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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13권
4.2. 유정의 종류와 그 전생(轉生)[2]
2) 중유(中有)
① 총설
앞(제12권)에서 ‘지옥과 온갖 천(天)과 중유(中有)는 모두 오로지 화생일 뿐이다’라고 논설하였는데,
여기서 어떤 법을 중유라고 한 것인가?
또한 이것을 어떠한 이유에서 바로 ‘생’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1)
게송으로 말하겠다.
사(死)와 생(生)의 두 가지 유(有) 중간의
5온을 중유(中有)라고 이름하니
마땅히 이르러야 할 곳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유는 ‘생’이 아닌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중유란] 사유(死有) 이후, 생유(生有) 이전에 5온을 구족(具足)한 유(有) 자체가 일어나 태어나야 할 곳[生處]에 이르게 되니, 두 가지 유(有)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유’라고 이름하였다.
이러한 [중]유 자체도 일어나기도 하고 몰(沒)하기도 하는데, 어째서 ‘생’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이러한 [중]유신은 업으로부터 획득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업으로부터 획득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업은 생의 원인[生因]이 된다”고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2)
만약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원인을 갖지 않아야 할 것[無因]이며, 그런 즉 무인외도(無因外道)가 논의하는 과실과 동일하다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유도 마땅히 ‘생’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생’이란 말하자면 당래(當來)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처소에 이르는 것으로, ‘이른다’는 뜻에 근거하여 ‘생’이란 명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유신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일어나고 몰하는 것일지라도 아직 그곳(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처소)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중유 자체는 말하자면 이러한 [사유와 생유] 중간의 이숙의 5온으로, 이것은 다만 ‘일어나는 것[起]’이라고만 말하고 ‘생겨나는 것[生]’이라고는 말하지 않으니, 사유와 생유의 중간에 잠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또한 ‘생’이란 바로 ‘나아가게 된 것[所趣]’이라는 뜻이지만, 중유는 ‘능히 나아가는 것[能趣]’이니, 그래서 ‘생’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게 된 것’이라고 함은 무슨 말인가?
이를테면 업에 의해 인기된 이숙의 5온이 마침내[究竟] 분명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3) 그리고 “‘업은 생의 원인[生因]이 된다’고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에 이는 마땅히 ‘생’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함은 이치상 옳지 않으니,
“업을 원인으로 하는 것을 모두 ‘생’이라고 말한다”라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보특가라로서 이미 생결(生結)은 끊었지만 기결(起結)은 아직 끊지 않은 이가 있으니, 널리 4구(句)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4)
바로 이러한 사실에 준하여 중유에 수순(隨順)하지만 생유에는 수순하지 않는 업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이러한 업에 의해 획득되는 것을 ‘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유가 ‘생’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그러한 경설(經說: ‘업은 생의 원인이 된다’는 경설)과 서로 모순되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이것(중유)은 이미 생유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중유를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생겨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인가?5)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당래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곳에] 이르게 된 것[所至] 나아가게 된 것[所趣]을 설하여 ‘생’이라 하지만, 중유는 그렇지 않다”고.
또한 하나의 업은 다수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일 찰나의 업에 다 찰나의 결과가 존재하고, 한 가지 무색업에 유색과 무색의 결과가 존재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업에 의해 인기된 결과에 ‘생겨나는 것[生:생유]’도 있고 ‘일어나는 것[起:중유]’도 있다고 한들 이치상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
② 중유의 존재증명: 이론적 근거[理證]
중유가 존재한다고 설하는 것은 이치[理]로 보거나 성교[敎]상으로 서로 어긋난다는 다른 부파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순정리론』 제23권에서 설한 바와 같다.6)
그러나 응리론자(應理論者)는 설하기를
“결정코 중유는 존재하니, 이증(理證)과 교증(敎證)에 의거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떠한 이증과 교증에 의거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정은] 곡식 등이 상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즉 生處)에 간단없이 속생(續生)한다.
우리의 종의에서는 영상[像色]이 생겨나는 경우도
그(본체와 거울) 중간은 역시 단절됨이 없다고 인정한다.
‘[영상의 실유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고
어떤 부류에서는 인정하고 있지만
그들이 설한 바는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영상은] 그 밖의 또 다른 영상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며
[실유의] 특성[相]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항상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능히 다른 색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이며
무분별(전5식)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혹은]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색이 병존하는 일은 없다’고 하였지만
이와 같이 말함으로써 [영상의 실유는] 획득될 수 있으니
빛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며, 두 가지 영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만 영상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으니
[영상은] 하나의 본체로부터 다수가 생겨나기 때문이며
상속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조건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자께서 건달박(健達縛)과 아울러 5불환과와
7선사(善士)에 관한 경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중유는 실유이다].7) 『구사론』에서의 본송은 다음과 같다.
[유정은] 곡식 등이 상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즉 生處)에 간단없이 속생(續生)하니
거울의 영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동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의 존재가 병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상속한 것이 아니며, 두 가지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경에서 건달박(健達縛)과 아울러 5불환과와
7선사(善士)의 존재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중유는 실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먼저 정리(正理)에 의할 것 같으면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중유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정코 어떤 처소로부터 몰하여 다른 어떤 처소로 속생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니, 세간의 상속(相續) 전전(展轉)하는 법으로서 비록 처소상의 단절됨[間斷]이 있을지라도 속생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유정이 어떤 처소로부터 몰하여 다른 어떤 처소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미 인정한 이라면, 결정코 마땅히 중간에 연속(連續)하는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비유하자면 세간의 곡식 등이 [씨앗으로써] 상속하는 것과 같다.
