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가 돌아온다. 70년대 ‘한국 최고의 율동가수’로 불렸던 가수 김추자(49)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소식이다. 69년 신중현의 노래 <늦기 전에>로 데뷔한 가수 김추자의 인기는 한마디로 대단했다. 어느 곳을 가든 그의 현란한 춤을 흉내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지난 20여년간의 침묵이 놀라울 수밖에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스타가 그 사이 딱 한번 TV 특집쇼에 출연한 일을 제외하곤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말 힘들었어요. 그 사이 남편 따라 외국에도 많이 나갔었는데 귀국만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열린 음악회>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담당 PD가 바뀌어도 꾸준히 섭외전화가 왔어요. 또 각종 토크쇼에서도 한번 나와 달라고 난리였고요. 궁금하다나요. 주부야 늘상 밥하고 빨래하는 게 일인데 뭐가 그리 궁금했는지…. 나중에는 딸한테 전화 받는 걸 미뤘더니 딸하고 친해진 PD들도 있더라고요.” 강산이 두 번 변했을 20년 세월. 하지만 그는 그 세월 속에서도 그리 많이 변하지 않은 듯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풀어헤친 퍼머 머리도 여전했고 온몸에서 풍기는 에너지 또한 여전했다. 보통 여성들보다도 훨씬 더 외향적으로 보이는 그가 어떻게 그 오랜 세월동안 살림에만 몰두할 수 있었을까. “노래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특히 외국에서 좋은 쇼 같은 것 보면 한마디로 울화통이 터졌죠. 하지만 여건이 안 되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성격상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은 못하고 그래서 기왕 살림을 할 바에는 철저하게 하기로 마음먹었죠. 신혼 초에는 콩나물 값까지 깎아가며 살림하는 재미를 느꼈어요. 그렇게 20여년을 살았더니 처음 시집왔을 때는 조금 못마땅해 하던 시누이들까지도 인정을 해줄 정도가 됐지.” 그는 주부로 산 지난 20여년 동안 누구보다 살림꾼이었음을 자부했다.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할 때 부끄러움이 없음을 알기에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의 화끈한 무대 매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살림꾼이 된 그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없겠지만 그의 살림솜씨에 남편 박경수 교수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지난 11월13일 대학로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이뤄진 인터뷰 자리에는 부군 박경수 교수도 자리를 함께 했다. 수업이 없는 날은 자주 아내와 동반외출을 한다는 박교수는 살림 이야기가 나오자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저 사람한테는 한번 돈이 들어가면 나오지를 않아요. 돈이 아까워서 10원짜리 내기도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새댁 때부터 물건값을 깎기에 사람들이 알아보는데 그래도 되냐고 하니까 다시 가수 안할 거니까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는 못 깎게 하니까 ‘눈이 저울’이라며 더 달라고 하대요.” 대중가수와 대학교수의 만남.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만남은 김추자의 형부와 박교수 선배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81년 처음 만났을 당시 박교수는 김추자가 유명 가수라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소개한 사람으로부터 ‘가수’라는 말을 듣고 레코드 가게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사서 처음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맞선 장소에서 처음 본 김추자의 인상은 강렬했다고 한다. 박교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노랗게 물들여 풀어헤친 머리에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그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원래 청순한 여자보다 앤 마거릿이나 소피아 로렌 같은 배우를 좋아하던 박교수에게 김추자는 이상형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정말 김추자라는 가수를 몰랐어요. 집사람이 한창 가수로 데뷔해서 활동할 때 전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거든요. 거긴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라서 한국 소식을 알 길이 없었어요. 처음에 선배가 ‘가수’라고 하기에 전 ‘클래식 가수’인 줄 알았어요. 대중가수라고 해서 테이프를 하나 사서 봤는데 그 사진이 엄청 이상했어요. 그걸 보고 실물을 봤더니 괜찮더라고요. 무엇보다 속이 좁은 여자 같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어요.” 서로의 화끈함과 진지함에 반한 두 사람은 한달 만에 비밀리에 약혼을 했다. 