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쳐진 성서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는 사탄이 준 것이다 - 성모님: "징벌의 공은 불의 세례로서 너희 세상을 깨끗이 정화할 것이다." "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진리로부터 너무도 멀어졌구나! 너희를 진리로 이끌기 위해 옛 예언자들을 통해 많은 지혜가 전해졌건만, 너희는 이 말씀들을 인간들의 사악하고 나약한 본성에 맞추어 모두 고쳐버렸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예언자들의 진리의 말씀을 되돌려 놓고 읽도록 하여라. 고쳐진 성서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는 사탄이 준 것이다. 이단들아, 오, 저주받을 이단들아! 도대체 너희가 어찌되려 이러느냐?" - 76.6.5 -
인간이 사탄의 지시에 따라 성서를 다시 써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육신의 부귀를 탐하지 말고, 자신에게 들어온 악마를 몰아내야 합니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혼돈과 기만, 진실의 왜곡. 인간이 사탄의 지시에 따라 성서를 다시 써서는 안됩니다. 빛을 청하는 기도를 하세요. 창조주의 말씀은 언제나 시대의 유혹을 뿌리쳐 왔습니다. 성교회가 새로 만들어 낸 것은 암흑을 부르고, 사악한 영혼을 끌어들이기 위해 교회의 문을 활짝 연 것과 같습니다. 계명을 생활로 되돌리세요. 이런 어리석은 행동은 천주님의 진노만 부를 뿐입니다."......."계명을 잊어버린 인간들에게서 희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죄악과 신성 모독, 그리고 더러운 오물이 세상에 넘치고 있습니다. 정화의 과정을 지나오는 동안 여러분은 천주님께 은총을 간청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은 창조하신 성부께 의해 깨끗이 될 것입니다. 비록 노아의 때처럼 모든 것이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천국에 올라 가장 높으신 주님과 함께 할 자들만 남을 때까지 정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가고 있는 파멸의 길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세속의 쾌락과 욕망에 넘어가고 있으며, 신의 자녀들조차 세속의 이익에 이끌려 자신의 영혼과 자신이 책임을 진 다른 이들의 영혼을 잘못 인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육신의 부귀를 탐하지 말고, 자신에게 들어온 악마를 몰아내야 합니다. 암흑 속의 집들은 죽음의 띠를 두를 것입니다. 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73.11.24 -
공동번역 성서와 가톨릭이 가는 길
제2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71년에 한국 가톨릭에서는 신교측과의 합동으로 공동번역 성서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신·구교와의 일치를 위한 전초이며 세계 최초라는 점에서 크게 자랑하여 왔다.
그리하여 지금에 와서는 공동번역 성서가 마치 한국 가톨릭의 정통적인 성서인냥 모두가 이를 사용하고 있으며, 옛 가톨릭의 참된 성서는 구하기 조차 힘이 드는 형편이다.
공동번역 성서가 맞춤법이나, 문장, 문귀 등이 현대어로 바뀌고 가로 쓰기로 되었으며, 활자도 아름답고 보기가 좋아 읽기에 편리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공동번역 성서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수다한 노력과 시간을 소비하여 만들어 냈으나, 신교측으로부터는 맹렬한 비난과 거센 반발을 일으키어, 아직까지도 20년이나되어 감에도, 이 성서를 쓰고 있는 교회는 하나도 없으며, 다만 극소수의 목사와 신도들만이 참고로 보고 있을 따름이고, 그 판권도 대한성서공회가 가지고 있어, 그들만 배불려 주면서, 본래 의도한 신·구교간의 일치 운동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는 도회시한다 하더라도, 그 내용과 뜻이 완전히 바꿔치기 되어 천주님의 말씀을 변조한 성서가 아닌 거짓 성서가 된 것을 볼때 통탄 함을 금할 길이 없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부와 신도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다만 옛날의 성서를 현대어로 고쳤을 뿐, 그 의미나 내용은 일체 변경이 없는 줄로 알고 있음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우리 가톨릭 신도들이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기 전에는 성서를 가까이 하지 않는데에 기인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기에 성경 구절을 비교하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마태오복음 17장 20절을 보면 마귀들린 사람에게 마귀를 쫓아 냄에 대하여 「이런 종류는 기도와 곧 재소 아니면 능히 쫓아낼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신 것이 성경의 본문이지만 공동번역 성서에는 프로테스탄트 성서와 같이 이 말씀을 송두리째 빼어버렸고, 마르코복음 9장 28절에 「재소」라는 말도 빼어 버렸다.
