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부흥의 길(復興之路)1부 자막 대사 녹취문
서문
이곳에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중국이 있다.
수천 년 동안 민족의 근면함과 용맹함으로 창조한, 이 찬란한 문명은 발전과 진보를 위해 노력해 왔다.
인류의 역사가 1661년으로 접어들 무렵, 청나라의 네 번째 황제, 강희제(康熙帝)가 등극한다. 중국은 봉건왕조의 마지막 태평성대를 맞았지만, 세계는 전례 없던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15세기 말 유럽의 항해가들은 해상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의 확장과 약탈,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어떤 나라도 독자적으로 발전해나갈 수 없었다.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은 인류 역사를 변화시킨다. 전 세계는 거스를 수 없는 근대화의 물결을 맞이하게 된다. 이 흐름은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강희에서 건륭(乾隆)황제의 시기까지 태평성대에 익숙해져있던 중국인들은 앞으로 닥칠 재난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약탈과 이권 쟁탈을 일삼는 서양 식민주의 세력의 손길은 이미 동방에까지 닿아 있었다.
중국의 3천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백여 년간 중국이 노력해온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그 장막을 연다.
부흥의 길 제1부 千年局變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
중국 동남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지난 2006년 이 마을의 조선소는 건립 140주년을 맞았다. 오늘날의 중국은 세계 3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造船) 대국이다. 마웨이(馬尾) 조선주식 유한공사는 현재 중국 조선업계로 치면 일반적인 기업이지만, 약 140년 전인 1866년 마웨이 조선소의 건립은 일대 사건이었다.
조선소 창립자며 청나라 운남·절강 지역 총독이었던 좌종당(左宗棠). 그의 상주문에 의하면, 조선소 설립목적은 ‘바닷길을 통한 외세 침략을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중대한 사명 아래 설립된 현대식 선박조선소. 중국 최초의 일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백여 년 전 청나라는 어떤 해상 침략을 받았던 것일까? 조선소 건립 26년 전, 위기는 바다로부터 다가왔다.
1840년 6월. 마카오 연해 밖에 정박해있던 영국 선박이 청나라를 침략한다. 그 후 2년 동안 청나라는 수차례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강요에 의한 협상.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아편전쟁’이라 이름 붙인다. 중국의 근대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편전쟁은 왜 일어난 것일까? 이 사건은 중국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1840년 4월. 장장 3일 동안 이어진 영국 의회의 논쟁 속에서 전쟁의 요인을 찾아낼 수 있다. 전쟁의 원인은 영국과 중국 사이에 거래되던 두 가지의 식물(植物) 때문이었다. 바로 영국의 아편과 중국의 찻잎이었다.
➡뇨다용(북경대학 사학과)
아편전쟁 발발 전 장기간 동안, 중국의 주요 무역상품은 찻잎과 농작물 등으로, 거래가 은(銀)으로 이루어져 중국의 은 보유량은 상당했죠. 이는 중국 재정에 유리한 무역거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자국에 유리한 거래상품인 아편을 내놓았습니다.
➡한스 반 드 벤 (케임브리지대학 동아시아 연구센터)
같은 시기 산업혁명을 겪던 영국과 비교하여 중국의 경제는 낙후돼가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후 생산력이 급속도로 증가한 영국은 세계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총력을 모았다. 이미 중국의 이웃나라인 인도는 원료제공과 공산품판매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다.
영국은 중국을 공략하기 위해 아편을 팔기 시작했다. 그후 40여 년 동안 3억에서 4억 량(兩)에 달하는 은이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한 량(兩)은 10돈, 또는 37.5g이다. 16돈이 한 근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한 량(兩)이 31.25g)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은 불법 아편무역으로 생명을 위협하고, 부도덕함으로 국고를 채워갔다.”
➡공수두어(북경사범대 사학과)
영국은 아편으로 상인들의 상거래 이윤뿐 아니라 많은 세금을 아편거래를 빙자하여 갈취했습니다. 아편전쟁 배후엔 영국정부의 지원이 있었다고 볼 수 있죠.
