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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또를 통해 본 한국연극(예술)詩學 試論(1)
-2002 월드컵아리랑과 고대한글, 치우와 삼신사상을 중심으로-
정순모(연극이론․연출가/극단 실험)
Ⅰ. 들어가는 말-연구방법 및 절차
Ⅱ. 2002 월드컵의 신명체험-2002 월드컵의 문화사적 의미
Ⅲ. 월드컵을 성공시킨 5가지 민족문화사적 상징물들.
1. 종교차원의 신들림(Madness)
2. 신들림을 가능하게 한 살아있는 맥박-5가지 민족문화사적 상징물들.
Ⅳ. 월드컵을 성공시킨 민족문화사적 상징물들의 철학적 의미.
1. 월드컵 북소리 3박자과 2박자의 수리철학적 의미, 그리고 3태극
2. 월드컵 3박자 북소리의 철학적 의미,
3. 3태극 및 한민족 전통문화의 수리철학적 원리
Ⅴ. 고조선 구비문학 유산으로서의 ‘아리랑’-연원, 연구실태, 새로운 해석
1. 윤도현의 ‘월드컵아리랑’에 대한 유감
2. 아리랑 연구 어디까지 왔나?
3. ‘아리랑’의 연원-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4. 고조선 구비문학 유산으로 아리랑의 문헌적 근거
5. 한민족 구비문학으로서의 ‘아리랑’의 진정한 의미찾기
6. 옛한글의 생성과 원리와 법칙
7. 아리랑의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
Ⅵ. 치우천황과 치우가면, 그리고 길가메쉬/마하바라타 서사시와 아리랑
1. 한민족의 영웅 치우천황은 누구인가?
2. 치우천황의 한민족 문화사적 의미
3. 치우와 길가메쉬/『라마야나』와『마하바라타』의 역사적 연원, 그리고 아리랑 사사문학 의 가능성과 아르또
Ⅰ. 들어가는 말-연구방법 및 절차
이 글의 목적은, 2002년 6월의 월드컵을 성공시킨 5가지 한민족문화 상징물들의 문화사적 의미와 잔혹연극론을 창출한 아르또의 동양전통연극 관련 자료들의 동양문화사적 의미를 비교분석하면서, 21세기 한국의 문화상황에 적합한 한국의 고유의 연극예술시학의 가능성을, 특히 잔혹연극론의 모형인 아르또가 참조한 동양전통연극 관련 자료들의 의미분석과 비교를 통해 탐색하는데 둔다.
이러한 시도의 가능성이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촉발시킨 것은, 20002 한국월드컵에서 한민족의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고 신명체험을 하게 한 민족문화적 상징물들이 갖는 전통적 종교철학성 또는 역동적 형이상학성이, 서구문화의 근본적인 해체와 서구인 개조를 위한 대안문화이론으로 창출된 아르또의 잔혹연극론의 종교철학성과 원리적으로 상응하고 있다는 연구자의 확신 때문이다.
이 연구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우선 아르또의 삶의 터전이었던 서구현대문화의 근본원리의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배은망덕하게도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 대안으로 아르또가 참고한 동양문화자료들이 내재한 종교철학적 실체가 과연 서구현대문화를 개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아르또가 참고한 동양문화자료들이 내재한 종교철학적 실체가 과연 동양의 종교철학적 실체의 전체인지 또는 부분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 속에서 아르또의 위치가 좌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을 위해 우리는 먼저, 서양의 몇 배가 되는 동양의 3극(三極)이라는 인도-중국-일본이, 각각 한국과 종교철학적인 관점에서 다른 점을 알아야 한다. 그 결과 도출된 한국 고유의 종교철학이 아르또가 참고한 동양전통예술 자료들 저변에 흐르는 종교철학적 의미와 상통할 수 있는지를 규명해야 하고, 이어 아르또의 잔혹연극의 실제가 오늘날 한국연극의 현상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찾아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글의 궁극적인 관심은, 특히 21세기 지구촌 지역문화(Glocal culture) 환경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할 대한민국의 고유한 문화창출의 가능성이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동양철학성을 기초원리로 창출된 아르또의 잔혹연극시학이 어떤 종교철학적 원리에서 친연성을 갖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한국연극현장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아르또 잔혹연극의 종교철학과 한국전통극의 종교철학과의 친연성을 드러내어, 한국연극현장에서의 잔혹연극의 활용방식을 탐색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 한국연극시학의 구축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차로 전개될 것이다.
1. 우선 2002 월드컵의 문화사적 의미를 정리해 보고, 그러한 문화사적 의미를 방출시킨 한민족 문화상징물들의 철학적 의미를 정리해 본다.
2, 그런 다음, 아르또의 동방탐색의 결과물인 잔혹연극론의 핵심철학이, 고대 그리스 및 이집트의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신비제의’의 주인공 코레(페르세포네) 여신이 갖는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그 코레가 한국의 일련의 고려(구려)계통의 국가명들이 갖는 종교철학적 특징과 연관된다는 것을 밝히고, 그 코레 신비제의 종교의 철학적 원리를 활용한 아르또의 잔혹연극론의 창출과정을 모형으로 삼아, 한국연극시학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 가능한 것인지를 시도해 본다.
Ⅱ. 2002 월드컵의 싱명체험-2002 월드컵의 문화사적 의미
2002년 6월, 한 달을 하루같이, 머리에는 붉은 옷과 띠를 두르고, 크고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大韓民國)과 ’아리랑‘을 외치고 부르며, 너와 나와 우리가 하나되어, 온몸이 고공비상하는 신비체험을 공유하며 우리 모두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했다. 우리는 그 때, (대)한(민)국과 태극기, 월드컵 아리랑, 전설적인 치우(蚩尤)의 붉은 악마가면(惡魔假面)과 붉은 단복이 왜 그토록 우리의 가슴을 격렬하게 진동시키고 합창과 어깨춤이 절로 나게 함을 느꼈고 그러한 삶을 행복이라 부르며, 그렇게 영원히 살기를 염원한다는 점에서 동지였다. 사실 행복에 대한 염원이 인간의 보편적 꿈이다. 2003년 1월, 영국의 직업 심리학자 <캐럴 로스웰>과 인생삼담사 <피터 코언>이 행복의 핵심요소를 3가지, 즉 P(개인적 특성, 인생관-적응력-유연성), E(생존조건, 건강-물질-인간관계), H(높은 수준의 정신적인 조건, 자존심-기대-유머감각)로 설정하고, 소위 인간의 행복감 수치계산 공식을 P+(5*E)+(3*H)라고 발표한 바 있다. 우리와 달리, 하나의 의무처럼 매주 일요일이면 성소(聖所, 예배당)에 들어가, 초월적인 신의 은혜를 감사하는 천년 이상의 습관을 가진 현대서구인들이, 도대체 얼마나 불행하면, 수치화가 불가능한 감정상태(Emotional state)까지 측정하려고 하는지 의아스럽다.
사실 수치화까지는 아니라 해도, 우리 한민족의 선조들도, 수천 년 전부터 행복의 조건을 연구하고 실천해 왔다.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비록 하늘(양)의 정기와 대지(음)의 정기가 상생(相生)/상극(相剋)하여 창조된 만물 중의 하나가 인간이지만, 당당히 대우주를 구성하는 3요소(천, 지. 인) 중 하나로써, 천지와 지극정성으로 공명(조화)할 때, 오복(福)을 받아 행복해 진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더구나 이 오복의 획득원리가, 인간․자연․우주 모든 곳에 상응한다고 생각하여, 오덕(德)-오곡(穀)-오미(味)-오방(方)-오시(時)-오가(五加)-오성(聲) 등등의 개념을 구축하고 체계화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동지(冬至)가 되면, 왜 붉은 팥죽을 끓여 집안 곳곳에 뿌리며, 정초가 되면, 왜 오색 색동저고리에 오곡밥을 먹는지, 나아가 처용가면무(處容假面舞)에서 5색 옷을 입은 5명의 처용이 왜 나오고, 봉산탈춤 팔먹중의 옷이 왜 5색이고, 고성오광대는 왜 5마당/5광대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안다. 모두가 조화되지 못한 것(악, 불행을 유발하는 것)을 막아 인간의 행복을 연금술적으로 확보․유지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행복의 조건을 성취하여 합일감(合一感)에 도달할 때, 우리 한민족은 신명(神明)/진흥(眞興)/진락(眞樂)이라고 부르고, 공자와 장자는 노닌다(遊)/흐른다(流)라고 하였다면,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우(A. Maslow)는 절정체험(peak experience)이라 부르고, 종교 쪽에서는 무아지경(ananda, 황홀경), 범아일여(梵我一如) 또는 법열(法悅, ecstacy)라고 했을 뿐이다. 또한 그러한 삶을 우리 한국인은 ‘신명난다’, ‘살맛 난다’라고 말한다면, 프랑스 사람들은 ‘On se sent vivre.', 영어권 사람들은 ’I feel myself be alive!'(?)이라고 말할 뿐, 그러한 합일적인 삶은, 너-나-우리-인간 모두의 궁극적인 영원한 꿈이다.
월드컵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종교와 예능의 본래의 기능, 즉 BC776년 올림피아 계곡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벌거벗고 시작한 종교적 제전(祭典, 5종 경기/비․희극 경연대회 포함)의 연원과 존재이유와 효능이 모두, 인간의 행복추구 욕구와 연관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도 희랍비극과 올림피아가 예능사(藝能史)에 의미 있는 사건으로 회자(膾炙)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월드컵 상징물들은 분명, 많게는 1만여 년, 적게 잡아도 5000년의 우여곡절을 살아 온 한민족의 후예인 21세기 한국인에게, 한편의 감동적인 초혼시(招魂詩) 이상의 사건들을 생산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러한 영적 장미의 상징적 도구들 중에, 한민족의 민족혼을 보다 크게 높게 환(桓, 韓)하게 증폭시킬 수도 있는 곰 할매는 물론, 3신(三神, 환인과 환웅과 단군)할배들의 초상화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더구나 2002년 6월13일, 치우천황의 붉은 액막이 굿의 효험 하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신명의 축제 한가운데서도, 마치 진정한 축제의 신은 희생제물을 필요로 한다는 고대신화처럼, 훈련용 미군장갑차 한대가 효순이와 미선이의 육체를 짓뭉개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축제는 엄청난 결과를 몰고 왔다. 과연 희생제의적 축제의 영험이었을까?
그로부터 6개월 후, 하늘을 찌르던 <2002년 6월의 한민족의 절정체험>은, 효순이와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반미(反美)분노감으로 변형되더니 결국, 2002년 12월 14일 밤, 백악관(White House)을 경악하게 한, <거룩한 광화문 촛불시위>로 나타났다. 그 다음 날 새벽, 잠을 덜 깨 부시시한, 21세기 제왕, 부시의 부실한 사과문이 당도했고, 아울러 그 축제의 여력은, 2002년 12월 19일 대선에서 노무현 정권을 창출하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21세기 한민족 축제의 알(얼)을 받은 시민들은, 2003년 1월 5일 현재까지도, 부시의 직접사과와 소파(Sofa, 주한 미국주둔군 지위협정)의 가시적인 개정을 촉구하기 위해, 마치 신라의 화랑도인 양, 임전무퇴의 신화적 장미로 살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소위 집약적 정보통신기술문화(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I.C.T.)로 대표되는 21세기 초두에, 최근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진지하고도 비판적으로, 종합적으로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위에서 말한 5가지 월드컵 상징물들의 문화적 효능은, 논리와 이성과 원칙 중심의 규범문화(text)적 영역에 의존한 효과라기보다는, 주변여건에 따라 변형․증폭되는 감성주의적 상황문화(context)적 영역에 더 의존했을 때에만 실제로 가능한 결과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월드컵 상징물이 파생시킨 실제 문화현상들은, 21세기 감성적 디지털 영상시대의 특성에 너무나 잘 부합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월드컵으로 인한 한국의 기적이, 4개의 강대국 미국-중국-일본-소련이라는 4대 강대국의 힘의 교차점인 한국, 그것도 냉전의 마지막 유산인 남한에서 표현되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바로 6개월 뒤, 콧대높은 21세기 초의 황제 부쉬의 사과를 받아낸 <광화문 촛불시위>로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더욱 강화된다. 나아가 한국의 민족/민주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했던 과거 10년 간, 한 때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탄생한 두 명의 영웅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와 결과를 고려하면, 이해차원이 아니라 차라리 혼란스럽다. 즉 영 삼삼하고 대중없는 정치로 공적보다는 차라리 실정을 거듭한 <김영삼-김대중 두 문민-국민정부의 과거 10년 간의 부패한 통치결과물>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면, 그 어느 때보다 국민의 냉정한 평가 위에, 규범적 질서의 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서, 오히려 그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한 두 영웅정치인의 비호 하에 성장한 노무현씨에게 정권이 이양됐고, 취임 약 3달이 지난 벌써부터 노무현 지지자들조차 분열되고 있다는 실제사실들을 고려하게 되면, 더욱 더 2002 한국월드컵의 문화사적 의미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건 완전히 기존의 사유체계(paradigm)을 완전히 바꾸어도, 거의 이해가 어려운 수준에 이른다는데 있다.
그래서 최근 월드컵 이후, 한국 특유의 상황문화적인 일련의 현상들의 원인을 분석한 문화비평가들이 폭주하고 있다. 그 중 혹자는, 역설적으로, 월드컵 이후 그러한 일련의 결과가 나타난 것은, 우리 한민족만이 가진 보편적인 문화적 유전인자(遺傳因子), 즉 3태극으로 상징되는 천지인(천부인) 문화문법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는, 3태극이 무엇인지 천부인이 무엇인지 전혀 배운 바도 없고 이해할 마음도 없는 한국민의 현실을 고려하여, 이러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대안까지 낼 수 있는 개념을 하나 제시하려고 한다.
즉 연구자가 보기에, 월드컵 이후 한국 땅에서, 이러한 신화적 생명력이 촉발된 원인은, 우리 한민족의 문화가, 유전적으로, 비이성적인 상황문화적 문법(contextual grammar) 중심이기 때문이 아니라, <신화적 변증법> 중심의 문화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신화적 변증법>은, 1980년대 초 한국 정신문화원에서 장기간 머물며, 한국의 유산들 중 사찰-무당-전통공예품 등을 연구하고 한국의 가능성을 시사한 후, 얼마 전 타계한 프랑스 구조인류학자 끌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Révi-strauss)의 용어이다. 물론 <태양에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지도 않게>라는 공식에 따른 논리에 입각한 이 <신화적 변증법>은, 헤겔의 <관념주의적 변증법>도 칼 막스의 <물질주의적 변증법>을 모두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마치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인간들처럼, 자연 친화적 순수한 인간의 신화적 사유방식을 지칭한다. 원시 미개인적 사고라고 경멸하지 말라. 태양에 너무 다가가면 모두 불타 버리고, 너무 멀어지면 얼어죽는다. 이것은 영원불변의 진리이다. 이것이 바로 환인-환웅-단군 할배들이 실천한 천지인(삼부인, 3태극) 원리에 근거한 홍익정신의 지혜요, 석가-공자-노장자가 말한 중용의 지혜이다.
Ⅲ. 월드컵을 성공시킨 5가지 민족문화사적 상징물들.
Ⅲ-1. 종교차원의 신들림(Madness)
그러나 만일 우리가, 2002년 6월 제전(祭典)에서, 환인/환웅/단군이래 최초로, 태극기로 몸을 두르고 마음껏 조국 대한민국을 부르고, 아리랑 가락에 어깨춤이 절로 난 이유를 아는 동지가 되었다면, 그때의 감동은 더 증폭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통일이 되는 그 날>처럼, 언젠가 다시 맛보게 될 제2의 월드컵 신비를, 보다 의미 깊은 체험의 대상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연구자가, 그 축제가 끝난 후에도 한 달이 넘도록 후유증이 지속되는 것을 보며, 그 신명체험의 이유를 연구해 본 결과물의 일부이다. 연구의 주제는, 붉은 악마군단(Red Devils)이 고안한 민족(民族)문화적 상징물들, 즉 대한민국, 아리랑, 대형 태극기, 치우라는 신화적인 영웅의 악마가면과 응원단의 붉은 색 등등이, 왜 그러한 전율감(신명체험)을 우리 마음속에 불러 일으켰는지, 또 그것들을 한민족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규명해보는 것이었다.
연구자의 전체적인 결론은, 아르또와 연관지어 볼 때, 그러한 문화현상이 단순한 광기(狂氣, madness)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차원의 신들림(Madness, 신내림)에 속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 2002년 6월의 그러한 민족공동체적 환희야말로, 가까이는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화현상일 뿐 아니라, 멀리 보면 반만년 또는 1만 년 전부터 존재해 온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사적 현상의 일단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번 월드컵을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비록 우리 한민족이, 냉전시대의 마지막 유물인 38선을 경계로, 반쪽은 민주․자본주의라는 논리로 살고, 반쪽은 구시대적인 공산주의 이념(ideology)의 논리로, 그것도 21세기 초 현재까지 무려 50년 이상 살아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한민족(韓民族)이라는 공동체 감정, 즉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일체의 종교/이데올로기적 한계를 초월한 신비한 영적(靈的) 장미(mythical rose, 기독교에서는 성모마리아를 상징)를 공유할 수 있다‘라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한민족 공동체적 감동이, 시공간적으로, <가짜가 진짜보다 더 미학적/실제적 힘(aesthetic and realistic force)을 발휘하는, 21세기 초감성적 영상(映像, image)의 시대>라는 최악의 조건 하에서 발생했다는 기이함 때문이었다
Ⅲ-2. 신들림을 가능하게 한 원인-5가지 민족문화사적 상징물들.
그럼, 그러한 영적 장미, 즉 잠재되어 있던 한민족(韓民族) 공동체적 이상의 발현을 가능하게 한 문화내재적 요소들은 무엇이었을까? 다각도로 말할 수 있겠지만, 연구자는, 붉은 악마단이 창의적으로 구상한 한민족 문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5가지 도구들 덕분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분명, 이 문화적 상징물들이 아직도 한민족의 영혼에, 언제든, 살아 움직이는 신화적 생명감(mystic vitality)을 촉발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다시 한번 그 5가지 민족적 상징물들과 그것들의 의미들을 정리해 보자.
ⅰ) 우선 ‘아리랑/아리랑/아라리오/아리랑 고개로/넘-어간다.’를 열창한 가수 윤도연의 열창! 연구자는 한민족의 감성을 수 천년 간 자극해 온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고조선 제1기~제3기 고조선 시대(BC 7197~295?) 지도자(단군)들이 만든 시민교육용 노래의 유물로 보인다.
ⅱ) 붉은 악마군단의 단복(團服, uniform)과 치우(嗤禹, 일명 자오지) 가면에서 보았듯이, 우리 한민족의 토속신앙에서 퇴마(退魔) 또는 구마(驅魔)의 의미를 가진 붉은 색감들,
ⅲ) 붉은 악마 단복의 붉은 물결과 대형 태극기가 촉발시킨 영혼의 흔들림과 유동감! 붉은 악마단의 붉은 단복이 이루는 물결들의 미적 감각(美的 感覺)과 아울러, 이미 위에서 말했듯이, 대한민국의 태극기는, 하늘로부터 씨(민족, 혼, 광명)를 받은 만물을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만물을 교화․완성하여, 대생명을 잉태․탄생․성장․보존․재탄생 시켜 하늘의 축복(人乃天) 가운데 사는 것이 하늘족(환한 족, 韓族, 桓族)의 임무라는, 생명철학의 원리와 실천방식(복희가 만든 8괘-64괘로 된 환인의 주역)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4색 대형태극기 물결이 주는 장엄한 감동은, 차라리 종교적 숭고미로 느껴졌다.
ⅳ) 치우 천황의 액막이용 붉은 악마가면이 불러일으킨 미묘한 영혼의 진동감! 문헌에 의하면, 한민족이 최초국가는 BC 7197년(桓因國) 환인이 세운 환국(桓國)으로 시작되는데, 이를 연구자는 넓은 의미의 고조선으로 분류하겠다. 그래서 필자는 넓은 의미의 고조선을 3기로 나누어, 각각 제1기 환인의 환국/제2기 환웅의 배달(박달, 신시)국/제3기 단군조선으로 구분했다. 그럼 치우는 누구인가? 뒤에 좀 더 설명하겠지만, 고조선 제2기의 환웅 배달(신시)국 시대(BC3898~1565)의 14대 천황 ‘치우(蚩尤, 일명 자오지, 자위지, BC2816~2707)를 말한다.
ⅴ)대~한민국이란 구호 뒤에 전개된, 3박자와 2박자가 혼합된 영적(靈的)인 북소리가 우리의 내면에 불러일으킨 그 절묘한 울림!
Ⅳ. 월드컵을 성공시킨 민족문화사적 상징물들의 철학적 의미.
Ⅳ-1. 월드컵 북소리 3박자과 2박자의 수리철학적 의미, 그리고 3태극
아는 바대로, 일반적으로 북은, 어떤 민족의 수호신이나 조상의 영혼(귀신)까지도 위로․진정시키고 인간의 소망실현을 마법적으로 설득하는데 효과적인 영력을 가진 신성한 악기로 믿어져 왔다. 당연히 동양에서는 다른 악기들과 마찬가지로 이 악기소리 역시 음양의 작동 원리(道)를 실천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 한민족의 정서를 잘 표현해주는 중요한 민속악기들의 명칭들-꽹가리, 징소리, 북, 장고-을 우리 순수말로 보고, 천부인 3재(천/지/인)에 기초한 옛한글 체계로 분석해 보아도, 그 악기들의 원초적 상응적 기능들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쇠를 질료로 하고 있는 꽹가리와 징을 보자.
꽹가리가 자음 <ㄱ+ㅇ+ㄱ+ㄹ>로 구성된 만큼 그 의미를 옛한글 체계로 풀면, 기(氣, 에너지, 힘)를 중심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가장자리로 퍼져 꿰뚫게 함으로써 결국 공격적인 외면적인 남성적인 양(陽, +)의 소리임을 표의(表意)하고 있다면, 징은 자음 <ㅈ+ㅇ>의 복합체인 만큼, 극단적으로 퍼지는 꽹가리가 품는 기(氣)의 예봉을 진정시키고 가라앉혀 은은한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방어적이면서 내면적인 여성적인 음(陰, -)의 소리로서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맺는다. 이 논리는, 상대적인 대립관계에 있는 나무통과 동물가죽을 재료로 하는 북과 장고 사이에도 적용된다. 즉 북과 장고는 전체적으로는 여성적인 소리로서 남성적인 꽹가리와 징소리에 대립되지만, 북과 장고 2악기만 보면, 상대적으로 그들 사이에 역시 음양의 상응작용이 전개된다. 즉 북은 자음 <ㅂ+ㄱ>으로 되어 있어,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모성본능적 맥박에 따르되 중심 밖으로 당당하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실천적 남성적 의지를 표의하고 있다면, 장고는 자음 <ㅈ+ㅇ+ㄱ>으로 되어 있어, 생명력을 안으로 보듬되 밖의 남성적 의지에 생명력을 주어 격려하고 맞장구치는 소리로서 북과 상응하는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악기 사이의 음양(상극)작용을 넘어 천지인(天地人)간에 상생-조화하는 형이상학적 황극대중(皇極大中, 수리철학으로는 九의 중심인 五의 상징)의 원리를 한국철학에서는 삼재론적 음양(오행)론(三才論的 陰陽五行論), 즉 그러한 음양의 변화원리가 만물의 5가지 근원적 구성요소들(元氣)에 작용하고 대자연과 공명하는 현상들을 이론적으로 통칭하여 삼신론적 음양오행론이라 한다. 그러나 중국철학은 한나라 이후 이 삼재론을 잃고 음양오행론을 중심으로 삼아 삼재론이 사라지는 폐해를 갖게 된다.
어쩃든 음양오행론은 악(樂)을 제정할 때도 적용된다. 물론 동양전통예술 개념상, 여기서 악이라는 말은, 시가무악극(詩歌舞樂劇)을 총체적으로 또는 각각의 예술장르를 대신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예술원리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내외적 인격완성의 실천방법으로 예(禮)를 주장하면서도, 그 예의 미흡함을 보완하여, 인간의 내적 인격을 정밀하게 완성시키는 방법으로 악(樂)을 주장한 공자가, 아주 중요시하고 정리했다는『예기』(禮記) <악기편>(樂記編)의 다음 말에, 비록 인간의 생명활동을 완성의 핵으로 보는 한국의 3배수 문화전통에는 잘 맞지 않지만, 그 원리만은 잘 나타나 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데, 만물이 그 사이에 산재하여, 각각 그 체용(體用)을 달리하여 실현되니, 결국 자연히 전체적인 체제(體制)가 실행된다. 게다가 음․양의 2기가 유행(流行)하여 쉬지 않고 작동하니 만물이 생성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양의 작동으로 인해 만물(대자연)이 합동화성(合同和成)하고 서로 공명진동하여 일어나는 것이 자연의 악(樂)이다.”
이조 성종 때, 성현이 지었다는「악학궤범」(樂學軌範) 서문에도, 악(樂)에 대한 이론이, 비록 공자 이후의 현실중심적 예악논리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어 역시 한계는 있지만, 그 원리를 잘 말하고 있다. 쉽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5음(音) 12율(律)란 악(樂)의 근본이다. 물(物)이 생기면 반드시 감정이 있게 되고, 감정이 발하여 음(音)이 되기 때문이다. 우선 관(管)의 길고 짧음에 따라 청성(淸聲)과 탁성(濁聲)이 있고, 또 음(音)에는 궁(宮)․상(商)․각(角)․지(徵)․우(羽)가 있어 5가지로 분배․상응․실현되니, 이것이 음양오행의 이치니라. 그리고 율(律)에는 12개가 있으니, 이것은 열두 달에 분배․상응되는 셈인데, 이 12율이란, 원래 봉황의 암컷과 수컷의 소리를 본받아, 이 봉황의 음/양의 소리를 각각 6가지로 나누어, 양(陽) 소리를 6음(六音)으로 나눠 6율(六律)이라고 하고, 음(陰)소리를 6음(六音)으로 나눠 6려(六呂)라 한 다음, 이를 합하여 12율(律이)라 칭한 것이다.”