루가복음 2장 48절을 보면 성모님께서 「아들아……」라고 하신 말씀을 「얘야……」라고 하였으며,
고린토 전서 9장 5절에 「우리는 다른 종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케파(베드로)와 같이 자매인 부녀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느냐」라고 하신 말씀중 「자매인 부녀」를 「크리스도를 믿는 아내」로 변조하여 목사들이 대체주의를 옹호하는 프로테스탄트 성경을 그대로 옮기었으며,
같은 심지로서 「누구든지 내 이름을 인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전답을 버린자는 백배나 받고 또 영생의 산업을 받으리라」(마태오 19-29)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중에서 「아내」란 말 마디만은 임의로 빼어 동당이 처버린 프로테스탄트 성경을 그대로 복사해 놓았다.
또한 디모데오 후서 3장 16절에 「천주의 감도 하심으로 된바 모든(성)서는 가르치기를 위해서나 반박하기를 위하여서나 개과시키기를 위하여서나 정의를 가르치기를 위하여서나 유익하니라.」하신 바오로 종도의 서간중 「천주의 감도하심으로 된바 모든(성)서」라는 부분을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게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라고 변조하여 프로테스탄트 성경을 비롯하여, 공동번역 성서와 각종 거짓 성경 등까지 옳은 것인냥 옹호하고 있다.
위에 예거한 것들은 옛 「교리해설」이나 “교부들의 신앙” 책자등에서 프로테스탄트 성경의 그릇된 점에 대하여 이미 지적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공동번역 성서에 그대로 받아 옮겨 놓았다.
또한 디모데오 후서 1장 13절을 보면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근거한 신앙과 사랑으로써 내게서 들은바를 건전한 교리의 표준으로 삼을 것이며」하신 말씀 중 「건전한 교리의 표준」이라는 말을 「생활원칙」이라는 말로 바꾸어 버렸다.
프로테스탄트에는 교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은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겉보기에 같은 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이라는 말마디 하나 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이라는 말의 뜻에 있어서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믿음”아란 자기의 종교적, 내적경험이나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고 하는 주관적, 정감적 확신을 “구원됐다”라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다.
이른바 신뢰적 신앙인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이라야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신앙관이 그러하므로 예수께서 몇가지 성사를 세우셨는가? 교회의 제도는 어떻게 정하셨는가? 등의 문제들에 대하여는 도외시 한다.
그들은 “구원 받았다”고 하는 믿음만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톨릭이 지켜오는 신앙은 천주께서 게시하신 진리를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울지라도, 우리의 지능을 그분에게 복종시켜, 이를 사실로 인정하는 「교리적 신앙」인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신뢰적 신앙이 기분적이고, 정렬적이며, 주관적이고, 무 비판적인 것에 비하여, 가톨릭의 「교리적 신앙」은 냉정하고도, 이지적이며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교파가 어떠하던, 교리가 어떠하던 간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지만, 우리 가톨릭에서는 천주께서 게시하신 교리를 인정하고, 그를 승복하며, 교리의 진부에 대한 관심과, 교리에 부합하는가, 또는 어긋나는가에 대하여 극히 예민하고 구령에 있어 요구되는 것이 「교리적 신앙」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리란 천주께서 게시하신 진리이며, 우리에게 내리신 계명인 것으로서 구령에 긴요한 것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톨릭에서는 평신도가 알아야 할 교리를 요약해서 간추려 천주교 요리라 하여 이를 가르쳤고, 이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신부님으로부터 책벌도 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볼때 「교리의 표준」이라는 말과 「생활 원칙」이라는 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종류로서 디모데오 전서 6장 3절에 「신심생활에로 시련되는 교리에 승복치 않는다면」하신 것을 “경건한 생활원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이라 하였고,
디모데오 후서 4장 3절에 「대저 때가 오매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듣기 싫어하고, 오직 귀가 소긋하여 자기 원욕을 따라 각각 스승을 연(連)해 고르며」라고 하신 말씀중 「교리」라는 말을 “가르침”이라고 고쳤으며,
디토서 2장 7절에 「그대 자신의 착한 태도를 모범으로 보여주며, 교리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완전 무결하게 하고 신중하게 할 것이요, 그 말은 건전하고 비난할 곳이 없도록 할지니라.」 하신 말씀에서 「교리」라는 말을 빼어 버렸다.
