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중심부는 공 회장의 저택이 거창하게 자리잡았다. 그리고 무대 변두리 부분 여기저기에 시장터, 합숙소, 테크노 찜질방, 고궁의 노천 휴게소 등을 설정하여 사용한다. 이 작품은 한 저택을 지키려는 구성원과 이것을 파괴하려는 집단간의 허위와 모순 그리고 사상의 혼란과 갈등을 지금의 우리 모습과 비유하여 꾸민 것이다.
제 1 장
유행가 <번지 없는 주막>의 반주 음악이 신나게 연주되는 중에 막이 오르면 도심의 시장터 입구.
맷돌과 멍석이 이동식 좌판을 가운데 두고 흥겹게 춤을 추며 손님을 부르고 있다.
단속반이 오면 신속히 도주할 수 있는 조립식 간이 좌판대 위에는 소위 가짜 밀수품인 선글라스, 라이터, 만년필, 전자시계 등이 진열돼 있다.
맷돌과 멍석 두 사람의 춤은 신명난 디스코풍의 용트림이다.
<번지 없는 주막>의 가사를 가라오케 식으로 따라 부르는 그들 노래 끝나자 파장의 스산함이 스며든다.
맷돌 : 애새깨가 어째서 씨알머리 소갈머리가 없냐? 공 회장이란 놈이 부당하게 금괴 80개를 뚱치고 있다는디, 넌 억장이 안 무너지냐? 뱃속에서 거위가 춤을 춰도 심지는 살아 있어야제.
멍석 : 정작 작심한 것이여 시방?
맷돌 : 관우 형님 헤어지고 나서 부화가 치밀어올라서 치가 떨렸어.
멍석 : 먹구 살기 위한 핑계여 전부.
맷돌 : (단호히) 아녀. 난 할 테니까 봐, 하고 말 것이여!
멍석 : (눈물이 핑, 콧노래를 한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나리는 이 밤도 구슬프다 능수버들….
맷돌 : 이대로 살 수는 없는 것이제!
멍석 : 만약 일이 성사되면 말여….
맷돌 : 왜 회가 동하냐?
멍석 :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가야제.
맷돌 : 금괴가 확인되면 조직에서 공 회장과 타협을 하겠다는 거 아녀?
멍석 : 그게 아니라 우리 몫!
맷돌 : 설마 하니 관우 형님이 입 닦고 안면 바꾸것냐?
멍석 : 그래두 뭔가 각서 같은 거라두 받았어야제.
맷돌 : 관우 형님 그런 사람 아니다. 큰 뜻이 있는 사람이여.
멍석 : 돈 백 정도는 주것제?
맷돌 : 그 이하는 아닐 것이다. 아따, 괜스리 운동회 전날 밤 맹이루 조바심 쳐지네.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관우.
관우 : 그거야 축제니까 당연하지.
맷돌 : 형님!?
관우 : 작전 명령이 드디어 떨어졌어. 디데이는 내일 저녁 자정.
멍석 : 아따, 인천 상륙하는 것 같네.
관우 : 때마침 공 회장의 저택 관할 지역 변전소에 변압기 교체 공사가 있어. 자정에서부터 30분간 관할 지역 전체가 정전이 된다는 공고가 나왔다.
맷돌 : 장비는요 형님?
관우 : 장비 형님은 안 오신다.
멍석 : 아따, 장비 형님 말고요, 장비는요?
관우 : 밧줄과 플래시, 소형 카메라, 환기통 제거용 리빠와 뺀찌, 그리고 햄버거 두 개.
멍석 : 간식까지 먹구 합니까요?
맷돌 : 일종의 야식이겠지.
관우 : 그게 아니라 공 회장집 정원에는 도사견 두 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어. 햄버거 속에 다량의 수면제가 들어 있다.
멍석 : 그러니께 햄버거는 도사견의 야식이구먼.
맷돌 : 제기랄, 야근은 우리가 하는데, 야식은 왜 개새끼들이 먹소?
멍석 : 야, 그러니까 개팔자지.
관우 : 금괴 확인과 사진 촬영이 끝나면 새벽 네 시에 퇴각한다. 밖에는 용달차로 위장한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을 거야.
멍석 : 가족사항은?
관우 : 공 회장의 부부와, 음악를 전공하는 외동딸 주리, 2층 방에는 공 회장의 팔순 노모가 기거하는데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이 노파는 간암에 걸려 있어 밤잠이 없다.
맷돌 : 그 외 남자는요 형님?
관우 : 운전기사와 관리인은 저녁 아홉 시면 각기 퇴근한다.
멍석 : 만약에 말입니다….
관우 : 실패를 가정할 수가 있다. 그때는 단순 절도범으로 가장, 일체 묵비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맷돌 : 깜방에 가게 되면요 형님?
관우 : 집행유예가 될 수 있게 조직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것이며, 실형이 떨어진다 해도 조직에서 보석금을 마련해 두었으니, 최저 3개월만 참으면 돼. 석방 후에는 조직에서 열사 칭호를 하사할 꺼다. 공 회장의 저택 내부 구조는 소상하게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최단거리를 이용하여 시간을 단축시켜야 해. 환기통까지는 물받이 홈통을 타고 오른다. 알지?
맷돌 : 임무 수행이 끝나면 새벽 네 시 전에 나와도 됩니까?
관우 : 공 회장의 딸 주리가 졸업발표회 음악 연습을 새벽 네 시까지 1층 거실에서 한다. 음악 연습이 끝나고 실내가 소등되면 나와.
멍석 : 이를테면 예술적인 작전이구먼.
관우 : 이번 작전의 명칭은 '개나발'이다. 임무 수행이 완료되면 즉각 암호로 내게 전화할 것 "우린 개나발을 불었다."
멍석 : 우린 개나발을 불었다?
