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충기 수필>
놀라운 여행기 ‘셔유록(西遊錄)’...
서유록(西遊錄)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3년, 강릉 모산의 진재(長峴) 뒷큰댁 안방마님 김씨(당시 50세)가 남편(崔東吉)께 청원하여 지병이 있었던 둘째딸 연아의 치료도 알아볼 겸 남편과 함께 셋이 함께한 서울 여행기인데 총 56장 110면으로, 순 한글로 작성되었다.
김씨 할머니는 모산 기장댁 김연한 님의 따님으로 전 강릉농고 교장을 지냈던 김남두님의 증조할머니셨고, 김남두 교장님의 모친은 학산 정주교(鄭冑敎) 님의 고모였다. 그러니 김씨 할머니의 큰딸이 우리 학산의 기둥 정주교님의 생모였다는 이야기인데 우리 고향 학산과도 인연이 깊은 분이시다
만성(晩惺) 정주교님은 미 군정시절 국회의 전신인 민선입법의원(民選立法議院)을 지내셨고 일찍 한학(漢學)을 공부하신 대유(大儒)로 강릉유림을 대표하는 강릉 유도회 회장(儒道會會長), 강릉 예총회장(藝總會長)을 역임하셨으며 강릉 화신백화점을 경영하는 등 사업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셨던 분이셨다.
정주교님은 내가 구정국민학교 다닐 때 사친회장(師親會長)을 하셨고, 내가 졸업할 때 그분 손으로부터 직접 도지사 상장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계축년(癸丑年:1913) 3월, 모산진재 뒷큰댁 안방마님은 맞손자와 손부(孫婦)가 사망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극도의 아픔을 떨쳐내고자 남편에게 서울유람을 청원하고 남편의 허락을 얻어 둘째딸 연아와 더불어 서울로 향하게 되는데 1913년 8월 3일에 강릉 모산(예전 長峴)을 출발한다.
나(筆者)는 자칭 세계배낭여행가라 자부하며 30여 개국의 여행기를 쓰고 비록 출간은 못했지만 내심 스스로 자부심이 컸는데 ‘셔유록’을 읽으면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김씨 할머니는 여행을 하면서 하루하루 일정에 따라 깨알같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는데 그 광범위하고 해박한 지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서술방식이 내가 쓴 여행기와 너무도 유사해서 읽을수록 놀라움의 연속이다.
내가 특히 감동을 받은 것은 여행하면서 기록한 곳곳의 지명과 얽힌 이야기들을 서술한 것이다.
대관령 반정(반쟁이) 부근의 ‘원울고개’의 고사(故事)...
강릉으로 부임하면서 ‘이 험한 강릉에서 원(員) 노릇을 어이할꼬?’
임기가 끝나고 강릉을 떠나면서 ‘제일 좋은 강릉 땅을 버리고 간다’
하면서 울고 넘었다는 원울고개 이야기 등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집 뒷산인 모산봉(慕山峰)이 ‘주먹 같더라’
대관령 국사성황당(國師城隍堂)-정선(旌善)-월정(月精)거리-진부(珍富)를 거치며 가지가지 이야기들... 평창 모로재(毛老峙)는 고개를 넘나드느라 ‘털이 세었다’...
대화 장터에서는 일제의 만행에 울분을 토하기도 한다.
평창 문재에 이르러서는 이곳이 강릉땅의 경계로, 장현(長峴)까지 200리...
집 떠난 지 여드레 만에 양평(楊平)에 도착하는데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합류(合流)지점에 이르러 ‘水光接天 江聲動地(수광접천 강성동지/물이 하늘에 닿았고 강물소리가 땅을 흔든다.)’ 라고 감회를 술회하기도 한다.
양평을 지나다 깊 옆에 선바위가 있고 바위벽에 사람 그림이 있는데 과거보러오는 사람들이 이마 위에 돌을 던져 올라앉으면 급제한다는 곳이었다고 한다.
김씨 할머니는, 시댁과 친정 여러 어르신들이 과거보러 서울을 다녀가셨는데 이곳에 다다르면 돌을 던지셨을까?
또, 어르신들 여독(旅毒)은 없으셨을까? 낙제하시고 분한 마음은 여북(오죽)하셨을까? 또, 경진년(庚辰年)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셨던 증조부께서도 이곳에 이르러 돌을 던져 올리셨을까?...
그리고 덧붙이는 말은 기쁨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서글퍼진다.’ 였다니..
떡소(덕소), 망우리를 지나 동대문에 이르러서는 ‘넓이는 상등(上等)이요, 바르기는 화살(矢)이요, 평(平)하기는 숫돌 같다고 감탄한다.
서울에 이르러 첫 인상은 이청목도(耳聽目睹) - 처음이라 정신이 아득하다 하였고, 집 떠난 지 열흘 만에 오백 오십 리 서울에 득달(得達)하였다고 썼다.
서울 거리는 ‘원산(元山)으로 왕래하는 화륜거(火輪車:기차)가 번개 같이 달아나고, 번갯불이 번득하며 수 칸 되는 유리옥이 굴러오니 전거(電車)로다.’ 라고 놀라움을 나타냈다.
김씨 부부는 서울을 비롯한 각 곳에 친지들이 있어 만나는 것을 보면 명문가(名文家)임에 틀림없었던 것 같다. 서울 도착 다음날이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秋夕)이었다는데 이런 대 명절에 집을 떠나 여행을 했다는 것 자체도 놀랍다.
서울 중학동에 사는 김해 진씨네는 부인이 강릉 서당댁 딸로 시댁의 친척이라 일박을 했는데 그 댁 딸이 서울의 여학교에 다녔는데 큰 관심을 나타낸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을 물어보는데 국문(國文), 한문(漢文), 십자(十字), 도화(圖畵), 수신(修身), 산술(算術), 일어(日語), 영어(英語), 침선(針線), 방적(紡績), 편물(編物)이라고 하자 너무도 놀라고 부러워한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이는 심중(心中)의 말이었었겠지. ‘강릉에도 여학교를 세워볼까?’
'참묵(慘默)하고 통분(痛忿)하다'고 토로했으니 교육자 출신인 나도 부끄럽다.
서울도 각 궁궐들과 거리들을 골고루 훑어보고 자세히 기록으로 남기는데 우리의 추억을 일깨우는 단어들...
삼개(麻浦), 을지로 1가의 옛 이름인 구리재(銅峴), 종현(鍾峴:명동), 와사등(瓦斯燈:가스등)....
이어서 인천항을 두루 돌아보고 서울로 돌아와 딸 연아의 치료방법을 찾아보나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부모가 안타깝게 여기자 딸이 하는 말
“나의 신수(身數) 할 일 없소. 쓸 데 없는 괴탄(愧歎) 마우” 였다고...ㅎㅎ
그리고 강릉으로 돌아오니 9월 8일, 꼭 한 달 닷새의 여행이었다.
김씨 할머니의 여행기를 읽으며 언뜻 생각나는 것은, 강릉은 틀림없는 여인들의 고장이라는 생각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당신 자신도 재능이 뛰어났지만 걸출한 인물인 율곡(栗谷 李珥)을 낳아 이름을 후세에 남겼고 더 뛰어난 천재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출생하고 자란 곳도 강릉이다. 그런데 이 김씨 부인의 글을 읽으면 그들에 비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근대의 신여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름(銜字)이 없을꼬? 족보를 뒤져보면 틀림없이 있을 터인데... 그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함자로 장현(長峴:진재)의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