그래서, ‘접신(接神) 또는 우주의 소리(진동)’라고 하면서 세계인의 찬사를 받고 있는 김덕수 등의 사물(四物)놀이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악기의 음․양소리의 작용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악기소리들 간에, 다음에는 악기소리와 인간이, 그 다음에는 인간과 대자연과 조화공명되어 합일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한국의 3재론적 음양오행론의 전통사상을 생각한다면, 악기가 4개가 아니라 적어도 3개 아니면 9(=3×3)개, 이론적으로 천지인 3재의 원리를 응용하여, 악기의 총수 또는 악기연주 방식을 재편성하여야 맞다. 어쨌든, 북과 장고의 ‘가죽소리’는 음이고, 징과 꽹과리의 ‘쇳소리’는 양이어서, 감동적인 음악은 음․양 두 종류의 소리들이 상극/상생작용을 함으로 인해, 소리들 서로가 공명(조화)하는 소리라는 논리다. 결국 쇳소리는 하늘의 소리요, 가죽소리는 땅의 소리며, 그것을 주체적으로 운용하고 완성시킨 것은 사람(연주자, 청자)의 몫이니, 결국 사물놀이의 감동은, 악기들 사이는 물론 각 악기의 소리들 사이에, 음양오행 원리가 작동함으로써, 결국 악기(四物)의 소리들 간은 물론, 악기(소리)들과 인간들(청중) 사이에 공명조화 현상이 일어나고 나아가 가장 중요한 것, 즉 그 감동의 원인이 되는 진동(공명)을 인간이 성취하여 대자연(천, 지, 인)을 혼연일체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특히 최근 공연예술 분야에서 사람(연기자와 관객)을 중시하는 21세기 퍼포먼스 예술이론은, 이러한 한국의 전통예술철학에 정확히 부합된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탈춤의 북이 내는 리듬 역시 대자연(천, 지, 인)사이의 공명조화 현상으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처음에 가죽을 때려 <쿵>하면 음이요, 그 다음 나무쪽을 때려서 <딱>하면 양이요, 그 다음 보다 빠르게 가죽과 나무를 번갈아 때려 <쿵딱>을 치면 가죽과 나무의 소리를 동시에 낸 것이므로 제3의 조화소리인 중성(태극), 즉 북소리들은 결국 음(陰)+양(陽)☞태극(太極)이 실현됨으로 인해, 처음은 북소리들 사이에, 그와 동시에 인간과 대자연 사이에 마법적으로 공명진동이 일어났다는 논리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음양간의 변화/조화의 계열체계가 대자연과 합일공명함으로 인해, 북의 리듬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서양의 정(正)+반(反)→합(合)을 주장한 헤겔의 관념적 변증법이나 칼 막스의 물질주의적 변증법의 직선적 전개논리와 형식면에서는 물론 그 의미조차 판이하다.
예를 들어, 제주도 무당(巫堂, 심방)의 악기(樂器)인 ‘울쇠’는, 구리로 만든 5가지의 무당굿 소도구(巫具)인 해거울․달거울․몸거울․아왕쇠․뽀롱쇠 등이 한데 어울린 악기들인데, 그 기능/형태/장식 문양에 따라, 일광경(日光鏡)․월광경(月光鏡)․병경(柄鏡)․방경(方鏡)․성경(星鏡) 등으로도 부를 수 있어, 결국 우주와 인간의 생성법인 음양의 이치가 적용된 악기임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해거울은 양(陽)이요 달거울은 음(陰)이며, 몸거울은 음양의 합(合)이요, 뽀롱쇠/아왕쇠는 별들로 구성되는 천체(天體)를 나타낸다고 보아, 결국 우주의 변화 그 자체(道)를 형상화한 사상체계, 즉 주역의 응용이라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주와 인간의 외부/내부에서 존재하는 일체의 현상들(만물)은, 음양의 무궁한 변화작용, 즉 상생상극으로 인한 변전을 겪는다는 일체의 담론들이 음양설이다. 또한 상극과 상생하는 음양 두 원리의 교차적인 변화․작용을 무상(無常)한 삼라만상의 생성소멸의 리듬이라 하고, 그 리듬에 영향을 받아 또 다시 5원기(五元氣, 五德, 木/火/土/金/水) 간에 변전(變轉, 상극과 상생)이 생성되는 바, 그 오원기(五德)간의 관계로써, 일체의 자연/인간의 운행(생성, 지속, 재생)질서를 설명하는 이론이 오행설인데, 이 2개의 담론을 묶어 흔히 음양오행설이라고 하며, 이 음양오행의 논리체계를 통칭하여 음양오행사상이라 칭하고, 이것을 삼재로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3재론적 음양오행론이라고 한다.
Ⅳ-2. 3태극 및 한민족 전통문화의 수리철학적 원리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동양의 전통문화는 이 음양오행원리가, 자연의 운행질서(4계절, 12달, 방위, 기후 등)는 물론 인간행위의 질서(왕조의 교체, 정치지도자의 교체, 결혼, 사주, 궁합 등 일상적 행사일체, 음식물, 색채, 의학, 기타 정신작용 등)에 적용된 결과물로 본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듣는 말들, 즉 역(易)사상이나 도(道)란 말은 실제로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도란 음양의 변화작용으로 인한 우주의 변화 그 자체를 칭하는 것이고, 역이란 그러한 도를 체계화한 사상이다. 또 그 역(易)을 연역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한 책을 주역(周易)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역에 의하면, 우주조차 한번 음하면 한번 양한다는 원리자체를 도요, 대자연의 도를 체계화한 것을 역이라고 한다.
이제 정리하는 의미에서 하나 덧붙여 두자. 주역에 의하면 음양은 본래 하나의 기(氣), 즉 무극(無極)이지만, 동시에 음양의 필연적인 교차활동에 의해, 모든 사물은 물론 그것들의 본체인 우주도 변화원리(道)를 따른다고 전제한다. 단, 이 음양 2기(二氣)가 교감(조화, 화합)할 때만 만물이 생생하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그럼에도 기실 음양의 대립구조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가설을 깔고 있다. 따라서 인류의 보편적인 관념으로서 성속의 대체관념인, 이 음양의 이분법의 궁극적인 이념은, 그 자체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창조력과 생명력을 언제나 생성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정말 창조력과 생명력을 생성하고자 한다면, 그 불완전한 음양의 대립이 소멸되는 상태, 즉 이원론의 대립을 넘어서 화합(造化)을 획득했을 때 가능하다는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한국사상에서는 이 조화의 책임이 인간, 특히 고조선 국가인 경우, 최고지도자(단군)에게 부여된다. 그런 이유로, 실제로 고조선 사회나 BC 3000년대의 고대의 인도-이집트-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왕은, 일정한 통치 후에도 그랬지만, 만일 통치기간이라 해도 중대한 천재지변(가뭄, 홍수, 천체의 이변 등)이 생기면, 왕을 공개 살해하거나, 스스로 자해하여 살점을 백성에게 나누어주거나, 하야하거나, 지하묘지에 생매장되었다. 어쨌든 대자연의 구성 3요소 중 하나로 인간을 넣고, 우주가 생성(生成)/유지되는 활동의 알파요 오메가가 인간이라는 이러한 한민족의 전통사상은 너무나 인간주의(humanism)적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사대주의적인 학자들은, 이 음양오행설이 중국에서 발생/발전한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자연법(자연법)으로서의 음양오행에 대한 인식이 없었거나 체계화되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고조선은 물론 한민족 문화의 기층을 몰라서 하는 망발이다. 더구나 음양 이원론은 고대사회에 보편적인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제된 통치사상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가졌던 고조선에서 중국으로 수출한 것이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음양/+-란 용어 자체는 양보한다 하더라도, 단군신화에서 보듯이, 적어도 신시(하느님의 거처)라는 말 자체가 성(聖)과 속(俗), 즉 음과 양이라는 대립개념을 설정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한글체계로 보았을 때, 어떤 생명활동의 겉모습과 안의 모습을 구분하는 ‘알’과 ‘얼’처럼, 그 사유자체가 이미 안과 밖이라는 상보적이되 하나를 잊지 않는 제3의 균형점을 지향하는 벡터개념을 전제한다.
알다시피, 배달국 환웅천왕의 명으로, 신지 혁덕(神誌 赫德)이 지은, 환웅이 환인에게서 받았다는 3개의 삼부인의 상징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것도 고대 한글인 신지문자(神誌文字) 또는 녹도문자(鹿圖文字, 사슴그림문자)로 기록한, 3개의 천부인의 원리서인『천부경』(天符經)이다. 이 책은 신라 말 최치원이 발견하여 한문 81자로 번역한 것이 있는데, 지금까지 약 10여명이 번역하였으나 속 시원히 해설을 못하고 있는 보물이다. 그 이유의 첫 번째가 옛 한글들, 즉 신지(녹두)문자와 그 이후의 가림다(加臨多, 여기서 가림은 순수 우리말로서 사물을 원리에 따라 분별한다는 의미)문자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우주만물의 근원과 시종(始終)을 1에서 10까지의 숫자(하나둘셋넷다섯...열)에 담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음양․오행․팔괘․구수(陰陽․五行․八卦․九數)가 나오고, 우주의 변화원리를 체계화한 역(易)으로서 원․방․각(圓․方․角)이 순환하는 이치, 곧 우주가 운행하는 원리가 나타나 있다.
여기서 연구자의 생각을 첨가하자. 우리는 흔히 0의 개념은 고대인도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신지 혁덕이 옛한글 신지녹두문자로 기록하고 신라 말 최치원이 한문 81자 한문으로 번역한『천부경』내용을 살펴볼 때, 하나(1)에서 열(10)까지의 숫자가 갖는 수리철학적 의미를 활용하고, 게다가 10을 0의 개념의 순환적 진전개념으로 보고 있다. 0은 우주(영혼)의 형상으로서의 하늘의 특성 일체의 형상이기에 그림으로 그리면 원(0)이 된다. 그래서 가림다 문자체계에서 0은 하늘(天)이 내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표상하는 신성한 음소이다. 아라비아 숫자 0이나 라틴어 계통의 언어들의 자모 O와는 전혀 달리, 가림다의 O는 하늘이 대자연과 관계 속에서 생산할 수 있는 특성들을 표상하며, 그것도 모음으로서만이 아니라 수리철학과 발음을 동시에 표상하는 자음(子音)으로 삼은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 외에는 없다. 그래서 연구자는, 표의(表意)문자이면서 동시에 표음(表音)문자였던 고대한글(신지녹두문자, 가림다) 체계에서 0은, 하늘의 특성 일체를 의미영역으로 가지되 정적인 자질이면 자음, 동적인 자질이면 모음(아래 아, 즉 ․)으로 보았던 상형문자적 음운이기에, 그 자체로는 하나의 알파벳 중에서도 모음으로만 활용하는 영어 등의 선조음(先祖音)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오늘날도 해결 못하는 문제 즉 지금의 ‘쌀’이나 ‘때’라는 말이 왜 고어에서 각각 <ㅄ+ㆍ+ㄹ>이나 <ㅵ+ㅏ+ㅣ>형태로 자음들을 사용했는지, 나아가 왜 오늘 날 영어에서 각각 <rice>, <time> 의 첫 자가 각각 <r/ㄹ>과 <t/ㅌ, ㄷ>로 남아 있는지를 알게 된다. 물론 심리학 뜻을 가진 <psychology>의 자음들이 왜 <p+s+ch(k)>인지도 설명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한민족의 고한글 체계는 세계 모든 언어의 원천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국의 옛문서『환단고기』등에는 분명,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 그 수메르와 동족이거나 그 후손의 일파로 보이는 고대 인더스강의 드라비다국은, 고조선 제1기 시대에 제후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 현대인의 오만한 사유를 바꿀 때 설명이 가능해 진다. 실제로 BC4500~2100년경까지 중동지역의 문화논쟁의 핵으로 존재했던 수메르는 우리처럼 티벳산 파를 즐겨 먹으며 상투-씨름-쐐기(설형)문자-길가메쉬 서사문학 등은 한민족의 전통문화 및 언어와 문학의 음조와 너무나 같다. 또한 적어도 BC2500~1500년경까지 존재했다가 아리안 유목문화와 장구한 문화논쟁을 벌려 현재 힌두복합문화의 중심원리를 이루고, 특히 인도남부 및 동남 아시아 문화의 원천이 된 드라비다족의 언어와 여성원리적 시바 종교철학은 오늘날 서양문화에 충격을 준지 오래되었다. 더구나 그 드라비다 계통의 어휘들 중 약 300개 이상은 현재 우리말과 같다. 또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나오는 바대로 환웅천왕이 환인으로부터 받았다는 ‘천부인(天符印) 3개가, 사실은 대자연(天․地․人 三才)의 이치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행복을 확보하려는 고도로 정제된 고조선 종교철학 또는 통치이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대인의 상대적 무지를 절대화하는 사이에 오히려 고대인의 놀라운 지혜를 현재의 삶에 활용할 기회를 너무나 많이 놓쳤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되던 장구한 하극상적 문화논쟁의 성과들, 특히 그러한 시기에 우리의 민족․문화적 직계로서 흔히 홍수로 상징되는 정치․문화적 위기를 타개할 비책을 개발하고 실천했던 고조선의 지도자들의 지혜들, 예를 들면 다인종 백성 통치비술인 구정법(九井法)과 그것에서 영감을 받아 농사일과 두레의 효력을 배합시킨 세계최초의 정전법(井田法, 1/9세 제도의 농경법) 실시의 경이로움, 나아가 그러한 통치경험에서 유추한 지혜경들, 특히 백성이 알기 쉽게 이해/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우리 민족과 대립상생관계에 있던 화하족(華夏族, 오늘날 중국인의 직계)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주(周)나라 무왕이 살아있는 백성을 위해 천하의 도를 질문하러 오자, BC1121년(무왕 즉위 13년째, BC1120은 은을 멸망시킨 다음 해) 전해주었다는 ‘홍범구주’(弘範九疇)이 BC2197년 진리회복의 비책(秘策)으로 하나라를 세운 우(禹)왕 생존시기에 초안이 작성되어 전해졌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는 바대로 중국지역의 문헌에서 보면, 이 홍범구주는 은나라 말 3대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은(銀, 商)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의 스승(太師)였던 기자가, 우둔한 주왕으로 인해 은나라가 기어코 주나라에 망한 BC12세기에 자신의 정신/혈통적인 고향 고조선에 귀화하여 황허강 하류 주변을 다스리는 고조선 제후국의 왕으로서 뜻을 펴면서, 고조선의 제후국 또는 친고조선 관계의 은(銀, 商)나라의 600여년 간의 경험적 사유가 철학적으로 추가 기록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어쨌든 인간구제의 차원에서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주나라 무왕에게, 대승차원에서 홍범구주를 흔쾌히 수출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국인의 주장과는 달리, 기자에 의한 홍범구주 수출기사에 의거하여서도, 분명 적어도 BC3세기 한(漢)나라 이전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우리 한(韓)민족의 삼신(천부)사상이 철학적 수월성을 보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으로 본다. 이미 위의 옛한글 설명에서 밝혔듯이, 이러한 사실 역시, 한자문화권 이전 유라시아 지역에, 한자문화권의 종주국 또는 원천으로서 한글문화권이 존속했다는 필자의 가설적 주장의 유력한 근거 중 하나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날 중국인의 신화적인 인물들 복희-여와-신농(염제)-황제-(치우와 티엑특)-당우(唐虞)의 요와 그의 아들 단주(丹朱), 예(羿)와 항아(姮娥)와 하백(河伯)과 복희의 딸 낙빈(복비), 허유와 소부-당우(唐虞)의 순-후직과 곤과 우-제준과 희화와 설과 탕-주나라 문왕과 무왕-공자-노자-추연-장자 등은 모두 고조선 1기와 2기와 3기의 사상을 창조적이지만, 부분적으로, 단계적 한계를 갖고 연구․실천한, 때로는 축소시킨 고대학자들의 유형들이라고 무방하다고 본다. 벌써 필자의 어투에 반감을 품고 이러한 주장을 사실무근의 배타적 민족주의자라고 매도할 분이 있겠으나, 넓은 마음으로 유라시아, 특히 동북 아시아의 상고문화의 다면성을 전체적으로 그려봄으로써, 처음이 아니므로 진부하기까지는 하지만, 그러나 21세기에 적합한 새로운 문화모형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럼, 한자문화권의 원천으로서 한글문화권이 존재했다는 필자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이제 월드컵의 3박자 북소리로 돌아가 보자. 어쨌든 알다시피, 박자 수도 당연히 숫자로 표현된다. 그런데 악기의 주조적 박자 수(數)도, 위에서 말한 바대로, 천지인 3재론적 음․양 오행 원리에 기초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노자는 천지의 만물창조와 순환원리를 1/2/3까지의 숫자 3개로 상징하지만, 한국의 3재론은 우주의 창조 및 순환적 작동원리를 1부터 10까지 10개, 새로운 온전한 열림으로서 10(열)은 결국 창조에너지 자체로서의 혼돈(Chaos, 無極, 空, chora)인 0(天)을 의미하므로, 0까지 치면 11개의 기본숫자로 상징하면서도 3수체계에 따라 1/3/3×3=9/9×9=81로 뻗어간다. 이것이 노자의 사상과 유사하면서도 3재론 속에 노자가 포함되는 점이다. 이 차이점이 바로 고조선의 3재론 중심적 삼신(천부인)사상의 독특성이 되는 셈인데, 필자가 아직은 미흡하지만, 노자의 도 이론을 이러한 천부인 3재사상의 일파로 간주하면서, 나아가 그 동안 국내외 재야/관학 학자들의 연구업적들을 참고하여 그 차이점을 말해 보겠다.
노자 역시 3재론적 사상을 가진 우리 전통사상과 관계가 깊다. 노자(노자)의 ≪도덕경≫(도덕경) 42장을 보자.
道生一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 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도(道)는 1을 낳고, 1은 2를 낳고, 2는 3을 낳고, 3은 만물을 낳는다. 따라서 만물은 자체 내에 음양을 업거나 안고 있어서, 충기(沖氣)로써 혼연일체(화합체)를 이루게 된다)
이 말을 흔히 1은 절대적 실체인 도가 낳은 하나의 기(氣)를 말한다면, 2는 그 기가 둘로 나뉘어진 음양(陰陽)을 말함이며, 3은 그 음양의 조화작용으로 생성된 화합체이고, 그 화합체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생일’(道生一)은 도(道)가 무(無)이면서 유(有)의 과정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중에 송나라의 주돈이의 <태극도설> 첫머리에 있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즉 무극(無極, 여기서 극은 끝으로 보이는데 中으로 보게 되면 중심이 없다라는 뜻에서 空)이 곧 1(태극)이라는 의미이다. 2는 발전과정에서의 음․양의 대립, 3은 이 대립의 극복으로 이루어지는 조화(造和)로서 여기에서 비로소 만물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상징 수의 순환의 자연성 논리에 현혹되어 무위자연설을 강조하는데, 불로장생류의 비현실적 사고로서 실천을 무시한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그럼 연구자가 아직 미흡하지만 우주의 구조적 형상으로서 생명나무, 존재계의 생성원리, 생명의 도를 설한 한민족 선조들의 유산인 천부경 원리에 의한 만물의 작용방식(易)을 보자. 노자와는 달리,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생명활동을 81자로 축약한 천부경에서는, 1을 대뜸 음양(陰陽, 人)으로 보고, 그 하늘의 원리와 대지의 원리를 교합한 사람(人, 陰陽)의 수인 1이, 또 1나를 내면 2가 되고 또 하나를 더 내어 3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양(陽, 天, 울타리)의 수 2와 음(陰, 地, 삶을 세움)의 수 3을 인간이 만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여성(대지)의 원리 3은 1(인간)과 2(천)의 계열작용의 결과이며 나아가 주체적인 인간의 삶의 활동(바탕, 특성) 일체를 상징하는 수가 된다. 그런 다음 삶을 의미하는 3과 육체의 죽음 후에 남는 4를 거쳐 새롭게 세운 깨달음의 수 5(悟)를 거쳐 죽음의 구속을 넘어선 새로운 비상의 삶응 유성하는 수를 6(育)을 대뜸 1과 같은 음양(인)의 수로 보아 만물 육성의 주체로서 인간의 상징수로 본다. 이 6은 7, 8, 9를 생성하는데, 7(陽)은 삶을 일구어 내칠 것을 내치는 활동을, 8(陰)은 실천하는 능력과 활동을 의미하는 사고 파는 활동을, 9(陰陽의 합일로서 人)는 깨달은 나(我)의 완성에 만족을 구하는 수를 상징한다. 즉 9(陰陽, 人의 수)는 각자(覺者)로서 인간의 최후의 만족스런 존재완성의 결과물을 상징한다. 존재의 완성을 그대로 이어 받은 10(人)은 음과 양의 합일로서 새로운 10이 된다. 그러니까 1, 6, 9, 10은 무이되 유를 지향하는 도(공, ㅇ, chaos, 무극)가 낳은 수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수로서 음양합일과 창조의 수로 보고 있다는 것이고 대자연의 주체를 인간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전이 노자와 상대적으로 같으면서도 차별화 된다는 점이다. 결국 천부경에서 하늘의 인장(印章, 그림)인 0은 옛한글의 자모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최고 원천(帝)으로서 무(無, 空, 道)가 되므로, 그 자체로는 음양개념이 없으나 음양인 1부터 10까지 수를 존재계에 내 보내고 거두어드리는 잠재적 창조력을 가진 숫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인간의 상징 수인 1(음양)은 모든 것의 삶의 창조적 대행력 자체로서 생명활동을 발출시켜야 할 운명을 가진다. 그래서 1은 다시 2를 내고 또 다시 3을 내어 1단계 조화로서의 3이 되고 6이 되어, 7, 8, 9를 내어 완성된 다음, 10으로서 새로운 세게(알)을 열려는 욕망과 힘으로 생성된다. 어쨌든 오늘 날 우리는 1,3, 5, 7, 9를 흔히 길수로 본다. 그러나 그 이유를 물으면, 천지인 삼재론적 천부경의 논리를 무시하고 그 천부경 수리철학을 끝내 미완성한 공자(중국)의 주역식 발상으로 설명한다. 어쨌든 <뭔가 인간이 보태지 않으면 진짜 완성(재탄생) 안 되는, 모자라지만 완성수이므로, 길수(吉數, 행운의 수)라고 본다고 하더라도, 주의하자. 모자라서 수행(요가)이 필요하기에 길수이다. 그래서 뭔가 인간의 노력이 보태어져야 되는 아쉬움이 남는 생산(창조, 생성, 생명의 완성)을 꿈꾸는 상징수(象徵數)이다. 그래서 한민족은, 유달리, 상 3판, 부주/부의금 낼 때 3-5-7로 가고. 행운의 수가 9땡이면 희망을 결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유달리 3-5-7-9를 선호하고 있지만 어쨌든 한민족의 전통적 3재론의 의미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노자는, 다시 말해서, 도생일(道生一), 1생 2(一生二), 2생 3(二生三), 3생 만물(三生萬物)의 과정은 완성될 때까지 계속된다는 자연주의적 논리에 현혹되어, 무위자연설-불로장생류의 형이상학적 사유체계를 완성시키지만, 현실실천을 무시했다는 오해를 받았던 반면, 한국의 삼신사상은 처음부터, 하늘신(天神)과 대지신의 합일로서 인간이 늘 대자연을 완성하는 존재로서 삶의 수양이 없으면, 자기완성은 물론이고 하늘이든 대지든 완성될 수 없다고 사유했다. 그래서 한국의 천부인 사상은, 유일신적 기독교-이슬람교-불교-도교를 포괄하면서 넘어선다. 그래서 혹자는 동서양의 종교개념을 포괄하는 21세기의 중심사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생성의 조화는 전개형태로 보면, 헤겔이나 칼 막스의 변증법적 논리를 연상시키나, 그 철학적 의미는 판이함은 불문가지이다.
이번 월드컵 북의 3박자는, 인간의 생명활동의 상징수로서, 특히 한국 전통의 3태극(三太極, 천부인)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2박자는 천부경을 의미를 대립적 이원론으로 축소한 오늘날 중국의 2태극(二太極)을 상징하여, 어쨌든 절묘한 총 5박자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흔히 한국은 3박자의 문화요 중국은 2박자의 문화라고 말한다. 반면 일본은 1박자 문화이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자, 여기서 연구자의 생각하나를 더하겠다. 연구자의 생각에는, 이것은 복잡한 역사적 현실을 헤쳐 나가면서, 세상만물을 다스림에 있어 무불치(無不治)의 이상(理想)을 꿈꾼 통치지들의 지혜의 폭과 깊이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물론 한민족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더스-흑해와 카스피해 부근 등 유라시아 문명지역 전부를 영향권에 둔 환인/환웅시대, 그리고 북경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전역을 제후국 또는 우호지역으로 두고 통치철학 생산의 종주국이었던 단군조선 이전까지는 모두 3박자였을 것이다.
