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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논산 관련 순교자 기록
1. 정사박해(1797)~신유박해(1801)
1) 정사박해(1797)
(1) 이보현 프란치스코
① 샤를 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
425쪽 각주 34: 을묘년의 박해를 피하여 2개월간 연산의 이보현 집에 은신한 바 있는 주문모 신부는, 1801년 국청 신문에서 이보현에 대해, 그가 이미 해미에서 죽었 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이기경 추안』 3월 15일 「주문모 공초」).
2) 신유박해(1801)
(1) 오한상
① 『사학징의』
1801년 각 도에서 유배 보낸 죄인 명단各道罪人酌配秩
오한상吾漢常:황경달黃京達과 사서를 외우고 익힌 죄, 창녕昌寧에 도배하다.
(2) 이상원
① 『사학징의』
1801년 각 도에서 유배 보낸 죄인 명단各道罪人酌配秩
이상원李尙元:이도기에게 사학을 배운 죄, 거창居昌에 유배하다.
(3) 이채운
① 『사학징의』
1801년 각 도에서 유배 보낸 죄인 명단各道罪人酌配秩
이채운李采雲:윤지헌尹持憲에게 사학을 배운 죄, 진주晉州에 유배하다.
2. 임신박해(1812) ~ 병인박해(1866) 이전
1) 임신박해(1812)
(1) 원 베드로
① 샤를 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
그 이듬해 (1813년)에는 公州읍에서 새 순교자 세 분이 생겼다.
…(중략)…
公州 감옥에서 다른 교우들을 여럿 만났는데, 그 중에 元 베드로와 張 마티아가 있었다.
元 베드로는 結城県 덕머리 사람인데, 그 지방 외교인이 경영하는 옹기가마에서 벌어 먹다가 형과 함께 입교하였다. 좀 더 안심하고 천주교를 봉행하려고 형제는 우 선 洪州로 이사하여, 역시 외교인이 경영하는 옹기가마에서 일하다가 관헌에게 붙들 려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석방되어 連山県 으실로 피신하여 이번에는 신자가 경영하는
옹기가마에서 일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 곳에서 일하던 신자들이 밀고를 당하였으므로, 형제는 鎮川으로 도망하였다. 거기에서 다시 붙잡혀 連山으로 압송되 어 초벌신문을 당하고 나서, 다시 公州監営으로 移送되었다. 마음이 약한 형은 배교하 여 귀양갔으나, 元 베드로는 監司 앞에 끌려나가 세 번 문초를 당하는 중에 혹독한 고문을
겪으면서 잠시도 마음을 굽히지 않았고, 드디어 마지막 문초를 당한 날 밤에 옥 중에서 영광스럽게 세상을 떠나니, 때는 公州로 이송되어 온 지 보름쯤 지난 10월 초 순이었다.
(2) 윤 생원
① 샤를 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
이 세 사람 밖에는 하느님께서 순교의 빨마가지를 내리시지는 않으셨으나 신앙 을 증거한 다른 한 분의 이름을 들어야 하겠다. 양반 가문에 태어난 尹 生員은 겨우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여 아직 삼종경 밖에 배우지 못하였었는데, 같은 시기에 연산현 에서 붙잡혀 공주로 압송되었다. 아무리 고문을 하여도 배교한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의당이 위에 이야기한 세 사람과 같은 운명을 당하였을 것이지만, 그는 지극한 효자로 이름이 났었으므로 감사는 나라의 관례를 따라 감형하여 북도로 정배를 보냈다. 그는 1832년까지 거기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천주교 교리를 철저히 연구하여, 죽을 때까지 충실히 신자의 본분을 지켰다.
(3) 장대원 마티아(장어둔남)
① 샤를 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
張대원 마티아도 덕머리 사람이었다. 부모가 몹시 가난하였는데, 부모를 잃었을 때에 아직 외교인으로 있으면서 처음에는 이집 저집으로 다니며 머슴살이를 하였었 다. 그러다가 곤궁을 견디다 못하여 떠돌아 다니는 광대패에 끼었었다. 그러나 다행히 천주교에 들어오게 되자, 이내 방탕한 생활과 못된 습관을 버리고, 錦山郡 솔티에 있 는 교우 옹기가마에 가서 일하면서 얼맛동안 열심으로 신자 본분을 지켰다. 그 뒤 冷淡하여 첩까지 얻게 되었으나, 그래도 신자의 본분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가 본처가 사망하자 첩과 정식으로 혼인을 하고, 다시 매일같이 기도를 열심으로 드 리며 전에 그르쳤던 것을 끊임없이 엄히 補贖하였다. 그가 피신 해 있던 連山縣 으실 에서 8월경에 붙들려, 公州로 압송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을 용맹히 참아받았고,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문으로 비록 한 때 배교한다는 뜻을 좀 보이기는 하였으나,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의 勸勉으로 이내 배 교한 것을 취소하고 전보다도 더 열심하게 되었다.
黃 바오로와 한 감옥에 갇히게 되어, 그는 같은 형벌을 받았으며, 둘이 함께 사형 에 처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형장으로 갈 때에 군중이 조소와 욕설을 퍼부 었다. 그러나 (張) 마티아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분명 하게 대답하였다. “당신네들은 웃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어야 할 것입니다. 불쌍한 건 우리 처지가 아니고 당신네들의 처지니까요,” 두 사람은 癸酉(1813)년 10월 19일 에 함께 斬首를 당하였는데, (黃) 바오로의 나이는 59세였다.
2) 기해박해(1839)
(1) 오종례 야고보
① 다블뤼 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야고보는 은진 고을의 양반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는 의지가 굳고 용감한 성품 을 지녔으며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어려서부터 신앙을 실천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 의고 어느 교우 집에서 살았는데, 그는 항상 순교를 갈망한다고 말했으며 비록 마음 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도 하였다. 1839년에 그는 고산에 살고 있었는데 형을 보러 진산 고을에 갔다가 거기서 포교들에게 적발돼 다른 이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형관 앞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는데, 형관은 그에게 “너 같은 어린 아이 는 다시 그러지 않겠다는 말만 한다면 당장에 풀어주겠다.”고 말했고, 이에 야고보가 대답하기를 “천주를 섬긴 연후에야 어떻게 제가 형벌이 두려워 그분을 부인할 수 있 겠습니까.”라며 굽히지 않았다. 두 번째 신문에서는 형벌이 배가되었고, 그의 형이 배 교하여 석방되는 것을 보게 하여 그를 꾀어보려고 하였으나 그는 그것으로 동요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다리를 맞고, 주뢰틀기, 막대로 찌르기 등의 형벌을 받고 끔찍한 고 통을 겪었으나 은총에 힘입어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옥에 서 보낸 기간은 모두 5개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기해년 음력 11월 30일에 다른 3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나이 는 겨우 19세에 불과했다.
