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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아저씨가 들려주는 7080 추억 여행
- 30년간 ‘농대 이발소’ 운영한 김명섭 옹
임은경(농학95,선구자취재기자)
이번 호에 만난 사람은 정말 특별한 분입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훌륭한 책을 펴낸 유명한 분이냐고요? 아님 뜻이 있어 귀농을 한 후 억대 연봉의 사업가로 변신한 멋진 성공 사례를 들려줄 참이냐고요? 아니, 아니죠. 이건 그 누구보다 평범한 한 이발사의 이야깁니다. 열다섯 살에 처음 가위를 잡아, 인생의 황혼을 맞은 지금까지 평생을 가위질 속에 살아온 한 남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으면서, 그 머리 숫자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을 듣고 간직하게 된 이발사. 농대에 다닌 남학생 중에 이분한테 머리 한번 안 깎아본 사람 있을까요? 심지어 가끔은, 여학생들까지 말입니다. 30년간 변함없이 농대생들의 헤어 스타일을 담당했던 그 양반, 학생회관 이발소 아저씨. 지금부터 아저씨가 엣지 있게 휘두르는 가위질 소리 따라 추억 여행을 한번 떠나볼까요?
군대를 다녀와서 이런 저런 사정으로, 혹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제적 후 복학하는 바람에 늦깎이 졸업을 하는 사례가 가끔 있지만, 제 아무리 학교에 오래 머물렀던 농대생이라 해도 이분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1974년부터 2003년까지 농대 이발소에서 수많은 농대인들의 머리를 깎았던 김명섭(69세) 옹. 그는 현재 수원 화서역 근처 H 아파트 앞 상가에서 개인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다. 매일 저녁 여덟 시까지 이발 손님들을 맞아 변함없이 바쁘게 일하는 김 옹은 일흔 살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고 활력이 넘쳤다. 삼십 년이나 일한 정든 일터 농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학생과 교수님들의 이름과 행적, 농대에서 일어난 세세한 사건들에 대한 그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하고 싶었다구. 학교가 서울로 이전만 안 했으면 지금도 농대에서 머리를 깎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김 씨가 농대 이발소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74년 11월이었다. 당시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장이 조수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 헌법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그 당시엔 방학이 되면 학교가 문을 닫았다. 이발소도 당연히 휴업이었다. 겨울 동안 일을 쉬고, 이듬해인 75년 봄에 이발소를 인수했다. 그로부터 삼십년이 지난 2003년 봄까지 그는 ‘농대 이발소 아저씨’로 불렸다.
“옛날 학생들은 기억할 텐데 그땐 학생회관이 정문 경비실 뒤쪽에 있었지. 빨간 벽돌 건물. 이발소도 처음에는 그 안에 있었어. 학생회관이 저 위에 강당 옆으로 올라간 것은 76년인가
77년쯤이었을 거야. (이 대목에서 95학번인 필자가 학교를 다닐 때 경비실 뒤편에 언제나 문이 잠겨 있던 을씨년스런 건물 하나가 기억 속에 떠올랐다. 인적도 드물고 어쩐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아 낮에도 잘 가지 않던 그……, 그 빨간 벽돌 건물이 학생회관이었다구요?) 자네 다닐 때 있던 학생회관은 처음에 기숙사였어. 내가 학교 있을 때 학생들이 자주 미국을 욕하고 하더라만, 사실 그 기숙사는 미국이 원조해서 지어주었던 것이지. 학생회관 건물을 포함해서 거기다가 처음에 기숙사 세 동을 지었어. 건설사 이름도 기억해. 극동 건설에서 지었지. 그거 지을 때 서둔동 사람들 중에 시멘트 한 포 안 훔쳐간 사람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했어. 한 포만 가져가면 그나마 양반이고, 우마차를 끌고 와서 열 포씩 싣고 간 사람도 있었지. 그거 가지고 가서 자기네 부뚜막도 짓고, 집수리도 하고. 그땐 학교에 담장이 없었거든. 아주 엉망이었지. 하지만 지금 시대 기준으로 그때를 생각하면 안 돼. 전쟁 직후 배고프고 힘들던 시절이었으니까.”