약혼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약혼식 며칠 전에야 식장을 예약했고 호텔 측에도 비밀로 해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던 작곡가 신중현과 가수 박상규,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결혼 소식은 뒤늦게 조금 엉뚱한 경로를 통해 알려졌다. 기자였던 박교수의 친구 한 명이 자신이 다니던 신문사의 연예담당 기자에게 제보를 한 것. 그로 인해 결혼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두 사람은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리 결혼을 놓고 남편 학교에서 난리가 났었어요. 대학교수와 대중가수의 결합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관한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섰답니다. 보수적인 당시 풍토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나봐요. 학교 전체가 시끄럽자 결국 총장님이 그건 개인의 사생활이므로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서 끝이 났어요. 그렇게 부산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얼마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죠.” 결혼 생활 19년 동안 그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족하도록 만들었던 것은 다름아닌 외동딸 혜원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신을 살만큼 모성애가 대단했던 그는 한마디로 딸에게 ‘미쳤었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걸음마를 하고 ‘엄마’ ‘아빠’라는 말을 하면서 차츰 성장해가는 과정이 마치 보석 같았다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물고 빨고 한마디로 아이에게 미쳐서 살았어요” “솔직히 전 제가 엄마가 된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어요. 물론 언니들이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는 했지만 화려한 세계에 사는 저는 특별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러다가 아이를 낳으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아이의 손톱이 마치 어른의 눈꺼풀 같았거든요. 조금 커서 ‘김치 줄까’ 그러면 ‘빠야서 줘’ 그러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물고 빨고 난리도 아니었죠. 혜원이가 그래요. 자기랑 엄마는 일란성 쌍둥이라고.” 그는 지금까지 여행계획을 세웠다가도 딸의 시험기간과 겹치면 포기를 해왔다고 한다. 엄마가 집에 없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딸은 엄마가 여행간다는 말만 들어도 귀부터 빨개지며 당황한다는 것이다. 그 역시 딸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어 딸에게 벌써부터 ‘데릴사위를 데려 오라’며 은근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딸의 응석을 받아주는 엄마는 아니다. 자상하면서도 때로는 엄격한 엄마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 특히 어릴 때부터 세뇌교육을 시켜 “결혼하기 전에 남자의 손목을 잡으면 죽는 줄 알고 있다”며 웃었다. 결국 딸에게 그는 엄마이자 애인, 친구, 카운슬러인 셈이다. 그는 딸 혜원에게 둘도 없이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던 만큼 작고하신 시어머니에게도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그가 박교수와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예비며느리로서 임종을 지켰단다. “절 참 좋아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좋아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도 이 머리에 요란한 눈화장을 하고, 시커먼 안경 쓰고, 브래지어도 안한 차림으로 만나 뵈었거든요. 조카들이 제 공연을 보러왔다가 찍어간 사진 한 장을 얻어서 품에 품고 다니시면서 ‘아가야’ 하며 사랑해주셨죠. 어머니가 예뻐해 주셔서 그런지 돌아가셨는데도 별로 무섭지 않더라고요. 돌아가신 시어머니 옆에서 하룻밤을 지새기도 했는 걸요.” 남편인 박교수와는 요즘도 떨어져 있으면 하루에 4, 5차례씩 통화를 할 만큼 사이가 좋다. 직업, 취미 어느 것 하나 같은 게 없어 오히려 이상적이라는 두 사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질을 꼭 닮은 혜원이에게 나중에 크면 “꼭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솔직히 고루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이 똑같고,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사람이죠. 모르는 사람은 제가 목소리가 크니까 부부싸움을 하면 이기는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화투를 해도 저는 패가 어떻게 들어오느냐에 따라 수시로 표정이 바뀌는데 남편은 전혀 변화가 없어요. 그런 사람이 오히려 더 무섭잖아요?” 박교수는 아내의 노래 가운데 제대로 끝까지 부르는 게 단 한 곡도 없다. 