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학창시절
조율연(1968년입학,통36기)
1948년 1월 25일 충남서천군문산면 출생
1963년 대전공업고등전문학교 기계과 입학
1968년 대전공업고등전문학교 기계과 졸업
1983년 인하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2000년 한양대학교산업대학원 기계공학과 졸업
1968~1978년 대한석탄공사 근무
1978~1981년 보령제약주식회사 근무
1983~1994년 서울시지하철공사 근무
1994~2006년 서울시도시철도공사 근무
2007~2014년(현) ㈜설화엔지니어링 근무
1968년도에 제가 입학한 국립 대전공업고등전문학교(이하 ‘전문학교’라 함)는 이름이 좀 길고 생소한 학교였습니다.
당시 ‘공업 입국’의 기치 아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고급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신설한 학제로서 중학교 졸업후 입학하는 5년제 학교였습니다.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대전공업고등전문학교, 부산공업고등전문학교,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 등 4개 학교가 바로 그때 동시에 설립된 학교였습니다.
솔직히 저는 시골에서 외롭게 자라 그 학교가 5년제인 줄도 모르고 들어갔을 정도로 홍보나 준비가 덜된 상태에서 개교하였던 걸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공부한 삼성동의 캠퍼스는 대전공업고등학교(이하 ‘공고’라 함)가 사용하던 교사였습니다. 전문학교가 생기면서 공고는 1학년 신입생을 뽑지 않았고, 2학년과 3학년 학생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또 공고가 한 학년에 기계과, 전기과, 토목과, 건축과,광산과, 방직과, 자동차과 등 7개 과에 학생수가 500여명이었는데 비하여, 전문학교는기계과, 전기과, 토목과, 건축과 등 4개 과에 1개 과당 40명씩 모두 16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문학교 개교와 동시에 대전실업고등학교(이하 ‘실고’라 함)를 같은 구내에 설립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고가 사용하던 하나의 교정에 공고, 전문학교, 실고 등 3개 학교가 같은 구내에 몸담게 되었고, 학교도 다르고 학제도 서로 다르니 피차간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입학 후 처음 우리가 공부한 교실은 교정 서쪽 끝에 있던 실습실로 사용하던 건물이었습니다. 바닥은 거치른 콘크리트였고, 창문엔 방범용 창살마저 있던 그런 곳에서 아마 1년 넘게 상당기간을 공부하였을 것입니다. 실고가 이사 가고 공고가 3학년만 남은 시점에서야 임시교실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본 교사에 입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고가 자체 교사를 준비하고 이사 가던 날 공고, 공전, 실고 등 전교생이 운동장에 도열하여 환송식을하고, 마지막으로 마주보며 거수경례를 하던 그때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전문학교 입학경쟁은 대단하여 한참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충청남북도의 시골의 수재가 다 모이고, 대전 시내에서도 유수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실력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어떤 과는 10대1이 훌쩍 넘기도 하였습니다.
제복도 곤색 대학생 제복에 각진 모자를 쓰고, 여름엔 곤색 바지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어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그래서 다공고 선배들이나 시내에서 좀 노는 선배들한테는 몹씨 아니꼽게 보였을 것입니다.
시골서 올라오거나 공부 밖에 모르던 우리들은 공고 선배들이 그저 무섭기만 하였고 결코 다정한 멘토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전에서 좀 노는(?) 학생들이 많기로 유명하고 자부심이 높던 공고 선배들 입장에서는 학교가 없어진다는 허전한 마음에다가, 후배들이라는게 학제도 다르지 이상한 제복에 공부벌레들이니 마음에 들었을 리가 만무했을 것입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선배들은 교정을 지나가는 우리를 이유 없이 저 윗 층에서 불러 올려 기합을 주기도하고, 길을 스쳐 지나다가 갑작스레 후크를 냅다 지르는 그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내 고향은 충청남도 서천군 산골이었습니다. 제가 전문학교에 입학하던 그때까지 고향 외에는 다른 도시를 가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기차 여행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시골 소년(?)이 무슨 용기로 혼자서 달랑 외사촌형님 댁 주소 하나 들고 천리 타향 대전까지 기차를 타고 입학시험을 보러 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고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당시 한밭중학교 교감으로 계시던 외사촌 형님이 대동에서 사셨습니다. 1년 가까이를 그 댁에서 하숙비도 제대로 내지 않고 신세를 지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두고 두고 고맙고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대동에서 삼성동 학교까지는 약4km 이상 될텐데 대부분 걸어서 통학하였습니다. 여럿이서 떼지어 대동천을 따라 떠들썩하니 등하교하던 추억이 되살아납니다.
그 후 자취를 하기 위하여 오정동으로 이사 가던 날 버스를 태워주지 않아 외갓집 조카들과 함께 책상이며 이불이랑 책보따리를 메고 지고 5km도 넘는 오정동까지 걸어서 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중 한 분은 불행히도 군에 가서 사고로 전사하였고, 한 분은 지금도 가끔 만나 산에도 가고 소주 한잔하며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며 추억에 젖는답니다.
당시 오정동은 시골마을 그대로였으며 순박한 동네 처녀들이 우리 자취방에 장난으로 돌을 던지곤 하여, 같이 자취하던 공부 밖에 모르던 친구한테 죄없는(?) 제가 눈총을 먹곤 하였습니다.
학교 서쪽 실험동 사이에 작은 방 한칸 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학교 조교(?)로 있던 선배 한 분과 오래 전에 공사감독 중 사고로 삼십도 되기 전에 작고한 유승래군 이렇게 셋이서 자취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학교 구내에 살면서 지각을 맡아놓고 하여 우리 내용을 잘 아시는 선생님에게 엄청 꾸중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20대 전후의 그 젊은 시절에 5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도 긴 긴 시간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세상 물정 모르고 무지개 빛 꿈에 부풀었던 시간들이 지나고, 우리들에게 다가온 현실은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전문학교가 고등학교도 아닌 것이 대학도 아닌 것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어정쩡한 신설 학제라, 3학년을 마치고 대학을 가고싶어도 학력 인정이 되지않고, 일반 고등학교로 전학도 여의치 아니하였습니다. 중학교 때 같은 반에서 우열을 다투던 친구들은 유수한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서울의 명문대를 목표로 입시준비에 열을 올리는데, 우리는 별로 적성에도 맞지 않는(대부분이 괜시리 그렇게 생각했다) 선반과 밀링을 돌리고, 목형과 주물을 만들고, 자동차를 분해조립하고, 제도를 그리고 등등 억지로 끌려다니는듯한 심정이었으니 실습시간이 정말로 고역이었습니다. 그 때도 성실한 많은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 열중하였으나, 일부는 자퇴하고, 일부는 검정고시로 대학입학을 준비하기도 하고, 일부는 군에 입대하고, 나머지 상당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케이스 중에서도 중증에 속해 수업일수가 한참이나 모자라 졸업도 못할 뻔한 것을 은사님들의 지극하신 도움으로 무사히 졸업을 하게되었습니다.
나름대로의 역경과 방황을 극복하고 졸업을 한 친구들은 오직 실력 하나로 당시 총무처, 서울시, 충청남도, 철도청, 한국전력 등 어디서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은 오직 당시 열성적으로 또한 친 형님같은 자애로움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신 은사님들과 모교의 은덕이라 생각합니다. 50여년 전의 그리운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 시절 이야기를 다하려면 끝도 없겠으나 입학 당시의 에피소드를 위주로 하여 기억들을 되살려 보았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