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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가을 뉴욕집회 - 우주적 연합체
5. 연합을 앎과 참 포도나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이로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요한복음15장)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들을 영화롭게 한 결과의 첫번째가 그의 집 아버지의 집이었다. 오늘은 두번째 참 포도나무인데 집은 어떤 재료들을 합성해서 구성해 놓은 구조물이다. 포도나무는 구조물이 아니라 생명의 유기체이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결과 다시 말하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결과로 얻어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구조적으로는 집처럼 구성이 되어서 아버지의 안식을 위한 거처가 되고 생명의 유기체적으로는 포도나무처럼 연결되어서 열매를 열린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농부고 나는 나무다. 이 말은 너희는 과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표징이다. 그 나무하나를 보면 그 안에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열매인 믿는 이들도 있고 나무하나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가 그 안에 아버지와 또 자기 자신과 그 영을 포함하고 계신 분을 표징 한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은 어제 말씀 드린 대로 모든 것이 다 삼일성 혹은 유기체적으로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거기서 서로 상호내조하고 상호거주하면서 서로 유기체적으로 서로 연결되어서 어떤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로 영과 혼과 육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서 어디까지 영이고 어디까지 혼인지 잘 구별할 수 없도록 그렇게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무엇인가를 주고받고 하면서 한 결과를 자꾸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는 혼으로 듣는다. 우리 생각 속에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그것이 영으로 전달되고 그것이 다시 또 육으로 전달되고 이래서 온 영과 혼과 몸이 어떤 온전함을 향해서 자꾸 유기체적으로 향상되어간다. 어느 한가지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은 영과 혼과 육이 하나의 건전한 실체로서 성장하고 온전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를 들어 신비적인 어떤 체험을 통해서 몰입해 버리면 자기들 말로하면 쉽게 말하면 영만 발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혼이 엉망이 되어서 생각이 제대로 안되고 영만 발전해서 무당처럼 된다든지 이렇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어떤 경우에는 육만 발전해서 육체적인 인간이 된다. 역시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 강림할 때까지 온전하게 보전되기를 원한다. 하나의 인격이 어느 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기체적으로 서로 연합해서 한 인격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 포도나무를 자세히 보면서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적인 표징이란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안에는 생명의 연결이 있다. 가지하고 뿌리하고 나무하고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 수액이 서로 흐르고 왕래하는 것이 있다. 밑에서는 물이 계속 올라가고 있고 위에서는 동화작용에 의해 밑으로 내려가고 있고 이것이 계속 흐르고 왕래하는 것이 보인다. 흐른다는 것이 그냥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면서 늘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하는 것이다. 뿌리에서 올라올 때는 삼투압 현상에 의해서 맹물 같은 것이 올라오는데 점점점점 올라가면서 맨 위에 가지까지 올라가면 그것이 맛이 생긴다. 그 맛의 결과로 잎이 생기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게 된다.
열매 속에도 뿌리에서 올라왔던 물이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변화된 물이다. 우리가 지금 고로새 단풍 물이라고 하는 것을 봄에 갔다먹는데 처음에는 그냥 물인데 그것이 나무로 오라오면서 수액이 되어 약간 단기운도 있고 그런 것으로 변하게 된다. 점점점점 올라가면서 다른 성질로 변해가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들었을 때는 그냥 들었는데 그것이 혼과 영과 몸을 통해서 가는 동안에 수액이 변하듯이 자꾸자꾸 변해서 맛있는 것으로 열매가 달콤한 것처럼 맛있는 것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열매를 따서 먹어보면 꼭지 있는 쪽하고 꽃피는 쪽하고 먹어보면 꽃피는 쪽이 훨씬 더 달다. 가지에 붙어 있는 쪽보다 가지에 붙어 있는 쪽보다 더 변화되어서 꼭대기까지 가기 때문에 꼭대기 쪽이 제일 달다. 가지 쪽은 덜 달다.
우리 인격도 마찬가지로 이런 유기체적인 변화를 통해서 자꾸자꾸 새로워지고 맛있는 것으로 맛이 있는 사람이 되게 된다. 달콤한 사람이 되게 된다. 달콤한 사람이 되면 열매가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식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완전히 다 익은 열매를 사용하는 이유가 완전히 다 익어야 가장 맛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 익었다는 것은 많은 흐름과 왕래를 통해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지만 흐름과 왕래를 통해서 변화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부단히 흐르고 왕래함을 통해서 부단히 우리가 말씀을 듣고 교통함을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고 맛있는 열매를 맺게 된다. 교회 안에서의 교통은 일종의 흐름이라 할 수 있고 왕래라고 할 수도 있다. 흐름과 왕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뭔가 자꾸자꾸 순화되어 나가기도 하고 또 견고해져 가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 맛있는 열매로 변화되어 간다.
