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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문학》 여름호 계간평(2021.5.)
펜데믹 시대 건너가기, 또는 회상과 상상적 표징 불러오기
노 창 수
(시인·문학평론가)
아주 예민해진 상상적 회상은 곧 우리의 정신세계로 향한다. 그것은 미세한 표징이나 더 미세한 징후가 되어 하나의 운명으로까지 진전되어 간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 중에서 재구성한 글
1. 시와 시인은 왜 분리 되는가
엄밀히 말해 시인은 시 속의 사람이 아니며 또한 될 수도 없다. 시인은 그가 마주한 현상에 대하여 대체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사람’인 〈시인〉과 ‘작품’인 〈시〉에 각기 다른 정서로 응대함이 그것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데 왜 시와 자신을 다르게 현시하는가에 대하여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는 시인이 아닌 다른 ‘사람’ 즉 시인의 ‘다른 자아’ 또는 ‘타아’에 의해 씌어지고, 이 ‘시’가 대상에 반응하는 환경 또한 그 ‘사람’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예컨대 사람이 거울을 볼 때 거울에 비친 자가 자기라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이미 아니다. 거울이란 물체가 반영하는 하나의 자기를 가장한 허상(虛像)일뿐이다. 〈시인&시〉 사이에 일어나는 이율배반적 현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시인&화자〉 사이의 거리 역시 같은 경우임은 물론이다. 예를 들어 보자. 지금 슬픔을 겪고 있는 시인이 시에서는 기쁨의 세상을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앞이지만 사뭇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떠올리는 시를 쓸 수도 있고, 또는 그 반대로 현재 보다 더 깊은 애정의 정서를 드러낼 수도 있다. 이는 시인이 아무런 선 감정(先感情)이 없이 전지적 작가시점, 또는 과장법적 구사로 시의 담화를 진술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아가 시가 어떤 대상을 표현함에 시인과 아주 다른 화자일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 예로, 김소월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 한용운의 「수의 비밀」, 김영랑의 「북」, 노천명의 「남사당」, 서정주의 「추천사(鞦韆詞)」, 박목월의 「만술 아비의 축문」, 박재삼의 「매미 울음에」, 이형기의 「폭포」, 신경림의 「파장」, 노향림의 「그리운 서귀포·1」, 문병란의 「직녀에게」, 하종오의 「밴드와 막춤」,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 김혜순의 「납작납작」 등이다. 시인의 입장과 화자가 반대이거나 그 관계가 사뭇 다른 인물로 등장하여 객체화되는 경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드러난 사람(허구의 화자)의 감정을 시인의 감정으로 착각해버리는 시인이나 독자가 많다. 미세하지 못한 이런 상상이나 회상으로는 좋은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 ‘사람’이라는 시인은 〈감정〉을 드러내는 ‘존재’이지만, ‘시’라는 작품은 대상과 화자의 〈이미지〉에 충실한 어떤 ‘기구(器具)’로써 기능한다는 점이다. 시적 화자가 기표하는 〈이미지〉가 의미적이고 감각적인데, 기실 시인이 기대하는 〈감정〉과 ‘정서방향(feeling vector)’은 그와는 전혀 다를 수가 있다. 하나의 대상 A에 대해 또 다른 대상 B를 설정해 놓고, 이 중 A가 B를 사랑 또는 배반하면서 A의 자의식을 발화하거나, 역으로 B가 A를 사랑 또는 배반하면서 B의 타자의식을 발화하는 걸 다루는 경우이다. 그 사례가 빈번해진 건 21세기에 든 현대시부터이다. 시의 이미지가 비소통의 언어인 기호 또는 그것조차 파기하는 언어가 되는 일도 떠나, 무의미 또는 그것조차도 무근거로 방기하는 언어가 되거나, 췌설 또는 그것조차도 수설(竪說)에 맡기는 언어가 되는 일은 다반사이다. 나아가, 속어 또는 그것조차 은어화(隱語化)하는 언어, 광기 또는 그것조차도 소침(銷沈)에 밀어 넣는 언어, 나아가 시의 언어장애 또는 그것조차 걸러내지 않은 언어에까지 실로 거침없이 하이킥을 한다. 