관우 : (봉투를 내놓으며) 이건 착수금. 우선 아침에 기상과 동시에 사우나에 가서 땀을 빼도록!
맷돌 : 체중 감량입니까?
관우 : 가느다란 홈통 타고 환기통까지 오르는 게 그리 용이치가 않어. 체중 조절을 잘 해야 돼!
멍석 : 타이틀 매치하는 거 같네 그려.
관우 : (손을 내밀며) 자, 모두 행운을 빈다. 조직에서는 그대들의 위대한 거사를 주시할 것이네!
관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맷돌 : 내가 뭐라구 그랬는가? 관우 형님은 절대 빈틈이 없는 사람이여.
멍석 : 결국 말려들었구먼.
맷돌 : 해낼 수 있어, 아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구!
멍석 : 우린 개나발을 불었다?
맷돌 : 암, 우린 개나발을 부러부렀다!
야릇한 음악.
암전.
제 4 장
공 회장의 저택.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중에 주리가 우아하게 거실에서 율동을 하고 있다.
검은색 작업복을 입은 맷돌과 멍석이 담장 밖에 나타난다.
두 사람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주리의 동작이 무르익어갈 즈음 암흑이 된다.
맷돌과 멍석,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와 환기통을 가로지르는 홈통 위에 밧줄을 걸어 한 사람씩 기어오른다.
주리 : 도대체 신경질나게 이게 뭐야….
보화 : (촛불을 켜들고 안방에서 나온다) 도대체 무슨 일이니?
주리 : 정전인가봐요!
보화 : 예고도 없이 정전은 또 뭐야….
공회장 : (뒤따라 나오며) 합선이 된 게 아냐? 변전소에 전화를 해보지 그래.
보화 : 전화번호를 알아야죠.
공회장 : 전화번호부를 찾아보면 될 게 아냐.
보화 : 깜깜절벽 속에서 전화번호부는 어데 있는지 알아요?
공회장 : 비상 사태를 대비했어야지.
주리 : 이깐 놈의 정전 가지구 왜들 난리법석이세요?
보화 : 저거 말버릇 좀 봐. 어른들 하는 일에 난리법석이라니?
주리 : 진득허니들 계시면 금세 들어올 거예요.
보화 : 금세 들어오긴. 니가 한전 사장이라두 돼?
주리 : 좀 세상을 낙천적으루 살아보세요.
맷돌과 멍석, 환기통을 뜯고 1층과 2층의 공간으로 기어든다.
맷돌 : 머리 조심혀.
멍석 : 어느 쪽이야?
맷돌 : 이쪽. (천장을 손으로 쓰다듬더니) 사방에 큰 못들이 삘기져 나왔다. 머리 숙여.
공회장 : 그야말로 눈뜬장님신세구만.
보화 : 그래서 내가 뭐랬어요? 늘상 비상 전등을 준비해두자고 하지 않았어요?
주리 : 지금 와서 그런 소릴 하믄 뭘 해 엄마.
공회장 : 안살림 임자가 지금 누구 탓을 하고 있어? 옳지, 여기 초 토막이 하나 있구나. (보화의 촛불에서 옮겨 붙인다)
관우 : 이미 한 발이 덫에 걸렸다. 후회하지 말어. 악착같이 맷돌을 살려내야 해. 한밤중에 그 집 식구들을 전부 밖으로 끄집어내는 방법을 강구해보자.
멍석 : 천장에서 귀신 소리를 내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백여우 우는 소릴 낸다든지 드라큐라가 하품하는 소리라든지….
관우 : (뒤통수를 치며) 지금 전설의 고향 얘기할 때가 아냐.
멍석 : 오죽 답답하면 그럽니까?
관우 : 옳지!
멍석 : 묘안이 있습니까?
관우 : 공 회장의 딸을 미끼루 삼는다.
멍석 : 미끼라뇨?
관우 : 공 회장의 딸을 유인해서 온 가족이 외식을 하게 하는 거야. 우린 그 틈에 맷돌을 천장에서 끄집어내면 돼.
멍석 : 고양이 목에다 방울 다는 격이네요?
관우 : 주말이면 두 모녀가 찜질방엘 간다.
공 회장의 저택.
공 회장과 관리인이 정원에서 저택 외곽에 부착되어 있는 환기창을 올려다본다.
공회장 : 아무래도 저것이 께름직해.
관리인 : 애당초 설계 초기부터 사모님의 주문이셨잖습니까?
공회장 : 미관상도 그렇지만 장마때가 되면 습기가 찰 우려가 있다구.
관리인 : 그렇다구 흉측하게 떼어낼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요?
공회장 : 저 환기창을 떼어내고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게 어떨까?
관리인 : 흉터 자국 같을 텐데요?
공회장 : 시멘트 위에 꽃무늬 타일을 붙이는 것도 좋겠어.
관리인 : 그야 어렵지 않지만 사모님 허락이 있어야….
공회장 : 이 집 주인은 나야.
관리인 : 작업량으로 따지면야 힘든 일은 아니죠.
공회장 : 차제에 아주 땜질을 하는 게 좋겠어.
관리인 : 그래두 창틀 사이로 새들이 드나들어 지저귀는 게 운치가 있어서 좋았는데….
공회장 : 그건 운치가 아냐! 집안에 날짐승이 드나드는 건 길조가 아냐. 새들이란 게 사방에다 분비물이나 싸고!
관리인 : 사모님께는 뭐라구 말씀드리죠?
공회장 : 내가 설득할테니 걱정 할 것 없어요.
관리인 : 우선 사다리부터 짜야 되겠군요.
천장 위의 맷돌, 고통 속에서 라이터를 켜 시계를 비춰 본다.