온갖 종족들로 구성된 연합국 형태로서, 적어도 고조선 제2기 환웅의 배달국 이래, 적어도는 6000년 이상, 번창기에는 유라시아 지중해 지역부터 동북아시아 전역을, 3한(三韓) 5가(五加)체계로 통치한 대제국 고조선이, BC 3세기에서 1세기 경 무너진 이후, 한반도는 그야말로 다국적민이 득실거리는 인종시장과도 같은 시기를 거친다. 즉 3부여-전(前)삼국-4국시대(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삼국시대로 생존경쟁을 하다가, 7세기 경, 외세(당나라)의 힘을 빌려 형제국(고구려, 백제, 부여)을 정벌하고 그들의 문화는 물론 대제국 고조선의 통치이념까지 망각한 통일신라 이후, 고려-이조문화까지, 한국의 박자는 3박자에서 1박자, 2박자, 4박자, 5박자 6박자, 8박자 등으로 혼합된다. 그러나 이조 말의 동학 및 민족종교들에서 보듯, 3박자 문화는 그러한 국가들의 기층을 형성한 민중의 몫으로 계승되어 왔다. 그러한 3박자 문화가 오늘날 가무악극, 건축술, 풍수지리, 태극기, 민속문화 등에 표현되어 있다.
자, 이제 결론을 짓자. 어쨌든 이번 2002 월드컵의 북소리 특징은, 조화를 상징하는 한민족의 3박자 뒤에 역동적 파괴를 상징하는 중국인의 2박자를 배치, 총 5박자를 이룸으로써, 한민족의 전통적 음양 오행원리에 의거하여, <조화-파괴-조화-파괴...>라는 귀신(혼)과 일체가 되는 정적(靜的)인 효과와 귀신(혼)을 움직이게 하는 역동적(力動的) 효과를 창출함으로써, 전통적인 한국의 음률까지도 성공적으로 멋지게 실천한, 한민족 문화사에서의 쾌거였다.
한국의 어쨌든,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3태극이 아닌 것은 유감이다. 박영효 및 고종 일행이 급히 만든, 오늘날 대한민국 태극기는, 사실 중국의 태극상(太極象)을 빼앗은 것이고 차라리 일본은 한국의 태극상을 잘 못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베낀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와 중국지역의 민간태극기는, 대동소이하면서도 좀 다르다. 한국 태극기는 천부인 삼신사상(天符印 三神思想)에 따라 제작되었다. 즉 하늘(天)과 대지(地)가 자신의 씨알들로 우주만물을 탄생시켰지만, 대자연의 한 요소인 인간이 지극정성(사랑, 홍익인간)으로 하늘과 대지를 상통조화 시키지 않는 한, 하늘의 씨도 대지(물)의 씨도 완성될 수가 없다고 보아, 우선 인간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대지의 특성을 상징하는 파란태극이 먼저 위로 올라가 하늘에 감응(공진, 울림)되도록, 시계반대(反歷史) 방향으로 돌게 만들었다면, 중국무술(태극도)에서 보듯이 하늘을 불의 특성으로 땅을 물의 특성으로 보는 중국지역의 태극기는, 불(태양)이 밑으로 내려와야 비로소 대지(물)의 특성이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하여, 시계(歷史)방향으로 돌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한국인의 제사축제는 인간의 지극정성이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고, 중국의 제사축제는 단절된 하늘이 다시 내려오기를 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중국지역의 국가 시조는 언제나 천명을 빙자하여, 혁명을 시도한다. 한국(고조선과 백제와 가야)문화를 이어받은 일본은 1박자 문화여서, 하늘이 자유자재로 인간이 사는 지상에 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인간이 원하는 도처에 신의 거처(신사)를 마련하여, 아기자기하게 장식하며 함께 기린다.
Ⅴ. ‘아리랑’의 연원과 연구실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
Ⅴ-1. 윤도현의 ‘월드컵아리랑’과 유감
그러나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진짜 목적은, 치우의 붉은 가면의 액막이 굿과 대한민국 찬양으로 고조되었던 월드컵을 전후한 일련의 사건들이 드러낸, 한민족의 문화사적 의미만 천착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엉뚱한 질문, 즉 윤도현의 월드컵아리랑의 가사, 즉 <아리랑/아리랑/아라리오/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가, 아리랑 고유의 민족적 의미와 정서를 좀 더 잘 드러내는 방법이 없었는가? 라는 아쉬움과 그것의 이유에 대한 고찰이다.
사실 필자 개인으로서는, 윤도현의 월드컵아리랑에서, 마치 허리 잘린 38선처럼, 뭔가 미흡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일까?
윤도현의 아리랑이, ‘아리아리랑 서(쓰)리서(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아라리가 났네’라는 경쾌한 세마치 장단의 경남 밀양아리랑의 후렴과 달랐기 때문일까? 잦은 중모리장단으로 무한한 흥(멋)부터 슬픔까지 넘나들며 온갖 인간정서를 구성지게 뿜어내는 진도아리랑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와도 품격이 달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긴호흡의 강원도 아리랑 후렴과도 달랐고, 깊고 험한 산간지방의 아픈 정서를 느리고 구성지게 담뿍 담아내는 가락을 가진, 한국의 현존 아리랑 중 가장 많은 가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 등등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던 탓일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분명, 윤도현의 아리랑은, 더구나 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8강-4강으로 상승하는 문맥(context, 상황) 속에서, 한국민족 마음 깊숙이 숨겨진 정서를 촉발시켜 신명감을 유도하는 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분명 대단했다. 그런데 왜, 연구자의 내면에는, 아쉬움이 남았을까? 그런 상승분위기라면, 다른 종류의 아리랑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정도의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의구심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필자가, 윤도현의 월드컵 아리랑에 분명 신명적인 울림을 느끼면서도 아쉬웠던 것은, 그 아리랑이 도대체 한민족에게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부르고 있다는 허망함에서 연유한다. 만일, 2002년 6월, 어떤 아이(알나)가, 또는 어느 외국인이, ‘반만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의 상징이라는 그 ’아리랑‘의 연원은 무엇이고, 그 뜻은 무엇이며, 왜 그토록, 한국민이 열광하느냐’고 물었다면, 과연 납득할 수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한국인은 몇이나 되었을까?
이것이야말로 개그 콘서트(gag concert)의 <허무개그>나 <우격다짐>에 나오면, 딱 좋을 소재가 아닐까?
연구자가, 1989년 약 2개월 간의 프랑스 연수에서 배운 게, 딱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계 영화제’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 지중해의 태양이 빛나는 소도시 깐느(Cannes)의 뒷 골목, 어느 인삼가게에서, 한국의 인삼이 ‘세계에서 유일의 최고’인 줄 알았던 필자는, 정작 한국의 인삼은 프랑스-독일-미국-캐나다-북한 인삼들 중에 하나요, 디자인도 별로요, ‘6년 근, 한국인삼‘이란 딱지를 붙인 소개서조차 부실한데, 놀라자빠진 적이 있다. 과연 그로부터 12년 후인 2002년 말, 세계인삼의 유통시장의 핵심인 홍콩에서, 한국인삼은, 그것도 ’6년근(六年根) 인삼‘ 부분만 4%를 차지하고, 나머지 부분의 한국인삼은, 모두 미국제가 점령함으로써, 지금 한국의 인삼창고들 안에서 푹푹 썩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 실패의 원인이, 세계 유일무이한 불로초라는 이름 값으로 인해, 고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경우 적절한 한자성어를 든다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될 것이다. ’6년근 한국인삼(홍삼)의 효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체질에 따라 인삼이 나쁠 수도 있다‘라는, 한국 한방의학자들의 양심적인 학설‘을, 미국 등 외국 인삼판매업자들이, 역으로 악용한 탓이다. 미국 등은 ’한국의학자들의 임상보고서에 의하면 이라는 단서를 붙여, 한국의 인삼은 6년근 홍삼 외에는 모두 건강에 나쁘다'라고 세계인삼 시장에 홍보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세계 인삼시장에서 한국인삼을 찾는 사람이 없어졌다. 이것이 한국의 제2의 IMF의 징조가 아닐까? 2~3년 전에야 비로소, 한국의 인삼은 유전자구조가, 미국 등의 인삼들보다 더 복합적이며, 그 효과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게다가 지금까지 한국 한의학자들의 속설과는 달리, 한국인삼 4년근 등이 오히려 6년 근보다 더 효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완전히 ’버스 지나간 뒤에 손들기‘다.
또 하나, 연구자가 프랑스 여행에서 배운 것은, 프랑스의 시골 작은 도시 어디를 가보아도, 자신들의 선조들의 유적유물들을, 설사 그것의 역사적 의미가 부정적(否定的)이라 해도, 과거역사란, 현재와 미래의 비판적 창조의 거울이 될 수 있기에, 하나도 파손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생활 공간화 하면서, 가치를 증대․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각 지방에서도, 기념할 만한 역사적인 일이나 사람이면, 작은 골목길에도, 그(것)들의 이름을 붙어놓아, 역사를 살아 숨쉬게 한다.
우리는 어떤가? 예를 들어 신도시의 대명사 압구정동을 살펴보자.
알다시피, 압구정(押鷗停)은 조선 세조부터 성종까지의 악명 높은 칠삭둥이 한명회의 호이며, 그가 지은 정자(亭子)의 이름이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고려-조선시대 중국인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한국에 오는 중국사신들이면 누구나 영광으로 여기던 필수 명승지였고, 오늘날 일본 유학의 조종(祖宗)이라는 이황 이퇴계도 직접 와서, 절벽 곳곳에 둥지를 틀고, 계곡을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 모래사장 위를 노니는 기러기 떼들을 보며, 시조들을 남겼겠는가!
그런데도 오늘 날, 압구정동 어디에서 그러한 흔적을 볼 수 있는가? 칼질한 얼굴과 예쁜 배꼽, 선정적으로 구명을 낸 청바지를 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오히려 과시하는 포스모더니즘적인 혼 빠진 젊은이들이 누비는 로데오 거리뿐, 시상(詩想)을 촉발시키던 기러기도, 깊은 계곡 휘몰아치던 물결과 하얀 모래사장도, 시인묵객들이 시를 짓고 읊던 압구정도 없다.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이 보인다’는 데, 무엇이 보이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뜻 있는 강남구청장이나 정치1번지 압구정 국회의원이면, 압구정 시창작․낭독대회라고 매년 전국적으로 열 수 있고, 압구정 축제라는 이름으로, 고성방가가 아니라, 고수부지 어딘가에, 고증에 따라, 멋진 정자라도 하나 지어, 게다가 최근까지도 배밭이었던 것처럼, 최근까지의 배밭의 명성을 활용하여 배꽃축제라도 열고 최근의 성수교 참사에 대한 시민위령비가 있는 뜻 깊은 시민휴식처로 만들 수 있으련만, 압구정동 직장 18년에, 그 옛날 잠원벌 우거진 뽕밭 한 가운데 비밀 대나무화살(竹弓) 제작소가 있었다는 그 잠원동 전철역 벽위 엉성한 베틀에 걸터앉은 처녀상(像)과 압구정 역 벽 위에 웃기는 압구정 그림 외에는, 한민족의 민족적 정기가 숨겨진 전통 화살과 단종애사의 주인공 압구정 한명회의 자취를 본 적이 없다. 고기도 자살한다는 메탄가스 퀴퀴한 한강, 그 고수 변에 보고 들리는 건, 성수대교 참사로 죽은 젊은 학생들의 고혼의 흐느낌과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잉어들과 주머니 풍족치 않은 미성년 젊은이들의 키스소리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과거 10년 전부터, 뜻 있는 대학의 젊은 대학생․교수들이 제기해 온, ‘한민족 인문학의 위기담론들’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날, 유․초․중․고 12년 공부 나무아미타불도 유분수지, 당구풍월은커녕,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니 그런 것엔 무심한 미래의 한국 젊은 허깨비들, 게다가 열 지어 선 외국유학 대열을 보라. 그들은 외국에 가서, 뭘 배우기는 하겠지만, 정말 본질적으로 배워야 할 것을 모르며, 왜 배우려 유학을 가는지조차 모르며, 한국인이 누구냐고 질문 받으면, 분명히, ‘난 한국 몰라요.’라고 말하거나, 엉뚱한 중국/일본논리를 대변하는 소리나 벅벅 해댈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을까!
Ⅴ-2. 아리랑 연구 어디까지 왔나?
이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으로 넘어가 보자. 이 아리랑론은 연구자가 문헌을 참고하여, 21세기 한국예술시학 창출의 이론적 근거의 하나로 1차 연구한 것이므로 미흡한 점이 있을 것을 전제한다.
어쨌든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아리랑의 연원이나 해석도, 정설이 없으며, 기존의 해석마저 석명(釋明)하지도 않다. 그 이유는 <아리랑>을 해석하는 학문/비학문적 관점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허긴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정설이 없기 때문에, 더욱 역설적으로,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우리 한민족을 무조건적으로 매혹시킨다는 미학적 가설이 성립한다. 하긴 그래서 모자란 연구자도, 기꺼이, 지금까지의 40가지 아리랑 해석들 중, 권위 있는 언어/문학가들의 주장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41번째 아리랑 해석자가 되려는 야무진 꿈을 꿀 수 있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현재 전해 오는 아리랑 민요의 숫자는, 3대 아리랑이라는 정선-진도-밀양 아리랑을 포함하여, 서도아리랑(평안도), 강원도아리랑과 정선아리랑(강원도), 함경도아리랑과 단천아리랑과 어랑타령(함경도), 밀양아리랑(경상도), 진도아리랑(전라도), 긴아리랑(경기도), 독립군아리랑(중국 연변), 사할린아리랑(러시아 사할린) 등등, 총 60여종에 총 가사의 수는 3600여개라고 보고되어 있다. 그러면, 그 60여종의 아리랑에 거의 공통되는 후렴구 <아리랑>이라는 노랫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며, 그것은 과연 언제부터 존재해왔을까? 아무도 잘 모른다가 정답이다. 더구나 ‘아리랑’연구가 본격화 된 것도, 그 역사가 일천하다.
아리랑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민족정신학이 본격적으로 필요하던, 국가까지 빼앗긴 1930년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여, 최근까지 수많은 역사-언어-문학-민속학자들이 연구하고 발표한 결과, 약 40가지 설이 나와 있다. 이것은 마치 고려중기,『삼국사기』,『삼국유사』가 그렇듯이, 우리와 같은 동이족인 거란과 몽고가, 오상고절 중국숭배로 일관하는 동족 고려가 얄미워, 전광석화처럼 쳐들어오자,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게다가 한민족의 혼을 찾는답시고, 오랑캐 거란과 몽고에 대한 차별화 또는 대응논리에서, 그 전까지 거들떠보지도 않던 고조선을, 그것도, 기존해있는 민족혼이 담긴 자료들도 거의 무시하고, 김부식은 중국식 유교입장에서, 일연은 불교적인 입장에서, 과거역사를 난도질하여 재각색하게 된 것과 극히 유사하다.
또한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아리랑의 연원과 의미를, 원가, 도솔가, 혜성가, 처용가 등 신라향가들과 같이 주술적인 노래의 일부로서 사용되던 후렴구라고 보거나, 아니면, 고려가요(고려민속요)의 후렴처럼 감정의 증폭을 의도하는 후렴구들의 하나이거나 그런 것의 파생물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아리랑의 탄생연원 연구사를 보면, 신라 및 고려 처용가에서 ‘(아으)...(아ㅿ날) 엇디ㅎ릿고/청산별곡의 (잡ㅅ와니 내) 엇디ㅎ리잇고‘/ 하여가(何如歌) 같은 시조 종장의 ( ...한들) 어떠리 등등이나, 3장 6구 시가로 시조의 연원이자 현존하는 유일한 국문 백제가요인 정읍사의 3음보 여음구(麗音句)인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이조 초 정도전의 신도가의 ‘아으 다롱디리’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등의 낙구(落句) 또는 격구(隔句)의 ‘아으’(阿也 또는 阿耶)와 같은 기능을 하는 려음(麗音), 즉 정형화된 리듬과 흥취를 돋구는, 또는 무의미한 장식적인 사설(nonsense verse)이라고 보는 입장이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에 의해, 흔히 고려속요들 중, 가장 고려인의 생활관과 창작성이 잘 나타난 청산별곡의 후렴어인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가, 아리랑 민요의 '아리아리랑 아라리오'라는 후렴구와 맥을 같이한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도 있다. 만일 그런 논리라면, 거듭된 외침 속에서 고난을 살던 고려중기 사람들의 절박한 삶이 풍자적으로 솔직하게 표현된, 만화풍의『쌍화점』(雙花店, 총 4절, 매절 8구에 4구의 후렴구 포함, 출전: 악장가사)의 후렴구들, 즉 ‘다로러거디러/더러듕셩 다로(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리/위 위 다로(르)러거디러 다로러‘, 그리고『대악후보』(大樂後譜) 출전『쌍화점』(3연까지만 기재)의 후렴어, 즉 ‘다로러니/더러듕셩 다로러/위위 다로거디러 다롱디다로러‘ 등은, 당시 고려인들이, 지금의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보다, 더 흔히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는, 아리랑 민요의 후렴구만은, 단순히 우리 선조들이 좋아하던 노래의 후렴구이거나 구음(口音), 과시적 반어적 표현, 의미 압축구, 악기소리를 흉내낸 의성어 등등이라는 입장에 찬성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연구자가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보면, 아리랑의 뜻을 대략 짐작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그 뜻이 깊고 그윽하기 때문이다.
Ⅴ-3. ‘아리랑’의 연원-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고등학교 시절 우리들은 민요 아리랑의 문학적 계보를, '가시는 님을 당연히 잡아 둘 일이건만, 님이 서운하면 아니 올까 두려워 보내니 가자마자 돌아오시오'라는 주제의 고려가요『가시리』, 정지상의『송인』(送人), 세계역사상 계약결혼 제1호로서 판소리꾼 이사종과 3년 계약결혼 후 금강산 속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황진이의 시조들의 주조(主調)인, <가슴 찢어질 듯 아프건만 울고 짜지는 않겠다는 애이불비(愛而不悲)의 애틋한 정서를 담은 절조(絶調)들>에 속한다고 배웠다.
물론 현재 전하는 아리랑들의 주류정서를 감안하면 그럴 법한 설명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말한 바대로, 아리랑을, 또 다른 관점들, 즉 순수 우리말의 원리에 대한 몇 가지 연구성과를 응용하여, 그 의미를 달리 드러내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다음 2가지 입장을 취하려고 한다.
하나는, 아리랑의 연원이나 의미를, 고조선, 특히 단군조선 시대 단군할배들이 베푼, 민족 종합교육 또는 유아/아동/청년교육용 노랫말들 중의 하나라고 보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아리랑을 적어도 단군조선시대 이래 존재해 온 우리 순수말로 보고, 천부인의 원리에 근거를 둔 한국의 상고언어(上古言語), 즉 그림문자인 신지문자, 그리고 시원적 한글인 가림토 문자의 관점에서 입장에서 보려고 한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알아 둘 상식 하나는 고조선의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고조선은, 넓은 의미로 보면, 고조선 제1기의 <환인의 환국>, 제2기의 <환웅의 배달국>, 그리고 우리가 역사시대라고 알고 배운 고조선 제3기 <단군의 단군조선>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사용하는 고조선은, 고조선 제2기 <환웅의 배달국> 이후의 제3기 고조선 <위만에게 망한 단군조선(기자조선 포함)>을 말한다.
둘째로 알아 둘 상식은, 세종대왕의 한글 이전에, 그것의 모체가 된 우리조상들은 시원적 한글이 적어도 2가지, 즉 신지문자와 가림토(또는 가림다)가 있었다. 이것의 입증자료는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천왕이 매년 참배하는 신사인 <이세신궁>에, 신대문자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거의 공표되지 않은 채 간직되어 있다한다.
먼저 아리랑의 연원을 구명함에 있어, 전자의 입장, 즉 <민중교육 노랫말의 하나>로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조선에 관한 자료들을 보면, 적어도 신석기 후기 또는 청동기 초기부터 우리 단군할배들은, 오늘날 도교/유교/불교/기독교 등의 원류라 할 수 있는 독특한 종교철학적 원리, 즉 도교(신선사상)의 관점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 고조선이래 우리민족의 전통사상인 천부인(산신, 삼신)철학 위에서 보려고 한다.
문헌상 한민족의 고조선은, 아득한 약 1만 년 전의 신화시대부터, 씨족국가 형태를 거쳐 청동-철기시대의 부족국가 형태로 존재했던,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지면서도 21세기 현재까지도 망하지 않고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세계 유수의 역사서의 아시아 편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으며, 한국에 관한 부분은 단 2~3 쪽도 안 된다고 한다.
아는 바대로, 비파형동검이나 고인돌, 각종 토기들이 증거하는 바대로, 고조선 제3기 단군조선은, 적어도 30여 개 이상의 거수(제후)국 및 소국들로 구성된 대제국이었고, 당시 백성은 약 1억 3천만 이상이었다. 특히 고조선 중, 청동기-철기시대의 복잡다단한 역사시대였던 단군조선의 지도자(단군)들의 백성통치기술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할 정도로 고도로 지혜로웠을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3한(三韓, 진한-마한-변한)-5사(五事)-5가제도(五加制度) 등이 증거하듯이, 3태극으로 상징되는 천부인 사상과 오행사상을 실천하여, 지상 최초로 인간의 이상세계(Utpia)를 구축했던 대제국이었다.
삼부인 3개로 상징되는 그러한 지혜를 환인-환웅-단군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마치 여성원리적인 여신을 추방하고 남성중심적인 제우스 만신전의 신화들을 구축하기 위해 온갖 지혜를 발휘한 고대그리스인들보다 더 현명하게, 단군(Dagan) 만신전을 구축하기 위한 지혜들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물론 BC3000년 이전의 환국과 배달국 시대의 우리조상들도, 유목민족 아리안족이나, 오늘날 기독교의 원류사상을 고안한 사막지대의 헤브류인들처럼, 하늘중심의 수렵생활에서 유일신적인 하늘사상을 배웠을 것이고, BC3000년 경 이후에는 대지지향적인 목축․농경생활로 인한 부의 축적, 새롭게 발명한 청동(철기) 제련법 등 도처에서 제기된 각종의 치열한 문화논쟁들을 통해 고도로 세련된 사유체계를 얻었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의 고고학적 업적을 참고하며 동서상고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다 알 수 있는 상식이다.
이러한 예에는 복희-신농-치우-황제 훤원-요-순-우-탕-문왕-공자-노자 등이 모두 포함되지만, 특히 도교이론을 완성한 장자(莊子)도 그의 도덕체계(道德體系)를 구축하기 위해, 당시의 주곡식(主穀食)인 쌀에 비하면 비천한 구황식물(救荒食物)인 피(稗)의 특성에서, 인간의 바람직한 도덕적 덕목을 유추하고 체계화시켰다. 또 인간의 영원한 진리를 상징하는 불사약(생명수, 황금, 진사)을 얻기 위해, 고도로 발전한 제련기술과 식물의 성장원리에서 암시를 받은 BC 4세기 중국의 추연의 연금술사상 등이 그렇다. 그러나 공자도 장자도 추연도 모두, 고조선 제3기 말 단군조선의 성현들이 이미 다 정립한 사상들을 기초로, 단지 몇 가지 중국의 시대적 요구사항을, 철학적으로 덧붙였을 뿐,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문화 혼합적인 주(周)나라를 모형으로 하되 귀신을 섬기던 은나라를 고향으로 생각한 공자의 동이족의 현인들에 대한 외경심을 보라! 이것이 바로, 진시황이 불사약을 얻기 위해 3천 동남동녀를 파견하고, 삼국지의 주인공 조조가 이상의 나라 동방의 신선국을 구경하러, 요동지방의 갈석산까지 직접 여행한 직접적인 이유이다. 오늘날 한국의 인삼이 유명한 것 역시 중국 황제들이 이러한 도교(신선교) 또는 연금술적 사상을 신뢰했기에 가능했던 명성이다.
Ⅴ-4. 고조선 구비문학 유산으로 아리랑의 문헌적 근거
연구자는 아리랑 노래를, 메소포타미아(수메르) 지역의 길가메쉬 서사시나 인도의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등이 그런 것처럼, 신석기 시대 목축단계에서 농경단계로 전환․정착되는 시기 치열한 문화논쟁 한 복판에서, 통치전략상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인간덕목을 계발․보급한 단군할배들의 지혜로운 통치전술사적 유산들 중 하나로 본다. 그러니까 연구자의 아리랑이란 노래의 의미와 연원에 대한 입장은, 우리 고유의 천부인 사상의 인간관이 그렇듯이, 마치 식물의 알곡이 자신의 집을 만들어 주변환경의 영양요소들을 흡수하여 여물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씨앗이 되듯이, 고조선이란 대제국(大帝國)을 다스린 단군할배들은, 당시 황제로서 요구되는 지도자의 덕목 중 하나인, 훌륭한 백성을 양성․보존․재생산하기 위해 아리랑 같은 구전노래를 의도적으로 창안하고 보급한 실제사실, 즉 백성들에게 국가 구성원으로서 반드시 체득해야할 통치의 도(道)와 필수적인 덕(德)을 개발․수양․체득하도록 하되, 그것도 문자를 모르는 국민통치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그 통치덕목들을 노래형태로 구전․보급시키면서도, 단계적(태중아기/유아/청소년/청년 등)으로 습속․풍속화(習俗․風俗化)시킨 흔적으로 보겠다는 말이다. 물론 이렇게 아리랑의 노랫말을, 전략적으로 치밀하게 계발되고 정제된 교육수단들 중 하나로서 계발․실천된 방대한 고조선시대의 국민훈육용 가요체계의 한 유산으로 보겠다는 필자의 주장에 의문을 버리지 않을 독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현재로서는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만일 연구자에게, 그러한 주장을 입증할 명백한 예 하나를 우선 들어 보라는 요청이 있다면,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그 내용이 고조선 시대의 종교철학적 이념이 담겼다고 보이는, 지금도 구전되고 있는 유아훈교용(基礎訓敎用) 노래들인 단동치기(檀童治基) 십계훈(十戒訓)를 들겠다. 이것은, 내용의 고매함과 아울러, 곡물이 자라듯이, 자연스런 인간성장단계에 부합된 교육적 효과를 체계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보아도 경이롭기만 하다. 다음은, 지금도 경기도 구리시 인험동에 보존회가 소장․보급하고 있는, 단동치기(檀童治基) 십계훈(十戒訓)을 연구자가 요약하고 보완․해석한 것이다.
