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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개혁과 동서양의 사상적 융합"
초록교육연대상임대표 호서대 교수 이기영
지난해 7월 16일 남양주 능내리 한강변 다산유적지에서는 정약용 탄신 249주년 기념음악회 ‘열수는 흐른다’가 열렸다. 1부로 다산 연구로 명성을 떨쳐온 서울대 금장태 교수가 ‘다산 정약용과 서학’이란 제목의 특강을 하고 2부엔 자연사랑문화예술인모임과 다산문화교육원의 다산을 주제로 만든 노래와, 클래식 기타연주, 전통 선비 춤 등이 이어졌다. 자연사랑문화예술인모임은 1999년에 결성해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져온 문인과 예술인들의 모임으로 원래는 ‘환경문화예술진흥회’란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주로 자연을 사랑하는 주제로 연례행사인 ‘백련시사(白蓮時社)’ 등 그동안 크고 작은 환경음악회를 매년 두세 차례 열어왔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다산이 28세에 고향에 돌아와 쉬면서 쓴 한시 ‘숙정촌’을 풀어서 작곡한 가곡 ‘강마을’을 청중과 함께 불렀다. 강마을은 다산의 한시들이 대부분 사회를 그린 참여시인데 반해 순수하게 자연을 읊은 드문 서정시로 다산의 고향인 한강변 마제주변의 평화로운 시골풍경을 보여 준다. 그해에 다산은 대과에 합격해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벼슬길에 들어서 서울로 이사했다. 이후 다산은 정조의 신임을 얻어 개혁을 단행하고 수원화성을 설계하는 등 큰일을 하게 된다. 또한 첫아들인 학연을 낳아 고향에 내려오는데 서울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오랜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돌아본 고향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렸다.
또한 한국의 토속시인 박목월의 시풍을 이어온 오세영 시인의 ‘다산초당’을 작곡해 귀화 일본인인 소프라노 후나타니 유까의 노래로 발표하였다. 유까씨는 다산을 사랑해 다산초당을 자주 드나드는데 한국인 교수와 결혼해 한국에 산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 판소리를 좋아해 판소리 조의 한이 서린 창법으로 가곡을 노래한다. 이외에도 국립국악원의 시조명창 문현이 다산이 타계하기 직전에 쓴 회혼시로 만든 시조 ‘육십풍륜’을 작곡해 노래했고 클래식기타리스트 박종화는 ‘다산아리랑환상곡’을 자작곡으로 연주했다. 매번 이 음악회의 주제가로 연주되는 ‘한강은 흐른다’는 은행가인 아마추어 테너 문상준이 노래했다. 문상준은 매우 큰 성량과 아름다운 미성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켜 성악가보다도 더 큰 갈채를 받았다. 5~6년 전 우연히 한 세미나에서 다산문화교육원의 김경선 상임이사를 만나 권유를 받아 나도 이사가 된 다음해인 2008년부터 매년 다산탄신일에 그의 생가에서 열린 ‘열수는 흐른다’란 음악회를 직접 기획하고 진행해왔다. ‘열수’는 50대에 다산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호인데 다른 형제들도 함께 사용했던 당호로 한강의 옛말이다. 목민심서나 흠흠심서 등 다산의 대표적인 책들엔 열수가 사용되었다. 올 2012년은 다산 탄신 250주년이어서 요즘 난 그동안 만든 다산관련 노래들을 모아 다산 탄신 기념음반을 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현존하는 학자들에 의해 한민족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로 선정되기도 했던 다산은 200여 년 전 부패가 극심했던 조선사회를 개혁하기위해 정조와 뜻을 함께 하며 성리학을 연구, 보완했고 실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관념적인 주자학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백성에 대한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로 부패에 빠진 조선사회를 구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경학을 실천적으로 연구해 경세학으로 다시 쓰고 당시 처음 접한 서학을 도입해 강력한 도덕국가를 세울 개혁의 꿈을 꾸었다. 당시 실세인 노론들을 따돌리기 위한 천도를 위해 수원성을 쌓았지만 그의 꿈은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18년간의 유배생활로 이어져 다만 그의 이상을 담은 500여권의 책만을 남겼다. 만일 정조가 다산과 이루려한 조선의 혁신이 성공했다면 곧이어 일어난 농민들의 반란으로 그 많은 동학인 들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일제에 짓밟히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최근엔 90년대부터 외환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부패한 기업인들이 중심이 되어 정권을 잡자 그 동안 대규모 감세 등 대기업과 강남부자들만을 위한 정치로 나라의 곳간이 텅 비고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이에 따라 극빈층이 늘어나고 학생과 교수들이 연쇄 자살하는 등 우리나라는 현재 최악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은 더 큰 부자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도탄에 빠져 카드를 포함한 생계형 가계 빚이 나라를 위협할 정도가 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200년 전, 그토록 백성을 사랑했던 다산이 이루지 못했던 개혁안을 연구해 현실에 반영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다산이 아방강역고에서 밝혔듯이 한국 고대사에서 대륙으로 진출해 큰 영토를 확보하고 찬란한 동아시아문화를 이루었으나 거란에 복속된 후 다시 되찾지 못해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었던 발해를 다시 연구해야한다. 