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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USA - WORLD HERITAGE 원문보기 글쓴이: 고영준
한국의 유교책판 [Confucian Printing Woodblocks in Korea]
국가 :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大韓民國)
소장 및 관리기관 : 한국국학진흥원(韓國國學振興院)
등재연도 : 2015년
‘유교책판(儒敎冊版, Confucian Printing Woodblocks in Korea)’이라고 불리는 이 기록유산은 조선시대(1392~1910)에 718종의 서책을 간행하기 위해 판각한 책판으로,
305개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한 총 64,226장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유교책판은 시공을 초월하여 책을 통하여 후학(後學)이 선학(先學)의 사상을 탐구하고 전승하며 소통하는 ‘텍스트 커뮤니케이션(text communication)’의 원형이다.
수록내용은 문학을 비롯해 정치, 경제, 철학, 대인관계 등 실로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음에도 궁극적으로 유교의 인륜공동체(人倫共同體) 실현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문중-학맥-서원-지역사회로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지역의 지식인 집단은 ‘공론(公論)’을 통해 인쇄할 서책의 내용과 이후의 출판 과정을 결정하였다.
제작 과정부터 비용까지 자체적으로 분담하는 ‘공동체 출판’이라는 출판 방식은 유례를 찾기 힘든 매우 특징적인 출판 방식이다. 또 이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이러한 관계는 500년 이상 지속되면서 ‘집단지성(集團知性)’을 형성하였다.
영구적으로 보존되어온 영원한 학문의 상징으로서 유교책판은 서책을 원활하게 보급하기 위해 제책(codex) 형태로 인출하도록 제작되었으며, 현전하는 모든 책판은 지금도 인출이 가능할 정도로 원래의 상태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유교책판이 본래 서책을 인쇄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은 틀림없지만 단순히 인쇄용 매체로서 기능이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유교책판은 선현(先賢)이 남긴 학문의 상징으로 간주되었고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누대에 걸쳐 보관 및 전승해왔다.
• 공론(公論)
유교책판은 모두 ‘공론’에 의해 제작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공론(公論)’이란 당대의 여론 주도층인 지역사회의 지식인 계층의 여론을 뜻한다. 때문에 서책 전체에 관한 것이든 아니면 부분적인 내용에 관한 것이든 공론에 어긋나는 내용은 출판이 제한되었다. 이렇게 공론에 따라 만들어진 목판은 파손되지 않게 후대를 위하여 보존되었고 이에 따라 후대는 스스로 해당 내용을 출판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의 기록문화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하고도 독특한 특징이다.
• ‘공동체 출판’ 네트워크
책판으로 인쇄된 서책들은 지역 공동체의 주도 아래 간행되었다. 공론의 주도자들은 문중-학맥-서원-지역사회의 주요 인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유교책판을 판각할 계획부터 판각 내용을 선정하고, 판각 과정과 완성 과정을 감독하고, 서책을 인출하고 배포하는 모든 과정을 담당하였다. 유교책판의 제작에는 개인이나 문중이 독자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비용이 필요한데, 그 비용까지도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이 서로 분배하여 부담하였다. 유교책판의 일관된 주제는 유교 공동체 사회의 구현이었으며, 이러한 내용을 담은 유교책판 역시 공동체 출판이라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 집단지성(集團知性)
유교책판의 학문적 의미는 5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집단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learning)’에서 찾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각각의 저자들은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책판에 담겨 그들의 제자들에 의해 다음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전승되었다. 한편 제자들은 스승의 학문적 성과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토론과 비판을 거쳐 그 내용을 반영하여 전승하였고 이는 모두 책판에 수록되어 전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유교책판에 수록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인륜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주제는 시대에 따라 발전하고 보다 구체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교책판을 통하여 학자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가치는 세계사가 추구하였던 보편적인 인간 가치와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된 유교책판은 각각의 서책을 인쇄할 수 있는 유일한 판목(板木)들이다. 멀게는 550년 전의 것도 있으며 가깝게는 60년 전에 제작된 것도 있는데 각각의 책판들은 단 한 질만 제작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원본’이다. 활자본과 달리 판목에 직접 새긴 목판본으로서 후대에 새로 제작된 번각복(飜刻本)도 거의 없는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유산이다. 때문에 이 책판이 어떤 방식으로든 훼손된다면 550년 동안 지속되었던 집단지성의 전통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성학십도 유교책판
한국의 유교책판 [문화재청]
유교책판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저작물을 간행하기 위해 판각한 책판으로, 305개 문중·서원 등에서 기탁한 718종 64,226장이다.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유교책판은 선학과 후학이 책을 통하여 서로 소통하는 text communication의 원형으로, 국가주도로 제작되어 종교적인 목적을 담은 한국의 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과는 달리 유교책판은 국가가 아닌 각 지역의 지식인 집단들이 시대를 달리하여 만든 것이다. 수록 내용도 문학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대인관계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지만 모든 분야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유교의 인륜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진정성
유교책판은 저자의 직계 후손들이 길게는 550년, 짧게는 60년 이상을 보존해 온 기록물로, 모두가 출처가 분명한 진본이다.
