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보험 얘기부터. 등반 전 기본적인 준비 중 하나는 바로 보험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로 활기찬 샤모니 시내에 가면 메인스트리트를 중심으로 L’Office de Tourisme (관광사무소. 각종 정보 얻을 수 있어요), La Maison de la Montagne (‘산악인의 집’이라고들 흔히 하는 듯) 등이 모여있다. 산악 보험은 ‘산악인의 집’에 가야 들 수 있는데 무조건 1인당 하루 5.5 유로. 사고나 조난 시 구조와 병원 이송, 응급 치료 등 기본적인 내용이 포함된다. 요컨대, 헬기를 개인 경비 따로 안 들이고 띄울 수 있다. 물어보니 다른 국가 포함 유럽 전체에 대해 적용되는 보험이라고.

- 샤모니 메인스트리트. 미란 언니와 대원 뒤로 보이는 동상이
몽블랑 초등자 자끄 발마와 소쉬르 -
몽블랑은 ‘알피니즘 역사에서 등정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산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원정 일정의 첫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한진 등반대장의 생생한 중계대로 결국 정상을 밟지는 못했지만) 구떼 산장까지의 체험으로 보면, 그런 상징성 외에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어 보인다. 길 자체는 오히려 지루하고 밍밍한 편이다. 하지만 몽블랑은 그 상징성이라는 엄청난 자력으로 전 세계 수많은 관광객과 등산객들을 끌어 들인다. 그래서이기도 하겠지만 고소 문제만 잘 처리하면 상대적으로 쉬운 등반지로 여겨진다는 곳임에도 성수기 주말이면 평균 12번 정도는 헬기가 떠주신다고.
원정 가기 전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고소가 올까, 어떻게 올까’하는 것이었다. 2천 이상 올라가보는 것은 처음이니까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고소가 왔나? 왔다. 물어보시는 분들에게 없다고 대답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고소였다.
몽블랑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벨뷔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산악열차로 갈아 탄 다음 니데글 산장까지 가야 한다. 그때 한번에 좀 고도를 많이 올렸나 보다(샤모니 1천 정도, 니데글 2천3백 정도니까). 오르막을 올라갈 때 숨이 헉헉 차오른다. 니데글 산장에 도달해 앉아 있으니 몸의 긴장이 완전히 풀리는 느낌? 말과 행동이 느려지고 공연히 헤실헤실 웃음이 나온다. 살짝 술 취했을 때 기분 좋은 느낌과 비슷했다. 대충 만사가 귀찮아지면서, 사람이 착해지는 거 같기도 하고. 화 내고 시비 거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라. 아쉽게도(?) 한 두 시간 지나니 이런 기분은 사라져 버렸다. (이 날 이후로는 몸이 적응했는지 다행히 별다른 고소 증상은 없었다.)
인호 형님은 조그만 집게 같은 기구로 혈중산소농도와 맥박을 체크해 주신다. 평지에서 보통 혈중산소농도 95~97, 맥박 60~90이라고 한다. 나는 93, 85 정도가 나왔고, 다른 대원들도 엇비슷하게 안전선 통과인데 남규 대장을 측정해보니 98, 60이 나온다. 인호 형님 왈, “이 사람은 셀파 해도 되겠네.” 뭐냐고요. 평지에서는 맥박수가 분당 한 50회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 대략 이런 모양으로 측정 -
우리가 하룻밤을 지낸 니데글 산장은 주변에서 구한 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리는 2층짜리 건물이다. 그림 엽서에 등장함직한 초록색 산, 회록색이 도는 바위산, 흘러내린 빙하의 흔적, 거기다 몽블랑의 흰 봉우리 등 너무나도 다른 산들이 겹쳐진 전망을 자랑한다. 주변 바위틈에 널린 꽃들은 일교차가 크고 기후변화가 극성스러운 지대의 식물답게 선명한 색감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다음 날은 아침 7시 반쯤 출발한다. 이후 떼뜨 산장, 거기서 다시 구떼로 이어지는 길은 다소 지루한, 삭막하기까지 한 잡석지대와 살짝 기어올라야 하는 경사진 암릉 길이 이어진다. 역시 오르막은 평소보다 좀 더 숨이 차고. 니데글에서도 그랬고, 떼뜨에도 도착하니 가이드들이 지켜 섰다가 ‘산장에 자리가 없다, 날씨가 좋지 않다, 이런 날씨에 비박하면 죽는다’ 등 무시무시한 경고를 했지만 우리는 일단 올라가 보기로 한다. 결국 구떼에 도착하니, 그 예약하기 어렵다는 산장이 텅텅 비었다. 일기예보가 어지간히 안 좋았던 탓에 아는 사람들은 다 빠진 거다. 먼저 도착한 한진 등은 벌써 맥주 한잔씩 하시고, 자리 잡고 쉬고 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섰다. 구떼 산장지기는 텅 빈 산장에 와준 우리가 반가운 건지 안돼 보인 건지 계속 미소 띤 얼굴로 뭔가 말을 걸려 애쓴다. 몇 개의 영어 단어가 오간 후 어찌어찌 ‘South Korea’를 알아듣고 계속 우리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올랭삐끄, 올랭삐끄” 한다. 아, 올림픽! 손가락 동그라미는 오륜기를 표시하려 했던 거였다… … 그 정도 하더니 한국에 대해 더 이상 말할 게 없어진 아저씨는 돌아서서 뭔가를 만들기 시작한다. (나중에 평창의 올림픽 유치 소식을 알려주었던 남자는 조금 더 젊은 영어를 좀 하는 사람이었고)
요리를 하시는군. 요리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남자는 멋지다. 훌쩍 큰 키에 서글서글해 보이는 구떼 주방 아저씨는 어딘지 오래 전 영화 베티 블루에 나왔던 베티의 연인, 조르그를 떠올리게 한다. 하루 종일 밖에서 시달리다가 들어와서 불평을 늘어놓으면 “음, 그랬어?”하고 아무렇잖게 받아넘기고는 맛있는 걸 만들어줘서 순식간에 마음을 풀어줄 것 같은 그런 선선한 인상이다.