나무가 있고 가지가 있고 열매가 있고 이것은 삼일하나님 안에서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고 그 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 영을 마시게 하였느니라는 말이 나온다. 아들은 마실 수 없다. 그 영은 마신다로 표현했다. 왜냐하면 그만큼 더 정제 되었다는 말이다. 쌀이 밥이 되고 밥이 다시 포도당이 되는 것처럼 점점 정제되었기 때문에 그 영을 마시게 하였느니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에 우리에게 오신 분은 그 영으로 오신 분이다. 밥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그 영으로 오신 분이다. 모든 사람에게 분배될 수 있는 그런 형태로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다. 성육신하신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분배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육신의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갈릴리에 있을 때 예루살렘에 있을 수 없고 예루살렘에 있을 때 갈릴리에 있을 수 없다. 12제자밖에는 선택할 수가 없는 그런 사정에 놓여 있었다. 이제 보혜사로 우리에게 올 때 또 다른 보혜사로 우리에게 왔을 때는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전혀 없이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서의 그분이 우리에게 왔다. 이것은 하나의 인격이다. 옛날에 생각할 때는 우리가 그때 태어났더라면 예수님을 직접 한번 만나 봤으면 좋을 텐데 우리는 참 불행하다 할 수 있었는데 육신으로 직접 만나봤기 때문에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보혜사로 왔을 때 모든 사람에게 다 분배될 수 있는 그런 형태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향상되고 더 변화되고 더욱 발전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적으로 예수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자기는 예수를 만나봤다고 말하고 있다. 육신으로 만나봤던 사도들에 대해서 자기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 이유는 Quality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훨씬 더 좋은 성질의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바울에게서 그 많은 계시들이 흘러나왔는데 육신으로 만난 것보다 더 많은 계시가 흘러 나왔다.
열매는 열매로 더 열매로 가기 때문에 그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것은 아들의 영화롭게 됨의 결과로서 맺어진 열매는 우리들 자신들인데 교회이다. 그 교회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영화롭게 됨으로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참으로 그분이 영화롭게 된 것은 많은 열매 안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포도나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포도나무는 계속 뻗어나가면서 열매를 계속 생산해서 풍성한 열매를 만들어낸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그분이 한 작은 사람으로 시작한 그분이 십자가에서 시작한 그분이 번식하고 번식하고 줄기를 뻗어서 오늘 우리한테까지 왔다. 우리한테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또 계속 갈 것이기 때문에 이 열매 맺음을 통해서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열매는 다른 것도 그렇지만 포도나무는 특별히 늘 해마다 새 가지에서 열매가 맺는다. 그래서 포도 농사하는 곳에 가면 가을에 잘라주고 봄에 또 한번 잘라주고 두 번 잘라준다. 새가지가 나오게 하려고 옛 가지를 놓아두면 포도가 나빠져 버린다. 포도가 작아지고 많이 열리지 않는다. 해마다 가지를 잘라주면 항상 새순이 나와서 새순에서 포도가 열리도록 되어 있다. 교회에서도 보면 참 이상한 것은 늘 새 가지에서 열매가 열린다. 그렇다고 옛 가지는 없어져야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분명히 나무가 있어야 가지가 있는데 열매 맺는 것은 항상 새 가지에서 열매가 맺힌다. 그 새 가지에서 맺힌 열매는 아주 신선하다.
교회가 늘 살아있다면 묵은 가지가 아니고 항상 새 가지에서 열매 맺는 그런 교회가 될 것이다. 묵은 가지의 역할들은 새 가지에 어떤 영양을 공급해주고 있는 것 같은데 열매는 항상 새 가지에서 열린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신선하고 늘 새롭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교리적인 세계에는 항상 똑같으니까 새것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포도나무로 비유할 수 있는 교회가 못된다.
교리의 바탕위에 세워진 교회 개신교는 교리의 바탕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천주교는 제도의 바탕위에 세워져 있다. 개신교는 교리의 바탕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장로교와 감리교와 성결교가 왜 이렇게 다르냐면 그것은 제도도 약간 다르지만 교리적인 근거가 다르기 때문에 달라졌다. 천주교에서는 제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교리가 조금 틀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제도에만 복종하면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 오히려 천주교가 그 내용이나 교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처음에 천주교에는 방언을 안했고 엄숙한 것만을 주장해 왔었는데 개신교에서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서 하니까 그 사람들은 금방 그것을 받아들여 지금은 더 심하게 한다. 그런 것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개신교 같으면 못받아 들인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장로교 총회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순복음 교회를 이단으로 정해놓고 있다. 교리의 기초위에 서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받아드리면 교리가 무너져 버린다. 그러면 그 교단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천주교는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안에 것을 계속 변화시켜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개신교는 어찌하던지 그 교리를 굳게 지키려하기 때문에 500년 전에 생긴 교회는 지금도 똑같은 교리 그대로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계시가 있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똑같은 교리를 고수하기 때문에 새로운 계시가 나올 수가 도저히 없다. 처음 시작할 때 그때 그대로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항상 그때 그것을 보존하자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을 잘 보존하는 데가 보수적이고 정통적이라 말하고 그것을 만일 조금만 비껴나가면 변질 되었다든지 이단이라고 그렇게 규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절대로 죽은 분이 아니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므로 제도가 되었든지 교리가 되었든지 어느 하나를 고정시켜 놓고 있을 수가 없다. 살아있는 분이니까 그렇게 고정시켜 놓은 곳에서는 그분은 거하실 수가 없는 분이다. 그러니까 포도나무로 비유를 한다. 살아있는 생명의 유기체로 자기 자신을 비유한다. 죽은 것을 가지고 이유할 수 없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다.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버리신다. 이것은 자기 생명이 아닌 것은 제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포도가지가 열매 맺지 않기 때문에 잘라버린다는 뜻은 자기 생명 아닌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아버지께서 그것을 잘라내신다.
