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육군중장의 중장 진급 서열은 1972년을 기준으로 제일 고참이다. 대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으로 오를 수 있다. 채명신의 말 한마디로 이 두 직위 가운데 하나는 당연히 차지할 수 있엇다. 그 말 한 마디는 "각하, 제 판단이 틀렸습니다." 였다. 박정희는 채명신으로부터 그런 말로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것으로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채명신은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혁명을 함께 한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마지막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열어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기를 바랐다.
1972년 5월 30일이 되었다. 채명신이 예측한대로 상부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날이 바로 채명신의 육군중장 계급정년의 날이다.
그날 오후5시가 지날 무렵 유재흥 국방장관으로부터 채명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국방장관실로 와 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채명신은 가겠다고 대답하고 헬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용산 미군 헬기장에는 장관이 보낸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국방부에 도착하니 모두 퇴근하고 국방부 청사가 빈집 같이 썰렁했다. 장관실에는 부속실 직원과 장관만이 있었다.
채명신이 방에 들어서자 장관은 벌떡 일어나 채명신 쪽으로 걸어 나와 채명신을 맞았다. 장관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선 채로 "이렇게 됐소" 하고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채명신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담담한 어조로
"장관님, 책상 서랍 속 서류 끄집어내십시요"하고 말하자 그때서야 당황하면서 서류를 꺼내어 채명신 앞에 보였다. 장관은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다시 장관은 "이거 이렇게 됐소"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 서류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가 선명했다.
채명신 중장 예비역 편입
노재현 중장 대장 승진
임 육군참모총장
본인에게 통보는 오후 5시 이후에 할 것
1972년 5월 30일 대통령 박정희
장관은 채명신에게 다시 "채 장군, 나는 전혀 내용을 몰랐소" 라고 변명했다. 채명신은 그에게 경례를 하고 장관실에서 나와 곧바로 후암동 집으로 향했다. 부인 문정인 여사는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남편의 차가운 표정에서 무엇을 느낀 탓인지 남편을 극진히 맞이하는 것이었다.
"나 저녁 안 먹었는데 먹을 수 있겠소?"
"네"하고 대답하고는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채명신은 방에 들어가 대구 2군사령부 참모장 이남주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오전 10시에 전역식을 거행하도록 준비하시오"라고 지시하니 참모장은 깜짝 놀라는 기색을 하며 "네" "네" 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나 혹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헬기를 타고 대구 2군사령부에 도착했다. 채명신을 맞이하는 모든 장병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들은 그동안 박정희와 채명신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대화의 내막을 알 까닭이 없었다. 당연히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할 줄 알았는 데 뜻밖의 비보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모장을 비롯한 장군 참모들은 더 심각한 표정으로 모두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채명신은 이들을 격려하면서
"지휘관은 바뀌게 돼있다. 그러나 군은 영원히 남아 계속 발전해야 한다. 냉정을 잃지 말라"고 타이르며 위로했다.
전역식 준비를 하는 동안 내외 귀빈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착했다. 연락조차 안했는데 이례적으로 용산에서 미8군사령관과 미군 장성들, 그리고 미 1군단장까지 전역식에 참석했다.
채명신은 평소와 다름없는 몸가짐으로 식순에 따랐다.
채명신은 전역사에서 '그간의 장병의 노고를 치하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군을 위해 헌신하며 국토방위에 최선을 다하자'고 격려했다. 간단명료한 전역사였다. 식장 분위기는 몹시 긴장되고 무거웠으나 채명신은 담담하고 태연한 군인의 몸가짐을 지키고 있었다. 전역사를 끝내고 사열차를 탈 때는 채명신도 인간인지라 슬픔이 복받혔지만 꾹 참고 사열을 끝냈다.