스스로도 인정하는 음치. 하지만 노래와 춤 솜씨가 젬병이라는 아내의 놀림에 “만약 자신이 노래와 춤에 능했다면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있었다”며 여유를 보였다. 가끔은 딸조차 “엄마 정말 젊었을 때 가수였냐”고 물을 만큼 노래와 담을 쌓았던 그가 다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은 결혼하고 10년쯤 지났을 때였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자신의 손으로 밥을 차려먹을 수 있게 되자 ‘노래를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한 것. 하지만 여건이 안되는데도 강행할 만큼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닌 척해도 남편 눈에 저의 그런 생각들이 보였나봐요. 먼저 노래를 다시 하면 어떻게냐고 하더라고요. 딸도 엄마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러고요. 그래서 5년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어요. 일단은 건강관리부터 시작한 거죠. 하루에 1시간씩 러닝 머신을 탄 덕분에 많이 단련됐어요. 그러고 나서 음성 되찾는 작업을 시작했죠. 나이가 들면 음성도 달라지잖아요? 하지만 예전과 똑같을 수는 없을 거예요. 덕분에 같은 <님은 먼 곳에>를 불러도 좀더 진솔하게 들릴 거고요.” 본격적으로 가요계 복귀를 준비한 것은 지난 여름. 선배 가수였던 기획자 이상열씨로부터 새 음반작업을 해보자고 제의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요즘 대학로에 있는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일주일에 이틀은 노래 훈련을 하고, 나흘은 뮤지컬 배우들과 어울려 재즈발레를 연습하고 있다. 내년 3월로 출반 예정된 그의 새 앨범에 곡을 주기로 한 작곡가들은 하광훈, 김명곤, 김희갑, 이호준 등. 아울러 70년대 이후 좀처럼 남에게 곡을 써주지 않던 작곡가 신중현도 흔쾌히 그의 앨범에 합류하기로 했다. “제가 다시 노래를 한다니까 예전의 파워풀한 댄스를 보여줄 거냐고 묻는 분들이 많은데 아직 모르겠어요. 사실은 그러려고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기는 한데 잘 될지는 두고 봐야죠. 이번에 활동을 시작하면 좀 귀하게 하고 싶어요. 양보다는 질로 승부를 하고 싶은 거죠. 일년에 1, 2번 정도 좋은 무대에 서고 디너쇼 같은 것도 열고요. 제가 50대로 접어든다고 해서 50대를 위한 노래를 하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줄 수만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가 처음 가요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열아홉살때였다. 춘천여중고 시절 응원단장을 도맡았던 그는 동국대 신입생 장기자랑에서 1등을 하자 작곡가 신중현을 찾아갔다. 그런 그를 어이없게 보던 신중현의 표정은 그가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나자 달라졌지만 대답은 “앞으로 연습실에 와서 꾸준히 연습해봐라”였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 돼 그에게 던져준 악보가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였다. 그를 확실히 스타덤에 올려놓은 노래는 이듬해 부른 연속극 주제가인 <님은 먼 곳에>. 하지만 그가 이 노래를 부르기까지는 숨은 사연이 있었다. “그건 원래 제 노래가 아니었어요. 유호 선생이 먼저 작사를 해서 신중현 선생이 곡을 만든 뒤 패티 김 선배에게 준 곡이었죠. 그런데 당시 패티 김 선배가 사정이 있어 거절을 한 거예요. 결국 곡을 줄 마땅한 가수가 없자 제게 기회가 왔고 그날 하루 연습한 뒤에 녹음을 했어요. 그게 그렇게 히트할 줄은 몰랐죠.” 그렇게 시작된 그의 가수생활은 그가 81년 스스로 가요계를 떠나면서 끝이 났다. 너무 오랫동안 바쁘게 살다 보니 결혼생활에서 오는 여유로움이 좋았던 것. 그리고 결혼한 주부로서 살림하는 재미와 아이 키우는 재미에 빠져 20여년이라는 세월을 흘려 보냈다. 하지만 새 앨범을 준비하는 그의 각오는 대단하다. 절대로 잊혀지는 가수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81년에 그랬듯 깨끗이 가요계를 떠나겠다고 한다. 그가 정식으로 대중들 앞에 서는 것은 내년 3월초. 과거 활동할 때 자주 섰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옆에서 차분하고 조리있게 말을 거드는 부군 박경수 교수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의 눈에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했고 박교수의 눈에서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박교수는 그와 함께 촬영하고 싶다는 요구를 끝까지 거절했다. 오늘은 김추자가 주인공이라는 이유였다. 가수에게는 은퇴와 컴백이 없으며 자신은 은퇴를 한 적이 없으므로 이번 공연도 컴백이 아니라는 김추자. 자신에게 춤은 배냇짓과 같은 것이라는 그가 지난 20여년 동안 가슴속에 참아온 열정을 어떻게 폭발시킬지 기대된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70년대 초반 이런 유행어가 있었다. 당시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마다 “불세출의 댄싱스타”, “한국 최고의 율동가수”라고 앞다투어 소개하던 가수 김추자씨의 인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여자아이들까지 엉덩이를 냅다 흔들어가며 병아리 주둥이 같은 입을 모아 김씨의 <거짓말이야>를 열심히 따라 불렀다. 