지금 바로 보더라도 곡식 등이 다른 처소로 속생하는 것은 반드시 중간에 처소상의 단절됨이 없기 때문이다. 유정류의 상속도 역시 그러하니, 찰나에 속생하여 반드시 처소상의 단절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유가 실유(實有)라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세간에서도 역시 어떤 색처(色處)는 비록 중간의 단절됨이 있을지라도 속생하는 경우가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본체[質:거울에 비친 영상의 본체]로부터 거울 중에 영상[像]이 생겨나는 것처럼,
사유와 생유의 두 가지의 이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8)
우리는 본체와 소의(예컨대 거울) 중간에 어떤 사물이 있어야 간단없이 연속하여 온갖 영상을 낳을 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 중간도 역시 단절됨이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월면(月面) 등의 대종은 항시 법이(法爾)로서 능히 청정 미묘한 대종을 낳으며, [그것이] 무간에 [모든 처소에] 두루 이르는 것으로, 소의(예컨대 강물이나 거울)와 직접적으로 대향하며 머무는 것은 모두 다 본체와 유사한 영상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소의가 맑거나 깨끗하면 영상이 나타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만약 소의가 거칠거나 더러우면 영상은 은폐되어 알기 어려운 것이다.
비록 두 가지(본체와 영상이 맺히는 소의) 중간에도 역시 영상이 존재할지라도 [영상은] 청정 미묘하기 때문에 소의에 머물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니,
마치 햇빛 등의 경우와 같다. 즉 [햇빛 등은] 비록 [모든 처소에] 두루 생겨날지라도 벽 등의 소의에 머무를 때 비로소 나타나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영상이 본체와 연속하여(다시 말해 단절됨이 없이) 생겨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인가?
중간이 막혀[隔] 있으면 영상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달 등은 중간에 연속되는 일이 없어도(다시 말해 달과 수면 사이가 단절되어 있어도) 강물 등에 능히 영상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면, 중간이 막혀 있을지라도 영상은 역시 마땅히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종의에서는 중유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다른 처소에서 온이 멸하고 다른 처소에서 온이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상의 형태나 용모, 굽히고 펴며, 구부리고 쳐다보며, 가고 오는 [동작] 등은 본체에 따르기 때문이다.9)
이와 같은 사실(중간이 막혀 있으면 영상은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따라 영상은 본체와 연속하여 생겨나는 것임이 증명되는 것으로, 중유를 부정하기 위해 이러한 [영상의] 비유를 인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0)
그런데 경주(經主:세친) 등 어떤 부류의 여러 논사들은 ‘[거울에 맺힌] 영상[이 실재한다고 하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비유(譬喩)가 되지 않는다’고 인정하지만,11) 그들의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즉 영상[이 실재한다고 하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니니, 또 다른 [거울]에 대향하여 이와 같은 영상을 바로 낳기 때문으로,
비유하자면 이러한 영상(또 다른 거울에 영상을 낳은 앞의 거울의 영상)이 본체와 소의[에 의해 생겨난 것]과 같다.
이를테면 거울과 [거울 앞에] 나타난 본체를 근거[依]와 조건[緣]으로 삼았기 때문에 거울 중에 소의와 본체에 따라 영상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영상의 조건이 된 본체가 실유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상이 조건이 되면 또 다른 거울에서도 역시 본체와 소의에 따라 영상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의 [거울의] 영상도 [또 다른 거울의] 조건이 되어 영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실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하며, 이러한 사실에 따라 모든 영상이 실유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앞의 거울의 영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또 다른 [거울의] 영상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생겨났을] 것인가?12)
만약 ‘앞의 [거울의] 영상의 조건이 된 본체가 이러한 [또 다른 거울에 비친 영상의] 조건이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앞의 [거울에 비친 영상의] 본체는 뒤의 [영상의] 소의(거울)와 [직접적으로] 대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뒤의 영상은 앞의 [거울에 비친 영상의] 본체에 따라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뒤의 영상의 소의[가 된 거울]은 오로지 앞의 [거울에 비친] 영상과 대향하였을 뿐 앞의 [거울에 비친 영상의] 본체와는 대향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앞의 [거울에 비친 영상의] 본체를 조건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뒤의 [또 다른 거울에] 나타난 영상이라 할지라도 거울과 본체를 등지고서 생겨난 경우를 일찍이 본 적이 없으니, [앞의] 거울 중에 나타난 영상을 조건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뒤의 [또 다른 거울의] 영상은 앞의 [거울에 영상을 낳은] 본체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앞의 [거울의] 영상에 따른 것으로, 그 이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다시 영상 자체는 실유하는 것임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영상은 실유의 특성[相]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안식 등에 어긋나지 않는(벗어나지 않는) 경계대상을 모두 다 실유라고 한다면―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마땅히 성립시키게 될 것이다―.13)
영상은 이미 볼 수 있는 것[可見]이기 때문에 실유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영상이 존재할 때 획득(인식)할 수 있기 때문으로, 이것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어떠한 때라도 결정코 획득할 수 없어야 하거나, 혹은 항상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14)
만약 ‘어떤 때는 획득할 수 있고 [어떤 때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의 근거가 된 연(緣: 본체)과 화합하거나 화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그럴 경우 그 밖의 다른 유위법도 연과 화합하는 상태에서만 실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15)
또한 영상은 능히 그 밖의 다른 색이 생겨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상은 능히 그 밖의 다른 영상[像色]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니,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 밖의 다른 영상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이다.16)
또한 [영상은] 무분별식(즉 전5식)의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5식신(識身)의 소연이 되는 경계대상이 실유라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이다. 즉 영상은 이미 다 같이 안식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실유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법이 이상과 같은 특성을 갖추었다면, 그러한 법이 실유라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으로, 이러한 영상도 이미 그러하기 때문에 실유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②-1 경주(經主) 세친과 대덕 희혜(喜慧)의 상색(像色) 무체설 비판