유교책판의 일부는 이미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에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나오며, 국가에서 만든 각종 ‘책판 목록집’에도 대다수 유교책판의 존재가 기록되는 등, 국가의 공식 기록물을 통해서도 그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책판은 인쇄문화사에서 드물게 <공론> 에 의해 제작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제작과정에서 수차례 교열이 이루어져 내용에 허위나 오류가 수록될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공론을 통해 인정된 매우 정제된 내용만 수록되어 내용상의 진정성도 확보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책판 제작 과정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물인 『간역시일기刊役時日記』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세계적 중요성, 대체 불가능성
한국의 유교책판은 책을 인쇄하기 위한 매체로서 제작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유교책판은 단순한 인쇄매체의 기능을 넘어 선현의 학문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후학들에 의해 보관 전승된 것이다.
첫째, 유교책판은 모두 <공론> 에 의해 제작되었다. 지역사회의 지식인 집단의 여론을 공론이라 하는데, 당대의 지식인 계층이 공론을 주도하였으며, 공론에 어긋나는 내용이 담긴 책판의 전부 또는 일부분은 인출에서는 제한되었다. 인출이 제한된 책판은 없애지 않고 그대로 남겨 후대의 판단으로 다시 출간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는 한국의 기록문화가 가진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둘째, 유교책판은 <공동체 출판> 의 형태로 책이 출간되었다. 공론의 주도자들은 지역사회에서 문중-학맥-서원-지역사회로 연계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들의 주도로 유교책판의 판각 계획부터 판각할 내용의 선정, 판각의 완성, 책의 인출, 배포까지 모든 과정을 담당하였다. 유교책판의 제작에는 개인이나 문중이 독자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비용이 필요한데, 이 비용까지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이 서로 분배, 담당하였다. 유교책판의 일관된 주제가 유교 공동체 사회의 구현에 있으며, 이 내용을 담은 유교책판도 공동체 출판이란 방식으로 진행된 것은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예이다.
셋째, 유교책판에 담긴 학문적 성과는 500여 년간 지속된 <집단지성> 이 이룩한 성과이다. 별개의 저자들이 시대를 달리하여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출간하였는데, 스승의 학문성과를 책판에 담아 제자가 이어받고, 다시 그 제자가 이를 이어받되, 맹목적인 전승이 아닌 토론과 비판을 통해 보다 진전된 내용을 책판에 수록하여 전승하였다. 이에 유교책판에 수록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인륜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일관된 주제가 시대에 따라 발전되고 구체화될 수 있었다. 유교책판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던 이러한 가치관은 세계사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인류 보편의 가치와 동질의 것이다.
