀의 언니는 그런 통역사의 부조리한 본질을 그대로 겪고 있고, 이 때문에 파탄을 앞두고도 속수무책이다. 양자의 비밀과 추문을 다 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저주에 가깝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 은폐된 비밀과 진실을 알고 나서도 우리는 결코 유쾌해질 수 없다. 굳이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주인공의 부모의 삶과 그들의 두 딸이 겪는 삶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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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으로 나간 자국민들이 자국어든 외국어든 외국에서 써서 발표한 문학작품(꼭 문학만으로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을 총칭해서 ‘디아스포라(Diaspora)’라 부른단다. 우리말로 옮기면 이산문학離散文學인데, 아직 확실하게 이 용어의 정의가 확정되지는 않은 것 같다.
원래 이스라엘 땅에서 쫓겨나 이방인의 땅에서 살게 된 유태인들을 가리키던 말에서 비롯한 이 말은 이제 여러 다른 상황에도 적용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라면 러시아에서 이루어지는 고려인 문학과 중국에서 활동하는 연변의 조선족 작가들, 일본의 재일동포 작가들,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이 범주에 들어온다.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이 범주에 들어올 사람과 작품들도 늘어날 것이다.
외국어로 쓴 우리 민족의 작품을 ‘한국문학’으로 봐야하는지를 두고 아직 분명한 의견이 정해지지는 않은 듯하다. 번역된 작품으로 통역사를 읽은 나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어렴풋하나마 수키 김의 통역사는 한국문학이라고 인정하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작품은 그렇다 치고 나는 작가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책에 실린 소개로 볼 때 작가는 여러 잡지나 신문에 글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또 두 번째 소설을 집필중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번역본이 나온 게 2005년이다. 벌써 8년이 지났다.(영어판이 나온 해로 따지면 10년이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은 발간이 안 된 듯하다. 아마존에도 그녀의 다른 작품에 대한 소개는 없고, 당연히 번역된 작품도 없다.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가 회심의 대작을 준비하느라 바쁘다면 다행이고 크게 기대가 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소설 자체로도 잘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가로서의 역량은 분명 탁월하다. 그러니 다음 소설도 기대할 만하다.
한편으로 나는 그녀가 다음 소설에서는(그 다음 소설이라도) 꼭 이민자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 소설을 쓰기를 바란다. 작가가 자기 경험에서 크게 벗어난 작품을 쓰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녀도 그녀가 가장 잘 아는 주제와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이제는 40대에 가까워졌을 것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미국 사회는 그녀가 잘 아는 주제와 이야기에 속할 것이다. 디아스포라와 관계없이 그녀가 더 넓은 주제로도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한 마디 더하면 이 소설은 번역본 초판만 나오고 절판이 된 모양이다. 지금은 새 책을 구할 수도 없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읽어도 좋을 소설인데 이 점이 안타깝다. 이 소설의 출판사는 ‘황금가지’다. 이 출판사는 주로 추리소설 등 장르소설을 많이 낸다. 앞서 말한 것처럼 통역사가 추리소설의 기법을 쓰고 있는지라 이 출판사에서 나온 듯하지만, 그렇다 보니 다양한 독자층의 관심에서 벗어나 버린 것도 사실이다.
정통 장르소설 독자에게 이 소설은 기법은 그렇지만 내용이나 주제는 생소하고, 심지어 이질적일 수도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을 흥미롭게 읽을 독자들이 출판사 때문에 이 작품을 외면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효경이란 연구자가 <이민자 문학과 모국어의 문제:수키 김, 통역사>란 제목으로 평론을 발표한 것을 읽어보았지만, 그녀의 작품에 대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접근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이 책에는 어떨 때는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역자 후기’도 없다. 그렇게 이 소설은 이 땅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상상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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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고도 오랫동안 읽지 않던 책이다. 1987년 초판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구입해 두었다. 그때는 단 권이었는데, 활자 조판이 컴퓨터 조판으로 바뀌면서 두 권으로 나눠졌다.
처음 샀던 책이 없어져 다시 두 권짜리를 구입해 놓고도 꽤 오래 손을 대지 않았다. 내 책장에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적지 않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재판까지 구입해놓고도 읽지 않은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이상하게 손이 안 끌리는 책이 가끔 있다. 그러다 3년 전 쯤에 처음 읽었고,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었다.
