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면 어르신 찾아뵙기 프로젝트(8월)/창내리 출신 장경준 어르신을 찾아서
8월의 폭염 아래 햇살이 뜨겁게 비치던 토요일 정오, 서울 성북구 정릉으로 장경준 어르신댁을 찾았다. 햇볕 사이로 봄비 내리듯 가냘픈 빗줄기가 콧등을 때리는 8월 6일, 함께 움직인 고향의 형제들은 어르신 찾아뵙기 단골 삼총사인 중면장년회의 유근배(식현리), 총무 김형준(천덕리), 그리고 필자인 회장 김용근이었다.
일명 길음뉴타운이라 불리는 곳,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아파트가 창내리 출신의 장경준 어르신댁이었다. 딩∼동!
현관문이 열리고..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주시는 어르신과 사모님 뒤로 또 한분의 여성 분이 서 있었다. 따님? 그래보이진 않아서 며느님이냐고 여쭙자, 장남의 아내, 큰며느리라는 대답이 냉큼 돌아왔다. 두 분만 살고 계신 줄 알았는데 아드님 부부와 손자 둘, 대가족이셨다.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고, 며느님이 가져온 냉커피와 과일의 맛을 즐기면서 6.25동란후 피난살이에 대한 궁금증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장경준 어르신, 중면 산악인 중에서도 2세대 강골들을 따돌리고 산을 타기로 소문난 어르신은 올해 만 여든여덟, 1934년생이시다. 부인인 김정수 여사와는 세 살터웃이다. 이 연세에 걸음을 제대로 옮기는 것만 해도 天福인데, 어르신은 산자락을 타고 날아다니니 노익장이 대단의 지경에 서 있는 셈이다.
1.4후퇴때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왔다. 당시 나이가 열여섯, 어리디 어린 소년이라할까? 다행히 뒤를 이어 모친과 작은형, 누님 등 4남매가 임진강 줄기인 사천내를 건너 월남을 했고, 그것으로 고향길은 막혀 버렸다. 이때 가장 늦게 피란을 와 합류한 막내 동생은 보안사령부에서만 30년을 근무했단다.
“경기도 일산을 가면 송포면이라고 있어요. 부산리였던가? 거기서 남의집살이를 시작했었지요. 머슴이었지. 도합 4년 정도 하고서 서울로 와서 생홯하다가 군대를 갔고, 병장으로 제대를 했어요.”국가 유공자이기도 한 장경준 어르신, 고향이 안성인 부인과의 인연을 묻자, 어르신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씀을 이어갔다.
“피란후 안성에 큰누님이 정착을 했지요. 누님집에 내려가 며칠을 있는데, 일 주문이 들어오데. 그래서 농가일을 했는데 일을 잘한다고 머슴일을 않겠느냐고 또 요청이 왔지요. 마침 홍수로 큰물이 났어요. 개울논으로 볏단이 둥둥 떠내려가는데 그걸 재빠르게 줏어날랐지. 일꾼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모두 피란나온 분들이라 미숙한 분들이었지. 내가 볏단을 민첩하게 주워다 능숙하게 묶는 것을 보고 머슴 제안이 왔어요. 서마지기논이었던가, 먹여주고 재워만 주면 된다고 들어갔는데 일년 후에 새경으로 벼 두섬을 주데. 그 다음해는 일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서로 데려간다고 경쟁이 났고, 그렇게 4년을 하니까 벼가 백섬이 모이더라구. 큰돈이었어요. 그걸 밑천으로 서울로 와서 집도 사고 했지요.”
부인과의 결혼에 대해 거듭 묻자, 장경준 어르신은 사모님 고향이 안성 금산동이었다고 힌트를 주면서 일잘하고 부지런하다고 소문이 나자 동네 사람이 중매를 섰고,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됐다는 설명을 곁들인다.
평생의 반려자 김정수 여사. 엄한 집안에 태어나 스물다섯이 되도록 선 한번 안보고 있었던 김정수 여사는 남편과의 첫만남이 첫선이었고, 그것이 결혼으로 이어지게 됐다. 장경준 어르신과보다는 세 살이 어리니 두 사람 다 滿婚이었고, 천생연분이었다. 아버님만 계셨던 김 여사는 세 남매 중 막내였는데 오라버니가 전쟁 터지고 바로 입대했다가 일주일 만에 전사를 해서 손위 언니와 더불어 자매뿐이었다. 부친은 따님이 결혼후 둘째를 본 이후에 타계했다.
