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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발제/2019년 11월 9일/나눔의 집)
인도네시아 ‘위안부’*의 한 단면과
미귀환 '위안부' 처리 방안에 대한 제언
- 인도네시아 말루꾸(Maluku) 제도, 부루(Buru) 섬 사례를 중심으로 -
김영수**
I. 들어가는 말 II. 태평양 전쟁과 인도네시아 위안부 1. 배경 2. 진행 상황 3. 일본 패전 후 상황 III. 미귀환 인도네시아 위안부 상황 1. 말루꾸(Maluku) 제도, 부루(Buru) 섬의 사례 2. 미귀환의 주요 원인 IV. 미귀환 인도네시아 위안부 처리 방안 1. 내적 방안 2. 외적 방안 3. 처리 방안의 활용 V. 나오는 말 참고 문헌 |
I. 들어가는 말
향신료1) 를 독점하기 위하여 1590년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을 말레이반도와 향신료의 주 생산지인 말루꾸(Maluku) 제도에서 몰아내고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만들게 된다. 영국에 잠시 주도권을 빼앗긴 1811년 – 1816년 사이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본에 항복하기 전인 1942년까지 네덜란드는 직접적인 식민통치2) 를 통하여 약 350여 년간 인도네시아를 장악하게 된다.3)
즉, 인도네시아는 대륙의 왕국이나 국가들과는 다르게 군도 국가라는 지리적 취약성으로 인해 중앙집권화된 막강한 통치력이 권력을 행사하는 역사를 가져 보지 못한 채 서구 세력인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된 것이다.4) 향신료 무역 전쟁에서 서구 열강들과의 각축에서 승리자로 남은 네덜란드는 말레이 세계5) 에 광활한 식민제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게 되며 그 관할 장악 지역이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영토적 모형을 마련하게 된다.6)
한편 중-일 전쟁(1894-1895)과 러-일 전쟁(1904-1905)에서 승리는 일본, 일본인들의 위상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은 역설적으로 일본의 위상을 세계 무대에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7) 태평양 전쟁 발발은 대동아 신질서(Greater East Asia New Order)를 확립하기 위한 일본 야욕의 출발점이 되었고 그 대상 지역은 중국, 만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태국, 말라야(말레이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인도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
II. 태평양 전쟁과 인도네시아 위안부
1. 배경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은 전격적으로 동남아 지역을 침공하게 되며 이에 대해 350여 년간 인도네시아를 식민통치하던 네덜란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1942년 1월 10일 일본군은 칼리만탄(kalimantan) 지역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침공의 주목적은 전쟁 물자를 위한 천연자원 확보, 특히 원유와 고무가 그 대상이었다. 개전 초기에는 인도네시아인들은 네덜란드 식민통치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는 해방자로 일본군을 환영했다. 일본군에 의해 지금까지 식민통치자인 네덜란드인들의 체면 손상과 위신 추락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 드려지게 된다.8) 1942년 3월 9일 인도네시아에 주둔한 네덜란드 군사령관인 푸르텐(Hein ter Poorten) 중장은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Java), 깔리자띠(Kalijati)에서 일본에 대해 항복 문서에 서명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인도네시아에 대한 3년 5개월여(1942.3.9-1945.8.17)의 일본 식민통치가 시작되었다.
2. 진행 상황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분할하여 육군과 해군이 각각 관장하게 하였다. 자바와 마두라(Madura) 지역은 육군 16사단 관할에 두고 그 중심을 자카르타(Jakarta)에 두었다. 수마트라(Sumatera) 지역은 육군 25사단이 장악하였고 나머지 인도네시아 동부 지역은 해군이 관장하면서 그 중심을 술라웨시(Sulawesi), 우중빤당(Ujungpandang)에 두었다. 그리고 식민통치와 함께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천연자원뿐만 아니라 인적자원을 노무자, 병보(兵補), 위안부 등으로 강제 차출하기 시작했다.
