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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28
창세기 6:9-17
노아의 역사
- 세 번째 톨레도트 -
성경에 방주의 치수가 나와 있으니 사람들은 방주를 그 치수대로 만들어 보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 많이 있었고 또한 방주가 머무른 아라랏(오늘날 지명으로 ‘아라라트 산’으로 해발 5,137m로 ‘터키’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을 중심으로 아직도 방주의 구체적인 흔적을 찾는 고고학자들이 많다. 방주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그 흔적을 찾았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창조과학회에서는 노아의 방주와 홍수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여 하나님을 증명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시도들이 있으나 계시된 말씀과는 1도 연관이 없으며 과학으로 예수를 믿게 하려는 시도 자체가 말씀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씀 자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라는 표현이 세 번째 ‘톨레도트’이다. 그리고는 족보가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세 아들에 대한 언급만 있고 곧 부패하고 포악함으로 인해 심판하신다는 말씀 이후에 방주를 만들도록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과거 개역한글판에서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라고 번역하였다. 새번역성경은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성경에서는 “노아의 이야기는 이러하다”라고 번역하였다.
노아의 톨레도트는 단순히 족보를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방주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언약으로 나타내시기 위한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노아를 통해 은혜의 족보를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시는 것이 세 번째 톨레도트이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심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심판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노아의 의’가 기준이 되어 그 의에 합당하지 않는 상태는 심판이라는 의미이다.
흔히 이 구절을 설명하면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받을 근거가 노아에게 있었다는 것이 된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노아에게 나타내시고 하늘의 비밀을 공유하여 같은 뜻이 되었기에 의인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 근거는 8절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말씀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아를 만나주셨고 그에게 은혜를 허락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기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노아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주셨기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시려는 이 땅의 어떤 존재가 공의를 행하는 자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은혜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인”이란 노아가 여호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씀에서 “당대”란 히브리어로 ‘도르’인데 ‘시대, 세대, 거주’라는 뜻이다. 한 인간의 잉태와 출생에서부터 그 후손의 잉태 및 출생에 이르기까지가 하나의 ‘도르’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6-27)라고 “노아의 때”를 말씀하셨다. 즉 노아의 의는 이 땅의 시대를 대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지 이 땅은 언제나 심판의 대상이다.
“완전한 자”라는 표현에서 히브리어 ‘타밈’은 흠 없는 제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출 12:5, 출 29:1, 레 1:3, 레 3:1, 레 4:23 등).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제사 제물의 흠 없음은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해 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타밈)”(신 18:13)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흠 없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참고 마 5:48). 그것을 잘 설명하는 말씀이 히브리서 말씀이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경고하심을 받아”라는 말이 헬라어로 ‘크레마티조’인데 ‘계시를 전하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계시가 온전히 전달되었다는 의미이다. “보이지 않는 일” 곧 하늘의 일이 노아에게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2:2에서 “믿음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노아가 믿음으로 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러므로 노아는 자기 믿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묵시 속에서 이미 존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아를 이끌어 노아에게 주어진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이 땅은 심판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10-13절).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라고 하였는데 “부패하여”라는 말은 히브리어 ‘샤하트’인데 ‘멸망시키다, 파멸하다, 부패하다’라는 뜻이다. 이 짧은 문장 안에서 4번이나 쓰고 있는데 계속 “부패하여”라고 표현하다가 13절 끝에는 “멸하리라”라고 번역하였다. “포악함”이란 ‘하마스’는 ‘폭력, 난폭, 부당행위, 불법, 악’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부패하고 포악하기 때문에 홍수로 심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멸망시키셨기 때문에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로 홍수로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이 본질적인 뜻이다. “모든 혈육 있는 자”란 셋의 계열과 가인의 계열이 하나가 되어 네피림이 중심이 된 세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육신의 상태, 땅적 존재이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14절). “방주”란 히브리어로 ‘테바’인데 ‘방주 상자, 궤’라는 뜻이다. 바로 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모세를 담아서 나일강에 띄운 갈대 상자가 ‘테바’이다(출 2:3,5). 그렇게 살아남은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심판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보여주는 상자이다.
지금 개정성경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번역하였는데 개역한글판성경에서는 “잣 나무”로 번역하였고(새번역성경, 쉬운성경) 공동번역과 가톨릭성경에서는 “전나무”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사실 잣 나무나 전 나무로 이해할 수 없다(열왕기상 6:15에 보면 성전 마루를 잣나무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베로쉬’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고페르”라는 말 자체로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고페르”라는 말을 히브리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집으로 삼다, 거하는 처소’라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서 한 번만 사용된 단어이고 성경 히브리어는 고대의 언어이기 때문에 사실 그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 연관된 단어와 연결하여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에 나오는 “역청”으로 번역된 말이 히브리어로 ‘코페르’이고, “칠하라”라는 표현이 히브리어로 ‘카파르’이다. ‘코페르’는 사전을 찾아보면 ‘몸값, 속전, 마을, 삼실나무, 역청’이라는 뜻이라고 되어 있고, ‘카파르’는 ‘덮다, 진정시키다, 화해하다, 속죄하다, 칠하다’라는 뜻으로 서로 어원이 같은 단어이다. 이렇게 보자면 “고페르 나무”는 ‘코페르’, ‘카파르’와 연관되어 한 가지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다른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카파르) 하더라(사 6:6-7)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카파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시 78:38)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카파르)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이런 점에서 “고페르 나무”는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나무로 궤(상자)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방주란 단순히 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덮고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모세의 갈대 상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언약 백성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후에 단어는 다른 단어로 쓰고 있지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칠하는 것이나 성막을 짓도록 하셔서 언약궤를 만들도록 하신 것은 방주에서 연유된 하나님의 죄 용서에 의한 구원의 실체를 언약으로 설명하고 보여주신 것이다.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15-17절). 한 규빗은 성인 팔꿈치부터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로 약 45-50cm이다. 주의 구체적인 치수를 제시하는 것은 방주는 노아가 임의로 지어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이고 또한 그것대로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왕이시다(사 33:21-22).
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3-10)
(202302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