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생멸문(生滅門) - 심생멸(心生滅)
제26강 생멸(生滅)의 길을 풀이한다 (1)
지금까지 공부한 과정을 잠깐 보면,
일심(一心)에는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
두 가지 문(門)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심진여문(心眞如門)에 대해서 공부를 했고,
오늘 부터는 심생멸문(心生滅門)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심생멸문(心生滅門)에는
첫 번째, 마음이 생멸한다는 심생멸(心生滅)이 있고,
두 번째는 생멸인연(生滅因緣), 마음이 생멸하는 데는 인연이 있고,
세 번째는 생멸상(生滅相), 생멸하는데 그 모습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사종훈습(四種薰習)에 대한 얘기인데,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의 해석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하게 부가한 해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풀어야할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마음이 참다운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본체계(本体界)라고 얘기하고
심생멸문(心生滅門)을 현상계(現像界)라고 얘기를 합니다.
본체계(本体界)는 드러나 있지 않는 것을 얘기하고
심생멸문(心生滅門)은 마음이 생멸하니까 현상이 나타나는 거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렇게 해석하면 다 틀린 겁니다.
번역도 그렇게 하시는 분이 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심생멸문(心生滅門) 그 자체가 일심(一心)이고
심진여문(心眞如門) 자체가 한마음입니다.
심진여문(心眞如門)이나 심생멸문(心生滅門)에는
본질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 얘기했죠.
심진여문(心眞如門)은 불변(不變)하고
인연을 따라 모양을 나타낸다[隨緣] 그랬습니다.
그리고 심생멸문(心生滅門)도 본체는 공하다[体空],
그리고 생멸하기 때문에 항상 어떤 일을 이룬다[成事],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심진여문에 불변(不變)하고 심생멸문에 체공(体空)이 같고
심진여문에 수연(隨緣)하고 심생멸문에 성사(成事)가 같은 거예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심생멸한다는 것을 현상계라고 못을 박아서 얘기하면 틀렸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바탕이 생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변하는 모습을 갖고 있는 거죠.
그래서 체공(体空)과 성사(成事)를 다 갖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심생멸을 얘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얘기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생멸한다는 게 상당히 중요한데,
심생멸(心生滅)에서 생(生)과 멸(滅)은 각각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이 생기는 것하고 마음이 멸하는 것을 의미가 있다고 하면
여러분들이 조금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생(生)과 멸(滅)에 대해서 얘기를 해 봅시다.
우리 본래의 마음인 진여(眞如)가 있고
진리를 모르는 무명(無明)이 있습니다.
무명이 진여에게 영향을 주는데 이것을 훈습한다 그럽니다.
심생멸문(心生滅門)에 네 번째 훈습[四種薰習]이라는 말이 나오죠.
이렇게 무명이 진여에게 영향을 주면 고통[苦]이 생기는[生] 겁니다.
이것이 윤회의 길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유전문(流轉門)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면
반대로 진여가 무명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면 고(苦)에서 벗어나는 낙(樂, 涅槃樂)이 생기는[生] 겁니다.
이때에 생(生)은 멸(滅)로 돌아간다는 환멸문(還滅門)이 됩니다.
여기서 멸(滅)은 모든 고통과 고통의 원인이 다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여가 무명에 영향을 주면 무명이 없어져 버리는 현상이 생깁니다.
반대로 멸(滅)이라는 것은
무명이 진여에게 영향을 미치면 정법(淨法)이 소멸해 버립니다.
그런데 진여가 무명에게 영향을 줘버리면 삶과 죽음의 고(苦)가 멸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바르지 않는 법[染法]이 소멸하는 거죠.
그래서 생(生), 멸(滅)이에요.
그러면 문(門)이라는 것은 무슨 문이냐 이거죠.
무명이 진여에게 영향을 미쳐서 고(苦)가 생기고[生]
정법(淨法)이 멸(滅)해 가면 흐르는 길[流轉門]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고통의 통로가 생기는 겁니다.
반대로 진여가 무명에게 영향을 미치면 낙(樂)이 생기고[生]
염법(染法)이 소멸해 버리면 환멸문(還滅門)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문(門)이라는 게 하나는 고통의 문[流轉門]이요,
하나는 고통이 사라진 깨달음의 문[還滅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문을 여기서는 ‘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게 아리야식입니다.
여기서 문(門)은 통로를 얘기하는데
깨달음의 통로는 수행의 길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심진여문(心眞如門)에서는 사마타觀[止觀]을,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는 위빠사나觀[觀觀]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위빠사나 그러면 남방 위빠사나를 많이 얘기를 하는데,
위빠사나를 ‘관(觀)’이라 그러고 사마타를 ‘지(止)’라 그럽니다.