넷째, 등재를 신청한 유교책판은 서책의 유일한 원형이다. 유교책판은 멀게는 550년 전, 가깝게는 6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각각 단 한질만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해진 ‘유일한 원본’이다. 활자본과 달리 후대에 새로 제작한 번각본도 거의 없는 것으로, 절대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것이며, 이에 유교책판이 훼손되면 550년간 지속된 학문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2014. 5. 17
대구경북의 유교문화와 목판
경북은 북쪽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경계로 삼국 때에는 고구려와 백제와의 교류가 제한되었고 경북남부의 중심지인 경주와도 거리가 멀었다. 더구나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전란의 피난처로 선호되었으며 때로는 정치적인 박해를 받아 은둔과 은거지로 용이하였다.
문화적으로도 보수 성향이 강하여 다른 지역의 문화를 늦게 수용한 감이 있다. 또한 대구 경북지역은 산지는 많고 경지는 좁기 때문에 경제생활도 그렇게 넉넉지 못하여 근검절약을 숭상하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음식문화를 보더라도 안동지방의 안동국시 헛제사밥이 고작이고 대구 또한 육개장이나 선짓국 등으로 질박한 음식문화는 물론 예술방면에는 저조하였다.
다행히 이 지역은 수리에 용이한 낙동강을 끼고 있어 배산임수의 집성촌이 발달하여 문중과 종가들이 많은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따라서 충효정신과 가족 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유교문화가 발달하여 일찍부터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안향 이제현 정몽주 정도전 권근 김굉필 이언적 주세붕 등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이들로 온건하고 합리적 학풍이 숭상되어 왔었다
특히 안동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역할을 한 태사묘의 인물이나 공민왕의 몽진 (영호루) 등 정치적 요인과 한국유학의 인맥을 이어 온 안동은 韓國精神文化의 首都 ,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 일컫고 있다.
문헌의 고장, 대구 경북
대구 경북의 중요한 유교문화유산은 기록 유산이다. 특히 문중 서원에서 생산, 보존한 기록유산은 그 정신적 가치가 크다. 그럼에도 이러한 문화유산들이 관리 보존의 사각지대에 놓여 분실되거나 도난당하여 멸실 훼손으로부터 보호하여할 과제로 대두되어 국가관의 기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조선왕실의 기록은 장서원에 있지만 민간의 기록은 방치상태에 놓였다가 근래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영남지역의 근간으로 목판을 수탁 받아 보관하고 있다
이렇듯 대구 경북 지역은 수양을 중시하고 心學的 경향이 뚜렷하고 修養論이 발달하여 지식교육을 중시한 것이다. 전국 향교의 18.7%가 서원은 196개소로 대구 경북에 소재한 것만으로 보와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목판(木板)
조선의 유교사회에서 목판(木板)은 선대 사람들이 후세에 지식을 전하기 위한 지혜의 보고로 선비 층에서는 가문의 영광이자 자랑으로 여긴 귀중한 재산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책판의 57%가 경상도에서 제작되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소장한 목판은 대개 경상도에서 서원, 향교, 저명한 문중에서 유학자들의 문집과 저술이나 족보 등을 간행한 책판들이다 이러한 책판은 조상의 유혼을 각인한 상징물로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였다. 그래서 최고의 정신과 자금을 동원하여 문집이나 족보를 간행하였다. 한국국학진흥원의 보관한 유교 책판은 718종 6만4226장이 세계기록유산으로써 등재를 원하고 있다
목판은 문집, 족보, 지리지(地理誌), 의서(醫書) 뿐만 아니라 영정, 과학서족, 능화판 같은 생활목판도 있고 천자문, 오륜행실도, 논어,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 등 당시 교과서 용도로 책들을 찍어내기도 했다. 또한 편액이나 주렴, 다식판이나 떡살 등 일상생활에서도 활용되었다.
목판 제작의 핵심적인 이들은 목판의 글자를 새기는 각수이다. 각수는 정신적인 문화사업의 핵심적인 인물로 승려가 많았고 속인도 있었다. 각수 중에 최고의 각수를 도각수라 한다.