더욱이 민족적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일제시대 때 식민지 정책으로 말살되었던 우리 한민족의 고대사를 복원시켜야 할 것이다. 한 걸을 더 나아가 이제는 성기호론(性嗜好論)으로 사람개개인의 차이와 선택권을 인정해 인권의 초석을 놓았던 다산의 민주적 인간관을 연구하고 이를 기초로 종교철학적 관점에서 동서양의 가치관 융합을 시도했던 다산의 새 인류문명 창조를 다시 시작해 나가자.
7~8년 년 전쯤인가, 남양주의 한 수련원에서 특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산 생가인 여유당이 근처에 있음을 깨닫고 자동차 핸들을 돌렸다. 당시 난 ‘유배지에서 온 편지’란 다산의 편지를 정리한 책을 읽었는데 그의 지극한 백성사랑과 시대를 걱정하는 학자로서의 진성성에 감동해 여러 차례 눈물을 쏟아낸바 있다. 200여 년 전 새로 접한 서구의 과학과 사상을 연구해 성리학을 보완한 실학으로 발전시켜 국가와 백성에 공헌했던 그 청렴했던 천재 선비를 가까이서 음미해보고 싶었다. 평소에 목민심서를 보면서 그의 뜻이 지금 우리의 부패한 현실에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3, 4년 전 베트남 관광여행 때 안내원이 청렴한 지도자인 호지민이 항상 다산의 목민심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읽었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베트남 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베트남의 아버지’ 호치민(胡志明. 1890~1969)이 1969년 사망할 때 머리맡에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가 놓여있었다. 호치민은 무척 목민심서를 사랑해 공무원 필독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다산은 관리들의 청렴은 관리의 본분이고 모든 선행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말하며 공무원들이 쓰는 돈이 백성의 피와 땀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호지민이 타계했을 때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목민심서를 비롯한 책 몇 권만을 유품으로 남겼다는 사실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이런 나의 진심을 알리고 싶어 다산의 묘지주변을 빙빙 돌며 마음을 집중해 한참동안 그와 영적인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러나 뜻대로 안 되자 포기하고 내려와 그의 자취를 둘러보고자 다산 기념관으로 들어섰다. 마침 나이가 지긋하신 한 여성 자원 봉사자 한분이 나에게 다가와 그의 유품들을 돌아가며 설명해주었다. 한학자인 그 분은 내가 다산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무려 세 시간이 넘도록 다산의 작품들을 돌며 한시의 획 하나까지 조목조목 읽어가며 세세히 설명해 주었다. 며칠 뒤 방학을 맞아 나는 다산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해 백팩 하나 달랑 메고 그가 18년간이나 유배당했던 해남 강진으로 내려가 다산초당을 둘러보았다. 여기서도 지역 문화운동을 하시는 박상일 선생님의 안내로 다산초당은 물론 대흥사의 혜장스님과 초의선사와 함께 했던 200년 전의 다산의 행적을 쫒아 다닐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난 다산에 관련된 책이 나오면 빠짐없이 읽기 시작했다. 당시 일을 나중에 다시 회상해보니 이 여성 자원봉사자를 통해 다산의 영혼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대표적인 실학자의 한사람인 다산은 일찍 서양문물을 접했고 서학에 빠져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역사상 다산과 다산의 둘째형 손암 정약전 그리고 셋째형 정약종처럼 한집안 3형제가 한꺼번에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긴 예는 드물다. 그러나 남인과 노론의 당쟁,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권신들의 갈등,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일어난 끔찍한 천주교 박해 등 온갖 역사의 질곡이 그들 형제들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형제들 중에서 제일 늦게 천주교 신자가 된 정약종은 신앙을 버리지 않고 매형 이승훈과 함께 순교를 택했고 정약종의 부인과 둘째아들 하상, 그리고 딸도 이어 사형을 당했다. 신앙을 버린다고 서약했던 정약용은 강진으로,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기나긴 유배길에 올랐다. 정약용은 그 후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양수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나 정약전은 유배지의 민중들과 어울리며 ‘자산어보’ 같은 명저를 남겼고 정약용이 풀려나기 2년 전 유배지에서의 생을 마감하였다.