생명이 어디서든지 왕성하려면 생명의 새로운 가지가 늘 나야만 한다. 우리가 나무를 보면 전지를 해주어야 열매가 맺힌다. 전지를 안해주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다른 나무들도 그렇다. 집 뒤에 귤이 있는데 귤을 해마다 전지를 해준다. 전지를 해주어서 그 전지의 기술에 따라서 귤의 크기와 양과 이런 모든 것이 다 결정된다. 우리가 무공해로 한다고 약을 전혀 안친다고 했더니 약 안치면 나무가 금방 못쓰게 된다고 했다. 해마다 전지를 해주고 비료를 주니까 나무가 못쓰게 안된다. 전지를 안하고 가만히 놔두어 버리면 나무가 못쓰게 된다. 열매도 작아지고 나무 자체도 못쓰게 된다. 항상 새로운 가지를 위해서 생생하게 하기 위해서 늘 전지를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그런 일이다. 교회에서 하시는 일이 늘 새로워지기 위해서 늘 새로운 가지가 나기 위해서 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아버지께서는 자기 생명 아닌 것을 제하라 하신다.
오늘 우리가 과정을 거쳐 가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늘 제해가면서 또 새것이 나오고 무엇인가를 제해가면서 새것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바꾸는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인생은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바꾸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거두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거두고 이런 말들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 인생은 어차피 바꾸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바꾸면 성공하는 것이고 잘못 바꾸면 실패하는 것이다. 돈을 잘 쓰면 이름이 나고 잘못 쓰면 욕 얻어먹는다. 돈을 쓴다는 것은 바꾼다는 얘기인데 무엇으로 바꾸느냐 술로 바꾸었다면 술 취하는 것이다. 좋은 것을 심어서 나쁜 것을 거두는 것이다. 돈을 주고 밥을 바꿨다면 배부르게 된다. 돈보다는 밥이 더 낫다. 보다 좋은 것으로 바꾸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
자기 인생을 드려서 자기인생보다 못한 것을 바꾼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나. 사람의 생명은 온천하의 어떤 것보다 귀중하다는 뜻이고 온 천하보다 더 귀중하다는 뜻인데 결국 우리가 산다는 것은 온 천하보다 귀중한 생명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한달 한달 달력이 지나간다는 것은 인생이란 한정된 것이므로 내 인생이 그만큼 없어져 간다는 것이다. 없어져 가면 무엇인가를 대신해서 얻어 와야 한다. 바꾸어 와야 되는데 바꾸지 못하면 인생은 실패하는 것이다. 곶감 빼먹듯이 하나씩 하나씩 빼먹다보면 어느새 없어져 버린다. 곶감 100개를 10줄 끼워서 한접으로 만들어 놓았다. 처음에 보면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들어가면서 하나 빼먹고 나오면서 하나 빼먹고 하다보면 뼈다귀만 남게 된다. 그래서 곶감 빼먹듯 한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처음에 보면 인생이 상당히 뭔가 하는 것 같다. 어려서 보면 아득한 것 같고 80노인을 보면 언제 저만큼 사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나 둘 빼먹다보면 곶감 꼬쟁이만 10개 남는다.
중요한 것은 안빼먹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어차피 빼먹어야 하는데 무엇으로 바꾸느냐는 것이다. 썩지 아니할 것을 바꾸느냐 영원한 것을 바꾸느냐 아니면 썩을 것을 바꾸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이 없고 우리 앞에 그리스도가 만일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을 바꾸고 싶어도 인생을 바꿀 것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 인생을 잘살려고 노력한다. 잘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바꿀 것이 없어서 못 바꾸는 것이다. 돈도 쓸데가 없는 사람은 이리도 써보고 저리도 써본다. 돈은 많이 벌어서 막 들어오는데 쓸려고 하니 쓸데가 없다. 그러면 이것도 써보고 저것도 써본다. 어떤 사람은 쌓아두고 있다가 죽는다. 못써보고 죽는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은 많이 벌어서 자식들한테 남겨주고 간다. 자식에게 넘겨줘봐야 고맙다고 하거나 감사하다 하겠나.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지 부모가 좋은 것을 주어서 잘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언가 잘한다고 하는데 바꾸어 놓는 것을 보면 허망한 것을 바꾸어 놓는다. 마지막에 보면 다 허망한 것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을 바꿀 데가 있다. 계속 주어도 끝없이 바꿀 데가 있다. 더 나은 것을 바꿀 데가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 아버지의 열매는 아들이다. 아들의 열매는 교회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다”했을 때 자기 자신이 열매라는 뜻이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했을 때 우리가 열매라는 뜻이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된다. 신앙생활을 해보신 분은 다 알겠지만 신앙생활 한다는 것하고 내가 그 안에 그가 내안에 있다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일 수가 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얻어오는 것이 다른 것 같다. 능력을 보고 살고 있으면 능력이란 것이 나한테 남게 되고 인격을 보고 살게 되면 인격이란 것이 남게 된다.