그런데 경주 등은 영상[의 실유]를 설정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실유의 색(거울과 영상)]이 병존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17)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일한 처소에 거울이라는 색법[鏡色]과 영상이 함께 현전하는 것을 보지만, [만약 그것들이 실유라고 한다면] 두 가지의 색은 마땅히 동일한 처소에 함께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것들은 각기 다른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폭이 좁은 강물 위에 비친 양쪽 언덕의 형태[色形]는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상이 동시에 함께 나타난 것으로, 양쪽 언덕에 있는 자는 서로를 분명히 본다. 그러나 일찍이 어떠한 처소에서도 동시에 [병존하는] 두 가지의 색을 함께 본 일이 없으니, 마땅히 이러한 두 가지 색이 함께 생겨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림자[影]와 빛[光]이 동일한 처소에 [병존하는 것을]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림자 가운데 매달려 있는 거울을 보게 되면 빛의 영상이 환하게 비쳐 거울의 면에 나타나는데, 마땅히 여기(하나의 거울 면)에 두 가지 상(그림자와 빛)이 함께 생겨났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혹은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의 색이 병존하는 일은 없다’고 하였을 때의 두 가지란 거울의 면과 거기에 비친 달의 영상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두 가지는] 가깝게 보이고 멀리 보이는 등의 차별이 있으니, 마치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18)
만약 [동일한 처소에] 함께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다르게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온갖 영상[像]은 이치상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無]임을 알아야 한다.”19)
여기서 그(경주)의 논거를 관찰하건대, 그것으로는 능히 거울에 비친 영상[像色][의 실유]를 부정할 수 없으니, 그와 같이 말함으로써 [도리어 영상의 실유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동일한 처소에 거울이라는 색법과 영상이 함께 현전하는 것을 보지만, [만약 그것들이 실유라고 한다면] 두 가지의 색은 마땅히 동일한 처소에 함께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것들은 각기 다른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였지만,
이는 [영상은 실유가 아니라는 주장의] 결정적인 논거가 되지 않으니, 동일한 처소에서 벽(壁)과 빛[光]을 함께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벽과 빛의 [두] 색이 다른 대종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동시에 동일한 처소에서 취할 수 있으며, 역시 또한 벽에 존재하는 빛을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 볼 때 거울과 영상도 함께 존재[俱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설한 바는 영상을 부정하는 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빛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일륜(日輪:태양)의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허물(벽과 병존한다는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치는 역시 그렇지 않으니, 난촉(煖觸)은 빛과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 경우] 햇빛[日光]의 색은 마땅히 의인(依因)을 갖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능의(能依: 햇빛)는 소의(所依: 벽)를 떠나 일어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빛과 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울과 영상의 두 색도 소의가 되는 대종이 비록 다를지라도 동일한 처소에 병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설한 ‘다른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라는 논거는 ‘두 가지의 처소는 동일하지 않아야 한다(다시 말해 동일한 처소에 병존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논증하는데 진위부정의 오류[不定失]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거울과 영상의 색은 다 같이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처소가 동일하지 않아야 한다면, 어떻게 “동일한 처소에 거울이라는 색법과 영상이 함께 현전하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처소가 다를 경우 [두 색을 동시에] 취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벽과 빛의 [두] 색의 경우처럼 처소가 비록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함께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러한 영상[像色]은 지극히 청정 미묘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온갖 색을 능히 엄폐하지 않는다. 즉 거울과 영상이 지극히 서로 인접하여 [양자는 동일한 처소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처소에서 취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운모 등에 의해 가로막혀 있는 색으로서 만약 지극히 서로 인접해 있는 것이라면 바로 [증상만을 일으켜] ‘동일한 처소에서 취하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빛과 벽은 비록 [처소가] 다를지라도 지극히 서로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동일한 처소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20)
또한 [경주는 “양쪽 언덕에 있는 자는] 동일한 강물에 비친 양쪽 언덕 형태의 영상을 동시에 각기 별도로 본다”고 하였지만,
이 역시 옳지 않으니, 영상이 인연화합의 어떠한 차별도 없이 이와 같이 보인다고 논증하였기 때문이다.21)
이를테면 하나의 강물 위에 하나의 영상만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영상은] 청정 미묘하여 처소가 인접한 경우 서로를 엄폐(장애)하지 않는 것으로, 견(見)의 인연이 충족[合]되면 능히 그것을 볼 수 있지만, 만약 견의 인연이 결여된 경우라면 능히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영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보이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마땅히 [영상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처소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일한 처소에서도 [회칠한 깨끗한 판자에] 산가지(셈대)로 그린 글자의 경우, 빛을 향하고 있거나 빛을 등지고 있음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데,
어찌 동시에 함께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영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22)
[또한 경주는] “그림자와 빛이 동일한 처소에 [병존하는 것을]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림자 가운데 매달려 있는 거울을 보게 되면 빛의 영상이 환하게 비쳐 거울의 면에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림자와 빛의 영상은 실유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림자와 빛 가운데 걸린 두 개의 거울에 나타난 두 영상은 실유의 빛과 그림자가 아니니, 색[법]처럼 그것의 촉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명료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벽 등에 따른(나타난) 빛과 그림자의 두 본체[質]는 두 개의 거울 면(각기 그림자와 빛이 비친 벽에 걸린 거울)에서 서로 상위하지 않고서 빛과 그림자의 영상을 낳는 경우가 있지만, 마치 유정의 영상 자체가 유정은 아닌 것처럼 [그것 자체가] 빛과 그림자의 색[법]은 아니다.