김 씨의 삶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열네 살인가 열다섯 살에 이발소 일을 처음 시작했다. 먹고 살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지금 어디 먼 나라들에서 어린이 착취한다고 그러는데, 그땐 우리도 똑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또래의 아이들도 모두 구둣방이나 양복점에 취직해 심부름 하면서 일을 배우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이발소 일이 올해로 55년째가 된다. 그중에 30년을 농대에서 보냈으니, 그의 기억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농대에 처음 개업했을 때 이발 가격을 물으니 그는 “담배 한 갑” 값으로 기억했다.
“그때 돈으로 220원이었나 250원이었나. 처음엔 하루 손님이 20명도 안됐어. 당시엔 장발이 한참 유행이었거든. 이발소는 어디든 장사가 잘 안됐지. 잘라도 귀를 덮은 모양으로 동그랗게 단발처럼 잘랐어. (비틀즈의 버섯머리를 생각하면 되나? 너도 나도 버섯머리로 농대 캠퍼스를 누볐을 우리 선배님들. 흐음…….) 그 유행이 언제부터 바뀐 줄 알아? 전두환이가 대통령 되면서 장발 검사 그만 해라, 미니스커트 단속 마라, 하니까 유행이 삽시간에 바뀌더구만. 우리 민족이 반골이라는 걸 내가 그때 확인했다구. 뭐든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이제 하라니까 그때부터 안 하더라구.”
그때부터가 이발소의 전성기였다. 하루 평균 5,60명의 손님이 들락거렸고, 손님이 특히 많은 토요일에는 하루에 120명의 머리도 깎았다. 학교 안이니까 값도 싸고, 김 씨의 이발 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나서 학생들 뿐 아니라 농촌진흥청 직원 등 외부 손님들도 적지 않았다. 80년 직후에는 데모하는 학생들을 감시하느라고 학교 정문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했지만, 88 올림픽 이후에는 그것마저 풀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영삼 대통령 때가 제일 잘된 것 같네. 그게 또 김대중 시절부터는 기울기 시작했어요. IMF 이후에 실업자가 늘어나니까 다 자영업으로 뛰어들잖아. 근데 만만하게 할 게 뭐가 있어. 그때 정부에서 미용사 자격증, 제빵 자격증, 자동차 정비업 등등 몇 가지 정해가지고 그 기술을 배우고 학원을 다니면 지원금을 줬다구. 그때 미용사 엄청 늘어났지. 미용사들이 이제 남자 머리까지 깎는 거야. 그것도 싼 값으로. 경쟁이 심해진 거지. 2001년부터 정말 안 되더구만.”
이쯤 되면 농대 이발소는 한국 현대사와 고락을 함께 한, 시대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한 말은 아닐 듯싶다. 수많은 농대인들의 가슴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이발소는 2003년 농대의 관악 이전과 함께 문을 닫았다.
“학교가 2003년 8월이면 완전히 이사 갈 예정이었으니까, 그 전에 4월 17일날 나왔어. 이전이 임박해서 나간다 하면 직원들도 불편하고 할 거니까 30년간 일했던 데 피해주지 않으려고 미리 나왔지. 근데 이발소가 없어지니까 재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이 여기 새로 개업한 데로 찾아와서 머리를 깎았어. 8월에 이사 가기 전까지 종종 그랬지.”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도,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인 주인도 서로 쌓인 정이 있었을 것이다. 김 씨는 “서울대 학생들은 다른 데 학생들하고 확실히 다르더라”고 잘라 말했다. 개업하고 나서 수원 지역 타 대학생 손님들도 많았는데, 행동거지나 예의범절이나 모든 것이 어딘가 다르더라는 것이다. 농대생들에 대한 그 나름의 애정의 표현이다.
