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하게 드래곤볼 GT는 액션적인 측면에서 별로 매력적인 애니메이션이 아닙니다. 순수 작화로는 모든 드래곤볼 애니메이션 시리즈들을 통틀어 그래도 가장 적은 기복을 보였지만, 액션은 오히려 정반대로 모든 시리즈들 중 가장 떨어지는 퀄리티를 자랑하죠. 이게 개인적으로 제가 GT를 딱히 안 좋아하고 재탕을 거의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단 결정적으로 눈으로 보는 재미가 떨어지니까요. 하지만 가끔 굳이 재탕을 한다면, 저는 특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한 곳에서 담당한 회차들을 유난히 많이 보는 편입니다.
프로덕션에 있어서 과거와 오늘날의 드래곤볼 애니는 꽤나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드래곤볼, 일명 드래곤볼 슈퍼의 주력 애니메이터들은 대다수가 토에이 애니메이션 소속의 전속 애니메이터들이며 다른 소수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나 프리랜서 애니메이터들이 외주를 맡아 작품에 참여하는 데에 비해, 지난 8,90년대 당시엔 다른 스튜디오들로의 외주에 상당 부분을 기대는 방식이었고 토에이 내부 애니메이터들의 지분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이 서브 스튜디오들의 숫자는 제법 많았습니다. ‘신도 프로덕션,’ ‘라스트 하우스,’ ‘스튜디오 카펜더,’ ‘K 프로덕션,’ ‘스튜디오 라이브,’ ‘도가 코보’ 등이 있었는데, GT엔 참여하지 않은 ‘스튜디오 칵핏’ 정도를 제외하면 이 서브 스튜디오들은 오리지널부터 시작하여 Z, 그리고 GT까지 계속해서 드래곤볼에 관여하며 토에이를 도왔습니다. 하지만 Z까진 좋은 액션을 보여주었던 애니메이터들도 GT에선 유독 힘을 쓰지 못했는데요. 여기서 그나마 예외였던 스튜디오가 한 군데 있었는데, 그 곳의 이름은 바로 ‘세이가샤’였습니다.
세이가샤는 원래부터 다른 스튜디오들보다도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던 스튜디오로, 피콜로 대마왕전, 라데츠전, 베지터전, 프리저전, 셀전, 마인 베지터전, 마인 부우전 등 중요한 회차에 지속적으로 투입되며 드래곤볼이라 하면 떠오르는 상당수의 전투씬을 뽑아낸 바가 있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GT의 액션을 캐리하게 되는데요. 그냥 간단하게 얘기해볼까 합니다.
• ‘타케우치 토메키치’
타케우치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으로서 전장을 누비고 1959년, 세이가샤의 애니메이터가 되어 2001년에 타개한, 드래곤볼 시리즈가 진행 중이던 당시 최고참 애니메이터였습니다. 캐릭터들의 눈을 크고 둥글게 그리는 특유의 스타일을 가진 그는 오리지널부터 Z 63화까진 세이가샤 담당 회차의 작화 감독을 맡았었으나, 그 후부턴 점점 날카로워지는 시리즈와 캐릭터들의 비주얼을 따라가지 못하고 원화가 역할로 밀려난 인물이었는데요. 기본적으로 액션의 동작이 많이 부자연스러운 편이라 타케우치가 특별히 GT에서 좋은 전투씬을 만들어낸 건 아니지만, 표현력만큼은 아주 괄목할 만한 강점입니다. 타케우치는 캐릭터들의 표정을 아주 과장되게 그리는 데에 능했으며 이것은 33화에서 오공이 베이비에게 꼬리를 잡혀 내쳐질 때 제대로 드러나죠. 스타일이 아주 확실하기 때문에 만약 드래곤볼 애니메이터들의 성향에 대해 알아가고 싶다면 그 시작점으로 아주 좋은 초이스입니다.
• ‘시마누키 마사히로’
드래곤볼 19화 때부터 동화가에서 원화가로 승급된 시마누키는 Z 63화를 끝으로 타케우치가 작화 감독에서 원화가로 내려오게 됨에 따라 그 다음 세이가샤 담당 회차였던 68화를 시작으로 작화 감독과 원화가를 오가다가 GT에선 그냥 원화가 역할로 고정되어 활약한 애니메이터입니다. 시마누키의 강점으로는 열이면 열 모두가 그의 이펙트를 언급할 것입니다. 특히 땅이나 바위의 파편들이 튀기는 장면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저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죠. 1화에서 나온 GT의 첫 전투씬인 우부와 오공의 대련, 혹은 33화에서 나온 오공의 황금 거대 원숭이 변신 씬이 대표적입니다.