따라서 빛과 그림자의 영상은 그 자체 빛과 그림자가 아니기에 비록 동일한 처소에 나타날지라도 상위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가 종의로 삼는 바는 그림자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상위할 것인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서로] 상위한다거나 해손(害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근거할지라도 상위한다는 뜻은 역시 없으며, 그런즉 그가 설한 논거는 [양자] 모두에게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거울[의 면]과 영상은 가깝게 보이고 멀리 보이는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온갖 영상은 이치상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였지만,23)
이 역시 [영상의 실유를 부정하는] 논거가 되지 않으니, 두 가지의 영상(空界와 달의 영상)이 [동시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공계(空界)와 달의 영상이 다 같이 거울 등에 근거하여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즉 공계의 색과 그곳의 달은 차례로 안포(安布:배열)되어 원근의 차별이 있는 것으로, 이것이 소의(즉 거울)와 영상의 처소가 차별되는 근거이다.
그리고 공계는 바로 실유로서, 색처에 포섭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변본사품(辯本事品)」에서 이미 간략히 성립시켰다.24)
그래서 [공계는] 달과 더불어 강물 위에 각각의 영상을 능히 낳을 수 있지만, 생겨난 영상[像]과 본체[質]는 상(相)이 동일하기 때문에 소의처에서도 유사한 [원근의] 차별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이와 같은 견(見)의 조건[緣]이 충족[和合]됨에 따라 원근이 존재하지 않음에도(다시 말해 영상에는 실제로 원근이 없지만) 원근을 보게 되니,
이는 마치 색채로 그린 그림[彩畵]이나 비단실로 수를 놓아 쓴 글자 따위를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지만 높고 낮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혹은] 달은 멀리 있기 때문에 그 영상 역시 그렇기 보이는 것으로, 마치 만월의 경우 그 영상도 일그러짐이 없이 보이는 것과 같다.25)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그(경주 세친)의 온갖 논거에 대해 논파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온갖 논거로써는 능히 영상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덕(大德) 희혜(喜慧,(『순정리론』에서는 邏摩))도 역시 다수의 논거로써 영상이 실유가 아님을 논증하고 있는데, 경주(經主)의 경우와 동일한 논거는 경주에 대해 비판한 것과 같으며, 동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순정리론』 제23권 중에서 이미 널리 분별하여 논파하였지만, 여기서 다시 간략히 서술해 보기로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울 등에 [비친] 온갖 영상은 모두 다 실유가 아니니, 부분적[一分]으로 [비친] 것이라고 하든지 모두에 두루[遍] [비친] 것이라고 하든지 다 같이 올바른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강물에 비친 달의 영상은] 달을 원인으로 하여 인발(引發)된 것이지만 물의 일부분에 근거하거나, 혹은 두루 근거하여 영상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먼저 ‘물의 일부분에 근거하였다’고 함은 이치상 옳지 않으니,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으로,26) [강물에] 두루 수전(隨轉)하기 때문이다.
‘모두에 두루 [근거하였다]’고 하는 것 역시 이치상 옳지 않으니, 한정[分限]되어 관찰되기 때문이다.27)
또한 [소의와] 양적인 차이가 없이 동작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 명의 천수(天授)가 거울로부터 멀어지거나 거울로 나아갈 때 영상은 [소의와] 양적인 차이가 없이 나타나며, 가거나 오는 작용의 차별을 보게 되지만, 하나의 실유의 색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2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영상이 실유의 색이 아니라고 한다면) 거기(거울이나 강물)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본체[本質: 즉 피사체]를 연(緣:조건)으로 하여 안식(眼識)이 생겨났기 때문으로, 마치 안근(眼根)과 색을 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근과 거울 등을 연으로 하여 거울 등에 [비친] 본체에 대한 안식이 생겨날 수 있으니, 실로 본체를 보고서 별도의 영상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말한 그 같은 온갖 논거로도 역시 능히 영상을 부정할 수 없다.
먼저 그가 말한 “부분적으로 [비친] 것이라고 하든지 모두에 두루 [비친] 것이라고 하든지 다 같이 올바른 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영상은] 실유의 색이 아니다”라고 함은 이치상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다른 경우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안근과 거울 등을 연(緣)으로 하여 거울 등에 [비친] 본체[質]에 대한 안식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역시 동일하게 이와 같은 두 종류로 따져 책망해야 할 것이니, 부분적으로 [비친] 것이라고 하든지 모두에 두루 [비친] 것이라고 하든지 다 같이 올바른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29)
즉 거울 등을 연으로 하여 본체[本質]를 다시 보게 되지만, [거울의] 일부분을 연으로 삼았다거나 혹은 두루 연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먼저 ‘거울 등의 일부분을 연으로 삼았다’고 할 수 없으니, 결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즉 [거울의] 다른 방소(方所)에도 모두 능히 현전할 수 있으니, [그곳도] 견(見)의 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거울 등의 [모든 부분을] 능히 두루 연으로 삼았다’고도 할 수 없으니, 보이는 것에는 분명 한정[分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중현)는 ‘달 등을 원인으로 하고 강물 등의 일부분에 근거하여 [달의] 영상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본체[質,즉 달]와 소의[依,즉 강물]가 중간에 장애[隔] 없이 상대(相對)하면, 소의 중에 법이(法爾)로서 본체의 영상이 생겨나는 것인데, 어찌 영상이 다만 [강물 등의] 일부분에 근거하여 생겨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영상이 소의(예컨대 강물)에 두루 근거하여 생겨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지금 바로 보건대 다수의 사람들이 강가에 길게 늘어서 있을 경우, 각기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강물에서] 달의 영상을 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한 사람이 다수의 영상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견(見)의 연(緣)이 (다시 말해 다수의 영상을 볼 수 있는 조건이) 충족[和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강물 등의] 모든 처소에 달의 영상이 생겨날 수 있을지라도 다만 견의 연이 충족된 것만이 현전하기 때문에 일부에서만 볼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부분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아울러 밝음[明]의 연이 결여되어 어두움[暗]에 의해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해석하였다.