옛날에 처음 목회를 하러 갔는데 가보니까 가장 필요한 것이 능력이었다. 교회를 잘 운영하려면 제일 필요한 것이 능력이었다. 주변에 다 보니 어떤 능력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잘하고 있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못하고 있다. 능력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좀 쫓아다녀보면서 얻어 보려고 했는데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지 못받고 말았다. 능력이 없어서 능력있는 세계는 실패했다. 만일 그것을 받고 있었더라면 나는 실패자가 되었을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밀려나게 되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내 앞에 한 인격이 등장해서 내가 그 인격을 볼 수 있는 세계로 옮겨왔다. 이것은 능력이 아니었다.
그 인격에 이끌린바 되어 30년을 살아왔다. 결국은 인격만 남는다. 내가 능력을 보고 따라갔더라면 성공을 했다하더라도 능력만 남았을 것이다. 실패하겠지만 성공해도 능력만 남았을 것이다. 능력은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가 다른 것 같다. 은사 받았다는 사람도 젊었을 때하고 다른 것 같다. 젊었을 때는 기도도하고 열심히 해서 뭔가 더 되는데 아주 늙어 버리면 그것도 못한다. 금식도 못하고 있던 은사도 없어지고 능력도 없어진다. 인격은 늙는다 해서 더 쇠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것을 열매로 주셨구나. 배에는 배가 열리고 감에는 감이 열리듯이 사람에게서 이것을 열리게 해서 하나님이 이것을 거두려고 사람을 만들어 놓았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나이가 들어가면 더 원숙해가지 능력처럼 쇠해지지 않는다. 능력은 어떤 능력도 나이가 들면 쇠해진다. 이것은 나이가 들어가면 더 익지 더 쇠해지지 않는다. 바울이 말한 대로 “육신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그때 바울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였다. “내가 이 장막을 벗을 날이 임박한 줄 안다”했을 때도 나이가 많았을 때이다. 그럴수록 더 완전해졌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은 이것인데 사람들이 다른 것을 찾고 있었구나. 나도 다른 것을 찾았더라면 지금쯤은 내가 설사 능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나이가 먹으면 안되므로 65세면 정년으로 정해 놓고 있다. 조용기 목사 같은 사람도 정년을 하느냐 안하느냐로 회의가 열린다고 하는데 거기서 한번 가결이 더되면 5년 더 하고 못하게 된다. 그렇게 능력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추구할 것이 그것이 아니고 가면 갈수록 더 완전해지고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을 추구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놓았는데 사람이 그것을 찾지 않고 다른 것을 찾는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 이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과실이므로 그것이 양적인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더 달콤해야 된다. 달콤한 과실이 많이 열려야 하는데 열매를 맺는 것은 꼭 나만큼 밖에는 맺지 못한다. 내가감나무면 감을 맺을 수밖에 없고 내가 포도나무면 포도밖에 맺을 수가 없다. 내가 포도나무인데 감을 맺을 수 없고 감나무인데 포도를 맺을 수도 없다. 내가 얼마만큼 달콤한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나는 달콤한 열매를 맺게 된다. 내가 달콤하지 않는데 내가 맺은 열매는 달콤하다 이것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하면 보통 사람들이 말씀 안에 거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것을 사람들은 말씀 안에 거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보수적인 사람일수록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고 더 그렇게 생각한다. 맞는 말 같은 데 여기 보니 그 말이 아니고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우리가 거하기는 주님 안에 거해야한다는 것이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십자가 안에 거한다는 말이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으로 보수니 진보니 이런 것이 생겼다. 나는 이런 말씀 안에 거한다 해서 장로교는 그 말씀 안에 거하고 천주교는 그 말씀 안에 거한다. 그래서 갈라질 수밖에 없다.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은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지 내가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이 내안에 거하는 것이다.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 말은 내말은 곧 그분 자신이다. 내말은 나이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그런 뜻이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안에 거하는데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한 것은 주님이 내안에 거하는 형태는 말씀이라는 형태로 거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어떻게 내안에 거하실 수가 있느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한 말씀이신 그분이 나한테 거하신다는 뜻이니까 말씀하나님 말씀주님 그분이 내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그분의 말씀이 내안에 거하는 것이지 내가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말씀으로서 내안에 거한다. 말씀이 되신 그분이 내안에 거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이래야 우리가 생각할 때 맞는 말인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왜 태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안하고 말씀이 계신다고 했는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지만 그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표현이고 하나님 자신의 증거이다. 그 증거인 말씀이 태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말씀이 내안에 와서 육신이 되면“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렇게 된다.
