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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래 음력 정초를 전후한 겨울철 놀이로 소년들 사이에 성행해 오는 제기차기는 그 기원이 꽤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중국에서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고안된 축국에서 제기차기가 연유되었다고 한다. 축국은 가죽주머니에 헝겊이나 부드러운 물건을 채워넣고 양편에 몇 길 높이의 대나무를 세워 그 꼭대기에 그물을 얹어놓고 7~8명 씩 편을 지어 가죽 주머니를 차서 위로 많이 올리는 편이 이기는 경기이다. 이러한 축국이 조선조에 들어와 한자어 축국에 우리말을 붙여 <적이>라 하다가 점차 제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보면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을 하다가 김춘추의 옷끈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축국이 단순한 오널날의 <제기차기> 정도라면 김춘추의 옷깃이 떨어졌을 리가 없을 것인 즉 당시의 축국이 공을 차고 뺏고하는 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격렬한 운동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찬다’는 공통성만으로 축국에서 제기차기의 유래를 생각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 이와 관련하여 놀이연구가 이상호씨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농경사회에서 김매기는 작물이 잘 자라게 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뿌리째 뽑아야 다시 살아나지 못하므로 김맨 주위에 뿌리가 뽑힌 잡초들이 질펀하게 뉘어 있다. 그 중에 잔뿌리가 많고 잎이 약간 달린 풀을 부모님과 같이 밭이나 논에 나온 아이들이 놀잇감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길을 가다 작은 돌을 위로 올려 멀리 찬다든지 나무토막을 차면 곧장 떨어지는 것과 달리 잎사귀 때문에 공중에 머무는 시간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여러 번 찰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원리로 풀에 납작한 돌을 매거나 뿌리를 물로 묻힌 후 굳혀 차다가 점차 엽전에 종이를 꿰어 오늘날과 같은 제기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축국과 제기차기는 놀이의 특성과 방법이 분명한 차별을 갖는다. 따라서 제기차기는 우리 조상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놀이로 그 유래를 규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