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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迎鳳書院記 後改川谷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 뒤에 천곡서원(川谷書院)1)으로 고쳤다
昔在三代之隆, 教法極備. 家有塾, 黨有庠, 州有序, 國有學, 蓋無適而非學也. 降及後世, 教壞而學崩, 則國學鄕校, 僅有文具, 而家塾黨庠之制寥寥焉.
옛날 3대(三代)의 융성할 때, 교법(敎法)이 극히 잘 갖추어져서 가(家)에 숙(塾)이 있고, 당(黨)에 상(庠)이 있고, 주(州)에 서(序)가 있고, 국(國)에 학(學)이 있었으니, 가는 곳마다 학이 없는 데가 없었다. 후세에 와서 가르침과 배움이 무너져 국학과 향교는 겨우 형식만 남아있을 뿐, 가숙(家塾)・당상(黨庠)의 제도는 전무(全無)하다.
*敎法(교법):가르치는 방법. 塾[글방 숙], 庠[학교 상], 文具(문구):문식(文飾). 실속은 없이 겉만 그럴듯하게 꾸밈. 寥[쓸쓸할 료{요}]. 寥寥(요료):외롭고 쓸쓸한 모양. 공허한 모양.
至使篤志願學之士, 抱墳策而無所於歸, 此書院之所由以起也. 夫書院之與家塾黨庠, 制雖不同, 義則同歸, 其有關於風化也甚大.
그러므로 독실한 뜻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로서 책을 지고도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서원(書院)이 생기게 된 이유이다. 대개 서원이 가숙·당상과 더불어 그 제도는 비록 같지 않으나 의미는 동일한 것이니 그 모두 풍화에 관계됨이 매우 크다.
*至使(지사):~하게 됨. ~한 결과가 됨. 墳[무덤 분]. 墳策(분책):전적(典籍). 風化(풍화):풍교(風敎).풍속과 교화.
故知道之士, 願治之主, 莫不於是而拳拳焉. 所以中國書院, 鼎盛於近古, 我東書院, 亦昉於今日, 皆所以廣教思,敦化原也. 而其有廟以祀先賢者, 則其於崇道作人之方, 尤爲備也.
그러므로 도를 아는 선비와 선치(善治)를 원하는 임금이 여기에 정성을 다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중국의 서원이 근고(近古)에 성행하고 우리나라의 서원 역시 오늘날에 시작되는 원인으로서, 이 모두가 가르침의 사고를 넓히고 교화의 근원2) 을 독실히 하는 것이요, 그 사당을 세워 선현을 제사하는 일은 도(道)를 높이고 인재를 진작시키는 방법에 있어 더욱 구비된 것이다.
*拳拳(권권):참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지키는 모양. 鼎盛(정성):흥성함. 창성함. 昉[마침 방]:동이 트다, 시작하다. 비롯하다. 敎思(교사):교화하고 사색함. 《역(易)》 「임(臨)」 “象曰 君子以敎思無窮”이라 하였다.
嘉靖三十有四年, 象山盧侯慶麟出牧于星, 治績甚著, 而尤以作人材․興教化爲急務, 且以本州居一道之中, 山川秀美, 異材之出, 前後相望焉.
가정(嘉靖) 34년[1555]에 상산(象山)3) 노경린(慮慶麟)4) 사또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와 그 치적이 매우 드러났는데, 더욱 인재를 진작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다. 또 본 고을이 한 도(道)의 중앙에 위치하여 산천이 수려하고 뛰어난 인재의 배출이 전후에 잇닿았다.
*相望(상망):서로 바라봄. 끊임없이 이어짐을 형용하는 말. 곧 매우 많음을 이른다.
其尤者有若李文烈公兆年, 當亂世事昏主, 能奮忠竭誠, 犯顏諫諍, 不憚逆鱗之禍, 及其終不可回, 則飄然脫屣, 匹馬還鄕, 以全臣節.