헌데, 어떤 시는 이 비소통의 언어를 표출하면서도 무의식으로 더욱 파고 들어가 또다른 제 3의 ‘자의식’이란 성(城)을 쌓기도 한다. 이때 시는 당면한 심리기제의 순간적 기복에 따라 〈시인∩화자〉와 〈시인∪화자〉를 넘어서, 〈감정≠이미지〉, 〈감정↔심리〉, 〈대상≠감정〉, 〈대상↔이미지〉, 〈심리≠이미지〉처럼 단절되고, ‘의식 구조’와 ‘무의식 구조’를 서로 넘나들며 기표화되기에 이른다. 일부 독자는 이런 시가 난해해 읽을 수 없다고 불평을 한다. 하지만, 그건 현대사회와 인간심리가 다층적인 복합구조로 변화하는 오늘의 특성에서 파생되는 현상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현실에 터한 하나의 반증으로 생성될 수밖에 없는 사회학적 시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시의 구사법은 좀 다르지만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적 시의 유발도 이의 한 흐름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미 90년대 장정일, 박남철, 유하, 황지우 등에 일상화되다가 2000년대에 등단한 여러 시인들이 이런 포스트구조와 아울러 심리의 다층적 구조를 자연스레 수용하는 시를 배설하기 시작했다. 이 젊은 시인들은 이제 거명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많아졌다. 최승호, 정끝별, 장이지, 김이듬, 김이삭, 황인숙, 함민복을 위시하여, 이병률, 김언, 손미, 홍지호, 양경언, 이린아, 진수미, 오형엽, 안태운, 조강석, 주창윤, 박연준, 강신애, 신미균, 진중일, 강은진, 최지인, 한연희, 박승열, 이기성, 황주은, 안미옥, 이산아, 김안, 길상호, 엄원태, 최종천, 김중일 등이 그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시인들은 더 많이 탄생하고 있으며, 앞으로 시단의 대세를 이어갈듯 하다. 현대 시인들의 심리시, 기호시, 배경시, 무의미시, 해체시, 키치시 등은 해외 문단에까지 이름과 작품이 알려지고 있다. 이 시들은, ‘너’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나’의 심리적 거리, 의식에서 나와 무의식의 끝으로 치닫기만 하는 ‘나’와 또 ‘다른 나’, 자신의 내부 의식의 불연속, 단말마적 사고나 찰나적 행위의 우발, 그리고 생태파괴의 암흑성과 작위성에 대한 비판을 주로 다룬다. 심지어 현재의 ‘무한한 자유’가 오히려 ‘구속’을 초래한다거나, 모든 존재가 누리는 ‘광활한 우주’가 곧 ‘감옥’과 같다는 사고를 갖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감옥’이 오히려 ‘자유’를 구현한다는 아이러니적 사유를 드러내기도 한다. 바늘에 찔려 쏟아낸 핏물로 전환된 ‘꽃의 환상’, 집단의 물리적 폭동과 억압으로부터 야기된 분노증 또는 그 관음증 등, 그 예가 불손하지만, 현대시는 보다 다기·다양한 변주를 발판 삼아 변화한다. 자아심리의 ‘결렬’과 대상 이미지의 ‘반란’, 독자 감정의 ‘난자’ 등을 보편화시키며 정석의 시를 파괴한다. 그런 경향은 주로 부조리한 정서에 관하여 ‘대변담화(代辯談話)’로 풍자되거나 비판적 담화로 표상된다. 이제, 바야흐로 시는 고전적 의미인 ‘서정의 산물’이라거나 ‘정서의 순화’라느니 하는 근대적 굴레에서 이미 뛰쳐나와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의 시는 낯설게 하기가 극심해지고 심리의 디테일이 깊어져 대상의 서정과는 한사코 어긋진 담화를 다룬다. 이 시에선 물론 특이한 비유와 상징이 형태와 내용을 쥐락펴락 한다. 비판의 주체나 도구, 그리고 풍자의 물격 또는 인격, 주위의 환경물에 대한 상징적 음란성과 폭력성 등, 고삐 풀린 말들처럼 비선적으로 번져간다. 그건 시가 숭상해온 전통적 미학보다는 현재적 독창성과 개성에 더 값하려는 어떤 고립적 이데올로기와 전위예술을 함께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잠깐 각설하고, 이에 관련지어 오래된 낡은 시를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더 낡게 가르치는 시인 선생들에게 더불어 개탄감을 보낸다. 옛 향수에 함몰되는 돈키호테 기사를 표방한 선생과 이를 따르는 나이든 산초 제자가 로시난테를 타듯 삭은 짚으로 꼰 시의 고삐를 쥐고 옛 풍차를 향해 열변과 돌진을 반복하는 사례가 적지 않음을, 이곳에 여백 메우기 삼아 지적해 본다. 그만큼 문단이 낡아 있음이다.