“영상[像色]은 가볍고 미세하여 정면에서 가까이하여야 볼 수 있는 것으로, 옆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보기 어렵다.
혹은 다시 점차적으로 한 사람도 역시 다수의 영상을 보게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마땅히 힐난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달의 영상이 한정되어 보이는 것은 그것의 본체[本質]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으로, 나타난 영상은 반드시 근거가 된 본체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혹 [허공처럼] 한정이 없는 본체를 연으로 한 경우라면 강물 위에는 무한정으로 영상이 생겨나게 될 것이니, 마치 강물에 허공의 푸른색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강물에 비친 영상이 한정되어 보이는 것은] 본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으로, 비록 일체의 모든 처소에 달의 영상이 [두루] 생겨날지라도 [부분적으로] 한정되어 보인다고 하여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혹은 다시 ‘거울 등을 연으로 하여 나타난 본체의 상(相)을 다시 보게 된다’고 말할 경우에도, 비록 [거울의] 일부분을 연으로 삼았다거나 혹은 [모든 부분을] 두루 연으로 삼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본체를 보는 것은 결정코 마땅히 거울 등을 연으로 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하며, [본체가] 영상을 낳는다는 것도 역시 그러한데,
어찌 수고스럽게(쓸데없이) [“부분적으로 비친 것이라고 하든지 모두에 두루 비친 것이라고 하든지 다 같이 올바른 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영상은 실유의 색이 아니다”라고] 따져 힐난하는 것인가?
또한 그는 “그러한 [소의와] 양적인 차이가 없이 동작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영상은 실유가 아니다”라고 설하였지만,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즉 비록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실유의 영상[像色]이 생겨나는 것일지라도 영상은 반드시 소의와 본체[本質]에 따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양적으로는 비록 동등할지라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소의상에 그것의 본체와 마찬가지로 색깔[顯]과 형태[形]와 동작의 세 종류의 영상이 생겨나니, 영상은 소의와 본체에 따르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록 [영상 자체는] 동작을 갖지 않을지라도 가거나 오거나 그 밖의 다른 운동과 같은 세 가지 작용을 획득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운동의 상(相)은 본체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임[運轉]에 따라 무간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혹은 소의(예컨대 거울)가 그것을 지닌 자에 따라 동요(動搖)하기 때문이다. 혹은 [영상을] 보는 자가 스스로 동요하는 것을 ‘영상이 움직이는 것[轉]’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30)
이처럼 모든 영상은 소의의 분량(分量)과 처소를 벗어나지 않지만, 본체 등에 따라 가거나 오거나 그 밖의 다른 운동의 상을 갖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31)
또한 그는 “본체를 연(緣)으로 하여 [영상에 대한] 안식(眼識)이 생겨난 것으로, 이는 도리어 본체를 보는 것이다”라고 설하였지만,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으니, 거울 중에는 본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다른 처소(거울 밖)에 존재하는 법을 또 다른 처소(거울 안)에서 취할 수 없다는 것은 세간의 상식적인 사실[世極成]이기 때문이다.
또한 취해진 영상의 형태나 크기나 색깔이 본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32)
만약 ‘[영상은] 연(緣:예컨대 거울 등)의 힘에 의해 [본체가] 바뀌어 일어난 것[改轉]으로, 비록 이것이 바로 그것(본체)이라 할지라도 나타난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서로 상위하기 때문이며,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영상이] 바로 그것(본체)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나타난 것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미 나타난 것에 차이가 있다면 마땅히 [영상이] 바로 그것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이 나타난 것이 다르다면 [본체와 영상은] 서로 상위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나타난 것에 차이가 있을 뿐 바로 그것(본체)이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으니, 커다란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늙음[老] 등의 상태 역시 마땅히 이전의 갈랄람(수태 후 첫 7일간의 상태) 등의 상태가 연(緣)의 힘에 의해 [바뀌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애써 노력(설득)하였음에도 어찌 온갖 연이 힘에 의해 [본체와는 다른] 별도의 영상이 낳아진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연[의 힘]을 빌려(근거로 하여) 도리어 본체를 보는 것이라고 분별하는 것인가?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역시 이와 같이 말하였다.33)
“그렇지만 비록 영상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이와 같이 [두 가지 존재(거울의 면과 영상)를 함께] 보게 된 것은 온갖 인연이 화합한 세력 때문으로, 이러한 제 법성의 공능의 차별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34)
그는 어찌하여 본체와 거울 등의 연이 화합한 세력이 별도로 [존재하는] 영상을 능히 낳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두 가지 존재를 함께] 보게 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
‘법성의 공능의 차별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고 설하였기 때문인가?
또한 ‘화합’이라는 말이 실유의 법[實法]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세력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35)
또한 다수의 연이 화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제법에 차별적인 공능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마땅히 공능이 차별되는 안과 색 등을 연으로 하여 공능이 차별되는 별도의 안식을 인기하여 낳게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역시 공능에 의해 차별되는 본체와 거울 등을 연으로 하여 공능이 차별되는 별도의 영상을 인기하여 낳게 한 것이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온갖 영상의 실유는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②-2 상색(像色)이 동유(同喩)가 되지 않는 이유
곧 영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동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 것이니, [영상은] 본체에 따라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든 영상을 관찰하건대 그것은 본체에 따라 괴멸하는 것이므로 생유 역시 사유에 따라 괴멸한다’고 할 경우, 유정의 상속은 바로 [죽음과 더불어] 단멸(斷滅)하여야 하는 허물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36)
또한 모든 영상은 본체와 유사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달 등의 영상은 결정코 본체와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영상이 생유의 비유라고 한다면] 소[牛] 등의 사유(死有)로부터 오로지 소 등이 태어나야 하지만, 이미 그 같은 사실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영상의] 비유는 [생유의] 동등한 비유(즉 同喩)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본체로부터 다수의 영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본체는 소의에 따라 온갖 영상을 낳으니, 하나의 본체는 그것에 대향하는 거울 등의 다수의 소의에 다수의 영상을 두루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한 [제]온상속(즉 유정)의 사유로부터 다수의 제온상속의 생유가 함께 생겨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영상은 이러한 [생유]에 대한 동등한 비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본체와 영상은 상속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본체와 영상은 동일한 상속이 아니니, 영상과 본체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상속은 반드시 동시에 생겨나지 않지만 영상과 본체는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에 [양자는] 상속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유정의 상속은 전후 무간으로, 이곳에서 죽어 다른 곳에 속생(續生)한다.