➡크리스토펴 휴즈 (런던대 정치경제과 아시아연구센터)
영국은 아편전쟁을 통해 시장을 개방시켰습니다. 총과 포탄으로 시장개방을 실현한 셈이죠.
투표 결과 다섯 표 차이. 영국 의회는 전쟁반대안(案)을 부결시켰고,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해상에서부터 시작된 영국의 공격은 무방비상태였던 청나라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청나라 도광 연간(道光帝가 왕위에 있는 동안), 당시 동방의 대국이던 중국은 8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원정 군사력은 겨우 7천여 명. 전쟁 후반까지 2만 명의 군사력이 보강되었지만, 80만 대군을 보유한 대국이었던 중국은 왜 영국에게 패한 것일까?
➡첸청단(북경대학 사학과)
영국의 군사력은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당시의 영국은 이미 산업혁명을 완성한 세계 유일의 공업국이었고, 자본주의를 지향하고 있었죠. 하지만 중국은 낙후된 농업국가였습니다.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 대부분의 중국인은 양국의 사회제도와 생산력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오랜 시간의 쇄국정책은 중국인들의 눈과 마음을 닿아놓았다.
➡중국 문인 왕중양은 서양인을 이렇게 묘사했다.
“다리가 길어 굽히기 힘드니 달리기조차 어렵고, 눈이 파래서 빛을 두려워하니 대낮에는 눈을 뜨지 못한다.”
광동지역에서 적국에 맞서 싸웠던 임칙서(林則徐 1785-1850)도 “중국이 찻잎과 대황(大黃) 공급을 중단하면 서양인들이 소화불량에 걸려 죽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영국인은 중국과 영국 간의 차이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전쟁을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한 상태였다.
➡황성타오 (중국인민대학 청대역사연구소)
그들은 각종 통로를 통해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중국 군대의 허술함을 알았고, 각종 대포와 방어력이 허술하다고 생각했죠.
아편전쟁은 중국 역사에서 큰 충격이었다. 홍콩을 빼앗겼으며, 배상금으로 2천 1백만 량에 달하는 은을 지불하겠다는 내용의 남경조약을 체결한다. 서방 식민국가의 무력과 압력 아래, 치욕적인 중국의 근대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은 반(半)식민지며 반(半)봉건사회로 전락한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군이 양자강에서 철수하자 도광황제는 연안에 위치한 군대의 철수를 명한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들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었다.
“큰 비가 지나가자 그 의미를 망각하네.”
모든 것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
➡양동량 (중국인민대학 사학과)
당시 북경의 주점에는 시국에 대한 토론을 금지한다는 대자보가 붙기도 했습니다.
영국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던 임칙서는 관직에서 파면 당한다. 1841년 8월 유배지로 떠나던 그는 진강(鎭江)에서 오랜 친구인 위원(魏源 1794-1857)과 만난다. 임칙서는 자신이 편찬한 사주지(四洲誌)와 외국의 자료를 건넸다. 이 자료들을 책으로 출간해 세계의 실정을 모르는 중국인들을 일깨우기를 바랐던 것이다. 1년 후 세계를 체계적으로 묘사한 해국도지(海國圖志)가 완성된다. 서방을 배워 서방을 물리치자는 내용이었다. 위원은 중국의 앞날을 위해서는 맑은 눈으로 ‘세계 속의 중국’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몇 년 후 임칙서는 신강(新疆)의 이리(伊犁) 지역에서 돌아왔다. 중국 근대사회를 가장 이성적으로 바라본 최초의 인물 임칙서는 결국 침묵을 선택한다. 해국도지를 편찬했던 위원 또한 불교로의 출가를 택하고, 항주(杭州)의 한 사찰에서 세상을 떠난다. 1840년의 포탄 소리는 오랜 전통과 환상에 빠져 있던 중국을 깨우지 못했다. 각성의 목소리는 너무나 약했고 변화는 싹을 틔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청나라 왕조는 당시의 세계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끔찍한 사건이 처음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둔감해지기 쉽다. 또 다시 비극이 되풀이된 후에야 비로소 뼈를 깎는 아픔을 느끼게 된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순환하기 마련이다. 