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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경험주의와 주체성
질 들뢰즈, in 경험주의와 주체성: 흄에 따른 인간본성에 관한 시론(Empirisme et subjectivité. Essai.. 1953)(한정헌, 정유경 옮김, 출판사 난장, 2012), pp. 165-209. (P.288)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철학자.
원제: Empirisme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53, 152 p.
이 책의 주제는 제5장의 제목 ‘경험주의와 주체성’이기도 하고,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경험을 통한 정신과 주체를 다룬다. 정신은 무엇인가 세 가지 관점에서, 정신 자기, 유기체, 그리고 시간에서. 그런데 정신과 영혼(psychê)은 어떤 관계 인지 문제제기도 없다. 마찬가지로 주체에서도 정신처럼 다룰 수 있다고 한다. 심리학이 도래하지 않은 시대에 자연이 생명을 태어나게 하고 또한 영혼을 생성하게 한다는 발상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51WKA)
<<주체는 발명하고 주체는 믿는다. 주체는 종합이며, 정신의 종합이다. 우리는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자. [1]우선 믿음 안에서 그리고 발명 안에서 주체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2]다음으로 주체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구성되는가? 어떤 요인들의 작용 아래서 정신은 변형되는가? [3]끝으로 정신 안에서 주체에 의해 작동되는 이 종합의 다양한 계기들은 무엇인가? 체계의 계기들은 무엇인가? (100, 184) [첫째는 100쪽, 둘째 106쪽, 셋째 108쪽]>
<첫째 문제에서부터 출발해보자. 또한 이전에 마치 우리가 정신을 세 가지 관점 하에서 - [a]자기 연관에 의해서, [b]감관 기관들의 연관에 의해서, [c]시간과 연관에 의해서 - 연구했어야 만 했던 것처럼, 우리는 정신이 그 자체 주체가 될 때 이 세 심급이 무엇이 되는지를 자문해 보자. (100-101, 184) - [주체의 특성에 관한한, 세 가지 심급에서 순서를 바꾸어 시간, 유기체, 정신 자체, .순으로..] >>
= [이상에서 보아 흄은 정신과 주체를 구별한다. 그 정신은 라틴어 맘(mens)와 닮았다. 영혼은 자기 계열이 있고, 정신은 여러 계열을 종합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면 정신은 인격성 또는 주체와 연관이 없고, 정신은 유적인간의 주관성이며, 표면위에서 활동하는 사회적 자기(soi)이다. 영혼이 온자아에서 자아로 선을 만들 듯이, 자기들(les sois, 타인들)의 종합으로서 체계(또는 학설, 신앙)가 있을 수 있는데, 이 체계를 온정신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면, 맘(mens)는 이중적이며, 신체의 영혼의 작동과 정신의 체계라는 두 범주가 나올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흄이 맘에서 정신을 분간해내고, 그 정신의 활동(l’action) 측면을 주체로 삼는다. 그래도 주체를 다루는 방식은 정신의 활동의 방식으로 다루어야 할 것 같은데, 정신의 확장의 방법과 거꾸로 주체의 성립은 [c] [b] [a] 순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라 한다. 정신을 다루는 실증의 자료는 주어진 것이고, 주체는 어떤 기반위에서 활동이기에 자료의 기반위에서 활동의 방식을(또는 양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 하나는 정신과 주관성이 대상성(자연)에 대한 대비로서 이중분절이라면, 또 하나는 주체(인격성, 영혼)이 신체에 대한 대비로서 이중분절일 것이다. 전자는 상층에서 후자는 표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면 심층에서는? 온자연이 물질과 온자아 사이의 이중성 또는 다중성을 만든다. 물질로 다양체를 온자아도 다양체이다. (51WK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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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경험주의와 주체성 165-209.