“안성에서 머슴살이 하면서 벌었던 백가마니의 돈으로 서울 염리동에 집을 사두고 군대를 갔기 때문에 난 평생 남한테 손벌리고 살지는 않았지. 아내도 평생을 전업주부로만 있었고.. ”
행정 절차 미숙으로 집은 그대로인데 거주지가 염리동에서 아현동으로 바뀌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거기서 50여년을 넘게 살았고, 지금의 정릉 뉴타운으로는 6년 전에 집을 사서 이주를 했다. 슬하에 둔 자녀는 아둘 둘에 딸 하나. 자영업을 하는 장남과 함께 살고 있는 장경준 어르신은 외손자를 포함해 손주들이 여섯이란다. 모두 둘씩을 두었다고..
화제를 바꿔 산을 타게 된 경위를 물었다.
“고향에서부터 날다람쥐처럼 산을 탔어요. 중면 산악회 역시 초창기부터 늘 함께했고 .. 지금도 새벽 세시면 일어나 동네 북한산을 세 시간 정도 돌고서 들어와 아침을 들지요.”
부인과도 함께 산을 타는가고 묻자, 초기 코로나때 부인이 119에 실려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했었는데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었지만 폐렴으로 고생을 했고, 그 후유증으로 심한 운동은 어렵단다. 병원 수발은 평생 동반자인 남편이 도맡아했고..
“녹용 세 재 먹고 걷게 됐지요. 지금도 매주 이틀은 인근의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고요.”
얘기를 듣다보니 두 분의 결혼관이 궁금해져서 이 다음 세상에서도 현재의 배우자를 택하겠느냐고 물었다. ‘생각해 볼 문제’라는 김정수 여사의 말에 호쾌하게 웃고난 어르신은,‘그땐 내가 다른 여자를 택하지 지금 부인을 택하겠느냐’고 역공을 펼친다.
보일러 난방 기술자로 살았던 장경준 어르신이 지금도 하고 있는 강남의 빌딩 관리인을 한 지는 이십 년이 넘었다. 88세의 노인, 대단한 노익장이라는 생각에 요즘 받는 월급을 물었다.
“이백만원 남짓해요. 연금도 받고 있고..”
장경준 어르신댁을 찾은 지 한시간 반 정도 시간이 흘렀다. 마무리겸해서 중면민회 활동을 하시면서의 소회를 물었다.
“ 중면민회 활동은 초창기부터 관여했지요. 작고하신 대룡리의 심현재 님을 비롯해 서한기, 장용재 씨 등이 초창기 멤버였어요. 가장 뜻깊고 좋았던 것은 역시 검단에다 중면인 동산인 망향의 동산을 마련해서 1세대는 물론, 2세대 이후에게 선산 없는 설움을 없이해 주고 함께 묻힐 곳을 있게 해준 것이지요,”
피란후 초상이 나면 홍제동 화장터부터 찾던 시절의 설움에 중면 고향분들이 함께 자리할 검단 망향의 동산을 마련했던 1세대 선배님들의 선각자적인 배려와 희생에 다시금 가슴이 저려왔다. 미수복경기도에서도, 개풍군에서도 쉽사리 갖지 못하는 고향민들의 산소를, 그것도 화장하지 않고 온전히 돌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를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마련했던 1세대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는 우리 2세대 이후의 후손들이, 후배들이 가져야 할 고마움은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도 지나침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 2세대 방문객 세 사람은 장경준 어르신과 김정수 여사님을 모시고 조금 늦은 점심을 들기 위해 미리 보아둔 인근의 장수족발보쌈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댁을 찾을 무렵 잠시 내렸던 소나기도 그쳐버린 정릉골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고,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가슴은 상쾌함을 느꼈다.
글/중면장년회 회장 김용근
첫댓글
좋은 일 감사하고,멋진 계획입니다.
다음은 대룡리 방문을 신청합니다.
김만순 동작구여의대방로 8
신대방 우성 아파트 102동 1705호.
고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