그 중에도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5) 같은 분은 난세를 당해 혼암(昏暗)한 임금[충혜왕(忠惠王)]을 섬기면서도 능히 충의를 분발하고 정성을 다하여 면전에서 직간하며 역린(逆鱗)의 화6) 를 꺼리지 않았다. 급기야 끝내 임금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어서는 과감하게 벼슬을 버리고 필마로 고향에 돌아와 신하의 절의를 온전히 하였다.
*犯顔(범안):상관의 안색(顔色)에 개의치 않고 간(諫)함. 憚[꺼릴 탄], 飄[회오리바람 표]. 飄然(표연):바람처럼 재빠른 모양. 초탈한 모양. 屣[신 사]
有若李文忠公仁復, 體質弘重, 文學高古, 名聞中華. 其遭亂則建討賊之義, 於逆髠則有先見之明, 而又能善處於二傲弟之間, 皆有補於名教.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7) 같은 분은 체질이 후중(厚重)하고 학문이 고고하여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들렸는데8) 난을 만났을 때에는 적을 토벌하는 대의를 세웠고, 역곤(逆髡:辛旽의 叛逆)에 대해서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으며 또 거만한 두 아우9)의 사이를 원만히 처리함으로써 모두 명교(名敎:유교儒敎)에 도움이 있었다.
*髡[머리 깎을 곤], 傲[거만할 오], 名敎(명교):명분(名分)을 중시하는 예교(禮敎).유교(儒敎).
其在隣邦而往來, 有若金先生宏弼, 身任道學之倡, 爲近世儒宗, 則寔有功於斯文, 慨然欲於其境內, 依山林,卽閒曠, 建置館宇, 以祀以養, 庶可以作新乎多士, 闡揚乎聖化矣.
그 이웃 고을에서 서로 왕래한 분으로서 김굉필(金宏弼)10) 선생 같은 분은 몸소 도학의 창도를 맡아 근세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니 이는 모두 사문(斯文)의 공로를 끼친 분들이다. 이에 개연한 마음으로 그 경내 산림이 우거진 한적한 곳에 관우(舘宇)를 지어 선현을 제사하고 후진을 가르치고자 하니, 많은 선비를 진작시키고 성화(聖化)를 천양할 수 있을 것이다.
*曠[밝을 광], 한광(閑曠):땅이 넓어 묵힘. 또는 그러한 땅. 한광지(閑曠地)=공한지(空閑地). 建置(건치):건설(建設)함. 作新(작신):바꾸어 새것으로 만듦. 환부작신(換腐作新). 闡[열 천], 揚[오를 양], 闡揚(천양):드러내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
歲戊午八月, 侯卽釋奠于先聖先師, 州之文士咸萃焉. 齊行合辭, 以書院爲請, 侯於是嘉與僉同, 乃相厥宜, 得地於古碧珍國之墟迎鳳山之趾, 伊水經其南, 雲谷在其東, 其中窈而深, 廓而有容.
무오년[1558] 8월에 고을 사또가 선성선사(先聖先師)에게 석전(釋奠)을 올리자, 고을의 문사들이 모두 모여 이구동성으로 모두 서원(書院)을 지을 것을 요청하였다. 사또는 이에 기꺼이 동의하여 그 마땅한 곳을 물색하여 옛날 벽진국(碧珍國)의 유허인 영봉산(迎鳳山) 기슭에다 터를 잡았다. 이수(伊水)가 그 남쪽을 지나고 운곡(雲谷)이 그 동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안이 으슥하고 깊으며 또 확 트여 용납할 만하였다.
*釋奠(석전):예전에 학궁(學宮)에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올리던 제례(祭禮). 齊行(제행):똑같이 행동함. 嘉與(가여):장려하고 우대함. 장려하고 도와줌. 僉同(첨동):모두 찬동함.