목판은 일제침략과 한국전쟁 때 화재와 도난으로 상당수 사라지고 각수의 수도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2008년 한국국학진흥원 수탁 국학자료 목록집
1. 진주강씨 통정공파
2. 안동김씨 감찰공파 운남공종친회
3.진주하씨충렬공파 (하용락)
4. 영천 고천서원
5. 청하 김해김씨 유수공파 소동문중
6. 울진장씨 중랑장공파(화방분파)
7. 아주신씨 오봉종택
8. 영양 난정계회
9. 도산서원운영위원회
10. 달성서씨 현감공파종중
11. 남양홍씨 문정공파 치당문중
12. 한양조씨 옥천종택
13. 청주정씨 죽헌고택
14. 청주정씨 추원재
15. 경주최씨 칠계 백불암종중
16. 안동김씨 삼당공파 현애문중
17.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
18. 의성김씨 만송헌고택
19. 하회 풍산류씨 귀촌종택
20. 함창김씨 물암종중
21. 안동권씨 복야공파 송제공후손
22. 무안박씨 무의공파
23. 의성김씨 월탄종택
24. 풍산류시 지산고택
25. 진성이씨 사곡파
26. 안동권씨 복야공파 도촌문중
27. 파평윤씨 야성군파 천평문중 우암종택
28. 안동김씨 사촌 삼우당파
29. 안동김씨 묵계 보백당문중
30. 반남박씨 숙천공파종중
31. 재령이씨 존재종택
32. 상주 홍양이씨 월간문중
33. 홍양이씨 창석파문중
34. 진주하씨 충렬공파(하시락)
35. 안동김씨 참봉공파
36. 진성이씨 대곡파 백운재고택
37. 창녕조씨 희천공파문중
38. 전주류씨 수곡파 대야고택
39. 봉화 반남박씨 낙한정파
40. 해주정씨 용강공파 모암문중
41. 밀양박씨 경헌고택
42. 청주정씨 청풍자공종중
43. 청주곽씨 함창파 양담종택
44. 남양홍씨 분천 농산고택
45. 문화류씨 곤산군파 귀정공파종중
46. 함창김씨 장소공주손
47. 안동권씨 복야공파 판서공계
48. 신안주씨 울진 충효당종택
49. 경주 남양홍씨 동와공파 판교문중
50. 진주강씨 통정공파문중
51. 영양남씨 영해 광계정
52. 영주 창원황씨 귀암종중
53. 영주 창원황씨 귀암종택
54. 봉화금씨 군위공파자산고택
55. 진성이씨 원촌파 원대종택
56. 영덕 경주최씨 침천정
57. 경주김씨 참의공파
58. 함안조씨 집의공파
59. 경주이씨 소정 덕봉공파문중
60. 안동김씨 감찰공파 둔굴재
61. 김해김씨 율은공파 막곡문중
62. 평산신씨 극재공 약목종중
63. 성산배씨 유산파 (참봉공파)
64. 동래정시 판서공파
65. 의성김씨 귀미파 문중
66. 의성김씨 손암공파
67. 원주변씨 거춘문중
68. 고성이씨 이가당
69. 평산신시 제정공파 통어사종가
70. 청주정시 약포종택우천공소천파문중
71. 영주 인동장시 서계공문중
72. 안동장씨 경당종택
73. 청송심씨 월오헌고택
2009년 한국국학진흥원 수탁 국학자료 목록집
호계서원, 도계서원, 함안조씨집의공파, 전주류씨함벽당종택,
평산신씨 미남문중, 청송심씨종중, 함양박씨묵재종택,
마곡서원, 진주강씨해은공파박사댁,
안동김씨구정공파지하, 진성이씨묵와고택, 진성이씨구계문중, 의성김씨삼열사공파,
순천김씨석애문중,
영천이씨운곡문중, 진주강씨산고문중, 풍산김씨심곡파종택
진성이씨주촌문중, 반남박씨가선공파, 풍천임씨강과공파, 도산서원운영위원회
창녕조씨훈도공문중, 밀양박씨문목공종가, 안동김씨대종회,
통영향교, 창녕조씨훈동공파자계정,
전주이씨송월재종택, 영천이씨충장공파농포문중,
진성이씨송당종택, 광산김씨정지재 광산김씨탁청정종가, 성산배씨등암종택, 영순태씨문중,
봉화덕수이씨월촌종택, 진주강씨통정공파, 달성서씨학유공파, 우계이씨종택,
경주최씨질암종택, 경주이씨소정문중, 경주이씨직장공파, 청송심씨월오헌고택,
고성이씨팔회당종택. 함안박물관 장헌구家. 기천서원,
순흥안씨충정공파, 고성이씨법흥문중(이동일), 고성이씨법흥문중(이종남),
풍천임씨청암가, 야성정씨참판공종택(괴음당), 영천이씨하연공파문중,
한양조씨하담고택, 풍산류씨대사간애운공문중, 풍산류씨양진당,
안동권씨정암문고, 풍산김씨망와문중, 풍산류씨진사택,
안동권씨석산문중, 안동김씨부사공파, 풍기진씨문중,
안동권씨정조공파, 전주이씨진남군파, 광산김씨낙음재,
영천이씨간산문고 영천이씨농암종택, 진성이씨주촌종파, 창녕성씨창성당문중,
동래정씨무은문중, 전주류씨수정재구려, 의성김씨한곡문중, 풍천임씨모성당문중,
탐진안씨의암종중, 울진신안주씨이우당문중, 창녕조씨희천공파문중,