심진여의 이 자리는 주관과 객관이 없는 자리기 때문에
생각의 흐름이 끊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도 주객이 상대하지 않게끔 해야 됩니다.
처음에는 주객이 상대하지만 심리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주객이 상대하고 있는 이 모습에서 떠나는 거예요.
그러면 진여의 본연의 자리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 방법이 사마타 방법입니다.
생각의 흐름을 그치게[止] 하는 방법입니다.
그 다음에 생멸문은 위빠사나觀을 해야 된다 했습니다.
생멸하는 이 마음을 잘 관찰한다 해서 생멸인연(生滅因緣)이라는 말을 씁니다.
마음의 생멸 인연을 관하는 것이 위빠사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능가경』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지혜(智慧)로 가는데 세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상(相)을 관찰하는 방법,
두 번째는 생겼다 멸했다하는 생멸을 관찰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세 번째는 불생불멸(不生不滅)로 들어간다는 거죠.
상(相)과 생멸(生滅)의 모습은 속제(俗諦)라 해서 세속의 진리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승의제(勝義諦)라 해서 진제(眞諦)를 얘기 합니다.
이렇게 지혜를 얻는 데도 세 가지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위빠사나觀이라는 게
생멸 인연을 관찰해 가면 불생불멸의 자리를 얻게 되죠.
이 불생불멸의 자리가 바로 진여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觀을 통해서 심생멸문에서 심진여문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완전히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리야식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남방에서 말하는 위빠사나하고
간화수행하는 대승하고의 수행 방법이 달라지고 수행 계기가 달라지는 것은
이 아리야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리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 합니다.
남방의 위빠사나 하고 대승에서 말하는 수행하고 왜 다른가 하면,
심식, 마음의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남방에서는 여섯 가지 심식[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을 얘기하는데,
대승에서는 여섯 가지 심식에 말나식, 아리야식해서 팔종식(八種識)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하나 더 얘기하는 게 있는데 그게 여래장입니다.
여래장은 아리야식 속에 있는 자성청정심을 얘기합니다.
속에 있다고 표현을 했는데 표현상 그렇지 사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는 조금 있다 얘기하겠습니다만
저 아리야식은 의식상에 나타나지 않는 무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초기불교, 부파불교를 지나면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주석을 많이 합니다.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하는 와중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의식은 깊은 잠속에서는 작용을 안 합니다.
그러면 남에게 해코지를 했다든지 좋은 선행을 했다든지 이러면
그것이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가 있어야 되는데
의식은 깊은 잠속에서 작용하지 않는 거 보면
내 판단으로는 의식은 항상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10년 전에 있었던 좋은 일이든
20년 전에 있었던 나쁜 일이든 기억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 기억이라는 게 어디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냐,
어디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냐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부파불교시대 때 얘기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BC에서 AD로 접어들면서 아리야식을 발견한 겁니다.
이게 대승불교 시작입니다.
그 전에는 육종식(六種識 : 전오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과 意識),
의식이 마지막 최종식이라 했는데,
자아의식[말나식]도 있고 제일 마지막에 아리야식이 있다는 거죠.
저 아리야식이 장식(藏識), 창고입니다.
보고 듣고 하는 모든 정보를 마음에 저장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게 근세에 와서 정신분석학에서 연구가 많이 됐죠.
불교에서는 아주 옛날에 얘기했던 것을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이 문제를 거론 한 사람이 프로이드입니다.
어릴 때 있었던 사건이 빌미가 되어서 성장하면서
어른이 됐을 때 그 영향을 입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았다면
이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장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 자기 파멸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는 거죠.
본인은 왜 자기가 스스로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지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을 해보니까
어릴 때 어머니에 대해서 사랑을 못 받은 복수심이라는 게
마음에 정보가 남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그런 것은 전혀 관계없는 거 같은데
그런 영향을 끼쳐가지고 자기 자신을 파멸의 길로 가게끔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얘기에요.
그러니 이게 아주 무서운 거예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못 받은 것이 거기서 끝나야 되는데
끝나지 않고 다르게 전이가 되어서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지는 겁니다.
그래서 수타니파타(Suttanipata)의 얘기가
과거의 번뇌가 바로 현재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거죠.
그래서 과거 번뇌를 끊어버려야 된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그것이 현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그것이 망심훈습(妄心薰習)입니다.
이런 문제를 불교에서는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생멸문이 그것을 해결해 줄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공(空)을 봐야 된다는 거죠.
이 공(空)이 심진여(心眞如)죠.
심진여에는 공(空)과 불공(不空), 두 가지가 있다고 했죠.
공과 불공은 같은 겁니다.
이 공은 번뇌가 완전히 없어진 번뇌공이잖아요.
