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동권 전탑(8개소: 전탑 3기, 전탑지 5개소)
안동은 전탑의 고장이라 불린다. 이는 인근 의성, 영양 등의 모전석탑을 포함하여 12개소의 탑지(전탑과 전탑지는 8개소)가 남아있고 안동 시내에는 현존하는 5기의 전탑 중 3기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는 유일한 국보(제16호) 전탑인 신세동 7층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3. 안동권의 전탑과 전탑지
(1) 안동 신세동 7층전탑
(2) 안동 동부동 5층전탑
(3) 조탑동 5층전탑
(4) 임하사지 전탑지
(5) 안동 금계동 다층전탑
(6) 안동 장기동 옥산사지 전탑지
(7) 안동 서후면 개목사 전탑지
(8) 영주 무신탑(無信塔)
안동에 전탑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부터 이런 저런 견해가 있어 왔고 그것에 대한 반박과 결론을 같이 설명한다.
1) 안동의 화강암이 강하지 못해 부득이 벽돌로 탑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또 조탑동 5층석탑과 금계동
다층전탑은 퇴적암 지대에 있고 또한 안동단층 남쪽의 퇴적암 지대에는 양질의 뻘(泥)이 생산되고
있어 벽돌을 만드는데 좋은 재료가 된다.
화강암의 모전석탑 : 9세기에 건립한 옥동(현 평화동) 3층석탑(보물 제114호)과 이천동 마애석불(보
물 제115호, 일명 제비원 석불) 등 우수한 화강암으로 조성된 불적이 있을 뿐 아니라 이천동, 학가산
등에는 어렵지 않게 양질의 화강암을 찾을 수 있다. 또 굳이 전을 번조(燔造)하지 않고 가까운 영양
의 모전석탑처럼 벽돌모 양으로 돌을 잘라 탑을 세우면 된다.
부족한 양질의 화강암이 전탑축조에 다소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으로 전부를 설명할 수 없고 일
부분을 보충 설명하는 종속변수와 같은 것이다.
2)전탑안동지방 발생지설 : 현재까지 안동에 남아있는 3기의 전탑은 8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지
고 있는데 비해 경주지역의 경우는 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석장사지 전탑, 8세기보다 훨씬
빠른 7세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인왕동 전탑과 농소 중산리전탑이 있다. 경주와 안동의 전탑은 대략
100년의 시차가 있다.
3)당인주류설(唐人住留說), 종파관련설(宗派關聯說) : 이 설은 중국전탑을 본 승려 또는 공장(工匠)이나
혹은 당나라에서 도래한 공장 등이 어떤 종교적관계로 안동에 체류하여 유력한 자금을 얻어 당시로
볼 때 웅장한 7층, 5층 전탑을 세웠거나 혹은 전탑을 선호하는 특정 불교 종파의 전교승이 중국으로부
터 안동에 도래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독특한 조탑형식을 남기게 되었다는 가정이다. 또 나당전쟁 후
당나라 포로를 안동지방에 수용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도 있다.
:이에 대한 아무런 문헌 기록이나 물증이 없고 경주지역에서도 다수의 전탑지가 찾아진 현재 특히 종
파관련설은 큰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또한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영주 부석사나 안동의 고찰
인 서후면 봉정사 등 창건 이래 비교적 사역이 잘 보존된 두 절에도 현재까지 전탑의 유구를 확인하
지 못해 더욱 그러하다.
안동지방에 많은 전탑이 남아있는 이유는?
결론을 말하면 다른 지역의 전탑보다 각별하게 보수 관리를 잘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영가지 고탑조를 보면
1. 「본부대비보(本府大裨補)」-법림사(동부동 5층전탑)
2. 「본부대비보 성화정미개축(本府大裨補 成化丁未改築)」-법흥사(신세동 7층전탑)
3. 「본부대비보 성화정미이민합력수축(本府大裨補 成化丁未吏民合力修築)」-임하사 7층전탑
위의 2,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1487년(성종 18)에 개축, 이민합력수축이라 적힌 2건의 대보수공사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특히 임하사 7층전탑의 경우는 ‘관리와 백성이 힘을 합하여 고쳐 세움’이라고 적고 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천시하던 조선시대에 불탑을 고쳐 세우는 일을 관리가 백성들과 함께 일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00~200년 만 방치해도 무너지기 쉬운 전탑을 안동에서는 200년 마다 보수 관리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동사람들이 이렇게 전탑을 보수하고 지킨 이유는?
