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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Parker on the Greatness of Wine :
로버트 파커가 제시한 명품 와인의 조건
이 세 용(한국와인협회 부회장/와인 칼럼니스트)
“무엇이 위대한 와인인가?” 로버트 파커가 최근(2005년 10월) 새로 출간한 저서의 첫 페이지에서 던지는 물음이다. 사실 이러한 물음은 파커가 새삼스럽게 제기할 만큼 새로운 문제제기는 아니다. 그동안 와인의 품질을 따져보는 수많은 시음평이 있어 왔고 이러한 평가를 토대로 탁월한 와인들을 선정해 놓은 저서들도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커가 이번에 708쪽에 달하는 두툼한 책으로 내놓은
첫째, 이 책의 서문에 해당되는 장문의 글에서 ‘위대한 와인’의 필요조건을 나름대로 여덟 가지로 분류하여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와인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파커는 명품 와인이 드러내는 공통분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 책의 부제가 암시하고 있듯이 파커는 현대적 관점(a modern perspective)에서 와인의 품질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이룩된 포도재배와 양조과정의 현대적 기술혁신을 주목하면서 와인산지의 뛰어난 잠재력과 와인메이커들의 창조적 비전을 평가의 중요한 잣대로 삼고 있다.
셋째, 선정된 와이너리에 대한 유용한 정보와 뛰어난 빈티지의 와인들에 대한 시음평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 모두 9개국 155개의 와인 명가들이 선정되었다. 신세계 지역은 미국과 호주의 와인들이 많이 소개되었고 그 밖에는 아르헨티나의 Bodega Catena Zapata 한 군데만 포함되어 있다. 책의 말미에 부록 형식으로 ‘미래의 와인 명가’ 후보자 리스트가 첨부되어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보르도의 Le Pin이 본문에 포함되지 못하고 부록으로 밀려나 있는 점이다.
다소 납득하기 어려우나 와이너리 선정은 저자의 주관을 반영할 따름이다. 와인의 빈티지 선택은 독자들이 현실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때문인지 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오래된 와인 명가의 경우 1980년대와 그 이전의 일부 ‘전설적’ 빈티지들도 수록되어 있다.
파커는 변호사에서 전업 와인비평가로 직업을 바꾼 첫 해인 1984년에 첫 번째 저서로
예술적 경지로 발돋움하는 명품 와인의 시학 일찍이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와인을 ‘병 안에 든 시’(bottled poetry)라고 불렀다. 무엇이 평범한 농산품 음료의 하나인 와인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비유하게끔 만드는 것인가. 다시 말하여, 명품 와인의 시학(Poetics)은 무엇인가. 파커도 이번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가 무엇보다도 탁월한 와인을 만드는 데 헌신하고 있는 예술가와 장인(匠人)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전통주의자들도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혁신을 추구한 혁명가들도 있다. 공통점은 비범한 개성을 지닌 와인이라는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장인정신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이다.
파커는 때때로 명품 와인을 이야기하면서 스타일상의 비유를 하기 위해 예술가를 거론하곤 한다. 마르셀 기갈(Marcel Guigal)의 단일 포도원 꼬뜨 로띠(Cote Rotie) 3총사들에 대한 비유가 그 대표적 사례. 빈티지에 따라 10% 안팎의 비오니에 품종을 배합하는 라 물린(La Mouline)은 3총사 가운데 가장 향기롭고 비단처럼 매끄러우며 엘리건트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파커는 이 와인을 모차르트에 비유한다. 반면 100% 시라 품종으로 만드는 라 랑돈(La Landonne)은 타닌 성분이 강하고 파워가 넘치는 과묵한 와인으로 브람스에 비유되고 있다.
와인의 숙성 과정에서 좀처럼 자기표현을 하지 않는 ‘사색에 잠긴 듯한 과묵함’이 브람스의 음악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라 뛰르끄(La Turque)는 라 랑돈에 비해 파워는 상대적으로 밀리지만 아로마적 특성은 라 물린 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두 와인의 특징을 합성한 음악에 비유된다.
