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 나라위한 일편단심 뜨거운 핏줄 /
철통같은 제이전선 힘이 넘친다 / 우리는 무적의 향토예비군 /
군복무를 마친 대한민국의 남성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부를 수 있는
‘향토예비군가’ 가사의 일부다.
1968년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면서 제정된 이 군가는 중 장년층의
남성세계에서 널리 불려 오다가 41년이 지나서는
20대~30대 초반 신세대 예비군들의 취향에 맞춰서 편곡이 되었다.
보다 경쾌한 리듬에 랩을 추가하여 기존의 군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냉전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일부 가사도 바뀌었다.
국방부로부터 정식 군가로 승인을 받은 ‘리메이크곡 향토예비군가’ 는
이제 생업과 안보전선을 오가는 신세대 예비군들에게는 힘을
더해 주는 응원가로도 정착이 되고 있다.
44년 전의 일이다. 북한은 그들의 124군 특수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을
서울로 잠입시켜 1968년 1월 21일 대통령관저(청와대) 폭파와
요인암살 및 주요기관시설파괴를 시도했다.
개성을 출발한 이들 남파무장공비들은 국군복장으로 위장,
1월 17일 23시 고랑포에서 서남쪽으로 3.5km지점 미2사단 경비구역
남방 한계선을 뚫고 18일 새벽, 흰색 모포를 덮어 쓰고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넜다.
파주땅(적성면 장좌리)으로 침입한 공비들은 파평산을 넘고 19일 새벽에
삼봉산에 도착, 진을 치고 낮시간 휴식을 취하다가 4명의 법원리
나무꾼 청년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무장공비들의 교본에는 남침 중 사람을 만나면 지체없이 살해 매장하고
작전을 계속한다고 되어 있지만 행군에 지친 공비들이 꽁꽁 언
땅에 시신을 묻는 일이 어려울 것 같아 그대로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공비들로부터 풀려 난 나무꾼들은 산에서 내려오자 말자 곧바로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 신고로 군·경 합동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전개되었다.
공비들은 19일, 날이 저물자 북노고산~앵무봉~남노고산루트를 타고
진관사 계곡까지 내려와 이곳에다 진을 치고 하룻밤을 보냈다.
믿기지 않는 먼 거리를 단숨에 쳐 내려 온 것이다.
20일에는 진관사 막영지를 출발, 비봉능선의 승가봉~비봉 사이의 안부를 넘고
승가사 주변에서 운명의 날 21일을 맞았다.
21일 오후, 공비들은 서울 종로구 세검정고개까지 내려 온 다음
창의문을 통과하려던 순간 경찰의 검문을 받았고 이어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에서 공비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유일하게 ‘육군하사 김창수’로 위장한 국군복장의 당시 27세 공비
‘김신조’가 생포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 후에는 미국정보수집보조함 푸에불로호가
동해상에서 납치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가공할 사건들로 인해 군과 경찰에는 경계비상령이 내려졌고,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불안한 시국에
1968년 4월 1일에는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대통령을 암살 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었던 김신조,
그는 “삼봉산 나무꾼의 신고로 작전은 실패하였지만 이 후
나는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자유를 지키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비학산과 삼봉산 취재길, 삼봉산이 손에 잡힐 듯한 가까운 곳,
작은 언덕위에 있는 토속음식점 ‘초리연’을 찾아 들어 갔다.
법원4리 우민제이장이 부인 유송은씨와 함께 운영하는 업소다.
우민제이장의 친형 ‘우철제(1947년생.작고)’씨는 21세 때 나무꾼으로
삼봉산을 올랐다가 경찰에 ‘간첩신고’를 한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 일행은 창밖 삼봉산을 바라 보며 안 주인이 잘 차려 낸 ‘두부버섯전골’에
막걸리잔을 비우면서 주인 내외분이 들려주는 ‘자랑스러운 형님 이야기’로
이 업소를 찾은 보람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
‘초리연’에서는 민박도 가능한 업소라 ‘1박’ 계획으로 다시 찾아 가기로 마음 먹었다.
www.sanchonmirak.com
첫댓글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혼자만 보는것도 그러고요. 그레도 올리는것이 좋은것 같네요.




이런글을 계속올려야 하는지 글세 제생각에서는 박선배님이 잘아는것을
후배들을 위해서 올리다보면 조금 조금 좋아지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