다산은 유배 기간 동안에 경제, 철학, 역사, 의학, 아악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오백여권 이상의 책을 써서 조선의 학문을 새로이 실천적 학문인 실학이란 이름으로 집대성하였다. 그는 유교경전인 경학을 연구해 구체적으로 백성들을 위한 실천적 경세학으로 다시 썼고 서양의 과학을 이용해 거중기를 만들어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성을 쌓았다. 서화에 능했던 그는 천재 시인이자 예술가였지만 탐미적이지 않고 경건한 생활을 했으며 사치를 멀리하고 자나 깨나 굶주림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걱정해 대책을 연구했다. 그는 모자라는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학자나 관리들도 농사를 지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김굉필, 조광조, 퇴계 이황을 이어 내려오는 한국의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권력과 물질에 대한 탐욕을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로 학문과 예술 등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발달된 과학을 받아들여 실용적으로 직접 국정에 이용해 백성들을 위한 후생복리에 힘썼다.
다산은 초기 한국천주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회를 세운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조선은 주자학이 부패한 세상을 치유하는 역할을 할 수 없음에 절망해 다른 길을 찾던 성리학자인 다산과 그의 일가 중심의 남인학자들이 서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다가 스스로 신자가 된 세계사에 전례가 없는 특별한 사건이다.
어린 시절부터 다산은 성호이익의 제자들 중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였던 신서파인 이가환, 이승훈과 가까이 하면서 성호 이익의 책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들을 접하기 시작하였다. 다산이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시기는 23세 때이다. 1784년 4월 어느 봄날 고향 마재에서 이벽의 누님인 큰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벽에게서 천지창조, 영혼, 사후세계에 대한 천주교교리를 듣고 심취하였다. 이후 그는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요한이라는 본명을 갖게 되었다. 이후 정약용은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인 명례방 신앙집회에 참석하다가 적발되었고 서학서를 강습하다가 고발당해 해미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1791년엔 정약용 형제의 권유로 신자가 된 윤지충이 제사를 없애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으로 서학 금서령은 물론 천주교 신앙자체가 금지되었다. 1795년엔 주문모 신부 밀입국사건에 연루돼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청양에 10달간 머무르기도 했고 1797년엔 천주교도로 비난받는데 대한 해명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다산은 강진에 18년간이나 유배돼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서도 학문에 정진해 제자들을 키우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Ch. Dallet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다산이 강진유배지에서도 신앙생활을 계속 유지하였고 마제에 돌아와서도 유방제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죽었다고 기술했다. 1801년 이후 다산의 신앙생활여부가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돼 왔으나 이 보다는 경학사상속에 천주교 교리를 접목시킨 그의 사상적 역활을 논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동양의 자연철학적 가치관이 바탕이 된 성리학이 탐관오리들의 발호를 막지 못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는데 이를 보완하기위해 서양의 유일신 사상을 어떻게 융합시켰나를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은 당시 부패한 교조적 이데올로기로서 공리공론을 일삼고 주자의 이름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등 당파싸움의 구실이나 주던 주자학(성리학)이 제 역할을 할 수 없음에 절망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원시공맹사상인 주대의 상제사상의 복원을 꿈꾸었다. 그리고 서양의 전지전능한 유일신 사상을 담은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보고 강력한 도덕국가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미 23살 여름에 다산은 정조가 태학에 내린 중용에 관한 70조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벽과 상의해가며 중용강의를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주자학적 세계관을 버리고 다산 경학의 기반을 이루는 새 세계관을 보여준다. 