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어의(御醫)로 뽑혀 약원(藥院)에 들어가는데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본원원(本院員)이니 그 의원은 모두 의업(醫業)을 세습하여 대대로 약원의 직임을 맞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의약동참(議藥同參)이란 것으로, 사대부로부터 미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재능이 있으면 모두 보임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동참의 경우 인원이 적지만 기술이 좋다. 세상에 전하기를 식암(息庵) 김석주(金錫胄)는 정승에 이르도록 동참의 직을 겸하고 있었다.
명의 유상(柳瑺)은 감사 유경집(柳景緝)의 얼자(孽子)인데, 동참으로 숙종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높은 품계에 올랐으며, 아직도 명의로 세상에 이름이 남아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판서 윤혜교(判書 尹惠敎)가 경기감사로 있을 당시에 훗날 정승을 지낸 아들 윤동도(尹東度)가 어린 나이였는데, 천연두를 알아 위중한 상태였다. 이에 유상을 불러 보이니, 유상이 “자초용(紫草茸)① 몇 근이 있다면 살려낼 수 있을 터인데, 어디서 얻을 것인가? 이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하였다. 윤 판서가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구했다. 양근(陽根)의 저리(邸吏)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고을 백성 중에 자초(紫草) 장수하는 사람이 지초를 캐 가지고 한양으로 들어왔다가 팔지 못하고, 지초 묶음을 저가(邸家)에다 버리고 갔습니다. 그래 그 지초 묶음을 해치고 살펴보니 장마 중에 여러 개의 자초용이 싹이 나서 이에 바치러 온 것입니다” 하였다. 싹을 따보니 자초용이 여러 광주리가 되었다. 유상이 한식하기를 “인력이 아니로다” 하고 다려서 여러 번 씻기니 과연 소생했고 딱지도 잘 떨어졌다.
윤동도는 노경에 재상의 위치에 올랐는데 얼굴에 마마 자국이 두꺼비 등과 같았다.
김석주의 집안은 감사 김징(金澄)과의 틈이 있어 김징은 이 때문에 벼슬길이 막혀 죽었다. 김감사의 부인 함평이씨는 과부가 되어 여러해 고질병을 앓았는데, 의원이 “인삼 근이나 써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김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한 분은 뒤에 정승을 지낸 김구(金構, 1649~1704)이고, 한 분은 참판을 지낸 김유(金楺, 1653~1719)이며 또 한 분은 목사를 지낸 김무(金楙)이다.
김석주가 우연히 두 수제의 인물됨을 보고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약국 주인을 불러 “자네는 김씨 집안과 친한 터이니 나의 인삼을 가지고 가서 너의 인삼이라고 말하고 김씨 집에서 인삼을 구하러 오면 근수를 따지지 말고 달라는 대로 모두 주어라” 하였다. 약국 주인은 정승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가난했던 시절에 김정승을 후하게 대접한 사람이었다. 김정승은 땔감 파는 소를 타고 교외로부터 서울로 들어올 때면 늘 그 약국에 머물렀고 밤이면 행장에서 관솔을 켜고, 대동법의 계책을 계획하곤 하였다. 김정승이 귀하게 되자 약국 주인은 잠곡의 집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잠곡은 이름이 육(堉)인데 선혜청(宣惠廳)에 대동법을 설치하여, 온 나라가 오늘의 이르도록 그 은혜를 입고 있다. 잠곡은 김석주의 조부이다. 식암은 이름이 석주로서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약국 주인은 또한 김징 집안과 친하게 지내던 터였는데, 그 집안이 망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변하지 않고 도와주곤 하였다.
하루는 김구가 사천에 시골집으로부터 걸어서 약국을 찾아와 “친환에 인삼을 써야 하니, 인삼을 좀 빌려 달라”고 하였다. 약국 주인이 인삼을 내어주고는 김석주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김석주는 계속 인삼을 내어 약국에 비치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몰래 병에 기록을 구해오게 하여 그 기록을 보고 좋아하며 말하기를 “이 병원 허로(虛勞)②에서 온 병이라 치료할 수 있겠다. 너는 인삼을 계속 대주고, 또 계속해서 쌀과 소금 기름 등속을 대어주라” 하였다. 몇 해를 지나자 병이 나아 완전하게 되었다. 부인이 울면서 두 아들에게 “아버지에게는 원수요. 어머니에게는 은인인데, 아들이 갚고자 할 때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두 아들은 어머니의 속뜻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기를 “원한은 가볍고 은덕이 크다면, 원한은 놓아 두고 은덕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부인이 “의리가 그렇다. 너희들은 너희 어미의 병을 낫게 한 사람을 아는가? 온 나라를 두고 누구의 재력과 누구의 의기가 능히 우리 집을 살려낼 수 있겠느냐? 일찍이 듣자하니, 약국 주인이 청성 집안과 친하다고 하니 반드시 청성이 모르는 중에 개책을 쓴 것 일 게다. 남편이 벼슬이 막혔던 것은 죽인 것과 다르고, 내가 살아난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이다. 너희들이 장차 김씨에 대한 원한을 갚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내가 우는 것이다” 하였다. 두 아들이 약국 주인을 찾아가 알아보니 과연 그러했다. 두 아들이 돌아와 그 사실을 말씀드리고 또한 울면서 “어머니께서 생각하신 바가 참으로 의리에 그러합니다” 하였다.
김석주가 죽은 뒤 그의 집안이 남인으로부터 화③를 당했는데, 김징의 두 아들이 이미 집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힘껏 구제하여 화가 그쳤다. 후세에 정승을 지낸 김재로(金在魯)는 곧 김구(金構, 1649~1704)의 아들이요. 병판 김성응(金聖應)은 청성집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만나 뜻 대대로 내려오던 혐의를 씻었다.
세상에 또 전하기를 김석주가 일찍이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을 보고 말하기를 “명년에 공이 반드시 각기병을 앓을 것이다. 급히 나를 찾아오면 치료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죽을 것이다” 하니 윤정승이 웃으면서 “내 다리는 튼튼하다. 명년 일을 어찌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김석주가 “잊지나 말라”라고 하였다. 그때가 되자 과연 통증이 일어나 예사롭지가 않았다. 급히 김석주를 맞이하니, 김석주가 소매 속의 약을 여러 첩 넣어 가지고 와서 복용하게 하고는 “그때 미리 치료했더라면 독을 제거하여 병을 앓지 않았을 터인데, 공이 웃기에 감이 억지로 권하지 못했다. 이제 다행히도 조기에 치료하게 되었지만, 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목숨에는 관계가 없다” 하였다. 그 약을 먹었더니 통증은 가라앉았으나, 종지뼈가 상해 한쪽 다리가 종신토록 못 쓰게 되었다. 그래서 당론에 치우쳐 윤공을 배척하는 자들이 모두 그를 독각정승(獨脚政丞)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김석주가 의술에 신통한 것이 대게 이와 같았다.『병세제언록 이규상』
【주】
① 자초용(紫草茸) : 자치의 싹. 두창 종창 약창에 쓴다.
② 허로(虛勞) 원기가 모자라는 것.
③ 김석주가 서인으로 숙종초기에 남인 세력을 제거할 때, 그 수단이 지나치게 음험하여 잔혹하였으므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때 남인이 집권하자 김석주의 집안을 아주 철저히 몰락시킨 일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