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상好喪
시끌벅적하다. 침잠해야 할 어머님의 장례식장에 웃음소리가 담을 넘는다. 잔치집인지 초상집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형제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지인들에게 건네는 인사에 정이 담뿍 실린다. 저만치에서 문상객들이 술잔을 부딪치며 '호상' 이라고 한다.
사람의 수명이 길어졌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에 가면 '호상' 소리를 쉽게 듣게 된다. 대개 망자가 병치레 없이 복을 누리며 살만큼 살다 돌아가셨을 때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다. 좋을 호好에 상喪이 보태지면 '잘 돌아가셨다' 는 의미를 가졌으나 결코 속뜻이 나쁜 것은 아니니라.
인간사 죽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채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아이의 죽음은 가엾기가 이를 데 없다. 한창 일할 나이에 당하는 죽음, 병마와 싸우다가 혹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당하는 죽음도 애석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중에도 애달고 애달픈 것이 젊은이의 죽음이 아닐까. 나이 든 부모님이라 해도 불시에 떠나가면 자식들은 천지가 캄캄해질 수밖에 없다.
죽음은 예순이 막 넘은 친정엄마를 다시는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엄마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슬픔조차 호강에 겨운 수작이란 생각만 들었다.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갔으나 이미 엄마 손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눈 한번 못 맞추고 떠나보낸 심정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이 한갓 바람 앞의 촛불처럼 여겨졌다.
느닷없는 친정엄마의 시한부 선고에 어쩔 줄 모르던 우리는 신기루 같은 기적을 바랐었다. 희망의 끄나풀이라도 잡고픈 심정은 장사꾼의 이야기에 팔랑귀가 되었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는가. 별리를 앞에 둔 우리는 이별을 준비했어야 옳았다. 가보고 싶었던 곳, 먹고 싶은 것, 가슴속에 담아 두고 하지 못한 속마음을 들려주었어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엄마와의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 같아 두고두고 가슴이 아팠다.
지난겨울, 무단히 감기로 입원한 어머님은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꼬박 이틀을 길고 긴 잠꼬대로 정신없이 주무시더니 하루는 말짱해지셨다. 아흔의 당신은 갓 시집왔을 적에 겪은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어른의 애정이 각별했다는 대목에선 새색시처럼 곱게 웃으셨다. 내 손을 꼭 잡고 아이들 잘 키우고 오순도순 재미나게 지내란 말씀도 했다. 그 길로 쾌차하실 줄 알았으나, 다음날 또다시 호흡이 고르질 못했다. 불현듯 황망히 떠나보낸 친정엄마 얼굴이 어른거렸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을 이가 어디 있으랴. 어머님도 하마 아무도 없는 밤에 홀연히 떠나게 될까 봐 불안해했었다. 가시는 길 외롭지 않기를 빌면서 곁에 바투 다가앉았다.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일랑 부디 내려놓으라며 당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의식이 혼미한 중에도 당신은 느끼고 들리는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편안한 모습으로 영면에 드셨다.
어머님 장례를 치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죽음은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먼 길 떠나기 전에 교감하고 갈무리를 잘하면 별리의 아픔을 견뎌내기가 한결 수월하지 싶다. 친정 부모님 임종을 못 했던 아쉬움에 다시 생각 하나가 일어선다.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이승의 끝자락에서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간에, 온전한 작별 인사를 나눈 경우야말로 호상好喪이 아닐까 하고.
장례식장은 고인의 마지막 의식을 치루는 자리이다. 생로병사를 겪어온 한 생명을 애통해하는 마음이 거기 있으면 좋겠다. 영정사진의 주인공은 정든 이들 곁에 머무르고 싶을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노인이 생을 달리했더라도 호상이란 말을 입 밖으로 내서 되겠는가. 먼 길을 떠나는 입장과 떠나보내야 하는 이의 심정을 짐작할 일이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초상집에서 망자를 그리며 망연히 앉았는데, 중년의 사내들이 아무렇지 않게 '호상'이라며 웃고 떠든다. 고인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아는 할아버지가 흘끔 눈을 치켜뜬다. 울컥하며 중얼거리던 그의 대사가 잊히질 않는다.
“니미 호상은, 호상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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