동충하초는 겨울에는 벌레인데 여름에는 식물이 된다는 뜻이다. 누에나 굼벵이 같은 것에 포자를 넣으면 처음에는 동물인데 그 안에 뿌리를 박아 점점 큰다. 커서 마지막에는 식물이 된다. 이것이 동충하초이다.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주입되면 우리 안에서 말씀이 점점점점 내 모든 것을 먹고 자라서 다음에는 말씀자체가 된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버린다. 나중에 포자만 있고 누에는 없어져 버린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바로 그분 자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되느냐 어떻게 예수님처럼 되느냐 그분의 말씀이 내안에 와서 거하면 된다. 말씀이라는 형태로서 그분이 내안 거하시면 된다. 이것은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말씀을 통해서 내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분이 내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동충하초는 이미 생명이 들어가서 풀이 되어버렸으니까 풀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자기한테 있는 것이다. 따로 구하고 안할 것도 없고 원래 그 생명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된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우리의 과실은 그분 자신이 내안에 말씀으로 들어오면 그 말씀이 내안에서 자라서 커가지고 나는 말씀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말씀으로 내가 덮어져 버리고 그 말씀으로 내가 화해져 버린다. 이것이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말은 할 말이 없어져 버리고 이 말씀밖에 없게 되고 이 말씀은 하나의 진리고 도구이다. 사람 자체가 그 진리 안에 그 도안에 있는 사람이 되게 된다. 그를 통해서는 마치 태양에서는 빛이 나오듯이 그 사람을 통해서는 그 말씀이 나올 수밖에 없다. 말씀이 육체가 되면 그 말씀 밖에는 나올 수 없다.
개는 개의 말이 육체가 된 것이기 때문에 개에게서는 개만 나온다. 뛰어다녀도 개가 나오고 짖어도 개가 나오고 밥을 먹어도 개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있게 되면 우리가 성장하게 되면 걸어 다녀도 예수고 잠자도 예수고 말해도 예수고 웃어도 예수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는 방식은 말씀이라는 방식으로 밖에는 거하실 수가 없다.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을 듣는 것이 씨를 심는 것이나 똑 같다. 어떤 말씀을 듣느냐에 따라서 그 말씀으로 조성되고 있다. 가령 어느 교회를 다니느냐는 어느 말씀을 듣느냐는 말이 된다. 그 교회는 어떤 말씀이 되었든지 말씀을 전하고 있는 곳이니까 그 목사가 말씀을 전하면 거기에 오래 다니다 보면 그 사람처럼 된다.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산이나 바다나 이런 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말로 우리가 얼른 받아들이기 쉽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으로 조성되는가 하는 것이다. 내 인간이 무엇으로 조성되었나 하는 것인데 선악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든지 벌리면 선악과가 나온다. 옛날에는 입만 벌리면 선악과가 나왔는데 이제는 선악과로 조성된 사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조성된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조성되면 그분 자신으로 조성되면 내가 입을 벌리면 당연히 그분이 나올 것이다. 육체는 어떤 물질로 조성되지만 우리 인격은 어떤 말씀으로 조성된다. 그래서 무슨 말씀을 듣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밭은 무슨 씨를 심었냐로 결정된다. 처음 씨를 뿌렸을 때는 비슷하게 잘 모른다. 싹이 나기 전에 모르고 싹이 나도 잘 구별하기 어렵다. 커갈수록 점점점점 구별되어간다.
장로교에 오래 다니다 보면 장로교인이 된다. 단순히 장로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칼빈처럼 되어간다. 만일 칼빈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거기 가있으면 하나님께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칼빈처럼 되는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라면 거기 오래 있다 보면 하나님께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전부 근본적인 것은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말씀을 듣느냐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다.