맷돌 : 도대체 멍석이 놈은 왜 안 오는 거여? 혹시……그럴 리가 없어. 그놈은 꼭 돌아올 거야! (웃음) 의심할 걸 의심해야제. 그놈은 영락없이 타잔맹이루 밧줄을 타고 날아들어올 것이여. (누워있는 발치 밑에서 무엇을 발견한다) 이게 뭐여? (비닐봉지 하나를 주워든다) 금덩어리들이 전부 소금으루 변했나? (수많은 비닐봉지들) 아니! 한두 개가 아닌데…. (발치 밑에서 여러 개의 비닐봉지를 끄집어낸다) 이게 뭐시여? (봉지를 뜯어서 혀끝으로 맛을 본다) …?
보화가 거실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다.
주리가 외출에서 돌아온다.
주리 : 입춘이 지났는데 날씨는 동지섣달 같애?
보화 : 문을 꼭꼭 닫구 다녀. 왜 그렇게 뒤끝이 흐리니?
주리 : 나보구 꼬랑지가 열두 개가 달린 여우라고 했잖아.
보화 : 넉살떨지 말어.
주리 : 아빠가 관리인 아저씨하구 정원에서 환기창을 올려다보구 계시던데?
보화 :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환기창을?
주리 : 사다리 어쩌구 하시는 걸 보니까 철겁을 하실 모양이지?
보화 : 뭐야? (베란다로 가서 밖을 내다본다)
맷돌 : 관우 형이 우릴 속였구나. 금괴가 아니구 히로뽕이었어! 왜 우릴 이런 고약한 함정 속에 집어넣은 것일까?
주리 : 엄마는 왜 환기창 얘기만 하면 질겁을 해?
보화 : 질겁은 누가 질겁을 해?
주리 : 환기창 설계는 엄마의 간곡한 주장이었다믄서?
보화 : 통풍이 잘 돼야 집도 오래 건사하는 게야.
주리 : 단순히 이유가 그것뿐이야?
보화 : 무슨 얘기야?
주리 : 언제나 아빠가 일은 벌이시구 마무리는 엄마가 하니까 말야.
보화 : 뒤끝 흐린 건 니 아빠와 네가 똑같다.
주리 : 그럼, 환기창이 엄마의 완벽한 뒷마무리야?
보화 : 니 아빤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트집을 잡아 뒤엎으려는 심뽀가 있어. 어둡다, 불좀 켜라.
주리가 벽 스위치를 올린다.
실내가 밝아진다.
공 회장이 들어온다.
공회장 : 관리인도 내 의견에 흔쾌히 찬성을 했어.
보화 : 그 위인이 건축에 대해서 뭘 알아요?
공회장 : 하찮은 일에 고집 부리지 말아요.
보화 : 시멘트가 아니라 철판으로 용접을 해보세요. 내 기어이 떼어내고 말 테니.
공회장 : 심통 부릴 걸 부려!
보화 : 심통이 아녜요!
주리 : 또 환기창 타이틀 매치로구먼.
멍석이 살며시 어둠을 타고 기어들어온다.
홈통을 타고 환기창을 향해 오른다.
공회장 : 도대체 천장 구석을 통풍시켜야 될 게 뭐 있어?
보화 : 그러지 않아도 2층 다락방 노인네 잠자리가 습해서 날 흐리면 예까지 냄새가 진동하는데.
주리 : (건넛방으로 들어가며) 엄마, 내일 찜질방 가는 거 잊지 마세요.
공회장 : 여보, 내 말을 잘 새겨들어. 어른께서 새벽에 전화를 하셨어.
보화 : 어른께서요?
공회장 : 위기 상황이라는 게야.
보화 : 그럼 물러나신다는 얘기예요?
공회장 : 출근길에 낌새가 이상해서 차 안에서 백미러를 봤더니 누군가 줄기차게 미행하고 있었어.
보화 : 누구예요?
공회장 : 노조의 간부들 같았어.
보화 : 만약 어른께서 물러나시면 어떻게 되는 거죠?
공회장 : 파업은 결국 폐업으로까지 몰고 가겠지.
보화 : 몸조심하셔야겠어요.
공회장 : 어른께서는 자기 몫을 홍콩 구좌에 예치시키라는 게야.
보화 : 재단의 운영금은요?
공회장 : 증권으로 분산시키라고 하시는군.
보화 : 고문 변호사와 상의하세요!
공회장 : 누군가 법정에서 위증하는 놈이 나올 거야.
보화 : 그래서 환기창을 땜질하시려는 거예요?
공회장 : 여보!
보화 : 알고 계셨어요?
공회장 : ….
멍석 : (천장의 어두운 공간을 더듬어 들어간다) 형….
맷돌 : 여기다. 자식…. 돌아올지 알았어.
멍석 : 관우 형을 만났어.
맷돌 : 뭐라디?
멍석 : 밖에서 구출 작전을 펴겠대.
맷돌 : 틀렸어. 하체가 완전히 마비가 됐어.
멍석 : 여기 항생제하구……소독제……그리구 압박붕대……진통제….
맷돌 : 목이 타-.
멍석 : 여기 콜라.
맷돌 : 우선 치료를 해줘.
멍석 : (상처를 살핀다) 살이 썩는 냄새가 나. 약사 얘기룬 출혈이 멈추면 상처에 고름이 생긴대. 항생제는 식후에 두 알씩, 그리구 소독은 수시로 하래. (쪽지를 펴보며) 참, 그리구 쇳독이 전신에 퍼질 수가 있으니까 곧장 종합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야 된다는디….
맷돌 : (쓴웃음) 종합병원?
멍석 : 금괴는 찾았는가?
맷돌 : 관우 형이 우릴 속였다.
멍석 : 무슨 얘기야.
맷돌 : 금괴가 아니구 (봉지를 보인다) 이거시여.
멍석 : 이게 뭐지? 설탕가루여?