이제 글월을 바꾼다. 시는 누가 뭐래도 〈서정적 완력〉과 〈운율적 룰〉을 거친다. ‘서정’과 ‘운율’은 바늘과 실의 관계로 등가적이다. ‘완력’과 ‘룰’은 불평등과 평등, 범칙과 규범, 방임과 규율의 상반 관계로 결국 아름답게 완미될 시를 희구한다는 점에서 영원한 전범이다.
2. 미세한 회상은 왜 미세한 상상의 징후에 값 하는가
이번 호에는 〈회상〉이 진전되어 〈상상〉을 유도하며 〈성장〉하는 시를 살피기로 한다. 이에는 강산에늘봄잔치, 고명순, 김인석, 오소후, 김옥중의 시를 예로 들어 일별하고, 이들의 회상적 서정과 정서적 깊이를 필적(筆的) 삼아 적필(的筆)해 본다. 사례로 든 시편이 적음은 수작(秀作)이 적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지만, 지난 호에 언급한바 얀 무카로프스키의 〈일탈의 언어〉나 황석우의 〈영어(靈語)〉의 사용이 적고, 다만 인어(人語)나 중어(衆語), 나아가 단순한 일상의 언어로만 쓰는 규범어적 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게 이 지역 문단의 취약점, 즉 ‘매너리즘(mannerism)의 늪’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좀 비쳤다. 아무튼 습기 먹어 징징 우는 장작불을 오래 지피듯 시 읽기가 조금은 지루했음을 밝힌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글을 쓰리라고 작정한 건 아니었다. 작품을 고르고 보니, 공교롭게도 전통의 ‘회상’과 현재의 ‘상상’에 대한 소재의 시편들이 눈에 띄었을 따름이다. 해서, 이에 관련된 시평의 초(礎)를 잡기에 이르렀다. 이 또한 코로나 시대를 통과해야 하는 ‘시의 소명’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펜데믹’ 사회에 전통적이고 미세한 소재들이 시인의 회상적 〈상상〉을 통과해 가며 어떤 〈운명〉으로까지 진전될 때, 독자에게 시적 위안을 줄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물론 그게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테지만.