청나라 왕조에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기록에 의하면 1842년부터 1850년까지 백 번 이상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고 한다. 1851년 청나라 정부에 대한 반감과 서방국가의 침략은 중국 국민들의 반란을 일으켰다. 청나라 왕조의 뿌리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국근대사에 있어 최초로 자본주의의 방안인 자정신편(資政新篇)이 출간되기까지 했다. 14년 동안 계속되어 온 농민봉기는 청나라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중국 내에서 반란이 빈발하던 1851년. 런던의 하이드 공원에서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만국박람회의 첫 테이프를 끊는다. 당시 대영제국이 생산한 공산품은 세계의 3분지 1을 차지하고 있었고, 철로와 선박 규모는 절반에 달했다. 또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세계 최강의 국가로 자리 잡고 있었고, 미국, 프랑스 등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윌리엄 C. 커비 (하버드대학 교수)
새롭게 탄생한 해상제국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었습니다. 당시 제국주의 시기는 식민지 쟁탈과 군사침략, 경제 확장이 빈번하던 때였죠.
고속 질주하던 제국주의 세력은 청나라에게 숨을 고를 여유도 주지 않았다. 제1차 아편전쟁 후 14년이 지나고, 위기는 또 다시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1860년 10월 18일. 북경을 침략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청나라 황제의 휴양지인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웠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했다.
“두 명의 강도가 원명원에 몰래 들어가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두 도둑은 프랑스와 영국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 날의 화재는 중국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 대청제국(大淸帝國)의 사대부들이 느끼던 중국에 대한 자부심도 산산조각이 났다.
중국이 국내외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 1861년 12월 24일. 함풍황제(咸豊帝)는 서방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어명을 내린다. 아편전쟁 종결 후 20년 후의 일이었다. 청나라 황실은 국가발전을 위한 20년의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도태된 중국이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의 소리이기도 했다.
1861년 6월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설립된다. 중국근대사에서 처음으로 청나라 정부가 주도하는 자구책이었다. 바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시작이었다. 이는 서방을 배워 서방을 물리치자는 위원(魏源)의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자강(自强)과 부흥(復興)이 주요 내용이었다.
1860년대 중국에서는 양무운동이 전개되었다. 군사공업 위주의 근대기업이 출현하고 새로운 육해군이 조직되었다. 신식 학당이 설립되고 유학생이 해외로 파견되면서 대청제국에는 새로운 기류가 일어났다. 이 양무운동으로 청나라는 국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중국 근대화의 길인가?
30년 후 중국은 그 답을 얻게 된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이번에도 위기는 해상에서 시작되었다. 아시아 최고의 북양해군(北洋海軍)도 침략자를 물리치지 못했다. 양무운동을 통해 정비를 마친 함대는 전멸했다. 중국은 또 다시 패배했다.
➡하자마 나오키(일본 손중산[孫中山]학회 이사)
청일전쟁 종결 후 청나라 정부는 일본에게 2억 3천만 량에 달하는 은을 배상하였습니다. 이는 청일전쟁 발발 전, 청의 3년간 재정수입이었고, 일본 메이지 정부의 4년간 재정수입이었습니다. 청나라는 3년에 걸쳐 배상금을 지불하였고, 일본은 전쟁 전 4년간의 재정수입을 한 번에 얻었죠. 이 배상금으로 일본 산업은 신속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개전 당시 중국과 일본 양국은 모두 전함과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유학파(留學派) 지휘관을 두고 있었다. 양국 모두 서방국가의 침략으로 문호를 개방했고, 1860년대부터 서방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청제국은 왜 일본에게 패한 것일까?