맷돌 : 히로뽕이다. 양으로 봐서 수백억대여!
멍석 : 그럼, 우린 팔자 고친 거 아녀!
맷돌 : 쉿! 조용히 해. 팔자가 아니구 함정에 빠진 거야.
멍석 : 함정이라니?
맷돌 : 여긴 마약 밀매꾼의 아지트여.
멍석 : 여기가 밀매꾼의 창고란 말이제?
맷돌 : (통증을 느끼며) 아- 창자가 뒤틀려-.
멍석 : 경찰에 신고하면 될 것이 아닌가?
맷돌 : 허튼소리 하지 말어. 우리가 가택 침입죄에 걸려든다.
멍석 : 이대로 죽을 것이여?
맷돌 : 여길 빠져나가야 돼.
멍석 : 옴짝두 못하면서?
맷돌 : 제에미!
멍석 : (갑자기 웃음) ….
맷돌 : 내게 꿈이 있다면 관우 형님처럼 되는 것이었다. 뱃심이 크고 의리가 있고……재담과 익살이 철철 넘쳐흐르는 관우 형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깜방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는 관우 형, 그 사람은 예사 좀도둑이 아니었으니께. 언제나 머릿속에 궁리가 가득한 사람이었어. 이를테면 탁월한 사상가였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최후진술을 하는디, 아주 낭랑한 목소리로 판사님들 상판을 올려다보며 하는 말이, 언젠가는 민중이 주인이 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었어. 방청석에선 박수가 터져나왔제! 간수놈들이 쩔쩔맸으니께. 우리가 해방될 때까지 너나없이 피를 흘려야 된다는 거였어. 헌디 관우 형님 뵐 면목도 없이 이게 무슨 조잡스런 꼴이랴-!
멍석 : 아따, 개꿈 한 번 푸짐하게 가졌네.
맷돌 : 금괴가 있다고 해야 우리들이 회가 동할 줄 뻔히 들여다본 거여-. 언제나 통빡이 그런 사람이니께.
멍석 : 관우 형 말씀이 공 회장 딸을 미끼루 삼것디야.
맷돌 : 이 집 딸을?
음산한 음악.
암전.
제 6 장
테크노 찜질방
간이 휴식 의자에 찜질방 차림의 보화와 주리가 나란히 누워서 쥬스를 마시고 있다.
보화 : 가슴이 많이 부풀어올랐다.
주리 : 징그럽게 무슨 소리야 엄마?
보화 : 가슴팍은 남산만한 게……이젠 어리광을 부리지 말라는 얘기야.
주리 : 내가 언제 어리광부렸어?
보화 : 육신만 찐빵처럼 부풀어오르면 뭘 해. 소갈머리가 여물어야지!
주리 : 내가 어때서?
보화 : 언제나 네 편한 것만 생각하잖니.
주리 : 엄마, 여자의 가슴 크기는 지능지수와 반비례한다면서?
보화 : 너처럼?
주리 : 아니, 엄마처럼!
보화 : 한때는 팔등신이란 소릴 듣구 장안을 활보하구 다녔어.
주리 : 엄마는 모든 게 일류여야만 직성이 풀렸지? 학교, 미모, 치장, 지식….
보화 : 니 아빠 만나기 전엔 이류나 삼류는 쳐다보지두 않았다.
주리 : 그런데 왜 삼류 딸을 낳았수?
보화 : 일류와 이류가 만났으니 응당 삼류가 나올밖에.
주리 : 아빠를 정말 이류라고 생각해?
보화 : 아빠는 돈 싸짊어지고 미국 가서 따온 박사였다.
주리 : 엄마의 행복은 뭐야, 그럼?
보화 : 남한테 굽신대지 않는 거.
주리 : 뒤집어 말하면 남들 머리 위에 올라타고 군림하고 뽐내는 거지?
보화 : 인생을 손해보며 살 필요는 없다. 내가 못 이기면 남이 갖는 거야.
주리 : 그래서 뺏어오는 거야?
보화 : 세상은 능력 나름이야…. 뺏는 게 아니라 정당하게 소유하는 거지.
주리 : 아니구 현기증이야!
보화 : 단 둘이 있으니까 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마.
주리 : 뭘?
보화 : 아빠의 자리가 위태롭다. 지금 세상이 팥죽 솥이 되어가고 있어.
주리 : 그래서?
보화 : 무슨 일이 있어두, 아빠와 엄마가 옳다고 믿어야 한다.
주리 : 왜 목소리가 떨려, 엄마?
보화 : 엄마는 세상이 뒤집힐 때를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주리 : 대비라는 게 뭐야?
보화 : 우리가 수렁 속으로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주리 : 돈?
보화 : 처참한 꼴을 볼 때가 올지도 모른다. 젖가슴만 뽐내지 말고, 그때를 대비해야 돼. (일어난다) 휴게실에 가서 전화를 하고 오겠다.
보화가 사라진다.
조그만 상을 헝겊에 싸들고 관우가 찜질방 차림으로 들어온다.
저만치에는 어설프게 찜질방 차림의 흰옷을 입은 멍석이 관우와 눈치 신호를 보내며 어정거린다.
관우 : 아가씨, 쌀점 한번 안 보겠소?
주리 : 쌀점이요?
관우 : 쉬-! 관리인한테 들키면 쫓겨나.
주리 : 찜질방에서 쌀점을 치세요?
관우 : 좋게 얘기해서 운명 철학이지. (헝겊을 젖힌다. 조그만 상 안에 쌀이 있다) 일금 천 원만 내면 이 햇쌀이란 것이 아가씨의 운수를 쪽집게같이 찝어낸다 이 말씀이오.