농대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은 수십 년이 지나도 녹슬지 않은 세세한 기억력에서 드러난다. 알만한 농대 출신들 중에 그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수만 씨가 71학번인가 72학번인가 그런데 나한테 머리 깎으러 몇 번 왔었지. 잠사과 송지헌 아나운서는 68학번인데 75년도 여름에 코스모스 졸업을 했고. 경남 도지사 김태호 씨는 대학원 때 내가 머리 깎아주곤 했지. 당시엔 몸매가 빼빼하고 볼품없었는데 지금은 티비에 나오는 모습이 아이구 외모도 괜찮고, 많이 변했더구만. 그 사람이 김성수 교수(농촌지도과) 제자 중에는 제일 출세했다구. 권영길 씨는 60인가 61학번인데 학생 운동 하다가 제적을 당했지. 이해찬 씨처럼. 나중에 복학이 돼가지구 70년대에 조용히 와서 학교를 다시 다녔어. 그때 졸업을 했지. 그 후에 99년인가 2000년에 학교에 한번 와서 먼발치서 본 적이 있어. 강연을 왔는지 방문을 왔는지 난 잘 모르지. 마영일(현 경북대 농대 교수) 박사가 그 사람 동창이야. 그 친구는 계열이 다르잖아. PD 아니야. 권영길 씨는 NL이고. 나는 마영일하고 친했어. 둘이서 권영길 씨가 왔다 갔다고 뒷말을 했지. 노무현 대선 때도 난 권영길 찍었어. 우리 학교 학생이니까.”
“아니 아저씨가 PD, NL을 어떻게 아세요?”
함께 간 정근우(농화학 84) 선배가 박장대소한다.
“내가 다 알지 왜 모르느냐”고 아저씨가 오히려 핀잔을 준다. 머리를 깎으며 손님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별의 별 얘기를 다 듣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 중에는 전국적으로 일약 유명세를 떨쳤던 록 그룹 샌드페블즈도 있었다.
“잠사과 김창완은 뭐 잘 알지. 동생은 식품공학과 창훈이인데, ‘나 어떡해’는 둘째 창훈이가 작곡한 거야. 그때 샌드페블즈에서 노래 부르던 보컬은 이름이 여배영이었는데 무슨 과인지 모르겠다. 엠비씨 대학가요제에서 일등 했을 때 리드기타 치던 게 이영득인데, 그때 학교에 영득이가 둘이었어. 샌페 영득이하고 ROTC 하던 영득이하고. 그래서 샌페 영득이는 샌득이, ROTC 영득이는 알득이라고 불렀지. 샌페에 드럼치던가 오르간 하던가 ROTC 출신이 또 하나 있었고. 그때 대학가요제 사회를 이수만이 봤는데 자꾸 우리 학교 우리 학교 하니까 사람들이 뭐라 했다는 얘기도 있고.”
몇 년 뒤 김창완 씨가 하는 그룹 산울림이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했다. 김 씨는 반가운 마음에 학생들과 함께 TV 앞에 앉았다. 그런데 '아니 벌써' 어쩌구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영 듣기 이상하고 귀에 거슬렸다.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노래였다. “아니 저게 무슨 노래냐”고 한마디 했더니 옆에 선 학생들이 와아 웃더라고, 그러면서 김 씨도 웃음을 지었다. 그리움이 담긴 미소였다.
긴 세월만큼이나 스쳐 지나간 사람도 많았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언젠가는 삭발 투쟁을 한다고 이발소에 바리깡을 빌리러 온 학생도 있었다. 딱 하나밖에 없는 바리깡을 빌려주면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거절했다. 가끔은 여학생들이 온 적도 있었다. 앞머리를 잘라달라고. 미장원에 가면 앞머리만 잘라도 일반 커트와 똑같이 받기 때문에 이발소에 와서 부탁하는 것이다. 아저씨, 하면서 문간으로 고개를 쏙 내미는 여학생들은 다 불러 들여서 무료로 잘라줬다. 여학생들한테는 한 번도 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가 그 사람들 이름은 몰라도 얼굴 보면 다 알지.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프로에 수의대 출신 수의사들이 가끔 나오는 거야. 아이구 내가 옛날에 저 친구 머리 깎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지. 학생회 학생들은 구내 식당에서 밥도 사먹고 주로 학생회관 근처에 있으니까 더 자주 봤어. 학생회장, 부회장만이 아니라 무슨 부장 무슨 부장 하면서 직함도 많데. 학생회 친구들을 많이 알지. 또 누구? 아……, 김상진. 김상진 학생은 이발소에서 본 적은 없네. 68학번이니까 송지헌 아나운서하고 동갑일 텐데. 그 학생 죽을 때 육종인 선생님이 축산과 학과장이었는데.”