➡리원하이 (중국사학회 회장)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중국에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존재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제도의 부패이고, 두 번째는 바로 낙후된 경제기술이었습니다.
➡나타샤 겐츠 (에든버러 대학 한학과)
우리는 이때가 중국이 각성한 때라고 말합니다. 중국은 처음으로 자국이 타국에 뒤처져 있음을 깨달았고, 문호개방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부패는 어리석음을 낳고, 어리석음은 부패를 심화시켰다. 양무운동 당시 설립된 중국 최초의 철로는 탕쉬(唐石) 철로다. 호북성 당산(唐山)에서 석가장(石家莊)으로 연결되는 철로였다. 철로는 1881년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정부는 기차의 운행을 금지시킨다. 기차의 진동이 덕릉(德陵)에 묻힌 선왕의 영혼을 흔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청제국에게 이긴 일본의 경우 1872년 영국인에 의해 첫 번째 철도가 완성된다. 메이지 천황이 개통식에 참여했고, 일본 국민들도 조심스럽게 플래트 홈에 올라가 철도의 개통을 축하했다. 7년 후 일본은 독자적으로 철로를 설계하고 건립할 수 있었다.
철로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랐던 중국과 일본. 청나라는 변하고 있는 세계적인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유럽과 미국 등의 나라들은 전기 사용을 목표로 한 제2차 산업혁명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무과(武科) 시험의 내용은 여전히 기마술(騎馬術)과 궁술(弓術). 문과(文科) 시험의 내용 또한 여전히 형식적이었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실무파들은 중국의 학문을 바탕으로 서양의 학문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당시 중국의 문화와 제도가 서방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마민(화중사범대학 교장)
중국 학문은 중국 전통문화의 기본이 되죠. 그럼 여기서 말하는 기본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유가사상의 도덕 전통으로, 이는 절대 변화할 수 없고 건드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서양학의 실용성은 과학기술을 본보기로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중국문화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죠.
마르크스는 세계 인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국가라도 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의 흐름을 무시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국가, 세계 체제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려는 국가, 그리고 과거의 부귀영화만을 되돌아보는 국가라면 말이다. 중국의 참혹한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양무운동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중국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과연 무엇이 제국을 구할 수 있는 것일까.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고 1년 뒤,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엄복(嚴復 옌푸1854-1921)은 중국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멸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3년 후인 1898년 엄복은 중국인들에게 사상을 개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영국의 생물학자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론’을 천연론(天演論)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해서 출간한 것이다.
➡장치즈(서북대학 중국 사상문화연구소)
사상 개방은 어떤 작용을 했을까요? 중국 전통의 순환논리사상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중국의 모든 원리는 순환이며, 주위환경도 순환한다고 믿죠. 기점을 출발하여 돌고 돌아 다시 되돌아온다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개념은 중국인의 사상 개방에 많은 작용을 했죠.
근대적 지식을 지닌 지식인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사회를 계몽시키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 광동(廣東) 출신의 한 청년이 천진(天津)으로 올라와 청나라 정부의 중신(重臣) 이홍장(李鴻章)을 만난다. 그는 평화롭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정치를 행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가 바로 손문(孫文 쑨원 1866-1925) 선생이다. 실망한 손문은 중국을 떠난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그는 흥중회를 수립하고 구국의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이 시기 또 다른 광동인(廣東人)인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 1858~1927)가 유신변법을 통해 청나라를 구하려 하고 있었다.
➡린쟈오 (손중산연구소 초대 소장)
정치와 사람은 모두 자질이 중요합니다.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사람을 통한 투표와 선거, 경선이 필요한데, 사람의 자질이 부족하면 공화제를 이룩할 수 없죠. 이는 강유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손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중국이 공화제를 이루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민주공화국이 되기 위한 자질은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두 사람의 성격은 달랐고, 그래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죠.