② 샤를 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
지금 소개한 이 용감한 증거자들은 모두 한 獄에 모여서 항구하자고 서로 격려 하였다. 섭리는 그들에게 呉宗礼 야고보라는 다른 친구를 하나 더 보태주셨는데, 이 사 람은 恩津 고을의 양반 교우 집 출신이었다. 갓 결혼하여 珍山 마을로 인사 드리러 갔 다가 「갓 결혼하여 高山 고을에 살고 있었으나 珍山 마을에 사는 형을 찾아 갔다가 형 과 다른 여러 교우와 함께 7월에 붙잡혔다. 営将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아직 어린 아이니,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만 말하면 이내 놓아 주마.” 呉宗礼 야고보는 대 답하였다. “천주를 섬기는 행복을 알고 나서 어떻게 형벌이 두려워 천주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관장은 달콤한 말로는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하겠으므로 고문 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소용이 없었다. 監司 앞에 끌려가서 呉宗礼 야 고보는 형이 배교하는 것을 보는 슬픔을 맛보았다.
그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고문 을 꿋꿋하게 참아받아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오래 전부터 원하던 것이 었다. 그는 옥에서 다른 증거자들의 고통을 나누어 받았다. 그들은 여러 달 동안을 버 려진 채 옥에서 신음하였는데 마침내 모든 절차가 끝나서 사형집행일이 확정되었다. 洪梓栄 뿌로따시오는 그 때까지 꽤 성실치 못한 신자였던 그의 아들들을 권면하였고, 이런 경우에 하는 말이라, 더 웅변으로 엮어지는 그의 권면은 그들 마음에 깊은 인상 을 주었다. 아버지가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눈물을 흘리자 울 것이 아니라 기뻐해 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하여 주었다. 그는 평온하고 심각한 안색으로 사형장으로 갔는데, 그와 반대로 다른 증거자들은 만족스러운 빛을 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그들은 11월 30일 즉 1840년 1월 4일(양력)에 함께 斬首되었다. 洪梓栄 뿌로따시 오는 60세, 呉宗礼 야고보는 19세, 李召史 막달레나는 32세, 崔召史 발바라는 50여 세 이었다.
병인박해(1866) 이후
1) 병인박해(1866)
(1) 김영오 아우구스티노(아오스딩)
① 『병인치명사적』
[17권-5~8]
김 아오스딩의 일기초 동석 김한문의 부
김 아오스딩은 본디 충청도 홍주 사람으로 그 부친은 일찍 죽고 그 모친과 서로 의탁하여 살더니, 그 모친이 우연히 천주의 은총으로 성교 말을 차차 들어 문교는 하 였으나 그곳에 일가제족이 많은 고로 성교하기 어렵되, 그 모친은 타당이 준행하더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일가총중에 이단사망과 각항 조당에 걸리어 행공하기 어려운 고로 할 일 없이 고향을 버리고 도리 밝은 교우를 찾아 은진 강경이로 이사하여 겨우 삼 종경을 행공하나 생애할 길이 없어 배 부리는 사람에게 부치어 배도 타며 생애하더 니 의외에 정해년 군난이 일어나 서울서 잡힌 교우 중 불림에 드러나매 경포졸이 급 히 내려와 전라도 여산 장차와 압령하여 여산관으로 들어가 문목하고 형문 1차에 전 주 감영으로 보내니 감사 잡아들여 혹형문목하며 갖은 형벌을 다 하거늘 신덕이 깊이 굳지 못한 고로 혹독한 형벌을 못 견디어 한 번 발명한즉 다시 문목 없고 형문 1차에 하옥한 후로는 오래 추열이 없다가, 갇힌 지 열석 달 만에 올려 다른 교인과 함께 추 열하되 별로 다시 문목 없이 형문 1차에 방송하거늘 본집에 돌아와 그곳서 살지 못하 고 즉시 떠나 진산 서면 가새벌로 가 우거하며 타당한 교우들과 모여 10여 년을 살고, 그 후에 또 충청도 연산 축방이로 가 우거하여 살 때에 무신년<1848>에는 신부 영접 하려 남경 길 다녀오고, 또 그 후 을묘년<1855>에도 남경 길을 다녀와서, 또 우거하 여 여러 곳으로 살다가 다시 충청도 연산 상사바위로 이사하여 살더니 병인년 군난이 대기하여 그 해 8월 17일에 본관 장차에게 잡히어 들어가 관정(관장) 추열 후 옥에 갇 혔더니 25일 영문으로 올려 문목도 많고 형벌이 많으매 처음은 발명하였다가 나중은 감사 장물을 놓고 문목하되 “네가 천주학 한지 몇 해 되었느냐?” 대답하되 “40여 년 이 되었노라” 한되 다시 형벌하며 “양사를 대라” 하니 답 “다 죽고 지금은 없노라” 하 매 또 형벌하며 “자식과 당을 다 대라” 하고 무수히 형벌을 하고 하옥하여 8월 28일 옥중에서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61이요. 증인은 동네 살던 김윤지의 아내, 본명은 발바라가 아옵니다.
[21권-118~119]
김 아오스딩은 본디 홍주 용면 불무골 사람으로 전라도로 이사하여 살다가 기해 년 4월에 경포에게 잡혀 여산관으로 갔다가 전주로 이수하여 13색(삭)만에 여러 교우 와 한가지로 영문 추열할 제 홀연간에 잠깐 잠이 들었더니, 감사가 보고 분부하기를 “저 잠자는 사람은 아마 무죄한 듯하니 놓으라”하매 즉시 놓임을 얻어 진산 가새벌로 가 살다가 여산(연산) 상사바우로 이사하였더니, 병인 8월 18일에 여산(연산) 포교에게 잡혀 굴하였다가 본읍으로 들어가 추열할 제 관가에서 문목하기를 “네가 성교한지 몇 해며 양인 주인은 몇 해나 하였느냐?” 대답하기를 몇 해 되었으며 장 주교. 안 주교 치 명하신 사정과 중국 내용 두 번 한 일을 다 말하고 추열 후 4일 만에 노성으로 이수하여 3일 후에 공주로 와서 고복하고 혹독한 형벌을 받아 손길(손)이 다 부러지기에 이 르고 5일 만에 한가지로 잡힌 김 베드루와 최 서방 3인이 동일 치명하니, 때는 병신 (병인) 8월 23일이러라.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29.