안동김씨보백당종중, 창녕조씨지산종택,
의성김씨월탄종택, 달성서씨낙동정사, 고성이씨간산문중, 단양우씨참판공파,
풍산류씨석고문중, 김해김씨곡천문중, 진주하씨충렬공파, 밀성박씨손곡문중,
인동장씨학림정종중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 목록집
북후 진주강씨 율산공종중, 안동권씨 부정공파 산택재문중
안동권씨 가일 지헌고택, 안동권씨 부호장공파 일원정.
안동권씨 병곡종택. 안동권씨 수곡후손가,
안동권씨 수곡문중, 안동권씨 양의당후손, 안동권씨 정남문고,
광산김씨 설월당종택, 예안 광산김씨 지애종택,
순천김씨 죽일공파, 순천김씨 참의공파 마봉소문중,
안동김씨 소산문중, 의성김씨 귀봉공파 송호파문중,
안동김씨 소산종중, 의성김씨 지촌공파 국탄고택,
안동김씨 보백당종중, 봉화 안동김씨 동평공주손가,
봉화 안동김씨 우산댁, 의성김씨 평장사공파 삼대종택,
풍산김씨 경남재, 선성김씨 판교 백암후손가,
영양남씨 봉주공파, 김해김씨 곡천문중 김문하가,
교하노씨 노승주가, 문화류씨 서산공파 참판공종중,
풍산류씨 충효당, 전주류씨 호고와종택,
전주류씨 근암고택, 전주류씨 박실웃대(上宅) 수정재고택,
전주류씨 수곡파 용와종택,
밀성박씨 국담공파 남강재, 청도 밀양박씨 병재문중, 형재문고,
봉화 반남박씨 낙한정파,
성산배씨 정절공백파 견동, 파평윤씨 야성군파 천평문중 우암종택,
평윤씨 대죽문중, 함양오씨 우재공문중, 의령옥씨 교리공파 만취당,
고성이씨 탑동종가, 경주이씨 교관공파 송람문중,
경주이씨 소정문중, 경주이씨 호계문중, 경주이씨 청호공파종중,
영천이씨 상장군파, 영천이씨 간재문중 읍춘정, 영천이씨 울산군파 운천문중,
재령이씨 갈암종택, 재령이씨 석보 항재파 백천고택, 재령이씨 존재종택,
재령이씨 항재문중, 전의이씨 양정공파종회, 전의이씨 청헌공파종회,
진성이씨 온게파 석연문중, 우계이씨 취사문중, 한산이씨 대산종가,
영주 한산이씨문중, 예천임씨 금양파 금포고택, 예천임씨 금양파 만문소,
영주 인동장씨 금강문중, 인동장씨 경재공파, 야성정씨 참판공종택(괴음당),
창녕조씨 예암종문회, 창녕조씨 시중공파 예빈시 별좌공파종중,
창녕조씨 희천공파문중, 예천 한양조씨 팔우헌종택,
영양천씨 호암사종중, 경주최씨 정무공파 성암문중,
청송심씨 대종회, 평해황씨 영이정,
도산서원 운영위원회, 옥계서원, 예안향교, 도계서원
한국국학진흥원(Korean Studies Advancement Center, 이하 ‘국학진흥원’으로 약칭함)은 한국학 자료의 수집ㆍ보존과 연구 및 보급을 통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이다. 한국학 자료 가운데 특히 민간에 흩어져 있는 멸실 위기에 직면한 유교관련 기록문화재들을 기탁받아 안전하고 과학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문중이나 서원 등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문화재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촉발된 국학진흥원 건립운동은 1996년 12월 문화관광부로부터 법인 설립허가를 받음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후 5년여의 공사 끝에 2002년 4월 본관인 ‘홍익의 집’을 완공하였고, 같은 해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의 탄신 500주년을 기념해 안동시에서 열린 세계유교문화축제에 맞추어 공식으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학진흥원은 안동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0여㎞되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는 퇴계가 만년에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목이다.