- Empirisme et subjectivité 90-117(P. 153)
§5.1. (90, 167)
우리는 주체성(la subjectivité)의 간추린 문제에서 경험주의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우선 사람들은 주체성을 어떻게 정의할지를 질문할 것이다. 주체는 운동에 의해 그리고 운동으로서 정의되어야 하는데, 그 운동이란 자기 스스로 전개하는 운동이다. 스스로 전개하는 것이 주체(sujet)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주체성이란 관념에게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매개(la médiation)와 초월(la transcendance)이다. (90, 167)
흄은 두 가지 차원을 인정했고, 이 두 가지를 인간 본성의 근본적 특성들로 제시했다. 즉 추론과 발명, 믿음(la croyance)과 인조물(l’articice). .. 인조물과 발명이 있는데, 그것들의 믿음으로부터 상응하는 공감은 단지 필연적 조건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믿는다와 발명하다, 이것들이 주체를 주체로서 만드는 것이다. (90, 167-168)
주어진 것(자료)으로부터 나는 주어지지 않은 다른 것(자료)의 현존을 추론한다: 그래서 믿는다. 카이사르는 죽었고, 로마는 있었고, 태양을 떠오를 것이고, 빵은 영양가가 있다. 동일한 작용[추론 조작]에서, 동시에 나는 판단하고, 나를 주체로서 – 주어진 것을 넘어서면서 - 제시한다. 나는 내가 아는 것 이상을 주장한다. (90, 168) [현재의 자아 이상의 것을 주체로 삼는다. 하나: 주장하는 인식적 주체. (51VME)] [아마도 상상작용을 통해 위상을 만드는 실천적 주체도 있을 것이고, 환타지, 착란, 망상일지라도 저너머까지를 만드는 발명적(믿음의) 자아도 있을 것이다. (51WKD)]
우리들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 즉 도덕적, 미학적, 사회적 판단에 의해도 또한 그 판단 안에서, 주체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주체는 반성하고 반성된다. 그 주체는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감화시킨 것으로부터 현실적 실행의 독립적인 능력을 분간하고, 말하자면 순수 기능을 분간한다. 그리고 그 주체는 자신의 부분성들을 넘어선다. (91, 169) [다른 하나: 도덕적, 실천적 주체. 부분성을 넘어선다는 것은 공동체성으로 향한다. moi(자아) 가 soi(자기) 로 된다. 자기는 사회체 내에서 추상기계이다. ]
그러면 우리는 무슨 권리로 그[오성의] 힘들을 가정하고 또 구별해내는가? 믿다(croire), 그것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주어지지 않은 다른 한 부분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명하다(inventer), 그것은 힘들(des pouvoirs)을 구별해내는 것이고, 그것은 근본적 총체성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총체성들은 자연 속에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91, 170) [이 총체성이 자연 안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새로운 발명, 인조물을 의미할 것이다.]
문제는 주어진 것 안에서 하나의 주체가 구성되는가? 마치 이 주체가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것인데도 구성되는가 말이다. 틀림없이 주체 또한 그 자체로 주어진다. (91-92, 170)
비판이 경험적이라는 것은 ... 사람들이 주체에 관해서, 어떻게 주체가 자료(le donné) 속에서 구성되는지?, 자문할 때이다. 이 자료의 구축은 주체의 구성에 자리를 내준다. 자료는 주체에 더 이상 주어지지 않고. 주체는 자료 속에서 스스로를 구성한. 흄의 장점은 이 경험적 문제를 순수 상태로 추출해 내었던 것이며, 이 문제를 선험적인 것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것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는 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91, 171)
§5.2. (92, 171)
[흄에서 정신이란 무엇인가? - [a]자기 연관, [b]감관 기관들(유기체), [c]시간과 연관]
[흄이 자료의 다양성을 알았던 것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인상들의 자료들은 분할가능한데 분할 불가능한 자료도 있다고 여긴 듯하다. 순수 공간과 지속 시간. ]
자료(le donné)란 무엇인가? 흄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그것은 감각적인 것의 흐름(le flux), 인상들과 이미지들의 다발(une collection), 지각들의 집합이라 한다. (92, 171)
경험주의는 다발의 경험에 의해서, 또 구별된 지각들의 움직여진 계속의 경험에 의해서 출발한다. 경험주의는 그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지각들이 구별되는 한에서 그리고 독립적인 한에서 그러하다. (93, 172)
“오히려, 모든 분리 가능한 것은 구별가능하고(discernable), 모든 구별가능 한 것은 서로 다르다(différent).” / 그러한 것이 차이의 원리이다. / “왜냐하면 다음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즉 구별될 수 없는 무엇{대상들}을 우리가 분리할 수 있다는 것, 또는 서로 다르지 않는 무엇{대상들}을 우리가 구별할 수 있다는 것, 등이 말이다. (93, 172)
이처럼 경험은 관념들이 서로 다른 것인 한에서 분리 가능한 관념들의 계속이자 운동이고, 또한 이들은 분리 가능한 것인 한에서 서로 다르다. 우리는 이 경험(cette expérience)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그 경험(l'expérience)이기 때문이다. (93, 173)
정신은 정신 안에서 관념과 동일하다. 만일 우리가 실체라는 단어를 보존하고, 우리가 정신에게 그 용도(un emploi)를 찾고자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그 관념을 갖고 있지도 않은 기저에게가 아니라 각 지각 자체에게, 정신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처럼, 정신을 종사하도록 적용해야 한다. (93-94, 173)
정신은 주체(sujet)가 아니다. 정신에게는 그 자신[정신]을 정신으로 삼을 주체도 필요하지 않다. (94, 173)
다른 한편 정신은 더 이상 온자연의 표상이 아니다. 지각은 유일한 실체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대상이다. .. 경험의 철학은 실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온자연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94, 174)
이리하여 관념은 대상의 표상이 아니라 인상의 표상이다. 그런데 인상자체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상은 표상이 아니고, 인상은 도입되지 않고(introduite), 인상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다(inne, 타고난, 본유적). 틀림없이 온자연이 있고, 실재적인 작용들이 있고, 신체(물체)들은 능력들(des pouvoir, 힘들)을 가지고 있다. (94, 174-175)