1895년 봄. 강유위와 그의 제자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북경에서 향시 합격자를 모집하고 이들과 연서(連書)하여 공차상서(公車上書)를 발기해 개혁을 제안한다. 강유위는 부국강병을 위해 개혁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그는 청일전쟁 후의 중국을 ‘무너진 집’이나 ‘난파된 배’라고 표현했다. 또한 중국인의 처지는 ‘새장에 갇힌 새’ ‘가마솥의 물고기’ ‘유치장의 죄수’와 같다고 생각했다. 노예처럼 전락해버린 중국 국민의 상황. 중국의 4천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일이었다.
열강에 의해 강탈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바꿔야 했다. 유신파들은 민권 부흥, 의회 설치, 입헌군주제를 제안한다. 그 동안 중국이 패배했던 이유는 전함과 대포가 아닌 서방의 제도였다. 중국인들은 이 사실을 반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강유위는 모든 정치체제 중 입헌군주제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전제정치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강유위의 주장은 광서황제(光緖帝)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다. 1898년 6월 11일 청나라 정부는 명정국시(明定國是)의 조서를 공포했고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시작된다.
➡차이러수 (청화대학 사학과)
무술변법은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의 목표와 이상이며, 경제적으로는 민족의 상공업 발전을 추진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103일 후 유신파의 개혁은 끝나고 만다.
109년 전 무더운 여름, 부패한 구제도와 도살자에 의해 애국자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국력 강화를 외치던 이들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담사동(譚嗣同 1865-1898)은 담담하게 죽음을 택했다. 그는 중국이 약해지는 이유가 그 누구도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변법자강(變法自彊) 운동은 끝내 짓밟히고 말았다. 하지만 애국자 6인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진충지 (중국사학회 초대회장)
변법자강 운동 이후, 유신과 서방의 사회정치학이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는 국민들에게 기존의 봉건사상 위에 자본주의 사상을 더해주는 셈이었죠. 이는 진보이며 새로운 개념입니다.
➡조나단 D. 스펜스 (예일대학 교수)
19세기는 중국에게는 굴욕적인 시대였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반성하고, 정말로 필요한 것을 찾으며,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을 모색하는 시기였습니다.
중국에게는 이 실패 또한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중국근대사에서 변법자강 운동은 중요한 사상계몽 운동이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중국의 봉건사상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변법정책의 산물이었지만 다행히 무사했던 경사대학당( 京師大學堂, 북경대의 전신). 이곳은 그 후 진보운동 과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0세기의 장막이 열렸지만 자금성은 여전히 장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20세기는 이곳에 치욕의 흔적을 남긴다.
1900년. 청일전쟁 이후 5년 뒤. 열강은 또 다시 북경을 침략했다. 과거와 다른 점은 8개 국가가 동시에 침략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각국의 군대는 북경에 구역을 나누어 상주했다. 각 지역 중국인의 집에는 점령국의 국기를 달아야만 했다. 중국의 심장에 8개국의 국기가 휘날렸다. 근대사에서 이러한 굴욕을 당한 국가는 없었다. 중국은 산산조각이 났다.
1901년 9월 7일. 청나라는 11개국과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하면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게 된다. 4억 5천만 량의 은(銀)! 청나라 재정 수입의 다섯 배였다. 아편전쟁부터 청나라가 지불해야 할 전쟁배상금은 7억 2천450만 량!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정부에게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수백 개의 조항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국민의 존엄성을 보호할 힘이 없었다. 국가의 주권마저 지키지 못하고 부패한 정부로 무너져갔다.
➡장레이(광동 손중산연구회 회장)
굴욕적인 신축조약 체결로 인해 중국은 반(半)식민지, 반(半)봉건사회가 되었고 이는 결국 비참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당시 혁명의 기운은 짙어져만 갔습니다.
1901년 4월. 영국의 무력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지 60년이 되던 해. 청나라는 드디어 정치제도의 개혁을 시도한다. 이른 바 청나라의 ‘신정치 방안’. 범위와 깊이로 보면 무술변법 이상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다.