주리 : 그것 참 신기하네요…. (작은 지갑에서 천 원을 꺼내준다)
관우 : 자- 신명스런 햇쌀아. 예수님의 지혜와 석가여래의 자비와 공자 맹자의 문장과 소크라테스의 분별력으로 이 아가씨의 운명을 이사야처럼 예언하거라- 라우- 라우- 라우…! (십자매가 작은 쪽지를 물어서 던진다) 수고했다, 햇쌀아. 너에게는 시커먼 누룽지나 산산히 퍼지는 죽신세를 면하게 하고 쫀득쫀득한 찹쌀밥을 만들어주리라.
주리 : 내 운명이 어때요, 아저씨?
관우 : (쪽지를 펴보며) 아- 청계천 시궁창에 쌍무지개가 떴구나-!
주리 : 쌍무지개라뇨?
관우 : 아가씨 이름은 공주리-.
주리 : 어머 징그러워. 어떻게 내 이름을 맞히죠?
관우 : 이 쌀이 보통 솜털 뽑는 쪽집게가 아니라, 처녀들 겨드랑이에 꼬부랑털 뽑는 다이아몬드 쪽집게요. 인삼물 먹여 키웠거든.
주리 : 그거야말로 신통방통하네.
관우 : (다시 쪽지 보며) 아하- 해 지기 전에 의인을 만날 운세로다- 다우- 다우- 다우- 다우!
주리 : 어머, 그래요?
관우 : 의인은 언제나 비단옷이 아니라 거적을 쓰고 오나니- 의인의 용모 자태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 라우, 라우, 라우!
주리 : (발끈 화를 내며) 아저씨, 여기 있는 내 졸업 발표회 팸플릿 봤죠?
관우 : 눈에 띄는데 왜 안 봐? (일어서서 가며) 자, 쌀점들 보세요- 불확실성 시대의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세요.
주리 : 순 사기꾼이야-.
멍석 : (어정쩡하게 다가오면서) 아가씨,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주리 : 뭐예요?
멍석 : 햇쌀이라구 하는 것은 원래가
주리 : 뭐 이 따위 사람이 다 있어!?
멍석 : 옆에서 보니까 생김새와는 달리 너무 쉽게 운명을 희롱하고 계시더라 이겁니다.
주리 : 재수 없어요. 비키세요!
멍석 : 만약에 말입니다. 지금 어린애가 저 물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 아가씨는 어쩌시겠습니까?
주리 : 뭐라구요?
멍석 : 아가씨 곁에서 사람이 죽어간다면 말입니다….
주리 : 그 따위 상식적인 가정에는 상식적인 답변밖에 더 있어요?
멍석 : 그게 뭡니까?
주리 :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죠. 물론.
멍석 :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을 방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리 : 누가요?
멍석 : 바로 아가씨!
주리 : 뭐 하는 사람이예요?
멍석 : 배꼽이 배에 붙은 겁니까? 아니면 배에 배꼽이 붙은 겁니까?
주리 : 정말 별꼴이야….
멍석 : 가장 쉬운 상식 문제에서 맥을 못 추네.
주리 : 그야 배꼽은……(까르르 웃는다)
주리 : (감정을 추스리며) 남들한테 오해 받어요. 가세요!
멍석 : 이게 아가씨 옷장 열쇠죠?
주리 : 어머, 내 열쇠!?
멍석 : 아무리 잘난 체해두 누구에게나 허점은 있는 겁니다. 옷장 밑에 떨어져 있더군요. (준다) 배꼽 내놓고 집에 가지 않으려거든 잘 간수해요.
주리 : 그래. 쌀점이 맞았어. 열쇠를 찾아준 의인….
멍석 : 지구는 절대 평범하게 태양을 맴돌아가지 않습니다.
주리 : 무슨 뜻이에요?
멍석 : 하루 종일 아가씨 뒤를 미행했습니다.
주리 : 어머나! 왜요?
멍석 : 피차 옷을 벗고 배꼽을 내놓고 있으니 진실을 얘기하죠.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주리 : 제 도움을요?
멍석 : 신성한 햇쌀에 걸고 맹세합니다. 절대 불량배나 납치범은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주리 : ……!?
요란한 천둥 소리.
2층 다락방에 희미한 불빛이 살아난다.
지축을 흔드는 천둥 소리에 노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공에 손을 뻗쳐 경련을 일으킨다.
노파 : 애들아! 아무도 없냐? 아무도 없어-? (침묵과 천둥) 바리공주님이 들어오시것대- 어서 문을 열어- 아무도 없냐?
공 회장이 아래층으로부터 올라와 나타난다.
공회장 : 어머니-!?
노파 : 바리공주님이 방바닥을 두들기셔-.
공회장 : 천둥 소리예요, 어머니!
노파 : 아니다. 아냐- 분명히 내가 누워 있는 밑창에서 신음소리가 들렸어.
공회장 : 창문을 열어놓으셔서 천둥 소리가 더 크게 들린 거예요.
노파 : 아니라니까- 누군가 숨넘어가는 소리가 예가지 들렸어- 그건 바리공주님이 날 데려가기 위해 이 집에 들어오신 게야-.
공회장 : 어디서 소리가 들렸다구요?
노파 : 바루 이 밑창이야- 너희들이 사는 1층과 여기 2층 사이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어-.
공회장 : 꿈을 꾸신 거예요, 어머니!
노파 : 꿈이 아니라니까-!
공회장 : 공연한 걱정 하지 마시고 누워 계세요.
아래층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노파 : 그것 봐라, 누가 찾아오지 않았니?
공회장 : 손님이 오시기루 약속이 되어 있어요.
노파 : 어서 내려가봐.
공회장 : (내려가며) 천둥 소리에 너무 놀라지 마세요.
노파 : (혼자 소리로) 천둥 소리허구 사람 소리도 구별 못할 줄 알어?
공 회장, 아래층 거실로 내려와서 현관문을 연다.