무슨 씨를 받느냐는 것이다. 씨가 떨어진 대로 된다. 콩이 떨어지면 콩밭이 되고 팥이 떨어지면 팥밭이 된다.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예수를 많이 열리게 되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내안에 거하라 말씀 안에 거하라고 말하지 않고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다. 내말 안에 거하라가 아니고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이 사랑은 주님 자신이다. 내안에 거하라는 말이나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나라는 그분 자신은 곧 사랑이시기 때문에 내안에 거하는 것은 곧 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안에 거하는 사람은 내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말씀 안에 거하라가 아니고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이 말씀 안에 거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말씀이라는 것이 교리이므로 교리 안에 거하면 문제가 생긴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예수님의 사랑을 잘못 이해한다 하더라도 사랑 안에만 거한다 해도 강퍅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 사랑 안에 거하든지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하든지 형님 사랑 안에 거하든지 예수님 사랑은 그만두고라도 사랑 안에만 거한다면 사람이 강퍅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소위 말씀 안에 말씀 안에 하는 사람들은 강퍅해져 버린다. 자기하고 조금만 달라도 죽이려고 한다. 원수진 일도 없는데 이단으로 몰아세운다.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겠다는 말을 응하게 하려고 한다. 대구에서 그런 사실을 보고 있다. 아무 연고 없는 사람들이 지금 원수처럼 난리이다. 왜 그런가? 그들이 들은 말씀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써놓은 것을 보면 어찌 이렇게 한치의 틀림도 없이 써놓았는지.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말씀 안에 거한다는 정말 좋은 것 같은데 말씀 안에 거한 결과는 그렇게 된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이것이 길가는 사람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사랑 안에 거한다면 사람이 강퍅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절대로 강퍅하지 않다. 교리 안에 말씀 안에 성경 안에 거하는 사람은 강퍅해도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강퍅하지 않다. 종교인들이 강퍅해지면 무서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한 역사는 세상이 다 알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역사가 다 안다. 실은 기독교가 그때 당시의 기독교 즉 로만가톨릭이 이단이라고 죽인 숫자가 로마제국이 죽인 숫자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세상보다 훨씬 더 강퍅하고 완악해지는 것이다. 교리 안에 거하게 되면 무서워진다. 세상이 사람을 죽일 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형사적인 문제나 남에게 해를 주었을 때 도저히 이 사람은 이 사회에 같이 살게 할 수 없다고 할 때 제거하거나 사형을 시킨다. 교리적으로 죽이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교리에 틀리면 죽인다. 세상보다 더 못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세상은 상식을 갖고 있지만 이것은 상식이 없어져 버렸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상식을 벗어난 일을 한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이 얼마나 적절한 말씀인지 모른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리라”. 계명 안에 거한다와 사랑 안에 거한다도 마찬가지다. 계명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어떤 계명이든지 강퍅해진다. 구약에 있는 율법들이 계명이 될 때는 사람들의 명령이 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증거지만 계명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은 사람에 대한 능력이다. 증거가 능력이 될 때 계명이라 한다. 계명 안에 거하면 강퍅해진다. 유태인들은 계명 안에 거하기 때문에 강퍅해졌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라하는 것이 계명이 된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증거지만 그것을 지켜라 할 때는 계명이 된다. 지켜라하는 계명을 지킬 때는 사람들은 강퍅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안 지키는 사람을 죽인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그냥 계명만 지키면 사람이 강퍅해지는데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계명은 곧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계명만 그냥 지키면 안되는 것이다.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계명이든지 어떤 명령이든지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어떤 명령이든지 그 명령을 지키는 목표는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우리가 교리가 있던지 말씀이 있던지 다 좋다. 그것을 지키는 목표는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위해서가 아닌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되면 사람은 결국 강퍅해지고 만다. 그래서 종교인들의 강퍅함이 생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죽여도 성이 안 풀리고 이를 갈고 고개를 흔들고 지나갔다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총이나 칼을 주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 국교가 아니라서 그렇지 국교가 되면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미국은 그런 역사를 지나와서 창립한 나라이기 때문에 정교분리를 헌법에 명시를 해두었다. 정치와 종교가 합해지면 무서워진다. 이것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놓았다. 어떤 경우에도 정치는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심지어 사탄종교가 나와도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형사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 안에 문제가 많이 있어도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다. 그 엄청난 피해를 경험하고 마지막에 세운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떤 사람은 역사가 200년 밖에 안된다고 하지만 200년밖에 안된 것이 아니라 전 구라파 역사를 가져와서 마지막에 세워진 나라가 미국이다. 역사적인 결론이다. 구라파 역사의 결론이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든지 교리를 지키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목표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 사랑 안에 거하면 부드러워진다.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던지 주변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사람과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과는 차이가 많이 생긴다. 충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무서움이 없고 강퍅함이 없다. 어려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강퍅해진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계명 안에 거하던지 소위 말씀 안에 거하거나 소위 교리 안에 거하면 사람은 강퍅해지기 때문에 기쁨이 있을 수 없다. 평안과 안식과 기쁨이 있을 수 없다. 자기가 정말 기쁨 가운데 있다면 다른 사람을 해하던지 다른 사람을 괴롭히던지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자기가 기쁨 가운데 있지 못하면 남을 괴롭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해방된 후에 그런 일이 생겼다.