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에 대하여는 답사기 (17)편 '인천'편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이 먼저 개항되었는데 그중 부산이 가장 일찍 개항되었다.
개항후 일본은 부산지역에 전통마을인 동래를 대신하여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시작, 용두산 주변에 일본인 거류지를 만들고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망, 교량, 상하수도 설치등으로 자국민(일본인)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어촌이었던 부산을 도시화하였을뿐만아니라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위한 시설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교두보로서 부산 북항과 부산진, 영도등지에 매축을 통한 항만공사등으로 조선의 침략과 수탈에 필요한 사회간접시설등을 건설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부산의 해안을 매립하여 시가지를 확대하고 도로와 항만을 건설함으로써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만들었다. 수많은 일본인이 부산에 정착했고 거리에는 일제가 공들여 지은 근대건축물이 즐비했다. 당시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지난 시절 개발 바람을 타고 사라졌지만, 근대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지지도 온전하게 보존되지도 않은 모습으로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또한 부산은 6.25전쟁중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다. 그시절의 피난정부의 기록과 흔적이 남아 있는곳이다.
부산하게 하룻만에 돌아본 부산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ㅇ 감천동 문화마을
부산지역내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보기전에 우리는 한국의 산토리니 혹은 마츄피추라고 불리우는 감천동 문화마을을 먼저 들렸다.
이곳은 6.25전쟁후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산자락을 따라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진곳이다.
작은 집들의 묘한 구조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들이 영화, 사진등에 많이 등장하면서 벽화마을로 소개되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지만, 원래 이곳은 태극도인들이 모여사는 집단촌 같은 곳이다.
태극도는 1925년 전라도 태인에서 무극도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일제의 종교해산령에 따라 1936년 해산되었다가 1945년 해방에 따라 다시 나타나 태극도로 이름을 바꾸어 부산 보수동으로 모여들었다가 정부정책에 따라 철거되어 1955년 무렵부터 감천동으로 모여들게 되었다고 한다.
ㅇ 부산 근대역사관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49호)
감천동을 둘러 본 후 부산 근대역사관에 들렸다.
이곳은 일제강점기때 조선수탈의 총본산,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가 해방 후 1999년까지 미문화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1929년에 지어진 근대식 건물로 최초에는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되었고, 해방후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이 되었다. 이후 부산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요구로 미문화원이 철수하고 1999년 반환받았다.
바로 1989년 5월 3일 동의대 사태가 벌어진곳이다. 참 역사적으로 많은 굴곡이 있던 곳이구나.
지금은 부산 근대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 전시하는 역사관으로 변모하여 많은 답사꾼들이 들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전시물 관람과 설명을 듣고 부산에서 조성한 갈맷길을 따라 용두산을 끼고 돌아 걸으면서 몇곳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부산 근대역사관>
<개항 당시 부산의 모습... 부두가 보이고 영도다리가 보인다. 영도다리 개폐를 보려고 몰려든 시민들...>
<근대역사관을 둘러본 후 갈맷길을 따라 용두산으로 올라갔다.>
ㅇ 용두산 공원
부산타워가 우뚝 서 있는 용두산공원은 예전에 일본인들의 성지였다. 바로 부산타워 자리에 일본신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남산에 신사를 세웠듯이 부산은 용두산 공원에 신사를 세웠다.
원래 용두산은 산의 형태가 용이 바다를 바라보듯 일본을 삼킬듯한 형세를 하고 있다하여 龍頭山이라 불리웠는데 6.25전쟁 당시 대화재가 발생하여 피난민 판자촌 1,000채가 넘게 불타버렸다. 헐벗은 산이 되어버린 용두산은 1955년에 지금의 충무공 동상을 제막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이 되었다가 4.19 혁명이후 다시 용두산 공원으로 환원 되었다.
부산탑으로 불리는 부산타워는 1972년 착공, 1973년말에 준공된 120m높이로 해발 69m공원 정상에 세워진 부산의 명물이다.
1997년에는 시민성금을 모아 '부산 시민의 종'을 건립하여 제야의 종등을 타종하고 있다.
<용두산 공원... 부산탑이 높이 서있고, 이순신 장군 동상과 부산 시민의 종이 보인다. 그 앞에는 꽃시계가 예쁘게 돌아간다.>
ㅇ 40 계단
부산 중구 뒷골목, 6.25전쟁시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이 40 계단 주변에는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밀집지역이었고,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내다파는 장터였으며, 헤어진 가족의 상봉장소로 유명했다. 영화에도 많이 등장하였으며 현재는 문화관광 테마거리를 조성하여 전쟁 피난민과 부두노동자의 애환을 느낄수 있도록 하였다. 참 많은 사연들을 묵묵히 지켜본 계단이다.
<40 계단... 기념비가 서 있고, 아코디언을 켜는 인물상이 중간에 세워졌다.>
<당시 생활상... 뻥튀기 모습이다.>
<40계단 가기 전에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선생을 기린 백산기념관도 둘러보았다.>
ㅇ 보수동 책방 골목
보수동 책방골목은 국제시장입구에서 건너편 보수동쪽 사선방향의 좁은 골목길에 집결된 책방들을 말한다.