관리인 : 손님이 오셨는데요, 회장님. (명함을 내민다)
공회장 : (명함을 받으며) 혼잔가 아니면 동행이 있던가?
관리인 : 한 분이십니다.
공회장 : 들어오시라구 그래요.
관리인 : 알겠습니다…. (나간다)
공회장, 잠시 불안하게 머뭇거리다가 턴테이블의 스위치를 누른다.
감미로운 피아노 협주곡이 흐른다.
한 차례의 천둥, 그리고 나타나는 관우.
관우 : 실례하겠습니다.
공회장 : 어서 오시오.
관우 : 대단한 천둥소리예요. 억수같이 장대비가 쏟아질 것 같습니다.
공회장 : 커피를 한잔 드릴까요?
관우 : 번거로우실 텐데…. 그냥 술이나 있으믄 한잔….
공회장 : 아참, 날씨도 우중충한데 차라리 그게 좋겠구먼.
한쪽 진열장에서 위스키를 꺼내 두 개의 잔에 따른다.
관우 : (비아냥거리듯) 아주 아늑합니다. 아주 따뜻하고 포근합니다.
공회장 : 음악은 어떠신지?
관우 : (그때서야) 아- 천둥소리 때문에 못 듣고 있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이군요.
공회장 : 카라얀의 지휘죠. 좋아합니까?
관우 : 특히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더욱 좋아합니다.
공회장 : 하- 그래요? (잔을 권하며) 자, 드시오.
관우 : (받아서 냄새를 맡으며) 카- 올드파로군요.
공회장 : 청각두, 후각두 아주 예민하시구먼?
관우 : 눈치, 코치, 귀치루 세상을 살아갑니다.
공회장 : 명함에 보니까 조직에 계시다구요?
관우 : 거절하지 않고 면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회장 : 나는 언제나 대화와 타협을 좋아해요.
관우 : 저희를 단순한 폭도들이나 혁명 집단으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공회장 : 허지만, 우리 공장에도 위장 취업자를 파견하고 계시죠?
관우 : 그건 오로지 천대받는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서입니다.
공회장 : 오늘 방문도 그분의 지령인가요?
관우 : 저건, 반 고흐의 그림이군요?
공회장 : 복사판이죠.
관우 : 완벽한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공회장 : 이상주의자라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관우 : 보리밭과 까마귀는 아주 대조적이죠. 풍요 속에 절망이라고 할까?
공회장 : 해석이 탁월하시구먼.
관우 : 실내 향기가 아주 좋습니다. 재스민인가요? 아니면, 라일락?
공회장 : 용건을 말씀하시지.
관우 : 대화와 타협입니다.
공회장 : 무슨 뜻이죠?
관우 : 지난 달 통계로는 부당 해고자가 1천2백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공회장 : 불법 노조 가담자들입니다. 과격분자들이란 말이요. 조립 기계 속에 톱밥을 뿌렸어요.
관우 : 재고용을 부탁드립니다!
공회장 : 잘 아시죠? 세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관우 : 전원 복직을 원합니다!
공회장 : 그것만은 안 됩니다!
관우 : 부인께서는 소유 주식의 일부를 매각하셨습니다.
공회장 : 주식을 고르게 분배하자는 뜻이었어요.
관우 : 공장 폐쇄를 이미 계획하시고 부실 주식을 현금으로 바꾼 겁니다.
공회장 : 주식을 공개했습니다. 현금은 없습니다.
관우 : 일종의 위장전술이죠.
공회장 : 위장이라뇨?
관우 :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보인다) ….
공회장 : 이게 뭡니까?
관우 : 히로뽕의 국제 시세는 엄청나게 뛰고 있습니다. 환율이나 금리 이상이죠.
공회장 : …!?
관우 : 이런 경제 불황기엔 가장 시리가 있는 투자죠.
공회장 : 그래서요?
관우 : 이 사진은 아직 조직에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공회장 : 뭘 요구하시오?
관우 : 조직의 운영 자금입니다.
공회장 : 술을 한 잔 더 하겠소?
관우 : 됐습니다. (술잔을 내려놓는다) 루빈스타인은 알레그로에서 특히 연주가 뛰어납니다.
맷돌 : (손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며) 물- 물- 물-! 멍석이- 이 새끼- 어떻게 된 거야? 관우 형- 살고 싶어- 살고 싶다니까-.
비상구가 살며시 열리고 2층으로부터 공 회장이 나타난다.
맷돌 : 멍석이냐-? 왔어? 대답을 해-!
공 회장, 플래시를 사방으로 비추다가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맷돌을 발견한다.
맷돌 : 누구야-?
공회장 : (어둠 속에서 뚫어지게 허우적거리는 맷돌을 바라본다) …!?
맷돌 : 어서 와 날 구해줘, 멍석아-.
공회장 : ……환기창을 막았어야 했어-.
불안한 음악.
암전.
제 7 장
고궁의 노천 휴게소. 주리가 앉아 있고, 멍석이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
멍석 : (익살스럽게 시늉을 해가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공룡 아시죠? 무게가 자그마치 10톤이나 됐다는 공룡입니다.
주리 : (까르르 웃는다) ……공룡…?
멍석 : 영화나 만화에서 보셨지 않습니까? 이놈이 왜 앞발을 들고 걸어다녔는지 아십니까?
주리 : 모르겠는데요.
멍석 : 순전히 폼입니다. 그래서 공룡이란 놈들 전부 디스크에 걸려서 이 지구상에서 멸종을 했다 이거 아닙니까. 제 놈의 체중도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폼만 잡다가 멸종을 했다 이겁니다. 폼과 멸종, 이거 그냥 우스개 얘기가 아닙니다.
주리 : (까르르 웃는다)
멍석 : 다음은 백 미터 결승전에서 왜 벤 존슨이 칼 루이스를 누르고 88서울올림픽에서 우승했는지 아십니까?