이것을 놀이(연극)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상징적의 자기 수양적 몸짓들이며, 동시에 인도연극의 무드라(Mudra)적 기능을 한다고 모여, 아리랑 서사연극론이 있다면, 하나의 중요한 모형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단, 여기서 노랫말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국제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상업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BC12세기에서 10세기 경(중국은 은말에서 주나라 초)을 전후하여, 보다 대중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보다 쉬운 대중적 전달이 필요한 시점에 효과적인 놀이(가무악극) 형태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한문을 쓰는 지역에 보급하기 위해, 번역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한문의 소리요소를 강조하고, 때로는 한문의 의미요소를 강조한 흔적으로 보인다. 이 당시까지는 적어도 동북아시아의 문화주도권은 고조선에 있을 것이므로, 이 노래들의 한글 말은 어디까지나 고조선 시기의 가림다체게에 입각한 우리 순수말임이 분명하다. 이 노래가 중국지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것은 BC4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중국 한족 중심사관에 오염된 결과일 뿐이다.
제1훈: 어머니(언니)가 아기를 안고 일심동체로 좌우로 흔들며 부르던 노랫말인 ‘불아불아’(弗亞弗我)이다. 이 말의 뜻은, 너는 대지(우주) 위를 이곳저곳 다니며, 모든 세상만물에 빛을 주는 새로 떠오른 불덩이(태양)이니, 그러한 태양처럼 살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제2훈;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토닥토닥하며 부르는 노랫말인 ‘시상시상 달궁’(侍上侍上達宮)이다. 이 말의 뜻은, 생명을 유지․성취․확장하려면 위(하늘, 생명의 원천, 어머니의 유방 쪽)을 보듬고 항상 섬겨야 도달된다.
제3/6훈: 아기를 마주보고 앉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손바닥을 펴서 손벽을 치게 하며 부르는 노랫말인 ‘도리도리 작작궁, 또는 도리도리 작구궁’(道理道理 作綽窮 또는 作九宮)이다. 여기서 도리도리는, 좌우를 잘 살펴야 사물의 도리(格物治之?)를 알게 되고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참사람(弘益人間)이 되는 조건이라는 뜻이고, 특히 작작궁(짝짜꿍)이란 말은, 무릇 일의 성립(治國平天下)은, 손을 펼친 다음 그 펼쳐진 두 손바닥이 서로 다가가 만나 이루어지는 손벽처럼, 하나에 하나가 적절히 잘 만났을 때에야 이루어지며, 단계적으로 만나야 최고의 궁극(목표)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작작궁은, 곤지곤지 노래와 마찬가지로, 눈과 손의 협응(協應)으로 인체의 내장기관의 축도라는 손바닥을 치는 것인데, 이 작작궁은 신체의 건강상으로 보아도, 마치 태견(수박)처럼, 기관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질병을 예방하는 일종의 요가의학적 운동이기도 하다.
제4훈: 아기를 마주보고 두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게 하며 부르는 노랫말인 ‘잼잼(잠잠)’ 또는 ‘지엄’(指奄)이다. 이 말의 뜻은, 만물의 근원(오행)의 원리를 힘있게 쥐는 법은 물론 그 힘(energy)을 펴는 운용법 또는 활용법을 동시에 알아야, 삼태극의 원리, 즉 육체(배알, 腸, 氣, 대지)과 마음(心, 알, 理, 天理)이 함께 어울려 원융무애(조화)의 생명을 이룬다. 알(정신, 혼, 생명)이 알(육체, 물질)로 나게 해야 비로소 ‘알이 알답게 생성된다’, 즉 ‘알알이(아라리)가 (영원히) 난다’라는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를 말하고 있다.
제5훈: 오른 손의 식지를 펴고, 펼쳐 진 왼 손의 가운데를 대었다 떼었다 하며 부르는 노랫말, ‘곤지곤지’(昆持昆持)이다. 이것의 의미는, 만물의 생성(성교육 포함)의 원리와 조화로운 운행은, 시작부터 완전한 완성을 이룸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인 가운데(中)을 놓치지 말고 실천하라는 뜻이다. 이 항목은 특히, 최치원이 번역한 81자 천부경 해설서를 본 분이면 확실히 알 수 있듯이, 천부경 철학원리의 처음과 끝을 꿰뚫고 있는 요체여서 중요시된다.
제6훈: 아기를 재우려고 업고 볼기(엉덩이)를 두드리며 부르는 ‘질나비(疾那陫) 훨훨’, 이 말 은, 어떤 아픔(질병)은 물론 부정한 것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야, 마음놓고 자고 살 수 있다라는 요가수행 과정에서 실천해야할 기본수칙의 하나이다.
제7훈: 짝짜쿵인데 이것은 제4훈과 함께 이미 말했다.
제8훈: 아기를 서보게 하면서 부르는 ‘섬마섬마 용타’(贍摩贍摩 庸沱)이다. 이 말은 스스로 도와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연마하여 사막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무서울 게 없는 뜻뜻한 낙타(駱駝0 같은 사람(인간)이 되라는 뜻이다.
제9훈: 아기를 뉘어 안고서 춤추듯 위아래로 올리고 내리며 부르는 노랫말인 ‘어화(噓和, 허화) 둥둥’이다. 이 말의 뜻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유연하게 대처할 담(용기, 사랑)을 키워 화목하게 서로를 올리며 살아야 행복이 온다>는 뜻을 가진다.
제10훈: 아기의 가슴을 토닥이며 부르는 노랫말인 ‘자장자장’(自獎自獎)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두려워(염려)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잠을) 권장해 보라는 뜻이지만, 확대하면, <두려워 주위 눈치 보지말고 자신과의 대화로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심신을 단련시키도록 노력해보라는 끊임없는 자기 수양적인 삶을 권장하라는 뜻을 가진다.
실제로 우리가 어린 시절, 부담 없이 들으며 자랐고 또 무의식적으로 후손에게 구전하는 이러한 노랫말과 의미와 몸짓들을 통해, 육체와 정신의 합일적 수양만이 행복의 조건이며, 천지만물 속에서 인간의 생명활동을 이해시키는 선조들의 탁월한 지혜는 놀랍기만 하다. 즉 한 인간(아이, 알, 아리)의 성장단계에 따른 적절한 신체와 정신의 조화로운 고도의 과학적인 훈련을 하나의 쉽고 즐거운 놀이문화(풍속)로 승화시켜, 자연스럽게 어휘력을 기르면서 박자-음률-리듬감각 등을 종합적으로 향상시키는 일련의 수행절차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만일 우리가, 연구자의 주장대로, 그 취지와 철학이 위의 노래와 너무나 같은 아리랑서사시 역시 이러한 취지의 노랫말들 중의 하나로 본다면, 지금까지 학자들이 주장한 바대로, 아리랑의 의미가 무의미한 시어(Nonsense verse)이거나 노래의 후렴구 또는 장식음이라는 설들이, 터무니없는 가설이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연구자가, ‘아리랑 아리랑’이, 깊은 종교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또한 고도로 정제된 인간수양 및 실천적 절차의 하나로 고안된 한민족 서사문학의 유산의 하나로 보는 이유이다. 그럼 아리랑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Ⅴ-5. 한민족 구비문학으로서의 ‘아리랑’의 진정한 의미찾기
자. 그럼, 아리랑의 의미를 드러내려면 어떤 이론적인 근거 위에서 분석해야 할까?
사실 이 주장을 펴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대전제가 필요하다.
우선 고(古)한글이 있었다고 기록한,『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을 믿어야 한다. 이 책은 넓은 의미의 고조선, 즉 환인의 환인국-환웅의 배달국-단군의 단군조선의 전역사와 언어와 풍속, 외교 및 정치사 등이 적힌 귀중한 자료이다. 그럼 『환단고기』라는 책이 어떤 것인가를, 지면관계상, 간단히 말해 보겠다.
이『환단고기』는, 근세조선조 말 계연수(桂延壽)가, 기존에 전해 오던 4권의 사서(史書)들, 즉 ① 신라승려 안함로의 삼성기전/원동주가 쓴 동명의 삼성기전을 각각 상하권으로 엮은 후, 그것에 ②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 쓴 단군세기, ③고려말 학자 범장이 쓴 북부여기, ④ 연산 및 중종 때 학자 이맥이 쓴 태백일사를 합쳐 한 권으로 역은 필사본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배달국 시대 신지라는 선인(仙人)이 해설한 원본『천부경』은, 신지가 만든 신지(녹두)문자로 기록했고, 이를 발전시킨 것이 단군조선 가륵단군 시기에 을보륵이 가림다 문자로 만든 역사책이다. 이 단군역사를 기록한 문자인 가림다조차 은나라의 갑골문자보다 1500년 앞서는 문자이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의 한글에 대한 일반상식을 넘어서는 몇 가지 원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순수어는 순수한 표음문자가 아니라, 한문처럼 상형과 회의라는 요소도 포함한 <표의문자이면서 표음문자>라는 말이다.
기록을 보자. 고조선 제3대 가륵단군 재위 46년(경자 2년, 단기 BC2181년, 중국의 하나라 시대), 형상으로 뜻을 표하는 참글(象形表意之眞書, 신지(녹두)문자)이 있었으나, 지방마다 풍속이 서로 같지 않고 말이 달라, 열 집도 안 되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고, 백리 정도의 나라에도 글자가 서로 이해가 안되어, 천제가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새롭게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고, 그것을 가림토(加臨土)라고 했다고 한다.
삼랑(三郞)이란 직책은 천지인 삼신을 모신 신궁의 신관(제사장)인 삼시랑(三侍郞)을 말하는데, 천지인 삼신은 하늘을 대표하는 인간인 천신환웅(天神 桓雄), 땅을 대표하는 인간인 지신웅녀(地神 熊女), 사람을 대표하는 인간신 단군(人間神 檀君)을 말한다. 제사장 삼시랑은 항상 천부경의 상징물인 천부인을 모시며 천부경을 강의하는 직책이기에, 그가 말과 글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천부인 3재(三才, 천/지/인의 특성)을 근간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가림토문자 이전까지 있었던 참글이 신지문자라면, 그것 역시 천부경 3재를 근거로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글자와 말로 무엇을 만들었겠는가? 당연히 천부인 3재를 근간으로 새로운 글자 가림토로, 당시 고조선 백성들에게 보급하기 위한 천부인 원리 해설서, 즉 신지의 천부경(天符經)을 가림토로 필사했을 것이다.
단, BC 10세기 또는 BC3세기 경, 오늘날 중국지역과 고조선지역의 정치․경제 및 문화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청동기시대 후기 또는 철기시대 초기에, 한문을 적당히 빌려 의사소통을 위해 편이상 만들어진 과도적 언어, 즉 이조 초까지 실제로 전승된 이두(향찰) 등등은 논외로 친다면, 결국 우리민족이 창조한 고유언어는 역사적으로 크게 3가지, 즉 신지-가림토-한글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천부경은, 신라 말 당나라 유학생으로, 황소의 난을 성토한 글로, 일시에 반란군을 약화시켰다는 최치원이, 이 가림토로 된 천부경을 발견하여, 그 난해한 천부경을 81자 한문으로 쉽게 뜻풀이를 하여 오늘 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해석마저 오늘날 우리는 옛한글을 몰라, 해석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얼마나 우스운가? 게다가 대학을 위시한 관학자들은 그것을 가짜라고 매도한지 오래됐다. 그들은 수많은 제자들의 눈들이 두려워, 죽기 전에야 양심선언을, 그것도 신문이나 글 한 모퉁이에, 하고는 속죄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영원히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AD 1443년 세종대왕의 명으로 정인지가 작성했다는 훈민정음 해례본 발표 3년 후에야, 귀양중인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면담하기 위해, 요동 땅으로 성삼문은 8번, 신숙주는 13번이나 출장을 보내어, 우리 직계선조의 문자들을 연구하게 한 후에야, 한문식 표준발음원칙이 적힌 홍무정운을 발간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바대로, 훈민정음이 중국의 홍무정운이나 음양오행설에 전적으로 의거하여 작성되었다는 주장이 신빙성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한글(언문)을 반대하는 최만리 등이, <당연히 외교 도리상 섬겨야 할 진서(한자, 중국어)가 있는데, 오랑케 말(고조선어) 등을 따르려는 세종임금에 처사가, 더구나 사대 외교면에서도, 지극히 옳지 않다>고 항의하자, 노발대발하면서, <너희가 음운을 (나만큼) 아느냐고 꾸짖으며, 군주의 깊은 속뜻도 모른다>고 면박한 후, 그들 모두를 하루동안 감옥에 쳐 넣고, 그 중의 한 명은 곤장을 쳐 귀양까지 보냈다.
세종의 진노와 성삼문-신숙주등이 자료수집차 요동에 파견 된 것을 보면, 세종대왕은 분명,『환단고기』및『단군고기』등의 국내자료는 물론, 과거 고조선 영역에 남아 있는 언어자료들, 즉 가림토 문자 및 중국 주변국가 언어(만주, 몽고 등)자료들을 널리 수집하고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참고자료들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거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28자로 된 훈민정음(언문, 암클)을 만들 때, 주된 참고 자료 중 하나로 사용했던 우리 토착문자, 즉 가림토 문자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의 한문을 만든 창힐조차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선진적인 고조선으로 유학을 하여 참고했다는, 38자로 된 시원적(始原的) 한글, 즉 가림토(加臨土) 또는 가림다(加臨多)를, 논란은 있지만, 같은 원리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전(以前)의 문자인 신지(녹도)문자도 염두에 두면서 분석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한글의 원형으로서, 적어도 2개의 시원적 한글들-신지(녹두)문자와 가림토(가림다)가 있었음을 알았다.
요약하면, 세종대왕께서도 분명히, ‘훈민정음은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옛 선조들의 글자(古篆, 고전이란 말은 자기조상의 옛글을 의미)를 본받았다’고 했다. 최만리 등이 대왕의 이 말을 물고늘어지며 ‘본 받을 문자(文字, 중국어)가 이미 있는데, 왜 대왕은 미개하고 천한 나라(고조선 포함)의 언어를 본받으려고 하느냐’고 비판하자, 세종은 노발대발하면서 ‘너희들이 정운을 (나만큼) 아느냐’고 벌컥 화를 내며, 모두 감옥에 쳐 넣고 만다. 이로 보건대,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며, 적어도 우리 선조가 만든 언어, 즉 가림토 문자와 관련된 상고언어자료들을 모방(字方古篆)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국내외 학자들에 제기되어온, 한글의 순수창제설과 원류논쟁들, 즉 한글을 세종대왕이 독창적으로 만들었다든가, 한글의 어원이 몽고어-중국의 한자, 아니면 일본의 신대문자, 아니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중에서도 브라미(드라바다, 타밀)문자라는 설 등등은 설득력이 없다. 단지 세종의 한글정비작업의 성과가 있다면, 당시의 혼란한 발음을 표준화시키고 중국인과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중국인의 현지발음법을 도입한 것, 가림토 38자 정음을 28자로 축소시켰다는 점, 한글의 자모음을 중국식 오행사상(五行思想)에 연관시키고, 이 세상의 모든 소리, 즉 개, 돼지 소리까지도, 기록할 수 있도록 발음기관을 관찰․연구하면서 필요하면 부수적인 철자법(부서, 병서 등)을 추가했다는 점, 가림토와는 다른 방식으로 천지인 3재(三才, 천부인)사상을 모음에도 원용한 점 등등이다.
단, BC 10세기 또는 BC3세기 경, 오늘날 중국지역과 고조선지역의 정치․경제 및 문화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청동기시대 후기 또는 철기시대 초기에, 한문을 적당히 빌려 의사소통을 위해 편이상 만들어진 과도적 언어, 즉 이조 초까지 실제로 전승된 이두(향찰) 등등은 논외로 친다면, 결국 우리민족이 창조한 고유언어는 역사적으로 크게 3가지, 즉 신지-가림토-한글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선 아리랑을 순수우리말로 보고, 그것의 의미가 한국의 상고언어(上古言語)들인 신지(녹두)문자나 가림토 문자의 제자(制字)원리에 의거해야만 풀리며, 가림토는 모음이 아니라 자음의 상형적 의미가 중심이며, 순수 우리말을 알려면 서울표준어보다는 지방 사투리, 특히 경상도-전라도 사투리, 고상한 말보다는 속어와 비어, 현재 한국어보다는 일본어, 일본의 원주민어, 인디안족의 말들, 중국-러시아 지역의 한국동포들이 간직하고 있는 언어들, 중구 고대한자어의 발음 등에 더 많이 남아 있다.
Ⅴ-6. 옛한글의 생성과 원리와 법칙
그러니까 아리랑은,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 언문)을 반포하기 이전, 즉 넓게는 고조선 제1기 환인의 환(인)국 이후, 좁게는 BC2333~295 또는 AD4세기까지의 고조선 제3기 단군조선 시기에, 우리 힌민족의 언어교육과 민족 정체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민중으로 하여금 노래형태로 부르고 전수하게 했던 가요형 구전경전(經典이며, 그 의미는 그것을 기록해 온 옛한글들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토착어인 녹두문자-가림토(후기 고조선시기부터 고조선이 멸망한 BC2~3세기 이후 일본황실 및 신라 최치원까지 전수)-이두(중국의 주(周)초부터 한(漢)시대 사이에 한문 수입한 후 훈민정음 창제 무렵까지 사용)와도 아무런 마찰/수정 없이 전승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다음 전제가 필요하다. 여기서 하나 미리 밝혀 둘 것이 있다. 연구자의 이러한 옛한글과 우리 말에 대한 생각은, 무수한 국내학자들의 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사실이나, 특히 재야언어학자 구길수-구자은 모녀학자들이 쓴『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이란 책에서 옛한글 체계의 이론적 구명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암시 받았음을 밝힌다.
전제 1> 아리랑은 고조선의 건국이념과 문자의 제자원리(制字原理, 구조)를 국민에게 알리려는 의도적인 구전가요의 일부이다. 다만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구려(예맥)-부여-고구려-3한(고대신라, 고대백제 포함)-발해-고려 이후, 그 의미는 서서히 소실되고, 오히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일상경험과 감정이 주도적으로 부착되었다.
전제 2) 한글 이전의 토착어인 녹두문자-가림토 문자(신지문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는 천지인(天地人, ㅇ/ㅁ/ㅅ 또는 ㅿ)이라는 3부인(三符印) 원리에 의거한 표의문자(表意文字)이면서, 동시에 표음문자(表音文字)이다.
전제 3> 그래서 순수 우리말 뜻을 알려면, 가림토 문자에 의거하여, 그것도 모음이 아니라 자음의 상형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물론 연구자가 보는 아리랑은, 옛한글들, 즉 신지(녹도)문자 및 가림토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된 노랫말이라고 본다. 따라서 아리랑의 본 뜻을 알려면, 대자연(천지인) 원리에 기초한 신지녹두문자 및 가림토의 생성원리를 알아야 가능하다. 혹자는 이 2개의 문자를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일단 가림토(加臨土)의 생성원리와 주요특징을 정리해 보자. 다음은 구길수-구자은의 책에서 영감을 받아 지금까지 연구자가 공부하면서 생각한, 신지녹두문자의 발전형태인 가림토의 원리이다. 따라서 일단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원칙1) 가림토 제자체계는 천지인(天地人), 즉 삼부인(三符印) 원리에 기초를 둔다. 훈민정음은 삼부인 원리보다는 음양오행론에 기초를 둔 중국의 홍무정운의 제자해에 억지로 맞춘 흔적이 돋보인다.
원칙2) 가림토는 훈민정음과는 달리, 자음 중심이되, 가림토가 철학적으로 수용한 천지인 원리에 따라 초성자음 중심이어서, 의미상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처럼, 모음의 변화와는 별 상관이 없어, 종횡으로 사용된 모음< l >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태양(해)이 뜨는 터(땅)>라는 의미를 천/지/인 3재(三才)원리에 근거한 가림토로 번역하면, 명사(체언)중심으로 태양은 <ㅇ>, 솟구치는 것은 인간의 소망에 의해 새롭게 이루어지니 <ㅅ>, 터는 대지의 특성이니 <ㄷ, ㅌ>이 되므로, 초성은 <ㅇ*ㅅ*ㄷ 또는 ㅌ>으로 써서 주요의미를 나타내고, <ㅇ*ㅅ*ㄷ>가 주요의미부가 되면서 <이시디 또는 아사다 또는 아사더 또는 아사달>로 썼다면, 달의 종성 <ㄹ>은 유연한 모양이므로 주요의미를 보조․보완작용으로 쓰였다고 본다. 단, *자리에는 모음< l >를 아무 때나 쓰되, 서서히 혼란을 막기 위해 <ㅡ>, 그리고 ㅇ을 오늘날 영어처럼 ㅓ와 ㅏ의 중간음으로 읽으며, 모음으로도 사용하되 혼란을 막기 위해 <․>형식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적은 어휘군으로는 의사소통이 어렵게 되면서, 사슴발자국 모양(鹿圖)을 본떠, 필요에 따라 방위(오행)개념을 도입하여 <ㆎ>처럼 <ㆍ>를 <ㅣㅡ>의 상하좌우에 덧붙여 보조․보완개념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참고로 모음이 급격히 발달한 것은 그리스어에서도 BC10세기 경에 나타난다.
원칙3) 가림토는 자음을 중시하되, 특히 천(天)의 특성을 상형하는 ㅇ계열 자음들(ㆆ, ㅎ 등), 지(地)의 특성을 나타내는 상형하는 ㅁ계열 자음의 구성요소이자 변형자음들(ㄱ, ㄴ, ㄷ, ㅌ, ㄹ 등)이, 그리고 인(人)의 긍정적 부정적 특성을 상형하는 ㅅ계열 자음들(ㅈ, ㅊ 등)이 의미 형성상 핵을 이루되 어느 한 계열로 의미가 모자랄 때는 다른 계열의 자음들을 원용하여 복합적으로 사용한다.(예: ㅎ곡용, ㄱ곡용 등), 예를 들면, 산다와 죽다(듁다)의 초성 <ㅅ과 ㅈ>은 인(人)이 천지의 씨알(생명)을 생산․보존․확장․실천하는 일체의 활동에서 긍정적 부정적 상형으로 본다. 즉 ㅅ과 연결 된 말은 예외 없이 무엇을 꺼내 세우는 현실긍정적 미래지향적 생명활동을 나타낸다. 죽다와 듁다는 ㅈ이 먼저인지 ㄷ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ㅈ으로 본다면 ㅈ은 긍정적 생명활동 ㅅ 위에 뚜껑(이불)을 덮었으므로 생명활동의 부정/보류/반작용으로 본다는 말이 되고, ㄷ으로 본다면 ㄷ은 생명활동의 중심으로부터 가장자리거나 뒤(고향, 과거, 북쪽)와 대지(터, 땅)의 부정적 특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옛 한글에서는 죽다의 죽을 <ㅼ+ㄱ>으로 썼을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되면 죽다의 의미는 결국 ‘세우되 대지의 특성의 중심이 아니라 멀어지는 가장자리의 생명활동’을 의미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학상 중요한 2가지 사항, 즉 지금도 약간 남아있는 곡용어들/이중-3중자음이 왜 생겼고 말이 복잡해 졌는지 이유를 해명할 수 있게 되며, 그 이후 세종대왕은, 대략 훈몽자회가 나온 중세시기까지 그러한 언어조어법으로 인한 언어혼란을 정비한 셈이 된다. 따라서 세종의 천재성은 이러한 언어를 정리를 시도했다는 점에 있으나. 그러나 지나치게 중국지역의 사람들의 발음을 본으로 삼고, 또한 음양오행론에 견강부회적으로 뜯어 맞추려고 한 나머지, 우리 순수말을 오히려 사라지게 했다.
원칙4) 따라서 가림토는, 한자처럼 상형문자적 특성과 동시에, 영어처럼 표음문자적 특성을 동시에 가진, 즉 글자와 발음, 수리철학적 의미가 동시에 가미되어 만들어진, 세계언어사에서 전후후무한 언어체계를 가진다. 단 ㅇ은 자음(ㅇ,ㆆ)과 ㅓ와 ㅏ의 중간음인 모음(․) 양쪽으로 쓰이다가, 지금처럼 모음은 ㅓ와 ㅏ 등으로 흡수되고 자음만 남는다.
분명 생각해 보지 않은 독자들은, 분명,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질문하리라. 그래서 이해를 위해 우선,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몇 가지 우리 순수말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보자. 그러나 알다시피 고조선시대의 순수 우리말을 찾기란 적어도 그간 2400년 간의 음운의 변화사를 고려하면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도 고어 전문학자들의 업적을 참고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보여 진다.
