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 이세돌 9단과 상대전적은 아마 내 쪽이 좀 나을 걸요.
이 대답이 아주 묘하게 거슬린다. 상대전적 따위는 손가락으로 헤아려보지도 않았지만 대충 이긴 기억이 많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한 마디로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조회를 해봤더니 14전 7승 7패.
주거니 받거니 팽팽한데 한 판이라도 자신이 더 이겼을 거라고 기억하는 편리한 착각에 자신감이 묻어난다.
이세돌 바둑을 어떻게 보냐고 묻자 아주 간단하게 답한다.
|
|
구리 : 기세가 대단합니다. 공격력이 좋죠.
약점은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았으나 창하오를 비롯한 다른 중국 기사들이 ‘포석’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들이 자랑하는 중국기원 공동연구 시스템 레이더 망에 이세돌의 미세한 취약 부위가 포착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완벽하게 이세돌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중반 이후의 가공할 변환술을 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
창하오 : 이세돌은 좀 묘해요. 나는 사실 그에게 스트레스가 심합니다. 매 번 당하는데 극복하기가 어려워요. 이창호에게 연패를 당할 때와 느낌 이 전혀 달라요.
무지 아프다는 이야기다. 이창호한테 연패를 당할 때는 실력이 딸리니 그런가보다 하고 체념이나 영광의 수업쯤으로 치부한다지만 이세돌에게 당한 패배는 왠지 모르게 능멸당한 처참한 기분이라는 뜻.
중국 바둑의 대부 녜웨이핑은 이세돌 트렌드를 음식으로 표현한다.
녜웨이핑 : 이세돌뿐만 아니라 한국기사들 바둑이 다 까칠해요. 아마 매운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봐요. 사실 내 제자 구리도 쓰촨성 출신이거든요. 쓰촨 지방 음식도 매콤하지요.
중국 쪽에서 본 이세돌은 절대고수로 인정하지만 이창호의 인식과는 아주 다르다.
이창호는 이미 국경을 초월한 우상으로 대접한다. 그러나 이세돌은 극복해야 할 최강의 적(敵)으로 통한다.
바꿔 말하면 이창호는 바둑 한류의 주인공이고 이세돌은 바둑 공한증(恐韓症)의 대마왕쯤으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이세돌의 초식이 그처럼 상대에게 극렬한 통증을 주기 때문이다.
|
이세돌의 강펀치야 굳이 여기서 설명해봐야 사족에 불과할 테고, 그런 그의 무사적 기질 때문에 대륙과 반도의 바둑대전이 훨씬 뜨겁게 달아오른다는 점에서 우리는 환호하고 열광하는 것 아닐까? 이창호의 완전무결한 품격도 아름답지만 승부의 세계에서는 뭔가 좀 더 자극적이고 현란한 도발이 흥행에 득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세돌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강자와 중요한 대국에서 만난 이세돌이 토네이도 흔들기로 판을 어지럽게 만들자 상대가 끙끙 앓다가 초읽기에 몰렸고 그만 시간패를 당했다. 상대가 아쉬워하자 이세돌이 계시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상관없으니 계속 둬보자고 했다.
|
|
 |
골 때리는 상황이지만 너무 아쉬웠던 상대가 덥석 돌을 들어 미로를 풀어보자고 덤볐다. 결과는 더 참혹한 상대의 대마몰살이었다.
어찌 보면 복기였는지도 모르지만 이세돌의 강렬한 승부욕과 확신의 기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쨌거나 국내의 전문가들도 이세돌과 구리의 맞대결은 팽팽하다고 증언한다.
박영훈 : 구리의 포석 감각은 최고입니다. 누구와 두어도 50수까지는 항상 앞서갑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전단을 찾지 않으면 그냥 밀려버리기 십상이지요.
박정상 : 구리 기풍은 공격적이죠. 그러면서 끝내기도 완벽합니다. 이세돌과 기풍이 흡사합니다.
구리와 이세돌의 기풍이 닮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세돌은 이렇게 말한다.
이세돌 : 둘 다 공격적이죠. 하지만 저는 실리를 추구하는 공격형이구요. 구리는 공격을 위한 공격을 하는 것같더라구요.
무슨 차이일까? 미묘하지만 이세돌이 체감하는 차이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다시 중국 쪽 위빈 9단의 분석이다.
위빈 : 구리의 강점은 빠른 수읽기입니다. 현대바둑은 스피드 화되고 있죠. 빠른 자가 강한 겁니다. 구리는 판을 볼 때 불필요한 길을 지워버리고 최대한 빨리 본질을 찾을 줄 아는 천재예요.
아주 명쾌한 진단 아닌가?
위빈은 그러면서 구리의 약점도 짚어낸다.
위빈 :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강하지만 구리는 이창호의 평정심을 아직 따라가지 못합니다. 쉽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어요.
다소 산만하게 이세돌과 구리를 이쪽저쪽에서 쑤셔보았으나 양국의 기사들 시각을 종합해보면 두 라이벌에 대한 이미지가 걸러지리라 믿는다.
이세돌은 2008년에 이창호에게 4대1로 밀리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세계대회 4관왕으로 우뚝 섰고, LG배와 삼성화재배 결승에 올라 2009년에도 계속 영광의 풍차를 돌릴 것이다.
구리도 만만치 않다. 후지쯔배를 먹었고 도요타덴소배 결승에 올라 이세돌의 세(勢)에 맞설 것이다.
지난 7월 7일 제21회 후지쯔배에서 구리는 이세돌, 이창호를 차례로 꺾고 우승했었다.
그는 우승 직후 아버지의 묘소에 찾아가 이세돌, 이창호와 둔 기보를 불태우며 경건하게 예를 올렸다고 한다. 그만큼 성취감이 컸던 모양이다.
 ▲ 후지쯔배 8강전에서 격돌한 이세돌(왼쪽)과 구리. |
이세돌 : 아마 내가 좀 많이 졌을 걸요. 그래서 갚아야 할 빚이 있죠. 구리한테.
구리의 도발을 듣고 이세돌은 씩 웃는다.
그 역시 구리처럼 시시콜콜 상대전적 따위 괘념하지 않는 눈치다.
갚아야 한다는 말에 신뢰감이 팍팍 풍겨온다.
왠지 그가 갚는다면 갚아질 것만 같다.
양건 : 이세돌은 기세의 승부사입니다. 바둑이 아니라 주사위 게임을 해도 이세돌이 던지면 그 쪽에 걸고 싶어진다니까요. 희한하게. ^^
이세돌 : 하하하 주사위를 하는데 왜 저한테 겁니까? 그냥 쪽박찰 겁니다.
앞으로 바둑을 보라는 이야기다.
이세돌과 구리의 대결에 상대전적이니 기보를 검토하는 분석은 전문가들의 몫일 테고 필자는 2008년 별들의 전쟁을 지켜 본 인상을 느낌대로 두서없이 올려드렸다.
내일 이창호 VS 이세돌 편 또한 짜인 틀 없이 분방하게 소개할 예정이오니 다사다난한 연말에 재미삼아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