왜 그리 오랫동안 이 소설을 읽지 못했던 걸까? 오히려 나는 이 작가의 다른 소설을 먼저 읽었다. 1988년에 나온 높은 땅 낮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워낙 오래 전에 읽어 그 내용이나 감흥은 많이 바랬지만, 전방에서 근무하는 포병 장교(그렇게 기억된다.)와 여군 사이에 벌어진 멜로 라인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솔직히 그 소설을 읽은 것도 내가 군대를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일종의 대리 체험을 느끼기 위해서였었다.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 소설의 스토리 라인에 많이 개입되어 있는 듯한 소설이었다. 군대에 관한 지식 외에 별달리 얻은 것이 없었거나, 내 독서 목적이 너무 치졸했던 탓에 이 작가의 다른 소설에 대한 호기심이 반감된 모양이다.
또 그가 창작을 통해서보다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에 치중한 점도 흥미를 떨어뜨렸지 않았나 싶다.(이 때문에 비명을 찾아서는 그의 등단작이면서 대표작이 되었다.) 특히 ‘영어공용화론’과 같은 주장은, 내가 그의 이런 글을 관심을 가지고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멀리한 계기가 되었다. 나름대로 논리를 가진 주장이겠지만 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미국의 51번째 주(州)로 편입하자’는 말만큼이나 허황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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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아마도 내 소설의 경향과 이 작품이 많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소설로 들어가기 전에>에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대체역사(代替歷史, alternative history)다. 즉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암살 기도가 실패로 끝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부상만 입었다는 가정 아래 쓰인 소설이다.
나 자신의 소설도 주로 과거에 있었다고 기록으로 전해지는 사건의 이면에 숨은 ‘진실’을 재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이 소설을 통해 뭔가 얻을 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야 사실史實까지 뒤바꾸지는 않았는데, 복거일은 아예 사실 자체를 전복시켰으니 대담하기로 따지면 나는 견줄 바가 못 된다.
소설의 제목에 나오는 ‘쇼우와[昭和]’ 62년은 서력으로 따지면 1987년이다. 실제로 ‘쇼우와’ 연호는 1988년까지 이어졌다. 88올림픽이 끝난 다음 해인 1989년 1월 7일 동아시아 근대사에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더러운 족적을 남긴 1급전범 히로히토는 자신의 행적에 대해 어떤 변명이나 사죄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저승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지 나는 적이 의심스럽다.
소설에서 조선은 결국 일본에 의해 합방되었고, 그 사실은 1987년 소설 속의 현재까지 변함이 없는 것으로 나온다. 즉 여전히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조선 말살 정책’은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어 조선 사람들은 ‘반도인半島人’이라는 모욕과 차별을 당하면서도 스스로 일본인으로 인식하면서 살고 있다.
이미 조선 고유의 언어와 문자는 사라진지 오래고, 모두 일본어를 구사하면서 살고 있다. 당연히 조선의 역사와 문화란 것도 철저히 말살되어 아주 오래 전부터 일본과 조선은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한 민족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선 사람들은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의심조차 품지 않는다. 어찌 보면 섬뜩한 상황이고 과연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지 의구심이 일기도 하지만, 세계사에서 그렇게 사라진 민족이나 언어, 문화가 적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일도 아니다.
‘쇼우와 62년(1987)’ 1월부터 12월까지가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다. 공간적인 배경은 주로 ‘경성京城’으로 불리는 서울이다. 주인공인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는 ‘한도우경금속주식회사半島輕金屬株式會社’ 기획부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39살의 청주淸州 출신 조선인 남자다.