乃因故廢佛寺之基, 滌祓而新之, 經始於是秋, 至明年己未而功告訖. 凡爲屋五十餘間, 正堂曰 “誠正”, 東齋曰 “克復”, 西齋曰 “敬義”, 又有 “高明”之樓, “風詠”之壇, 而總名之曰 “迎鳳書院”.
이에 곧 옛 절터를 이용하여 그곳을 말끔히 새로 닦아 이 해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기미년[1559]]에 이르러 완공을 보게 되었는데, 모두 50여 칸이다. 그 정당(正堂)을 ‘성정(誠正)’, 동재(東齋)를 ‘극복(克復)’, 서재(西齋)를 ‘경의(敬義)’라 하였으며, 또 ‘고명루(高明樓)’와 ‘풍영단(風詠壇)’이 있어 이를 통틀어 ‘영봉서원’이라 하였다.
*滌[씻을 척], 祓[푸닥거리할 불]:부정(不淨)을 없애다.
乃於院東, 立祠廟若干楹, 以奉三賢之祀. 乃定祭式, 乃簿物品, 庖廩門墻, 旣備旣鞏, 土田臧獲, 旣優旣充. 旣又貿書千餘卷以藏之, 立爲學規, 督率有方, 章甫雲集, 濟濟乎洋洋乎厥有其緒焉.
서원 동쪽에 및 칸의 사묘(祠廟)를 세워 세 현인의 제사를 받들며 제식(祭式)을 정하고 물품을 치부하게 하였다. 주방 · 창고 · 대문 · 담장 등이 모두 구비되고 견고하며, 토지와 수복(守僕)이 모두 넉넉하게 갖추었으며, 또 1천여 권의 서책을 사서 간직하였다. 학규(學規)를 세워 감독하고 통솔하기를 법도 있게 하니 선비들이 운집하여 그 성대하고 힘찬 모습에 질서가 있었다.
*楹[기둥 영], 簿[장부 부]:등록하다. 庖[부엌 포], 廩[곳집 름{늠}], 臧[착할 장], 臧獲(장획):노비를 천대하여 이르는 칭호. 貿[바꿀 무]:사다, 督[살펴볼 독], 督率(독솔):감독하고 통솔함. 章甫(장보):유생(儒生). 濟濟(제제):많은 모양. 가지런하고 아름다운 모양.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모습. 緖[실마리 서]
嗚呼. 侯於是舉, 可謂任之勇而力之勤, 慮事周而及物遠矣. 雖然, 上國之於書院, 必擇儒先之知道者, 爲之山長, 主盟以倡率, 故道術不分, 而學者知所趨矣.
아! 사또의 이 거사(擧事)에 대해 참으로 책임에 용감하고 노력에 근실(勤實)하고 일을 염려함에 주밀(周密)하고 사물에 끼치는 영향이 원대하다 하겠다. 비록 그러나 상국(上國)에서는 서원에서 반드시 유선(儒先)으로서 도를 아는 이를 선택하여 산장(山長)으로 삼아 일을 관장하며 통솔하였기 때문에 학술(學術)이 분산되지 않고 학자가 추향(趨向)할 바를 알게 되었다.
*及物(급물):은혜가 만물에 골고루 미침. 儒先(유선):학자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 主盟(주맹):어떤 일을 발의하고 주관함. 道術(도술):도덕과 학문. 문장과 도덕. 불분(不分):한 곳으로 모임. 趨[달릴 추]
若吾東方, 則院教新興, 而此典未講, 儻或入院之士, 爲學之方, 不幸而不出於古人爲己之學, 而惟科目譁競之事, 是尙是務, 則雖日從事於書林藝苑之中, 而求邇聖賢之門墻, 比如適越而北轅, 反之於心而無得, 揆之於事而太乖, 豈不可畏之甚耶?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서원의 가르침이 새로 일어나고 있으나, 이 제도가 밝혀지지 않아, 간혹 서원에 입학하는 선비로서 학문하는 방법이 불행하게도 고인들의 위기지학(爲己之學)11) 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과목(科目:과거시험)으로 경쟁하는 일만 숭상하고 힘쓰니, 비록 날로 서림(書林)・예원(藝苑)에 종사하더라도 성현의 문에 가까이가기를 구하기란, 비유하면 마치 월(越)나라로 가는데 북행(北行)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마음에 돌이켜도 얻지 못하고 일에 헤아려도 너무나 어긋나니 어찌 두려워할 만함이 심하지 않겠는가?