주리 : 그야, 약물 복용 덕분이겠죠. 그래서 금메달 박탈당했잖아요.
멍석 : 땡! 틀렸습니다. 벤 존슨 그 친구 약물 검사에 안 걸리려고 냉수를 너무 마신 겁니다. 오줌이 마려워서 빨리 뛴 거예요. 빨리 끝내고 화장실 갈려구-. 그래서 칼 루이스보다 0.2초 빨랐던 거예요. 세상에 0.2초 빨리 뛸려구 오줌 참는 놈이 어디 있습니까?
주리 : 참 재미있어요.
멍석 : 그런데두 세상에는 오줌 참고 뛰는 놈들 너무 많습니다.
주리 : 자- 이제 얘기해보세요. 내게 부탁하고 싶다는걸.
멍석 :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테레비에서두 시엠이 끝나야 본 드라마가 시작되지 않습니까? 잘 알 만한 아가씨가….
주리 : 시엠이 너무 길면 채널을 돌리거든요.
멍석 : 조금 전에 제 직업을 물으셨죠?
주리 : 그래요.
멍석 : (노래를 시작한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나리는 이 밤도 구슬프다-.
주리 : 가수예요?
멍석 : (변사처럼) 파상풍에 걸려서 죽어가는 친구가 있습니다. 세상살이 한번 뻐근하게 살아보겠다고 남의 집 천장 속에 기어들어가다 대못에 옆구리가 찔려, 쇳독이 온몸에 퍼져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주리 : (까르르 웃는다) 못에 찔려요?
멍석 : 벤 존슨이 칼 루이스를 제압한 0.2초의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을 움켜쥐고 신음하는 가엾은 친구가 있습니다.
주리 : 그게 누구예요?
멍석 : (갑자기) 누굴 사랑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리 : 아뇨!
멍석 : 누굴 미워해본 적이 있습니까?
주리 : 아뇨!
멍석 : 누굴 믿어본 적이 있습니까?
주리 : 아무도 안 믿어요!
멍석 : 누굴 의심해본 적이 있습니까?
주리 :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요.
멍석 :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주리 씨 집 천장에서 사람이 죽어간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주리 : 그런 기적은 절대 내게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멍석 : 졸업 후에 미국에 유학 가시는 건 믿습니까?
주리 : 그럼요!
멍석 : 아까 찜질방에서 찹쌀의 기적을 보셨습니다.
주리 : 그건 기적이 아니라 사기놀음이었어요.
멍석 : (크게) 맞아요! 사기놀음입니다. 사기놀음!
주리 : 소리가 너무 커요!
멍석 : (작게) 오늘 저녁 주리 씨 집을 비워줄 수 있겠습니까?
주리 : 왜요?
멍석 : 그 친구를 끄집어내야 합니다. 오늘을 넘기면 죽어요.
주리 : (까르르 웃는다) 정말 얘기 솜씨가 탁월해요. 어쩌면 거짓말을 사실처럼 능숙하게 표현하세요? 아마 누가 들어도 착각하겠어요. 혹시 방송국에서 코미디 대본 쓰시는 거 아녜요?
멍석 : 내 말이 거짓말로 들립니까?
주리 : 아뇨. 영락없는 사실처럼 들려요. 정말 놀랬어요.
멍석 : 주리 씨! 그러면 우리가 이 드라마를 완성시킵시다.
주리 : 어떻게요?
멍석 : 오늘 밤 온 식구를 모시고 외식을 하십시오. 단 두 시간이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이 벤 존슨의 기록보다 빠르게 이루어질 겁니다.
주리 : 그럼, 아저씬 어떡하시겠어요?
멍석 : 저는 홈통을 타고 올라가 환기창을 열고 천장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
주리 : (박수를 치며) 정말 멋져요! 아주 근사해요! 그래서 드라마는 어떻게 끝나게 되죠?
멍석 : 우린 개나발을 불었다!
주리 : 우린 개나발을 불었다?
멍석 : 그것이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입니다.
주리 : 어쩜 끝 대사가 그렇게 근사할까?
멍석 : 약속해주시겠습니까?
주리 : 굳이 번거롭게 외출할 거 없어요.
멍석 : 환자를 끄집어내서 응급실로 보내야 합니다!
주리 : 아녜요. 그럼, 드라마의 클라이맥스가 맥이 풀려요. 마지막 장면을 내가 연출하겠어요!
멍석 : 어떻게 하시겠소?
주리 : 마침 오늘 저녁에 우리 집 거실에서 내 졸업 작품의 시연회가 있는 날이에요. 귀한 손님들이 오실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내 율동과 음악 소리에 정신을 팔 거예요. 그 순간을 이용하세요. 얼마나 예술적인 클라이맥스예요. (손을 내민다) 오늘밤 정식으로 저희 집에 초대하겠어요. (까르르 웃는다)
멍석 : 감사합니다. (손을 잡는다) 따스하네요.
주리 : 나는 오늘 전설이나 우화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 예술관에 지대한 영향을 주셨어요. 나의 예술 세계로 기꺼이 들어오세요.
멍석 : 무용 공연 시간은?
주리 : 앙코르가 없으면 40분이 소요될 거예요….
공 회장 저택의 거실이 밝아진다.
공 회장과 보화.
보화 : 오늘 밤에 주리 졸업 공연 시연회가 있는 날이에요. 당신도 말끔하게 입으세요. 귀빈들이 오시니까요.
공회장 : 조직에서 사람이 왔었어.
보화 : 이것도 하나의 사교예요. 빈틈없이 진행을 해야 돼요.
공회장 : (크게) 조직에서 사람이 왔었다니까!
보화 : (정지 동작) 조직에서!?
공회장 : (사진을 내민다) 이게 당신 짓이었지?
