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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불교신문이라고 부르지만 그때 제호는 ‘대한불교’였다. 대한불교신문의 사장은 덕산 이한상 거사였다. 그는 육중한 체중이었지만, 늘 빨간색 폭스바겐을 타고 다녔다. 그런 차가 사장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 했으나 작은 경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또 다른 위엄이 있어 보였다.
덕산 거사는 당시 재가불교 신행단체로 결성된 달마회(達磨會)의 중앙간부로 있었다. 달마회는 숭산 행원스님이 지도하는 재가신도단체로 선수행을 함과 동시에 교학공부를 열심히 하는 단체였다. 이와 같은 신행단체를 운영하면서 덕산거사는 65년까지의 불교정화사를 정리하게 되는 한국불교 최근 백년사를 종합적으로 수집하는 삼보학회를 만들었다. 그 삼보학회는 대한불교 사장실 옆방에 자리하게 되었다. 신문사 운영, 백년사 자료 수집은 대단한 인적조직이 필요하였고, 그 자금도 대단하였다. 이러한 모든 자금을 덕산 이한상 사장이 단독 염출하였다. 덕산거사의 헌신적이고 정열적인 신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65년 이후부터 한국불교가 학술.수행.홍보.인재양성 등에 관심을 갖고 추진한 것은 삼보학회가 결성되어 이러한 사업을 진행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재가신도들은 달마회나 삼보법회에 나와서 불교 강의를 듣는가하면, 강남 봉은사에서는 대학생 구도부를 조직해 대학생들이 사찰에서 생활하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이러한 모든 운영비도 또한 삼보학회가 장학회를 조직, 장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수여하는 방식을 통해 충당됐는데, 이 모든 것이 다 덕산거사의 원력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한불교신문사에서 모두 이루어졌으므로 서경수, 정광호, 안진오, 박성배 선배들을 항상 만날 수 있었고, 또한 유엽스님, 박경훈, 조용원, 송재운, 윤영흠, 이병남 등 신문사 직원들도 얼굴을 대하게 되니 나도 큰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대한불교신문 10여년 이끌어
삼보학회.장학사업 등 추진도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 발행하는 신문이므로 수요일이 원고 마감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수요일까지 자기가 맡은 면의 원고를 만들어야 한다. 원고청탁은 누구에게, 취재는 무엇을 하여야 한다고 편집회의에서 결정이 나는 것이므로 기자들은 의견을 내어 놓기도 하고, 편집국장의 지시를 받기도 했다.
신문은 목요일 대한일보에서 작업하였다. 당시 ‘대한불교’는 인쇄시설이 없으므로 덕수궁 건너편에 있는 대한일보 공무국에 가서 신문을 제작해야 했다. 동판 담당이 윤영흠 기자였는데, 종회가 끝나면 항상 고민을 하였다. 새로 만들어진 동판과 구동판이 한주먹이나 되고, 스님들은 모두가 삭발하고 있기에 동판상만 봐서는 스님들의 얼굴을 바로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지형을 뜨기 전에 얼굴이 바뀌면 바로 고치면 되지만 윤전기에 걸려 신문이 인쇄가 되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신문사가 총무원에 사과를 하지만, 윤영흠 기자가 난처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윤기자의 인간성은 총무원이 다 알아주었으므로 삼배참회로 일단락되기도 했다.
건설부분에만 열중하고 재정을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인 덕산 이한상 거사의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어 한국불교의 언론, 장학사업, 재가불교운동, 삼보학회의 최근불교백년사 등의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면 했는데, 이한상 사장이 ‘대한불교’ 사장직을 사퇴하고 1972년 1월28일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그 방대한 사업도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아무튼 65년 이후부터 한 10년 동안 불교가 생명 있는 종교로, 사회에 무엇을 투사하는 듯했으나, 한 사람의 이주로 인하여 모두가 꿈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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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기연들에 합장합니다. 불교의 역사가 깊으지는 느낌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를 믿고 따르는 불교수행자들이 많아지길 발원해 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