상제사상(上帝思想)이란 세상의 주제자인 상제가 하늘에는 물론 혼자 있을 때에도 우리 마음에 함께 한다고 생각하고 경건하게 상제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상제의 의미는 진리(理)의 실천을 강조한 퇴계 이황의 주리적 이기론(主理的 理氣論)과 사단칠정설(四端七情設)에도 일부 반영돼있어 심성론을 바탕으로 한 도덕 사회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다산은 퇴계와 율곡의 논란거리가 되었던 성리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은 허망한 형이상학에 불과해 이(理)만을 기반으로 한 성리학 체계만으로는 사람들이 올바른 도리를 실천하도록 이끌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性(착한본성), 道(도리), 命(하늘의 명령), 敎(교화)를 모두 본래 지각도 없고 위엄과 능력도 없는 하나의 이(理)로 돌려버린다면 사람들이 삼가고 두려워 할 바가 어디있겠느냐고 기술해 성리학을 공리공론으로 보는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상제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강력한 신앙의 영적인 힘을 체험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상제를 그의 이론체계의 맨 꼭대기에 위치시킨다. 다산은 상제를 천지와 인간과 귀신 등 온갖 만물을 만든 창조주, 초월자, 주재자로 제시하고 유일성, 지고성, 절대성과 전지전능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상제의 주재하에서 사람들은 윤리적 실천동기가 생겨 도심(道心)을 구현해 경건하게 살게 되므로 이상적인 도덕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특히 다산의 성기호설은 상제가 인간에게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한 도덕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한 인간의 자주적 결정권을 존중해 천자도 대중이 추대해야하며 실정을 할 경우 임금도 교체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백성중심의 혁명적 국가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정, 환곡, 군정 3정의 문란등 조선후기사회의 부패를 털끝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표현했는데 이를 개혁하기위해 혁명적인 개혁안인 ‘경세유표’를 썼다. 또한 지방행정에 대한 개혁안인 ‘목민심서’에는 목민관으로서의 지방관리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경건한 업무 태도를 명시하였다. 특히 군정의 문란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애절양’이란 한시로 표현해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애절양’은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스스로 남성을 자른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군정으로 인한 학정에 시달렸나를 알 수 있다. 다산은 필요이상으로 매년 때가되면 관리를 뽑아야해 관리의 과잉 배출 등 과거제도로 인한 폐단도 지적했는데 일본이 과거제도가 없어서 문학이 뛰어나고 무력도 중국과 견줄만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다산은 서양의 과학을 연구해 직접 실무에 이용했는데 수원화성을 쌓을 때 거중기를 만들어 경비와 시간을 절약하게 하였고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해 ‘마과회통’이란 책을 써서 전염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기도 했다. 한편, 거문고 연주를 즐겨했던 그는 진시황 때 분서갱유로 사라진 6경중 악경을 새로 쓴다는 생각으로 동양의 음악이론을 정리해 음악학 저서인 ‘악서고존’ 12권을 완성했는데 중국음악인 아악의 음악적 비과학성을 지적하고 개선한 것이다. 그는 성인의 도도 음악이 아니면 시행되지 못하고 제왕의 정치도 음악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하고 천지만물의 정(情)도 음악이 아니면 조화되지 못한다고 주장했으며 군자는 잠시라도 예악을 몸에서 떠나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도 불리는 다산은 2세기 전 동서양 사상이 처음 만나는 문명충돌의 시점에서 천주교교리를 유교경전에 접목해 재해석해 유교사상이 지닌 잠재적 가능성을 확대하였다. 이처럼 동서양의 이질적 사유가 다산 안에서 서로 조화와 소통을 이룸으로써 더 큰 세계관을 제시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부패한 조선을 바로 잡기위한 혁명적 사회개혁을 꿈꾸었는데 소설가 한승원은 이를 ‘다산’ 1, 2권을 통해 소설로 쓴바있다. ‘다산비결’은 다산이 쓴 사회개혁서 ‘경세유표’의 핵심을 간추린 책으로 동학혁명을 일으킨 동인으로 판단되며 지역책임자인 접주들의 필독서로 혁명이론서가 되었던 책이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들어있다.
‘평범한 남자로 죄가 없을지라도 보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죄인이다. 편법을 동원해 도둑질하거나 수탈하거나 착취한 것들을 쌓아놓고 즐길 뿐 그것을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들과 나누려하지 않은 것은 하늘의 명령 즉 천명을 어긴 죄인이다.’
