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문학지의 생명력과 영향력 / 이두백
백두산문학지의 발행인인 김윤호 친구가 2024년 1월 15일 갑작스럽게 별세했다는 소식이 답지되어 깜짝 놀랐다. 다음날 서울 태릉에 있는 장례식장에 바로 갔는데, 부인께서 알아보고는, 독감과 폐렴이 겹친 게 직접 사망원인이었다고 얘기해줬다. 그간 코로나바이러스도 두 번 확진되었었다고 했다.
떠날 때는 말이 없다지만, 2023년 11월~12월에만 해도 여러 차례 컴퓨터 메일로, 제47회 백두산문학 문학 강연 및 시 낭송회, 제41회 백두산문학 신인문학상 시상식, 제11회 백두산문학상 시상식을, 12월 17일 서울 노원구청 소강당에서 그들먹하게 한다고 알려와 전화 통화도 몇 차례 했는데 그 뒤 말없이 떠났다.
사단법인 한국문협이 주관하는 여러 행사에도 함께 많이 참석해왔고, 2022년 11월 1~2일, 제42차 전국지도자대회가 열린 부여에서도 1박2일 함께 했다. 같이 한 산책도 커피 집에서 여러 참석자들과 나눈 환담들도 살아올라왔다. 그때, 2021년엔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으로 꽤 고생했고 그 전 젊었을 때 폐렴을 한번 앓아 더욱 조심한다고는 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2022년 12월 7일에 고창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는 소식도 알려줘 칭찬해줬다.
아마 김윤호 친구가 쓴 마지막 글이었을 <계묘년 한해가 저물고 동튼 갑진년에는>이 실린 2024년 1월 12일자 영광신문이, 이 친구 장례식 후인 1월 19일에, 내가 사는 집에 도착되어 읽게 되니 이 친구의 돈키호테같고,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이었던 인생행로가 파노라마처럼 떠올라왔다.
이 친구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친구였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살던 가족들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사 왔었기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로 전학 와서 나와 같은 반 친구가 되었다.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영광읍에 소재한 중학교에도 3년간 같이 다녔다. 걸어 다니던 나로서는,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우리 집과 이 친구 집이 멀지 않아 자주 오가곤 했다. 이 친구 집에 가면, 부모님께서 항상 따뜻이 대해주셨고 집이 꽤 크고 마당과 뒤뜰도 넓었다. 누나들과 여동생이 많았지만 독자아들인 이 친구 덕분에 맛있는 음식도 많이 같이 먹곤 했다. 이 친구 부친께선 소가 아플 때 침을 줘서 낫게 해주시는 소위 시골수의사격인‘소침 주시는 분’으로 통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여고생들과 시낭송회나 문학의 밤 행사에 참여하곤 하더니, 법과대학 다닐 때는 전국불교학생회 활동에 심취하였다. 고시공부를 하면서는 엉뚱하게도 단식에 심취하여 단식도장을 열기도 했다. 내가 대학졸업 후 고시공부 해보려던 1974년 2월엔 엉뚱하게도 687쪽에 이르는 <불교성전> 책을 보내왔다. 응원을 하려던 것이었던지 고시를 포기하고 취업하라는 암시였었던지 궁금했지만 덕분에 심취해서 모두 숙독했다.
이 친구가 나보다 2년 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집에 내려와 있을 때는 자주 놀러가서 대화도 많이 했고 친구가 보유하고 있던 법정스님의 책들 및 문학서적 들을 많이 빌려서 탐독했다.
이후 이 친구는 다시 서울에 올라가 계속 대학원 공부를 해서, 행정학 박사학위도 땄고, 정치권도 많이 기웃거렸다. 경제적으로는 안정이 조금 안 되었었던지 박사학위 마칠 즈음엔 며칠 간격으로 급한 전화를 다섯 번이나 해와 웃으면서 급전 수요를 충족해 준적도 있다.
그러다가 이 친구, 엉뚱하게도 1991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시로 등단했고, 용감하게 1994년 6월11일엔 백두산문인협회를 창립했다. 1995~6년경엔 이 친구의 장모님과 처남을, 어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났는데, 이 친구의 처남이 농촌에서 수문용접 일을 해온 경험자여서, 내가 대형조선소에 취업시켜주는 중간역할을 했었다. 역으로 세계 5위 규모 조선소를 건설하여 가동을 준비하던 조선소에선 기능인력 모집이 절실하던 때라 서로 좋은 결과가 되었고, 이 친구가 사위/ 남편/ 매형역할을 잘 한 셈이 되었다.
1999년 3~4월에 엉뚱하게도 이 친구가, 서울신문과 공동주최로 시인, 화가 등 예술인 백여 명씩의 금강산 뱃길문화체험을 몇 차 주도했다. 이 친구의 이런 활동을 응원하시는 분도 계셨던지 첫 시집 『화산』 5천권을 펴냈고, 이 친구의 어머니까지 모시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갖기도 했다.
2000년 7월에 종합문예지 『백두산문학』 창간호를 발행하였다기에, 대학 다닐 때 대학신문, 취업 후 회사 사보에 글을 지속 투고해오던 나도 이 친구 통해, 2002년 『백두산문학』2호에서 수필로, 2003년 『백두산문학』4호에서 시로 등단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친구는 계속, 2004년 6월 대북 인도적 물자지원 단장으로 북한의 진남포와 평양을 방문하더니, 2006~7년엔 남북공동나무심기 행사로 개성에 가서 평화통일의 숲 가꾸기를 주관했는데 나도 개성에 같이 가서 은행나무20여주를 심었고 내 명찰도 달아놨었다.
2016년 10월엔, 이 친구 또 국회출입기자포럼을 출범시키더니 2023년까지 통일정책토론회를 여의도에서 국회의원들 및 교수들 참여하에 5회나 가졌다.
통일을 염원하고 체험한다는, 고구려 옛 터 및 백두산역사문화탐방을 20회나 주선하기도 했는데, 2023년 9월에도 주선한다기에 지인을 합류하게도 했다.
『백두산문학지』는 2023년 말에 41호를 발간했고 『백두산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인원은 25년간 약 350명에 이른다.
한 개인이 주도하여 발행하는 문학지의 생명력은 얼마나 될까? 개인이 주도하는 문학지가 문단의 민주화에 기여하여오고, 글 쓰는 이들을 많이 발굴하고 글쓰기 생활화의 지평을 넓혀오는 데에 기여한 바는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발행인 별세나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단점을 극복하기 또한 쉽지 않은듯하다. 사단법인 한국문협에 가입하기 위해, 내가 2008년 수필로 재 등단했던 『문예한국』 도 어느 사이 중단되어 안타까웠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 오면서 41호를 넘긴 『백두산 문학』지가 백두산문학 출신 작가 350명이나 김윤호 친구의 지인들에 의해 지속 발행되길 기대해 본다.(월간문학 2024년 8월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