첫째 질문: 우리는 영어/불어의 “live/vivre'를 <산다=생명을 이어가다>(중세어: 니다)라고 하는데, ‘die/mourir"는 ’죽다(중세어: 듁다)‘, 'love/aimer'는 ’사랑하다(중세어: 괴다)‘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왜 산다를 죽는다로 사랑을 자랑이라고 쓰면 안되었을까? 알다시피 어원상 영어와 불어는 옛한글의 영향을 받은, 고대 인더스 드라비다국의 언어와 또 다른 한민족의 일파인 유목민 아리안족의 고어가 합해진 산스크리트어가 발전한 굴절어(inflectional language)이다. 옛한글의 영향을 직접 받은 수메르 설형(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페니키아-크레타-뮈케네 문자-그리스문자 등으로 변하고 드디어 라틴어로 정착되는데 약3500년, 라틴어에서 불어가 만들어지는데 1000년, 고대불어에서 영어가 만들어지는데 100년이상 걸려 오늘날 영어의 최소한 70%는 불어와 거의 같다. 더구나 한국어와 히브리어는 숫자에 철학적 의미를 부착시켜 그림(표의)문자이면서 표음문자로 남아 있다. 고대 아시아어들, 즉 총칭하여 옛한글은 오늘날의 고립어인 한자, 교착어로서 어미와 조사가 발달한 훈민정음(한글)과 인도유럽어 계통의 라틴어와 게르만어 등의 선조어이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우리 조상들은 천지인 철학원리에 따라 옛한글체계를 만들고 단어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산다/죽는다/사랑하다=괴다라는 말은 이미 그 속에 그 각각의 본질적 의미가 갖는 형상에 따라 필연적으로 글자를 동시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식으로 말하면, 우리 옛말은 본질이 존재에 앞서므로 언어의 특성 중 하나인 자의성이라는 것이 시원단계에서는 성립되지 않았다. 그래서 옛한글에서는, 지금의 서구현대어어 학자(소쉬르 등)들이 주장한, 언어의 특성 중 하나로서 자의성(恣意性)이 조사(전치사, 후치사 포함)나 어미 또는 모음의 영역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글자와 말과 의미가 동시에 만들어진 언어라는 뜻은, 우리 옛한글이 지금 우리가 배우듯이 교착어적인 요소보다는 한문처럼 고립어적 요소가 우선되어, 한문보다 먼저 생성되었다고 보는 근거가 되어, 소위 위서라는『환단고기』등의 옛 책들이 사실은 위서(僞書)가 아니라 진서(眞書)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말을 보라. 발음이 우리와 비슷한 것이 너무 많다. 세종대왕은 이 사실에 주목하고 언어를 정비했다. 요컨대 적어도 BC3000년 경을 전후한, 상고시대에는 적어도 유라시아 도시지역은 언어(말)가 거의 통일되어 있었고, 그것을 주도한 나라가 바로 대제국 고조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중국인들은, 한국말소리가, 중국지역이 당(唐)나라일 때 쓰던 옛말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하면서 재미있어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답형식으로 옛한글에 대한 연구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 단, 어순이나 형용사, 명사, 동사, 전치 또는 후치사, 접두사 개념 등 세부용법은 연구가 모자라 제외한다.
질문1: 그럼 우리 말은 어떤 필연적인 종교철학적 원리에 의거하여, 산다/죽다/사랑하다라는 말들이 만들어지고 동시에 의미는 물론 글자도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럼 왜 고등학교 중세고어 시간에는 산다를 쥭다로 쓰고 구개음화 등등의 문법이 적용되는가? 산다에서 ㅅ은 인간의 특징적 형상인 산모양의 여린 △, 죽다의 ㅈ은 ㄷ으로 변하지만, 그것은 ㅅ과 △, ㅈ과 ㄷ은 언어학적 발달과정에서 서로 교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옛 한글의 글자 구성원리란 어떤 것인가? 이미 언급했지만, 우선 정답부터 말하면, 우리 순수어는 천지인(天地人)이라는 3원리의 철학적 의미의 상형인 <ㅇ/ㅁ/ㅅ>으로 상정하고, 그 자음의 조합시에도 철학적인 의미범주를 확대하여 부여하면서 말과 글자를 동시에 만들었다. 그러니까 살다/죽다/사랑하다라는 순수 우리말은, 모음보다는 동사어간 중 초성/종성의 자음 ㅅ/ㄹ/ㅈ/ㄱ/ㅅ/ㄹ/ㅇ/ㅎ 등에 의미범주를 의도적이고 과학적으로 부여하여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아니 그렇다면, ‘아리랑’이나 ‘서리랑’ 그리고 ‘쓰리랑’ 등의 원래 의미를 알려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의 제자원리(制字原理)가 아니라, 위 첫 번째 질문에서 말한 바대로, 오히려 단군시대의 순수 우리 고대 한글인 가림토(가림다)를, 가능하면 그 이전의 한글인 신지녹두(신대)문자)의 제자원리와 비교하며, 알아내야 풀린디는 말인가? 그렇다. 그럼 아리랑이란 말을 알려면, 그 말을 구성하는 모음보다는, 자음 ㅇ/ㅅ/ㄹ을, 고조선 시대의 음운체계에 따른 의미범주로 유추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 의미차이 또는 원리가 어떤 것인가? 앞의 가림토 특성을 설명하며 말했다.
질문2: 오늘날 우리가 일본어라고 배우고 있는 아다라시(앋+알+아시, 새것, 즉 성적으로 동정을 지키고 있는 남녀)/아시바(앗+입+아, 집을 세우거나 조명설치 등을 할 때 기초 받침대 또는 보조구실을 하는 구조물) 등의 말들은 사실 우리 순수 우리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버렸으나 일본인은 지금도 그대로 그 뜻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어느 외국학자들은 일본말은 고구려어를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본인은 아침 해(朝日)을 아사+히라고 하는데, 아사(=아침)은 우리 환웅이 내려왔다는 ‘신전 터’의 이름인 아사달의 ‘아사’와 같다는 것은 상식인데, 그래서 우리는 아사달이 ‘아침의 해가 뜨는 신선한 땅’이라는 뜻풀이를 하면서, 그 아사(朝)에 이두식 표현인 선(鮮, 신선함)까지 가미하여 조선(朝鮮)이 나왔다는 것을 다 안다. 사실 역사적으로 동북아시아 역시 상업적 교류의 확장과 도시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북경지역이 문화중심이 된 주나라시기부터 우리말은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하여 고조선이 멸망한 시기, 즉 대략 중국의 한(漢)나라 시기이후, 한문을 문자(文字, 진짜 글)이라고 숭상하면서, 더구나 신라 말-고려시대 사대주의적 발상으로 단군을 버리고 기자조선을 숭배하는 사이에 우리말을 본격적으로 버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안다. 특히 BC30~3세기 경, 상업과 공업의 발달로 도시문화가 발달하면서, 상대적이지만, 인간의 인간에 의한 소외로 인한 신경증을 유발하는 여유와 권력쟁취를 욕망하는 계층이 심화되면서, 고대 서남아시아 지역은 물론 동북아시아의 제민족 역시, 질병치료적 통치방식의 하나로 인간구제론적 지혜를 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수 천년 간 축적된 BC10세기 이전의 상고문화연구가 또 다시 촉발되었고, 그 결과물이 인도에서는 자이나와 석가와 시바제의주의자들, 그리스에서는 피타고라스-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신비제의-오르페우스-디오니소스 제의주의자들의 부활,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와 묵자와 같은 요가수행적 인물들이 배출되어 나왔다는 것을! 그런데도 우리 한민족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적 결과물만 중요시한 나머지 석가와 공자와 노자와 맹자와 순자와 추연이 동방의 문화론의 조종인양 잘못 생각하여, 나아가 예수/마호멧/유대교의 유일신적 사상까지도 포괄하는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존재했던 삼신신앙적 한민족 선조들의 고매하고 심원한 고유사상들을, 그것도 무려 1500년 이상 말살․분실하거나 평가절하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물론 그렇게 말살한 상고문화를 한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한문문화권 이전 또는 병행한 고조선 한글문화권 또는 고조선 구려(句麗, 高麗, 九黎)문화권의 유산들-즉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삼신적 태극문화, 옛한글문화, BC30~10세기 사이 치우시대를 비롯하여 첨예하고 지속적인 문화논쟁의 결과물로서 동서교류적 방대한 동북아시아의 문화를 포함한다.
실제로 범위를 좁혀 옛한글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적어도 우리 토착어를 한문과 섞어 쓴 이두를 사용한 이조 초(세종대왕)까지는 우리 순수말이 다량 살아 있었으나, 세종대왕이 만든 28자로 된 한글체계에 따라 표준적으로 발음하면서, 간편화하는 사이, 그리고 주시경 선생 등이 그 중 4자를 버리고, 자음보다는 오히려 별로 중요하지도 않던 조사, 어미, 모음조화, 어미변화, 종성법, 표준말법 등등을 복잡하게 갖다 붙이면서, 더욱 더, 고조선 시대에 우리 조상이 쓰던 순수 우리말은, 겨우 경상도-전라도 등 사투리와 비속어 속에서만 살아 남고, 그 원형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고조선의 유민과 백제-신라-가야의 상고문화를 전수 받은 일본에는, 고조선 시대의 종교와 사상 및 우리 순수말의 원형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고조선시대의 우리 순수말(풍속, 종교철학, 사상 포함)의 의미와 제자원리를 알려면, 현재 시골사투리나 속어, 일본의 상고어나, 심지어 BC 2000~9000년 사이 배링해협 등을 통해 아메리카로 단계적으로 건너 간 몽골리안의 일파인 아메리카 인디안의 (고대)언어, 아니면 인도고대어,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들 중 우리와 같은 어족(語族)민들의 언어를 뒤져야 할 입장이 되었다는 말이다.
Ⅴ-7. 아리랑의 새로운 해석과 한민족 예술시학의 가능성
물론 연구자는 전문언어학자가 아님을 감안하며 이 글을 읽기 바란다.
먼저 이미 많은 학자들이 밝힌 것처럼, 아리랑에서 아리랑을 <알+이>라고 쓸 수 있다면, ‘알’이란 천지인 삼부인의 원리에서 보면, <하늘이 흘러내려 활성화시켜 준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경상도 토박이말에서, 지금도 사용하는 <아이>를 <알나/얼나>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이는 결국 <알이>가 된다. 그러니까 삼재론적 옛 한글체계로 보아도, 알은 하늘의 특성 <ㅇ>을 초성으로 사용하고 있고 동시에, 이미 다른 학자들이 밝혔듯이, <아이>와 연관된 의미범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유의할 것은, <진동(유성)음 ㄹ>은, 영어와 불어에서의 <l, m, n>과 마찬가지로, <인접한 음을 변화(자음동화)시키는 유연한 음>이라는 특성을 가지는데, 옛 한글에서도 <하늘의 정기(씨)가 아래로 흘러내려 창조(생성)되는 의미>를 가진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고한글체계에서 <ㄹ>은 대지의 요소적 특성을 상징하는 <ㄱ, ㄴ, ㄷ, ㄹ, ㅂ 등>으로 세분화된 것 중의 하나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한글이 그림(표의)문자이면서 동시에 표음문자로 출발했다고 보는 이유이다.
또 전(前)삼국시대에, 한자어 알천(閼川)을 아리나리라고 했다는 것을 보면, 알은 아리로 읽었다. 그런데 실제로 송화강, 두만강, 한강 등도 모두 아리수>알이수>알수라고 부른 것을 보면, 상고인은 물(강, 호수, 바다)이 바로 그런 뜻을 가진다고 보아, 물(바다, 강, 셈, 우물)도 ‘아리>알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아리랑의 아리라면 아리수는 알을 품고 탄생시키고 기르는 물이며 또한 물(우물, 바다)이다.
그래서 하늘이 준 알을 감싸안은 대지의 여신, 특히 물기 있는 대지가 잉태․보호․탄생․성장․재탄생시키는 것을 보면, 온전히 알을 받은 대지(어머니)는 <알물> 곧 생명체(만물)을 낳는 강물 그 자체로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리랑의 아리는 아이(알나)이며 또한 상징적인 의미는 모두 생명과 그것의 활동을 상징하는 물(우물, 바다)이다.
아는 바대로 고조선 삼재사상은 생명의 종교, 생명의 철학이다. 그 원리는 어떤 것일까?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대로, 우리의 전통적인 천부인 삼재(삼신)사상 1단계를 알아야 한다. 즉 하늘이 준 알(+)과 대지가 준 알물(-)이 교합작용하여 만물(인간 포함)을 낳는다가 그것이다. 그런데 생명을 잉태/탄생/보존/유지하는 대지의 특성을 대표하는 대지의 요소는 물이요 하늘의 특성을 잘 표현하는 것은 태양(빛, 광명)이다. 그래서 물의 상징은 개천-강-호수-바다로 확장되고 그 특성 또한 달, 여인, 어머니, 동굴, 동굴에 사는 곰 등으로 확장되다 보니, 물 속에 잠긴 아기(알아, 얼나)를 동굴처럼 생긴 배(창자) 속에 갖고 있는 어머니의 자궁은 동굴이고도 알을 갖고 있으니 배알이 된다. 결국 알은 대지이며 어머니이다. 알(아리)을 가림토체계로 보면, <하늘이자 정기(씨앗)의 상징인 o, 그리고 유동하여 흘러내려 생성한다는 뜻의 ㄹ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결국 알(아리)이란 <하늘의 정기(씨앗, 정자)가 유동하여 아래로 흘러내려 대지(물)의 알에 묻히고 얽히어 생성되는 생명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뜻이, <랑>을 일단 <, 교합, 동반>(with)로 보면, 대략 <하늘의 알과 대지의 알이 교합한 것이 바로 알알(만물)이니라>라는 식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알다시피 우주란(宇宙卵, cosmic egg)은 우주의 알(씨앗, 정자, egg)이란 뜻인데, 알리란, 가야-신라-고구려 등에서 보듯 알을 말하고, 알은 <우주/태양의 빛>의 상징으로도 표현되어 언제나 물(대지, 어머니) 곁에 흘러내려 교합해야 성립하지만, 그러나 결국 어머니라는 인간의 자궁 속에서만 완성되어 또 다른 씨앗으로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알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늘과 대지의 교합으로 생성된 <생명의 시원적 씨앗=영혼=에너지>를 인간(어머니)에 의해 또 다른 생산적인 씨앗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만물에 유용한 우주의 완성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아는 바대로 이것이 삼부인 철학의 요체다. 인간이 그래서 인체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옛사람들은, 이러한 생명잉태와 탄생과 성장원리들을 확장시켜, 아기를 밴 여인의 배(창자)를 배알이라고 했고 그것을 가진 분을 어시(부모)라고 했다. 후에는 <배알이 없는 놈>하면, <뿌린 씨앗이 어느 족속의 것인지 모르는, 즉 자존심도 없는 자>라는 뜻으로 변화되었다.
2. 그럼 아리랑에서 랑(郞)은 무엇일까? 이 ‘랑>낭’이라는 단어는, 세 가지 방식으로 그 뜻을 추정할 수 있다.
① 우리에게 현재도 남아 있는 유사한 용법의 말을 통해 말의 의미를 유추하는 방법이다. 즉 <랑>을, 예컨대 ‘너랑 나랑 머루랑 다래랑 먹고’에서 ‘랑’들처럼, ‘~와 동반하여/어울려/하나되어/교합하여/무리지어 또는 동반/어울림/뜻이 하나됨/교합/의기투합/무리짐으로 인하여’ (영어의 with)의 뜻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확장하면 신성한 의무를 가진 남/여성 비밀결사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은 위에서 말했으므로 생략한다.
② 우리말과 한문을 섞어 의미를 유추하는 방법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신랑/삼시랑/화랑 등등의 <랑>이라고 본다. 랑이란 말의 뜻은 한자로 번역시, 소리요소로는 선(善, 좋음, 훌륭함)이란 뜻을 가진 랑(良)에, 의미요소로서 언덕 부(阜, 땅, 터전, 대지, 언덕)변을 쓴 이유를 새겨야 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랑이라는 말을, 고구려와 백제의 위협 앞에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신성한 언덕(신전, 땅, 조국, 신라)의 씨앗(왕족, 꽃, 花)를 지키고, 끝내 생존국가로 만든 신라의 <화랑도>(화랑의 무리, 남성비밀결사체) 할 때의 <랑>(郞)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랑>(郞)을, 한문으로 번역시, 조금 다른 뜻을 가지는 랑(浪廊朗琅瑯埌嫏㫰...)으로 썼다해도 거의 다 통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문(漢文)은, 흔히 생각하듯 한문에서 우리 한국말이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 우리말이 영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하지 않듯이, 우리가 거의 잃어버린 우리말 단어의 의미와 발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③ 연구자가 말했듯이 고(古)한글체계로 보면, 랑이란 단어는 <ㄹ과 ㅇ>이 들어 간 말이므로, <하늘이 준 영혼(씨)을 대지(땅, 현실, 터)에서 유연한 지혜를 발휘하여 뿌리고 성장시키고 보호․보전하는 활동으로, 그래서 너와 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생명활동을 거침없이 실현하는 일을 하여 씨앗을 뿌리고 거두자 자>라는 의미망을 가진다. 이런 뜻이라면, 당연히 두 번째 것은 세 번째 의미를 확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결론적으로 아리랑 아리랑의 <랑>의 의미는, 고한글 체계 우선의 법칙(?)에 의해 크게 한가지 의미망-즉 첫 번째의 의미 하나와 두번째 해석의 도움을 받아 결론적으로 확인된 세 번째 의미 하나-으로 압축된다.
3. 그럼 서리(쓰리)랑에서 서리(쓰리)는 무엇일까?
혹자는 <아리 아리랑 서리(쓰리) 서리(쓰리)랑>을 <아리고 아린 고갯길, 쓰리고 쓰린 고갯길>이라고 하는데, 물론 필자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해석은, 원래 의미에서 확장되어, 때로는 상관없다고 할 정도로, 한(恨)많은 생을 반추하는 입장에서, 고조선 이후에 음성상의 이유 등으로 덧붙여졌다고 보여진다. 만일 연구자의 말이 옳다면, 단군조선 시대 아리랑 노래는,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그렇게 슬프고 한스럽게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부인 상징체계로 불 때, 슬이>스리>쓰리>써리>서리라는 말은, 우리 말에 남아 있는 유사한 용법의 말은 슬기라는 말이 어원인 것 같다. 그렇다면 <서리랑>의 서리<설이<슬이<(슬기)는 고한글 체계로 <ㅅ 또는 ㅅ의 강조인 ㅆ/ㄹ/구부리는 활동을 상형하는 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의 정기(씨앗, 命)을 받은 사람(ㅅ)이, 대지와 인간 사이관계, 즉 삶(ㅅ)에서 구부리고 세워야 하는, 모든 유연한 일체의 슬기로운 수립활동을 하는 자>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연구자는, 서리(쓰리)랑은 <사람이, 인간사이(사회, 현실)에서 하늘과 땅의 뜻(道)을 받아 터득하고 구부러진 것을 펴고 세우고 이룩하고 남을 보호하는 일체의 원융무애한 홍익활동 또는 그렇게 실천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아리랑이라는 노래의 내용은, 적어도 고조선 3기 단군시대 이후 전해오는 한민족 고유의, 참으로 지극히 형이상학적이면서도 21세기에도 합당한, 삼신사상(三神思想) 또는 천부인 사상(天符印 思想)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진인(眞人)이나 군자(君子)를 초목표로 하는 장자나 공자의 선조격의 고매한 사상으로서, ‘하늘과 대지를 운명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이건만, 결국 고된 수행을 한 인간만이 하늘과 대지의 기운(命)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아리랑 노래는, 하늘이 감응하도록 웅장한 합창으로 불러, 하늘신(天神)조차 주술적으로 감응하여 지상으로 내려와 자신의 피조물(만물)과 함께 하나가 되어 즐겁게 어울리며 듣고 함께 부르도록, 신명난 멜로디와 웅장한 리듬이 적격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아리랑 노래 가락은 지나치게 가볍고 처량하다. 그런 의미에서 윤도현의 <월드컵 아리랑>은, 한민족 조산들의 고유한 철학을 감안할 때, 민족학적 음악예술적 창작기술(민족예술 시학)이 너무나 미흡하다.
그래서 연구자는, 2003년 벽두에 원대한 소망을, 3태극(三太極)의 터전에 건다. 조만간 누군가 <반만년 아리랑> 또는 <일만년 아리랑>을 가사․작곡․노래할 천재예술가가 나타나, 2002년 6월의 그 절정체험을, 아니 2002년 12월, 부쉬를 제압한 그 촛불축제의 전율감을 재현해 줄 그 날이 오기를! 대한민국의 선조들의 지혜인 환경친화적인 생명철학으로 세계를 되살릴 가장 훌륭한 <아리랑>이 대한민국에서 창조되기를! 그래서 38선이 무너지고, 우리 신지문자와 가림토로 노래부르던 옛 한민족의 조상들이, 인간의 이상국(paradise)을 이승에서 실천하기 위해 요가수행으로서의 인재를 기르던 사습(射習)놀이터들, 즉 북극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요동 3성과 만주의 옛 한민족의 강토를 되찾았을 때 부르게 될 조국찬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언덕)으로 날 넘겨주소>가 나오기를! 이제 연구자가 해석한 아리랑 노래를 정리해보자. 물론 여기서 하늘은 태양 또는 환한 빛의 뜻으로, 대지는 땅, 물기 있는 땅, 생명수립의 터전, 또는 생명의 바다 등으로 번역해도 좋다.
번역1: <하늘의 알과 대지의 알이 교합한 것이 바로 만물(생명체)로서의 알알이(아라리)니라. (어렵더라도) 알(생명)이 실현되는 언덕(대지, 신시, 마을)을 향해 서로 밀고당기며 넘어 가세나.>
번역2: <하늘의 알과 대지의 알이 교합한 것이 바로 알알(만물, 생명체)이니라. 배알 있는 너와 나 우리는, 모두가 알(생명)을 실천하는 지혜의 등불 한국(韓國, 桓國) 사람이니, 우리가 바로 알이요 알이로다! 생명의 언덕을 서로 도와 넘기세 그려>
Ⅵ. 치우천황-치우가면의 문화사적 의미, 그리고 길가메쉬 서사시와 아리랑
Ⅵ-1. 치우천황이 실존인물이라면, 도대체 누구인가?
여기서, 한민족 문화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치우천황에 대해 고대 동서교류차원에서 연구하고, 문화사적 의미를 정리하면서, 한국연극시학의 가능성을 전건해 보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대로, 기록에 의하면, ‘치우(蚩尤, 일명 慈烏支, 慈爲支, BC2707~2598)는, 고조선 제2기의 환웅 배달(박달, 신시)국 시대(재위는 BC3898~2333, 실제 수명은 151세)의 14대 천황으로 107 또는 109년 간 통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버지의 지혜를 본받은 치우의 아들 치(티)액특 15대 천황(BC2598~2509)은, 오늘날의 티벳(Tibet)을 제후국으로 만들고, 통치방법으로 한민족의 고유신앙인 삼신신앙을 수출하고 교화하여 그 후손들이 800년 간 통치한 것으로 나와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BC2707부터 BC1500년까지 약 1000년간 한민족의 문화중심이 어디쯤 있었는지, 특히 하나라와 은나라와 주나라로 연속되는 시기를 밝히는 중요한 문화연속적 열쇠가 된다. 지금까지 치우를 비롯한 하은주가 하나의 거짓신화 또는 거짓역사가 아니라, 황하(중원)문명 중심으로 조작된 황제(皇帝)문화체계로 인해 왜곡․해석된 것임이 드러난다. 최근의 장강유역의 하모도와 삼성퇴 및 굴가령, 양저, 황하 하류의 북신문화, 은문화, 티벳문화 등이 치우가문과 연결된다면 하나의 엄연한 역사시대로서 그 문화적 의미가 새롭게 좌표 되어야 할 것이다. .
치우를 제대로 아는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국과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삼국사기, 제왕운기, 고려사,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 한국자료 최소 9개, 사마천의 사기, 한서지리지, 삼국지, 주서 등 중국측 역사서 11종 및 시경, 예기, 산해경 등 소위 11경-를 통해 비교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
또 하나는 아메리카 인디안 문화 등에 나타난 치우흔적연구를 포함하여 보다 폭넓게 객관적으로 정리한 중국학자들의 최근해석과 맹목적 민족주의자들이라고 매도당해 온 한국재야학자들이 말하는 치우를 비교학적으로 정리하는 방법,
셋째로는, 최근의 고대 아시아 전역(중동, 그리스 포함)의 고고학적 자료 및 고대 역사서들를 통해 종합적으로 비교하며 동서문화 교류 관점에서 치우관련사를 연구한 일본/외국학자들과 그들에 동조하는 국내학자들(예: 박용숙 등)의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비교하며 정리해 보는 방법 등이 있다. 이 방법은 관학/재야학자들로부터 동시에 비난을 받고 있는 입장이나 연구자는 오히려, 최근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들(예: 장강(양자강) 하류의 하모도 및 삼성퇴 고대문화 등)을 기초로 균형만 확보하여 연구한다면, 한민족 문화의 시원이해의 지평을 급격히 넓히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본다.
이 글에서는 먼저 첫 번째 입장에서 치우를 위치시켜본 후, 다음 단계로 둘째와 셋째 방법을 뒤섞는 방법으로 치우를 종합적으로 규명해 보려고 한다. 물론 일부 독자들의 반감이 예상되나, 연구자의 관심은 치우가 실존인물이었다면, 그는 무엇을 했으며, 그가 가진 문화자취의 의미는 무엇이며, 현대 우리의 직계선조 여부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의견들을 있는 그대로, 정리한 것임을 거듭 밝힌다.
먼저 전자의 방법으로 치우씨 집안역사를 정리해 보자.
