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말라야’ 실제 주인공 엄홍길 대장을 만나다
아름다운 고성 바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도전, 희망, 의리, 희생, 휴머니즘. 이런 단어를 나열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람, 산악인 엄홍길(56)씨다. 영화 '히말라야'가 개봉 한 달여만에 누적관객 700만명을 훌쩍 넘어선 지난 1월 중순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그를 만났다.
"고향분들께 히말라야의 기운을 전합니다" 엄홍길씨는 수많은 직책과 직명을 가졌고, 지금도 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 (주)밀레 기술고문, 대한산악연맹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지만 '대장'이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린다.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엄 대장님'이라 부른다. 서울 중구 장충동 장충빌딩에 있는 엄홍길휴먼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엄 대장은 고향사람과 고향에 전하는 새해 인사말부터 시작했다. "60년 만에 돌아온 붉은 원숭이의 해입니다. 음양오행에서 붉은색은 큰 성공이나 생명 등 기운이 번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사정이 여전히 어렵지만, 새해 경남도민 모두 소망하시는 일 성취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의 고향 경상남도 또한 대한민국에서 으뜸가는 도가 될 수 있도록 히말라야의 기운을 전해드립니다." 내친김에 고향 이야기부터 들었다. 워낙 유명인인 데다 영화 '히말라야'의 흥행으로 연말연시 엄 대장과 영화 이야기 등이 많이 소개됐으니 그런 이야기는 뒤로하고. "어릴 때 고향 큰집에서 부모님을 따라 외갓집에 가기 위해 산길을 걸어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펼쳐지는 남해바다의 전경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잔잔한 파도가 햇빛을 받아 은빛 물결을 이루고 점점이 섬이 떠 있는 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호수 같은 바다였지요."
영현면서 출생, 외가 삼산면 추억 많아 엄 대장의 외갓집은 고성군 삼산면 장치리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바다는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고성 자란만이다. 자란만은 장치리 가까이에 목섬과 솔섬, 밤섬, 자란도 등의 섬과 크고 작은 바위섬을 품고 있으면서 예부터 어패류가 풍부한 바다다. 지금은 굴 양식장이 펼쳐져 있고, 세계적인 청정 굴생산해역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엄 대장은 이곳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고 낚시하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해삼을 낚아 올리던 이야기를 할 땐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지 얼굴에 웃음이 퍼지며 아주 상세하게 묘사했다. "노 젓는 작은 고깃배에서 허리를 구부려 밑면에 유리를 댄 나무통을 통해 바다 밑을 내려다보면서 끝에 작은 갈고리를 단 작대기로 해삼을 걸어 올릴 땐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친가가 있는 영현면은 고성에서도 내륙지역이어서인지 추석 때면 삼촌과 함께 산에 가서 밤을 따고, 겨울이면 큰어머니가 독에 재워놓았던 홍시를 꺼내 주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에서 태어난 엄 대장은 세 살 때 부모님을 따라 경기도 의정부로 이사 갔는데도 이처럼 고향에 대한 아름답고 애틋한 추억을 지금도 떠올린다. 명절과 친가·외가 등 집안에 잔치가 있을 때면 부모님을 따라 고향에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향 이야기 할 땐 얼굴에 웃음부터 엄 대장이 1960년생이니 60~70년대 설이나 추석 때면 선물꾸러미를 들고,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고향을 찾는 귀성행렬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엄 대장도 "남한의 최남단에서 최북단으로 이사 간 우리 가족이 명절 때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걷고 하면서 고향에 갔던 장면은 마치 피난 가는 행렬과 비슷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때마다 어린 엄홍길은 대부분 영현면 큰집에 갔다가 10㎞ 정도 떨어진 삼산면 외갓집에 들르는 게 정해진 코스였다. 지금은 자동차로 10여 분이면 닿지만, 당시 크고 작은 고개를 몇 개 넘어 걸어서 다녔다. 2남2녀 중 위로 누나를 두고 둘째이자 장남인 엄 대장은 걸음마를 시작할 때쯤부터 외할머니 품에서 많이 자랐다. 어머니가 원도봉산(도봉산의 의정부 쪽 지명) 자락에서 등산객을 상대로 음식을 만들어 팔았던 가정형편 때문인지 가족이 의정부로 이사 간 뒤에도 어린 엄홍길은 외갓집에 자주 맡겨졌다. 그래서인지 엄 대장은 강연과 언론 인터뷰 등에서 고향 고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고향 이야기를 할 때 표정이 가장 밝았다. 그만큼 고향에 대한 추억과 애정을 많이 갖고 있다. 지금도 아버지 산소가 있는 고향에 가끔 들를 때나 행사 때 고성에 가면 아늑하고 편안하다고 한다.
영화 '히말라야' 통해 휴먼스토리 조명 엄 대장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1989년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4좌를 세계 8번째, 한국인 최초로 완등했다. 14좌 외에 8000m가 넘으면서도 주봉과 산줄기가 같아 위성봉으로 분류되는 얄룽캉과 로체사르를 더해 16좌라 부르기도 한다. 엄 대장은 2004년과 2007년 각각 얄룽캉과 로체사르를 등정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16좌를 완등한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05년에는 1년 전 에베레스트 등반 도중 사망한 동료이자 후배 산악인 고 박무택(당시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대장)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휴먼원정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로 가 수습해오다 악천후를 만나 도중에 돌무덤을 만들어 편히 쉬게 한 이야기로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히말라야'는 이를 소재로 했다.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이 목숨을 건 등정을 오로지 우정과 의리로 무장한 휴먼원정대의 스토리는 당시 방송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서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가 많이 들어왔지만, 엄 대장은 고사했다. 그러다 우리 사회가 너무 각박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메말라가는 것 같아 휴먼원정대 이야기가 인간애, 희생정신, 우정, 진정한 의리 등과 같은 가치를 조금이나마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해서 수락했다.
"11월 거류산 등산축제 때 만납시다" 엄 대장을 위대한 등정을 한 신화적인 산악인, 세계 산악계의 전설 등으로 부른다. 하지만 그는 "설맹에 걸려 8750m에 혼자 남은 박무택을 구하기 위해 전진캠프를 떠나 혼자서 올랐다가 박무택을 만난 후 힘에 부쳐 조난당해 끝내 돌아오지 못한 백준호 대원(영화 속의 '박정복', 배우 김인권 분)의 당시 등정이 '가장 위대한 등정'"이라고 말한다. '영화 흥행으로 많이 바쁘실 것 같다'고 물었더니 "영화 때문에 특별히 바쁜 것은 아니다"며 "다만 새로운 17좌를 위해 좀 바쁘긴 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17좌는 히말라야 오지에 학교 16개를 짓는 일이다. 16좌 완등의 의미를 담았다. 2월 중 1개를 준공하면 10개째 완성한다. 이를 위해 엄 대장과 후원자들은 지난 2008년 엄홍길휴먼 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은 장애인 등반대회, DMZ평화대장정, 청소년 희망원정대 등 우리사회에 희망을 전하는 일들도 하고 있다. 엄 대장의 개인 프로필을 보면 기관·단체의 홍보대사 직책만 28개나 나온다. 강연과 산행행사 동행 요청도 많이 받는다. 매년 11월이면 고성군에서 개최하는 '엄홍길대장과 함께 하는 거류산 등산축제'도 그중 하나다. 엄 대장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거류산 자락에 있는 '엄홍길전시관'을 찾는 분들이 많아졌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올해 거류산 등산축제 때 고향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면 한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글 최춘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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