국학진흥원은 한국에서 유교문화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대표적인 문화권으로 손꼽히는 영남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권은 퇴계학의 본산으로서, 율곡 이이(1536-1584)를 정점으로 하는 기호학파와 함께 조선유학을 양분하였던 영남학파의 근거지라는 문화사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지역이다.
이런 까닭에 이 지역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교문화의 흔적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 지역의 서원은 한국(남한) 전체 서원 수의 약 32%에 달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종법제도의 상징인 종가나 재사 등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그야말로 종가 하나 끼고 돌아가지 않는 골이 없고 서원 하나 안고 흐르지 않는 내가 없을 정도이다.
국학진흥원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2002년 이후 현재까지 약 5년 동안 모두 20만여 점에 이르는 한국학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지정학적인 요소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국학진흥원은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한국학 자료의 수집과 보존이라는 설립취지를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에 둥지를 틀고 있는 셈이다.
국학진흥원은 모두 6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그 중심기능에 따라 크게 다음의 4개의 건물군으로 다시 나뉜다.
본관 건물로서 2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동은 지하 1층에 지상3층 규모이고 뒷동은 지하 1층에 지상 4층의 규모이며, 연면적은 12,812㎡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살려 지붕을 한옥지붕으로 마감하고 동기와를 올렸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둘렀다.
주로 연구실과 행정실로 쓰이며, 자료정리실과 도서관 그리고 500여명 수용 규모의 대회의실과 각종 세미나실 등 연구에 필요한 관련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유교문화를 주제로 한 박물관이다. 영남학파의 본산이라는 국학진흥원의 지정학적 특징을 고려하여 한국의 유교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건립되었다.
면적 4,414㎡의 4층 건물로서, 2층에서 4층은 전시실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시로 크게 나뉜다. 아울러 1층은 국학진흥원이 수집하는 각종 기록문화재를 정리·분류·보존할 수 있는 수장고도 갖추고 있다. 이 수장고는 기록문화재의 특성을 감안하여 종이로 된 자료의 변질과 훼손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각종 보존 장비를 갖춘 최첨단의 시설로 설계되어 있다.
국학진흥원이 역점을 두고 수집하고 있는 목판(책판)을 전문적으로 보관하는 시설이다.
연면적 1,402㎡로서, 지상 2층 건물 2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습도에 따라 자동으로 개폐되는 전동식 창을 비롯하여 목판 보관에 필수적인 각종 보존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다. 국학진흥원이 추진하고 있는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에 발맞추어 총 10만장의 목판을 수장할 수 있는 규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