두 가지 비판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왜? 온자연과 결정 가능한 관계에 대한 물음은 그 나름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물음은 자명하지도 않고, 주어지지도 않는다. 이 물음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체뿐이다. (94, 175)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다음들의 사이에서 일치를 뿐만 아니라 알맞은 계기(au moment convenable)를 사유하는 것일 것이다. [그 다음들 사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모습들(les apparences)이 의존하는 알려지지 않은 힘들(les pouvours)과 주어진 안에서 주체의 구성을 결정하는 초월적 원리들(les principes) 사이, 온자연의 힘들과 인간본성의 원리들 사이, 온자연과 주체 사이. 그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주어진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 자료(주어진 것)는 전자의 표상도 아니고 후자의 변양(la modification) (95, 175) [전자는 대상으로서 후자는 인식주체로서 다루고자 하지만, 좁히면 신체와 영혼의 사이이다. 이 둘의 일치가 생기는 알맞은 계기를 생각해 보라는 것인데 그 답이 주어진 것(le donné)인 셈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주어진 것은 적어도 감관에 주어진다. 또 주어진 것은 기관들, 심지어는 뇌를 가정한다. (94, 175) . 이
.. 요컨대 유기체과 그 감관들은 그 자체 무매개적으로 인간본성의 특성들 또는 주체의 특성들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 신체의 메카니즘은 그 자체로 주체의 자발성을 설명할 수 없다. 기관은 자기 지신에 의해 또 자기 자체로서는 인산들의 출현의 메키니즘 속에서 인상들의 다발(une collection)일 뿐이다. (96, 176-177) [신체가 인상을 가지는 것은 메카니즘 상으로 영혼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체는?]
우리는 항상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주어진 것, 정신, 지각의 다발은 자신과는 다른 것을 표방할 수 없다. (96, 177) [남성형 자료(le donné)영혼의 상상을 넘어서, 즉 사변적으로 추론하여 등장하는 자료이며, 이것은 정신의 대상이고, 게다가 인상과는 다른 지각의 내용이라고 한다. 여기서 지각을 정신의 작용과 같은 계열에 넣은 것은 문제거리이다. 벩송에게는 지각은 신체에, 추억들과 기억 작동은 영혼에 연관을 설명한다. 그래야 실증적이다.]
정신을 정신으로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은 질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양의 관점으로부터 이다. 우리에게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관념의 표상적 성질이 아니라 관념의 분할가능성이다. 차이의 원리는 우리에게 경험주의의 근본원리를 이미 말해왔다. 그러한 것이 그것[경험주의]의 의미였다. 정신의 불변항은 그러저러한 관념이 아니고, 가장 작은 관념이다. (96-97, 178-179) [영혼에서 분할 불가능성인데, 정신에서 관념은 분할 가능성으로 있다. 정신의 개념작용으로 성립하는 정신은 성질이 빠진(내용이 빠진) 형식 또는 기표이다. 이로서 정신(또는 속좁은 이성)은 실질적 내용 없는 형식을 다룬다. 이 정신의 극한 순수공간으로서 유클리트 기하학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정신을 심리학(정신학, 관념학)으로 본 것은 상층이고, 내용과 질료를 함께하는 심리학(psychē 영혼학)을 다루는 것은 19세기 후반에서 가능했다. 무의식이 현존하고 있음을 밝힌 것은 최면이었다. - 주체와 연관을 못시킨 것은 최면중에 사실을 본인이 의식적으로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당신이 나에게 모래 한 알의 천분의 일과 만분의 일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그 수와 그것의 서로 다른 크기에 관한 구별되는 관념을 갖는다. ... 모래 한 알의 관념은 20개로 더 나아가 천개 또는 무수히 많은 관념들로 나눌 수도 없고 분리할 수도 없다.” (97 178) [이 인용문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우리는 관념자체 또는 인상을 분할의 가치 기준에 연관시키는 이런 반성을 정신의 계기(le moment de l‘esprit)라고 부른다. 정신에 주어진 것은 이러저러한 관념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래알을 표상하는데 소용되든 그 부분을 표상하는 데 소용되든 가장 작은 관념을 내세운다. (97, 179) [모래알을 크기에 의한 너비(l‘etendue)는 공간의 성립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립이라기보다 (먼저) 주어진 것으로 관념이 전에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첫째 부분을 살펴보자. 정신이 유한한 능력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작업은 최소부분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이 최소부분을 흄은 단위, 분할 가능한 점, 원자 또는 입자의 인상, 한계 짓는 관념(l’idée-limite)이라고 부른다. 더 작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은 다른 어떤 관념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물도 없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97-98, 179-180)
논제의 둘째 부분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이 첫째 부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본다. 가장 작은 관념 즉 가장 작은 인상은 수학적 점도 물리학적 점도 아니라 감각적 점(un point sensible)이다. 물리적인 점은 이미 너비가 있어서(étendu) 분할 가능하다. 수학적 점은 무(un néant)이다. (98, 180-181)
감각적 점 또는 원자는 가시적(visible)이고 가촉적(tangible)이며, 색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견고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펼쳐지지 않지만, 현존한다. (98, 181)
“플루트로 연주한 다섯 음은 우리에게 시간의 인상과 관념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청각이나 다른 감관에 나타나는 여섯째 인상이 아니다.” (99, 181)
이처럼 주어진 것(자료)이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l‘espace)이 주어진 것 안에 있다. 공간과 시간은 정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99, 181)
“정신 속에는 일련의 연속적인 지각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의 관념은 우리에게 항상 현전(제시)한다는 것이다.” (100, 182)
따라서 두 가지 객관적 특성들에 의해서 결국에는 주어진 것(자료)을 정의해야 한다: 요소의 분할불가능성과 요소들의 분배: 원자와 구조(atome et structure). 장 라뽀르뜨(Jean Laporte, 1886-1948)가 이것을 주목했듯이, 흄의 원자론에서 전체가 부분들의 합계(le somme)라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100, 183)
§5.3. (100, 183)
[주체에 관하여, 시간에서 그리고 유기체에서.]