*儻[빼어날 당]:혹시, 儻或(당혹):아마. 혹시. 가령. 譁[시끄러울 화], 藝苑(예원):문학과 예술이 모인 곳. 邇[가까울 이], 適[갈 적], 轅[끌채 원], 揆[헤아릴 규], 乖[어그러질 괴]
嗟乎. 擇里擇術, 孔孟之深戒, 爲今之士, 科舉之習, 雖不能全廢, 其視聖賢爲己之學, 正心修身之道, 則內外本末輕重緩急之序, 判然如霄壤之不侔矣.
아! 거처를 가리고12)내외 · 본말 · 경중 · 완급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 가지런하지 않는 것과 같이 분명하다.
*判然(판연):확실하게 드러나 있는 모양. 霄[하늘 소], 侔[가지런할 모]
學者誠能審擇於此, 而勇決其取舍, 以其孳孳嚮道之誠, 易其汲汲馳外之心, 本之於性分, 而求之於方冊, 則凡古昔聖賢一言一行, 皆可師法, 而況於此邦三賢忠義之實, 道德之光, 無異於親炙之者乎?
학자가 진실로 능히 이것을 살펴 선택하여 과감히 그 취하고 버림을 결정하여, 도(道)로 향하는 부단한 정성으로써 과거(科擧)에 급급한 마음을 바꾸고, 자신의 성분(性分:性品)에 근본하여 서책에서 구하면, 옛 성현의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실이 모두 모범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이 지방 세 명현의 그 진실된 충의와 빛나는 도덕이 성현에게 친히 배운 자와 다름이 없음에 있어서랴.
夫忠義道德, 本非二致, 而道德爲之本焉, 則服《小學》以培根本, 遵《大學》以立規模, 力持誠敬而發揮六經, 以期至於聖賢之域, 此金先生爲學之大略也.
대개 충의와 도덕은 본래 다른 것이 아니고, 도덕이 충의의 근본이 되니, 《소학(小學)》을 실천하여 근본을 배양하고, 《대학(大學)》을 준수하여 규모를 세우며, 성경(誠敬)13) 을 힘써 유지하여 6경(六經)을 발휘(發揮)하며, 성현의 경지에 이르기를 기대하는 것이 김선생의 대체적인 학문 방법이다.
*二致(이치):일치하지 않음. 다름. 發揮(발휘):재능이나 능력 따위를 떨쳐 나타냄. 六經(육경): 중국의 여섯 경서. 《역경·서경·시경·춘추·예기·주례》.
爲仁由己, 有爲若是, 眞知而不眩於空言, 實踐而不騖於他歧, 睹諸扁而如臨履, 瞻祠宇而想函丈, 麗澤相資, 仞山莫虧, 則高者可入室而升堂, 下者猶不失爲吉人脩士, 處則正家而表俗, 出則匡國而濟時, 斯無負立院養士之本意矣.
인(仁)을 하는 것이 자신으로 말미암으니,14)15) 사당을 쳐다보고 스승을 생각하여 그 은택을 서로 힘입으며16) 산을 쌓아 올리듯 하는 공을 무너뜨리지 않으면,17) 고명한 자는 성현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18) 낮은 자도 오히려 좋은 사람과 훌륭한 선비가 됨을 잃지 않을 것이다. 물러나 있으면 가정을 바루고 세속의 모범이 되며, 출사(出仕)하면 나라를 바루고 시대를 제도(濟度)하니, 곧 서원을 세워 선비를 기르는 본의(本意)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眩[아찔할 현], 騖[달릴 무], 歧[갈림길 기], 睹[볼 도], 虧[이지러질 휴], 修士(수사):조행(操行)이 깨끗한 선비. 表俗(표속):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됨을 이르는 말.