병인년 치명자
김 아우구스티노의 자(字)는 영오니라. 강생 후 1805년에 충청도 홍주 땅에서 태 어나고 부모 때부터 입교하여 열심 수계守誡하다가, 중년에 신부 영접차 청국으로 갔 다가, 허행虛行하고 돌아와서 전라도 고산 배재서 살다가 전주 포교에게 여러 교우와 함께 잡혀 가서 아홉 달을 갇혀 그간 무슨 혹형을 받았는지 알 수 없고, 마지막에는 여러 교우들과 함께 문초할 때 졸고 있으니, 군사들이 흔들어 깨우고 감사監司가 보고 말하기를 “저 놈은 이 난중에 졸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무죄인가 보다”하고 문초없 이 방송하기로, 연산 상사바위촌에 살다가 1865년323 8월에 공주로 잡혀가서 치도곤 을 많이 맞고, 그 달 29일에 죽었더라.
1922년 3월 27일, 진안군 성수면 중기리 위 치명자 손자 김 프란치스코, 죄인의 부친에게 생시에 여러 번 자세한 말을 들었습니다.
정리번호 95. → 『병인치명사적』 [21권-118~120]과 내용 동일
(2) 김영삼
① 『치명일기』
770. 김영삼
연산連山 사람이라. 병인년 군난에 전주 포교에게 잡혀 하옥한 지 두 달 후에 참 수 치명하니, 나이는 20세러라.
② 『병인치명사적』
[ 22권-60~61 ]
김영삼이
영삼이는 요왕의 형이니 부모께 잘 배워 열심 수계하더니 병인년 군난에 전주 포교 와 성명 묻고 “네가 성교를 하느냐?”하거늘 “내 과연 천주성교를 봉행하였노 라”하니 포졸들이 여러 소솔들을 다 잡아가려하는 고로 하나도 아니 갈 수 없으매 슬픈 마음을 강잉하여 혼자 포교를 따라 전주로 가니 영장이 문왈 “네가 천주학을 하느 냐?”하니 “과연 성교를 하였나이다” 하옥한 후 두 달 후 참수치명하니 나이 20세요. 증인은 그 조카 대흥 우러내 사는 김 도마니 나이 28세라.
③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20. → 『병인치명사적』과 내용 동일
(3) 김윤지
① 『병인치명사적』
1권 10페이지:원본 유실로 인해 내용이 없음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9.
죄인 고산 동암 최 베드로
김윤지는 본디 연산 상사바위에 살더니, 병인년에 공주 포교에게 잡혀 공주로 가 참수 치명하옵고, 이 사람은 죄인이 친히 보지는 못하였으나, 여러 사람에게 들은 즉 치명 잘하였다 하더이다. 나이는 55세라.
(4) 김 베드로(베드루)
① 『치명일기』
455. 김 베드로
본디 은진恩津 강경리江景里 사람으로서 공주 땅에 가 살더니, 병인년에 본관 포교 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43세러라.
② 『병인치명사적』
[ 22권-73]
김 베드루
베드루는 본디 충청도 은진 강경이 사람이라. 그 부모 문교하여 성교를 배우므로 한가지로 성교를 배우더니 그 부친은 후에 성교 봉행을 아니하나 베드루 처자를 데리 고 열심 수계하여 착실히 수계하더니 병인년 군난에 공주 땅에 살 제 본관 포교에게 잡혀 “당과 책을 대라”하며 혹형이 심하나 한 사람도 대지 아니하고 형벌을 인내하고 공주로 가니 영장 문목에도 굴함이 없이 옥에 있은지 오래지 아니하여 교하여 죽이니 나이 43세요. 증인은 그 아내 홍주 초록이 사는 장 비리스다니 나이 57세라.
③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20. → 『병인치명사적』과 내용 동일
(5) 김 베드로(베드루)
① 『병인치명사적』
[21권-119~120]
김 베드루는 본디 진산사람으로 연산 상사바우서 살더니, 병인 군난을 당하여 마 침 출타하였더니 중로에서 그 의자가 본읍 포교에게 잡혀간다는 말을 듣고 걸음을 재 축(재촉)하여 들어오매 본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먼저 포교 앞에 달려들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전정이 만이(만 리) 같으니 내가 대신 잡혀가겠다”한데 포교들 말이 “각각 몫이 다르니 만만코 못하겠다”하거늘 또 정대한 모양으로 실히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아무리 내가 친히 낳은 자식은 아니나 친자식이나 조금도 다름 없으니 놓으라”한데 저들이 할 수 없어 그 아이는 친히 놓았으나
베드루는 본디 읍외촌간에 인심을 많이 얻었는지라. 이러므로 포교배와 방관자 들이 아무쪼록 빼어 놓으려 하여 장물 잡은 성물과 서책을 가져 같이 잡힌 김 아오스 딩의 장물 중에 넣어버리고 말하되 “이 장물은 다 김 아오스딩의 장물이라, 베드루의 것은 아니라”하거늘 베드루 정색하여 바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내 물건을 남의 것이 라 하리오? 이 중에 몇 가지는 내 것이다”한데 그 때 베드루를 위하여 말하던 사람들 이 후면으로 나가서 무릎을 치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런 애달픈 일이 없다”하더라
그 길로 바로 본읍으로 들어가매 관가에서 문초하기를 “네가 서학한지 몇 해나 되었느냐?” 대답하기를 “몇 해 되었나이다” 그런 고로 문초한 후 4일 만에 노성으로 이수하고 3일 만에 공주로 이수하였더니, 5일 만에 관정문초를 당하여 종시 굴치 아 니하고 교하여 죽으니, 때는 병인 8월 28일이러라. 이상은 진안 터골 사는 김 회장 요 안이 기록함이라.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95. → 『병인치명사적』과 내용 동일
(6) 김 세례자 요한(요안)
① 『병인치명사적』
[23권-115]
김 요안은 본디 연산사람으로서 공주 짐때울 가서 살다가 병인 12월 24~5일 간 에 공주 포교에게 잡혀 본읍 옥중에서 치명하니 나이는 45세요,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정리번호 161. → 자세한 기록은 없음
(7) 서경도
① 『치명일기』
593. 서경도
본디 은진恩津 사람으로서 공주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42세요, 때는 병 인 10월이러라.
② 『병인치명사적』
[8권-12~13]
은진. 서경도는 본디 충청도 은진 사람으로 문교하여 열심 수계하며 성품이 양선 하여 사람 대접하기를 인애로 하며 먼저 치명한 자의 말씀을 듣고 항상 자기도 치명 하기를 천주께 간절히 기구하며 열심히 바라더니, 병인 10월에 뜻밖에 공주 포차에게 잡히어 문목에 “내 과연 천주성교 봉행하노라”하니 잡아 본관 추열에 종시 굴치 아니 하므로 본관이 공주 진영으로 보내어 영장 추열에 굴치 아니하고 뜻과 마음이 더욱 굳세고 간절한 마음으로 위주치명하기를 바라더니 과연 원과 같이 교하여 하니 연은 40이요, 때는 강생 1866년 병인 10월이러라.