75년도는 내내 학교가 ‘굉장했다’고 김 씨는 회상했다. 이발소도 장사가 잘 안됐다. 김상진 죽음의 여파는 내내 학교를 술렁이게 했다. 학생이 머리를 깎고 있는데 다른 학생이 와서 왜 데모에 참석하지 않느냐며 뒤통수를 때리는 일도 있었다. 4월에 그 일이 있고 난 후 학교는 사십 며칠간 문을 닫았다. 이발소도 어쩔 수 없이 경제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5년 후에 학교에서 대대적인 장례식을 해주더라고. 꽃상여 만들어서 학교에서 자리굿도 했어. 그 친구 제삿날, 4월 11일에. 젊은 사람이 죽은 거니까 호상이 아니었는데도 굉장히 축제 분위기에서 장례식을 하더구만. 밖에까지는 안 나가고 학교 안에서만 하더라고. 나도 일하다 짬짬이 나가서 구경했지. 그날 정보과 형사들이 아주 쫙 깔렸었어. 버스로 학교 다 둘러싸고 전경이 4,5백 명 바깥에서 대기하고, 데모할까 봐.
여학생들이 상여 뒤를 따라갔는데, 여학생 하나가 지금도 기억나. 얼굴이 예쁘장하고 그래서 남학생들이 그 여학생을 많이들 주시했다고. 순천여고 나왔어. 나중에 토목과 친구하고 캠퍼스 커플이 됐어. 남학생도 아주 예쁘게 생겼어. 졸업하고 남학생이 한번 왔었어. 그 친구하고 결혼했다고 하더라고. 아이구 내가 이름을 몰라서, 원…….”
70년대는 학생 같지 않게 거친 학생들도 더러 있었고, 학교 행정도 지금처럼 체계가 잡힌 것이 아니었다. 어떤 학생은 전공이 적성에 안 맞는다며 수업에도 안 들어가고, 심지어 시험도 후배를 시켜 대신 치르게 하고, 그러고도 졸업을 하더라고. 이발소에 와서는 후배한테 ‘야, 너 관악에 몇 시 수업 시험 좀 대신 들어가라’ 그러더란다. 그때는 행정이고 뭐고 어딘가 좀 어수룩한 시절이었다고 김 씨는 말했다.
“그때는 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이 있었고, 일학년 때는 몇 주씩 군사 훈련을 받았어. 일학년도 관악으로 안 가고 수원에서 공부할 때야. 교양 수업을 관악에서 듣기 시작한 것은 77년부터지. 그러니까 동아리에도 신입생들이 많이 들어왔어. 처음에는 많이 들어오다가 몇 달 지나니까 다 빠져나가더라만. 학생회관에 연묵회하고 음악감상실하고, 연묵회 옆에 조경과 학생들 많던 무슨 그림 그리는 동아리였는데……, 아이구 생각이 안 나네. 하여간 그 학생들이 이발소에 많이 왔어. 연묵회하고 거기 그림 동아리하고 학생회관 벽에다 전시회 많이 했지. 서예 전시하고, 그림 전시하고. 그러면서 유신 헌법 시대가 지나고, 80년대가 지나고……. 80년대는 자고 일어나면 맨날 데모였어. 왜 데모했는지 나는 잘 모르지.”
이발소는 학생과 교직원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을 잡으러 온 형사들도 이발소에 와서 머리를 깎았고, 서울대 유학을 보낸 고향의 부모님이 올라와서도 들르는 곳이었다.