비바람 불고 송이눈 무겁게 쌓여도
결코 쓰러져 누임을 몰라라
봄과 여름, 가을, 겨울, 그 허물을 타박지 않고
내내 짙푸른 몸통과 잎새의 지점
이런 자연적인 쾌적함에서
새벽 윤슬로 아침 이슬로 단장하며
연약히 웃자람 모른 줄기 잎에
죽로차를 서늘히 만난 기쁨을 뉘와 나누리
차의 맛깔에 더한 양념으로
초본과 목본의 대향을 가미해
직선에서 평면 차원으로 공간을 넓힌
차의 향과 맛과 빛깔이 일품이어라
-강산에늘봄잔치 「죽로차」 전문
사람들은 대숲으로부터 위안 받기를 즐긴다. 그것은 새벽이슬을 향해 반나(半裸)로 벋어오를 때, 또는 비를 떨구며 바람으로 흐느낄 때, 아니, 제가 낸 소리를 스스로 듣고자 휘어지며 아이처럼 떼를 쓸 때, 쌓인 눈에 키를 줄여 지나는 사람을 놀래킬 때, 그때 대숲은 우리의 서정을 우려내는 절정기(絶頂期)이지 않나 싶다. 이슬 젖은 대나무밭에 듬성듬성 딴 찻잎을 재료로 이름하여 “죽로차”를 빚는다. 대의 청량감은 덖은 솥을 감아 돌며 처마 아래로 와 부딪는다. 시는 이렇듯 “뉘”와 음미할 ‘죽로차’의 일품미를 다룬다. 커피는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시기에 좋다지만, 죽로차는 붓글씨와 더불어 풍경과 교우하며 누려볼만한 차라 본다. 차향은 숲내음처럼 깊어지고 청순감은 창포물에 맡긴 머리 결처럼 쇄락해 온다. 시에서 화자는 “웃자람 모른 줄기 잎”을 보면서 “죽로차”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초본과 목본의 죽향(竹香)”의 차, 그걸 비유하는바 “직선” 보다는 입체의 한 “평면”임을 강조해 보인다. 그러니, ‘신사’보다는 ‘선비’에 더 어울릴 터이다. “공간을 넓”히는 향과 빛깔에서 그윽한 정분을 얻으려는 자는 품격조차 달리해 보인다. 화자는 “죽로차”에 대하여, ‘(1)비바람 눈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2)사계절 내내 짙푸른 몸통과 잎새를 지닌다, (3)차의 맛깔에 양념으로 대향을 가미한다, (4)차향과 맛과 빛깔이 직선에서 평면으로 넓힌다’ 등 감미와 감정을 섞어 전언한다. 죽로차는 느슨하게 자적(自適)하듯 우리의 정을 방울방울 다독여 간다. “새벽 윤슬”과 “아침 이슬”로 단장한 ‘죽로차’를 〈회상〉하며 화자는 〈현재〉인 듯 이에 “젖어” 든다.
해마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 따라
꽃내음이 들려온다
글자 모르던 할머니가
어릴 적 가르쳐 준
꽃 이름들
먹을 수 있는 참꽃
못 먹는 개꽃
사립문 옆 흐드러진
가지꽃과 녹두꽃
올해도 따스한 날 와서
고향집 꽃이름에
향기로이 젖어든다.
-고명순 「봄 2」 전문
이 시는 ‘기승전결’의 수순을 밟는다. 즉 ‘꽃망울 터지는 소리와 꽃내음’은 〈기〉, ‘할머니가 가르쳐준 꽃 이름’은 〈승〉, ‘참꽃, 개꽃, 녹두꽃’은 〈전〉, ‘고향집 꽃 이름에 젖어든 향기’는 〈결〉로 봄이 그것이다. 꽃망울이 터뜨려지는 소리와 더불어 추억되는 향기는 지금에 맞는 그 순간처럼 잊을 수 없다. 글자를 모르는 할머니가 가르쳐준 “꽃이름”은 기억의 주름에 형형색색 살아있다. 해서, 올 봄도 할머니가 일러준 계절에 찬란한 물을 들일 것이다. 시에서, 정감은 정서적 주관성으로 일관된바 이미지의 발전과정이 ‘통주관성(通主觀性)’을 띤다. ‘과거’의 꽃, 즉 〈회상〉은 세월을 건너와 ‘오늘’의 〈상상〉에 와 마주친다. 할머니가 가르쳐준 봄꽃들의 이름은 자연의 동력으로 그 기대감을 당김으로써 부풀게도 한다. 그걸 이 시는 하나의 ‘통주관성’이란 인식망으로 유인해 온다. 이는 ‘자연발생적 동기’에 실려 옛 할머니와 함께한 “꽃이름”에 바탕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화자가 기대한 ‘상상의 꽃’에 이르게 된다. ‘상상의 이미지’는 시인에 의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독자가 ‘의도적인 축’의 향방으로 이미지를 나아가게 함을 알 수 있다.