치우씨 집안은, 3301년간 유지 된 고조선 제1기 환인의 환국시기(BC7197~3898)에 9개(나중에 12개) 씨족 연합국 가운데 하나로 출발하여, 1565년간 유지된 고조선 제2기 환웅의 신시(박달)국 시기(BC3898~2333)에는 개국 9개 공신집안의 하나로 출발하여 또한 번창한다. 환국시기에 치우씨 집안은 <병마와 도적 막고 사람을 보호하는 집 짓는 일>을 맡는데 14대 치우천황과 15대 치액특 천황은 모두 이 치우씨의 후손이다. 이 환국시기에 치우씨 가문 외에도 <결혼>은 주인씨, 부싯돌을 발명하고 야금법을 발견했으며 <벌목과 농사, 부싯돌을 발명하고 야금법의 발견>은 고시씨가 맡는다. 오늘날 시골에서 집 짓는 목수를 ’지위‘라고 하고, 중매하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하는 것, 음식 먹기 전에 한 숱 갈 ’고시레‘ 하며 던지는 것은 모두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고조선 제2기 배달국 시대동안 끝까지 잘 나간 집안이 셋이 있는데, 물론 치우씨 집안도, <녹두문자로 ’천부경‘을 기록하고 왕의 출납 및 회계전문> 가문인 신지씨, 그리고 위의 <농사와 나무담당> 가문인 고시씨와 함께 포함된다. 그래서 치우씨 집안은, 국방을 담당하는 요충지 역할을 맡은 가문의 전통적 주임무를 고려해 볼 때, 고조선 제2기 배달국 초․중기까지는 고조선 3신체계의 종교적 직능상 전통적으로 마한(馬韓)의 왕족이었으나 고조선 배달국 14대 치우천황을 배출하고 그 아들이 티벳지역 및 오늘날 장강하류 및 황하하류 유역까지 포괄하는 지역을 800년 이상 통치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치우천황 이후 고조선의 핵심기둥인 진한으로 기능이 승격되어 BC2333년 단군조선으로 넘어 갈 까지 번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환국/배달국 시기에는 전통에 따라, 혈맹을 맺을 때 피를 섞어 먹듯이, 구정법(九井法)이라는 연금술적 씨앗(, 알, egg, 정자)섞기(封禪儀式)로 왕족의 씨앗을 우생학적으로 배양했는데, 그것을 고대 중동의 지구라트와 같이, 제사를 지내는 인공적 거대사원의 천단(天壇) 깊은 곳에 보존했다가 필요하면. 사원의 여사제로서 이런 봉선의식 전문담당 검(곰, 동굴, 지하굴)족의 여인들에게 엄격한 절차에 따라 배양한 것으로 보이는데, 성공여부를 떠나 종족의 평화유지책으로는 기묘한 효과를 발휘했을 인공수정(封禪)의식과 관련제도는 고조선 국가 존속을 결정할 만큼 중요했을 것이다. 연구자는 치우가 활동한 구려(고려)가 바로 3한 중 진한(辰韓)으로서 이런 사제업무를 맡은 가문으로 번성한 나라로 보며, 이 전통이 바로 고조선 멸망 후부여-고구려-백제-가야-신라-일본이 전승한 난생신화적 왕족탄생의 비밀이며, 특히 통일신라 이전 진골이 존속한 진덕여왕 때까지도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고도의 통치전략의 핵심으로서 이 봉선제도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시기에 합의가 파기되고 각자의 방식으로 실천한 것이 한민족 분열의 결정적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신라의 경우, 김춘추와 김유신은 이런 전통을 파괴하고 진골이 정권을 잡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들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태어난 아이 중 통치자에 적합한 자질을 가진 자가 천황의 자식(비왕,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비상시국에는 제후국왕 및 중요신하들의 회의체인 화백회의를 통해 그 위기타개에 적합한 최종천황을 결정했기 때문에, 비왕이 변변치 않으면, 도태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치우씨의 후손 치우(자오지, 자위지)가 배달국 14대 천황이 된 것도, 같은 한민족이지만, 염제(신농)의 후손인 유망이 고조선 제국의 근본이념에 반기를 드는 반연방정부(辰國, 천황국) 정책을 펴고, 염제와 대립관계를 가졌던 공손씨(헌원, 나중에 유망을 죽이고 황제가 됨)과 연합하면서 야기된 시대적 위기상황 타개에 적합한 인물로 선출되었기에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위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를 당시 고조선의 정황과 관련시켜 알아보자.
정리하면, 고조선은 전통적으로, 원칙상 오늘날 미국의 연방국처럼, 연합국가 형태로서, 각 제후국의 왕(수장)들과 그 신하들이 삼신적 진리의 숲(신전, 천황궁, 숲의 왕궁)에 모두 모여, 일정한 종교/정치/사회/경제적 상황(조건)에 따라, 각 시기에 적합한 고조선 전체의 천황을 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조선 초기 숲의 왕(신성 왕)시기에 조직기능은 (촌락, 씨족, 성읍, 부족)국가 등의 정치적 개념보다는, 삼분법(三神)적 세계관에 따라 종교적 직능을 우선하였는데, 낫으로 표현되는 사제계급으로서 최고의 왕(천황)이 있는 곳을 진국(辰國 또는 辰韓), 칼로 상징되는 전사업무를 맡는 인황(人黃)이 있는 곳을 마한, 그릇(컵)으로 상징되는 일체의 생산업무를 맡는 지황(地皇)이 있는 곳을 변한(번한)이라고 했다. 특히 이것이 발전하여 단군조선 시기에는, 국방에 전념하는 나라를 마한, 전쟁에 소요되는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을 주업무로 하는 번한(番韓, 나중에 弁韓, 한반도의 가야국의 기능)과 함께 3한(三韓)이라 불렀다. 이 상고시대의 보편적 샤마니즘적 삼기능체계는, 마치 꼬리를 물고있는 뱀(용, 우로보러스, urobolus)처럼, 셋이 곧 하나가 되는 가위-바위-보라는 삼태극적 기능구조로서 서로가 이익이 되는 홍익인간 이념을 가지는 현묘지도(玄妙之道, 삼교합일, 삼위일체)였다. 3한(三韓, 三桓)의 원래 의미는 <3줄기 환한 빛>이고, 우리 민족을 한민족(韓民族)이라고 한 이유도 이러한 전통을 수천 년 간 실천해 왔기에 얻어진 것이며, 오늘날 한민족 문화는 이러한 삼기능 체계를 안거나 버리면서 결과된 문화라고 보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前)삼국시대의 마한(백제)-변한(가야)-진한(신라)은, 기실 이러한 단군조선의 종교적 3기능 통치방식이 분열되고 독립적으로 재정립되는 과정들의 유산이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고조선의 그러한 전통을 고수하고 대제국으로 부할했지만, 남쪽의 삼한을 설득하는데 역부족을 느끼며, 결국 유-불-선을 받아들이면서 무너지고 발해로 넘어가면서 사라진다. 이것은 한국의 수천년간 전통이 급격하게 사라지는 계기가 된다. 물론 하나의 한(韓) 밑에는 수많은 소부족(국가) 단위들이 소속된다. 더구나 고조선의 천황은 그냥 천황궁에 앉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제후국을 순행하는 순행통치를 원칙으로 하여, 필요에 따라 수도가 바뀌기도 했다. 천황의 아들(왕자)은 비왕(稗王, 패왕, 副王, 예비 천황)으로서, 배달국시대의 유명한 스승들-예를 들면 환웅천왕 시절의 신지 혁덕, 그리고 주역을 창안한 왕자출신 복희, 복희와 동문수학 동기인 발귀리(發貴理), 발귀리의 후손으로 치우와 중국 헌원(황제), 한문을 만든 창힐의 스승인 자부(紫府) 등-로부터 천부사상을 배우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각 제후국에 관리로 파견되어 실무 정치술을 수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조건이 미달되면, 탈락한다.
치우가 천황이 된 시기는, 환웅이 배달국을 세운지 1197년 후인 BC2707년이므로, 중국인의 관점에서 치우를 위치시켜 보면, 그 시기가 어떤 위기를 겪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야기는 치우천황보다 약 1000년 전인 태우의 천왕(BC3512~3419)의 12아들 중 막내인 복희로부터 전개된다. 복희의 제일 큰형이 6대 다의발 천황(BC3419~3321, 혹자는 이분이 복희라고도 한다)이 되자, 당시 3신철학적 지혜의 1인자였던 복희는 여동생 여와와 함께 부부로서 동조자를 얻어 배달국 서쪽. 혹자는 지금의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지역 국가 중 우루크라는 곳-에 도시국가(복희국이라 하자)를 만든다. 알다시피 이 시기이면 BC4500년경부터 제민족들의 각축장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세계문명의 발상지 수메르가 생긴지 약 1000년 후이다. 그러나 태호 복희(이상하게 연대는 아버지 태우의보다 먼저인 BC3528~3413)는 복희국을 세운다. 복희가 뜻을 못 다 이루고 피살 또는 억울하게 죽자 여와가 복수하고 복희국을 재건한다. 이내 복희의 처이자 여신인 여와가 복희국을 염재(炎帝) 신농(神農, BC3218~3078)에게 선양하고, 신농은 신농국을 세우고 후손에게 계승시켜 가던 중 큰 홍수(재난)를 맞는데, 그 홍수 후 신농국 제4왕조 유망이 황제의 후손과 연합하여 고조선 기본 합의이념에 도전하자 배달국 천황 쪽에서 치우를 발탁하여 유망과 황제를 제거하라고 한다. 이미 헌원은 3차례에 걸쳐 염제 신농과 3차례 싸워 승리한 공손씨의 후손으로서 천황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었다. 드디어 치우에게 패배한 유망을 죽이고 유웅국을 세워 왕(황제)이 된 훤원은 치우와 10년 간 73번 싸워 전패하지만, 그로부터 25년 후, 또 다시 치우에게 도전하여 싸움에 이긴다. 그 후 황제의 후손들은, 위기 앞에서 나라를 요왕에게, 요왕의 후손들은 나라를 순왕에게 물려준다. 요나라/순나라 시대에는 모든 역대왕이 요임금/순임금이라고 불렸다고 가정한다. 혹자는 치우의 행적이, 순나라의 마지막 왕으로부터 자리를 이어 받아, BC2197년 하나라를 세운 우(禹, BC ?~2197)의 시대 초기의 혼란한 시대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록상 맞지 않는다.
요순임금에 대해 하나 알아두자. 요임금의 아버지는 고조선 제2기 당시의 배달국 환웅의 가신이었다면, 순임금의 아버지는 단군조선의 가신이었는데, 아들 순이 조국을 배반하고 같은 한민족이지만, 고조선 정통 종교적 직능에 따른 이념을 달리하는 화하족(華河族) 국가인 요나라의 신하가 되어 뜻을 펴려하자, 직접 죽이라고 명령하나, 워낙 효성이 강한 순이 아버지에게 슬기로운 태도로 대한다. 감동한 요임금(사실은 당시 요나라 왕)이, 순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순나라 마지막 왕은 하나라 우왕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이 요나라와 순나라 시기를 합하여, 우리는 흔히 요순시대(대략 환웅이 배달국을 세운 BC 3900년~2197년경)라 하고,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이상국의 시기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지나친 이상화는 나중에 중국학자들의 전설적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한민족 사대부들의 사대주의적 사유의 산물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비판적 해체대상 1호로 삼아야 한다. 특히 요나라 초대 요임금은 성자였으나 그 후손 요임금들은 포악한 자들도 많아, 치우가문과 전통적인 적대관계 또는 우호국으로 변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배달국 14대 천황 치우는, 명실공히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에 공히 밝은, 즉 문무를 겸비한 천재(天才)였다고 사료된다. 치우 자신이 전문 대장장이, 야금술 및 연금술 학자, 천문학에도 밝은 일대 영웅으로 당시의 구리-청동-철-금 광산을 확보하고, 당시 제련 및 제강기술자를 우대하여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연금슬-야금술-제련술을 가진 나라가 되어 기네스 북을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과학사상의원조라는 연금술은 BC10세기 이집트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헌에 의하면, 환인이 세운 환국은, 정도는 다르지만 배달국과 전기 단군조선까지도, 그 통치 및 영향권이, 지금의 극동지역은 물론, 오늘날의 이란(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고인도의 드라비다족이 살던 인도의 인더스 강 5대 지류, 그리고 흑해, 카스피해, 아랄해 주변의 코카서스 지역 및 터키-이라크-중앙아시아 지역, 나아가 고대의 크레타-미케네-고대그리스-시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까지에, 삼부인 문화사상을 전파한 제후(거수)국을 거느리고 있었고, 아니면 적어도 정치-경제-문화 등 일체의 정신적 모국(母國)으로서 영향을 주며, 긴밀히 교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실제로 발해의 왕자 대야발(大野勃)이, 한민족의 영향관계 역사(족적)을 찾기 위해, 지금의 터키지역에 2번에 걸쳐 탐색여행을 올랐다 한다.
배달국 치우천황의 시기에는, 왕이 되기 이전에 이미, 당시 천문이치와 연금술의 대가였던 자부(紫府)선생(발귀리의 후손) 밑에서, 중국의 한족(漢族) 3대 시조 중의 하나인 헌원(軒轅, 일명 황제) 및 한문을 만들었다는 창힐 등과 함께, 동문수학(同門修學)하였다. 당시 이미 청동-철 등을 능숙하게 제련하는 기술을 알고 있던 치우는 전쟁에 나서면, 구름과 바람과 벼락을 마음대로 부리고 구리머리와 쇠이마로 가히 신이라 할 만했다. 당시 치우는 북경 중심의 고조선 산하 제후국들을 넘보는, 나중에 동문 사형사제 간이 된 헌원(軒轅, 黃帝)에 맞서, 무려 10년 동안, 73번 전투 중 73번 전승을 했다는, 한민족의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73번이나 패한 훤원은 화해를 청하게 되고, 곡옥과 비단을 들고 치우의 배달국에 들렸다가 당시 유명한 자부선생에게서 천부사상을 배우고, 감화를 받아 도교(신선교)를 창시하는 교조가 되는데, 중국의 진한세대의 황노사상이 바로 이 황제의 신선교와 노자의 도교를 합친 것을 말한다.
필자의 공부에 의하면, 이 치우와 훤원(나중에 황제)과의 73번 전투의 배경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 전쟁은 배달국의 2대공신 집안인 고시씨와 치우씨 가문의 후손들 간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즉 고시씨의 후손으로는 소호(小昊)와 소전(小典)이 있었는데, 소호는 금(돈)으로 왕이 되었다 하여 금천(金天)씨를 붙이게 되어 금천 소호라고 불린다. 소전은 제8대 안부련 천황 ((BC3240~3167)때, 중국 섬서성 기산현 강수(姜水)지역의 군장으로 파견된다. 그런데 이 소전의 자식이 바로 한의학의 원조인 신농(神農, 姜水에 살았다 하여 성을 姜으로 함)이다. 이 신농은, 운도 좋았다. 왜냐하면, 제5대 태우의 천황의 막내아들 복희가 누이동생 여와와 함께 다른 지역, 즉 수인-유소씨 등이 사는 서쪽 (수메르)지역을 활당 받아 나라를 세웠는데, 이 ‘복희씨의 나라’를 통치하던 여와가 국가를 신농에게 물려주어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농의 후손인 유망이 종주국인 베달국에 방자하게 굴자, 치우천왕은 즉각 81명의 정예부대를 선두에 배치하고 유망정벌을 시작한다. 유망은 헌원의 아들 소호에게 치우를 막으라고 명하지만, 연전연패한다.
한편, 유망의 동태를 살피던 소호의 아버지 훤원(황제)은, 유망의 미래가 가망 없음을 확인하고 그 틈을 이용해 왕을 꿈꾼다. 치우는 즉각 야심 찬 훤원과 73번의 전투를 벌여 전승한다. 이 때 치우는 내친 김에 수하의 오장군을 보내, 중국 10대 전설적인 영웅 중 하나인 제곡 고신(帝嚳 高辛)까지 제압한다. 결국 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헌원은, 지남거와 비석박석기를 개발하여 치우를 끝내 이기고 유망을 죽여 황제를 자처하기도 했지만, 서로 지치기도 했고, 멋진 승부를 낸 영웅들답게,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 때 치우에게 예물을 들고 찾아 온, 헌원 왕(黃帝)은, 당대의 유명한 현자 자부(慈府)의 제자가 되는데, 그 후 중국의 도교를 창시하면서, 중국의 시조 중 한 사람으로 추앙된다. 나중에 진시황의 진(秦)-무제의 한(漢) 시대를 전후하여 유행한 황노사상(黃老思想)은, 이 황제의 도교와 노자의 도교가 합친 것이다.
Ⅵ-2. 치우천황의 문화사적 의미
이리하여, 치우는, 잠시이지만, 한반도-만주-몽고, 지금의 북경 및 낙양을 포함하여 회남지역, 산동-하북-하남-강소-안휘성까지 정복, 최초/최대의 제국이 된다. 이 영광은 지속되어, 단군조선의 고불 단군시기에는 인구가 약 1억 8천명이 되었다 한다. 치우는, 전통적으로 이순신을 비롯한 한민족 영웅들 모두의 스승이었다. 최근 옛날 우리 강토였던 요동반도-만주지역에서 한민족의 뿌리를 되찾으려는 한국학자들의 연구열풍, 그리고 최근, 갑자기 1990년대부터 자신들의 3대 조상 중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의 학자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본격연구 중이다. 왜 그럴까? 연구자가 보기에, 소련연방이 분열된 것처럼, 54개 중국 소수민족 중 대종족들(예: 티벳, 위구르, 조선족 등)의 독립운동 시도에 위협을 느꼈거나, 아니면, 최소한 남북한 통일 이후 뜻 있는 한민족 지사(志士)들에 의해 제기 될 가능성이 농후한, 옛날 고조선-부여-고구려 강토였던 요동반도-만주 땅 등에 대한 한민족의 주장에 쐬기를 일찍 박기 위한 문화전략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우리 또 다른 동지가 되자. 왜곡된 한민족의 역사를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자. 물론 그 해체대상이, 20세기 초 한민족 관련 서적 20만 권을 불태우거나 숨긴 일본학자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배운 친일주의적 우리학자들, 그리고 기하급수적으로 쌓여지는, 친서구적 엘리트들의 민족기록에 대한 왜곡된 언행들만이 아니다. 시급히 비판적으로 해체․재구성 해야할 대상이 바로, 수 천년간 중국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한민족에 대한 언행과 문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명심하자. 이것을 통해 우리는 현재 한국의 남북통일을 가장 바라지 않는 주변강국이 누구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산동성 어딘가에 치우의 무덤이 있다는 문서가 최근 발견되어 한국과 중국사학자들 모두 흥분시키고 있는데, 조만간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기를 모두 기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치우는, 단군시대 이전까지는 중국인들 및 우리 한민족 모두에게 공동의 전설적인 영웅이지만, 후에 중국의 질투 어린 지배자와 그를 추종하는 학자들에 의해, 치우에 대한 왜곡기록과 삭제는 물론, 액막이용 악마가면으로 평가절하 되었는데 비해, 한민족은 치우를 민족의 수호신(영웅) 또는 전쟁의 신으로서 지속적으로 숭배하면서, 동시에 영고-무천-솟대제의와 같은 축제의 보호신으로 사유되어 왔다. 나중에 사대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를 맞아 치우에 대한 왜곡된 시선의 영향을 받아, 치우의 역사는 고스란히 망각되고, 다양한 종류의 액막이용 민속가면으로 신라-고구려-백제-고려-조선까지도 제작되어, 현재 적어도 20여 종류 이상의 치우가면이 전해오고 있다. 이 가면들을 응용한 신종 치우가면이 이번 월드컵에 등장했다.
Ⅵ-3. 치우와 길가메쉬/『라마야나』와『마하바라타』의 역사적 연원, 그리고 아리랑 사사문학의 가능성과 아르또
이 단원은 인도(자바, 발리)의 2대서사시의 연원과 종교철학을, 연구자가 확실히 고조선의 훈교용 구전가요들 중 하나라고 믿고 있는 아리랑의 시원과 긴밀히 결부시켜 보려는 관심에서 1차로 작성된 단원이다.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연구자에게 있다. 먼저, 필자는 이 두 서사시의 연원을 한민족의 상징인 고조선의 민족훈교용 구전노래 ‘아리랑’과 결부시켜 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 초안을 필요로 한다.
‘즉 BC25만년 경, 마치 플라톤이 언급한 바 있는 전설적인 아틀라스 문명, 또는 초고대 중앙-동북아시아 문명이었다는 무우제국의 소멸처럼,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 있던 전설적인 <레모리아>라는 대륙을 받치고 있던 판구조가 가라앉으며 바다 밑바닥을 들어올리자, 바다에 살고 있던 물고기/조개 등은 졸지에 솟구치는 바다 밑 흙에 묻혀 서서히 하늘에 맞먹는 높이의 히말리아 산 정상에 나타난다. 지구는 온통 물바다로 변하고 인간족들은, 코끼리와 함께 오늘 날 유라시아 북쪽 털공룡과 곰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나아가 북극까지,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몰려들자 새로운 인종시장이 형성된다. 그러나 오직 한 곳 히말리아 북쪽 파미르고원, 우랄산맥, 알타이산맥, 곤륜산맥의 곤륜산 근처만 하늘의 뜻인 양, 공중부양을 하면서도 요지부동 살기 좋은 땅으로 남는다. 물론 사람들은 곤륜산에 사는 행운의 사람들을 하늘이 내려준 천족 또는 바람(風)을 타고 다니는 신선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BC2만년 경부터 빙하지대였던 히말리아 산 부근이 녹는 가운데, 수많은 홍수와 화산의 분출 등등을 겪은 후, BC1만2천년 경, 온화한 기후로 인해 지구의 모습은 세계의 지붕 히말리아-곤륜산맥을 중심으로, 흑해, 카스피해, 아랄해 등이 포진한 코카서스 지역, 오늘날의 지중해, 티그리스-유프라테스, 황허, 인더스 강, 바이칼 호수, 사해 등, 호수와 강은 제 길을 찾고 골짜기는 분명해지고 초목이 우거진 둔덕이 생겨났을 것이다. 양자강과 그 남부 지역만 아직 육지보다는 바다가 많았다. 그 후 몇 천년 동안 이미 제 길을 찾은 물줄기로 인해, 사막지역과 초원지역이 분명해질 때쯤, 이미 북부 유라시아 지역의 인간들은 남으로 이동, 특히 지중해주변지역과 산동-요동반도 지역에 정착한 몇 큰 집단들은 장구한 세월의 공동체 생활로부터 얻은 수렵과 목축, 농경의 지혜와 쑥과 마늘, 티벳산 파 등으로 약제/양념도 만들고 씨름대회로 선의의 경연대회를 벌리는 지식을 계발․활용하면서 창의력을 가진 자를 종교-정치 지도자로 내세워, 구성원들의 어려움/굶주림을 구제하도록 했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집단의 지도자들이, 특별히 살기 좋은 지중해 동안의 소아시아/사해지역 주변 지역, 티그리스-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 중앙아시아 지역에 포진하고 지혜를 서로 전수하고 선의의 경연으로 친선을 도모하는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각자 자신의 집단의 특기를 살려 대대로 전수하기를 권장하고, 공통된 이념을 확인하기 위해 기념대회를 벌이고, 어디선가에서 발견한 비장(秘藏)의 술(酒) 또는 유사 담배 또는 아편 등을 꺼내놓고 미지의 초월적 세계를 맛보게 하여, 초보적 종교놀이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지혜경(經)를 작성 활용하게 했다면, 사람들은 그를 두 말없이 기꺼이 하늘같은 어머니라고 부르며, 세금을 거두어 그들에게 바치고 부호(문자)들를 만들어 형제국임을 증거하며, 그들이 꿈꾸는 이상국을 실현하기 위해 전쟁에 동참하는 것까지도 영광으로 여겼을 것이다. 마치 어느 신라-가야인이 고대일본에 건너가 원주민으로 하여금 나라를 만들어 ‘왕-신하놀이’를 시키며 전쟁으로 먹거리와 편이를 제공하자 오히려 즐기며 환영했듯이, 그 존경하는 자의 지시를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재미있다고 즐기는 가운데, 서서히 지배/피지배 놀이가 유익하고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족속들이 생겨났다면, 오늘날 우리의 진정한 직계조상들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자.
과거 500만년 동안 최소한 5번 이상의 빙하기와 간빙기 덕분에, 인간이 지배하기 어려웠던 대형동물이 거의 사라진, 그래서 적어도 BC1만 2천 년 이후, 그야말로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 되고 욕망이 큰 인간 집단끼리 힘겨루기가 불가피한 환경이 되고, 이윽고 무력보다는 축적된 지혜들, 즉 문화가 각자의 집단을 확장․보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 집단이 있게 되었을 때, 그 때『마하바라타』와『라마야나』,『길가메쉬』와『아리랑』과 같은 서사시들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인간적 질서찾기와 평화찾기와 먹거리찾기를 위한 지배-피지배 놀이, 종교와 전쟁놀이, 공동체 축제놀이 등등과 함께 지혜로운 자의 통치전략/전술의 하나로서 발견되고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시기라면, 도움이 되는 문화전략/전술을 통해 고도의 지혜로운 정보를 분배하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 존중하는 연합국형태를 구상한 문화적 천재(天才)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현자들 중의 하나가 바로, 한민족의 신화적 족적에 분명히 기록되어있는 BC7197년 고조선 제1기 환인(桓因)국의 1대 천황 하느님(안파견)이였다고 한다면, 그것을 굳이 아니라고 박박 우길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또 그러한 지혜를 전수 받은 제자현자들이 소금과 물고기와 무역이 가능한 지중해-사해주변, 유목과 수렵조건이 좋은 카스피해-흑해-아랄해-바이칼 호수 주변의 코카서스 지역, 풍요한 물고기와 보리와 야채와 약제와 유목이 가능한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강, 그리고 황허강 주변의 언덕들에 정착했다면, 불가능했다고 볼 이유는 무엇인가?‘
BC25만년 초고대 인도의 국가 명이 바라타 또는 마하바라타였다는 전설은 무시하더라도, 실제 가능했던 위와 같은 이야기(관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총동원하여, 아리안 족과 외부 종족간의 역사가 비유적으로 담긴『라마야나』, 그리고 아리안 족 내부의 권력투쟁과 민족교훈을 다룸『마하바라타』의 연원을 추정해 보면서, 동시에 한민족의 얼을 생산한 고조선의 정체와 고조선의 종교철학적 이념이 고스란히 담긴 아리랑 서사문학 또는 한국 고유의 (연극)예술시학의 존재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21세기 세계예술시학의 하나인 아르또의 잔혹연극론과 맺게 되는 연관적 의미를 연구해보자.