1932년 중국 상해에 최초 위안소를 개설9) 한 일본군은 1942년 3월 남태평양 일본군 사령부 지시에 따라 동남아 지역과 태평양 지역에 위안소를 건설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일본, 한국, 중국, 말라야(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 인도, 유라시아, 태평양 군도 국가 등에서 위안부들이 강제로 차출되기 시작했다.10) 1942년에 북부 중국에 100개소, 중부 중국에 140개소, 남부 중국에 40개소, 동남아 지역에 100개소, 서남 태평양 지역에 10개소 남부 사할린에 10개소 등, 총 400여 개의 위안소가 개설, 운영되었다.11)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군의 성 노예로 착취당한 종군 위안부에 대한 통계는 지금까지 객관적으로 정확히 파악된 것이 없다. 그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이 패전에 따라, 일본군이 위안부에 관련된 자료를 조직적으로 폐기, 은폐한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위안부 출신 국가들은 현재까지도 자국 위안부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 결과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에 의해 위안부로 강제 차출된 각국의 여성의 숫자를 최소 2만여 명12) 에서 최대 41만여 명13) 으로 추산하는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14)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진주한 초기에는 그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잔류 되어 포로가 된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여성 등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그 사례로, 자바의 체뿌(Cepu) 지역에 있던 그 수가 밝혀지지 않은 네덜란드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집단 강간을 당한 후, 병원 응급실에 수용되어, 지속적으로 강간이 이루어진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자바의 블로라(Blora)지역에서는 3주 동안 네덜란드 여성들에 대해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강간이 집단으로 자행된 사실이 있다.15)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수세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선박을 이용하여 중국이나 한국으로부터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 공급이 점차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많은 선박들이 연합군의 공격으로 격침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위안부를 차출하기 시작하는데 초기에는 일본군이 직접 위안부 차출을 관장하다가 점차 현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다.16) 1942년 5월 3일자 일본 해군이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술라웨시 지역에 45명, 동부 칼리만탄에 40명, 북부 칼리만탄에 30명, 그리고 동부 자바, 수라바야(Surabaya)에 30여 명의 위안부가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1942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인도네시아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전쟁 물자의 강압적인 수탈과 인력의 강제적인 동원으로 인해 경제는 극심하게 피폐해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위안부 차출은 인도네시아인들을 점차 공포와 자포자기로 몰아넣게 된다. 인도네시아 현지 여성을 상대로 위안부를 차출, 모집할 때 일본은 식당 종업원이나 세탁부로 취업하는 것이라고 거짓 선전을 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10대 어린 소녀들과 그의 부모들에게 향후 독립된 인도네시아를 위한 인재 양성의 일환으로 싱가포르17) 나 일본에서 학업을 계속 시켜주겠다는 거짓 약속으로 위안부를 모집했는데 이는 한국, 중국 등과 비교하여 색다른 방식이었다.18)