“호진(?)이 다음에 학생회장을 한 친군데 빼짝 마르고 전라도 광주가 고향이야. 그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그렇게 찾아오더라고. 그 부모님은 자식이 농대 학생회장이라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어. 운동권이라고. 어따 대고 얘기할 데가 없으니까 한잔하고 이발소에 와서 한숨을 쉬면서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는 거야. 형사들도 이발소에 많이 왔지. 약간 대머리 조 형사하고, 똥똥한 박 형사 하고. 그런데 술이나 마시고 일은 잘 못하더라구. 일이 힘드니까 저녁에 가면 술 퍼마시고 아침에 기운 없이 나와가지구선, 졸리니까 이발소 들어와서 빈 의자에 자빠져 자고 그랬어. 나가란 소리를 못하겠더라고. 한번은 학생을 잡으려고 매점 아줌마 옆에 서서 기다리더라구. 사진을 앞에 놓고 물건 사러 오는 사람하고 사진하고 비교를 하는데, 내가 보니까 사진 속 학생이 앞에 서 있는데도 이 형사란 인간이 알아보지를 못하는 거야. 에라, 또라이 병신. 어찌나 답답한지 내가 당장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학생들 잡혀갈까봐 암 말도 안했지.”
한때는 학생과 경찰이 아침에 교문 앞으로 함께 등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학생이나 학교 관계자가 아닌 외부인은 교문 출입을 차단당했다. 가끔 경찰이 교내로 들어와서 학생들을 잡아가는 일도 있었다. 양쪽에서 하나씩 팔을 붙들고 가는 모습을 김 씨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주로 학생들이 많지 않을 때였다.
이발소 손님들 중에는 물론 교수들도 있었다. 교수님들 중에서도 ‘부모님 잘 만난 사람들’은 안 오고 소탈한 교수님들이 많이 왔다고. 6.25 전쟁 전에는 교수가 부족해 농촌진흥청 등 여기저기서 교수를 차출(?)해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발하던 교수님들도 별의별 뒷얘기를 해줬어. 지저분한 얘기는 실망할 테니까 안 할게. 6.25 나던 당시에 서울대 교수가 스물다섯 명인데 그중에 열다섯이 남로당 박헌영 씨를 지지했었다고 하데. 어떤 교수가 그 얘기를 하다가, 아이고 실수했다고,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잖어? 그러니까 이런 얘기도 하는 거지…….”
교수님들 중에도 이곳에 개업 후 가게를 찾아온 분이 더러 있었다. 학생들 못지않게 교수님들과도 친했던 김 씨는 농대 교수 계보(?)를 훤하게 꿰고 있었다.
“농대 초대 학장님인 조백현 교수님 막내 사위가 저……, 잡초 전공하던……, 그래, 권용웅 교수. 또 이은웅 교수님이 조백현 교수님 제자지. 예산 농고 선생이었는데 대학원 공부하려고 들어왔다가 조백현 교수한테 잡혀서 교수가 됐다고 하더구만. 그때는 교수가 그렇게 부족했다니까. 허문회 교수도 조백현 교수 제자인데 농학과 졸업하고 진흥청에서 일하다가 들어왔고. 그분 참, 정직하고 불의와 타협 않고 사시는 것도 가정적이고 그랬는데, 작년 말에 돌아가셨지. 그분 후임은 고희종 교수, 이은웅 교수 후임이 이변우 교수고. 얼굴 동글동글하고 농담 좋아하던 건 채영암 교수. 교수 월급이 작다고 푸념하길래, 복 많은 줄이나 알라고 내가 뭐라고 해줬지.”
한번은 농대 교지였던 상록지가 이발소를 찾아와 인터뷰를 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아버지뻘이다 보니 학생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얘기도 많이 하게 됐다. 특히 교수님이나 어른들에 대해서 버릇없이 구는 태도, 어른들 앞에서 담배 피우고 인사 안 하는 것을 지적했다. 그런데 나중에 교수님들이 그걸 보고 와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이발소 아저씨가 대신 해줬다고 좋아하더라고. 당시 학생담당 학장보였던 김성수 교수는 독일에 가 있다가 상록지에서 그 기사를 본 것을 잊지 않고 와서 얘기할 정도였다.