필자는 안동의 탑들이 세워진 자리는 풍수비보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안동읍도에는 남문 밖에 현재의 동부동 전탑인 법림사지 전탑, 동문 밖에는 신세동 전탑인 법흥사 전탑이 그려져 있으며 안동의 서쪽에서 낙동강을 건너면 임하동(옥동)의 임하사 7층전탑, 북후면 장기동의 월천 전탑 등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일직선상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는 남쪽이 열려 지세가 허한 것을 막는 대비보(大裨補)이다.
신라의 왕도 경주의 경우도 사찰과 풍수비보와의 관련을 찾을 수 있다.「삼국유사」아도기라 칠처가람지허조에 전하는 고신라(前佛시대)의 일곱 가람터 가운데 다섯 가람터(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가 하천과 관련된 지역이다. 이는 홍수의 범람을 두려워하여 신성시했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
특히 경주 분황사는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폐사가 되지 않은 유일한 사찰이다. 조선시대 읍치에 가까운 평지 사찰이 거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법등이 유지된 것은 북천의 물길이 경주시내로 향하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을 분황사가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방 관리나 토호들이 분황사를 폐사시킨 뒤에 생길 하천 범람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신라 탑의 시원인 분황사 모전석탑도 유지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안동권 전탑의 조성시기
신세동 전탑은 무문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편년의 기준이 없어 기단부 신장상을 편년 기준으로 삼으면 신장상 탑 부조가 등장한 시기인 8세기 중반으로 보인다.(고유섭은 8세기 전반)
동부동 전탑은 옆에 위치한 운흥사 당간지주가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826년, 흥덕왕 원년)와 유사한 점에서 하한을 9세기 초 이전으로 잡고 이 사지에 출토된 당초문암막새의 제작시기에 따라 8세기 초까지도 소급 가능하다.
3)안동 일직면 조탑동 5층전탑(보물 제57호)--일직대전탑
중앙고속도로 남안동나들목 못 미처 넓은 들판 중앙에 위치하는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전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단(基壇)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5∼6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초층 옥신부분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초층 옥신이 석재로 이루어진 것은 조탑동 5층전탑 한 기 뿐이다.
남면에는 감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감실내부의 목조기둥(심주)은 목조건축물이나 목탑에서 볼 수 있는 형식으로서 탑(건물)의 중심축을 바로 잡아줄려는 의도에서 세운 것이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당초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에는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이 탑의 체감 비율은 지붕보다 몸돌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데,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점과 5층 몸돌이 너무 큰 것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부분적인 보수를 거치는 동안 창건 당시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탑의 높이는 8.65m,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8세기 중엽).
이 탑의 주변에는 석탑의 옥개석 등이 남아 있으며 영가지에도 일직삼탑(一直三塔)이라 하여 전탑 외에 두 개의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조탑동 5층전탑 외에 2기의 탑이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 중초사 당간지주(보물 제4호)는 이두문체의 초기 형태인 속한문으로 기록된 6행 123자의 명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창건당시의 당간지주 조성연대와 조성책임자를 기록한 당간지주이다.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 채석하여 이듬해(827) 2월 30일에 조성 건립되었고, 조성 책임자인 절주통(節州統) 황룡사 항창화상을 위해 10여명의 법사가 이 일에 동참하였다>고 적혀있다
금계동전탑은 9세기 후반 이전, 임하사지 전탑지는 8세기 중엽, 옥산사지 전탑은 신라하대, 개목사지 전탑지는 신라 말로 추정된다.
1)안동 신세동(법흥동) 7층전탑(국보 제16호)--법흥사 전탑
전체 높이 17m, 한국 최대의 전탑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 때 세워진 법흥사에 속했으며 법흥사는 17세기초에도 소규모의 사찰이 남아 있었다. 현재 상륜부가 결실되었고 기단부도 원형을 잃고 있어서 본래 형태를 추정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기단은 한 면에 6장씩의 팔부신중이나 사천왕을 새긴 면석을 붙였는데, 북쪽은 이나마도 붙어 있지 않고 시멘트로 보강되어 있고 면석의 너비도 70~88cm로 균등하지 않으며 신장상 중에도 광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혼재하여 신장상 전체 또는 일부가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는 높이로 보아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원형을 확인할 길은 없다.