학업 계속이라는 거짓 약속은 주로 자바 지역에서 입소문을 통해 암암리에 확산되었다. 일본 식민통치 기관의 말단 직책19) 을 갖고 있으며 최소 초등학교 졸업 학력 이상인 13세부터 18세까지의 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향후 독립된 인도네시아를 위해 헌신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미명 아래 딸을 갖고 있는 부모들을 집요하게 회유, 협박했다. 인도네시아 전역에 약 40군데의 위안부 중간 집결지가 도시를 중심으로 개설되었고 이를 통해 많은 인도네시아의 나이 어린 처녀들이 인도네시아 역내 또는 해외에 있는 일본군의 성 노예로 끌려나가게 된다. 중간 집결지에서 일정 기간 체류 후, 어린 소녀들은 싱가포르와 일본에서의 학업 계속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배에 승선하게 된다. 배가 출항하자마자, 어린 소녀들에 대한 무차별 성적 폭행과 강간이 배 안에서 자행되기 시작했고 배가 일본군이 주둔한 지역까지 항해하는 동안, 배 안 소녀들의 육체는 철저하게 유린당하게 된다. 순결을 지키기 위해,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소녀, 돛대에 매달려 저항하는 소녀들로 배 안은 아비규환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 소녀들의 몸뚱이는 성에 굶주린 일본군에 다시 내던져지게 되는데, 이때 많은 소녀들은 이미 자포자기 상태가 된 후였다.20)
어린 소녀들에게 해외에서의 학업 계속이라는 거짓 약속으로 위안부를 차출한 방법과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21)
첫째, 일본이 일본 도쿄나 싱가포르에서 학업 계속22) 을 약속한 것은 공식적으로 일간 신문이나 관보에 게재된 바가 없다. 그 이유는 일본이 그들의 범죄 행위를 의도적으로 은닉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모든 것은 암암리에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었고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둘째, 끌려간 대부분의 어린 처녀들은 그가 원해서 가족과 헤어졌다기보다는 일본 식민 정부 기관 안에 갖고 있는 부모들의 직책이 일본군에 의해 박탈 위협에 직면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차출된 경우가 많았다
셋째, 인도네시아 어린 처녀들은 각자의 집에서 한 명씩 일본이 준비한 운송 차량에 태워졌고 중간 집결지에서 일정 기간을 거친 다음, 인도네시아 역내 또는 해외로 선박에 태워져 끌려갔다
넷째, 일본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 처녀들을 차출하여 강압적으로 일본 군인의 성 노예로 삼았는데 이는 반항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연령대의 어린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업 계속이라는 거짓 선전과 거짓 약속을 통한 위안부 차출이 점차 어려워지자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인도네시아 여성들에 대한 일본군에 의한 유인과 납치, 폭행 그리고 강간이 무차별적으로 횡행하게 된다.
3. 일본 패전 후 상황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에 따라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 각지와 해외에 산재해 있던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들도 일본군 성 노예 상황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다른 나라 출신 위안부들처럼 인도네시아 위안부들도 아무 대책 없이 현지에 방치된다. 어느 특정 지역에서는 증거 인멸을 위해 위안부들이 일본군들에 의해 학살당하는 참담한 상황도 벌어지게 된다. 인도네시아 위안부들 중 극소수만 귀향하게 되고, 대부분은 현지에 남게 된다.
인도네시아 위안부들 역시 다른 나라의 위안부들처럼 귀국, 귀향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들은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생존을 위해 현지 사회에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나이와 현지 여성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미모를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 위안부들, 특히 자바 지역 출신 여성들은 관심을 끌기 충분했으며 자연스럽게 현지 남성들의 여자가 되어 갔다. 점차 그들은 고향의 가족, 친지들을 잊게 되었고, 고향의 종족 언어마저도 구사하지 못하는 감시 속에서 생존을 위해 철저하게 현지 관습과 제도 속으로 녹아 들어가게 된다.
III. 미귀환 인도네시아 위안부 상황
1. 말루꾸(Maluku) 제도, 부루(Buru)섬의 사례
태평양 전쟁 당시 인도네시아 동부 지역에 있는 말루꾸 제도 중 부루 섬에 얼마나 많은 인도네시아 위안부들이 체류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전무한 상태이다. 다만, 인도네시아 작가인 쁘라무디야 아난따 뚜르(Pramoedya Ananta Toer)가 쓴 넌픽션23) 에 부루 섬 현지의 위안부들의 참상을 일부 밝혀지고 있을 뿐이다. 본 논픽션에 등장하는 12 명의 위안부들의 사례를 통해 그들이 어떤 경로로 부루 섬 현지에 도착했는지, 그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단편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에 따라 부루 섬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철수하게 되며 위안부들은 대책 없이 부루 섬에 방치된다. 