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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거제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동백
김영삼대통령하면 떠오르는 것이 부친 김홍조옹과 멸치/ 죠깅과 민주산악회/단식투쟁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40대 기수론/IMF 도래와 아들 김현철 등이다. |
주소: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1368-2
오시는길: (장목코스) 거제대교- 고현-연초-장목-외포-대계마을
(옥포코스) 거제대교-고현-연초-옥포-덕포-대계마을
(거가대교) 부산 가덕도-연초면 송정 인터체인지-옥포-덕포-대계마을
홈페이지 : http://kysarchives.or.kr/ 055-6394-0303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월용리 휴관/ 관람료 무료
김영삼대통령은 장목면 외포리 큰닭섬이고, 나는 연초면 천곡리 상천부락이다. 자연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라 매스컴에 알려지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다. 김영삼대통령은 어린시절 외포소학교에 다니다가 장목소학교로 전학한다. 외포에서 길이 멀어 장목면 두모리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졸업을 하고 통영중학교에 다니다가 부산 경남중학교로 전학을 간다. (미확인)
나의 고향에는 천곡에 사는 친척이 통영중학교 다닐 때 김영삼대통령과 한방에서 하숙을 하였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의 행동거지에 대해 물어보니 답을 하지 않는다. 아마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을 텐데.
그리고 우리문중에는 거제의 삼천재중의 한사람이 있었는데 가난하여 대학에 진학을 하지 못하고 마산에서 건어물상점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머리가 너무 명석하여 그냥 썩기에는 너무 안타가워 칠천도 갑부집에 소개를 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 유학을 간 남편은 공부하느라 부인을 거덜떠 보지도 안았다. 여기에 마음고생을 한 이 여인은 그만 상사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형님은 김영삼대통령이 처음 국회의원을 나올 때 조직부장으로 일을 했으나 일본 유학생활 때 배고품에 시달려 폐병으로 죽고 말았다. 아마 살아 계셨더라면 김영삼 뒤를 이어 거제도 국회의원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김영삼 가족사는 김녕김씨로 임진왜란 시 거제도에 와서 외포리에 터를 잡고 할아버님께서 어업을 하였고 아버님 김홍조옹 께서 물러 받아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김동욱할아버지는 큰 어장을 하면서 외포리에 열열한 크리스찬으로 교회를 짓고 전도를 하여 외포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김대통령은 장목보통소학교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하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전국웅변대회에서 2등을 한 연유로 장택상에게 발탁되어 정치에 발을 들려놓게 된다.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자 그의 정치적 꿈은 현실로 다가왔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거제에서 출마하여 26세의 나이로 전국최연소 의원이 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당시 김영삼씨는 국회의원 피선거권인 만25세가 되지 않아 장목면사무소에서 호적을 한 살 고쳤다는 설도 있다. 어찌하던 우리나라 의정사상 최초의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미확인)
김영삼 대통령에게 어머니가 정신적 지주였다면, 아버지는 정치적 지주였다. 아버지 김홍조 씨는 부인 박부연 씨 사이에 1남5녀를 낳았는데, 이 외아들이 바로 김영삼이다. 아버지 김씨는 1930년대 말 모두 어렵게 살던 시절 정치망 멸치 어장과 어선 10여 척을 소유했던 거제도에서 제일가는 갑부였다.
아버지 김씨는 자손이 유달리 귀했던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김영삼에 대해 온갖 정성과 애정을 쏟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적극적인 보살핌 속에서 자란 김영삼은 어린 시절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당연히 자부심도 강하고 자아의식도 누구보다 강했다. 특히 어머니는 여장부 스타일로 성격도 활달하고 씀씀이도 후해 동네에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어린 김영삼이 바닷가에서 놀고 있으면 먹을거리를 그곳까지 가져다주는가 하면, 아들 김영삼이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온갖 음식을 장만해 하루 만에 다녀올 정도로 아들 사랑이 각별했다. 아들이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보다 오히려 어머니의 적극적인 후원과 인기 덕분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가 뒤늦게 아들 후원에 발 벗고 나선 것도 어머니의 설득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아버지 김홍조 옹은 명절 때마다 거제도에서 잡은 싱싱한 멸치를 몽땅 서울로 올려 보내 ‘YS멸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고, 크고 작은 선거 때마다 재정적 지원을 해줌으로써 아들이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효심이 깊었던 김영삼 대통령이 1992년 대선에 승리한 뒤 거제도로 내려가 당선증을 드리며 큰절을 올리던 사진이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재임 중 매일 새벽 아버지에게 안부전화를 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는가 하면 생일 때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꽃다발을 보내고, 어머니가 묻힌 거제도 대계마을 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에 아버지의 가묘와 비석까지 마련해 두었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아버지 김홍조 옹은 아들이 대통령으로 재임 중 주변의 권유에도 단 한 번도 청와대를 방문하지 않을 만큼 처신에도 만전을 기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토록 따르던 어머니 박부연 씨가 1960년 남파된 무장공비에게 목숨을 잃어 아버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 시절 김 대통령이 양복 안주머니 지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용돈을 빼주어 ‘통 큰 정치인’으로 알려지고, 주변에 늘 사람이 모여들었던 이면에도 어찌 보면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힘’이 있었다. 덕분에 정치세력을 늘리고 마침내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생가는 오래전에 개관되어 있었지만 기념관은 지난6월18일 개관하였다. 개관식에는 김영삼전대통령내외분, 이명박대통령, 그리고 한나라당 중요당간부와 구 상도동을 이끌던 거두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그런데 바로 나의 옆 좌석에 배우 신성일시가 있었다. 아무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인생무상이라 할까? 1970년대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였으나 세월의 흐름에는 당해낼 자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묘한 인연이라고 할까. 식을 마치고 외포부두 멸치회 먹으려 갔더니 바로 옆 좌석에 있지 않는가. 그냥 모른 채하기가 멋 적어 인사를 했다. 같이 동석한 교장들도 인사를 나누었다.
한 달포지나 11일 기록전시관을 찾았다.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상당히 많았다. 평일에는 500여명 주말에는 1000~2000여명이 방문한다고 하니 괘 많은 인원이다.
거제의 인물이라고 하면 청마유치환선생과 김영삼전대통령이다. 그런데 거제인들은 김영삼전대통령에 대하여 좋지 못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평생를 통한 민주화운동과 대통령시절 이룩한 업적은 어디가고, 재임 말년에 터진 IMF구제금육과 김현철 홍인길 친인척 권력형비리로 모두 파뭏이고 말았다.
이곳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기록전시관은 단순히 볼거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시대의 위인이자 민주화의 선봉에선 장본인으로 점점 퇴색해져가는 사람과 시대의 흐름속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선사하는 교육적인 곳이라 생각된다. 큰 꿈을 가지고 사는 어린아이, 비록 꿈을 다시 꾸기엔 늦었지만 역사적 변화해 버린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 위인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이곳을 들러 가슴속에 무언가 하나라도 얻어가길 바란다.
2010.6.18 개관식 때 김영삼 대통령 모습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 입구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 (큰닭섬)
김대통령생가 사랑채
김대통령 안채--서울에서 온 관광객이 열심히 방명록을 기록하고 잇다.
40대의 김대통령 모습--정말 저렇게 미남일까? 실제 그 당시 실물을 가까이서 보았는데 정말 잘생겼더군!!!
소학교 시절 교과서인데 현재와는 많이 다르군
부산서온 관광객의 멋진모습
나는 미래 여자 대통령이 될래요!!!
세월의 부대김속에서, 아! 옛날이여---. 배용준보다 인기가 좋았던 배우 신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