또한 요한 제2서 9절에 「무릇(참된 신앙을) 떠나 그리스도의 교리에 머므르지 아니하는 자는 천주를 뫼시지 아니한 자며, 교리에 머므르는 그 사람은 성부와 및 성자를 뫼신자니라.」하신 말씀을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지 않고,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하느님을 뫼시지 않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을 함께 모시는 사람입니다.”라고 변조하여 「참된 신앙을 떠난다」는 말을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것”으로 「교리」라는 말을 “교훈” 또는 “가르침”아라 하였다.
이 밖에도 로마서 6장 17절과 16장 17절 데살로니카 후서 2장 15절 디모테오 전서 1장 10절, 4장 6절, 4장 13절, 4장 16절, 5장 16절, 6장 1절, 6장 3절 티토서 1장 9절 등에서 「교리」라는 말을 무참히도 제거시켜 버렸다.
이것이야 말로 천주께서 게시하시어, 근 2000년간 순교자의 피로써 지켜온 가톨릭의 교리를 완전히 파괴하려는, 악마적인 간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디모데오 전서 4장 3절을 보면 「그들은 혼인하기를 금하며, 천주께서 신자들과 진리를 인식한 자들에게 감사하면서 먹도록 조성하여 주신 음식도 먹지 못하게 하느니라.」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음식」이라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는 바로 그 다음편인 4장 6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대 만일 이(교리)를 형제들에게 전하여 주면 그대는 신앙의 말씀과 지금까지 신봉한 옳은 교리를 그 음식으로 삼는 좋은 일꾼이 되리라.」하신었다.
즉 이 구절에서 음식이라 함은 “신앙의 말씀과 지금까지 신봉한 옳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요한복음 4장 54절에도 「나의 보내신 자의 의향을 준행함과 그 일을 온전히 행함이 나의 음식이니라.」하셨다.
따라서 디모데오 전서 4장 3절의 뜻은, 천주께서 신자들과 진리를 깨달은 자들에게 감사 드리면서, 배워 익히도록 정해 놓으신, 지금까지 믿어 왔던 올바른 교리와 신앙의 말씀, 그리고 천주님의 의향을 지키고 행하는 것을 못하게 금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이런 자들은 결혼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못먹게 합니다. 그러나 음식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으로서, 진리를 깨닫고, 신도가 된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라고 내용을 뜯어 고치므로서 육신을 위한 음식으로 밖에 알아 듣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또한 묵시록 13장 17절에 「그 표 곧 짐승의 이름이나 또는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나 사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게 하더라.」는 문장중 사고 판다는 말 앞에 “물건을”하고 한마디를 만들어 놓으므로서, 읽는 자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게 하였다.
사고 판다는 말은 반드시 물건에 한해서 쓸수 있는 것으 아니다. 코린토전서 6장 20절과 7장 23절을 보면 「너희는 비싼 값으로 구매 되었나니」하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이 구절에 있어서는 프로테스탄트 성경에도 “물건”이라는 말이 첨가되지 않고 있다. 다시 묵시록 14장 4절에 있는 “동정자” 또는 「정절이 있는 자」라고 한 것을 “숫총각”이라고 말을 바꾸어 놓았다. 이 구절의 뜻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은 “요한묵시록에서 말하는 짐승의 정체” 제15장 “간선된 144,000인”을 읽어 보면은 알 수 있다.