파커는 20세기의 위대한 와인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와인을 딱 한 가지 선택하라고 강요받는다면 1978년 빈티지의 라 물린으로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파커의 이번 저서에 소개된 와인들 중에는 1978년 빈티지 라 물린을 비롯하여 평점 100점을 받은 명품 와인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딱히 평점 100점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90점 이상을 받은 다양한 스타일의 뛰어난 와인들이 시음평과 함께 선보이고 있다. 모두가 나름대로 와인의 시학을 내면에 지니고 있는 ‘병 안에 든 시’인 것이다.
명품 와인의 필요조건 여덟 가지
와인의 명품성 혹은 예술성을 규정하는 공통된 요소들은 무엇인가. 파커는 책에서 자신이
첫째, 미각과 지성을 다 함께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파 커는 그동안 자신의 저서와 인터뷰를 통해 여러 차례 와인이 가져다주는 심미적 가치를 두 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한 바 있다. 하나는 감각적으로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쾌락적 가치(hedonistic value)이다. 다른 하나는 와인의 향과 풍미가 보다 여러 겹의 복합성(complexity)을 지닐 때 나타나는 지적 가치(intellectual value)이다. 명품 와인의 첫 번째 조건은 아로마와 플레이버 프로파일(flavor profile)이 일차원적 단순성을 넘어 다차원적 복합성을 지녀야 한다. 쉽게 말해서, 입안과 두뇌를 동시에 만족시키면서 즐거움을 주는 와인을 말한다.
둘째, 시음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 수 있는 흡인력을 지녀야 한다.
파 커는 자신의 오랜 시음경험으로 볼 때 탁월한 와인들을 부케만으로도 손쉽게 판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단 파커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시음을 해본 와인애호가들이라면 대부분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명품 와인은 최초의 시음에서 맛볼 수 있는 매혹적인 첫 느낌뿐만이 아니라 강렬한 아로마와 여러 층위의 뉘앙스로 가득한 향미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셋째, 강렬한 아로마와 향미를 제공하되 무겁고 둔탁하지 않아야 한다.
와 인이 무겁고 둔탁하다는 것은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오크의 영향이 과도하거나 양조과정에서 엑스트랙션(extraction)이 지나친 경우이다. 뛰어난 와인이나 음식은 강렬한 복합성과 함께 균형 잡힌 정갈함(purity)을 지닌다고 파커는 주장한다. 캘리포니아나 호주와 같은 신세계 와인산지에서 생산되는 와인들 가운데 강건하고 힘은 넘치나 균형과 초점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구세계 와인 명가들이 생산하는 명품 와인과 크게 대비된다.
넷째, 한 모금씩 와인을 마셔 나갈수록 더욱 더 맛이 뛰어나야 한다.
와 인을 오래 마셔본 애호가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일이다. 명품 와인일수록 마시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보다 새로운 뉘앙스와 복합성을 표현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 병의 명품 와인이 주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마지막 잔을 마실 때라고 파커는 말한다. 레바논의 와인 명가 샤또 무사르(Chateau Musar)의 주인 세르쥬 오샤르(Serge Hochar)도 파커와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와인의 미학을 이해하려면 긴 시간에 걸쳐 와인 한 병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와인의 맛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마지막까지 어떻게 변화하는지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감각적 차원을 넘어 지성을 자극시키는 정신적 차원의 와인 맛을 ‘맛을 뛰어 넘는 맛’(taste beyond taste)이라고 불렀다.
다섯째, 숙성이 진행될수록 와인의 품질이 향상되어야 한다.
숙 성 능력은 탁월한 와인과 범상한 와인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조건이다. 그런데 파커는 와인의 숙성 잠재력과 품질 향상에 관해 일부 유럽 쪽의 와인비평가들과 견해를 달리 한다고 밝힌다. 그가 보기에 이들 유럽의 비평가들이 “뛰어난 와인은 충분히 숙성되었을 때에만 제 맛을 내며 어릴 때에는 기대 이하로 실망스러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한다. 파커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채 숙성되지 않았을 때 떨떠름한 맛과 산미가 강하고 과일 풍미가 빈약한 와인은 나중에 숙성 단계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에도 신통치 않은 와인이라는 것이다.