(8) 이 바오로(바울로)
* 이 바오로는 논산 출신은 아니지만, 체포되어 은진관을 거쳐 갔다는 기록이 있 으므로, 이 부분만 수록한다.
① 『병인치명사적』
[ 22권-42~43
이 바오로
바오로는 본디 충청 정산 사람이라. 문교하여 성교를 봉행하되 부모가
다 외교라, 부친을 권하여 성교 도리를 배워 영세하여 세상을 버린 후 남포 땅에 살제 병인년 군난을 당하여 자손이 다 흩어진 후에 나중 일을 보려 하고 있더니, 본관 차사에게 잡 혀 관가에 가 10여 일을 지내니 그 사혹형을 참지 못하므로 배교하고 나오나 항상 불 평한 마음으로 소솔을 데리고 살더니, 마침 안 주교와 신부 몇 위와 또 교우 몇이 충 청도 수영 와서 치명하시매 그 시체를 마구 버릴 길이 없다 하고 재하질 수십인을 데 리고 배 타고 가서 그 시체를 거두어 싣고 나오다가 풍파를 만나 10일을 해중에서 고 생한 후 하륙하여 장사한 후에 차차 군난이 심하매 전라도로 피하여 있을 제 경포에 게 잡혀 은진관에 들어갈 제 처자들이 따라오거늘 “너희는 다 오지 말고 있다가 주명 대로 세상을 지낸 후 천국에서나 만나자”하고 공주로 가나 그 동생(아들)이 마침 남포 청에서 잡혀 공주로 오매 삼부자 서로 만나니 “이것이 막비주은이니 세상 일을 생각 지 말고 다만 위주하여 죽자”하더니 후에 서울로 올려 포장이 묻되 “네가 성교를 하 느냐?” “내가 과연 고 주교께 영세한 후 성교를 봉행하오니 다시 묻지 마옵소서” 하니 하옥한지 10여 일 후 교하여 죽이니 나이 63세요, 증인은 그 손자 서천 작은재 사는 이 안드레아니 나이 38세라.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20. → 『병인치명사적』 [22권-42~43]과 내용 동일
2) 정묘박해(1867)
(1) 김 사도 요한(요왕)
① 『치명일기』
348. 김 사도 요한
연산連山 사람이라. 정축(1877)년에 다른 교우와 한가지로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와 옥에서 굶주려 죽으니, 나이 36세러라.
② 『병인치명사적』
[ 22권-60~61]
김 요왕
김 요왕은 본디 충청도 연산 사람이라. 부모의 교훈함을 잘 받아 열심 수계하더 니, 후에 진산 가새벌 살 제 병인년 군난에 그 형은 전주 가 치명하고 피하여 있더니, 정축년 군난에 다른 교우 “피하라”하되 아니 피하고 여러 교우 경포에게 잡혀 “네가 천주학을 하느냐?” 물으매 “내가 과연 천주성교를 봉행하노라”한즉 별로 다른 말 없 이 서울로 가 옥에 있은지 석달 후에 상영 분부에 성교인 몇 사람 잡은 것을 “주려 죽 게 하라”하신 고로 음식을 아니 주매 굶어 죽으니 36세요. 증인은 그 조카 대흥 우러 내 사는 김 도마니 나이 28세라.
③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20. → 『병인치명사적』과 내용 동일
(2) 김 치릴로(치로, 시로, 시루)
① 『치명일기』
526. 김시로
은진恩津 관곡 사람으로서 비인庇仁으로 이사하였더니, 정묘 10월에 공주 포교에 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52세러라.
② 『병인치명사적』
[6권-28~30]
김 시루는 충청도 은진 관곡 사람으로 그 숙부와 한가지로 입교하여 비인으로 이사하여 근 20년 열심 수계하면서 상해하는 말이 “사람이 세상에 나서 주를 받들어 섬기다가 치명은 반드시 할 일이라”하고 혹 다른 교우 치명 하였다 하면 기뻐하며 또 이르되 “한 번 치명하기로 뜻을 세우면 어찌 임금의 앞인들 굴복하리오?”하고 치명하 기를 원하더니 병인년에 본읍 장차에게 잡혀 관전에 들어가니 관가 문왈 “네가 사도 를 하여 백성을 무혹하며 남의 재물을 탈취한다 하니 어찌 그런 도를 행하느냐?” 답 왈 “그런 일 없나이다” 또 가로되 “하늘을 욕하라”하거늘 대답하되 “『사기』에 이른바 옛적 대한 7년에 은왕 성탕이 전조단발하고 곤복을 벗고 삼옷을 입어 상림 들에 비를 빌어 백성을 건지고, 무흘(무을)이는 가죽 주머니에 피를 넣어 하늘을 쏘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하였다 하니 지금 하늘을 욕하면 그 죄 중치 아니하리이까?” 관왈 “네 말이 옳다”하고 놓으니라.
또 정묘 10월에 공주 포차에게 잡혀 본관에 들어가니 관가 아무 형벌도 아니하고 이튿날 떠나 공주로 갈 새 중로에서 그 아들을 만나 옷을 벗어 주며 이르되 “어린 아우 데리고 잘 있으라”하고 가니라. 그 후 추열 사정은 모르고 치명한 후 즉시 그 아 들이 시체를 찾아 장사할 새 얼굴이 생시와 같더라. 나이 50이러라. 이 사적은 지금 고산 시랑골 김 회장 선경이에게 들었노라.
[23권-117]
또 김 시루는 충청도 은진 관격 세거지인으로 비인 띠안말 와서 회장 소임으로 지내더니, 병인 군난을 당하여 본부에 잡혀가니, 관원이 묻기를 “네가 사도를 하여 남 의 재물을 탈취한다 말이 옳으냐?” 대답하기를 “남의 재물 탈취는 고사하고 내 재물 을 많이 잃었나이다”“너는 천주를 욕하여라” 답 “못하나이다” 문 “어찌하여 못하겠 느냐?” 답 “옛적에 7년 대한에 은왕 성탕이 전조단발하고 하늘께 비를 빌어 대우방수 천리하와 백성을 구제하고, 무휼(무을)이란 임금은 가죽부대에 피를 담아 하늘을 쏘고 벼락을 맞았사오니 어찌 욕하리이까?”한데 “그 말이 옳다”하고 다시 문목 없이 10여 일만에 나와 다시 그곳에서 농사하더니, 불과 아홉달 만에 공주 포교에게 잡혀가 치 명하니 때는 정묘 10월이요 나이는 52세올시다.
③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98.
죄인 고산 웅수골 김 마티아
『치명일기』 526에 있는 김 치로가 공주 포교捕校에게 잡혀가 치명함을 죄인 중형仲兄 시몬과 여러 교우에게 분명히 들었나이다.