부루 섬에 남겨진 위안부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현지의 미개한 반유목(半遊牧) 종족인 알푸루(Alfuru)족 남자들의 소유가 되는데 현지 관습에 따라 재화24) 와 물물교환 방식으로 매매가 되는 처지가 된다. 아버지의 여자가 되었다가 그 아들의 여자가 된 사례가 발견될 정도로 알푸루 족 여성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물물교환의 한 대상일 뿐이었다. 심지어는 더 이상 한 남성의 소유가 되지 못하는 여성은 마을 공동의 재산이 되어 주민들의 감시를 받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현지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외부 세계와는 철저하게 차단당하게 된다. 출신 지역인 언어 (특히 자바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외부인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도 금기시 되었다. 알푸루 종족의 관습과 규범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하게 되며, 이를 위반했을 경우, 집단적인 사형(私刑)이 이루어졌다. 부루 섬에 있는 위안부 출신 여성들은 고향의 가족, 친지들로부터 철저하게 망각 되어 가는 존재가 되었으며, 위안부들 자신도 그들의 가족을 의도적으로 잊으려는 안타까운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즉, 부루 섬의 위안부들은 귀향하는 방법과 길을 몰랐고 돌아가서 위안부 출신이라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집안 체면을 중시하는 전통 (특히 자바 족이 강함) 그리고 부모에 대한 애증의 감정 때문에 많은 위안부들이 어쩔 수 없이 현지에 남아 그곳 사회에 동화되어 가게 된다. 특히 다른 나라 출신의 위안부들과 달리, 부루 섬의 위안부들은 혼전 순결을 강조하는 종교(이슬람)의 규율, 교리에 얽매여 귀향을 포기하게 된다.
부루 섬에 방치된 위안부들에 대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25)
1)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속임수에 빠져 위안부가 된 그 수를 파악할 수 없는 인도네시아 처녀들이 부루 섬에 잔류, 생존했었지만, 2019년 5월 현재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26)
2) 그들은 문화와 문명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된 채 비참하고 미개한 삶을 영위했다
3) 가족들조차도 그녀들을 찾을 노력을 보이지 않고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정부 자체도 그녀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간주하고 있다
4) 그녀들은 가족을 그리워하고 대부분은 귀향하기를 원했으나 그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5) 현지 종족 출신 남편이나 부루 섬 지역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들은 외부 사람과 자신들의 출신 지역 언어, 특히 자바어로 말하기를 극히 주저하고 있었고 현지 주민들로부터 모든 행동을 철저히 감시당했고, 현지의 관습이나 전통을 위반했을 경우, 가차 없는 폭행을 당했다
6) 그녀들은 비참한 삶의 굴레 속에 있었으며, 고단한 일상은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게 했고 전염병 감염과 의료시설 미비로 인해 그들 중 많은 숫자가 이미 사망했다
2. 미귀환의 주요 원인
다른 지역에 있었던 인도네시아 위안부들과 마찬가지로 부루 섬에 남겨진 위안부들 대부분은 귀향하지 못하고 현지화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 둘,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들이 귀향, 귀환하지 못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으로 다음 사항을 들 수 있다.
첫째,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폐, 쇠락한 상태가 되어 삶의 의욕이 상실 되어 있었다
둘째, 어린 나이에 겪었던 성적 학대와 성적 고통은 평생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어 그녀들을 압박했다
셋째, 종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주위로부터 몸을 버린 여자로 평생을 손가락질 당할 두려움이 있었다
넷째, 자신들의 안위 (직책)를 유지하기 위해 자식을 사지(死地)로 내몬 부모에 대한 깊은 원망이 마음속에 내재 되어 있었다
다섯째, 위안부들 대부분이 신봉하고 있는 종교(이슬람)에서 강조하는 여성 순결의 중요성이 귀향에 있어 큰 장벽이 되었다
따라서 부루 섬의 위안부 출신 여성들은 귀향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현지 사회에 동화되어 가면서 망각 속의 사람이 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현지의 이질적인 문화, 관습, 전통으로 인해 정서적 충격을 겪게 된다.