전역식을 마치고 정문까지 가는 동안 도열한 장병이 한결같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채명신은 '지난 군대생활을 통해 내 임무를 완수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들어서면서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조국을 빛낸 영웅 채명신 장군
채명신 장군 전역 다음 날, 육군은 물론 전국의 곳곳에서 아쉬움의 대화들로 하루 종일 들끓었다. 군대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국민 대부분이 채명신 장군이 국익을 위해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장군임을 알고 있는데 갑자기 군복을 벗었다는 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군인의 거취가 이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여러 언론사들은 후암동의 채명신 예비역 장군에게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지만 일체 거절하고 오로지 독서에만 전념하는 시간을 보냈다. 정보기관에서는 늘 검은색 찝차를 후암동 골목 길에 세워놓고 출입자를 감시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외롭지 않았다. 부인 문정인 여사의 내조 덕분으로 처음으로 가정의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군인 가족처럼 한곳에서 마음놓고 가정생활을 즐기지 못했던 채명신으로서는 이 후암동 가정에서의 삶이 가장 의미있었던 부부생활이었다고 술회했다.
부인 문정인 여사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후 채명신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나 남편의 야전근무가 대부분이므로 떨어져 지낼 때 사회봉사활동으로 일관하여 이화여대 'Home Comeing Queen' 으로 추대되었다. 문 여사는 서점에 다니면서 좋은 책을 골라 남편에게 읽도록 하는 일이 일과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생활이 6개월 가까이 지날 무렵인 1972년 10월 정부에서 주 스웨덴 대사로 임명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에서는 정부가 채명신을 유배지로 보냈다는 험담이 있었으나 채명신 자신은 일정 기간 외국에 나가있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나 그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유익하다고 보고 다행스러운 직책이라고 생각하며 임지로 떠났다.
채명신이 떠난지 얼마 안돼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유신헌법이 제정 공포되고 유신시대로 들어섰다.
1982년까지 그리스 대사, 브라질 대사 등을 역임하고 있었고 본국에서 소외되는 외지의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12.12군사반란 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으나 전두환 정권에서도 기피인물로 귀국을 불허하므로 미국 하버드대학과 UC버클리대학 연구원으로 1988년까지 연구활동을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일체 공직에 눈 돌릴 사이도 없이 6.25전쟁 및 월남전 전우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봉사활동에만 종사하다가 2013년 11월 25일 오후 세시 15분에 서거하셨다.
채명신 장군은 늘 자기가 명을 다하면 국립 현충원 월남전 전우의 무덤에 함께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 뜻이 이루어져 8평 장군묘역 대신 1평 월남전 사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채명신 장군은 건군 사상 분명한 기록 세 가지를 가지고 있는 최고의 전쟁영웅이다.
첫째, 채명신 장군은 건군 이후 전체 국군 장병 가운데 전투경험 일수가 가장 길다. 어느 누구도 그 기록을 깰 수 없다.
둘째,채명신 장군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4회의 을지무공훈장, 6회의 충무무공훈장, 5회의 화랑무공훈장 등 다른 훈장을 합해28개의 훈장을 수훈하여 훈장 수훈에서도 국군 제일을 기록한다.
셋째, 채명신 장군은 공비토벌이나 6.25전쟁, 월남전을 통해 단 한 번의 결정적 패전 없이 전승을 기록한 유일한 장군이었다.
이에 이 글을 마감하면서 이 글을 쓴 박경석은 채명신 장군의 서거에 부쳐 다음 시 '조국을 빛낸 영웅 채명신 장군' 을 영전에 바친다.
첫댓글 서현식 전우 고맙습니다.
서재에서 귀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박장군님께서 눈병까지 나시고 고생을 많이 하신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사령관님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좀 푹 쉬시기 바랍니다.
이글을 읽고는 박대통령이 그렇게 야속할수가 없었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충언을 들었더라면 박정희 대통령은 더 역사에 빛날 대통령으로 남았을 겁니다.
나 또한 서현식 전우와 같은 생각입니다.
옳은 밀씀입니다. 김재규 총탄에 죽지도 않었을 것이고 사령관님 말씀대로 스스로 정치생명이 아닌 자신의 생명을 끈은 것입니다
역사는 말합니다. 아무리 혼동의 세계가 그의 위대함을 지우려해도 먼 훗날 역사는 채명신 장군의 참 군인의 빛나는 행적과 처신은 지울수없고 세월이 갈수록 우리는 오래도록 기역할 것입니다.
최단 박사께서 완독하셨군요,
뜻을 함께하니 다행입니다.고맙습니다.
출판사 요청에 의해 '채명신 장군과 나' 를 추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