1안: 혹자는『라마야나』와『마하바라타』가, 초고대 문명국가의 유산 중 하나라고 말한다. 여기서 초고대 문명국가란, 마치 2000년 4월 시작되어 2003년 4월 거의 99%상 완성된 인간 유전자 지도(Genom)가 예측하게 하는 복제인간이 사는 미래사회와 유사하다. 이 초고대 문명의 주인공은 BC5만~1만 5천년 사이, 외계의 어느 별에 살고 있던 첨단 생명공학을 개발한 우주인들, 즉 신생명공학 기술을 개발하고, 그 별에서 실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공방 끝에 패배, 지구를 실험장소로 택한 일단의 외계 과학자(우주인)들이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도착한 그들은 오늘날 카스피해-우랄산맥-알타이산맥-천산산맥-파미르고원--바이칼호 등을 경계로 한 어딘가에, 새로운 인간생명체를 복제한 선민족(하늘 족, 天族)이 다스리는 나라(일명: 무제국)를 구축하고,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지혜를 전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기존의 지구와 지구인들을 통치․교화하게 하는 권능을 베풀면서, 21세기 우리보다 더 고도로 발달한 초고대 식민지문명(1차: BC5만년~4만년, 또는 2차: BC15000년 전후)을 번성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 후 우주인을 중심으로 한 천족간의 파벌적 권력다툼 및 각성한 지구 원주민의 독립투쟁이 진행되는 긴 세월 동안, 일부 우주인 및 가족들은 스스로 실험의 완벽성에 만족한 귀환하기도 하고 일부는 추방당하는 형식으로, UFO를 타고 고향인 외계로 돌아가기도 하고, 일부는 특명을 받고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한다. 어쨌든『라마야나』와『마하바라타』는 이렇게 우주인 및 천족들의 과도한 욕망과 부패로 인한 헤게모니 쟁탈전, 아니면 마치 그리스 신화에 기록된 신들 간의 2번의 대전쟁처럼, 거대한 천족들이 세운 국가들 간의 정복전, 또는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은 지구인들의 반란과 추방의 역사가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대해, 필자는, 동의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쨌든 이것이 끊임없는 UFO(우주인 비행물체) 논란의 근거이며, 그래서 환인-환웅 할배들을 우주인들의 직계후손이라고 하면서 천족(天族)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다는 것만 말하고 슬쩍 넘어 가려 한다. 단 하나 우리역사서와 상관이 있는 것 하나는, 삼국유사에 천제(天宰) 환인의 환국의 역년(歷年)이, 단군기원전 4866년 건국하여 당시의 역법으로 계산한 3301년 외에, 일연 자신이 알자 못하는 63182년이 있다고 한 부분이다. 환국의 역년(歷年)이 2가지인 이유는, 3301은 좁은 의미의 환국 자체의 역년이고, 63182는 백두산족의 먼 조상이 유라시아 대륙 서쪽 어느 지역에서 후천(인간 각성)을 열고 천제성(天宰城)인 마고성(麻姑城, Magu castle)을 축성, 지상의 선계를 최초로 연 시대부터 환웅천황의 배달국 성립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자는 우리가 모르는 역법계산법이 있었거나, 아니면 위의 외계인이 세운 무우제국설과 연결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2안: 혹자는『라마야나』와『마하바라타』가, 고조선 환인국의 거수국(제후국)이었거나, 아니면 수메르문화를 토착적으로 발전시킨 초고대 인도의 토착적 명칭인 (마하)바라타국 또는 드라비다국의 외부 종족과의 힘 겨루기에 관한 구전유산들의 총화로서 대략 BC6000년경부터 형성되었다가 문자화되었다고 한다. 이 의견은 이 글의 주제와 연관되기에 좀 길게 논의해야 할 것 같다.
BC6000년경이면, 대한민국의 역사로 환원해 보면, 고조선 제1기 환인의 <환국>(BC7197~3898) 초기에 해당한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기록으로 보면, 고조선 제1기 환인이 세운 환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그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고전적 통치철학을 가졌으며, 오늘 날 북경-한반도와 그 북부를 총괄하는 동북아시아 지역-수밀이국(수메르)-바이칼호수 주변 국가-인더스 드라비다국-티벳 지역-오늘날 코카서스 지역의 국가, 소금이 나던 사해를 중심으로 한 가나안지역까지 총 9~12개의 제후국을 연방국 형태로 거느렸던 대제국이었고, 우리 (대)한(민)국이 바로, 오늘날 비록 2개로 쪼개져 있지만, 그 직계 후손이다.
여기서 논의의 전개와 관련하여 필자의 의도를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조선 제2기 환웅의 신시국 후반부터, 주로 상이한 종교, 정치 및 언어철학적 이유에서 분화․계승된, 한민족이 BC3000년경부터 생산해 온 2대 민족계보부터 정리해보자.
1. 하나는 환인의 순수한 환민족의 철학적 범주를 지킨 환웅-치우-치엑특-단군-동이족 국가라는 은의 멸망 귀족 기자-한족(漢族)인 위만-3부여와 3한-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의 4국시대-가야멸망과 일본 천황계보 형성-통일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계보이고,
2. 또 하나는, 복희-여와-신농-유망으로부터 국가를 선양 받은 셈족 계열의 황제 헌원 계보이다. 이 황제의 자리를 선양 받은 사람이 요나라의 요임금이고, 요나라를 선양 받은 사람이 바로 동이족의 후손이라는 순이고 순나라를 선양받은 사람이 하나라의 우이고 하나라를 정복한 사람이 은나라의 탕왕이고, 은나라를 정복한 나라가 바로 주나라이고 주나라를 정복한 나라가 진(秦)의 진시황이요-진시황의 진을 정복한 나라가 한(漢)나라, 즉 오늘날 중국인의 계보이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날처럼 한국과 중국이 형성된 원천은, 한민족의 활동근거가 지중해부터 유라시아 에 걸친 전역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축소․한정된 이후, 특히 BC4세기 말 한(漢)나라 시기부터이다. 즉 한나라시기부터 중국지역민은 문화우월적 또는 문화중심적 한족(漢族)이라는 문화이데올로기를 조작, 주변국들에 지속적으로 유포하고, 나아가 주변국들을 문화열등 변방국으로 몰아가는 역사가 계속되는 사이에, 변방국들 스스로 그러한 문화전략의 부정적 의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편승하면서 오늘날 한국과 중국과 일본 3가지 민족개념으로 정착시킨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장 피해자는 한민족의 직계후손인 대한민국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라마야나』와『마하바라타』가 고조선 제1기 환국시기의 거수국(제후국)의 하나이거나 수메르와 친연성을 가진 드라비다국 이후의 역사적 유산이라면, 서사문학의 성격상 당연히, 그 드라비다국의 정치철학적 종주국인 환국에도『라마야나』와『마하바라타』에 버금가는 훈교용 서사문학이 존재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필자는, 바로 우리민족의 상징인 구전민요 아리랑이, 특히 천부인 사상의 뜻풀이 및 해설서인 천부경의 삼신사상이 녹아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환인-환웅-단군신화 전반부와 연관된 구비서사문학의 유산의 일부로서, 환국(桓國)이후, 특히 고조선 제2기 환웅의 신시국의 치우천황이후, 제3기 단군의 단군조선 때까지 수 천년간 불려진 민중가요이자, 특히 천부인(천부경)사상이 담긴 국민훈교용 구전서사시의 일부라고 본다.
실제로 고조선 제2기 환웅의 배달(박달, 신시)국(BC3898~2333)은, 수메르어와 고대의 인도의 토착어 드라비다어가 암시하듯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표의(表意, 상형)문자이면서 표음문자인 옛 한글들(신지녹두문자 등 약 10여 개)을 창안했고, 특히 광대한 대제국의 통치 및 종교철학적 종주국으로서 구전적 지식의 문헌화와 동시에 보편 종교와 보편언어,『마하바라타』에 기록된 신성족의 씨받이를 위한 말희생제의처럼, 권력의 산실인 왕족의 씨의 생산․보존․보급․통제의 연금술적 기술 등등, 문화전략이 절대 필요했을 시기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도 의심 많은 혹자는, 길가메쉬와 바알과 아르또와 한국의 아리랑(예술)문화가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질문하리라. 그럼 다음을 보라. 단, 분석방법은 동서고금의 관련자료에 의거하므로 주의 바란다.
알다시피 구약성서의 배경으로서 가나안인(페니키아와 같은 아무르족, 오늘날 유대인)이 주장하는 최초의 역사시기는 BC6천년, 적어도 BC5250년경부터이다. 그 존재를 충분히 입증해주는 자료는 유명한 사해문서들, 즉 오늘날 시리아 서해안 고대도시 우가리트(라스샴라) 및 아마르나 점토판문서다. 우가리트 점토판에 의하면 인류의 아버지이자 최고의 창조신 엘(EL)이며, 그의 아내는 신들의 어머니인 아세라이다. 그러나 BC3000년경 수메르와 아카드 문화논쟁시기에는 그들의 권위를 이어받은 계약의 신 바알(Baal))신과 그의 아내이자 누이인 아나드 여신 중심으로 전개된다. 한국의『한(환)단고기』나 중국사서로 보면, 여기서 바알은 복희로, 아나드는 미노아의 수소의 도움을 받아 남편의 복수를 하고 국가를 성립시키는 여와로 보인다. 즉 한국 측 자료인『한(환)단고기』에는 복희와 여와는 고조선 제2기 신시국의 제6대 다의발 천황의 막내아들과 누이동생으로서 수메르 지역에서 키쉬(기주)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시련을 겪는 주인공으로 나타나고,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신 바알과 아나드 부부신으로, 중국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특히 수렵술과 주역의 원조인 하도(河圖)를 발명한 복희씨(伏犧氏)는, 나중에 자신이 세운 나라를 통치한 농경과 의약을 발명한 염제 신농씨(神農氏), 불을 발명한 수인씨(燧人氏)와 함께 하나의 신적 존재로서 문명의 기반을 닦아 인류역사를 시작한 고대중국의 창설자 3인(삼황, 三皇) 중 하나로 나타난다. 특히 동이족이 확실한 태호(太皥) 복희는, BC3528~3413년 재위에 있으면서, 그 아버지는 기본적인 선도(仙道, 참인간, 즉 仙人이 되는 길)를 확립했다는 배달국 5대 태우의 환웅천왕인데, 복희는 그 천황의 12아들 중 막내로서 팔괘문을 만들고, 당시 최고의 선인 발귀리(밝은 이, 광명인, 윷판을 만들었다는 자부선생의 선조)와 동문수학 동기로 쌍벽을 이루었다 한다. 복희는 어느 날 신선이 몸에 내려 삼신산(백두산, 청구 대풍산)에서 제를 올리고, 하늘가람(伽藍, 하늘사상을 연마하는 구도자의 거주지 일체, samgharama)인 송화강에서 괘도(掛圖)를 얻으니, 그것이 무궁한 변화를 가진 하도(河圖)인바, 이 하도는 3번 꺽고 3번 붙여 위치를 바꿔 추리하면 묘하게 삼극(三極)을 품는 괘도였다고 하는데, 이 하도에서 얻은 8괘로 64괘를 구성하여 소위 역(易)을 만드니, 이것이 바로 고조선 환역(桓易)의 최초이며 오늘날 중국의 주역의 원전으로서 역리(易理)의 원조가 되면서, 나중에 공자 등의 유학의 성립에 기초가 된다. 이 복희는 여동생 여와와 함께 중국서쪽 지역(수메르 지역)으로 가서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복희씨 나라를 세워 왕이 되려다 기득권세력에 밀려 죽음을 맞이하면서, 분노한 아내이지 여신(이난다)인 여와가 복희왕국을 완성하나 나중에 신농에게 넘긴다. 이 복희국을 선양받아 수립된 신농국의 제4대 왕조의 왕이 유망인 바, 만일 이 지역이 수메르 지역이라면, 이 유망이 바로 길가메쉬이다.
특히 BC2800년경 한민족의 핵심일원인 수메르족의 핵심터전이 메소포타미아(중국)지역인 탁록(혹자는 지금의 북경 부근)에 살며 길가메쉬(유망)를 도우면서도 호시탐탐 천황을 꿈꾸다가 장장 10년 간 치우와 73번 전투에 73번 전패한 훤원(나중에 皇帝)에게 1차로 도교를 전한 사람이 복희라고도 하는데, 알다시피 특히 복희는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족에게 60진법을 최초로 사용하게 했으며, 못의 모양을 본 뜬 설형(쌔기)문자의 원조가 되었으며, 동시에 오늘 날 한문의 원조인 용서(龍書) 또는 8괘문 또는 서계문(書契文)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문을 완성한 창힐의 아버지로 알려진 황제는 신시국 자부선생에 천부사상을 추가로 배워 소위 황노사상을 완성하는데, 특히 양생법(養生法)에 밝아 유명한 성전(性典) 소녀경(素女經, 백인미녀와 흑인미녀와의 성교기술이 담겨 있으며, 창힐이 기록했다고 함)의 주인공이다. 하나 더 알아 둘 것은 삼신교의 3․1철학원리에 기초한 10진법은 고조선이 사용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리스가 이어 받는다. 이제 이 길가메쉬 서사이야기를 신화적으로 해석해 보자.
어쨌든 바다의 신 얌과 지하(陰府)의 신 모드와 형제지간이었던 대지(풍요)의 신 바알(복희)이 지하(악)세계의 신 무트(Mut, 얌과 7두의 로단)에게 죽자, 그의 누이이자 아내이자 여신인 아나드가 수소의 힘을 빌려 무트를 죽이고 부활시키는 이야기가 바로 유명한 바알과 아나드 신화이고 아나드가 되찾은 키쉬국이, 중국신화에서 태양의 신-의약의 신-농업의 신 신농에게 양도되고 그 이후의 4대왕(유망)이 바로, 한민족의 전쟁신 치우와 치열한 접전을 벌린 길가메쉬, 즉 한국과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신농의 후손 유망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 시리아 지역의 우가리트 이슈타르테 신전이나 또는 흑해남부 아라리트 산정에 머물며, 제정일치의 최고총수 또는 교황인 환웅황제가 한 기능은, 애매하지만, 주변 모든 도시국가들이 공인하는 국제법인 보편적 종교철학적 이념으로 국제적 갈등문제들를 해결하는 중간자(연방정부)로서 역활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 결국 길가메쉬 신화는 치우와 유망, 그리고 취약한 유망을 도우며 어부지리를 얻은 헌원(중국의 시조 황제, 사르곤)간의 전쟁사이며 환웅(그 때도 단군이라 부름)의 국제분쟁중계사이며, 주인공 길가메쉬의 인생의 의미를 탐구과정이 담긴 구비서사문학이다. 그래서 연구자는 이러한 경험과 교훈이 바로『라마야나』와『마하바라타』에 녹아 있다고 본다. 아는 바대로 아르또와 브레히트는 공히 이 바알신화가 갖는 종교철학적 원리를 파악하고 각자의 삶의 은유적 이정표로서 연극이론 탐구자료 속에 융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길가메쉬가 적어도 BC28세기를 전후한 신석기 후기-철기 초기의 실제역사를 반영하는 구비서사시라면, 한민족사서에서 BC7197년 설립된 세계 최초국가인 환국(韓國, korea, Corée)이후의 고조선 전시기의 종교 및 통치철학이 담긴 서사문학 유산이 아리란이라고 보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물론 그 분명한 증거의 하나는 아리랑이란 말 자체가 천지인 삼재철학의 구체적 표현인 고한글 체계로만 그 의미가 설명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자료로보면, 파미르고원 동쪽에 포진한 고조선 제1기 환인(桓因)의 환국(桓國, 한국)은 9개의 연합씨족국가의 우두머리 국가로서 연방정부 및 수장(하느님, 안파견)의 기능을 수행하며, 환인은 신성왕(왕중의 왕)으로서 고도로 지혜로운 통치문화를 생산․보급하였다. 또 그 뒤를 창조적으로 계승한 고조선 제2기 환웅의 박달(신시, 배달)국은 오늘날 소아시아(터키 및 이라크 북부)에 포진한 국가로서, 특히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주변 수메르 평원, 지중해 주변의 수많은 도시국가들을 제후국으로 거느린 수장국가로서 도시국가간의 제반 갈등적 문제들을 지혜롭게 해결하되, 특히 박달국 전체의 종교/통치의 초목표에 심각한 도전이 되는 사안은 직접 연합도시군 편성권을 가지고 무력적 해결도 불사하는 막강한 연합국가 사령부의 상징어였다. 그러니까 길가메쉬 서서시의 진정한 연원은, 오늘 날 서구학자들의 설명과는 달리, 오늘날 아시아 전역을 포함하는 상고역사의 유물로서 그것을 밝힐 자료가 바로 한민족의 상고사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간단히 길가메쉬의 연원과 의의를 말하면, 고조선 환웅의 박달국시기, 적어도 BC2700~2300년까지의 고조선 제2기 신시국시의 문화영웅들인 복희-여와-신농-유망-헌원-환웅(단군) 사이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구비서사문학의 결정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상고시대의 고대동양사 관련 자료는 고조선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그 설명이 어떠한 것이든 미흡한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즉 길가메쉬 서사시는 염제 신농(神農)이, 키쉬(Kish, 중국 사기에는 기주, 冀州)왕국의 시조신들인 복희와 여와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후, 그 복희-와여-신농의 나라의 4대왕조의 왕 유망(길가메쉬)이 오만한 폭군으로서 힘만을 앞세운 정복전쟁으로 국제질서를 어지럽히자, 백성들의 천신 아누에게 구원요청, 아누가 창조여신이자 아내인 아루루(아라라로 일어면 아리라>알일아, 즉 알을 일으키는 원천지)에게 유망보다 더 힘센 남자 소호(엔키두)를 만들어 진압군 파견을 명령한 후, 전략에 빠진 소호가 오히려 유망과 친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유망은 반성은커녕 소호와 더불어, 태양신 샤마슈를 숭배하여 남성원리적 태양군 50인의 정예군 또는 50개 정예군단울 얻어, 다간(Dagan 또는 Dagon, 나중에 우리말로 단군 뜻으로 되는데, 이 때는 천신이자 황제인 환웅을 지칭)이 지원하는 여성원리적 태모신 아루루의 숲(삼림, 신전)을 악의 소굴로 규정하고 신성한 나무(신단수)를 베고 그 신전을 지키는 수호결사체 대장(괴물 용이나 뱀으로 표현된 Humbaba, 고한글로 보면 하늘 씨를 담은 대지를 감싸고 보호하는 원천)을 죽이며 도전하자, 당시 사원(환웅의 박달국)의 실질적인 여주인 이난나(Inanna, 또는 이난다, 아슈타르테, 여와)가 직접 나서서 길가메쉬와 화해를 모색하며 전략결혼까지도 제안하지만 차겁게 거절당하면서, 전쟁은 재미있게도 2003년 4월 미국연합군이 점령한 이라크의 바스라에서 바그다 드에 걸친 지역에서, 국제전으로 돌입한다. 환인국을 배반한 신농국 4대왕 유망의 강력한 후원세력은 실제로는 유망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던 신흥세력 셈(아카드)족 훤원(황제, 사르곤)이였다. 이에 화가 나고 위기를 감지한 이난다는 천신 안(AN, 아마도 환웅)에게 즉각 국제회의인 화백회의 소집을 청원하며, 최후의 비상카드, 즉 7년 간 지상의 한발을 불러온다는 강력한 폭탄을 가진 하늘의 숫소이자 움마의 왕인 르갈자게시(치우)의 81 정예군(단)의 파견을 요청한다. 이미 신농국 유망은 셈족의 수호신인 태양신 사마쉬에 기대어 사마쉬 수호결사체인 50개 정예군(단)으로 공격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환웅이 주제한 화백회의 결과가 나오자, 치우는 즉각 천부경의 원리를 따르는 친태모신적 곰족국가 연합군인 81개 정예군(단)을 소집, 출병한다. 여기서 81의 수리철학적 의미는 천부경의 철학적 의미를 상징한다. 그래서 르갈자게시(치우)가 유망을 도우는 헌원과 탁록을 중심으로 10년 간 73번 싸워 73번이기고 25년간 수메르 평원 도시국가들를 최초로 평정․통일시키지만, 25년간(?) 와신상담한 훤원이 최후의 74번째 도전을 하자 또 다른 탁록(중국 문헌은 북경근처라고 함)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우리나라 문헌과는 달리, 치우제국은 동쪽 변방 세력으로 밀려 몰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치우는 최초 메소포타미아 지역 통일제국을 세운 것으로 기록된다. 한편 황제의 도움으로 결국 승리는 했지만, 황폐화된 우르크를 보며 인생무상을 느낀 유망(길가메시)은 더 이상 왕을 탐할 기력을 잃고, 인생을 명상하는 신선이 되는 연금술적 불로초를 구하려고 모험을 시도하지만, 결국 그 노력마저 실패하면서, 드디어 신농의 4대 손 길가메시의 우르크왕국을 훤원에게 양도한 후, 종말을 고한다. 끝내 이 유망의 자리를 차지한 아카드 셈족 출신의 헌원(일설: 사르곤)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데, 이 나라가 바로 사르곤(헌원)의 아카드 왕국(BC2731~2316), 즉 메소포타미아 제국이며 나중에 요에게 선양된다. 그러나 역사는 도는 법, 그 후 황제(사르곤)의 후손 요가 다스리다가 선양한 순(舜)이 다스리던 BC2230년경, 치우의 손자이자 숲(수메르 여신전)의 수호국 결사체 대장 구데이엄(구테움, 특명 또는 티액특)이 아카드왕국에 도전, 승리 후, 남부 수메르 도시국가들을 정복한다. 이 구데이엄의 나라가 바로 BC2111년경 순수 수메르(한민족)인 우르나무가 세운 되찾은 수메르 왕조의 최초/최후의 왕조인 우르 3왕조인데, 우르(UR)를 수도로 삼는다. 순임금은 동쪽으로 이동, 우(禹)임금에게 BC2197 국가를 넘겨주고 하나라를 세우게 한다. 한 편 치우의 손자 구데이엄은 메소포타미아(아카드) 영토전부와 엘람까지 병합하나 BC2000년경 셈족의 일파가 주도한 고대 바빌로니아에 쫒겨, 티벳트 지역으로 패퇴하여, 포진한 후, 800년 간 통치한다. 이 시기부터 치우의 후손들이 중심이 된 고조선은 동북아시아 경영에 착수하여, 하나라-은나라-주나라와 중국중심지역 쟁탈전에 돌입하면서 오늘 날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우는 동북아 고대사가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치우의 후손이 세운 이 티벳국이 바로 오늘날 달라이 라마의 티벳의 선조국이며, 이 들의 지원을 받아 고조선은 북경북부 지역에 포진 한반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오늘날 그 티벳 주변의 소수민족들(현재 중국지역)이 한민족 문화와 친연성을 가지는 이유이며, 가까운 미래, 통일한국이 만주 동북삼성을 되찾으려 할 때, 공감대를 가져야 할 나라들 (위구르, 대만 등)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어쨌든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한다. 적어도 BC3000년을 전후하여 다민족이 우글거리던 메소포타미아-지중해 서안 지역에서도, 특히 우르크(지금의 바빌론 유적지)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로 발전된 지헤를 활용한 수메르 최초 왕국들 중, 특히 한민족 복희씨가 시작하고 그이 아내 여와가 완성하고 신농에게 물려 준 그 키쉬(기주)왕국(복희-신농국)의 제4대 왕조의 왕 길가메시왕(유망)가 주인공으로 되어있는 구비서사시 길가메쉬가, 아카드어로 어느 정도 문헌화 된 것은 BC28세기~24세기경 아카드 시대라고 공식화되어 있으나, 실제로 최근 발굴된 자료들로 볼 때, 우리 옛한글과 유사한 설형(쐐기)문자로 단편적으로 최초로 문헌화되기 시작한 것은 BC3000년경을 전후한 수메르 시기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길가메쉬 서사시는 이미 복희-신농의 키쉬왕국 이전에 존재했다가 후대의 역사가 반영된 것임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길가메쉬 신화의 최초 발생시기는 적어도 BC3000년 훨씬 이전이다. 그렇다면 길가메시 서사시는 이미 수메르 지역의 도시들에서 BC6000년경에 발생, 구전되다가, 유망-치우-헌원-환웅 시기의 역사적 흥망과 인생의 의미를 단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알다시피 이미, 지리학적으로 볼 때, BC 1만 5천년에서 1만 2천년경이면, 무려 500만년 간 거듭된 5번 이상의 빙하/간빙기들로 인해, 생존한 거대 동물이라곤 곰과 들소, 가축화 가능한 것들 이외에는 없는 환경, 즉 그야말로 신의 뜻인지, 수많은 지혜를 구전으로 물려받은 인간만을 위한 독점적 세상이 되었다. 더구나 그런 시기 이후에, 유목-목축-농경법을 활용하는 지헤로운 정착민족이 생겼다면, 게다가 무려 200만년~500만년간의 자연의 혹독함과 싸워 이겨낸 인류가 축적된 지혜(철학)에 대한 기억들을 구전할 여유와 이유가 진정 충분했다면, 길가메쉬-야마야나-마하바라타, 그리고 한민족 문화의 정수인 구전 서사가요 아리랑, 그런 것을 종합하여 고대그리스 신화가 탄생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실제로 최근 고조선 제1기 환국과 제2기 배달(신시)국의 원터전의 하나로 보이는 카스피해 주변지역과 사해근처, 또는 우가리트 지역에서 BC5500년경, 고도로 발전된 문화를 가졌던 신석기인들의 집터와 유물(태모신상)이 최근 발굴․증명되지 않았는가? 더 이상 우리의 오만한 상상력은 시원인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도 한국 및 일본 등을 방문하고 감동을 받은 후, 죽기 얼마전인 1980년대 초, 문자를 가진 인류의 역사는 BC500만년 그 이전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지 않은가?