그는 회사원이면서 일본어로 시를 써온 시인으로, 그 해 첫 시집을 내기로 되어 있다. 몇 년 사이 그가 맡은 가장 중요한 업무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사라무’와의 합작 투자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었는데, 거의 성사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아내와 딸을 둔 어엿한 가장인 그는 자기 과의 부하 여직원인 시마즈 도끼에[島津時枝]를 남몰래 흠모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를 좀 더 발전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내지인(內地人)인 도끼에와 조선인인 자기 사이에 놓인 무너뜨릴 수 없는 벽 때문에 마음만 있을 뿐 이를 드러내놓고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유사라무’에서 온 협상 대표인 에릭 앤더슨을 상대로 회사에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계약을 맺으려는 부단한 노력과 총독부 및 일본 정부의 관련 부서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은 이 소설의 중요한 내용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소설의 내용을 길게 소개할 이유는 없겠다.(또 워낙 사건이 복잡하게 전개되어 내용 요약도 쉽지 않다.) 그런 와중에 히데요는 우연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작가가 쓴 도우교우, 쇼우와 61년의 겨울이란 소설의 복사본을 손에 넣게 된다.
그 내용이란 것이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다.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고, 일본은 미국과 2차 세계대전을 벌였다가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뒤 항복했으며, 조선은 독립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의 황당한(?) 내용에 당황하면서도 그 소설에서 히데요는 일말의 희망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시집을 전해주려 청주에 있는 큰아버지를 방문했고, 거기서 주인공은 백 년도 되지 않은 이전에 조선이란 왕국이 존재했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은 별개의 역사를 소유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빠진다.
게다가 동경제국대학 교수로 있는 사노 히사이찌[佐野壽一]의 저서 독사수필讀史隨筆과 조치원의 헌 책방에서 구입한 조선고가시선朝鮮古歌詩選은 그로 하여금 조선에서 말살된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만다. 또 장모의 장례식 때 찾은 원산元山 석왕사釋王寺의 승려 소공小空 스님으로부터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沈黙과 그의 저술들을 전해 받은 이후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어와 조선의 고유 문학을 탐구하는 일에 빠져든다.
이미 조선에서는 조선에 관한 문헌들이 거의 사라졌고 오직 일본 교우또우[京都]에 있는 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히데요는 합작 계약의 정부 허가를 받는다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그간 아무도 찾아보지 않은 조선 역사와 관련된 문헌들을 복사해오기에 이른다. 그러나 김포공항에서 검색을 받으면서 이 문헌들은 발각되고, 그는 사상범으로 몰려 경찰의 취조를 받게 된다.
고문과 취조를 당한 끝에 반성문을 쓴 그는 한때 그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팔 병신이 된 뒤 전향한 조선인 평론가 하꾸야마 마사오미[白山正臣]로부터 ‘갱생 교육’을 받는다.
왜 조선인은 일본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꾸야마의 논리에 결코 마음으로 복종할 수는 없었지만 히데요는 석방을 위해 그의 입장에 동조하는 한편, 절망에 빠진 그의 참혹한 심정도 이해하게 된다.
간신히 보호 관찰 처분을 받고 석방된 그에게 회사는 자진해서 퇴직할 것을 권했고 그도 이에 따르려고 했는데,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자리는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옥에 갇힌 그를 돕기 위해 학교 후배의 남편 아오끼 류우자부로우[靑木龍三郞] 헌병대 소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었던 아내 세쯔꼬[節子]는 그만 그와 불륜의 관계에 빠지게 되고, 이를 알게 된 히데요는 큰 좌절에 사로잡힌다.
결국 아내뿐만 아니라 딸 게이꼬[惠子]까지 능욕하려던 그를 히데요는 살해하고 만다. 더 이상 조선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없게 된 히데요는 잡지에서 보았던 중국 상해上海에 있다던 임시정부를 찾아가 조선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겠다고 결심하고 잠든 아내와 딸을 놓아둔 채 장장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고난의 발걸음을 띄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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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박하게 정리해 이런 줄거리를 가진 이 소설은 역사적 현재와는 너무나 다른 가정이 소설의 현실성을 심하게 허물어뜨릴 것 같지만, 읽는 내내 전혀 그런 위화감은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조선 문화에 대해 무지했던, 일본 제국의 충량(忠良)한 신민으로 자부했던 주인공이 엄청난 역사 왜곡이라는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대단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또 도끼에와 앤더슨, 그 사이에 형성되는 애정의 삼각관계와, 1987년 당시 실제로 외국 회사와 합작하기 위해 거쳐야 했을 법한 이런저런 과정들이 생생하게 기술됨으로써 소설 읽는 재미를 한껏 배가시킨다.