이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가 주체(un sujet)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자 원하는가? 우리는 상상작용이 단순한 다발로부터 인식능력(une faculté)이 된다고 말하고자 원한다. 분배된 다발이 체계(un système)가 된다. 자료(주어진 것)은 그 자료를 넘어서는 운동에 의해 또 운동 안에서 재파악 된다. [그러면] 정신은 인간본성이 된다. 주체는 발명하고 주체는 믿는다. 주체는 종합이며, 정신의 종합이다. (100, 183-184)
우리는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자. [1]우선 믿음 안에서 그리고 발명 안에서 주체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2]다음으로 주체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구성되는가? 어떤 요인들의 작용 아래서 정신은 변형되는가? [3]끝으로 정신 안에서 주체에 의해 작동되는 이 종합의 다양한 계기들은 무엇인가? 체계의 계기들은 무엇인가? (100, 184) [첫째는 100쪽, 둘째 106쪽, 셋째 108쪽]
첫째 문제에서부터 출발해보자. 또한 이전에 마치 우리가 정신을 세 가지 관점 하에서 - [a]자기 연관에 의해서, [b]감관 기관들의 연관에 의해서, [c]시간과 연관에 의해서 - 연구했어야만 했던 것처럼(§5.2.), 우리는 정신이 그 자체 주체가 될 때 이 세 심급이 무엇이 되는지를 자문해 보자. (100-101, 184) - [주체의 특성에 관한 세 가지 심급에서 순서를 바꾸어 시간, 유기체, 정신 자체, .순으로..]
우선 시간과의 관계에서, 이 지각들이 나타나는 양태 속에서 고찰된 정신은 본질적으로 계속(succession), 즉 시간이다. 이제 주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지속(une durée)에 대해, 습관(une coutume)에 대해, 습관(une habitude)에 대해, 기대(une attente)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기대는 습관이고 습관은 기대이다. 과거의 추동력(la poussée)과 미래로 도약(l'élan), 즉 이 두 가지 규정들은 동일한 근본적 역동주의의 두 측면이며, 즉 흄 철학의 중심이다. 습관-기대에서 벩송적 지속이나 기억의 대부분의 특성들을 발견하기 위해 그 텍스트들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 흄은 주체성의 두 가지 작용인 믿음과 발명을 연구할 때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101, 184)
여기서 흄은 대다수의 공리주의자들 또한 전개하게 될 단순한 법률 이론을 다시 가져온다. 그것은 각각의 인간 자신이 소유하는 것을 보존하기를 기대한다(s'attend)는 것이다. 좌절된 기대의 원리는 소유권의 논리 안에서 모순의 원리의 역할, 종합적 모순의 원리의 역할을 하게 된다. (101, 185)
그러나 습관과 기대의 역동성만이 그런 상태를 소유권으로 변형시킨다. 흄의 독창성은 이런 역동성의 이론에 있다. 말하자면 기대는 습관에 의해 일어나는 현재와 과거의 종합인 것이다. 기대, 즉 미래는 주체가 정신 안에서 구성하는 시간의 종합이다. (101-102, 185)
“다음과 같은 것이 관습(l'accoutumance, 습관, 중독)의 효과이다: 중독은 우리가 오래 향유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익숙해지게(familiariser)할 뿐만 아니라, 중독은 또한 호의로 배열(une disposition, 재량권)을 생겨나게 하도, 또 아마도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덜 알려진 다른 대상들 보다 우리에게 그것을[오래 향유했던 것을] 선호하게 한다.” / 이런 관점에서 특권화된 실례는 시효의 실례이다. .. 소유 상태 그자체가 시간이며, 시간 이외 그 무엇도 아니다. (102, 185-186)
시간이 그러한 연관 속에서 주체와 함께 있다는 것, 주체가 우리에게 시간의 종합을 제시한다는 것, 이 종합이 오직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며 발명적(inventive)이라는 것을 더 잘 말할 수 없다. (102, 186)
믿음에 있어서도 자명하다. 우리는 믿음이 단지 원인[결과] 관계에 의해 현재의 인상에 통합된 생생한 관념이라는 것을 안다. 믿음은 감정이고 관념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방식이다. 믿음은 “생각된 관념이라기보다. 오히려 느껴진” 관념, 생생한 관념이다. (102, 186-187)
결국 [시간의 종합이라는] 본질에서 원인(결과)적 관계란 무엇인가? “이것은 한 대상에서 이것을 습관적으로 수반하는 다른 대상의 관념으로 이행하는 관례(la coutume)에 의해 생산된 경향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습관(l'habitude)과 경향의 이런 역동적 통일성을, 미래를 구성하는 과거와 현재의 종합을, 지나간 경험과 현재에서 적응의 종합적 동일성을 재발견한다. / “관습(l'accoutumance, 습관, 중독)은 인간 삶의 위대한 지침이다. (…)...” (103, 188)