IV. 미귀환 인도네시아 위안부 처리 방안
미귀환 위안부 문제를 포함하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지금까지의 인도네시아 정부의 노력은 아쉽게도 전무한 상태로 평가할 수 있다. 정부의 무능력은 관련 위원회 결성조차도 실현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 태평양 전쟁과 관련된 전쟁 배상 문제에 대한 일련의 회동에서도 인도네시아 정부는 일본에 대해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태생적으로 친일(親日)의 성격을 견지한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인 수까르노(Sukarno) 이후 지금까지 역대 인도네시아 정부는 위안부 문제 처리에 있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정부의 무관심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출신 여성들은 정부의 어떤 공식적인 확인 없이 방치된 채 명목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운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인도네시아 역내 또는 타국에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깨끗이 사라진 사람들로 죽어갔고,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제도적, 법률적, 경제적, 사회적 그 어떤 도움과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가족들조차도 그녀들이 겪었던 비참한 삶에 대해 침묵하고 의도적으로 망각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당사자인 위안부 출신 여성들도 그녀들이 잊혀져 가는 현상을 어쩔 수 없는 하나의 불가항력으로 받아 드리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일본정부에 대해 인도네시아 정부가 과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27)
첫째, 일본이 패망한 후 일본 범죄에 대한 고소권을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 정부 자체가 고소, 고발할 수 있는 관련 증빙 자료를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둘째, 인도네시아는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장 투쟁 중인 혁명기28) 에 있었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 해결에 즉시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셋째, 독립을 쟁취한 후 신생 인도네시아는 지루한 정쟁에 휘말렸다
넷째,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해 인도네시아 정부 자체의 무능력과 무관심이 있었다
1993년 일본 변호사연합 회원들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당시 사회부장관인 인뗀 수웨노(Inten Suweno)를 만나, 태평양 전쟁 당시 종군 위안부 해결 없이는 관련 국가들과 일본 간의 선린 우호 형성이 어렵다는 취지의 방문 목적을 전하게 된다.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부의 요청을 받아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법률구조단’(Lembaga Bantuan Hukum Yogyakarta)가 주축이 되어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들의 등록을 받게 된다. 이때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총 1,156명이 태평양 전쟁 당시 위안부 출신임을 등록하게 된다.29) 1995년 6월 당시 일본 총리인 무라야마 토미이치가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에 대해 ‘미안하다’라고 밝힌 후, 하시모토,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역대 일본 총리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간헐적으로 사과했으나 공식적인 배상 문제를 포함한 법적 책임을 천명하지는 않았다.
태평양 전쟁 중 그리고 종전 후에 사망한 사람들을 포함하고 주위의 시선 때문에 상기 ‘족자카르타 법률구조단’에 등록하지 못한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들을 감안하면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 수는 예상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미귀환 위안부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들의 정확한 숫자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가 일본 정부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한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본 도쿄에서 진행된 아시아 태평양 전쟁 배상회의에서 인도네시아 위안부 출신인 마르디옘(Mardiyem)이 일본 정부에 대해 다음 사항을 강조한 사례가 있을 뿐이다.