(3) 김 토마(도마, 토마스)
① 『치명일기』
507. 김 토마
정 안드레아와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
(4) 정 안드레아
① 『치명일기』
506. 정 안드레아
연산 중보실 사람이러니, 정묘년에 김 토마와 한가지로 공주 포교에게 잡혀 함께 치명하니라.
② 『병인치명사적』
[3권-72]
정 안드레아는 연산 중보실 사람이라. 병인년에 잡혀 배교하고 외인촌에 있어 치 명 못한 것을 항상 한탄하다가 다시 정묘년 김 도마와 한가지로 공주 포교에게 잡혀 두 사람이 서로 위로하여 이르되 “어서 가서 위주치명하자”하고 공주관으로 가 치명 하니라. 진안 절골 정 도마 기록하옵나이다.
[4권-47~48]
정 안드레아는 연산 중보실 사람으로 병인년에 잡히어 배교하고 나와 왼촌(외인 촌)에 있으며 항상 치명 못한 것을 한탄하다가 다시 정묘년에 김 도마와 한가지로 공 주 포교에게 잡혀서 두 사람이 서로 위로하여 이르되 “할 일 없다. 가서 위주치명하 자”하고 공주관으로 가 치명 잘 하였다 하더라. 이는 진안 절골 사는 정 도마에게 들었노라.
③ 『박순집증언록』
정 안드레아는 연산 중보실 사람이라. 병인丙寅(1866)년에 잡혀 배교하고 외인촌 에 있어 치명致命 못한 것을 항상 한탄하다가 다시 정묘丁卯(1867)년 김 토마스와 한가 지로 공주 포교에게 잡혀 두 사람이 서로 위로하여 이르되, ‘어서 가서 위주치명爲主致命하자.’하고 공주 관으로 가 치명致命하니라. 진안 절골 정 토마스가 기록하옵나이다.
(5) 황 세례자 요한(요안)
* 황 세례자 요한은 논산 출신은 아니지만, 피신 당시 강경 교우에게 들렸다는 기록이 있어 수록하였다
① 『병인치명사적』
[6권-44~45]
황 요안은 누가의 양아들이라. 부훈을 받아 그 모친과 아내를 가르쳐 열심수계하 더니 병인년 정월에 피신하여 났으나 모친과 처자는 산막골 있어 달리 구처 못한 고 로 매양 가만히 들어가 보더니 대략 정묘년 봄에 강경이 교우 집에 가 자고 몽사를 말 하되 “내가 오늘 밤 꿈에 길을 가다가 큰 뱀을 만나 길을 막기에 칼로 치니 피가 길에 가득하고 마음이 쾌활하였으니 아마 치명할 꿈이라”하더니 그날 밤에 산막골 들어가 모친과 아내를 만나보고 이튿날에 경포에게 김 서방과 함께 잡혀 “권 신부 가신 곳과 연고를 대라”하고 적신으로 달고 무수한 매를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본관에 몇 날 갇 혔다가 경포와 한가지로 서울로 갈 새 너더리 장터는 평시에 아는 사람이 많은지라. 좋은 말로 하직하고 올라갔으나 치명한 사정과 날은 알지 못할러라. 이 사적은 고산 구더리 사는 이 요안 기록하나이다.
[8권-26~28]
서천. 황 요안은 누가의 아들이라. 어려서부터 문교하여 부모의 훈계를 받아 열 심 수계하더니 중년에 부자 서로 갈리어 누가는 안 주교 건전으로 가 있고 요한은 권 신부 복사로 가 있더니 병인년 풍파를 당하여 권감을 모시고 전교 길에 갔다가 군난 이 대기하매 권감의 명을 받아 집에 돌아가 신부의 물건과 집을 보살피고 인하여 신 부와 서로 이별이 되어 항상 걱정으로 지내고 거리에서 부친의 편지를 받고 사연을 보고 울며 왈 “부친이 곧 치명 길로 떠나시다가 나에게 치명하길 권면하셨다”하더라. 군난이 대기하매 경상도로 피난하였더니 후에 돌아와 부친의 시체를 찾아 장사 하고 항상 가솔을 권면하고 그 생부 냉담하므로 항상 열심히 권면하며 항상 근심하고 지내더니, 병인 9월에 또 군난이 대기하여 그 형 안드레아와 매부 이 아오스딩이 한 가지 잡히어 치명하매 여러 소솔을 어떻게 안배할 수 없어 멀리 피하지 못하고 있더 니 군난이 점점 일어나매 할 수 없어 전라도로 피신하였다가 얼마 후에 집을 향하여 가다가 강경이 교우의 집에서 몇 날 동안 두류하고 떠나던 날 친구더러 말하되 “내가 오늘 밤에 치명할 꿈을 꾸었노라”하며 “아마 이번에 가면 다시 만나기 어렵겠다”하고 그 길로 들어가 즉시 경포에게 잡히어 “천주성교를 하노라”하고 “생부와 권 신부를 대라”하여 무수한 형벌을 받고 본관에 갇히었다가 얼마 후에 서울로 올라가새 너더리 장터에서 머물러 이전 친한 주막 사람과 한가지로 술을 먹고 흔연한 모양으로 이별 하며 왈 “내가 자네 보기와 이곳이 마지막이다”하고 떠나 올라가 치명하니 때와 날은 알지 못하고 연은 31이러라.
3) 무진박해(1868)
(1) 윤자호 바오로(바울로)
① 『치명일기』
360. 윤 바울로, 회장
본래 공주公州 유기관불 살더니, 무진년 군난에 수원水原 포졸에게 잡혀목을 옭아 죽이니, 나이는 60세요, 때는 그 해 7월이러라.
② 『병인치명사적』
[ 16권-76-90]
윤 바오로의 행적
윤 바오로는 파평윤씨로 대대 명가의 자손이라. 노성 땅에서 생장하였으니 3형 제 중에 말째러라. 그 부모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놀미 강경이로 이사하여 살다가 그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나매 그 막내 아들 바오로를 데리고 충주 땅으로 반리(반 이)하여 살더니, 마침 거기서 어떤 교우에게 문교한 후 부자 한가지로 고향으로 들어 가 열심으로 배우더니 바오로 먼저 영세하니라. 바오로 먼저 영세한 후 날로 열심을 감발하여 천주 섬기는데 더욱 힘 쓸 새 본 고 향에서는 많은 친척들 사이에서 갖가지 이단 사망에 빠져 방해됨이 많은고로 수계범 절하기에 편치 못하여 그 늙은 부친을 모시고 고향을 떠나 공주 계룡산 한 교촌으로 이사하여 살매 날로 천주를 공경함에 더욱 열절하여 영식은 일진월부하나 그러나 육 신 생애가 부족하여 얼마 지나지 못하고 본 고향에서 가져온 바 재물이 다 탕진되고 또한 약간 남아 있던 전답까지도 다 팔아다가 먹은 후 살 수 없는지라.