주방을 슬쩍 훔쳐보니 불 위에 커다란 들통이 끓고 있고 (나중에 성민형님이 사줘서 알게 되었는데 수프 남비였다.) 조리대에는 얇게 밀어놓은 반죽과 푸른 사과(아오리?)가 바구니 한 가득. 애플 스트러들(파이 껍질에 설탕에 졸인 사과, 견과 등을 넣고 계피로 맛을 낸 빵인데, 크라상과 함께 가는 데마다 먹고들 있더라. 맛있어요.)이라도 만들고 있는 건가. 흘낏거리면서 이제 서서히 물려가는 알파미 봉지에 물을 붓는다.

- 올라갈 때 바라본 구떼 산장의 모습. 이때는 평화롭게만 보였다 -
다음 날 아침은 눈보라가 심했다. 정상을 포기하고 매서운 바람 속으로 하산을 시작하던 그 순간이 전체 일정을 통틀어 평소 내가 갖고 있던 “원정대원” 이미지에 가장 근접했던 때인 것 같다. 방풍 자켓에 발라클라바, 고글 등으로 무장하고 산장을 나설 때는 긴장감과 함께 약간의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예상보다는 훨씬 순조로왔던 하산을 마치고 알펜로제로 돌아왔다. 정상을 못 밟은 아쉬움은 있지만 아직 마터호른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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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블랑
-불어로는 Mont Blanc, 이탈리아어로는 Monte Bianco (몬테 비안코). 모두 하얀 산이라는 뜻.
-높이 4,810 m의 알프스 최고봉.
-1786년 8월 자크 발마와 미쉘 파카르가 초등.
* 구떼 루트
샤모니 숙소 -(버스)-> 우쉬 벨뷔 케이블카역 -(케이블카) -> (산악열차)-> 니데글(2,372 구떼 루트의 시작점) -(트레킹 잡석, 잔돌)-> 떼뜨 산장(3,100) -(낙석주의)-> 구떼 산장(3,817) -> 발로 산장(4,362)(무인) -> 몽블랑 정상(4,807)
첫댓글 뭐야! 이거 연속극 스타일 이네 ! 채널고정 뭐 이런거야! 에이 이젠 안봐!
잘 다녀오셨어요? 다음편 기대 ^^
후기를 읽으니 여러가지를 배울수 있어서 좋네요...다음편도 기대할께요~^^
먼저 올렸던 원정 사진과 오버랩 되면서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져요~마치 소설같이요^^
몽블랑과 마터호른 인류최초로 오른곳이 몽블랑(1786년)이며, 등산의 황금기를 마감한곳이 마터호른(1865년) 입니다. 몽블랑의 몽(Mont)은 프랑스어로 산이며, 블랑(Blanc)은 '흰빛' 즉 만년설이 덮인산 이란 의미입니다. 호른은 뾰족한 뿔, 등산에서는 뾰족한 봉우리를 뜻합니다. 마터호른, 베터호른, 바이스호른, 슈레크호른,슈바르츠호른,브라이트호른,모르겐호른등 가보지 않아도 그산의 명칭만 보아도 산의 형태를 가늠할 수 있겠지요
아, 그렇구나. horn (뿔)이군요. ^^ 재미있네요~
호른은 독일어 이고, 프랑스어로는 에귀유(aiguille) 라는 단어가 있는데 똑같이 뾰족한 암봉을 말합니다. 샤모니 에귀유가 유명하지요, 약간의 사용의미를 부여한다면, 호른의 명칭을 사용하는 봉우리는 거의 독립봉입니다. 에귀유단어를 사용하는곳은 뾰족한 봉이 많은 침봉군이 있는 곳을 칭하더군요. 참고로 영어로는 니들(needle)이라고 합니다. 원뜻은 바늘이지만 등산에서는 바늘 끝처럼 뾰족한 암봉을 의미 합니다. 우리말로는 침봉 입니다.
고맙고, 유익한 정보에, 글솜씨에 제가 행복한 시간이였네요. (등반을 참여해서 행복하셨겠지만)
감사합니다^^ 그런데 암장에서 뵌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