요컨대 종합은 과거를 미래의 규칙(règle)으로서 제시하는데 있다. 우리는 믿음에서도 소유(la propriété)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상 동일한 변형(transformation)과 마주친다: 즉 시간은 정신의 구조였다. 그런데 이제 주체는 시간의 종합으로 소개된다. (103, 188)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 관념의 형식 하에서 한 인상의 재출현이다. 그러나 당연히 기억[추억] 그 자체에 의해서는 시간의 어떠한 종합도 조작[작업]할 수 없다. 기억은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기억은 자료(주어진 것)의 다른 구조들의 재생산에서 자신의 본질적 역할을 발견하지 못했다. (103-104, 188)
이러한 의미에서 습관과 기억의 관계는 주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응할 뿐만 아니라, 습관은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차원 없이도 쉽게 지낸다. 즉 습관은 기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습관은 일상적으로 이런 저런 방식으로 기억 없이 지낸다. 때로는 습관이 추억(souvenirs)들의 어떠한 환기도 동반하지 않으며, 때로는 습관이 환기할 수 있는 어떠한 개별적 추억도 없다. 한마디로 과거로서 과거는 주어져 있지 않다. 다만 과거는 주체에게 자기의 진정한 기원과 원천을 부여하는 종합에 의해서 또 종합안에서 구성된다. (104, 188-189)
“당신이 물체들의 본성을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웠다고 주장해 봐도 소용없다. 물체들의 감춰진 본성은, 아울러 그 물체들의 모든 결과들과 활동들은 그것들의 감각적 성질들이 아무 변화하지 않고서도 변화할 수 있다. 이런 일은 가끔 몇몇 대상들에서 생겨난다. 왜 그런 일이 모든 대상들에서는 항상 생겨나지 못했는가? 어떤 논리, 어떤 추론의 과정이 당신에게 이런 가정[의심]에 대해 보증해주는가? 나의 실천이 나의 의심들을 반박한다고 당신이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질문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 나의 행동[활동]에서는 [당신이 말한] 그 점에 관해서 충분히 만족한다. 그러나 얼마간의 호기심을 가진 철학자로서 나는 회의주의를 말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이러한 결론의 토대를 알고자 갈망한다.” (104-105, 190)
사실 실천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과거와 현재가 주어지면 종합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현재와 과거는, 약동의 출발로서 이해된 전자와 관찰의 대상으로서 후자이기에, 시간의 특성들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시간의 구성요소들이기보다 오히려 종합자체의 산물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정확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는 시간 속에서 몇몇 원리들의 영향 아래서 구성된다. 시간의 종합은 그 자체가 구성화, 조직화, 이중의 감응(cette double affection)일 뿐이다. (105, 191)
한편 흄은 우리에게 경험을 하나의 원리로서 제시하는데, 이 원리는 다양성, 즉 유사한 경우들의 반복을 표출한다. 다른 한편 흄은 습관 속에서 하나의 다른 원리를 보는데, 이 원리는 우리에게 하나의 대상에서 이것을 동반하는 대상으로 이행하기를 규정한다. 말하자면 이 원리는 우리가 적응해야 하고 적응할 수 있는 영원한 현재로서 시간을 조직하는 것이다. (105, 191) [여기서 두 가지 원리는 하나는 경험에서 다른 하나는 습관에서 온다고 한다. 전자에서 반복, 후자에서 조직이다. 후자가 추론으로 연결되어 인과를 성립시키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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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방금 주체가 정신 안에서 구성될 때 시간이 어떻게 변형되는 지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둘째 문제로, 유기체는 무엇이 되는가로 이행할 수 있다. 좀 전에 유기체는 구별된 지각들의 메커니즘으로서만 제시되었다. (106, 192)
유기체는 이중의 자발성을 취한다 ... 우선 관계의 자발성(une spontanéité de relation)이 있다. “우리가 어떤 관념을 생각할 때, 동물 정기(les esprits animaux)가 인접한 흔적들로 들어가서 그 관념과 관련된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106, 193)
다른 한편으로 배치의 자발성(une disposition de relation)이 있다. 우리는 흄에게 두 종류의 인상들, 즉 감각 인상들(les impressions de sensation)과 반성 인상들(les impressions de réflexion)을 구별하는 것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살펴보았다.
