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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회복을 꿈꾸며
본문
서명수(교수, 협성대 구약학)
에덴의 동쪽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였다.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 3:23-24).
창세기 2장부터 3장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에덴동산 이야기의 마지막 두 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 동쪽으로 쫓겨나던 날의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이것은 분명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형벌임에 분명하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고, 천지인(天地人)의 조화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천혜(天惠)의 환경에서 떠나 척박한 땅에서 땀 냄새 풍기며 일을 해야 하고,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갈등과 집착 등으로 점철된, 정처 없는 고단한 ‘인생길’을 걸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척박한 삶의 환경에 던져져 고단한 인생길에 첫 발을 내딛는 아담과 하와에 대해 밀튼(John Milton)은 그의 서사시 <실락원>(Paradise Lost) 마지막 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저들이 뒤돌아보아 낙원의 동쪽을 쭉 쳐다보니
이제까지 저들의 행복의 보금자리는 저 불타는
칼에 의하여 흔들리고 있고 문은 무시무시한
얼굴과 불타는 무기로써 싸여 있는 것이다.
저들은 절로 눈물을 흘렸지만 곧 닦는다.
세계가 모두 저들 앞에 있었다. 여기서
저들의 안식처를 찾기 위하여
섭리를 안내자로 하도다. 저들은
손에 손을 잡고 천천히 방황하는 걸음걸이로
에덴을 지나 쓸쓸한 저들의 길을 간다.1)
그렇다. 낙원에서 추방된 두 사람은 “방황하는 걸음걸이로” 자신들의 삶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순간부터 인간 사회에는 소외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뒤따르게 되었다. 에덴에서 느꼈던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은 뭔가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으로 바뀌고, 봄날의 공기처럼 부드럽게 전신을 감싸듯 에덴에 가득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기운은 차가운 겨울밤 저 멀리서 아스라이 쏟아지는 별빛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물의 창조자로서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해 있던 하나님이 이제는 에덴을 떠나 마치 저 높은 하늘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초월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모종의 불안이 저녁 어스름처럼 밀려들고, 깊은 고독감과 상실감이 전신을 감싸며 도는 것이었다. 신적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인간 실존이랄까, ‘아이’(i) 자 위의 점처럼 떠 있는 불안한 존재, 그러나 결코 전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 존재, 아니, 한 점 점으로 있기에 전체로서의 ‘아이’(i)가 되게 하는 역설적인 존재, 그런 존재로 두 사람은 쓸쓸히 에덴의 동쪽을 배회하다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아 어디론가 발길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덴의 모든 조화로운 환경으로부터 분리되어 낯선 땅에 던져져 해산의 고통을 맛보고, 엉겅퀴를 내는 땅을 일구며 일평생 수고의 땀방울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고, 종국에는 죽어 흙의 먼지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길(창 3:16-19), 에덴의 동쪽!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된 후 새롭게 서로의 존재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비록 벌을 받아 쫓겨난 인생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삶과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낙원 밖의 삶’, 마침내 아담과 하와는 동침하여 자식을 낳았다(창 4:1). 피붙이를 품에 안은 기쁨, 아담은 아버지가 되고, 하와는 어머니가 되었다. 하루하루 힘겨운 노동도 자식들을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낙원의 삶을 부러워하랴! 땅이 아무리 거칠다 하여도 이마의 땀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순치(順治)된 땅은 곡식의 싹을 틔워 내고, 하루하루가 고단하다 하여도 무럭무럭 자라는 카인과 아벨을 생각하면 삶의 고단함이란 미래의 희망으로 통하는 통로인 것을!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 키우는 재미로, 자식들의 밝은 장래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터전을 옮기고 지경(地境)을 넓히며 열심히 개척해 나갔다. 집터를 다지고, 우물을 파고, 밭을 일구고, 축사를 짓고, 길을 내고. 그들이 팽팽해진 삶의 의욕과 긴장, 그리고 바쁜 일상에 매몰되어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카인과 아벨도 훌쩍 커 장성한 청년이 되었다. 한 뱃속에서 나왔으나 서로 다른 개성과 생활방식, 카인은 농사일에, 아벨은 양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농경사회와 유목사회를 대표하는 카인과 아벨,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부조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회자되는 ‘문명의 충돌’은 아니어도 뭔가 생활양식의 차이가 주는 불편은 있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막연한 비교심리와 소외감에서 오는 질투와 미움, 상대적 소외감과 박탈감이 존재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내 제물은 거절하신다는 말인가?’ 마침내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말았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 이때까지 아담과 하와는 에덴의 동쪽에 뿌려진 ‘삶의 비극성’이라는 음험한 곰팡이균이 질투와 미움, 소외와 박탈감의 포자(胞子)를 퍼뜨리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2002년 ‘ 에덴의 동쪽 ’