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한국기독교를 박해하는 과정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옥에도 갇히고 많은 고문을 받고 고생을 당하면서 순교적인 신앙을 지켰다. 어떤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했다. 해방이 된 다음에 둘로 갈라졌다. 신사참배를 한파와 안한 파가 갈라졌는데 신사참배를 안했던 사람들은 신사참배한 사람들을 한 사람들을 원수처럼 생각했다. 너희와 상종할 수 없다. 그래서 최초로 갈라지게 되었다. 얼른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겠다고 한쪽에서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현실에 적응하고 잘 먹고 잘 살았고 한쪽에서는 그것을 반대하느라 옥에도 갇히고 심한 고초를 당하고 했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만일 그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므로 일어났던 일이었다면 내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한 목표여서 그렇게 되었다면 자기들이 옥에 있었던 것은 고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해방되어 나왔을 때 신사참배한 사람들을 볼 때 원수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불쌍하게 보였을 것이다. 자기들은 주님의 사랑을 입고 있었고 이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입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그 안에서 행복했을 것이다. 자기가 핍박을 받는 것 자체가 행복했을 것이다. 행복했던 사람이 나와서 행복하지 못한 불행한 사람을 원수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을 생각할 때 옳은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은 아니었구나. 옳은 일이었지 은혜 안에 있는 일은 아니었구나. 그 자체가 만일 은혜였다면 남이 그렇게 안한다고 해서 이가 갈릴 리가 없다. 자기는 은혜를 받았고 축복을 받았다. 그것이 은혜였고 그보다 더한 축복이 없었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저들이 하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육신적으로는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자기한테는 엄청난 축복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 내가 축복 안에 있으니까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가 있다. 내가 축복 안에 없으면 남을 축복 할 수가 없다. 세상에 옳다는 일은 참 많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도 많고 말씀을 지킨다는 것도 많고 옳은 신앙을 가진다는 것도 많은데 문제는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고 계명 안에 거하는 사람은 강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왜 그렇게 강퍅했을까?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계명 안에 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했더라면 그 사람들만큼 복 받은 사람들이 없다.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천하만민 가운데 내가 너만 알았다 할 정도로 그렇게 사랑했다. 눈동자처럼 이스라엘을 지켰다고 했다. 그만큼 사랑한 백성이다. 그 사람들이 그만큼 충분한 사랑가운데 있었다면 천하만민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고 사랑했겠는가. 이 사람들은 그 사랑 안에 거한 것이 아니라 그 계명 안에 거하게 되어 강퍅해졌다.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줄 알게 될 것이다. 나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냥 계명하면 이것은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라 이런 놈은 죽이고 이런 놈은 살리라 이런 것이 된다.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계명이 이 안에 흡수되어야 한다. 성경 안에 무슨 계명이 있다하더라도 그 계명은 이 계명 안에 다 흡수되어야 한다. 나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니까 그 안에 다 흡수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길이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길이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신약의 계명을 지켜야 된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이 싸움거리가 되어 있기도 한다. 그분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으로 다 완성이 되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했다. 여기 목숨은 육신의 목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의 목숨을 말한다. 푸쉬케, 혼의 목숨이란 말은 내 생각을 버린다는 말이다. 내 생각 내주장 내 옳다는 것을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푸쉬케를 친구를 위해서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하는 것은 사랑하면 푸쉬케를 버린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혼을 버리는데 버린다는 말은 혼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아가서 5장 6절에 보면 “그가 내게 말할 때 내 혼이 나갔구나” 자기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는 말이다. 신랑이 자기한테 말하는데 그 말을 들을 때 자기 혼이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은 없어져 버렸다.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다. “그가 내게 말할 때 내 혼이 나갔구나” 그것이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 생각 내주장이 다 어디로 나가고 없다는 것이다.“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므나” 사람은 자기 혼이 자기가 살아있는 증거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주장하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나이고 자아이다. 사랑을 만나니까 내 혼이 나가고 없다. 자기 생각도 주장도 판단도 다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내가 병이 났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해서 푸쉬케를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하는 말은 그런 말이다. 친구 때문에 자기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 내 주장과 내 생각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속에는 내 푸쉬케가 없어진다.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다. 친구라고 한 것은 네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로 알게 했다는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는 내 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한다.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하면 곧 나의 친구인데 왜냐하면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비밀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혼을 잃어버리면 그가 말할 때 내혼이 잃어버려지면 우리는 그분의 모든 비밀을 다 흡수하게 된다. 하나님 말씀이 나가는데 왜 안 들어가는가 하면 자기 혼 때문에 안 들어간다. 자기주장 자기생각이 있으면 말씀이 안 들어간다. 자기주장과 자기생각이 딱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생각이 싹없어져 버렸다 어디로 나가버렸다는 말은 그가 말할 때 내 혼이 나갔구나 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내안에 확 들어왔다는 말은 그때 내 혼이 나가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내게 들어온다. 내 혼을 가지고는 그 말씀이 들어올 수가 없다. 내가 무너질 때 그분이 들어오신다. 내가 나 자신이 없어지면서 그분이 들어온다.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그분의 말씀이 너무너무 좋으면 나는 내 푸쉬케가 어디로 가버리고 만다. 지금까지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던 내가 철의 장막이었던 그 혼이 잃어버리고 없다 혼이 나가버렸다. 우리말로 혼나갔다는 것이다.