10년 후인 1911년. 청나라 정부는 책임내각을 구축한다. 하지만 내각을 만주족과 황족으로만 구성해, 결국 개혁은 실패하고 만다.
➡장위엔위엔 (화중사범대학 초대 교장)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새로운 정책은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회는 황권을 멀리하고 황권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신정부가 육성한 군대와 학생들까지 정부와 대립했고, 정부조차도 자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손문은 청나라를 곧 무너질 집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청나라는 모든 구조가 썩어버려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이러한 집을 몇 개의 작은 기둥으로는 지탱할 수 없는 법이다.
20세기 초. 중국에 한 줄기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바로 혁명이었다. 당시 손문은 의지가 확고한 혁명가였다. 그는 최초로 중국의 부흥을 외치고, 중국을 위해 끝까지 싸웠으며, 20세기 초 중국에 역사적인 큰 변화를 추진한 주요 인물이었다.
1905년 8월 20일. 손문 등 혁명의 인물들은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설립하고, 중화민국의 건설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손문은 민보(民報)를 발간하면서 이 동맹회의 3대 강령을 강조한다.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상밍쉬엔 (중국 신해혁명 연구회 고문)
삼민주의는 당시 중국이 직면한 3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죠. 첫째는 민족의 독립문제였고, 둘째는 정치적으로 민주 공화가 가능한가의 문제였고, 셋째는 국민의 생활과 사회발전 문제였습니다.
삼민주의의 기치 아래 손문과 애국지사들은 수차례의 무장봉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들은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성공시키게 된다.
광주(광저우) 시 선열로에 위치한 묘지. 이곳에 72명의 젊은 혁명가들이 잠들어 있다. 1911년 4월 27일. 황흥은 광주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희생된 혁명당원들 중 많은 이들이 봉기를 위해 귀국한 유학생들이었다. 그중에는 24살의 린쥐에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광주 봉기 두 번째 날. 린쥐에민은 손수건에 아내에게 줄 유서를 남긴다.
“당신을 만나고부터 가족이 되어 행복하기를 원했지만, 거리에 들끓는 피비린내와 개, 늑대를 보고도 어찌 가족의 행복만을 추구하겠소!”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애정도 갖지 말고, 어려움에 처한 조국을 외면할 순 없었다. 그는 아내와 곧 탄생할 아들을 뒤로 하고 혁명의 길로 나선다.
역사는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조국과 국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청춘과 행복, 생명을 바친 이들의 위대한 용기와 정신을 말이다.
광주 봉기 반년 후, 1911년 10월 10일. 무창(武昌)혁명이 발발한다. 먼저 무한(武漢)지역 3개 마을이 광복을 맞는다. 그리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전국 13개 성(省)이 청나라 정부의 통치에서 벗어난다.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청나라 왕조는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한 왕조가 끝이 났다. 2천년 동안 중국에서 지속되어 오던 봉건군주제가 멸망했다. 그리고 새로운 공화국이 아시아에 탄생했다.
신해혁명은 자산가 계층이 일으킨 민주혁명이었다. 그리고 중국 국민이 민족의 부흥을 위해 일으킨 혁명의 이정표가 된다.
역사는 변하고 있었다. 중국 역사상 자산계층이 참여하는 최초의 공화정부가 건립된 것이다. 신해혁명은 중국인의 사상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들이 2천 년 간 믿어왔던 천자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 어떤 사상이든 버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상이 중국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손문으로 대표되는 민주혁명의 선구자들은 중국의 근대역사에 빛나는 한 획을 그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해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다. 단지 황제를 쫓아냈을 뿐, 중국은 여전히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압박 속에 있었다. 반(反)제국주의, 반(反)봉건주의라는 혁명의 목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앞으로 그 누가 반제국, 반봉건의 역사적 사명을 완성할 것인가?
위대한 부흥을 꿈꾸는 중국의 여정, 국민이 이뤄낸 변화의 움직임, 그들은 이제 막 근대화를 향한 힘겨운 여정에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