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3장
엘리후의 첫 번째 발언(2)
(찬송 548장)
2020-8-4, 화
맥락과 의미
엘리후의 첫번째 발언 32-33장이 계속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로 말한다고 하면서(1-7절),
욥의 주장을 요약하고(8-13절),
욥에게 반박하며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죄인을 회개와 회복을 주신다고 말하고(14-30절),
욥에게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호소합니다(31-33절).
5. 엘리후는 하나님의 신으로 말을 한다고
함 (1-7절)
“그런즉 욥이여 이제 내 말을 들으시오. 내 모든 말에 주의를 기울이시오.”(1절) 바로 말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7절이나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33:1-7이
서론입니다. 그
뒤에 자신의 말을 합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4절) 32:8에서
한 말을 반복합니다. 자신의 말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그 능력에 둡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신”은
성령님이라는 뜻이 강해 보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 있지만 자기에게는 특별한 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라”(5절)는 말에는 도도함이 있습니다. 동시에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나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6절) 하면서 겸손히 말을 이어갑니다. 그의 말에는 도도함과 겸손이
섞여 있습니다.
6. 욥의 주장을 요약하며 질책 (8-13절)
“그대는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8절) 엘리후는 욥의 주장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욥은 자기에게 죄와 허물이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9절).
둘째, 욥은 불의가 없는 자기를 하나님이 치시고 감시한다고 말하였다고
요약합니다.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11절) 이것은 욥이 13:27에서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13장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원수처럼 대하신다면서, 하나님께서 만나서 해명해 주실 것을 요구했습니다.
욥의 말을 요약한 다음에 말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12절) “그대는 의롭지 못하다”고
단정해서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크심을 잘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왜 불평하느냐?”(13절) 그러고도 욥이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앞으로
엘리후는 하나님의 크심을 중심으로 말을 이어갈 것입니다.
7. 환상과 고난을 통해 말하시고 회개와
회복을 주시는 여호와 (14-30절)
1) 환상 중에 말씀하심 (14-18절)
욥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지만, 엘리후는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씀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직접 말해 주십니다.
사람이 졸거나 깊이 잠들어서 수동적이 되었을 때 귀를 여시고 교훈을 내리십니다. 사람을
경고하셔서 두렵게 하십니다(17절). 그 이유는 사람의 꾀를
버리게 하고 교만을 막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사람의 영혼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칼에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입니다(18절).
2)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심 (19-22절)
둘째,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로만 대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바로 지금 욥이 당하는 그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십니다. 여기서 징계는 징벌의 뜻만 있지 않습니다. 깨우쳐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내려 주십니다.
3) 회개와 회복으로 이끄심 (23-30절)
23-24절: 이제 엘리후는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말씀과
징계를 받는 사람이 회복되는 길을 말합니다.
앞서 엘리바스도 고난을 통한 연단이 가치가 있음을 말했습니다(5:17-26).
엘리후는 회복되는 길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자가
있어야 합니다. 천사 중의 하나가 그 역할을 하면 됩니다. “중보자”는 보통의 대속자가 아닙니다. 양측 사이에 서서 해석해 주는 존재를 말합니다. 천사가
사람의 해석자로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정당히 행한 것을 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십니다. 대속물을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25-26절: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회복시켜 주셔서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게 하실 것입니다. 욥이 앞에서 “대속자”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을 나의 살로부터 보리라”(19:25,26)고
소원한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엘리후는 말합니다(25절).
이렇게 회복된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여기서
기도는 보통 제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전에는 이 사람의 제물과 기도를 받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은혜로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십니다. 앞서 욥이 소원한 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가까이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의로움을 회복해 주십니다.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26절).
27-28절: 이렇게 회복된 사람은 성도의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간증하며 찬양할 것입니다.
“내가 전에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27절)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한 사실을 간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건져서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신 것을 찬양할 것입니다(28절).
여기서 엘리후는 욥이 죄로 인해 징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욥이 중보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회복되는 데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됨을 말합니다.
29-30절: 욥에게 일어날 수 있는 회복의 과정을 앞에서
말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두 번 세 번 행하십니다. 죄인(욥)에게 환상으로 말씀하시고 고난을 보내시기를 여러 번 행하십니다. 죄 때문에 멸망하는 길에서 생명으로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7. 욥에 대한 권고 (31-33절)
“욥이여, 주의를
기울여라. 들으라. 잠잠하라.” 단호하게 말합니다. 욥이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의롭게 될 것이라고 권합니다. 자기의 말이 그에게 구원을 주는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자기 확신이 뛰어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너무 오만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요약: 하나님은 말씀과 고난으로 말씀하시고
회복시킴
엘리후는 욥이 죄 때문에 고난당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욥이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할 죄는
없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그의 말은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도에게는 환상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또 질병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앨리후는 “천사”를 “중보자(해석자)”로 말합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긴 하지만, 사람의 죄를 중보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가 천사를 그리스도와 같은 중보자로 생각했다면 잘못입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영적 존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해석과 중보의 일을 하는 것으로 본 것은 옳습니다.
또 엘리후는 회복된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심을 말합니다. 회복된 사람은 교회 앞에서 간증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욥에게 적용될까요?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우선 엘리후가 욥이 죄 때문에 이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더 거룩하게 단련하기 위해 이 고난을 주셨습니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연단을 받는 그 순간에도 욥은 죄인입니다. 욥은 자신이 구체적인 죄가 없이 고난을 받는다는 그 사실에만 집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잊어 버리고 고난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말씀하시고, 회복시키는 과정을 잘 제시합니다. 이것은 욥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큰 유익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사람의 근본 문제는 죄와 비참입니다. 비참한 고난 가운데서도 죄인인 자기 모습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욥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엘리후를 보내신 것에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의 종 욥에게 자신의 죄인됨도 볼아 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시는 엘리후 그도 죄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일을 정확히는 몰랐습니다. 고난을 통해 연단하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더구나 확신이 지나쳐서 교만해 보이는 그의 말이 욥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 같습니다. 엘리후의 태도에 겸손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깨서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연단하십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욥은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 면이 있습니다. 죄와 비참함이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 고난을 주셨을 때도 우리 자신은 죄인입니다. 고난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정당하게 기도하며 부르짖을 때도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유없이 이 고생하고 있다.” 이 생각만
하고 있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하면서도 교만하면 거기에 죄가 생깁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당신도 죄인이니 항상 회개하라” 하면 마음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성상 죄인인 자신을 인정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돌아 보고 나아가 죄인됨을 인정하게 합니다.
평안할 때도 고난이 있을 때도 우리는 항상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죄를 추구하는 경향)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님 안에서 새롭게 된 성향)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로마서 8:13)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와 기쁨으로 인도하는 사람도 연약한 죄인의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우리 가족이나 성도일 수 있고, 직분자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아픔을 몰라 준다. 당신이나 잘 하시오.” 그런 마음을 품지 맙시다. 부족한 사람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