할 일 없이 다시 노친을 모시고 본 고향으로 들어가니 친척들이 몇 해 만에 잃었던 일가를 만나보매 기쁜 마음으로 전에 쓰던 이단의 물건과 본 묘의 갖가지 책임을 전과 같이 다시 맡기려 하며 또한 외인의 여식으로 강박히 혼인을 정하려 하거늘 때에 바오로 벌써 교우 여식 밀양박씨로 더불어 정혼하였더라.
바오로 양심이 좋지 못하여 다시 고향을 떠나고자 하니 일가들이 천방백계로 만류할 뿐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데로 갈까 하여 날마다 엿보는지라. 그러나 부자 수치 됨을 무릅쓰고 용심을 발하여 밤을 타 수챗구멍으로 빠져 도주하여 다른 일가의 집으로 가 부쳐 살더니, 윤씨의 산송 까닭으로 인하여 모든 일가들이 모여 오거늘 거기 있지 못하고 다시 그 동네를 떠나 광천 독바위 어떤 과부의 객주 집으로 가서 머슴으로 있을 새 전에 아니하던 생일을 처음으로 하여 어려운 것이 많으나 그 만나는바 모든 괴로움을 다 감수인내하며 매사가 민첩하고 진정하더라. 하루는 천주가 저를 시험코자 하실 새 마치 옛적에 성조 요셉이 이집트국 푸티 팔에게 종으로 팔려가 있다가 그 안주인에게 음행의 유인으로 하여금 제가 입었던 옷 자락을 내어 버리고 달아난 것 같이, 하루는 그 안주인이 바오로의 규모단정하고 용모 화려함을 보고 사사로이 가까이 하여 음행으로써 꾀거늘 바오로 굳이 사양하여 듣지 아니할 뿐더러 즉시 그곳에서 일어나 가져왔던 옷보와 쓰던 물건을 내어 버리고 그 집을 떠났더라.
바오로 그 집을 떠난 후로 사세 부득하여 장사로 다닐 새 겉으로는 육신 생애를 위하여 다니는 듯하나 속 마음으로는 죄악에 묻혀 있는 무수한 영혼을 건지기 위하여 이르는 곳마다 성교도리를 정성으로 강론하고 가는 교촌마다 구변 좋게 도리를 벽파하고 훈계하여서 교우들의 신덕을 굳게 하고 열심을 감발케 하니 이러므로 바오로의 이름이 경향에 전파되었더라.
바오로 공주 유기라 하는 촌에 이르니 그 촌 사람들이 이웃 반종들의 토색으로 인하여 구박이 자심하거늘 바오로 저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그 동네에서 살더니, 그 해 파공에 윤 바오로가 교중에 출등하므로 안 주교 아시고 바오로에게 도회장 책임을 맡기시니, 바오로 겸손한 마음으로 회장 직임을 맡은 후에 더욱 열심을 발하여 원근 에 두루 행하며 모든 교우들을 권면할 새 본집은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나 조금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다만 영혼의 일만 힘쓰더라.
교우들이 모인 곳마다 항상 성교의 거룩한 도리를 가져 강론하기를 좋아하고 풀 어주기를 좋아하며 또 아무리 바쁜 일을 하다가도 만일 누가 불목한다 하면 그 하던 일을 버리고 가서 화목시키고 누가 냉담한다 하면 곧 가서 권면하며, 또 어떻게 원근 교우촌으로 다니며 구변 좋게 열심으로 강론하였던지 처음에 여교우들은 내외를 하 고 나와 보지도 아니하다가 만일 강론을 시작하여 들리면 젊은 부인들 뿐 아니라 양 반의 부녀들까지 내외를 불고하고 와서 정성으로 듣더라.
이렇게 바오로의 명성이 사방에 전파되매 모든 교우들이 바오로의 집에로 도리 듣기 위하여 타처에서 구름같이 모여와 날마다 7~8명에 지나지 아니하는 날이 없더 라. 하루는 집에 손들이 어찌 많이 왔던지 양식이 없으므로 대추 한 말을 사다가 손에 게 나누어 주고 난즉 각 사람에게 겨우 한 주먹씩 밖에 차례 가지 아니하였더라. 그 후 안 주교께서 바오로의 집에 객들이 너무 많이 감을 아시고 저의 가난한데 방해가 될까 하여 각 교우들에게 분부하시기를 “만일 누구든지 내 관면 없이 바오로의 집에 자주 가는 자가 있으면 성사를 막으리라”하시니라.
또 주교 모셔오기에 극력 주선할 새 방방곡곡에 다니며 교우들에게 애긍전을 거 두더니 하루는 돈을 추심하여 가지고 예산 퉁점이 고개라 하는 곳에 당도하니, 강도 들 수십 명이 달려들어 그 가진 바 돈을 탈취코자 하는지라. 할 수 없이 돈짐을 벗어 놓으려 할 즈음에 홀연 뒷산 꼭대기에서 한 총각 아이가 소리 질러 이르되 “저 노인은 거기서 무엇을 하려 하나이까? 이 아래서 누가 당신을 기다린다”하니 바오로 깜짝놀 라 돌아다보매 전에 보지 못하던 한 총각 아이라. 즉시 돈짐을 지고 일어나되 탈취하 려 하던 도적놈들은 그 아이의 하는 말을 듣고 모두 넋신을 잃고 있다가 감히 범접치 못하였다 하니, 이상하도다. 이 일이여! 필경 천주께서 저의 성교를 열애하는 마음을 돌아보시어 급하고 위엄(위험)한 때에 당신 천신을 보내시어 도와주신 듯하도다.
또 하루는 돈을 가지고 천안 소반이 고개를 넘어 오다가 도적을 만나 다툴즈음 에 우연히 포교 수십 명이 달려들어 도적들을 잡으려 하거늘 바오로 측은한 마음으로 저들의 생명을 호위하여 주기 위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은 내게 돈 빚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인데 지금 내게 돈을 당장 달라 하매 ‘나도 즉 여러 식구의 양도가 급하므로 지 금은 주지 못하고 올 가을에 주마’하나 저들이 듣지 아니하고 굳하여(굳이) 지금 받아 가려 하는 고로 지금 서로 다투는 중이라”하니, 포교들이 바오로의 말을 듣고 도적들 을 꾸짖어 가로되 “그러면 지금 농사 때에 무슨 빚을 받으려 하느냐? 가을에 받으라” 하고 가는지라. 도적들은 포교들이 간 후 바오로를 향하여 이르되 “당신은 참 큰 양반 이로소이다. 우리는 당신을 해하려 하거늘 당신은 오히려 우리들의 지금 죽은 생명을 살려 주시오니 이런 큰 은혜를 어찌 다 측량하오리까?” 백배사례하고 가니라.