최소한 10년 이상 숙성되어야 제 맛이 살아나는 명품 와인도 숙성 초기부터 나름대로 인지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 어릴 때에 이미 싹수가 노랗다면 커서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뛰어난 와인이 어릴 때에도 그에 걸맞은 맛을 내며 숙성 잠재력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최적으로 익은 상태의 포도로 만들어 밸런스가 뛰어난 와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배럴 테이스팅을 통해 와인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라 하겠다.
여섯째, 명품 와인만의 비범한 개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비 범한 개성(singular personality)은 탁월한 빈티지를 평가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기준이다. 파커는 어떤 와인산지의 보통 수준인 빈티지를 흔히 ‘클래식 빈티지’(classic vintage)라고 미화시키는 것은 그릇된 것이며 ‘클래식’이라는 단어의 남용이라고 비판한다. 탁월한 와인과 탁월한 빈티지는 비범한 개성을 공유하며 상호간의 관계는 필요충분조건이 성립된다. 예컨대, 보르도 레드 와인의 경우, 풍요롭고 수려함이 돋보이는 1982년 빈티지와 1990년 빈티지 그리고 튼실한 타닌과 엄청난 숙성 잠재력이 특징인 1986년 빈티지는 비범한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캘리포니아의 경우, 완벽한 밸런스와 매끄러운 질감이 특징인 1994년 빈티지 나파 및 소노마의 까베르네 소비뇽과 블렌드 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일곱째, 와인산지의 떼루아를 탁월하게 반영해야 한다.
파 커는 세계 와인생산국 가운데 프랑스만큼 떼루아 개념에 대해 남다른 집착을 하는 유난스런 나라도 없다고 말한다. 사실 까베르네 소비뇽, 삐노 누아르, 시라, 샤르도네 등 주요 고급 품종의 세계 최고 산지들이 프랑스에 있고 또 그에 걸맞은 명품 와인을 생산해내기 때문에 떼루아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과 천착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파커는 떼루아를 지나치게 신성시하거나 떼루아에 포함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요소까지 망라하여 그릇된 전문성을 표방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떼루아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견을 표명하면 개념과 언어표현의 정치적 적합성(political correctness)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비화되는 우스꽝스런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떼루아에 대한 파커의 시각은 그의 와인비평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또한 떼루아에 대한 견해차는 오늘날 와인 스타일의 전통과 현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전개되는 데 한 몫을 톡톡히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파커는 떼루아 개념이 때로는 게으른 와인 생산자들의 현상유지를 합리화시켜주는 편리한 도구로도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훌륭한 떼루아의 와인 명가라 할지라도 포도밭 관리에 쏟는 정성과 양조 단계에서 지혜로운 선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결과는 보잘것없는 와인의 생산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사이에 나타난 Chateau Margaux 와인의 품질저하는 그러한 사례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또한 파커는 떼루아를 탁월하게 구현하는 방식은 전통주의적 접근뿐만 아니라 현대주의적 접근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와인이지만 최종적으로 잔 안에 채워진 와인의 품질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파커가 선호하는 와인들은 알코올 함량이 높고 과일이 농축된 강건한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파커는 이러한 풍문이 자신의 어느 한쪽 면만을 부각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뛰어난 품질을 전제로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즐긴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가 가장 선호하는 와인들 중에는 전통적 스타일의 와인들이 많다고 한다. 파커는 그 중에서도 삐에몬떼의 원조 전통파인 Bruno Giacosa의 와인들을 30년 넘게 즐기고 있는데 전 세계 와인들 가운데 자신이 사전에 시음하지 않고 바로 구입하는 유일한 와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덟째, 와인을 만드는 사람의 열정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
한 해의 와인농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기는 수확기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최적의 포도알 익는 상태를 포착하여 수확일자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비와 변덕이 교차되는 대자연의 위력 앞에 와인메이커들이 최상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고된 노동과 정성 그리고 열정뿐이다. 그래서 파커는 말한다. 명품 와인은 이들의 열정과 헌신에 의해 포도원과 포도 품종 그리고 빈티지가 가장 자연스럽고, 철저하게 비개입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결과물이라고. 이렇게 탄생한 명품 와인들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대지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준다. 그리고 그 심미적 결속의 시공간 속에서 와인은 인류 문명의 가장 세련된 모습을 구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