이 어찌, 그 옛날, 까마득히 멋 옛날만의 일이랴! 오늘날 현대인의 삶의 정황 역시 에덴의 동쪽 그것과 멀지 않다. 아담과 하와가 “방황하는 걸음걸이로” 에덴에서 멀어져 갔듯이 현대문명 역시 뚜렷이 가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전진하고 있지 않는가. 제국주의 시대로 규정지어진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를 맞이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20세기만큼은 평화와 공존의 세기가 되기를 기원하며 기대했을까. 그러나 한 번 방향이 잘못 잡힌 역사의 수레바퀴가 제자리를 잡기란 쉽지 않은 법. 비록 서구에서 일어난 전쟁이라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전세계적이었으므로 가히 세계대전이라 말할 수 있는 세계 1, 2차 대전이 터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는가! 그래서 미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1차 대전 중 미국의 북캘리포니아 설러너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아 전쟁 중에 전개되는 한 가정사를 담고 있다. 편견에 찬 완고한 아버지와 집을 나가 유곽(遊廓)을 경영하는 타락한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모범적인 형 애런과 어머니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채 반항적인 나날을 보내면서도 내심 아버지의 신뢰를 갈망하는 동생 칼, 이들 사이에 가로놓인 대화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 영혼 깊은 곳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애증은 20세기 인류의 정신적인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암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20세기 말을 보내고 온갖 기대와 희망을 품고 맞이한 21세기의 첫 해가 채 가기도 전에 인류에게 다가온 것은 무엇이었는가? 전대 미문의 테러,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테러와의 전쟁. 더욱더 무서운 것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보다도 비오듯이 쏟아지는 포탄보다도 다 많은 증오와 갈등의 씨앗이 이미 뿌려졌다는 사실. 뿌려진 이 씨앗들이 어느 그늘진 곳에서 어느 때에 발아하여 싹을 틔우고 성장한 후 어떻게 다시 그 포자를 터뜨릴지 누가 알겠는가.
2002년 벽두에 서 있는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그 옛날, 아담의 후손들이 번창했을 때 시날 평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거역의 바벨탑을 쌓았듯이(창 11:2-4), 인류는 지금 ‘생명의 바벨탑’을 쌓고 있지 않는가. 신의 고유한 영역으로 간주되는 생명도 이제는 인간의 힘에 의해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복제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영역은 점점 좁혀지고, 사람들의 관계는 사막화되고, 자연과의 관계는 착취적 관계로 변질되고 있으니 21세기 에덴의 동쪽은 여전히 추방 이후의 문제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류는 영원히 에덴의 동쪽에서 “방황하는 걸음걸이로” 비걱거리며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고, 인간에 의해 자연이 무참히 짓밟히고 신음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인류가 낙원의 회복을 꿈꾸는 것은 헛된 망상이 될까? 회복해야 할 에덴동산의 진정한 원형적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에덴의 문을 여는 열쇠
내 일찍이 행복의 동산을 노래하였도다.
그것은 한 사람의 불복(不服)으로 인하여 잃은 것
내 이제는 노래하노니 온 인류에게 낙원을
돌이켰음을. 그는 또 한 사람의 확고한 순종에 의하여
온갖 유혹을 넘어서 충분히 시련을 받아
유혹자는 그의 모든 간계가 드러나 패하고
배척을 받아 에덴은 황막한 광야에 서게 되었도다.2)
<실락원>을 쓴 밀튼이 <복락원>(Paradise Regained)을 쓴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증언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복음서의 기록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낙원의 회복의 길을 찾았던 것이다. “또 한 사람의 확고한 순종”에서 다시 낙원으로 가는 길을 찾은 밀튼의 빛나는 예지는 그 첫걸음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고행의 기도와 명상으로 시작하고 있다. 분명 인류의 참다운 구원은, 에덴의 동쪽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21세기의 모든 인류가 취해야 할 바, 즉 오직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아닐까? “확고한 순종”만이 불순종에 의해 굳게 닫혀진 낙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닐까? 이 돌들이 빵이 되게 해 보라는 사탄의 물질에 대한 유혹,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아들됨’에 대한 확신을 시험하는 유혹,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줄 터이니 내게 엎드려 절해 보라는 권세와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을 다 물리치고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에 의해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은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순종”. 그러나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혹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 그런 유혹 한 번 톡톡히 받아 보기 위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일까?