이렇게 바오로가 갈력 주선함으로 안 주교와 다른 여러 위 신부들을 조선에 모 셔 나오시니라. 그 후에 대흥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다시 용인 더우골로 이사하여 살 다가 병인년 군난을 당하매 본 토종들이 성교를 미워하여 잡아 본관에 부치고 가장을 모두 적몰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식구를 데리고 다시 공주 관불산으로 이사하니 때에 장 주교와 여러 위 신부 잡혀 가시고 또 각처의 유명한 교우들을 잡아 올리니라. 윤음 이 내려와 사방이 요란한지라. 때에 바오로 치명할 마음이 간절하여 의매 김 마리아 로 더불어 한가지로 치명하기를 약속하고 날마다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잡히지 않은 것은 이는 포졸들의 두목들과 더불어 전부터 친하게 지낸 연고러라.
이 위에 말한 김 마리아는 본디 서울서 부요하게 살던 집 과수라. 서울서 윤 바오 로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육신의 고난을 불고하고 다만 영혼의 유효한 말을 듣기 위하여 그 가진 바 재산을 다 팔아 가지고 윤 바오로가 사는 데로 이사하여 바오로와 한가지로 의남매를 맺고 살다가 마침 기회를 만나 서로 치명하기로 언약하고 있더니 바오로 잡혀 치명하던 날까지 정성으로 밥도 얻어다 주고 있었으나 그 때는 여인들은 잡지 아니하는 고로 치명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돌아오니라.
바오로 천주의 안배하심만 바라고 있더니 하루는 별안간에 포교들이 들어오는 지라. 보니 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 김명보와 치문이라. 이 자들이 각각 포졸들을 거 느리고 들어와 인사한 후 슬피 통곡하고 말을 아니하고 있거늘 바오로 그 연고를 물 은되 저들이 가로되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다 잡아 압송할지라도 형님은 어떻든지 빼놓기로 결심하였더니 지금은 나라에서 형님은 성교의 괴수라, 외국인을 조선으로 데려온 두목이라 하여 형님의 이름자가 직접 박혀 내려왔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 이냐?”하고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는지라. 바오로 즉시 이 말을 듣고 화평한 용모를 드러내어 위로하여 가로되 “울지들 말게. 만일 윗 영이 그러하면 자네들이 나를 잡아 바쳐야 자네들의 본분이요 또 나도 잡혀가야 나의 도리가 마땅하다”하고 저들을 권면하고 위로한 후 모든 포졸들을 불러 앉히고 참외를 사다가 하나씩 돌려주고, 그 사랑하는 아홉 살 된 막내 아들이 곁에 있음을 보고 육정을 끊기 위하여 참외 하나를 주어 돌려보낸 후 그 장남한 한 아들을 불러 여러가지 말로 훈계한 후에 입었던 옷을 벗어 놓고 헌옷과 갓·망근(망건)을 쓴 후에 먼저 자원하여 포졸들 앞서 가니, 때에 바오로의 아들과 그 동리 사람들이 의논 하고 길거리에 가 있다가 포졸들을 때려 물리치고 바오로를 구하고자 하여 공론이 은 은하거늘 바오로 그 기미를 알고 엄히 책망하여 가로되 “천주의 안배하심을 어찌 사람이 막으리오?” 하며 여러 가지 말로 만류하고 훈계하니 동리 사람들이 순종하여 의논을 파하니라.
바오로 그날 본관으로 들어가 갇혀 있다가 그 후에 수원읍으로 이수하였으나 바오로 그때까지 아무 형벌도 받지 아니하고 무사히 갔으니, 이는 포졸들의 두목이 바 오로의 아들들로 하여금 돈 28냥을 포졸들에게 주었음으로 아무 형벌없이 가니라.
바오로 즉시 관가에 들어가 문초할 새 포장이 물어 가로되 “네가 누구에게 배웠 으며 누구에게 영세하였느냐?” 하거늘 바오로 대답하여 이르되“ 안 주교에게 배워 영 세하였나이다” 또 포장이 가로되 “너희 동류들이 어디 있느냐? 대라” 하니 “만만코 못한다” 하거늘 곧 하옥하니라.
그 후에 바오로 날마다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으나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모르 나 한가지로 옥에 갇혀 있어 친히 목도하던 교우의 말을 들은즉 바오로 옥에 있을 때 에 함께 옥에 갇혀 있는 교우들을 항상 권면하며, 실망하며 냉담하여 가는 자들을 지성으로 권고하여 신덕을 견고케 하였다 하며, 또 친목한 김 마리아의 말이 “내가 밥을 얻어다 줄 때마다 옥 구녕(구멍)으로 보면 밥을 받은 후 자기는 먹지 아니하고 다른 교 우들에게 나누어 주는 고로 그 후에는 밥 한 그릇을 따로 얻어다 주었다”하며, “하루 는 바오로가 자리 한 잎을 사다 달라 하기에 내가 곧 장에 가서 왕골자리 한 잎을 사 다주니 자기는 앉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을 깔아 앉히더라”하더라.
바오로 이렇게 옥중에서 아름답게 세월을 지내다가 마침 교사함을 입어 그 영혼 을 천주께 바치니 때는 강생 후 1868년 무진 7월 18일이요, 새 군난 난지 3년 만이니 바오로의 나이는 60세러라. 여기 사적을 기록한 치명자는 치명록 제 360호에 있는 윤 바오로 회장올시다. 이 치명사적을 저술한 자는 치명자의 손자되는 베드루올시다. 죄인이 어려서부터 조부의 사적을 친히 목도한 부모들에게나 또 다른 여러 교우들에게 많이 들었음으로 이 사적을 여러 해 전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누차 상고하고 문의하여 작년에 비로소 마쳤나니다.