“정신은 감각의 모든 관념들을 수천번 다시 지나간다고 해도 거기로부터 새로운 독창적(originale) 관념을 결코 추출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서, 즉 정신이 그러한 관조로부터 새로운 독창적 인상을 태어나게 한다고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연이 그런 방식으로 인식능력으로 행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107, 195) [자연이 행사하는 경우에만 정신은 독창적 관념을 추출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주체성의 원리들이 정신 안에서 반성 인상들을 구성할 때 그 원리들의 어떤 새로운 차원을 신체에게 부여하는가 아는 것이다. 감각 인상들은 하나의 메커니즘에 의해 정의 되었고, 이 메커니즘의 절차로서 신체를 참조했다. 반면 반성 인상은 하나의 자발성, 배치(une disposition)에 의해 정의되고 이 자발성의 생물학적 원천으로서 신체에 귀착 한다. (107, 194)
이 경우에 자연은 “그 자체로 무매개적으로” 정념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들의 작용에 의해 보조되어야만 한다.” 이 원인들은 자연적이지만 기원적(originelle)이지 않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 신체적 배치[배열]의 역할은, 자연적이고 결정 가능한 상황들 속에서 정념을 생산하는 외적 대상에 에 의해 할당될 뿐이다. 즉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정념의 현상을 신체적 배치로부터만 이해할 수 있다. “자연은 신체에게 몇몇 욕구들과 몇몇 성향들을 부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 정신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러면 배치의 일반적 의미는 무엇인가? 정념의 개입에 의해 배치는 어떤 관념의 출연, 정념에 응답하는 대상의 관념을 자발적으로 불러일으킨다. (108, 195)
§5.4. (108, 195)
남은 것은 가장 일반적인 마지막 관점이다. 다른 기준 없이 주체와 정신을 비교해야 한다. .. [셋째 문제로] 즉 정신 안에서 주체를 구성하는 원리들은 무엇인가? 어떤 요인(facteur) 아래서 정신은 스스로 변형되는가? 흄의 대답이 간단하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정신을 주체로 변형시키는 것, 정신 안에서 주체를 구성하는 것, 그것은 인간 본성의 원리들이다. (108-109, 195-196)
이 원리들은 두 종류이다. 한편은 [관념]연합의 원리들이고 다른 한편은 정념의 원리들이다. 우리는 후자를 일반적 형식 하에 어떤 점에서 유용성의 원리(un principe d’utilité)로 제시할 수 있다. (109, 196)
관계들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 이것은 명백하다; 만일 관계들이, 관념들은 관념들 사이에서 성립되는데, 이 관념들 자체의 소유들을 원인들로서 갖지 않는다면, 즉 만일 관념들이 다른 원인들을 갖지 않는다면, 이런 다른 원인들은 혼자서 관계들을 확립하는 하나의 주체를 결정할 것이다. 진리와 주체성의 연관이 드러나는 것은 진실한 판단이 동어반복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서 이다. (109, 196)
관계들은 그것들의 항들의 밖에(sont extérieurs, 외재적) 있다: 윌리엄 제임스가 스스로 다원론자라고 말할 때, 원칙적으로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버트란트 러셀이 스스로 실재론자라고 말할 때, 마찬가지이다. 이 명제에서 모든 경험주의들의 공통점을 보아야 한다. (109, 197)
흄이 관계들의 두 종류를 구별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관념들의 어떠한 변이도 없이 변할 수 있는 관계들”(동일성, 시간과 장소의 관계, 원인성) 그리고 “우리가 서로 서로 비교하는 관념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들”(유사성, 반대, 성질의 정도, 양과 수의 비례) 이다. 이런 의미에서 후자의 관계들은 밖에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가 믿었던 바인데, 칸트가 흄이 수학을 분석판단의 체계로서 제시했다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관계는 그것의 항들의 밖에 있다. (109-110, 196) [관계라는 관념(또는 개념)은 항들 밖에 있다. 즉 항들의 연결고리이며, 계산에서 + - 등과 같은 연산자 밖에 항들이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관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고려될 수 있다: 집합적이고 분할불가능하게, 분배적이고 개별적으로, 즉 관념의 출현양태가 그 관념을 위치시키는 결정 가능한 다발 안에서 그리고 관념의 고유한 특성들 안에서 고려될 수 있다. (110, 198) - [집합적 분배적은 구성에 속하고, 분할가능하고 개별적은 관계에 속해야 할 것 같다.]
