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 2009. 10. 30자 보도자료 [전통주 명인의 술 이야기]<1> 문배주 이기춘 씨 천년비법, 곡주 금지법에 묻힐 뻔 《‘일본에 ‘사케’, 프랑스에 ‘코냑’이 있다면 한국에는 □가 있다.’ □에 들어갈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답은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 나라 역사의 일부일 만큼 오랜 전통을 지닌 술이어야 한다. 또 세계 시장에 내놔도 손색없을 국가대표급이어야 한다. 이제부터 □를 채울 전통주의 명인(名人)들을 찾아 나선다. 명인들이 직접 빚은 술을 마시며 술술 들려주는 ‘술 이야기’다. 명인은 농림수산식품부가 정하는 식품명인들 가운데 소개한다.》 “‘문배주’의 고향은 평양 아닙니까. 이 술이 한국의 국주(國酒)로 꼽힌다는 건 실향민에게 꼭 대통령이 된 것 같은 자부심을 줍니다.” 1000년 넘는 문배주의 명맥을 잇고 있는 이기춘 씨(67). 이 씨의 얼굴에 번지는 뿌듯한 미소가 문배주 향처럼 은은했다. 그는 문배주 술을 한 번에 들이켜며 문배주가 ‘남북의 화합과 평화’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문배주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만찬석상에 올랐던 술이다. 이 씨는 그 의미를 살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기자는 23일 이 씨, 그리고 그의 아들 승용 씨(34)와 함께 문배주를 음미하며 술 이야기에 빠졌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마련된 부친 이경찬 선생의 사당(祠堂)에서였다. 문배주를 빚어온 조상의 사진들, 이 선생이 생전에 아꼈던 술병들이 문배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 문배주 4대 이기춘 씨의 술 이야기 기자의 귀에는 이 씨의 ‘평양’ 발음이 ‘?양’으로 들렸다. 간간히 억양의 높낮이도 느껴졌다. 9세 때까지 유년 시절을 보낸 평양에서의 흔적인 듯했다. “얼마 전 현대중공업의 거대한 생산시설을 봤을 때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요.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평양의 평천양조장이 그렇게 컸었지요. 양조장이 어찌나 잘됐던지 연간 매출이 평양 한 해 예산이란 얘기까지 있었습니다. 1940년대 말이었는데 양조장 트럭들이 오가고 종업원도 수십 명이었을 정도니까요.” 고려 태조 왕건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문배주 제조법은 이 씨 가문에서 증조모 때부터 이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문배주를 3대째 이은 부친 이 선생은 1951년 1·4 후퇴 때 서울로 피란 온 뒤에도 계속 문배주를 빚었다. 하지만 그는 곡물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양곡관리법 시행에 따라 손을 놔버렸다. “아버지는 ‘알코올에 물 타 만드는 술은 안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 슬럼프에 빠져 끝없이 바닥으로 내려가셨죠. 한참 뒤 국가에서 국주를 찾는다고 하자 아버지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문배주도 국주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죠.” 문배주가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선생의 고집스러운 장인정신 덕이었다. 그는 제사 때마다 집에서 법에 걸리지 않을 만큼 소량의 문배주를 빚었다. 알코올에 물 섞은 술은 찾지도 않았다. 그런 고집을 이어받은 이 씨도 1980년대 들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저는 원래 대기업에 잘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 작업장에서 화물차 운전수가 된 옛 양조장 직원을 만났지 뭡니까. 그 직원이 ‘양조장집 주인 아드님이 어떻게 되신 거냐’고 묻더라고요. 부끄럽더군요. 가업을 잇겠단 생각으로 다 버리고 나와 버렸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온 결과는 흡족한 결실로 돌아왔다. 이날 그는 마침 ‘러브 콜’을 받고 일본에 다녀온 길이었다. “일본에서 열린 한국 전통주 행사에 다녀왔는데 바이어들이 상당히 많이 가져갈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술 마실 때마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다짐합니다. 외국 자본도 호시탐탐 문배주를 노리고 있으니까요. 세계 시장에 반드시 한민족 대표술로 키울 겁니다.” ○ 5대 이승용 씨의 술 이야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자인 아들 이승용 씨는 문배주에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포장을 입히고 있었다. “전통주는 품질 개선 노력이나 연구가 미흡한 편입니다. 문배주도 마찬가지였죠. 2년간 품질에 공들였습니다. 4년에 걸쳐 패키지도 다시 개발해냈어요. 요즘 소비자 취향에 맞게 40도짜리 외에 23도짜리도 개발했습니다. 앞으로 술병의 디자인에 더 신경을 쓸 생각입니다.” 그는 1993년 작고한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문배주 명인의 길을 잇기로 했다. 아버지의 조언으로 대학에서 농화학, 그 가운데서도 발효 부문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일본시장을 타깃으로 삼고 있습니다. 도쿄 식품박람회에 5년째 참가하고 있는데 몇 년 동안 박람회에서 맛만 보고 갔던 대형 유통회사에서 드디어 주문을 했습니다. 8월에 납품을 시작해 반응이 좋아서 11월에 2차로 판매할 예정입니다.” 아들 얘기를 듣던 아버지 이 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난 문배주 기술을 전하지만 돈 버는 데는 능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양조장 사업을 잘 키웠던 할아버지를 빼닮았어요. 잘 지켜봐주세요.”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 문배주 :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방에서 전래돼 온 증류주. 고려 태조 왕건 때부터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잘 익은 문배나무 돌배 향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밀로 만든 누룩, 좁쌀, 수수 등을 주 원료로 한다. |
출처: nami와 함께하는 행복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na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