이 사적의 증인으로 말하면 생시에 증인은 죄인의 부모 치명한 사적은 치명록에 있는 김 마리아
안성군 읍내면 동리 294번지 윤 베드루 백 종終
[23권-87~89]
충청도 공주 유기 지방에 살던 윤 바오로의 사적은 산뒤 공소에 있는 신 마리아 가 그 맏자부라. 시부의 내력을 말하되, 시부 본디 경향에 유명하기로 성교의 거룩한 도리를 널리 권화하며 서울 왕래를 종종 하더니, 외교 여인으로 더불어 남매지의를 맺은 후에 거룩한 도에 대주재 계심을 말한즉 확실히 믿고 교에 돌아와 말하되 ‘내가 이때까지 이런 아름다운 일을 몰랐다가 이제야 알았으니 아무쪼록 의오라버님을 따 르리라’하고, 불고세속하고 와서 열절한 마음을 몇몇해 진정으로 주모를 공경하다가 무진년 군난을 당하여 바오로 날로 포착함을 예비하다가 천주의 안배하심으로 경기 수원 포교에게 잡히임을 입으매 바오로 희희낙락한 마음으로 포졸을 대접하고 소솔 에게 은밀한 말을 하려 하니 포졸들이 혹 도망할까 의심하여 뒤를 따르는 고로 자녀 에게 한 말도 못 하고 안연히 잡히어 간 즉, 그 여인이 또한 나서며 하는 말이 “오라버 님이 이미 좋은 길로 가시니 나도 따라가 위주치사하리라”하고 수원 옥중에 가 몇 며 칠 동안 밥을 빌어다가 생명을 도울 때에 모르는 교우 몇을 같이 보우하다가 하루는 아침밥을 얻어 가지고 온즉 벌써 목을 얽어 죽였는지라. 이 일을 보고 이 여인이 바 로 법정에 들어가 관원에게 아뢰되“나도 천주 성교하는 사람인즉 저와 같이 바삐 죽 여 달라”하니, 여러 포졸이 등을 밀쳐 물리치며 하는 말이“이 실없는 여인아, 바삐 물 러가라. 사람 죽이기 지겹다”하니 더구나 2~3차를 달려들다가 치명지은을 얻지 못하 고 나와 그 신을 거둘 새 사람을 사서 안장하고 본 지방에 돌아와 자세히 말하기로 자 녀들이 분명히 알았으나“그 여인의 성과 본명은 여러 해 되기로 잊어 알지 못하노라” 하고“그 여인은 그 후 몇 해 타당한 마음으로 수계하다가 선종(善終)하였다”하고“ 그때 바오로의 나이는 기록치 못하노라”하다.
③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10.
『치명일기』 360의 윤 바오로 회장은 본디 공주 유구 관불산 살더니, 무진년에 수 원 포졸에게 잡혀 목을 옭아 죽이니, 나이는 60세요. 때는 그 해 7월이더라. 잡힐 때 본 이는 박 야고보라. 살기는 검단이.
정리번호 158.:원본 유실로 인해 내용이 없음
정리번호 163.
일기약초 日記略秒
치명자 일기
윤 바오로는 공주 관불산 살더니, 무진년 10월에 경포에게 잡혀 고복(考覆)하고
수원으로 가 치명하니, 잡힐 때 본 이는 지금 전라도 익산 도화정 사는 유 회장 프란 치스코요. 치명할 때 본 이는 윤 바오로와 한 동네 살던 신문교우新門敎友 오 군명이가 자원 치명하러 갔다가 자세히 보았더라. 치명일기에 기록치 아니하였더라.
정리번호 226. → 『병인치명사적』 [16권-76~90]과 내용 동일
4) 무인년 박해(1878)
(1) 박 알렉시오
① 『병인치명사적』
[21권-25~26]
N.20 증인 은진 뒤강이 사는 박 안드레아
죄인의 형 이나시오와 아릭수와 말구 연산 배티 살더니 무인<1878> 2월 30일에 유명한 유다스 최우둘(최우돌)이 경포 20명을 데리고 죄인 4형제를 잡아서 최 신부와 이 복사 요안의 거취를 알려하여 혹독한 사형을 많이 받고 그때에 아릭슈는 자기 혀 를 내어 이로 끊으려 하매 포졸이 본명을 묻고 “경을 강하라”하니 천주 십계를 분명 히 외운즉 만반 유인하여 배교하면 놓으려 하되 형제 서로 굳이 권하여 죽기로 뜻을 세워 서울로 갈 제 그 시 40일 봉재라 재 지키는 모양을 보고 포졸의 능욕이 더욱 심하더니
포장 앞에 나가 추열할 때 또한 전과 같이 “배교하라”하여 형제 각각 무수한 형 벌을 받고 포청에 갇힌 지 28일 만에 죄인의 3형제는 놓임을 입고 알렉시오는 옥중 에 있어 부활 첨례 날에 형제를 권하여 “대송으로 착실히 하여 영신 예비를 하라”하 고 6삭을 지난 후에 옥중에서 죽으니 나이는 36세라.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20. → 『병인치명사적』과 내용 동일
정리번호 56.
죄인 고산 석장리 있는 박 요한
『치명일기』에 불참한 박 알렉시오는 본디 죄인의 부친이라. 연산 배티서 살다가, 경포에게 잡혀 갈 때 죄인의 모친이 친히 보았고, 서울로 가 그 치명함을 경포에게 들 었으나, 본 사람은 없나이다. 때는 무인년 2월 그믐날이요, 나이는 35세.
(2) 성 베드로
① 『병인치명사적』
[21권-24]
N.19 죄인 고산 석장리 성 아오스딩이가 『치명일기』에 불참한 사람
성 베드루는 죄인의 부친으로 본디 연산 배티서 살다가 치명한 박 알넥슈와 한 가지로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갈 때에 그 잡힘을 박 알낵슈의 아내 이 안나가 친히 보 았은 즉 본디 박 알넥슈와 서로 남매간(처남매부간)이라. 두 사람이 서울로 가 치명할 때는 친히 본 사람은 없으나 포교에게 들은즉 옥중에서 죽었다 하더이다. 때는 무인 년 2월 그믐이요 연은 38세.
[21권-25~26]
성 베드루는 아릭슈의 매부로서 연산 배티에 한가지로 살더니 한가지로 잡혀 형 벌 아래 굴치 아니하고 옥중에서 한가지로 죽으니라.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9, 20. → 『병인치명사적』과 내용 동일
5) 경진년 박해(1880)
(1) 장정선
① 『병인치명사적』
[21권-6~7]
진산 사람 장정선이는 연산 동면 오리올로 이사하여 살다가 경진년 3월에 경포 에게 잡혀 서울로 올라가 포청서 치명하니, 시년이 30이요 때는 경진년 3월. 장정선 이 잡힐 때에 그 본촌 사람 김성오가 친히 보았다는 말을 죄인이 들었나니다.
이 증인의 김성오는 본 자는 수겅(수경)이니 이 사람도 교우로 장정선이와 한 이 웃에 살더니 장정선이 잡힘을 친히 보고 저는 도망하여 피하여 즉금 살았으되 서울서 북으로 가 80리 허에 산다 하더라.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4. → 『병인치명사적』과 내용 동일
연도 미상의 순교자
(1) 김춘삼의 중형
① 『병인치명사적』
[21권-123]
김춘삼의 중형은 연산 논골 살 제 공주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죽으니 연이 30여 세러라.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95. → 『병인치명사적』과 내용 동일
(2) 박공악
① 『병인치명사적』
[21권-123]
박공악이는 연산 오작실 살 제 경포에게 잡혀가 죽으니 연이 30여 세러라.
②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95. → 『병인치명사적』과 내용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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