若昧於一念之差, 而終歸於千里之繆, 讀書, 惟記誦之是力, 綴文, 惟剽竊之爲工, 薾然終日, 役心於利之一字, 則其終身所役者, 亦不過此一字而已矣.
만약에 한 생각의 차이에 어두워 끝내 천리의 어그러짐에 귀착되며, 글을 읽을 때면 오직 기송(記誦)만을 힘쓰고 문장을 엮을 때면 오직 표절만을 능사(能事)로 삼아 나약하게 온종일 이(利)의 한 글자에 마음을 쓰면 종신토록 힘쓰는 일 역시 이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繆[얽을 무]:잘못되다[謬], 綴[꿰맬 철], 剽[빠를 표], 薾[번성할 이, 피곤할 모양 날], 薾然(날연,苶然):피로한 모양. 허약한 모양.
夫人之責重於士者如何, 而士所以自處者如此, 寧不爲吾徒之羞病, 而俗人之口實也耶. 敢請院之諸生, 毋自滅裂, 而各奮其志, 思盡力於此學之名實, 則於聖賢之遺教, 國家之迪材, 盧侯之所望, 其庶幾乎.
대개 사람들이 선비에게 중임을 맡긴 것이 어떠하기에 선비로서 자처(自處)하는 바가 이와 같겠는가? 이것이 어찌 우리 무리의 수치(羞恥)와 속인들의 구실(口實)이 되지 않겠는가? 감히 서원의 여러 유생(儒生)들에게 청하건대, 스스로 멸렬(滅裂)하지 말고, 각기 그 뜻을 분발하여, 이 학문의 명실(名實)에 진력(盡力)할 것을 생각한다면 성현의 남긴 가르침과 국가가 인재를 일깨움과 노(盧)사또의 기대에 가까울 것이다.
*迪[갈 적], 庶幾乎(서기호):혹시. 아마. ~에 가까움. 대강 같음.
若其羣居游息之樂, 則各在其人之自知, 固不待滉言, 然而樓之高明, 可以體子思鳶魚之妙, 壇之風詠, 可以追曾點鳳凰之象, 亦在夫學問之功, 深造而自得之耳. 不然, 欲想像揣摩於顧眄之際而知之, 則亦終於不可得而已. 學者其無以爲易而忽之哉.
그 여러 사람이 거처하며 노닐고 쉬는 즐거움 같은 것은, 각자 그 사람이 스스로 아는 데에 달려있어 실로 나[황(滉)]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누각이 고명(高明)하니 능히 자사(子思)가 말한 연어(鳶魚)의 묘리19)를 체득할 수 있고, 단(壇)에서 풍영(風詠)20)하면 능히 증점(曾點)이 말한 봉황(鳳凰)의 기상21) 을 추급(追及)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학문의 공(功)에 달려있으니 깊이 나아가서 스스로 얻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보는 즈음에 상상하고 가늠하여 알고자 하면 역시 끝내 얻지 못하고 만다. 배우는 자는 쉽다고 생각하여 경홀(輕忽)히 여기지 말지어다.
*深造(심조):깊은 경지에 도달함. 학문과 연구에 가일층 매진함. 揣[잴 췌], 摩[갈 마], 揣摩(췌마):상대방의 뜻을 헤아려서 그 뜻에 맞게 영합하는 일. 추측함. 짐작함. 顧眄[고면]:잊을 수 없어 돌이켜 봄.
嘉靖庚申七月下澣, 眞城李滉, 記.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二〗
가정(嘉靖) 경신 7월 하한(下澣)에 진성(眞城) 이황(李滉)은 기록한다.