첫째,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들에게 공식 사과하라
둘째, 종군 위안부들이 파괴된 인격과 인권을 회복 시켜달라
셋째, 일본 역사 공부에 종군 위안부 교육을 확립시켜라
넷째, 종군 위안부들에게 정상적인 배상을 해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아직도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그 실체와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인도네시아 정부의 무관심, 무능력 그리고 학교 교육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위안부들이,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강제 차출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얼마나 많은 위안부들이 사망을 했고, 미귀환했는지에 대한 통계도 전무한 상태이다. 다만, 극소수의 위안부들이 생존해 있어 과거 태평양 전쟁 당시의 그들의 참혹한 삶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미귀환 위안부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 처리 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내, 외적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1. 내적 방안
1) 인도네시아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태평양 전쟁 당시 자국 출신 위안부 (미귀환 포함)들에 대한 실태 파악과 정확한 통계 자료의 전산화 추진
2) 인도네시아 정부 중심으로 위안부 출신 여성들에 대한 실질적인 명예 및 인권 회복과 경제 지원 수립
3) 종교적 (이슬람)으로 위안부를 포용하고 화해하는 분위기 조성
4) 위안부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실질적인 사회단체 결성
5) 체계적인 학교 교육과 지속적인 사회 캠페인을 통한 위안부에 대한 사회 통념과 인식 개선
6) 국영 또는 공영 방송의 위안부 실체에 대한 기획 특집 제작 및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한 확산
2. 외적 방안
1) 태평양 전쟁 당시 위안부 출신 국가들과의 문제 해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 실현)을 위한 정부 간 협력 연대 강화
2) 미귀환 위안부를 포함한 위안부에 대한 정보, 자료의 관련 국가 간 상호 교환
3) 종교 단체와 연계하여 미귀환 위안부 포함 위안부 문제 여론화
4) 세계 기구 (국제사법재판소, UN, YWCA 등)를 통한 위안부 문제 제기 및 세계적인 문제로 공론화 형성
5) 관련 국가들의 국영, 공영 방송사와 공동으로 미귀환 위안부를 포함한 위안부에 대한 기획 특집 프로그램 제작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확산
3. 처리 방안의 활용 방안
1) 내, 외적 처리 방안으로 마련된 객관적 자료 (문서, 영상, 녹음 자료 등)을 관련 국가와 공동으로 국제 사법 기관을 통해 일본 정부에 공식 전달. 이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보상의 조속한 실현 압박
2)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내 역사 교육, 특히 청소년 교육을 위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게 유도
3) 인도네시아 역내외에 산재해 있는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들의 흔적, 특히 직계 자식과 후손에 대한 지원 방안 확립에 활용
V. 나오는 말
지금까지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살펴보았다. 특히 미귀환 위안부 문제를 부루 섬의 사례를 통해 파악해 보았다. 미귀환 위안부를 포함하여 위안부 해결 방안에 있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인도네시아 상황에 있어 본 소고가 작은 도움이 되길 희망해 본다. 더 나아가서 미귀환한 우리나라 출신의 위안부들이 현지에서 어떻게 적응하면서 모진 삶을 살아내고, 죽어갔는지를 본고 부루 섬의 미귀환 인도네시아 위안부들의 삶을 통해 유추해 보고자 했다.
끝으로 일본군 성 노예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공식 사과와 법적 타당한 보상을 집요하게 거부하고 있는 일본 정부에 대해 본고가 객관적인 자료로 그들을 압박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로 활용되기를 희망한다.
참고 문헌
1. 단행본
1) 국문
양승윤, 『인도네시아사』,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0).
2) 영어
George L. Hicks, 『Comfort Women : Japan’s Brutal Regime of Enforced Prostitution
in the Second World War』, (London: Paperback, 1997).
3) 일본어
A.B. Lapian,et,al, 『Di bawah Pendudukan Jepang : Kenangan Empat Puluh Dua
Orang yang Mengalaminya』, (Jakarta: Arsip Nasional Republik
Indonesia, 1988).
Ikuniko Hata, 『Ianfu to Senjo no sei』 (The Comfort Women and Sex in War),
(Tokyo:Shincho-Sha, 1999).
4) 인도네시아어
Eka Hindra/Koichi Kimura, 『Momoye Mereka Memanggilku』, (Jakarta: Esensi).
L. De Jong, 『Pendudukan Jepang di Indonesia: Suatu Ungkapan Berdasarkan
Dokumentasi Pemerintah Belanda』, (Jakarta: Kesaint Blanc, 1991).
Saya Shiraishi/Takashi Shiraishi, (ed) 『Orang Jepang di Koloni Asia Tenggara』,
(Jakarta: Yayasan Obor Indonesia, 1998).
2. 논문 및 논저
1) 인도네시아어
Dimar Kartika Listiyanti, 「Sejarah Jugun Ianfu pada Masa Pendudukan Jepang di
Asia」, (Jakarta: Universitas Indonesia, 2008).
2) 중국어
Su Zhiliang 「Inanfu Kenkyu」 (Research on Comfort Women in Chinese),(Shanghai:
Shanghai Publishers, 1999).