3안: 그러나 연구자의 의견과는 달리, 몇몇의 합리를 추구하는 고고인류학자들은 적어도 BC6000경부터 아리안족이 외부종족과의 투쟁의 단적인 표현인『라마야나』, 그리고 그것을 확장하며 치열한 내부 종족간의 권력싸움을 통한 교훈을 반영시킨『마하바라타』의 연원을, 더구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길가메시의 연원을 알면서도, 분노할 정도로 형편없이 낮춘다. BC3000년경도 아니고 BC1000~750년 사이라고 한다. 연구자가 현재 가장 신뢰하는 조셉 캠벨도, 유감스럽게도, 일단, BC1000~750년경으로 보겠다고 하며 경험과학적 입장들에 찬성표를 던지고 있다. 그러니까 조셉 캠벨 등은, 특히『마하바라타』의 형성시기를, 혹자들(연구자 포함)의 주장처럼, 최대로 인색하게 친다고 해도, BC3000전후, 즉 고조선 제2기 환웅의 배달(신시)국(BC3898~2333) 제14대 치우(蚩尤, 慈烏支, 慈爲支, 2707~2598)천황 시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을 무시한다. 캠벨 등 인류학자들은, 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그 2개의 서사시의 연원이, BC1000~500년경 새로운 도시국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시기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연구자는 BC3000년경이면, 수메르의 길가메시신화가 문서화 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특히 근래 치우(蚩尤)시대의 금속문화의 신빙성을 인정한 중국의 상고대 금속문화연구 학자들처럼, 앙소문화/마가요문화의 영향으로, 세계 최초의 연금술적 철학/금속무기 제조의 대가였던 고조선 제2기 환웅의 배달국 14대 천황 치우의 신화가 사실이라면, 특히 고조선의 3부인철학이 담긴 옛 한글체계, 그리고 이 한글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복잡한 인도 산크리트어 문법구조를 염두에 두면, 고조선 세대의 탁월한 지도자들이 유포시킨 구전 시민교육 노랫말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아리랑 서사문학의 존재가정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럼 캠벨 등이 주장하는『마하바라타』의 연원으로 돌아가 보자. 어쨌든 캠벨은 그의 책 동양신화에서 고고인류학자 볼티머 휠러의 견해를 인용하여 2서사시의 연원의 추정근거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즉 1950년대 초, 인도 갠지스강 상류지역, 그러니까 지금의 델리에서 80마일 북동쪽의 하스티나푸라 봉분에서 발굴한, 토기(질그릇)가 아닌 도기, 즉 3가지 분명한 층화(層化)를 보여주는 연속적인 도기(陶器, 오지그릇) 중 마지막 2가지가, 예술치료적 전략이 요청되는 도시문명의 등장을 증거 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들이 바로『마하바라타』내용이 암시하는 시대배경과 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캠벨이 2개의 대서서시 형성연대라고 동의한 이 시기는, 우리나라로 보면, 고조선 3기 단군조선 중에서도 말기에 해당되어,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어쨌든 증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우선하는 법이니, 잠정적으로, 우선 캠벨이 설명한 그 3가지 연속적인 (채색)도기류(彩色陶器類, 토기가 아님)의 출토실태와 두 대서사시의 연원과 연관시킨 이유를 알아보자.
“1기: 구리로 만든 도구와 연관이 있으며, 도시생활이 충분히 발전되기 이전 존재한 것으로 보이는 BC1000년경의 황토색 도기(陶器)시대
2기: BC8~5세기의 청동기 회색 도기시대, 이 회색 그림도기는 줌나-겐지스 두개의 강이 만나는 도압(Doāb)의 중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면서도 서쪽의 펀잡, 동쪽의 우지자 지역까지 퍼진, 녹로에 불을 지펴 잘 구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그림을 보면, 직선-점선-동심원-나선-시그마선-만자형 무늬 등을 지니고 무늬 색깔은 대체로 검지만 붉은 것도 있다, 휠러는 이 문화시기를 아리안 족과 결부시키면, 아리안 인도침입 두 번째, 즉 펀잡지역에서 나와 인더스 계곡과 발루치 경계지역에서 포용할 여러 관념과 장인들을 취사 선택한 후, 갠지스-줌나 도압 중부지역을 아리안(인도유럽어족의 한 분파) 시대라고 정리했다.
이 시기는 브라흐마나 시기(BC10~8세기)와 주요 우파니사드 시기(BC8~6세기)로서 마하바라타에서 그 메아리가 들리는 <아자타샤트루>-<자이발리> 왕들이 위대한 전쟁을 이끌던 시기이며, 영국의 장미전쟁처럼, 귀족봉건시대의 종말을 결과했으며, 이 전쟁의 재앙 이후, 영웅(vīra)라는 용어는 전차투사가 아니라, 마치 자이나교 마지막 구세주인 마하비라(Maha-vīra, 위대한 영웅)처럼, 요기들에게 부여된 시기이다.
3기: 철녹법(鐵轆法)으로 제조되어 우아한 광채가 나는 강철재질을 함유한 검은 광택의 북방도기시대, 즉 BC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 특히 붓다(BC 563~483)에서 아쇼카 왕(BC268~232)에 이르는 시기의 도기시대. 즉 초기 붓다의 초기 가르침이 이루어지고 (AD16세기까지도 존재한 최후의 불교국가가 있었던) 비하르 지역에서부터, 아쇼카 직전의 왕들이 탈취한 서쪽 펀잡 북부(탁실라), 동쪽의 벵갈-오리사, 남쪽의 아마라바티-나시크 등에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 위의 고고학적 자료 중 고대인도에 정신분열증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예술치료적 장치의 하나로 위 2개의 대서사시를 사회적으로 긴히 요청할 만한 도시문화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실제시기는 언제일까? 캠벨은 위 2번째와 3번째 자료가 내포한 시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 당시의 도시는, BC300년 경의 고대 인더스 문명보다 퇴보하여, 벽돌-돌이 아니라, 오히려 목재로 성을 짓고, 거대한 들보와 통나무로 된 방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특이해 보인다. 특히 고고학자 휠러는, 위 2번째의 도기에 나타난 그림을 통해, 당시(BC10~6세기) 고대인도의 도시생활을 유추하면서, 특히 그러한 도시배경은 곧『마하바라타』가 불러일으키는 전반적인 배경과 어울린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의견에 조셉 캠벨도 일단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왜 그러한 도시문화 시기에『마하바라타』와 같은 대서사시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아르또의 잔혹연극론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지난 호에 언급한 바 있으나 한 번 더 캠벨의 의견을 들어 보자.
BC1000년대의 전반기 어느 시점에,『마하바라타』의 전반적인 도시배경을 연상시키는, 줌나-갠지스강 유역에 세워진 안락하고 조직화된 청동기시대의 도시생활이 생겨나고, 이어 몇 백년 사이에, 끝없이 넓고 기름진 토양, 그리고 편리한 하천교역으로 상업자본을 축적한 부자가 되었으나 질투(시기)심 많은 왕조 정치체가 십여 개 생겨났으며, 게다가 BC6~5세기 페르시아로부터 제련/제철산업과 상업적 감각을 활성화시킨 동전주조기술이 확산되면서, BC5세기 경 철기문화를 대표하는 강철녹로를 이용한 검은 광택의 도기복합문화가 일어났는데, 이상하게도 이 문화는 더 이상 변화 없이 수세기 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사이에 둔 다른 한쪽, 즉 인도의 뱅갈지역에서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이르는 전역에는 수백 개의 세속적 소통치 군주권력체(police)들이 나타나면서-탄생도 죽음도 없는 개인영혼의 불멸을 믿는 이전의 원시수렵인의 사고와는 너무나 다른, 즉 삶의 모든 측면이 천상의 영역에 의해 계시/제시되는 우주차원의 수학적 조화의 모형에 의해 다스려지는 BC3500년부터 1750년대까지의 사제국가의 관념과도 너무나 대조적이고 다양한-이윽고, 특히 BC10~6세기 경에는 급격히 세속이념들이 상승된다.
각 권력체의 왕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수도의 성곽-읍-도시들을 가지고, 장로위원회-시민의회-궁중호위대-사원성직자-소농-무역상인-가계-주거지, 번성한 지역에는 기념비와 시민공원 등이 들어서 분주한 작은 도시들을 영위한다. 이제 이 달라진 도시에서 상업자본을 축적하거나 기본적 생존조건 확보에 성공한 자들이 생겨나고, 물질(자본)이 야기시키는 욕망은 부풀려진다. 그러는 사이, 이전에는 없었던 여가와 여유는 이전에 없었던 질문들을 야기시키고, 이윽고 정신분열증을 앓는 자들이 속속 출현한다.
바로 이때, 한 무리의 추종자를 이끌고, 자신들만이 그 시대가 주는 깊은 어두움과 슬픔을 문제들의 원인을 정확히 알며, 그것들을 단번에 해결할 비술을 갖고 있다고 장담하는 유랑성자(流浪聖者)들이 등장한다. 인도지역에는 카필라(Kapila, 기원전 600년경), 고살라(Gosala, 기원전 535년 활동), 마하비라(Mahavira, 기원전 485년경 사망), 붓다(기원전 563-483년) 등이 그렇고, 그리스 지역에는 피타고라스(기원전 582-500년경), 크세노파네스와 파르메니데스(둘다 기원전 6세기에 속함), 그리고 “리본과 화환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불멸의 신으로 돌아다니며 기적을 행하는 자”인 엠페도클레스(기원전 500-430년경) 등이 그들이다. 물론 이들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에서, 좀 더 희미한 존재들, 즉 인간인지 신인지도 불명확한 파르슈바(기원전 872-772년?)와 리샤브하 등이 고대 인도에, 그리고, 고대그리스 지역에는, 이미 BC14세기 이전에 존재했다가 갑자기 어떤 사회적 요청으로 재부상 한 신비종교들의 주인공 오르페우스와 디오니소스, 데메테르와 코레(페르세포네) 여신들 등이 그들이다. 조금만 더 시공간을 확장하면, 인도의 자이나와 석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나아가 중국의 공자, 노자, 장자, 추연 등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럼 이러한 사상의 전개과정을, 아르또의 동방탐색과 관련지어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알다시피 아르또가 영향 받은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00년경 활동)는, 동시기의 인도의 붓다가 “불의 설법”에서 말한 것처럼, 삶을 영원히 존재하는 불이라고 말하였다. 실상 이 시기의 우주의 근본요소에 대한 가르침은, 비단 페르시아 양쪽, 즉 인도와 희랍이란 두 전통은 물론, 문헌상 볼 때, BC17세기 이후 BC4세기 사이에 극동지방(중국, 고조선)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의하자. 특히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인간에게 영적 영향을 준다고 믿은 우주의 근본요소에 대한 가르침이 4원소인 불, 공기, 흙, 물로 비유되고, 인도에서는 5원소인 에테르, 공기, 불, 물, 흙으로 나타난다. 극동의 고조선과 그것의 영향을 직통으로 받은 중국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러했다. 아르또 역시 1937년 8월, 이러한 시원적 신비사유에 사로잡혀, 스스로 점성술적 성자(신의 대행자)를 자처하고 곧 바로 아일랜드 신비여행을 떠난다. 말이 난 김에, 그러한 신비사유체계들이 아르또의 신비사유체계와 얼마나 유사한지 연관시켜 보자.
1937년 6월 아르또는, 마법적 사건들의 뜻풀이 법을 알기 위해 78개가 한 벌인 이탈리아식 점괘카드 타로(tarot)를 맹렬히 공부하다가, 계시(illumination)를 경험하고 아르또는 스스로 신의 선택을 받아 더 이상 인간 아르또가 아니라, 그의 제자인 장 쥬네가 그런 것처럼, 성자 아르또(Saint Artaud)라고 사유하기 시작한다. 그 해 7~8월 중순 사이에, 아르또가 발행한 소책자(brochure), 즉 저자명을 쓸 자리에 인간 앙또냉 아르또가 아니라, 단순히『계시 받은 자』(Le Révelé, the Revealed One)라고 표기된 이 책 속에서, 일종의 예언자 아르또는, 마치 15세기 페스트 환자를 치료하며 2층 마루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기록한 프랑스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처럼, 인간의 영혼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할 우주의 원소들, 즉 ‘신성한 불, 물, 흙, 그리고 성령이 일치해 있던 대기로 둘러 쌓인 신성한 별’, 이 우주적 4원소에 의해, 서구 합리주의적 기독교문화가 붕괴될 날(holocauste, 희생제물로 대량학살이 예견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했다고 예언했다. 이 책은, 멕시코 타마후마라족 마을로 들러가는 길 좌우로 늘어선 바위들의 숫자들에서 체험한 것처럼, 유태교 카발철학의 수리철학, 그리고 그것과 유사한 신비숫자 계산법, 그리고 이탈리아식 점괘카드 보는 법들로 되어 있지만, 사실 그것의 내면에는 아르또 자신이 이미, 마치 타락한 피조물에 대한 분노하는 야훼처럼, 강력하고도 시적인 분노감으로, 아르또 자신이 소문자 인간 아르또로부터 최종(절대)적으로 분리된 상태에 도달한 자(성인, 신의 대행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최후의 단절선언이 들어 있었다.
“난 지금껏 현실의 그림자 속에서, 아니 사회가 만들어 준 합리적 기준(형식)에 따라 맞추어 행동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건만, 결국 그 모든 합리적 형식(그림자)들 때문에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기껏해야 정신착란이나 주는 더럽혀진 환각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난 더 이상 그따위 이성주의적 허위에 속지 않기로 했습니다...끝내 이 세상의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떨어지는 사이, 난 어느덧, 내가 그토록 거부했던 무의미한 공허 속에 서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이 육체는, 이 세계를 낱낱이 살면서도 현실적인 것을 몽땅 구토해내는 묘한 놈입니다...”(아르또 전집, 7권, p173)
이로부터 1달 정도 후 아르또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발견한 서구인 개조용 종교가 태모신적 <예수-시바>교라고 밝힌다. 이 당시 서구 유일신적 문화에 대해 아르또가 느낀 공포스런 고독(분리)감과 절망과 슬픔과 분노는, 고대 인도의 자이나, 석가, 고대그리스 방랑성인들 디오니소스나 오르페우스 등 보다 더 심했으리라. 그러나 이 글에서 우리가 진정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아르또가 바로 1930년대 서구환경 속에서, 그가 느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BC7~4세기의 방랑성자들의 사유태도를 흉내내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BC7~4세기이전의 고대인도의 성자들만이 아니라 오르페우스-엘레우시스(데메테르, 코레)-디오니소스를 자처하는 신비주의자들도, 특히 1943년경 아르또가 간간이 화두를 꺼낸, 배아형성과정에 비유되는 ‘기관 없는 육체’ 개념으로서의 우주란(宇宙卵)의 이미지와 그 철학적 의미들을 알았고, 동시에 잔혹한 우주작용을 춤으로 형상화하는 파괴-무용-요가의 신 시바(Siva)의 의미들(창조-파괴-재창조)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고대한국의 부여-고구려-신라-가야국에서도, 수천년간 지속된 고조선의 허무한 붕괴로 인한 무질서(Chaos) 속에서, 이 기관 없는 육체 개념과 유사한, 태모신적 우주란(Cosmic egg)사상을 또 다시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실천한다. 물론 연구자의 생각에는, 한반도 주변에서 그러한 종교철학이 실천된 사례들 중 대표적인 것은,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의 종교철학들, 특히 초기 가야와 신라의 신도(神道)와 화랑(원화)사상임은 물론이다.
다른 동방지역에서 이러한 종교철학은, 이미 물을 근원자로 본 탈레스(기원전 640-546경)의 말에도 영혼을 소유한 우주가 정령들로 가득 차 있다는 관념이 보이고 있고, 4세기 플라톤도『티마이오스』에서 원형적 에너지체인 우주의 몸(Chora, Khora)은, 마치 고대인도의 자이나종교에서처럼, “모든 다른 생명체들이 몇몇씩 혹은 종류별로 각 부분을 이루고 있는 살아 있는 생물(유기체)”로 발현된다고 묘사하고 있다. 물론 고조선의 셋이 하나가 되는 소위 3․1철학의 원형인 삼부인(天符印, 天符經) 사상가들이나 중국의 공자, 노자, 장자, 연금술의 추연 등도 같은 사상계보에 있다.
지금까지 논의를 요약하면, 아르또가 모델로 삼은 고대 인도/그리스 방랑성자들이 출현하기 이전에, 크게 2개의 사유체계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인도의 2개의 서사시에 내포되었다는 것이다. 즉
① 하나는, 석기시대부터 BC1750년 이전까지의 원시수렵인들이 가졌던 개인영혼 불멸에 관한 관념들, 즉 영혼은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으며 단지 육체(베일)을 통하여 겹으로 된 몸 안에 들어왔다가 나갔다한다는 에니미즘적 생각들이 있었고,
② 그리고 기원전 1750년경 당시의 두 문화 중심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비탄과 의심과 의문의 문학이 증거해 주듯이, 정신 내지는 심리가 문제되기 시작한 도시발생시기인 기원전 1750년경부터 BC4세기경까지의 도시문화인이 가졌던 관념들, 즉 고대근동의 사제 국가 관념, 즉 삶의 모든 측면이 천상의 영역에 의해서 계시되고 제시되는 우주적이고 수학적인 조화의 모델에 의해서 다스려진다는 발전된 사고들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신의학적 문제가 심각하게 문제가 되고 치유법을 가진 유랑성자를 본격적으로 필요로 한 시기는 적어도 ②의 사유체계가 대략 BC1750년경부터 무려 격동의 1천년을 겪은 후가 된다는 말인데, 그 1천년 사이에, 방대한 영역에 걸쳐, 문명이 성숙함에 따라, 농촌적인 고풍의 성향이 강했던 청동기시대의 신성한 왕의 도시는, 서서히 세속적 왕의 화려한 도시로 변했음을 말해 준다.
그럼, BC1750년경의 청동기 도시와 BC750년경의 철기도시들 사이의 차이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1. 더 이상 백성의 대부분이 농민이 아니라, 상인, 전문적 도적, 고리 대금업자, 다양한 종류의 장인, 재판관과 서기계급, 선원, 대상(隊商), 여관업자, 광산 관리인, 군인 장교 등의 이름과 나란히 존재한다.
2. 그러한 비농민들에게 비옥한 토양을 기리고 숭배하는 농촌 종교의 낡은 제의나 승리를 위한 주술을 근거로 하는 신성왕 제의적 힘이 더 이상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최고선이 될 수 없게 된다.
3. 사냥이라는 낡은 필요성만이 아니라 토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약간 세련된, 그러나 여유 있는 계층의 출현으로 인해, 새로운 삶이 정신적 고통을 겪는, 도시인구가 출현하였다.
4. 이들은, 전쟁이나 다양한 격동하는 사회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여가, 상당한 사치품,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경증 유발에 필요한 여가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5. 그래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최고선을 탐색할 거대한 예비지대가 확립되고, 새로운 선지자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 선지자들은 자기 자신의 경험들 속에서 새로운 불안을 체험한 결과 새로운 지식체계를 가진 자들, 즉 세계사에서 최초의 체계적인 심리학자, 몇 가지 면에서 보면 최상의 심리학자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지식을 가진 유랑성자들이지만, 문제는 그들의 심리학적 탐색의 기본 도구가 그곳이 어디이든, 그 이전 과거의 지식탐색도구들, 즉 과거의 사제국가에서 전승된 낡은 신비제의적 지식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아르또 잔혹연극이론 구축의 모형이 된다. 따라서 그러한 탐색도구 역시, 필연적으로, 새로운 것이 압도적이지만, 동시에 과거와 똑같은 관념들, 즉 대우주와 소우주를 통일시키는 보이지 않는 조화와 균형에 대한 관념, 그리고 주술적 효과를 유도하는 공명의 개념 등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주관심사가, 새로운 경험적 지식들, 즉 더 이상 주술적인 것(날씨, 수확과 재화의 풍요, 그리고 장수)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것(심리의 이완과 조화)과 사회학적인 것(사제 전통을 대신하여 세속 전통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와 개인의 통합)이 됨으로써, 새로운 신화발생지대가 완벽히 확립된 시기는, 대략 그리스에서 호머가 활동하던 BC 750년경이다. 그러니까 아르또는 바로 1930년대 병든 서구 현대사회를 BC 750년경의 시대상황에 비유하고 자신을 하나의 신화적 영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다음은 BC750년경 철기도시 사회에 대한 캠벨의 말이다.
“제한되기는 하였지만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획일적 성격을 지닌, 그리고 밀접한 관련을 지닌 개인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인구, 즉 청동기시대의 후반부와 초기철기시대 단계에 있는 방대한 지역의 사람들이, 대체로 비교 가능한, 새로 출현하기 시작한 도시적 가정생활의 자국들(imprints)에 의해서 동시적으로 상호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동종의 심리학적 ‘포획들(seizures)'이, 예비신화발생지대 모든 곳에서, 심리적 관념과 실천들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 섬광처럼 빠르게 확산되었다.”
칼 케레니 역시, 특히 플라톤의 사상형성에 영향을 끼치고, 동시에 아르또 잔혹연극론 형성의 모형이 된, 적어도 기원전 6~7세기 그리스에서 급격히 새롭게 재유행한, 오르페우스 신비종교의 영적 통과(입문)의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족에 속박되어 있던 원시적 제의의 배경을 벗어나, 그때의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시대의 종교적 욕구에 맞게 수정한 자신들만의 예술을 수정하여 내놓으면서, 입문 의례의 의미와 성격이 저차원의 의례주의적 방향과 순수한 고차원의 영적 방향으로 분화되었다. 후자의 영역의 철학자들이 선구자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우주의 근원을 수로 본 피타고라스 학파, 후에는 여러 철학자들이 나왔다. 그렇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우주(자연)의 궁극적 비밀(아르케, 一者, 절대적 진리, ARCHE)을 지, 수, 화, 풍으로 보고, ‘리본과 화환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불멸의 신으로 돌아다니며 기적을 행하는 자’ 행세를 한 엠페도클레스식으로 행동하였던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도 그와 유사한 상황에 유사한 사회적 문제들이 야기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와 같은 서사예술의 영역들에 철학적으로 안착된다. 전(前)아리안 시대의 도시에서 나타나는 낡은 의례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방향으로 새로운 가르침, 즉 죽음에서의 재생, 금욕, 심리학적 초연, 신화적 동일시와 같은 근본 주제들을 제공하였다. 이 가르침들은 아마도 페르시아의 길과 상호작용하면서 토착적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널리 흩어져 있는 증거들로 보건대, 인도와 그리스에서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위치한 페르시아에서도 초기의 이원론적인 신화적 철학의 근본 모티브들이 갑자기 새로운 형태로 인도지역과 거의 동시에 출현하였고, 곧 바로 확산된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럼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치료비법 또는 사회치료비법을 가졌을까? 페르시아를 축으로 한 두 지역, 즉 그리스에서이든 인도에서이든, 그와 같은 성인(철학자)들의 가르침 속에서 아리안 초기신화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주제들이 많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과연 그들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는, 아리안 초기신화(유목민적 천사상)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다음과 같은 독특한 주제들이 많이 나타난다.
1. 고대 그리스 지역의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이 제기했던 근본적인 주제, 즉 무덤인 육체에 구속된 영혼개념과 금욕을 통한 해방
2. 나아가 재생의 바퀴에 대한 관념(윤회를 통한 업의 개념과 영원한 삶)
3. 페르시아의 길(조로아스트교의 교리)에 영향을 받은 지옥의 처벌을 받게 되는 죄
4. 엑스타시를 유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절대적 지식과 해방으로 나아가는 노력이 덕이라는 관념 등
여기서 꼭 하나 우리가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1935년 아르또의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잔혹연극 실험극『쌍씨 일가』에, 이 주제들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적어도 아르또는 자신을 BC1750 이전의 사유체계와 함께, 동시에 BC1750년부터 시작하여 BC750년에 그 절정상태를 온전히 드러난 여성중심적 사유체계의 부활적 계승자를 자처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곧 아르또가 자신을 현대 서구인의 정신병 또는 병든 문화를 교설․치유하는 종교적 성자로 보았다는 것의 증거이며, 동시에 그러한 사유체계의 산물인 BC 750년경의 고대 그리스/인도지역의 신비종교들, 즉 오르페우스와 엘레우시스, 디오니소스종교들, 그리고 인더스 시바요가 및 힌두복합종교, 나아가 그것의 예술적 표현인 인도(발리)연극 연구의 깊이와 폭이 우리의 상식을 넘고 있다는 한 증거이다.
여기서 일단 지면상, 아르또의 연극론과 옛한글 체계를 통해 한국(연극)예술시학, 즉 아리랑 시학 되찾기(1)는, 다음 호로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