그러니까 위빠사나觀을 통해서 마음이 생멸하는 이 속에서
번뇌를 통찰해서 실체가 없음을 확실히 보게 되면
심생멸문에서 심진여문으로 들어가면서 진여를 깨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삶과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과거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심생멸문에서 등장하는 아리야식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기에요.
또 한 가지는 수행의 차이점에 대한 얘기입니다.
남방 위빠사나 수행을 계속하면
나중에 정신과 육체가 해체가 되고
마지막에 의식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의식소멸이 멸진정(滅盡定)입니다.
그렇게 되면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의 윤회에서 벗어난다 그래요.
그게 끝이에요.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아리야라는 마음을 발견한 거예요.
의식이 소멸했지만 의식 뒷면에 숨겨져 있던 말나식[자아의식]이 남아 있고
말나식 뒤에 아리야식이 남아 있다는 거죠.
이 두 가지[말나식, 아리야식] 심식이 있는데,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드러나 있는 의식까지 소멸해서 삼계에서 벗어났다 해도
이 두 개[말나식, 아리야식]가 소멸 안 되니까 생사를 거듭하는 거예요.
삼계 밖의 생사를 변역생사(變易生死)라 그럽니다.
이 변역생사는 아직 심식이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삼계를 벗어났는데도 생사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말나식과 아리야식이라는 게
자성청정심이 아니고 망념입니다.
진짜 자성청정심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대승기신론」에서는
심체(心体)는 소멸하지 않지만
심상(心相)은 소멸한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원각경』에서 하는 얘기는
원각(圓覺)에서 몸과 마음이 다 나와서
다시 소멸해서 원각으로 돌아가지만
마치 허공에 꽃이 피었다가 사라져도 허공은 변함이 없듯이
원각은 바뀌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성청정심이 그와 같다는 거죠.
아라한의 경계는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다음에
십지(十地)의 초지(初地)가 아라한의 경계에요.
그러면 아라한의 경계에서 십지(十地)를 거처 불지(佛地)로 가려면
말나식과 아리야식을 철저하게 없애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보살수행이 시작되는 거예요.
남방불교 수행의 한계는 아라한까지입니다.
아라한이라는 성인의 경지에 들어갔지만
완전하게 부처의 지위는 아니라는 얘기죠.
그래서 부처의 지위에 오르려면
저 아리야식을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환해야 된다는 겁니다.
「대승기신론」에서 얘기하듯이
아리야식의 껍질을 깨고 자성청정심을 회복하는 겁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거죠.
그래서 이 심식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것은 대승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을 이것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마음 밖에 대상이나,
마음 밖에 사물이나,
마음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왜?
마음 밖에 보이는 이 세계도 아리야식이라는 거죠.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진실을 얘기하기 시작하는 거죠.
시간이 다 됐네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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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부처님 지혜의 말씀으로 더욱 평안자리 되시기 바랍니다 정혜신님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오직 마음 뿐 이라는것...생할속에 불법이 이어지기를
나무아미타불_()_
늘 부처님과 함께하여
부처님 지혜광명 충만하시기 기원합니다..무렴님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아뢰야식의 껍질을 깨고.... ,
자성청정심을 회복하는 것이....
수행의 주체(목적)인 가요?
감사합니다.
자성불을 보아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큰공부 이루시기 기원합니다...()
내가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고
모두가 행복으로 보살행으로 중생구제 기원합니다.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고운인연에 함께 합니다
큰공부이루소서..광혜의하루님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좋은 법문 감사합니다
부처님 지혜언덕의 길 함께합니다..
행복한 부처님되소서...엄궁처사님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아라한 경지까지 아는 것과 참된 원각(圓覺)의 경지까지 아는 것은 수행에서 아주 큰 차이 있음을 봅니다
아는 만큼 보여지기에 공부함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수행의 경지를 알아 공부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수행의 과정에서 말나식과 아리야식이 밖으로 모습이 표출되어
점차 녹아지고 소멸됨 봅니다.
바른 깨달음으로 부처님 말씀 증명하기를 바랍니다...
눈이 오더니 추워졌습니다 건강기도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말나식(자아의식) 아리야식(무의식)은 겉으로 드러나지않는 마음임을 배웁니다.
오직 마음뿐이며 마음밖에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것을 사마타(知)와 위빠사나(觀)을 통해 배워야함을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大乘起信論 28 - 智雲스님 講義 - 5. 生滅門 - 心生滅 - 第26講 生滅의 길을 풀이한다. (1)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
_()()()_
허당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제가 btn 홈페이지에 2004년~2006년 대승기신론을 지운스님 동영상으로 강의할때 공부했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가장행복한 공부 카페에서 그대로 문자화에 그 노고에 감사드리며, 양해를 얻어 모셔(아비라불교 밴드)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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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_()_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