회복되어야 할 낙원의 삶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는 낙원, 그 낙원과 불순종에 의해 쫓겨나기 전 낙원에서의 참다운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진정 낙원의 삶이란 무엇인가?
에덴동산은 지상에 인간에 의해 성전(聖殿)이 건축되기 이전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사물과 더불어 거하시는 ‘원형적 성소’(archetypal sanctuary)였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라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인데 금이 나는 히윌라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그 땅에서 나는 금은 질이 좋았다. 브돌라라는 향료와 홍옥수와 같은 보석도 거기에서 나왔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구스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앗시리아의 동쪽으로 흘렀다.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창 2:10-14).
에덴동산에 관한 이 묘사에는 “강”과 “금, 보석” 두 가지 면이 두드러지고 있다. 동산 한 곳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며 네 줄기로 갈라지고, 그 땅에는 질 좋은 금, 홍옥수와 같은 보석류, 향료 등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 강가에는 이쪽이나 저쪽 언덕에 똑같이 온갖 종류의 먹을 과일 나무가 자라고 그 모든 잎들도 시들지 않고 그 열매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나무들은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이며 그것은 그 강물이 성소에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사람들이 먹고 그 잎은 약재로 쓸 것이다(겔 47:12).
에스겔이 본 회복될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이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줄기가 솟아 나와 동서남북 사방을 적시며 흘러 아라바를 거쳐 사해(死海)로 들어가 바다를 정화시키며 온갖 물고기를 살려 내는 ‘생명의 강’의 모티프를 보여 주고 있다.
‘생명의 강’,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와 사방으로 갈라지는 강 역시 ‘생명의 강’을 의미한다. 성전과 관련된 ‘생명의 강’의 모티프는 시편에도 잘 드러나 있다.
강 하나가, 그 강줄기들이 하나님의 성을 즐겁게 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하는구나(시 46:4).
에덴동산에 풍부했던 금과 보석, 값진 향료 역시 성전 모티프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성막(聖幕)을 건축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백성들이 성막 건축을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곧 금과 은과 동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는 모시실과 염소 털과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과 돌고래 가죽과 아카시아 나무와 등잔용 기름과 예식용 기름에 넣은 향품과 분향할 향에 넣는 향품과 에봇과 가슴받이에 박을 홍옥수와 그 밖의 보석들이다(출 25:3-7).
분명 금과 홍옥수와 향품은 광야시대의 성소인 성막 건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물품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에덴동산의 묘사에 등장한다는 것은 에덴동산 자체가 ‘원형적 성소’임을 암시해 준다 하겠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인 에덴동산은 단순히 ‘자연세계’가 아니라 ‘원형적 성소’로서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질서와 조화에 찬 거룩한 세계이며, 생명의 요람으로서의 자연세계이다. 이 자연세계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부여된 사명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어떤 생활을 하였는가?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를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창 2:15). 그런 후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를 흙으로 빚어 아담에게 이끌어 오자 아담은 그것들에게 하나 하나 이름을 붙여 주었다(창 2:1-20). 에덴 동산을 돌보고 모든 짐승들에게 각기 나름의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사업에의 동참을 의미한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단순한 작명 행위(作名行爲)가 아니라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며, 사물의 특성과 본질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행위이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원형적 성전’에서 ‘자연의 제사장’으로서 모든 생명들을 돌보며 노동을 즐기고 근면하게 생활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와라는 배필을 만났을 때, 그는 진정한 사랑을 느껴 인류 최초의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부를 것이다”(창 2:23).
둘은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창 2:25). 서로가 타인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에는 서로가 타인으로 인식되어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래서 둘은 서로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몸을 가렸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인 ‘원형적 성소’에서 ‘자연의 제사장’으로서의 삶이 바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진정한 삶의 모습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는 낙원에서 모든 인류가 가꾸어 가야 할 참다운 삶의 모습이다.
천지인의 조화가 깨어지고, 갈수록 물질화와 세속화의 정도를 더해 가는 이 혼탁한 세상을 다시 ‘원형적 성소’로서의 에덴으로 되돌리는 일, 그리고 모든 생명들을 돌보며 천지인의 조화 속에 살아가는 ‘자연의 제사장’으로서의 삶에 대해 동경하는 일, 이것이 어찌 헛된 꿈일 수 있으랴!
1) 존 밀튼, 『失樂園 復樂園』, 柳玲 譯(世界文學全集 28; 서울: 乙酉文化社, 1974), 443-444.
2) Ibid,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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