온밤 밑바닥까지 환하게 둥근 날
신발 한 켤레가
토방 외진 쪽에 뭉게구름으로 감춰져 있다
나는 살짝 서리 맞은 구름을 걷어내고
달볕을 통째로 훔쳤더니
고여 있던 누님의 전신의 소리가
귓속말처럼 반묶음씩 튕겨져 나와
길게 허공을 메우고 있다
건너온 소리와 건너간 소리가 섞여
새파랗게 휜다
진한 들짐승 울음도 들어있다
나는 신께 그 울음의 번역을 부탁하고 간신히 돌아섰다
그리고, 그리고
훗날에
그놈은 독한 매형이었다
지금은 지독스럽게 그립다
-김인석 「문간방」 전문
이 시엔 시·청각적 감각이 수놓듯 박혀있다. 예컨대 “누님의 전신의 소리”, “귓속말처럼 반 묶음씩 튕겨져 나오”는 소리, “건너온 소리와 건너간 소리”, 그리고 “들짐승의 울음” 소리 등에서 보듯, 청각적 이미지를 연쇄로 꿰어내 감각다발을 다채롭게 한다. “밑바닥까지 환하게 둥근 날” 그의 신발은, “뭉게구름”으로 감춰진 “토방 외진 쪽”에 “문간방” 아래에 있다. 그건 이 시의 전환적 상징물이다. 해서, 예의 영어(靈語)나 ‘낯설게 하기’를 적용해 보인다. 얀 무카로프스키(J. Mukarovsky)에 의한 ‘전경화(前景化)’나 그 ‘일탈의 언어’일 듯도 하다. “서리 맞은 구름을 걷어내고” 보는 방, “달볕을 통째로 훔쳐”내고 보는 방, “고여 있던 누님의 전신의 소리”가 “귓속말처럼 반 묶음씩 튕겨져 나오”는 방, “건너온 소리와 건너간 소리가 섞여 새파랗게 휘는” 방, “신께 울음의 번역을 부탁하고” 나서 내가 “간신히 돌아서던” 방 등의 묘사에서 보듯 〈청각&시각〉의 교차진술로 말과 이미지가 심층화되는 구조를 보인다. 특히 마지막 반전 묘사는 압권이다. “진한 들짐승 울음도 들어 있”는 그 방이란 “독한 매형”이 기거하던 “문간방”임을 밝히고 있음에서 그러하다. 아니, 그보다 더 극적인 건 마지막 “그놈”을 확인하는 데 있다. 그놈이 “지독스럽게 그립다”고 말함으로서 “독한 매형”을 ‘회상’의 장에서 ‘상상’의 장으로 탈출시키는 것이다. 그건 매형과 화자를 연결하는 ‘운명적 상상’일 것이다.