의심할 바 없이, 그러나 이처럼 정신은 대치(une confrontation)의 재료(la matière)만을 우리에게 주었지만, 정신의 현실적 원리를 주지 않았다. 인접하거나 멀리 떨어진 대상들은 전혀 설명되지 않는데, 그것은 거리와 인접성이 관계들(des relations)이라는 것이다. 정신 속에서 공간과 시간은 구성(une composition)일 뿐이다. ... 관계의 독창성은 동일성의 문제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실 여기서 관계는 허구(fiction)이다. (110-111, 198-199)
관념들이 분할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관념들이 구성하는 단위들(les unités)이 더해지고, 빼지고, 등가가 되고, 연산 체계 속에서 들어가는 것을 설명해주지도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 관념들의 배열 덕분에, 그 관념들이 구성한 길이들(les longueurs)이 측정되고 평가될 수 있다는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거기서 산술학과 기하학이라는 두 가지 별개의 문제를 인식한다. (111, 199-200)
“적합하다고 판단한다(juger bon)”는 판단은 최상의 표현이다. 그것은 결국 규범적 판단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이 판단, 이 규범이 무엇인지, 주체성의 규범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 한계에서 흄의 의지주의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인데, 그 문제는 의지의 원리들, 정신의 특성들과 독립된 원리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111-112, 200) - [수학적(기하와 산술)의 판단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법칙과 같아서, 그 극한에서 관계의 설정은 주체(정신)와는 무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기하의 단위 점과 길이와 산술의 단위 수는 주체의 문제라기보다, 정신성(지성성)의 기호에 의한 놀이 또는 가상성일 것이다.]
이 원리들은 우선 [관념]연합의 원리들, 즉 인접성, 유사성, 인과성이다. 명백히 기 용어들은, 이것[용어]들이 관계들의 경우들로서만 제시되었을 때, 이것들이 조금 전에 파악되었던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관계들은 연합의 원리의 한 결과[효과]이다. 이 원리들 자체는 정신에게 항상성[일관성]을 부여하고, 정신을 자연화한다. (112, 200)
요컨대 연합의 원리들은 결과로서 복합관념들을 갖는다: 즉 관계들, 실체들과 양태들, 일반관념들. 연합의 원리들의 영향 아래서, 비교되고, 그룹으로 묶이고, 환기된다. 이 연관(ce rapport)은 오히려 이 복합관념들의 내밀함과 주체의 내밀함은, 하나는 다른 하나의 이면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에게 언어 속에서 표현된다. 왜냐하면 주체는 말함으로써 어떤 종류로든 관념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 관념들은 이미 주체에게 지칭되어있었다. (112-113, 201)
관계는 그 항들에게 바깥에 있다. 이것은 관념들이 연산[계산]들(des operations, 계산)의 본성을 고려하지 않고 특히 관계들의 본성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연산들이란 사람들이 관념들 위에서 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관계들이란 사람들이 관념들 사이에서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본성의 원리들, 연합의 원리들은 관계들의 필연 조건들이다. (113, 201-202)
우리는 흄이 연합으로 설명되는 것을 자연적 관계, 연합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철학적 관계라 부르고 있음을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흄은 가장 중요한 것인 다음 관점을 많이 강조한다: 자연(본성)의 고유함은 자연적이고 편안하고 무매개적이라고. 매개들(les médiations) 안에서 자연(본성)은 자신의 힘과 자신의 생생함을 상실한다. 중개물들(les intermédiaires)들은 자연을 고갈시키고, 중개들 각각에게 자연은 자신의 어떤 것을 남겨둔다. (113, 203)
흄이 말하듯이 닮음(유사성)은 항상 관념들의 연결 또는 연합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 “성질이 매우 일반적이 될 때 그리고 성질이 아주 많은 개별자들에게 공통적일 때, 그 성질은 정신을 개별자들 중의 어떠한 것으로도 직접적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성질이 한꺼번에 너무나 큰 선택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 성질이 개별적으로 어떠한 대상으로 스스로 고정되도록 하는 것을 상상작용에게 못하게 막는다.” (114, 203)
[관념]연합론에 대한 이루어진 대부분의 반대들은 이러한 것에 귀착한다. 그러니까 연합의 원리는 사유의 형식 일반 엄격하게 설명하지만, 사유의 특이한 내용을 설명하지 못한다. 연합은 우리 의식의 표면만을, “껍질(la croûte, 외피)만을 설명한다. 이점에 관해서 벩송과 프로이트만큼이나 다른 저자들이 서로 만난다. 벩송은 유명한 저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실재로 두 관념 사이에 약간의 유사성의 특징[특징]을 지니지 않거나 어떤 측면에서 서로 접하지 않는 경우를 찾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우선] 유사성의 경우는 어떠한가? 두 이미지가 아무리 심층적인 차이에 의해 분리된다 하더라도 훙분히 높이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것들이 속하는 공통의 류(類)를, 따라서 그것들에 연결선의 구실을 하는 유사성을 항상 발견할 것이다. … 우연히 선택된 임의의 두 관념 사이에는 언제나 유사성이 있으며, 언제나 인접성도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잇따르는 두 표상 사이에서 인접성 또는 유사성의 관계를 발견한다고 한들 왜 하나의 표상이 다른 표상을 떠오르게 하는 지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 진정한 문제는 어떤 측면에서는 모두가 현재적 지각을 닮고 있는 무한한 추억들(souvenirs) 중에서 어떻게 선택이 이루어지는 지, 왜 그것들 중의 하나만이, 저것이 아닌 바로 이것이 의식의 빛에 출현하는 지 아는 것이다.” (114, 204-205)