‘모든 논과 밭은 경작하는 사람이 소유해야한다. 양반이나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땅은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야하고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고 얻은 소득을 일한만큼 비율에 따라 분배해야한다’
‘백성들에게는 밥이 하늘이다. 일을 하고 먹는 밥이 성스럽다. 일하지 않고 먹는 밥은 추하다. 일이나 밥을 착취하는 벼슬아치는 도둑이다’
‘조선 땅에서 제일 못된 제도는 양반제도이다. 조선사람 들이 잘 살려면 양반무리들을 없애야한다. 부리던 종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살림을 차려주면서 독립시켜야함이 마땅하다.’
‘음악을 알아야 천지를 평화롭게 경영할 수 있다. 음악은 하늘과 땅 빈자와 부자, 상정과 종, 양반과 상놈, 임금과 백성을 한데 아우르는 천지우주의 향기로운 소리이므로 음악은 우울함과 외로움을 달래주고 울분을 삭여주고 절망의 어둠에서 희망의 밝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암시해준다.’
몇 년 전인가 가을에 아산의 봉곡사를 찾았다. 봉곡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오래된 절이나 규모가 작아서인지 속세에 알려지지 않아 주변에 사는 주민들에게만 겨우 알 정도였다. 지금부터 200여 년 전인 1795년 다산이 13명의 소장 남인 학자들을 모아 장장 열흘 동안 이 절에 기거하며 이익의 성호학에 대한 강학회를 열었다고 한다. 우연히 봉곡사 근처에 사는 분을 만나 안내를 받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봉곡사에 가려면 10여분 정도 산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오래된 소나무 솔밭길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비늘같은 솔피가 두텁게 덮혀 하늘을 향해 솓음치는 용처럼 힘차게 솟은 수백 년 생의 굵고 긴 소나무들의 줄기위에는 가지를 덮은 구름모양의 소나무 잎이 무리를 지어 떠있어 평화롭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연출했다. 당시 추운 어느 날 아침 다산도 이 솔밭길을 내려와 냇가에서 세수를 하고 다시 올라갔다고 기록돼있다. 길을 산책하며 다산도 이 길을 걸으며 가렴주구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걱정하고 이상적인 열린사회를 구현하기위한 방법들을 찾았겠지 하고 상상하며 아름다운 소나무들을 목이 아플 정도로 쳐다보며 걸었다.
봉곡사 주변은 역사를 멈춰놓은 듯 현대문명의 흔적이 거의 없다. 안개 자욱한 날 홀로 봉곡사 솔밭 길을 걷다보면 하늘 향해 까마득하게 뻗은 수백 년 생의 곧은 소나무 군상들이 역사의 새벽길을 먼저 가신 선비들로 변신한다. 다산이 굶주리는 백성들을 걱정하며 새로이 접한 서양의 과학을 이용해 더 많은 수확을 낼 농사법을 궁리하며 제자들과 겨울의 눈 내린 새벽길을 올라갔던 바로 그 길이다. 나는 수백 년간 우리의 혼을 지켜온 맹사성,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김구 같은 추상같은 일생을 살다 간 선비들 사이로 걸어가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귀와 권좌가 목적이 아니고 오로지 백성과 임금을 걱정하고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우리의 선비들, 학문과 풍류, 그리고 백성을 지극히 사랑했던 님 들처럼 검소하고 고고하게 살다가 어느 날 큰 뜻을 위해 남은 명을 아낌없이 바쳐야지 하고 다짐해 보았다.
이제 다산 사후 2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주자학이 지배했던 다산이 처했던 당시 상황과는 달리 유일신 기독교 사상세력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서구기계문명에 의한 제국주의의 출현과 세계 1, 2차 대전으로 인한 인류의 타락,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파괴되어가는 자연과 인류문명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동양의 자연철학사상을 되살려야한다.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자연과 일치된 삶을 가치관으로 담은 자연철학문화를 되살릴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따라서 서양의 이원론적가치관의 폐해를 막기 위해 동양의 일원론적, 전일적 가치관을 융합시켜서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생태계 파괴와 획일화로 인한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동서양의 균형있는 새로운 문화적 융합을 위해 다산의 지혜를 되살려 오늘에 반영할 수 있도록 ‘동서융합 다산연구소’를 세워보자고 제안하며 본고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