보화 : 그 사람들이 냄새를 맡았군요.
공회장 : 협박을 당했어.
보화 : 타협을 하셨어요?
공회장 : 반을 떼어주기루 했어.
보화 : 잘 하셨어요. 물건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처움부터 환기창을 냈던 거예요.
공회장 : 그 환기창으로 들어왔어! 물건을 딴 곳으로 옮겼소.
보화 : 어디에요?
공회장 : 어른댁 아지트!
보화 : 잘 하셨어요.
공회장 : 이젠 환기창을 막아도 되겠지?
보화 : (만족스럽게) 당신 뜻대로 하세요. 아주 단단히 덮어버리세요!
공회장 : 아주 영구히?
보화 : 그래요. 영구히! (공 회장에게 다가가서 그의 등에 얼굴을 다정스럽게 묻는다) 여보 우린 한 가족에에요. 세상엔 우리들밖에 없어요. 우린 꼭 행복해야 돼요. 아시겠어요?
공회장 : (보화의 한 손을 꼭 쥔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가정을 꼭 지켜야 하오. 난 비로소 우리가 누구보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소.
보화 : (떨어지며 활기차게) 자, 오늘 주리의 시연회가 활기에 넘치도록 해야 돼요! 아주 아름답게 황홀하게.
공회장 : 그래- 멋진 잔치를 마련해봅시다.
요란하게 인터폰 소리가 난다.
두 사람 2층을 올려다본다.
보화 : 노인네예요!?
주리가 뛰어나온다.
주리 : 제가 올라가보겠어요.
공회장 : 가능하면 네 시연회에 할머니도 초청을 하렴.
주리 : (층계를 올라가며) 네, 알겠어요.
2층 다락방 밝아진다. 노파가 멍하니 앉아 있다.
주리가 올라온다.
주리 : 부르셨어요, 할머니?
노파 : 너 혼자니?
주리 : 네.
노파 : 거기 앉거라.
주리가 노파 곁에 앉는다.
주리 : 왜 그러세요, 할머니?
노파 : 내 방에 오르는 마지막 층계 오른쪽에 작은 쪽문이 있다.
주리 : 쪽문이라뇨?
노파 : 니 에미가 만들어 놓은 비밀 문.
주리 : 비밀 문?
노파 : 아무도 몰래 그리 들어가봐라.
주리 : 거긴 왜요?
노파 : 꿈에 바리공주님이 나타나시어….
주리 : 또 그 말씀이에요?
노파 : 아니다! 바리공주님의 비명 소리가 이 마루 밑창에서 들렸어.
주리 : (예감이 떠오른다) 비명!?
노파 : 바리공주님이 천장 속에 갇히어 죽어가고 계신 게여. 환기창을 열어줘야 해.
주리 : 환기창!?
주리, 자리에서 후닥딱 일어나 나간다.
노파 : 이제야 속이 후련해지는구먼.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애.
천장 공간이 밝아온다.
주리가 플래시를 들고 기어들어온다.
맷돌 : 누구여? 멍석이냐?
주리 : (다가가며) …?
맷돌 : 그래- 자식 왔구나- 넌 꼭 올 줄 알았어! 넌 의리를 지키는 놈이잖아-.
주리 : (작게) 누구세요?
맷돌 : (주리의 손을 움켜쥐고 경런) 우린 절대 관우 형을 의심해선 안 돼- 알것제? 여기에 히로뽕이 있다는 걸 아셨을 테니께 관우 형은 큰일을 벌이실 거여-.
주리 : …!?
맷돌 : 나 죽으면- 제에미- 고향에는 묻어주것제-. (주리의 손을 흔들며) 어떻게- 지랄같이- 못에 찔려 뒈지냐-. (점차 생명의 촛불이 꺼져간다. 가늘게 노래한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나리는- 이 밤이- 구슬프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주리의 손을 움켜 흔들며) 제미랄- 우린 개나발을 불었네-.
축 처지는 맷돌.
주리, 가만히 한 손으로 뜨고 있는 맷돌의 두 눈을 쓸어서 감겨준다.
천장 공간이 어두워지며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거실이 밝아지다.
공 회장과 관리인이 객석 앞쪽에 앉아 있다.
보화가 멋진 파티복을 입고 관객석을 향해 인사말을 한다.
보화 : 손님 여러분, 이렇게 먼 곳까지 왕림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 딸 주리의 졸업 작품 시연회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들께 주리의 부모로서 정중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공 회장, 자리에서 일어나 객석을 향해 보화와 함께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보화 : 각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중요하듯 한 가정의 자유와 행복 또한 중요합니다. 오늘 밤 우리 가족 일동은 한 가정의 행복을 여러분 앞에 확인시켜드림으로써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한 가정의 질서와 화목의 위대함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어떤 명분이나 이유에 의해서도 결코 평화로운 한 가정의 행복이 파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주리의 예술을 통해서 한 가정의 행복은 기필코 수호되어야 하며, 또 영유되어야 함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소리 길게.
주리가 뛰어나온다.
주리 : 아름다운 갈대밭에 불이 붙었다. 불은 삽시간에 들판을 태운다. 아름다운 갈대는 한 줌의 재가 되고, 그 울창했던 갈대숲 늪지 속에 빠져 죽은 들짐승의 앙상한 뼈마디가 나타난다. 갈대숲은 꿈이요 환상이었고, 앙상한 들짐승의 뼈는 현실이요 아픔이었다. 환상의 장막을 걷어버려라…! 나는 꿈과 현실이 뒤바뀌는 어두운 공간을 보았다. 우스꽝스런 코미디의 각본이 현실로서 나의 세계에서 완성되는 걸 보았다. 우리 모두는 허위와 모순과 독선의 시체를 미리 위에 이고서 현란한 몽상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저택의 벽난로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