8. 15 해방이후 헌책을 난전을 벌여 파는 문화가 형성되었고, 6.25전쟁 이후 각 건물 처마밑에서 미군부대에서 나온 잡지등 헌책들을 노점에서 팔기시작하면서 지금의 책방골목이 되었으니 50년이 넘은 부산의 명물이자 근대역사의 흔적이다.
<보수동 책방골목 모습...>
ㅇ 부산 국제시장
부산을 대표하는 대형 시장인 부평시장, 깡통시장, 국제시장 그리고 그 유명한 자갈치시장도 모두 근대에 형성되었다. 특히 부평시장은 부산 최초의 상설시장으로, 이 시장이 성공을 거두자 다른 곳까지 상설시장이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일제는 이러한 상설시장을 조성함으로써 전통적인 조선의 5일장을 없애 나갔다.
이중 국제시장은 1948년 목조건물 12개동을 건립하여 '자유시장'이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6.25전쟁과 더불어 피난민들이 모여들고 미군의 군호품과 군용물품이 유통되면서 '도떼기시장'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지금은 부산영화제 거리와 더불어 관광 명소로 부각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사실 이 시장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것이 아니라 골목골목 이어져있다.>
<여행객들에게는 단연코 먹거리가 관심품목이다....>
<국제시장 BIFF 광장쪽 노점에서 인기제일은 단연 '씨앗호떡'이었다.>
ㅇ 구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동아대학교 박물관) (등록문화재 제41호)
구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는 1925년에 지어진 경남도청이었다. (그 이전에는 경남도청이 진주에 있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당시 임시수도정부청사로 사용되다가 전쟁후 다시 경남도청으로 이용되었으며,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되자 부산지방검찰청 본관 및 법원으로 사용된다. 법조청사가 거제동으로 이전후 2002년 동아대학교가 인수하게 되었으며 2009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박물관 3층은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기록실로 꾸며져있다.
<현재는 동아대 박물관인 과거 경남도청.... 6.25전쟁 피난시절 대한민국 임시수도 정부청사였다.>
ㅇ 임시수도당시 대통령 관저 (현 임시수도 기념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3호)
1926년 경남도지사 관사로 지어졌으며, 한국전쟁당시 부산으로 임시정부가 내려오자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가면서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유물전시를 위해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재단장하였다.
당시 대통령관저를 그대로 재현해놓았으며 뒷편 건물은 원래 부산고검장 관사였으나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확장개편하였다.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1층은 당시 관저를 재현해놓았으며, 2층은 원래 집무실이었으나 전시실로 꾸며놓았다.>
<당시 모습... 대통령 서재, 내실, 식당, 화장실...>
<복병산 배수지는 높은 곳에 있어 올라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현재 국내에는 3대의 근대전차가 남아 있다.
2대는 일본의 전차로 서울 역사박물관과 국립서울과학관에 복원, 전시되어 있고
미국 전차는 부산의 동아대학교에서 복원, 전시중에 있다.
<부산의 마지막 전차...>
ㅇ 부산 영도다리
부산 영도다리는 1934년 11월 23일 개통되어 당시 부산과 영도를 渡船(도선)으로 오가던 불편함을 해소함은 물론 하루에 몇번씩 들어올리는 다리구경을 위하여 인파가 몰려드는 명물이기도 하였다. 또한 8.15해방과 6.25전쟁 이후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애환과 망향의 슬픔을 달랬었던 장소였다. 전쟁 당시 영도대교 인근은 피난민으로 가득 메웠던 우리나라 근대사와 함께 해온 구조물인 동시에 근대 부산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다리였다.
그후 늘어나는 교통량과 영도지역 급수문제로 1966년 도개는 중단되어 일반다리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유일한 단엽식 도개교(bascule bridge)로 희소 가치가 매우 높은 교량이라는 점과 관광명물로의 가치가 존중되어 2013년 9월 15일 현재 47년만에 다시 복원공사를 마쳤으며 11월부터 개통한다고 하는데 교통에 지장을 줄것을 염려하여 하루에 한, 두번 들어올릴지? 한달에 몇번 정해놓을지는 미정이라고 한다. 그날을 기다려본다.
<1934년 11월 23일 영도다리 개통식... 이날 5만명 넘는 시민들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2013년 9월,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험중인 모습 (TV 캡쳐)... 11월말경에는 차량통행이 재개될것이라고 한다.>
Tip : 부산 맛집 18번 완당집
부산에 맛집은 한 두개랴마는 우리는 18번 완당집을 가보기로 했다.
원조 완당집을 찾아가니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TV에서 보던 그 집이 아니다?
문앞에 써있기를 '남포동 남천동 서면롯데백화점 완당점과는 무관'하다고... 그게 그집이었구나~
완당... 물만두 같은것인데 부드럽고 달콤하다. 옆에서는 발국수를 먹었다. 대나무발에 건져주는 모밀국수로 보인다.
< 계 속 >
ㅇ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cafe.daum.net/sm-academy
ㅇ 사랑하는 내인생 : http://cafe.daum.net/people4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