따라서 다만 마땅히 곡식[의 예]를 인용하여 동일한 법의 비유[同法喩]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영상의 경우는 [이러한 사실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생유의] 비유로서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나타난 영상은 두 가지 사실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든 영상은 두 가지 연(緣)으로 말미암아 생겨날 수 있는 것으로, 첫째는 본체이며, 둘째는 거울 등[의 소의]이다.
그러나 세간을 현견하건대, 생유는 그렇지 않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생유는 영상과 같은 것이고, 사유는 본체와 같은 것인데, 다시 어떠한 법이 있어 영상의 소의(즉 거울)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인용한 [영상의] 비유는 [생유의] 법과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정혈(精血:아버지의 정액과 모태의 피) 등이 영상의 소의와 같은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것은 유정이 아니기 때문이며(다시 말해 무정물이기 때문이며),
또한 화생이 허공 등에서 홀연히 생겨난다고 할 경우, 거기서는 무엇을 영상의 소의처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만약 ‘오로지 식(識)이 상속 유전하는 것으로, [그것이] 연속하여 죽고 태어난다고 하는 뜻이 이미 성립하였는데, 다시 색의 상속을 주장하여 다시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라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아직 색에 대한 이탐(離貪)을 획득하지 못한 제 유정에 대해 색을 떠나 오로지 마음만으로 상속 유전한다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색을 떠나 마음이 상속 유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생을 받을 때에도 결정코 색을 취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상속은 반드시 색과 함께 할 때 비로소 능히 유전하여 생을 받을 처소로 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오로지 [색에] 계박되어 태어나며, 오로지 [색에] 계박되어 죽는다”라고 하였다.
오로지 [색에] 계박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간으로부터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즉 성자께서는
“아직 색탐을 떠나지 않은 일체의 모든 이로서 색의 계박에 묶이지 않은 이가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식(識)만으로 상속 유전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의 본유(本有)의 색이 능히 상속하여 이후 태어날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니, 죽는 곳에서 신체가 사멸하는 것을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별도의 색이 존재하여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중유[의 5온]이 결정코 존재한다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안근(眼根)과 이근(耳根)과 의식(意識)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非至境]만을 취하기 때문에,37) 여기에 있으면서 멀리 있는 달을 취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도읍을 생각하는 것을 [계경에서] “[마음은] 멀리 가고[遠行]……”라는 따위로 설한 것으로, 마음은 색을 떠나 능히 다른 방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38)
이처럼 영상은 본체와 [간단없이] 연속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죽는 곳과 태어나는 곳 사이에 간격이 있다(다시 말해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동등한 비유[同喩]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밝혔다.
이에 따라 이제 메아리[響聲]를 비유로 삼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해 보아야 할 것이니,39)
소리와 저편 골짜기 중간에 어떤 법[物]이 존재하여 상속하며 전(傳)해져 메아리를 낳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본래의 소리가 발성되면 그것의 소의가 된 대종이 전(傳)해져 미묘한 대종을 낳으며, [그것이] 골짜기 가운데 두루 이르다가 부딪치는 곳에서 본래의 소리와 유사한 메아리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의 소리를 발성한 처소와 저편 골짜기] 중간에도 비록 소리의 메아리가 상속하고 있을지라도 흩어져 미약하기 때문에 들을 수 없는 것으로, 만약 중간에 산이나 계곡 등과 접촉하게 되면 바로 적취(積聚)하여 역시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메아리가 상속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인가?
[메아리는 본래의 소리와] 시간을 달리하여 들리기 때문이다.
어찌 [그대(중현)의 종의에서도] ‘모든 소리는 상속 전전하다가 귀에 들어와 들리게 된다’는 사실을 결정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소리가 전전상속하다 연(緣:예컨대 저편 골짜기)을 만나 메아리를 낳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대의 책망은 옳지 않으니, 나는 [그 같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나는 소리가 전전상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귀에 들어온 것만을 듣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유정의 대종은 소리를 낳는 인연처에서 전전(展轉)하다 서로 부딪칠 때 모두 다 소리를 낳는 것으로,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소리를 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본체의 처소[本質處:예컨대 목구멍]에서 생겨난 소리를 먼저 취하고, 그 후에 비로소 다른 처소(예컨대 저편의 골짜기)에서 생겨난 메아리를 듣게 되니, [이같이 말할 때] 외도가 [말한 것과] 같은 ‘[오로지] 근과 직접 접촉한[至根] 소리만을 듣는다’는 허물은 없는 것이다.40)
만약 오로지 이근을 핍박하여(다시 말해 이근과 접촉하여) 생겨난 소리만을 능히 취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다른 곳에서 [생겨난] 소리와 메아리는 멀어서 들을 수 없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마땅히 멀고 가까운 소리의 차별도 알지 못해야 하는 것이다.
②-3 유여사의 중유비판에 대한 재비판과 중유 논증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말하기를]
“예컨대 무색계에서 몰하면 중간에 연속됨이 없이 욕계ㆍ색계의 색이 생겨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역시 마땅히 사유(死有)와 생유(生有)의 두 가지 유도 중간에 연속됨이 없다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41)
이러한 책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유색계에 태어날 때에도 [색법의] 연속됨이 있기 때문이다.