3. 번역서
Daduk Zainal Abidin bin Abdul Wahid/소병국 옮김, 『말레이시아史』, (서울: 도서출판 오오름, 1998).
Pramoedya Ananta Toer/김영수 옮김, 『인도네시아 ‘위안부’ 이야기』, (서울: 동쪽나라,
2019).
1) 후추, 정향, 육두구, 용뇌 등.
*작은 따옴표 안의 ‘위안부’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성 노예 여성을 의미. 이하 위안부로 표기
** 비교문학박사(한국외국어대학교), KBS 국제방송 선임 PD 역임
2) 동인도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를 통한 통치 기간(1602-1798) 포함
3) Dimar Kartika Listiyanti, 「Sejarah Jugun Ianfu pada Masa Pendudukan Jepang di Asia」,
(Jakarta: Universitas Indonesia, 2008), p.31.
4) 양승윤, 『인도네시아사』,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0), p.73.
5) 멀라유 (Melayu)어를 lingua franca로 하는 지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그 중심
6) Daduk Zainal Abidin bin Abdul Wahid/소병국 옮김, 『말레이시아史』, (서울: 도서출판 오름, 1998), p.65.
7) Saya Shiraishi/Takashi Shiraishi, (ed) 『Orang Jepang di Koloni Asia Tenggara』, (Jakarta: Yayasan Obor Indonesia, 1998), p.2.
8) A.B. Lapian,et,al, 『Di bawah Pendudukan Jepang : Kenangan Empat Puluh Dua Orang yang Mengalaminya』, (Jakarta: Arsip Nasional Republik Indonesia, 1988), p.14.
9) George L. Hicks, 『Comfort Women : Japan’s Brutal Regime of Enforced Prostitution in the Second World War』, (London: Paperback, 1997), p.45.
10) Dimar Kartika Listiyanti, op.cit., P.11.
11) Dimar Kartika Listiyanti, ibid., p.20.
12) Ikuniko Hata, 『Ianfu to Senjo no sei』 (The Comfort Women and Sex in War),
(Tokyo:Shincho-Sha, 1999).
13) Su Zhiliang 「Inanfu Kenkyu」 (Research on Comfort Women in Chinese),(Shanghai:
Shanghai Publishers, 1999).
14) Dimar Kartika Listiyanti, op.cit., p.31.
15) Dimar Kartika Listiyanti, ibid., p.44.
16) L. De Jong, 『Pendudukan Jepang di Indonesia: Suatu Ungkapan Berdasarkan Dokumentasi
Pemerintah Belanda』, (Jakarta: Kesaint Blanc, 1991), p.108.
17) 당시 일본은 Syonanto(昭南島)라고 지칭함
18) Pramoedya Ananta Toer/김영수 옮김, 『인도네시아 ‘위안부’ 이야기』, (서울: 동쪽나라, 2019),
pp. 24∼36.
19) 주로 통, 반장, 이장, 면장 등 직책
20) Pramoedya Ananta Toer/김영수 옮김, op.cit., pp. 56∼58.
21) Pramoedya Ananta Toer/김영수 옮김, ibid., p.62.
22) 産婆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소문도 있었음
23) 원제목은 『Perawan Remaja dalam Cengkeraman Militer』, (군부 폭정 아래의 처녀들)을 『인도네
시아 ‘위안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김영수가 한국어로 번역
24) 돼지, 염소, 닭, 옷감, 창 등
25) Pramoedya Ananta Toer/김영수., ibid. p.103.
26)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 연구자, Mrs. Eka Hindrati 확인(2019.5.17.)
27) Pramoedya Ananta Toer/김영수, ibid., pp.63∼64.
28)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한 후, 인도네시아에 재진입한 연합군(네덜란드 중심)에 대해 1949년
까지 진행된 인도네시아 청년들 중심의 무장 투쟁 시기
29) Dimar Kartika Listiyanti, op.cit., 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