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마(水魔)
박 지 연
최근 집중 호우로 수많은 농경지와 집, 가축, 제방이 무너져 물에 잠기고 떠내려갔다. 서울 우면산의 산사태는 일본 쓰나미처럼 무섭게 밀려왔다. 소양강 부근 산사태로 인하대생들이 여름과학 봉사 나갔다가 팬션에서 아까운 젊은이가 인명 피해를 당했다. 낙동강 유역과 남부 지방도 도처에서 극심한 물난리를 겪고 있다. 중부 유럽의 독일, 오스트리아, 프라하, 헝가리, 러시아와 네팔 필립핀 등 아시아, 지역을 가리지 않고 세계의 도처에서 재해를 당하고 있다.
1998년 여름에도 많은 비로 특히 경기 북부지방과 그 주변, 임진강이 범람하고 연천지방은 상습 수재지구로 그 피해가 엄청 났었다. 그 때에도 정작 장마철이 지난 어느 날 게릴라성 폭우가 강타하여 경기 북부지방이 상상을 초월한 피해를 입고 많은 사람들이 떠내려가고 재산이 졸지에 수몰되는 지경에 이르던 날, 벽제에 사는 우리 공부동아리의 한 젊은이가 걱정이 되었다.
염려한 대로 밤에 노도처럼 밀려오는 황톳물,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산사태는 평지의 들을 지나 제방을 무너뜨리고 새로 지은 그의 집을 삽시간에 삼켜 버렸다. 잠자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 하나 달랑 들고 나온 가족들, TV에서 본 무서운 장면 그대로였다.
늘 갠지스강이 범람하여 상습적인 홍수 피해를 입고, 굶주림과 수인성 질병으로 시달리는 방그라데시의 수많은 사람들의 참혹한 장면을 볼 때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얼마나 고마워했던가. 한편 양쯔강의 대홍수가 중국 최대의 곡창지대를 강타하여 3천여 명이 사망하고 2억도 넘는 이재민을 내고 있다. 양쯔강 주변도시를 사수하기 위해 누런 거센 물살과 싸우며 수천 km의 제방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처절한 군, 경, 민의 모습을 보면서도 남의 일로만 여겼다.
그러나 기습적으로 쏟아 부은 폭우가 잠시 잠잠하던 날, 우리는 그를 방문했다. 그곳은 논과 밭, 집까지 휩쓸어 부서진 가지가지가 엉켜 마치 폐허처럼 쑥대밭이 되어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는 너무나 참혹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웃옷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부서진 것들을 이리저리 치우고 있는 군인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인근에 있는 부대에 피해 있던 동네 사람들 중에는 자동차까지 쓸어 내려가는 걷잡을 수 없는 물살에 어린 자식과 가족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망연자실, 넋이 나가 있었다.
우리는 급하게 옷가지와 생활용품, 위로금을 모아 다시 찾았을 때, 그들은 그곳에 겨우 천막과 비닐하우스를 쳐 아침저녁으로 스미는 찬 기운을 피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의 옆에 오빠네 화랑도 수몰되어 40호가 넘는 귀한 그림들이 모두 수장되어 버렸다. 동양화, 서양화, 서예작품 등 작가들의 혼이 담긴 수십 점의 명작들이다. 그의 재산의 일부인 300 여 점의 분재도 송두리째 망가져 그들은 말 그대로 빈주먹이 되었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떠내려가다 비스듬히 누워 푸르름을 지키고 있는 인동초 하나가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사람은 예로부터 우거진 수풀을 배경으로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정붙이며 자연을 다스리고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다. 그 곳도 바로 그런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곳곳에 산을 헐어 제치고 허술한 제방 쌓기 등은 자연을 거슬린 사람들의 엄청난 잘못이다.
늘 포근하고 우리를 안아주던 산이 겁을 주고 말없이 생명수가 되던 냇물이 갑자기 수마로 돌변해 우리를 어렵게 할 줄 누군들 알았으랴. 수마로 인한 후유증은 도처에 엄청나게 널브러져 있다.
모두가 나서서 이재민들이 하루 속히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힘 써야 한다. 그도 다 잃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우리가 영란씨를 HOPE 라고 부른 것처럼 그는 마을의 일꾼이요, 희망이기도 했다. 여름날 땡볕에도 버텨내는 꽃처럼 강했다. 다만 반복되는 수난을 당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수방대책이 큰 교훈으로 남았다.
여기저기 둘러보는 동안 초가을의 해는 서둘러 서산에 숨고 풀섶의 이른 풀벌레 소리가 더욱 처량하게 들렸다. 우리는 울퉁불퉁한 길을 되돌아오며 그를 황량한 곳에 남겨두고 떠나옴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는 지친 생활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오래오래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연합신문
199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