성서의 번역은 문장에 조금 어색한 느낌이 있다고 해도 주관에 흐르지 말고 원문 그대로를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성서 번역자들이라고 하여, 성경 말씀의 심오한 뜻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을 적절히 만들어 넣는다든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힌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을 “몸”을 말하는 것이니까 원문에는 없는 “몸”이라는 말을 보태거나, 또 여자와 더불어 더럽힌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숫총각을 말하는 것이므로 원문에 나오는 “정절이 있는 자”라기 보다는 “숫총각”이라고 하는 것이 문장상 어울린다고 하여 이를 뜯어 고쳤다면, 이는 성서를 망쳐놓고 천주님을 욕되게 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마태오복음 11장 12절을 보면 「요한 세자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을 빼앗기로 싸우니 강포(强暴)한자 천국을 빼앗느니라.」하신 말씀이 있다. 이것을 “세례자 요한때부터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폭행을 일삼는 자들이 힘으로 하늘나라를 뺏으려고 합니다.”라고 바꿔치기하여 전혀 반대의 의미로 뒤집어 놓았다.
프로테스탄트 성경에도 이 구절의 의미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 가톨릭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는 윗 사람에게 순명할 것을 허원하고, 모든 가톨릭 신도는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 가르치고 이것을 지켜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폭력적인 자가 천국을 차지 한다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분명 하지만은 「이미 성경에 기록된 바는 다 우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서」(로마서 15:4) 천주께서는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현실속에 사는 선량한 신도들을 위하여 이 말씀을 성경안에 남겨 놓으신 것으로 생각한다.
여하튼간에 인간의 지혜로 깨달을 수 없고, 납득이 안 간다고하여, 그 말씀을 변조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서가 아닌 것이다.
다시 구약성서중 이사야서 34장 16절에 “야훼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아라. 그중에서 하나도 빠진것이 없느니라. 서로 갖추어져 부족한 바가 없으니 이는 그이의 입이 몸서 명하셨으며, 또 그이의 입김이 몸소 그들을 모으셨음이니라.”(선종완 신부님이 변역하시고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발행한 단행본 구약성서 이사야서 참조) 하신 것을 공동번역 성서에는 전혀 다른 짐승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공동번역~야훼의 기록을 찾아내어 읽어 보아라. 이런 모든 짐승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니리, 그것들은 직접 야훼의 입에서 떨어진 분부를 받아 몰려온 것들이다.)
프로테스탄트 성경에도 이 구절의 의미가 변경되지는 않았다.
이밖에도 그 뜻이 바뀌어 애매하게 만들고, 말을 보태고 빼고 한 것이 부지기수이라. 여기에서 일일이 지적 나열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찌기 Emser는 루-터가 위작(僞作)한 프로테스탄트 성서속에 1400여군데의 그릇된 것을 지적한바 있었다(교부들의 신앙에서) 그러나 공동번역 성서를 세밀히 관찰하여 본다면, 프로테스탄트 성서보다도 더욱더 앞질러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이내 알게 된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이라고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로 부터는 맹렬한 비난을 받으면서 완전히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왜그러냐 하면 성경을 유일한 신앙의 근본으로 아는 그들은 그들의 성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지적한 몇 구절만 본다 하더라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공동번역 성서가 오류투성이의 이단서라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바오로 종도의 서간을 인용 한다면, 공동번역 성서는 사실에 있어서 성서로로서의 가치 조차도 없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크리스도의 성총을 인하여, 너희를 부르신자를 그처럼 빨리 떠나고 유혹을 받아, 다른 복음(비록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에로 옮겨간 것을 괴이하게 여기노라. 이는 다만 몇몇 사람들이 너희를 산란케 하여, 크리스도의 복음을 뒤집어 놓으려는 것을 뿐이니라. 그러나 우리라든가 혹은 하늘로부터 나린 천신이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 저주를 받을지로다.
우리는 전에도 말함과 같이 이제 다시 이르노니 너희가(네게서)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가라디아서 1:6)
또한 묵시록 22장 18절을 보면
「만일 이 서책에 대하여(일언반구라도) 더 첨가하는 자가 있다면 천주 반드시 저에게 이 서책에 기록된 재앙을 당하게 하시리라.