이 소설은 소설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읽는 재미’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아울러 109개 단락으로 짜인 구성은 독서의 속도를 빠르게 이끌어 나간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긴 소설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힐 것이라 나는 장담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는 대체역사라 규정하고 있지만, 사실 이 소설은 1987년 한국의 시대 상황을 패러디한 작품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그렇게 읽힐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뜻이다.) 그 무렵 한국은 군부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고, 많은 서적들이 ‘불온서적’이란 이유로 금서 목록에 올랐으며, 서울 올림픽 개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계층 간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 갔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함성은 거세져 갔다. 급격한 경제 성장의 여파로 서양 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우리 것을 서서히 잃어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많은 점에서 소설의 현실은 당시의 현실과 닮아 있다.(이런 일들 가운데 2013년 현재도 유효한 것이 적지 않다.) 이런 점에 대한 작가의 우려가 소설 곳곳에 음화로 새겨져 있었다. 그런 작가가 무슨 곡절로 ‘영어상용화론’에까지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한국 사회가 겪고 있던 문화적, 정신적 혼란을 이 소설은 은연중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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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서도 읽을거리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내고 있지만, 한편 소설이 담고 있는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담론의 깊이도 만만치 않다. 109개로 구성된 각 장마다 실재했던 사람들의 경구나 작가가 가상한 인물들, 또는 문서들을 먼저 짧게 인용함으로써 허구의 소설과 실존하는 현실 사이의 거리를 소거시키고 있다. 그럼으로 해서 소설은 마치 한 편의 논픽션이나 어떤 사람의 전기를 읽는 듯한 현실감을 유지하게 만든다.
또 주인공이 놀라운 사실을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고민과 갈등들이 소설의 틀을 벗어나 당면한 우리 시대의 현실 문제로, 나아가 나 자신의 문제로 전이되게끔 유도한다.
특히 이미 친일 인물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이광수李光洙의 행적과 변절한 비평가 하꾸야마의 고민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나약한 지식인이 어떻게 자기 합리화의 길로 접어드는가를 숙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왜 마땅히 친일인사라는 오명을 감수해야 하는지 수긍하면서도 비감에 젖게 만든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식민지 시대 친일을 저질렀던 사람들에 대해 대놓고 당당하게 비난할 자신은 없다.
내가 그런 환경 속에 놓인다면, 잔인한 고문과 혹독한 보복에 시달려야 하는 일이 과거에 있었던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실재로 닥친다면 나는 과연 의연하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의 길로 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길을 갔으리라 생각한다. 80년대 신군부 군사독재 시절 때도 나는 운동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과 명예뿐만 아니라 가족의 안위와 자신의 목숨까지 내버리고 독립 운동에 나섰던 지사들이 더욱 존경스럽고, 위협과 회유에 넘어갔던 사람들을 무작정 꾸짖을 수도 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행복까지 포기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친 그분들과 그분들의 후손들에게 오늘날의 우리는 무슨 보상을 얼마나 진정에서 우러나와 충분하게 하고 있는가? 아예 작정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라면 얼마든지 성토할 수 있다. 그렇게까지 양심을 내버리지는 않을 것임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용서야말로 진정한 복수라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산다. 우리는 과연 저들의 고민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지 이 소설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아울러 우리의 무뎌진 현실 인식을 예리하게 벼릴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첨언 : 소설에서 ‘십이월’ 부분은 없었던 것이 소설적으로 완성도를 더 높였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아내가 헌병대 소좌와 불륜에 빠지고 결국 그를 살해함으로서 주인공이 상해 임시정부로 가게 되는 결말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이 부분에서 조금 억지를 부렸다. ‘십일월’까지 주인공이 고통과 고민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점에서 끝났다면 소설은 더욱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을 듯하다. 햄릿이 고민 끝에 자살하지 않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죽인 뒤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면 너무 결말이 우습지 않겠는가? 이미 소설은 ‘십일월’로 작가가 하고자 했던 모든 말을 다했다.
임종욱/ 한문학자 ․ 소설가. 저서 『동양 문학 비평 용어 사전』, 장편소설 『이상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