즉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욕ㆍ색계에 태어날 때, 순후수업(順後受業)에 따라 바로 이러한 처소의 대종이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이숙색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유색계에서의] 색이 생겨날 때 연속됨이 없는 것은 아니다.42)
혹은 모든 상속은 끊어짐[間斷]이 없기 때문이다. 즉 [무색계의 이숙이 다할 때] 4무색온은 무간(無間)ㆍ무단(無斷)으로(다시 말해 시간적인 단절 없이 즉각적으로) 연이 되어 욕ㆍ색계 중의 색을 인발(引發)하기 때문에 [그러한 유색계에서의 색이 생겨날 때 연속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여사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치 자벌레가 먼저 앞발을 딛고 나서 그 후에 뒷발을 옮기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사유와 생유의 처소는 비록 떨어져 있을지라도 먼저 [생유를] 취하고 그 후에 [사유를] 버림으로써 다른 처소에 이를 수 있으니, 중유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와 같다고 한다면 [사유와 생유는] 두 유정이나 두 가지의 취(趣)가 아니어야 하며,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작용[俱行]한다는 과실을 범하게 된다.43)
또한 자벌레의 몸은 중간이 단절되어 있지 않지만 사유와 생유는 그 중간이 단절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비유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유여사는 다시 말하기를
“사유와 생유의 두 유(有)는 비록 떨어져 있을지라도 이를 수 있으니, 마치 의(意)의 세력이 통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옳지 않으니,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와는 다른 그 밖의 종류로서 여기서 몰하여 저기에 생겨나는 것이라면 중간이 단절되어 있으니 마땅히 신통의 지혜[通慧]를 성취하였다고 해야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바로 행(行:즉 업)의 차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로 그렇다고 할지라도 [행의 차별은] 미세하기 때문에 알기 어려우니, 이를테면 일 찰나에 대해서는 마땅히 힐난해서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별도의 이치가 있어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지금 바로 보건대 찰나에 무간(無間)으로 생겨나는 것은 결정코 방소(方所:처소)도 무간이라야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유색계에 태어나 색이 처음으로 일어날 때, 옛날의 색(무색계에 태어나기 전의 욕계ㆍ색계의 색)과 지금의 색은 방소(처소)상으로는 무간(無間)이지만(다시 말해 간격 없이 인접해 있지만) 찰나상으로는 유간(有間)일지라도 속생(續生)할 수 있듯이,44)
하계(욕계ㆍ색계)에서의 사유와 생유의 색도 역시 마땅히 찰나 상으로는 무간이지만 처소상으로는 유간일지라도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가 않으니, 종의를 바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옛날에 욕계ㆍ색계로부터 몰하여 무색계에 태어날 때 색신이 멸하였던 처소가 바로 지금 그곳(무색계)으로부터 몰하여 욕ㆍ색계에 태어나는 곳으로서, 앞서 색신이 멸하였던 곳과 무간의 처소에서 지금의 색을 인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종의로 삼는 바가 아니다.45)
그렇기 때문에 이 경우(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유색계에 태어나는 경우) 찰나와 처소가 다 같이 인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비유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한 만약 찰나상으로 인접[隣近]하여 생겨나는 것이라면 처소의 경우도 결정코 그러해야 할 것이니, [처소의 경우만 별도로] 유예(猶豫)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중유신(身)은 청정한 천안(天眼)에 의해 지금 바로 획득될 수 있는 것으로, 그래서 [계경에서도]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중유신은 지극히 청정한 천안에 의해 능히 보이는 것이다.”
또한 저 존자 아노율타(阿奴律陀,Anuruddha: 불제자로서 천안제일)도 역시 말하기를
“구수(具壽)여, 내가 부처의 변화를 관찰해 보건대 그 수량이 지극히 많으니, 온갖 중유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유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③ 중유의 존재증명: 경전상의 근거[經證]
또한 성교(聖敎)에서 중유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유(有)에는 일곱 종류가 있으니, 5취의 유와 업유와 중유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46)
또한 경에서 건달박(健達縛)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 말하기를
“모태에 들어가게 된 것은 요컨대 세 가지의 사실이 함께 현전하였기 때문이니,
첫 번째로는 어머니의 몸의 시기가 적당해진 것이며,
두 번째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交愛]하여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건달박이 바로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47)
중유신을 배제하고서 그 어떤 별도의 실체[物]가 존재하기에 ‘건달박이 바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였을 것인가?
또한 경에서 다섯 종류의 불환(不還)이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의 불환이 있으니,
첫 번째는 중반(中般)이며, 두 번째는 생반(生般)이며, 세 번째는 무행반(無行般)이며, 네 번째는 유행반(有行般)이며, 다섯 번째는 상류반(上流般)이다”라고 하였는데,48)
만약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일컬어 ‘중반’이라고 할 것인가?
만약 “[중유가 아니라] 욕ㆍ색의 두 세계 중간에서 반열반을 획득하는 것을 일컬어 ‘중반’이라 하였다”고 한다면,
그러한 두 세계에 태어나지 않을 경우 중간에 존재하는 일 또한 없을 것인데 어찌 유정으로서 [욕계와 색계] 중간에서 반열반으로 나아가는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거기(욕계와 색계 중간)에 존재하는 하늘을 ‘중(中)’이라고 이름하며, [그곳에 머물면서 반열반하기 때문에 ‘중반’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면,]49)
이치는 필시 그렇지 않으니, 그 같은 성언(聖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다른 부파에서 [전하는] 어떠한 경에서도 ‘중천(中天)이 존재한다’고 설한 일은 없으니,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주장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또한 계경에서 “일곱 가지 선사취(善士趣)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50)
그것은 즉 앞의 다섯 가지 불환에서 중반을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중반으로 나아가는] 처소와 시간상에 멀거나 가깝거나 중간이거나 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51)
비유하자면 장작개비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잠시 일어났다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바로 가까이서 소멸하는 것처럼 첫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쇠붙이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불꽃이 일어나 중간쯤 지속하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두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쇠붙이의 커다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멀리까지 이르도록 떨어지지 않고 있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세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실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들이 주장하듯이 별도의 중천(中天)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여기에 처소와 시간상의 세 가지 품류의 차별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7선사취)에 따른 주장과 논파에 대해서는 『순정리론』 제24권에서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중유가 실유라는 사실은 지극히 잘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유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사견(邪見)에 포섭된다.52)
이미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널리 분별해 보았다.