모든 가수들이 애국가 부르듯 근엄한 자세로 노래하던 시절, 파도치듯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시원하게 불러젖힌 김추자의 등장은 90년대 서태지의 출현에 비길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80년 결혼과 함께 무대에서 내려간 뒤에도 그의 노래와 춤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한번도 김추자를 잊은 적이 없다. 아직도 많은 부모들은, 김추자 시대의 자신만큼 자란 딸이 ‘핑클’과 박지윤에 환호하면 “그래도 김추자에 비하면 어림없지”라는 말로 일갈한다. 그러나 야박하게도 김추자씨는 근 20년 동안 ‘머리카락 보일라’ 집안에만 꽁꽁 숨어 있었다. 이제 그의 나이 49살. 흘러간 인기가수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한두번 얼굴을 비칠 법도 했지만 그는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이제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내년 1월을 목표로 새 음반과 컴백무대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것을 보여줄 게 없는데 가끔 마실나가듯 방송에 나와서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그때가 좋았지’라는 식으로 추억만을 반추시키는 그런 가수로 남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동안 주부로, 엄마로 살기도 정신없이 바빴어요.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아이 도시락 싸고 집안정리하고 때되면 장담그고, 제사 준비하다보면 한두해가 훌쩍 지나갑디다. 노래요? 안 하고 싶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런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성격이 못돼서 집안일에만 푹 빠져 지냈어요.” 가끔 어린 딸은 활동 당시의 음반 재킷들을 보면서, 몸뻬바지에 뒤꿈치가 투명해진 양말을 신고 세탁기를 돌리는 그를 향해 “엄마 진짜 가수였어?”하고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하곤 했다. 이제는 가끔 노래방에서 “엄마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며 <무인도>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고3짜리 딸 혜원이도 “엄마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부추기고, 교수인 남편도 “당신 재능이 아깝다”고 권유해 지난 여름 큰맘을 먹게 됐다. 때마침 선배가수였던 기획자 이상열씨가 새 음반작업을 해보자며 제안해왔다. “젊을 때 하던 일을 다시 한다는 건 설레고 기분좋지요. 그런데 활동재개를 알게 된 주위분들이 다들 기대감을 표시하니까 시작할 때보다 마음의 무게가 더해지는 건 사실이에요.” 작곡가 하광훈, 김명곤, 김희갑, 이호준씨 등이 그에게 선뜻 곡을 주기로 약속했다. 사진작가 김중만씨와 디자이너 하용수씨 등 김추자씨의 열혈팬임을 자임하는 사람들도 그의 컴백 앨범에 크고 작은 도움을 주기 위해 모였다. 70년대 이후 좀처럼 남에게 곡을 써주지 않던 신중현씨도 흔쾌히 그의 앨범에 합류하기로 했다. 우리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작곡가와 가수 커플로 꼽히는 신중현과 김추자가 다시 손을 잡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69년 봄 철모르는 대학 초년생이었던 김씨가 신씨를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는 자기가 칠 대형사고를 예상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응원단장을 도맡아하며 남들 앞에 나서길 좋아하기는 했지만 춘천 촌아가씨가 뭘 알았겠어요? 대학 신입생 장기자랑에서 1등을 하고는 무턱대고 가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그가 작곡가 신중현씨를 찾아가기로 한 건 순전히 “흔드는 걸” 좋아해서였다. 신씨 주변사람한테 “만나기 힘들 거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들었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연습실로 찾아가 오디션 요청을 했다. 신씨의 뜨악 하던 표정은 그의 노래 한곡을 듣고 조금 변했지만 그의 대답은 “앞으로 연습실에 와서 꾸준히 연습해봐라”였다. 그러나 오디션을 본 지 한 달이 채 안 돼 신씨는 그에게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의 악보를 던져줬다. 그해 가을 데뷔 앨범을 발표하자마자 치솟기 시작한 김씨의 인기는 다음해 연속극 주제곡인 <님은 먼 곳에>에서 폭발하고야 말았다. “처음 준비할 때는 ‘70년대 김추자’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신중현씨와의 작업을 의식적으로 염두에 두지 않었어요. 그렇지만 그분만큼 저에게 어울리고 저만이 소화할 수 있는 곡을 주신 분도 없고, 까다로운 선생님의 곡을 저만큼 작곡자의 의도대로 읽어준 가수도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자주 안부도 여쭙지 못했는데 선뜻 도와주신다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출처 - 여성동아 2000.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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