그러니까 쪽빛이다
바다도 하늘도 그대 마음도
남인화포(藍印花布)를 넓게 펴서 말리며
그대 찾아 하늘로 오를거나
그대 찾아 바다로 내려갈거나
수 천 년의 시간을 바래볼거나
이 옳치 않은 내음은 싸악 버려야 한다
언제 내 가슴에
쪽빛꽃 한 송이 피운 적이 있었던가
오진 홍원태 나염방에서
결국 나도 남색지려(藍色之旅)
쪽빛 꽃 한 송이, 시치미 발목에 매달고
끝끝내 쪽빛을 가르며 그대 마음에 이르리라
-오소후 「남색꽃천 휘감고」 전문
화자는 “나염방에서” 나오는 “쪽빛”을 시샘한다. “나도 남색지려” 함은 쪽빛에 대한 화자의 관심이 어떻게 기우는지를 말해준다. 이처럼 화자는 쪽빛을 향한 강한 주체자로 서 있다. 그가 이미 관심을 두어온 바 자신을 두텁게 하는 미세한 표징일 법하다. 해서 “그대 마음에 이르리라”고 운명에 결기를 세우듯 진입한다. 화자는 “남색꽃천”에 만남과 정한을 “끝끝내 쪽빛”이란 말로, 그가 오래 전부터 온 외길을 돋을새김해 보인다. 끝 행의 “끝끝내”는 “쪽빛” 말고도, “남인화포”, “꽃 한 송이”, “나염방”, “남색지려” 등을 통합하여 심화된 한 결미에 이른다. 화자는 만날 대상에 “그대 찾아 하늘로 오를거나”, 아니면 “바다로 내려갈 거나” 하다가, “수 천 년의 시간을 바래 볼거나”로, 결국 그와 설레는 상봉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이내 “이 옳치 않은 내음은 싸악 버려야 한다”며 반전한다. 그래, 결국 도달하려는 곳은 “쪽빛 꽃 한 송이”를 “시치미 발목에 매달고” 오래도록 “끝끝내” 익혀둔 비의(秘意)에 이르려는 것이다. 시는 본심을 감추지 못한다. 첫구 “그러니까 쪽빛”이라는 연유를 통하여 시를 다시 눈여겨보게도 한다. “홍원태 나염방에서 결국 나도 남색지려”를 결행하거나, “쪽빛을 가르며 그대 마음에 이르”려는 마무리가 현재와 미래를 능청스레 연결한다. 아니 결심을 단호하게 내비치기도 한다. 그 구성이 ‘수미일관(首尾一貫)’으로 매조지되어 “끝끝내 쪽빛”으로 되돌아온다. 그건 독자를 사로잡을 “끝끝내”와 같은 집념이기도 할 것이다.
더위가 대군을 몰아 성 밖을 에워싸니
수천 번 전투에서 창 하나로
이제는 화분에 앉아 전쟁사를 읽는다.
-김옥중 「한여름 산세베리아」 전문
시조의 소재는 “전투”와 “창”이다. 거대한 “더위”로 상징되는 “대군”에 맞서 날카로운 “창”으로 치열하게 싸울 “전투”이다. 창은 거실에 놓인 “산세베리아”의 모습과 같으며, 화분이란 “성 밖”에 일어난 전쟁에서의 주 공격무기이다. 이처럼 굳센 산세베리아를 “더위”와의 전투에 비견함으로서 이미지와 관념 사이를 좁혀 보인다. 만일 소재나 주제가 단일 이미지로만 결합된다면, 시가 답답해짐은 물론, 박차고 나아가려는 결기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조는 그런 붙박이식 상상을 차단하며 〈더위→대군→성〉 [초장], 〈산세베리아→전투→창〉 [중장], 〈화분→전쟁사→읽기〉 [종장]의 과정을 밟는다. 해서, 각 단계 마다 결전 자세에서 오는 전이가(轉移價)를 톺아 보인다. 화자는 한 여름 집안에 든 산세베리아의 무용담을 듣는다. “더위”란 침입군을 “창” 하나로 물리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전쟁사”란 산세베리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더위가 대군을 몰아 성 밖을 에워싸”는 전황(戰況)처럼, 찌는 듯한 계절에 “산세베리아”는 화염 방사하는 전투를 치러내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 왔다. 그러나, 그가 한때 과도하게 써먹던 창은 이제 들어앉아 있다. 수없이 공격하며 뚫고 지나와 이젠 거의 표박된 듯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 더위에 자신의 옛 “전쟁사”를 다시 쓰려 할지도 모른다. 이 시조는 그걸 시인의 입장으로 비견해 보인다. 왜냐하면 젊었을 때 마냥 휘두르던 글쓰기 붓이 어느덧 늙어 무디어졌기 때문이다. 해서, 산세베리아처럼 예리한 필을 다잡으며 시 쓰기를 벼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적과 싸웠던 그때의 치열성을 ‘회상’한 결과일 것이다. 그건 지금 ‘상상’에 다다른 바 시인의 결심 포인트이기도 할 것이다.