또 만일 이 서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일언반구라도) 빼어 버리는자 있다면, 그 사람의 차지할바 이 서책에 기록된 생명의 나무와 거룩한 도읍의 몫을 천주 저에게서 제거하여 버리시리라.」하였다.
이렇듯이 두렵고도 저주가 담긴 말씀이 있음에도 성서를 그토록 만들어 놓았음은 「천주를 두려워 함을 저들의 모르는 바」(로마서 3:18)이기 때문인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므로서 많은 신도들이 진실된 성서를 버렸음은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천주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은 하루속히 이 그릇된 공동번역 성서를 내버리고, 진실된 가톨릭 성서를 되찾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천주님 대전에서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이 변조된 이단서를 신도들에게 권하고 가르치며, 미사가 거행되는 제단에서 이것을 낭독하고 있는 가톨릭을 볼때 깊은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필자는 이미 1978년에 참된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아 왔다.
시골 벽촌에 있는 경당같은 조그만 교회로서 100여명 밖에 들어설 수 없는 극히 가난한 교회이지만, 그 안에 들어서면 온갖 정성을 들여 꾸며 놓은 제대와 성상들이 경건한 신앙심을 갖게하며, 저절로 숙연해진다.
주일마다 대미사는 성수예절로서 시작하고, 신부님의 창과 그레고리안 성가로서 미사가 봉헌된다.
사제의 정성 어린 미사 집전의 모습과 천신과도 같이 공손한 자세로 시중을 드는 어린 복사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경건스럽게 기도드리고 있는 신성한 분위기 속에 깊이 묻히노라면 커다란 안위와 평화를 맛보게 된다.
또한 언제나 대 미사 후에는 성체강복이 있으며, 그때 제대위의 성광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업드려 있을 때면, 나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린다.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천주성신께서 인도하시는 참된 가톨릭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만의 하나라도 그릇됨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가톨릭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 순종하고 순명하는 것과 「진리를 거슬려 불의에 복종하는 것」(로마서 2:8)과를 혼동해서는 안되며 분명히 가려야 한다.
진정으로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하고 교황에게 순명하는 자는 어느 누구인가?
라틴어 미사전례를 세상 마칠때까지, 영원히! 어떠한 지위에 있는자라 할지라도, 어떠한 합법적인 수단으로도! 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선언하고 이를 개정하는 자는 천주님의 노하심과 종도 베드로 바오로의 분노를 자초하는 자라는 저주가 담긴 교황 성 비오 5세의 교령 Quo primum을 헌 신짝처럼 내던져 버리고, 지금과 같이 타락된 교회로 만든 것에 그대로 맹종하는 자인가? 또는 어떠한 지위에 있는 자라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성인 교황의 칙서에 충실히 따르는 자인가?
천주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교황에게 초자연적이고도 위대한 권한을 주셨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교황이라 할지라도, 천주님의 진실된 복음을 변조하거나, 교리를 변조하거나, 천주께서 세우신 성사의 재료나 형상(축성문)을 바꾸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신 후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네가 천주의 뜻을 맛뜨리지 아니하고, 오직 사람의 뜻을 맛드리니, 너 나를 조당하는도다.」(마태오 16:23) 하시며 베드로를 엄책 하신바 있다.
그렇다면 천주께서는 지금의 교황이라 할지라도 천주께 의합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인간에게 영합하는 것을 추구한다면은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엄책하실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란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억누르고, 천주께 의합케 하는데 있는 것이다.
시대의 사조나 조류에 따라서 신앙을 개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영합케 하기 위한 것이지, 천주님을 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혹자는 구약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주께 드리는 제사가 변화되어온 과정을 들어 그 합당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점점 자라면서 어른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에제키엘서 16장에도 교회를 피덩어리 어린것에서 하나의 아름답고 세련된 부인으로 성장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어른이 된후에 철없는 어렸을 적을 동경하여 어린이의 행동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은, 올바른 정신상태 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이며, 이를 상징한 것으로서,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한 제사였음에도 천주께서 이를 얼마나 중히 여기셨는가 하는 것은 출애급기 25장부터 29장 까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성당, 감실, 제대 제구, 사제서품, 제의, 제물, 각종 재료, 모양, 색깔, 크기를 비롯하여 심지어 바깥 마당의 울타리 말뚝을 쓰는데까지 하나로부터 백 전체를 천주께서 직접 세밀하게 게시하시였던 것이다.