迎鳳書院(영봉서원) 星州(성주) 《退溪先生文集 卷之四》 「書院十詠」
鳳山儒館極恢張 영봉산에 세운 서원 넓기도 한데
聚訟賢祠挾謗傷 사우에 송사 모아 헐뜯기만 일삼네
但願諸賢明此學 원컨대 여러분들 이 학문 밝힌다면
閒爭浮議自消亡 헛된 다툼 뜬 논란 저절로 사라지리
1)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리에 있었던 서원. 1558년(명종 13) 이조년(李兆年), 이인복(李仁復),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영봉서원(迎鳳書院)으로 창건되었으나, 이후 정구(鄭逑) 등에 의해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개명되었으며 주향자로 숙정자(叔程子: 北宋 程頣), 주자(朱子), 김굉필(金宏弼)을 배향하였다. 1573년(선조 6) 사액되고, 1607년 중액되었으며, 1623년(인조 1) 정구, 1642년(인조 20) 장현광(張顯光)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2) 화원(化原) : 《朱子大全 箚疑》에 “교화의 근원은, 학교를 세우고 사당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敎化之原, 建學立祠之謂]”라 하였다.
3) 상산(象山): 황해북도 곡산군(谷山郡)의 옛 별호.
4) 노경린(盧慶麟): 1516(중종 11)∼156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 아버지는 사과(司果) 적(積)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내금위(內禁衛) 중(重)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박사를 거쳐 공조·예조·호조·형조의 낭관(郎官)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에 올랐으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좌천되어 나주목사·성주목사 등을 지냈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숭상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세웠다. 1557년(명종 12)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았다. 만년에는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1564년에 가자(加資)되었다.
5) 이조년(李兆年) : 1269~1343. 고려의 원종-충혜왕 때의 문신·시인·문인이며 학자이다.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아버지는 경산부(京山府) 이속인 장경(長庚)이다. 장인은 정윤의로 경산부에 부임해서 그의 사람됨을 보고 사위로 삼았다. 1294년(충렬왕 20)에 향공진사로 급제한 후 안남서기(安南書記)·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협주지주사(陝州知州事) 등을 거쳐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1306년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의 이간으로 충렬왕·충선왕 부자간 다툼이 치열했는데 이조년은 진퇴(進退)를 삼가하고,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를 당했다. 유배 후 13년간은 고향에서 은거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심왕(瀋王) 고(暠)가 왕위를 넘보자 발분(發憤)하여 홀로 원나라에 가 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충숙왕이 환국한 후 감찰장령·군부판서 등을 역임했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숙위시 방탕하게 생활하므로 경계의 말을 간곡히 올리자 왕이 담을 뛰어넘어 달아났다고 한다. 충혜왕이 왕위에 올라 정당문학예문대제학직을 내리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했다. 충혜왕의 방탕을 보고 충정으로 간했으나 듣지 않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죽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로 시작되는 시조 1수를 남겼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6) 역린(逆鱗)의 화: 임금의 뜻을 거슬러 당하는 화. 용의 턱 밑에 거꾸로 붙은 비늘이 있는데 그를 건드리면 용이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7) 이인복(李仁復) : 1308(충렬왕 34) ~ 1374(공민왕 23). 고려말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자 극례(克禮), 호 초은(樵隱). 할아버지는 성산군(星山君) 조년(兆年)이며,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포(褒)이고, 동생이 인임(仁任)이다. 백이정(白頤正)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326년(충숙왕 13)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福州司錄)이 된 후 춘추공봉(春秋供奉)에 발탁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기거사인으로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대녕로금주판관(大寧路錦州判官)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기거주로 승진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후 우부대언(右副代言)·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했고, 서연(書筵)에서 진강했다.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1354년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가 되었고, 이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1356년 원나라가 기씨(奇氏) 제거와 변방 침범을 용서하자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에 「고금록(古今錄)」을 편찬했다. 1359년 수사공 상서좌복야 어사대부(守司空尙書左僕射御史大夫)를 거쳐 이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첨의평리(僉議評理)·삼사우사(三司右使)·서북면도찰군용사(西北面都察軍容使) 등을 역임했다. 1364년 찬성사(贊成事)로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에 봉해졌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이 복위한 것을 알리고 돌아와 정동행성좌우사낭중(征東行省左右司郎中)이 되었으나, 왕에게 신돈(辛旽)을 멀리할 것을 간하다가 파직당했다. 이듬해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71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색(李穡)과 함께 「금경록(金鏡錄)」을 증수했다. 1373년 검교시중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초은집》이 있다. 1375년(우왕 1)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다.
