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다양한 성격의 문화 공존
속초는 행정구역상 고성군, 양양군, 인제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태백산맥의 주요한 산인 설악산으로부터 동쪽 방향으로 흐르는 세 하천에 의해 3분된다.
제일 북쪽의 장천천은 영랑호로, 중앙의 청초천은 청초호로, 남쪽의 쌍천은 동해로 유입되어 작은 분지를 이루게 되고 동서로 발달한 하천을 따라 인구의 이동이 이루어져 농업이 발달하였고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이동하면서 어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하천의 근원지인 설악산은 웅장한 산세와 기암괴석, 깊은 계곡 등으로 관광지로 개발되었고 그 이전에는 산촌생활의 근거지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은 지역의 중요한 문화형성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문화는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속초문화를 규정짓는데 이러한 특이한 지형적 여건은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건은 속초의 문화를 농경문화, 어촌문화, 산촌문화가 공존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제2절 문화 단절 현상
현대 속초 문화의 가장 큰 특성은 전통적 삶의 양식과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현대 속초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지난달부터 이곳에 대대로 터 잡고 살아오면서 문화 양태를 전수받은 이들이 아니고, 당대의 격심한 사회 변동으로 갑자기 유입된 새로운 세력들로 재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속초는 고유 전통 문화의 승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해 다소 기형적인 문화 양상을 보여왔다.
1945년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국토는 분단되어, 우리 속초는 이른바 ‘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때 이 지역의 엘리트 계층 즉, ‘문화 주도 세력’들은 ‘해방된 조국의 역군’으로 인민 공화국 정부에 적극 협조하게 됨이 당연시 되었다. 따라서 1950년 전쟁이 나고 수복이 되자, 이들은 자진 월북할 수밖에 없었고 또는 납북 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속초 지역은 문화 주도 세력이 소멸되기에 이른다.
실제로, 1919년에 개교한 대포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들의 해방을 추적해 보았더니, 60여명의 졸업생 중 20여명이 북한에서 생활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당시 보통학교는 이 고장 유일의 현대 교육기관이었고, 그 졸업생은 이 지역의 엘리트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문화 주도 세력들의 상당수가 월북 또는 납북의 형태로 ‘在北’의 상태에 있었음은 전통 문화 소멸의 원인을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예이다.
3절 이질적 문화의 혼합 현상
이 실향민 인사들은 함경남북도 전역과 평안남북도, 황해도 출신들이 고루 섞여 있었으므로, 유년시절의 문화적 체험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공통의 문화적 색깔을 찾아내지 못함으로써 속초는 상당히 오랫동안 문화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도 북한 통치하에서는 견딜 수 없는 세력, 즉 브루조아 계층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각기 자기 지역의 문화 주도 세력들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속초에는 북한 전역의 문화가 유입되어 기존의 문화와 혼합하는 형태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중요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는 북청사자놀음의 경우, 속초에 거주하던 피난민들에 의해 재현된 것이 남한에서의 최초 공연이다. 이들은 1·4후퇴 이후 이곳에 정착하면서 함경도 북청 지방 특유의 공건물인 도청을 짓고 1957년부터 자신들의 민속을 재현했는데, 이것이 그 10년 후 서울을 전승지로 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생활양식에도 변화를 주어 어민들의 경우 조업 방식이나 선박 건조 방식 등도 북한 지방의 것이 도입되었고 어로요도 북한 지방의 것으로 재현되고 있다.
북한 문화는 언어생활에도 침투해 북한 방언이 오히려 속초 고유의 방언을 밀어내고 있기까지 했다.
이렇듯 실향민의 유입으로 속초 문화는 획기적 변화를 겪게 되며, 고유의 민속문화는 소수세력으로 남는 기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사실 실향민의 유입은 속초뿐 아니라 인근 고성·양양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실향민들 대부분이 어업이나 상업에 종사했고, 농사를 짓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일부 해안 지역과 도심지만이 이들 실향민들에게 노출되었을 뿐이고, 농경 문화권은 여전히 보호될 수 있었다. 따라서 속초는 도문동, 노학동 등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이 실향민들에 의해 노출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전통적 삶의 방식을 보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이해된다.
결국 유년 시절의 문화적 체험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새로운 문화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속초 문화는 이질적이고 혼합적인 문화 양식을 보이며 문화 공동화 현상이 한동안 유지된다.
제4절 피난민 문화 창출
속초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은 피난민 문화가 차지한다. 피난민은 해방기에 3,561명, 동란기에 48,722명이 유입되었으며, 이 가운데 함경남도가 92.9%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북청·영흥·단천·홍원·이원군 순이다. 이들은 대부분 함경남도 해안출신으로 1·4후퇴 때 가장 많이 월남했으며, 1·4후퇴 후 휴전시, 6·25전쟁 발발시 등이다. 이렇게 모여든 피난민들은 난민이라는 집단 개성을 유지하여, 경제활동과 사회문화활동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어로작업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갖게 됨으로써 난민사회는 안정감과 결속력을 다져 나갔다.
속초 피난민의 민속은 피난민의 정착과 삶이라는 남북분단사 내지 난민사와 일정한 연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해방이후 북한 공산치하를 탈출한 피난민과 6·25전쟁 때 월남한 북한 주민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월남하였고, 난민취락을 형성하면서 집단으로 생활하였다.
초기에 속초에 정착한 피난민들은 이질적인 언어관습과 행동양식, 생활풍습, 문화방식 등으로 토착주민들과 융합되기가 힘들었으나 전쟁 중이거나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복구기간에 피난민 모두가 힘을 합쳐 함께 살아야 한다는 명제 하에 대집단을 형성함으로 심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더구나 이들 대부분은 주거지가 형성되지 않은 공지나 해변가에 임시로 집을 짓고 살면서 직접적인 마찰을 피했으며, 곧 통일이 되어 공산국가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면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일념으로 일시적인 거주 방식을 취했다.
경제활동의 경우 대부분 이들이 생업으로 종사했던 어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동명동과 청호동 일대에 한 두 가구가 모여들기 시작함에 특색이 강한 독자적인 ‘난민의 섬’(Refugee island)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속초에 거주한 북한 피난민들은 나름대로 전통을 고수하면서 한편으로 토착민과 일정한 민속 문화적 교섭을 가졌다. 그러한 예로 북청도청(北靑道廳)을 만들어 사자놀음을 하면서 지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정서적 갈등을 해결했으며, 이를 통해 결집하면서 강인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소득을 올리며 주변 이웃과 공유하면서 원만한 적응을 이루었다. 또한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자녀교육에 매진하여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면서 지역에 공헌하였다.
이러한 실정에 비추어 보면 속초 피난민과 그들의 민속은 지금까지 피난 1세대가 아직까지 생존해 있으므로 시대적 특수한 상황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는 복합적 민속문화의 양상을 띠고 있다.
첫댓글 속초문화원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