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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명 (이름) | 재위 기간 | 특기 사항 |
진흥왕 (三麥宗) | 540.8-575.8(36) | 7세에 등극하였으므로 43세에 죽음 심맥부라는 이름도 있음, 진흥왕순수비, 24대 |
진지왕 (舍輪) | 576.8-579.7.17(4) | 형 동륜이 일찍 죽어 왕위계승, 음란방자하다는 이유로 4년만에 폐위됨 |
진평왕 (白淨) | 579.8-632.2(53.7) | 신라왕들 중 최장기간 재위, 박혁거제가 61년간(13세에 등극)재위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의문이 듬 |
선덕여왕 (德曼) | 632.2-647.1(16.1) | 재위 3년 분황사 완성, 14년 황룡사 목탑 창건 |
진덕여왕 (勝曼) | 647.1.17-654.3(8.3) | 진평왕의 동생 국반갈문왕의 딸, 신년하례를 받고, 왕의 연호 처음 사용 |
태종 무열왕 (金春秋) | 654.4-661.6(8.2) | 삼국통일 기틀 마련, 백제멸망(660) |
문무왕 (法敏) | 661.6-681.7.1(21.1) | 고구려멸망(668),30대 |
신문왕 (政明) | 681.7-692.8(12.1) | 문무왕의 장자 |
효소왕 (理洪) | 692.8-702.7.27(11) | 신문왕의 장자 |
성덕왕 (興光) | 702.8-736.2(36.7) | 신문왕의 2자, 효소왕의 동생 |
《삼국사기》문무왕조에는 감동이 절로 느껴지는 기록이 하나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왕 21년 7월 1일. 가을 왕이 죽으니 시호를 文武라 하였다. 모든 신하들이 왕의 유언에 따라서 東海口 큰 돌 위에 장사하였다. (세속의 전설에는 왕이 化하여 龍이 되었다하여 그 돌은 대왕석이라 한다)왕의 유조(遺詔-유언)는 다음과 같다.”
“부덕한 몸이 어지러운 運을 만나고 전쟁의 때를 당하여 서를 치고 북을 토벌하여 국토를 안정시키고 배반하는 자를 죄주고 협조하는 자를 불러들여 遠近이 다 편안케 되었으니 위로는 祖宗의 끼치신 염려를 위로하고 아래로는 父子의 묵은 원한을 갚았으며, 상은 널리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모두 미치고, 벼슬은 안이나 밖이 다 균등하고 무기를 녹여 농기를 만들고, 백성을 仁壽의 지역에 있게 하였다. 호세를 가볍게 하고 출역을 생략하여 집은 부요하고 인구가 늘며 인간이 편안하고 국내가 염려 없으며 창고의 곡식은 산더미같이 쌓이고 감옥은 죄수가 없어 풀만이 우거졌으니 유현(幽顯)에 부끄러움이 없고 士人을 저버린 바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풍상에 쪼들리어 痼疾(지병)을 이루고 政務에 노심하여 다시 병이 뿌리 깊게 되었던 것이다. 運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이 한가지라 황천에 돌아간들 무슨 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이 빛난 덕을 지니고 오랫동안 동궁에 있었으니 위로 여러 재상과 아래로 뭇 관원들은 죽은 사람을 보내는 義를 어기지 말고 산사람을 섬기는 예를 결하지 말 것이며, 宗廟의 主는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니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라.
아 ! 山谷은 변천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저 오왕 합려(吳王 闔閭)의 북산 무덤에 채색의 금부(金鳧-황금주옥으로 만든 향로)가 남아 있지 않고 위왕 조조(衛王 曹操)의 徐陵 望地에 銅雀*의 명칭만 들을 뿐이라. 옛날 萬機를 총괄한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초동과 牧豎(목수-목동)는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토끼는 그 곁에 구멍 뚫는다. 무덤이란 한갓 자재를 허비하여 역사의 조롱거리를 만드는 것일 뿐 헛되이 인력만 수고롭게 하면서 죽은 넋을 살릴 수도 없는 것이니 고요히 생각하면 그지없이 슬픈 일이다.
이와 같은 종류는 내가 즐겨하는 바 아니니 죽은 뒤 10일 되거든 庫門의 바깥뜰에서 西國 의식에 의하여 화장하고 服의 경중은 본래 정규가 있거니와 治喪하는 범절은 되도록 검약을 따를 것이며 그 나머지 邊城의 鎭守와 州·縣의 課稅까지도 일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곧 개혁하라. 사방에 공포하여 이 뜻을 알게 하고 소속 관원은 즉시 시행하라.”
감동이다.
삼국지의 조조가 죽으면서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매월 삭망(朔望-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동작대에 올라 나의 서릉을 바라보며 酒脯를 올리도록 하라”고 하였다(鄴都故事-업도고사)는 고사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