3. 미세한 징후는 왜 시의 운명을 결정하는가
미국의 비평가인 와버 윈터즈(Yvor Winers,1900~1968)에 의하면 ‘언어란 이중적 성질을 가진 표현체(表現體)’라 정의한다. 그는 개인이 사용하는 단어란 거의 회상적인 동시에 그 안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정의한다. 폴 발레리는 「순수시론」에서, 시의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회상과 상상을 전달하는 상징’을 병행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는 과거에 대한 ‘회상적 상상’으로 시적 깊이를 더할 수 있다 했다. 비평가 존 랜섬(J.C.Ransom,1888~1974)도 지적했듯 시인의 과거 〈회상〉이 〈상상〉으로 발전함은 ‘시의 기술’을 풍부하게 하는 하나의 단초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하여,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1884~1962)는 ‘이미지에 있어서 작은 뉘앙스가 반드시 작은 생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여, ‘상상력이 이미지를 결정하는 것이지 이미지가 상상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강조한다. 이 글 서두에서 밝힌 바, 그는 ‘아주 예민하게 된 회상과 상상하는 정신에 있어, 가장 미세한 표징이나 징후조차도 시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고 역설한다. 사실 시에서 이미지의 뉘앙스가 크든 작든, 그것은 사물의 움직임과는 별 관계가 없다. 작은 뉘앙스라도 큰 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반대로 큰 뉘앙스라도 작은 동력에 그칠 수 있는 이유에서이다. 옛일에 대하여 〈회상〉하는 일은, 시인에 따라 〈상상〉 쪽으로 증대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다만, 시가 옅어지기 때문에 디테일한 상상을 보태거나 기워 더 깊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현재와 같은 펜데믹의 시대에 전통적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시가 뭐 특별히 치유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잔의 “죽로차”로 맞이하는 청량감은 코로나를 극복하는 명상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옛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꽃이름”은 그것으로 찬란한 만개를 기다리거나 또는 만개를 보며, 상처를 잊는 가슴 벅찬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어떤 사건으로 숨어 살아야 했던 누님과 매형, 그들이 사는 옛 “문간방”에서 잊혀졌던 화자의 그리움까지 깨어나 우리를 이 즈음에 호명한다면…. 그리고 나아가,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듯 휘감는 “남색꽃천”의 “쪽빛” 속으로 들어가는 사뿐한 나비 같은 보행도, 이 난세를 지나친다면, 쏟아지는 햇발을 딛고 다시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구색 맞춰 입을 쪽빛옷감을 준비라도 하는 기회이다. 여름 화분 속의 “산세베리아” 같은 표창(鏢槍)으로 이 맹위의 코로나를 찔러보기도 하며….
그렇다. 더딘 행보지만 오늘 시가 이만큼씩 다가와 삶을 응원한다. 시가 있기에, 사물 사이 교집합들에 얽힌 〈회상〉과 〈상상〉의 언어를 일으키며 시인은 〈성장〉할 수 있고, 복잡한 현대시를 더 독창적으로 〈성장〉시켜 나아갈 수 있다. 이제, 튼튼한 다리로 펜데믹의 늪을 건넌다. 다행이지 않는가. 현재의 〈미세한 상상〉은 낱낱 〈과거의 회상〉에 터하여 〈더 미세한 징후〉를 낳는 법이니.
시인은 병든 시대에도 바늘 끝보다 아픈 시를 운명적으로 벼리며 산다. 옛 ‘회상’이 지금의 ‘상상’을 무등 태워 올릴 때, 그대는 ‘성장’의 손뼉을 크게 징검징검 울릴 일이다. 그러면…, 오래 기다린 커튼콜과 함께 그 동안 진저리난 몸부림으로 견디었던 타투의 시가 화려하게도 살갗에 드러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