8) 문충공(文忠公)…중국에까지 들렸는데: 문열(文烈)의 손자로, 충선왕(忠宣王) 3년에 원(元)나라 과거에 합격하고, 공민왕(恭愍王) 때 또 원나라에 사신 갔으며 당시 사명(辭命)이 많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9) 거만한 두 아우 : 이인임(李仁任)과 이인민(李仁敏)을 가리킨다.
10) 김굉필(金宏弼):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뉴(金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한승순(韓承舜)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렸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景賢錄)》·《한훤당집(寒暄堂集)》·《가범(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1) 위기지학(爲己之學) : 《논어》 「헌문편」의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날은 남을 위해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에서 비롯되었다.
12) 간재(艮齋)는, 《논어》 「이인(里仁)」의 “擇不處仁”이라는 구절에 대해, 《孟子質疑》에서 “孔子言擇里而居焉 孟子引之以 明人擇術而學焉也”라고 하였다.
13) 성경(誠敬) : 정자와 주자의 학설 가운데 나오는 존성(存誠)과 거경(居敬)을 말하는데, 존성은 성실함을 보존하는 것이고, 거경은 몸가짐을 조심하여 삼가는 것을 말한다.
14) “인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 어찌 남을 통해서 하는 것이겠는가[爲仁由己而由人乎哉]’라고 하였다.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15) 임리(臨履) : 조심하고 신중하다는 뜻. 《시경》 「소민(小旻)」에, “두려워하고 경계하기를 깊은 못에 다다른 것같이 하고, 살얼음을 밟는 것같이 하라[如臨深淵, 如履薄氷]” 한 데서 온 말.
16) 이택(麗澤)은 벗들이 서로 도와서 절차탁마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태괘(兌卦) 상(象)」의 “두 개의 못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이 태이니, 군자는 이를 보고서 붕우와 함께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17) 《서경》「여오(旅獒)」에 “작은 행동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끝내 큰 덕에 누를 끼칠 것이니, 아홉 길 높이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여 공이 무너진다[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고 한 데에서 온 말로, 오랜 동안 공을 들인 일이 한 번의 실수로 허사로 돌아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18) 입실(入室)은 학문의 조예가 깊은 것을 의미한다. “유는 마루에까지 올라왔고 방에만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다[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라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先進》
19) 연어(鳶魚)의 묘리: 군자의 수양된 덕행이 상하에 미쳐 모두 즐겁게 하는 이치.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장」에 “鳶飛戾天 魚躍于淵)”이라 하였다.
《중용장구》제12장 “시(詩)에서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다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고 하니, 이는 천지의 도가 상하로 밝게 드러나 있음을 말한 것이다.”
20) 욕기풍영(浴沂風詠) : 기수에서 목욕을 하고 바람을 쐰 다음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각자의 뜻을 묻자, 증점(曾點)이 타던 비파를 놓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늦봄에 봄옷이 다 지어지면 대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하니, 공자가 감탄하였다. 《論語 先進》
21) 증점(曾點)이 … 기상: 경쾌한 기상을 비유한 말. 《논어》 소주(小註)에 “曾點有鳳凰千仞象”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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