관념들의 연합은 이 관념대신에 저 관념이 상기되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관계를 “상상작업에서 두 관념이 임의적으로 통합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가 두 관념들을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게 되는 이 개별적인 상황(cette circonstance particulière)”으로 정의해야 한다. ... 관계에게 충족이유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상황(la circonstance)이다. (115, 205-206)
이 상황의 용어는 흄의 철학에서 줄곧 나타난다. 상황은 역사의 중심에 있고, 상황은 개별적인 것의 과학과 미분 심리학을 가능하게 한다. 프로이트와 벩송이 관념 연합은 우리 안의 표면적인 것, 의식의 형식주의만을 설명한다고 지적할 때, 이들이 본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말은 감화(affectivité)만이 특이한 내용, 심층, 개별자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옳다. 그러나 흄이 말한 것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다. 흄은 다만 표면적인 것, 형식적인 것 역시 설명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런 임무가 어떤 의미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머지에 대해서 흄은 상황을 내세운다. (115, 206)
이렇게 이해된 상황들의 집합은 항상 주체를 특이화한다. 왜냐하면 그 상황들의 집합은 그것의 정념들과 욕구들(besoins)의 상태를, 그것의 이해관계들의 할당을, 그것의 믿음과 생생함의 분배를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체가 정신 속에서 구성되기 위하여, 정념의 원리들이 연합의 원리들에게 통합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본다. (116, 206-207)
§5.5. (116, 207)
상황을 필요한 것은 관계들만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체들과 양태들에도, 또한 일반관념들에도 있다. (116, 207)
“왜냐하면 불가분적 개념들은, 이 관념들이 자체들 사이에 유지하는 이런 유사성을 참작하여, 그룹으로 그리고 일반항 아래로 놓이기 때문에, 이 유사성은 상상작용 속에서 관념의 출현을 쉽게 하는 것이 틀림없고, 관념들이 기회에 맞게(à l'occasion) 보다 편안하게 암시되게 해주는 것이 틀림없다.… 가장 찬탄할 만한 것은 관념들이 필연적이거나 또는 유용한 그 순간에 상상작용은 신속하게 자기의 관념들을 암시하고 이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116, 207-208) [상상작용이 신속하게 유용한 관념을 끌어온다. 그것도 기회에 맞게.. / 실증적 설명이 불가능할 때 .. 쓰는 표현법일까?]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주체가, 두 종류의 원리들이 결합되어 나온 영향 아래서, 정신 안에서 제시됨을 본다. 모든 것은 마치 연합의 원리들이 주체에 필연적 형식을 부여하는 것처럼 일어나지만, 반면에 정념의 원리들은 주체에 특이한 내용을 부여한다. 이 후자[정념의 원리들]는 주체의 개별화 원리로 기능한다. (116-117, 208) - [연합에서 주체는 사회적 자기(soi)이라면, 정념에서 나온 개별화에는 자아(moi)가 있다. ]
결국에는 수단-목적, 동기-행위라는 연관들(ces rapports)은 관계들(des relations)이고 또한 다른 사물이기도 하다. 이론적 주체성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 또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은 경험주의의 근본 명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을 잘 살펴보면 말하는 다른 방식일 뿐이다: 주체는 자료들 속에서 구성되어있다. 만일 주체가 자료(주어진 것) 안에서 구성된다면, 결국 주체에는 실천적인 것만이 있다. (117, 209) [연합에 따라 표면 위에서 주어지는 주체는 실천적 주체(soi)이고, 개별화된 정념에서 발생하는 주체는 자아(soi)이며, 전자에서 정신(지성, 오성)을 다룰 수 있고, 후자에서 영혼을 다루게 되겠다. 이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다룰 수 밖에 없지만, 지성과 오성은 영혼과 연관없이 물질의 절단, 배열, 배치로 다룰 것이다. 이런 표면적 물질성을 다루는 것을 명령 또는 지시로 다룰 수 있는 가상성(상징, 기표)을 이름 짓자면 정신(Soi)일 것이다. 이 정신은 프로이트에서 초자아(Surmoi)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신 즉 온자기를 초월적이라기보다 삶의 한계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부분을 다룰 수 있다는 가정에서 성립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초월은 없다. 천국도 없고, 부활도 없고, 윤회도 없다. 온자아(유저정보)에서 자아들의 생성이 있으며, 이 생성은 동일반복도 차이반복도 아니라, 새로운 생성으로서 차히반복을 한다. 현실의 삶에 대한 문제로서 실천은 자아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흄은 자기(soi)에서 - 적응, 유용성, 편안을 바탕으로 -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51WK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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