시마누키의 액션씬을 자세히 보시면 캐릭터들의 동작이 사람보다는 마치 로봇처럼 상당히 부자연스럽고 뻣뻣하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점은 예전부터 액션 애니메이터로서 시마누키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꼽혀왔는데요. 그나마 이 때 당시엔 주먹 한 방 한 방에 박력을 불어넣어 타격감을 살리는 임팩트 프레임과 특유의 화려한 이펙트가 이러한 약점을 커버해내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캐릭터들의 자세한 모션 하나하나로부터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었으나, 나중에 드래곤볼과는 다른 전투 연출 방식을 가진 원피스로 둥지를 옮기게 되자 시마누키는 더이상 임팩트 프레임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먼 훗날 시마누키가 드래곤볼 슈퍼로 드래곤볼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캐릭터들의 어색한 몸동작이 임팩트 프레임 없이 적나라하게 팬들에게 목격되었으며 설상가상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해 이제는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죠. 밑에 후술할 그의 후배와는 달리, GT는 사실상 시마누키에겐 내리막길의 시작을 알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 ‘히사다 카즈야’
히사다는 Z 4화 때부터 원화가로서 작업하게 되었고 이후 타케우치가 63화를 끝으로 작화 감독에서 내려오자 시마누키와 돌아가며 (히사다는 98화를 시작으로) 작화 감독 역할을 맡다가 GT에 들어선 아예 단독으로 세이가샤 회차들의 작화 감독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GT에서 히사다가 직접 담당한 원화는 대표적으로 일성룡전에서의 용권과 원기옥 파트가 있습니다.
당시 히사다의 대표적인 강점으로는 바로 캐릭터들의 역동적인 포즈에 있었습니다. 그의 다이나믹함은 평범한 장면에서의 평범한 몸짓에도 특별함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였고, 이건 캐릭터들의 부자연스러운 포즈가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히던 시마누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33화에서 우부와 베이비의 싸움이 두 사람의 차이점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히사다의 이러한 실력은 나중에 토에이 소속으로 GT에 몸 담았던 ‘코이즈미 노보루’의 뒤를 이어 스스로를 원피스의 캐릭터 디자이너로까지 올려놓는 데에 큰 받침대가 되어줍니다. 참고로 2019년 여름, 원피스 애니가 와노쿠니 편으로 접어들며 ‘마츠다 미도리’가 히사다의 뒤를 잇게 되었습니다.
• ‘타테 나오키’
마지막으로 이들 중 제일 후배인 타테입니다. 3년간 동화가로 활약했던 타테는 시마누키가 작화 감독으로 승격된 Z 68화 때 같이 원화가로 올라섰고, 시마누키로부터는 타격감을, 히사다로부터는 역동적인 포즈를 흡수하며 꾸준히 좋은 활약을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때 타테의 작화체가 날카로웠다는 오해를 하는데, 사실 타테는 이 시기부터 이미 다른 애니메이터들에 비해 소프트한 스타일을 가진 애니메이터였고, 작화 감독인 시마누키나 히사다의 수정으로 그것이 가려지다가 이후 원피스에 참여하며 원피스 6기 극장판의 감독이었던 ‘호소다 마모루’의 영향을 받아 더욱 과감해졌을 뿐입니다. 이 6기 극장판에 타테가 직접 참여했던 건 아니지만요.
오늘날 타테의 스타일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것이 아니며 GT에서부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보다 더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 캐릭터들 몸의 부위를 순간적으로 늘려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테는 업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스쿼시 앤 스트레치를 잘 구사하는 인물이며 그 시작은 이 때 이미 진행 중이었죠. 시마누키와는 다르게 타테는 GT를 기점으로 애니메이터로서 한 단계 발전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그 결과, 현재는 토에이 애니메이션 최고의 애니메이터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드래곤볼 GT는 여러 좋은 점들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액션의 빈약함 때문에 저로선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드래곤볼 애니입니다. 특히 베이비 편과 전체적인 컨셉 등은 괜찮았다고 생각해서 더 아쉽네요. 가끔씩 유튜브에서 명장면들은 찾아서 보는 편인데 이 명장면들 중에서도 전투씬은 하나도 없다는 게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첫댓글 재미따
역시 다테씨도 나름이름이 있는 작화분이시군요
정말 좋은자료
캬....최고의 글이십니다 ㅎㅎ 역시 믿고 보는 ㅎㅎ
우와...역시 좋은글!!
거의 독보적 자료
멋진정보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