그때 씨가 받아드려진다. 생명의 씨가 그때 들어온다. 문이 열렸을 때 확 들어간다. 항상 열려 있으면 좋지만 어느 순간 혼이 나갔지만 닫혀 질 때도 있다. 그래도 한번 들어간 씨는 결국 나오게 된다. 말씀을 듣다가 혼이 빠져나가버려서 그 순간에 씨가 들어갔는데 어찌하다 정신이 바짝나서 다시 닫아져버렸다. 처음에는 그런 때가 많고 듣고 나서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지 할 때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씨가 받아들여져 그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 오신 분들 가운데 보면 한번이라도 말씀이 정확하게 들린 사람은 언제 돌아와도 돌아온다. 여러 번 경험을 해봤다.
한번 그것이 확 빛으로 자기한테 비쳐와서 자기 혼이 확 나가버렸을 때는 다음에 혼이 돌아와 닫혀져도 언젠가는 다시 열려서 들어오게 된다. 지난번에 어떤 형제가 몇 년 전에 왔는데 너무나 분명하게 뭔가를 봤는데 돌아가서 인터넷에다 아니라고 했다. 3년 전인가 돌아왔다. 인터넷을 안보니까 무엇을 썼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올 텐데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하게 보고는 안 올 수 없다. 그가 말할 때 내혼이 나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나의 사랑으로 병이 났다고 전해주라 그렇게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인다.
교리를 배워서 되는 그런 기독교인이 아니고 내 혼이 잃어버릴 만큼 내 푸쉬케가 잃어버려질만큼 뭔가 나한테 받아드려져서 잉태를 한 것 같다. 과실을 많이 맺게 하려고 내가 너희를 택했다. 우리가 택해서 간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열매를 맺게 하려고 나를 택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계속 포를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계속 공격을 했더니 문이 확 열렸던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선택해놓고 거기다 집중적으로 사격을 하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혼이 나가버린 것이다.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택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 항상 과일이 익게 하려고.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할 것이다. 이미 그 씨를 받아버렸으니 이제는 세상이 자기 것이 아닌 줄 안다. 그래서 세상이 결국 핍박하게 될 것이다. 나를 핍박했으니 너희를 핍박할 것이다. 내말을 들었으니 너희 말을 들을 것이다. 나를 대하는 것이나 너희를 대하는 것이나 같을 것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 마지막에 보혜사가 나를 증거 할 것이고 너희도 나를 증거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분과 우리사이에 생명과 사랑을 통해서 유기적으로 교통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내 혼이 나가도록 나를 공략해 오는 분도 있고 내가 내 혼을 방어하려 했지만 그가 말할 때 내 혼이 나갔구나. 그 말씀이 내안에 들어와서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게 되었으니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된다. 그분의 사랑 안에 내가 거하므로 우리 안에서 무엇이 나와서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이것은 생명의 유기적인 관계를 말한다.
집은 건축물이고 이것은 하나의 생명체다. 이 생명체를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그분이 영화롭게 된 결과로 우리는 이런 생명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었는데 그 영화롭게 된 것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으로 들어와서 그분의 죽음 안에 내가 발견되고 그분의 살으심 안에 내가 발견되어서 나는 그분과 한생명의 유기체로 발견되고 거기서 주고받는 흐름이 있어서 우리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열매를 맺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그분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그 속에 어떤 수술 작용이 계속 일어나서 주고받는 역사가 일어나서 우리 안에서 열매가 맺어지고 그 열매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말씀드린 대로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내 사랑 안에 거하라 하는 그 안에 우리가 거하는 동안에 우리 안에 포도나무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그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뿌리에서부터 가지까지 뭔가 계속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결국은 가지에서 열매가 열리고 그것이 아버지 밥상에 올라가게 되고 술상에 올라가게 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지금 그 포도나무 속에 들어있다. 내가 뿌리일 수도 있고 가지일 수도 있고 나무일 수도 있는데 이 속에서 늘 무엇인가 흘러서 보이지 않지만 왕래하여 우리는 우리의 혼 목숨을 잃어버리면서 그분의 사랑에 우리가 취해가고 그분의 사랑에 우리가 젖어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교리적으로 만들어진 사람하고는 다른 사람이다. 종교적으로 만들어진 사람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다. 사랑이 계속 젖어 들어간 사람이다. 그사랑 안에 그냥 녹아져 가는 사람이다. 어떤 교리를 배워서 기독교인이 되던지 무슨 교파의 사람이 되던지 이런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아버지 하나님 안에 그분 안에 거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다 죽은 막대기 같은 인생들을 주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포도나무가 되게 하셔서 그 안에 당신의 흐름과 공급이 끊임없이 있고 당신의 그 흐름과 공급 안에 우리가 거하므로 말미암아 우리도 당신의 지혜를 받아서 사랑을 먹고 자라서 사랑이 가운데서 쉼을 얻고 기쁨이 충만한 이런 사람들로 우리를 키워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려고 하는 아버지의 계획을 우리가 알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 안에 거하고 당신의 사랑 안에 우리가 거하므로 당신을 우리가 먹어가고 당신으로 젖어가고 당신으로 우리가 화해가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로 인해서 세상이 우리를 볼 때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예수의 사람이고 저것이 예수의 교회라고 알려질 수 있도록 그렇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