“김성수 교수는 사람이 통이 크고 멋있었다구. 한번은 학생들, 대학원생들 데리고 수원 시내에서 술을 먹는데 당시 돈으로 12만원어치를 먹었다고 그러데. 돈이 없으니까 서울 농대 교수 누구라고 적어주고 다음날 오라고 그랬대. 그래, 다음 날 돈 준비해갖고 있다가 커피 한잔 끓여서 대접하고 그 자리에서 주었다고, 그 얘기가 한동안 유명했었지. 나중에 또 학장보였던 잠사과 강석권 교수는 학생들이 아무리 대들어도 나서서 뭐라고 하지 않는 아주 점잖은 분이었지. 교수가 뭐라고 하면 학생들이 더 따지고 드니까. 맡은 직책이 있다 보니까, 운동권 학생들하고 많이 부딪혔을 텐데 항상 점잖았지. 다른 교수들도 대부분 학생들을 점잖게 달래고 그런 분위기였어.”
하지만 모든 교수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인가는 학생회관 탁구장에서 어떤 교수가 학생의 머리를 때리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동물자원학과 한인규 교수였다. 교수와 학생간의 말다툼이 극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캠퍼스 내에서, 그것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 목격한 사람들은 충격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학생들 중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 씨가 보기에도 학생이 말을 너무 심하게 하더라고. 한 교수도 좀처럼 굽히는 성격이 아닌데, 그 학생이 운 나쁘게 하필 한 교수에게 그렇게 대드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기억에 남는 사람 중에는 농화학과 유순호 교수도 잊을 수 없다.
“그분은 제주도 출신인데 배도 안 나오고 나이 잡수셔도 그렇게 몸매가 예뻤어. 나한테 머리를 깎으면 번갯불에 콩 볶듯이 빨리 깎는다고, 늘 불만이라고 농담처럼 그랬지. 수원 세무소 안에 가면 옛날 아리랑 호텔이 있어. 거기 이발소에서 깎으면 좋대. 오래 만져주고 서비스도 좋고. 그런데 사모님이 구내 이발소에서 깎으면 아무 말도 안 하는데, 거기 이발소에서 깎고 가면 꼭 뭐라고 하더래. 왜 머리를 이상하게 깎아놨냐고. 그분이 학장 하실 때 이발소 시설을 해주셨지. 그전에는 전기세 때문에 에어컨도 못 놨어. 여기 구내 가게들에는 지원을 잘 안 해줬어. 서점은 200만원을 주고 바깥 전봇대에서 전기를 끌어다 썼어. 옥상에다 80만원 주고 동그란 안테나 설치하고. 서점이 시설에 돈을 많이 썼지. 그땐 가끔 학교에 도둑도 많이 들었어. 가게들에서 잔돈으로 쓰려고 바꿔놓은 현찰을 많이 털리고 그랬지. 과 사무실에서도 밤새 뭐 잃어버렸다, 그런 일도 자주 있었고.”
이제 와 삼십 년을 돌아보려니 할 말이 너무나 많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세월이 한 순간에 지나가버린 것 같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김 씨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듯 했다.
“농대에서 나오기 전에 국민대 이창현 교수(언론정보학부, 농대 83학번)가 사진기를 들고 찾아와서 이발소를 그렇게 찍어가더라고. 몇 십 년 후에 책으로 나올 거래. 언제는 또 티비를 보는데 임학과 이강호, 그 친구가 데모하는데 맨 앞에 앉아가지고 화면에 가득 나오더라고. 종렬네 집 이층에 살던, 형하고 아버지가 배농사 짓는다던 그 친구도 옆에 있고. 그 친구는 졸업한 뒤에도 시민 운동하다가 두 살 더 먹은 연상의 여학생하고 결혼을 했지. 천안하고 평택 사이에서 농사짓는 김덕일이는 나중에 전국농민회총연맹 무슨 직함 달고 티비에 나오더라고. 그런 걸 보면 신기하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그 친구는 수원 유신고등학교 나오고 원래 고향은 전라도 어딘데 모르겠고 늘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날 따랐지. 농가에서 이웃 아저씨 대하듯이 나한테 이런 저런 얘길 많이 했어. 곱슬머리 수원여대 학생하고 결혼해가지고, 나중에 애기 낳아가지고 데리고 오고 그랬지…….”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는 그 시간을 기억해줄 학교 캠퍼스도 없어지고, 이발소도 없어졌다. 졸업생들은 이발소에서 머리 깎던 때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고, 이발소 아저씨 김 씨는 또 농대생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