기단 남면 가운데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무문전으로 탑신을 축조하였으며, 초층옥신 남면에 감실을 설치하였다. 옥개부의 모서리부분은 정방형의 전으로 축조하였으며 1층 옥개 하부에 화강석재로 만든 별석 3개를 사용하는 등 전탑붕괴를 막기 위한 상당한 배려를 한 것이 주목된다.
상륜은 모두 없어 졌으나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금동제 상륜부를 객사 소용물을 만드는데 쓰려고 거두었다고 한다. 낙수면의 윗면에는 기와를 입혔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기와는 조선시대 중수 시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명에 신세동은 들어간 것은 국보지정 당시 옆 동네의 이름을 잘못 붙인 것으로 이곳이 과거에도 신세동이었던 적은 없다, 법흥동의 오기가 명백하므로 ‘법흥동 7층전탑’으로 바꾸어야 한다.
탑의 뒤편에는 옛날 법흥사 터로 보이는 고성 이씨 소종가인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중요민속자료 제 185호)이 있고 150m정도 떨어진 거리에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의 생가인 임청각(보물 제162호)이 있다. 전면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건설한 중앙선 기찻길이 있고, 그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4)안동 풍천면 금계동 전탑--화인사지 전탑 추정
1959년 까지 다소 파괴되었으나, 4층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다가 1959년 가을 사라호 태풍의 내습 때 거의 도괴되고 말았다. 붕괴전의 사진을 보면 4층인 것으로 보아 원래는 5층이었을 것이다. 추정높이도 5m를 넘지 않는 소형전탑으로 보인다.
이 탑은 자연석 기단위에 있으며 초층탑신 동면의 일부만 무너지기 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특이한 점은 고와(옛기와)와 같이 삼베무늬(포목문) 벽돌의 사용이다. 이 사실은 다른 전탑의 벽돌과 달리 그 제작기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2009년 5월 16일 안동시 풍천면 금계리의 금계동 전탑 답사
도록에 나타난 것보다 더 많은 붕괴가 일어났다. 예전에 있였다는 슬레트건물 안의 비로자나불도 도난당하고 없었다. 유지 보수 문화재지정이 급하다.
5)안동 임하동(옥동) 임하사지 전탑
임하사지는 현재의 안동생명과학고등학교 동편 야산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데 협소하기는 하나 신세동 전탑의 추정사역보다는 넓어 보인다.
임하사지 전탑은 문헌(영가지 고탑조)에 나와 있으나 그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던 중 건설공사 과정에서 탑지가 노출되어 안동대학교 박물관이 긴급 발굴 조사하였다.(1985년)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탑 기단부 중심의 지하 1.5m에서 석제사리함을 발견, 사리장엄구를 수습하였다. 탑지의 한 변이 5.6m에 이르는 거대한 전탑이었음을 밝혀내었다. (신세동 7층전탑은 기단 한 변이 6.4m 정도)
지하구조는 매우 특이한 목탑식 지하 구조이고 안동지역에서는 드물게 연화문전과 당초문전으로 축조한 것이 드러났다.
당초문전은 조탑동 전탑과 비슷하고 신라토기파편이 출토된 점을 근거로 이 탑의 초창은 신라 말까지 소급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했다.
6)안동 북후면 장기동 옥산사지 전탑--월천 전탑으로 추정
옥산사지는 북후면 장기리 벽절마을에서 서북편으로 약 1km거리, 옥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옥산사는 「영가지」에 의하면 고찰이며 금당 서쪽에 ‘암혈(巖穴), 청정(淸井), 마애불, 전탑’ 등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절 모습과 일치한다.
전탑지는 마애불에서 동남쪽으로 약 30m떨어진 산 능선 골짜기에 있는데 현재 높이 50cm의 기단면석과 벽돌 파편 10여 점 만이 남아 있다. 벽돌은 모래가 많이 섞인 회청색 또는 회백색의 무문전이다. 기단면석의 바깥 옆면에는 안상이 모각되어 있다. 이 탑은 1965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조사를 하여 기단 1변의 크기가 252cm×254cm정도의 정방형으로 밝혀냈다.
마주보는 자리에는 옥산사 마애삼존불이 있는데 규모는 작으나 안동지역에서는 유일한 삼존불로 주존불은 약함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이다.
[출처] 경북지역 전탑들|작성자 허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