구약의 제사에는 양, 염소, 소, 비둘기, 곡식 등이 제물로 봉헌된 제사였음에도 이토록 하셨거늘! 하물며, 천주성자, 당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치시는 완전한 제사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셨겠는가?
그 신성함을 해치는 어떠한 것도 접근을 못하도록 배려하셨을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부들로부터 전래되어 왔으며, 트리덴띠노 공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의결하였고, 교황 성 비오 5세께서 영세 불변한 것으로 선포하신 라틴어 미사전례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교회와 교황의 무류성이란 일단 결정 공포된 신앙, 도덕, 교리에 관한 문제를 후대의 교황이나 공의회에서 재의하거나, 수정할 수가 없고, 영원히 변경치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사실이 있다면, 교회와 교황의 무류성에 일대 치명상을 주는 것이다.(교부들의 신앙에서)
미사전례야말로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므로, 교황 성 비오 5세의 선언이 무류의 것이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느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진실된 복음과 미사와 교리를 파괴하면서, 거기에 무조건 따르라고 하는 것은, 선량한 신도들로 하여금 크리스도를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가톨릭은 파괴하는 것이 만만코 천주성신으로 부터의 것일 수는 없는 것이며, 이것은 분명히, 악마로부터 반 크리스도로부터 온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제2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라는 것에는 듣기 좋은 미문여구(美文麗句)를 다 내세우고 있지만, 가톨릭이 이토록 타락되고 부패된 것이, 제2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온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보라! 내가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너희 앞에 두노라.」(예레미아서 21:8)
교령 Qur primum(성비오 5세 1570년)
우리의 이 영구이 유효한 교령에 의해서 우리는 이 미사 전례서에 어떠한 부가도, 삭제도, 변경도, 결코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정하고 또 명한다.…….
우리는 명확히 어떠한 지위, 또는 성직의 자라 하더라도 추기경도 제외함이 없이 권위에 있는 모든자들에게 경고하고, 또 그들에게 명한다.
즉 엄격히 순명할 것으로서, 성스런 트리덴띠노 공의회에 의해서 명하여지고 천주님을 경배하는 순수한 하나의 길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이 미사 전례서에 포함되어 있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식 또는 미사의 기도를 사용하던지 허가하든지 해서는 결코 안된다.
장래의 어떠한 때에도 사제는 재속 사제이거나 수도 사제이거나 미사 성제를 행하는 다른 어떤 양식을 쓰도록 강제할 수 없다.
그리고 명확하게 양심의 주저와 교회의 벌 견책의 두려움을 배제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에 첨가해서 선언한다.
즉 우리가 우리의 이 명령과 교령이 영구이 계속되는 것이며, 합법적으로 장래에 폐지하든지 또는 수정 변경하든지 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 거이라고(교령으로) 명하여 정하는 것은 우리의 사도적 권위의 효력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누구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위에 우리의 이 명령에 반 하는 어떠한 행위라도 감히 기도(企圖)하고 시도하려는 자에게는 언제까지나 그가 전능하신 천주님의 노하심과 축복된 종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노하심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알리어라.
교령 “De de fectives" (성 비오 5세)
성 변화때의 실제의 말마디에 있어서 결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성사의 형상적 원리인 성변화의 말마디는 다음과 같다.
「대저 이는 곧 내 몸이니라.」그리고 「이는 새로 맺는 영원한 언약의 피니 “신덕의 오묘함이여”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죄사하기로 흘릴바니라.」
만일 성체와 성혈의 축성의 양식에 있어서 의미의 변화를 포함하여 무엇인가 생략, 또는 변경이 된다면 축성은 무효이다.
의미의 변화없이 첨가된다면 축성은 무효로 되지는 않지만 그러가 그 사제는 대죄를 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