④ 중유의 형상과 4유(有)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중유는 당래 어떠한 취(趣)로 가고, 생기한 중유의 형상(形狀)은 어떠한가?
나아가게 될 취[所趣]의 생유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당래의 본유(本有)의 형상과 동일한데
본유란 말하자면 죽는 찰나 이전에
태어나는 찰나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견인업(牽引業)이며, 두 번째는 원만업(圓滿業)이다.53)
중유와 생유의 두 가지 유(有)는 견인업은 동일하지만 원만업이 다르다. 즉 견인업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러한 중유의 형태는 당래 본유의 형상과 서로 유사하니, 마치 도장과 찍혀진 문상(文像)이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욕계에서의 중유는 크기[量]가 비록 5ㆍ6세 된 어린아이와 같을지라도 근(根)은 명리(明利)하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욕계에서의 중유는 모두 본유가 성년일 때의 크기와 같다”고 하였으며,
다른 어떤 이는 “
보살의 중유는 그럴 수 있지만, 그 밖의 다른 유정의 중유도 역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즉 보살의 중유는 성년일 때처럼 형상과 크기가 두루 원만하며, 온갖 상호(相好:32상과 80종호)를 갖추었기 때문에 중유로 머물면서 장차 모태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백 구지(俱胝,koṭi: 백 억의 뜻)의 4대주(大洲) 등을 비추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중유는 모두 생문(生門:어머니의 陰門)을 통해 들어가는 것으로, 어머니의 배(즉 우측 옆구리)를 가르고 태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54)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중유는 실로 원하는 바대로 태에 들어가는 것이지 생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색계에서의 중유의 크기는 두루 원만하고 그 신체가 미묘하여 마치 본유의 그것과 같다.
또한 그곳에서의 중유는 의복과 함께 태어나는데, 참(慚)ㆍ괴(愧) 즉 내외에 대한 부끄러움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계에서의 중유는 대개 의복과 함께 태어나는 일이 없으니, 참ㆍ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보살과 선백(鮮白) 비구니만은 예외인데, [그것은 그들의] 본원력(本願力)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오로지 이 비구니만을 예외로 한다”고 하였다.
즉 그녀는 승가에 가사(袈裟)를 보시하고 수승한 원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세세생생 자연적으로 의복을 구비하여 항상 몸에서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때에 따라 다른 옷으로 바뀌기도 하였다.55) 뿐
만 아니라 최후 반열반하였을 때에도 바로 이러한 의복으로써 시신을 감아서 화장하였으며, 그 유골을 수습하여 솔도파(窣堵波,stūpa:탑)를 세울 때에도 역시 의복의 형태로 주위를 동여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살이 일으킨 일체의 선법은 모두 오로지 무상(無上)의 보리(菩提)로 회향되기에 우리의 종의에서는 두 사람 모두가 [의복을] 갖추었다는 설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중유와] 유사하다고 한 본유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사유(死有) 이전에, 생유(生有) 이후에 존재하는 온(蘊)이다.
즉 유(有)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설할 것 같으면, 그것(有)은 비록 모든 유루법과 통하는 것일지라도 유정의 [전후] 상태 중에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첫 번째는 중유(中有)로서, 그 뜻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두 번째는 생유(生有)로서, 이를테면 온갖 취(趣)에서 결생(結生)하는 찰나를 말한다.
세 번째는 본유(本有)로서, 태어나는 찰나를 제외하고서 그 이후부터 죽기 이전의 단계이다.
네 번째는 사유(死有)로서, 이를테면 [현세의] 최후찰나를 말한다.
만약 어떤 존재[有]가 아직 색에 대한 이탐(離貪)을 획득하지 않았을 경우, 이러한 존재는 결정코 [사유와] 무간에 중유로 일어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생의 단계를 네 가지로 분별하게 된 것이라면, 어찌 온갖 존재 가운데 중유를 최초의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즉 본유라는 명칭은 마땅히 중유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56)
중유에 근거한 것이 아니니, 당래 무간에 생겨날 생유 등의 세 가지는 그것(중유)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존재의] 상태[位]가 당래 무간에 중유 등 온갖 [존재의] 상태를 낳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본유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유라고 하는 명칭은 그 밖의 생의 온갖 상태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으로, 하나[의 존재]가 [다른] 세 가지 [존재의] 상태를 낳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본유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유’가 무간에 결정코 그러한 ‘유’를 낳는다고 할 경우, 이러한 ‘유’를 그것에 대한 본유라는 말로 설정할 수 있다.
또한 본유라고 하는 명칭은 바로 나아가게 될 취[所趣]에 근거한 말로서, 다른 세 가지 ‘유’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본유라는] 명칭을 획득하지 못하는 것이다.57)
[중유의] 형태와 크기[形量]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⑤ 중유의 여러 특징―9문(門) 분별
이제 그 밖의 다른 뜻에 대해서도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58)
게송으로 말하겠다.
[중유는] 동류(同類)와 청정한 천안에게 보이며
업의 신통[業通]이 있어 빠르며, 근을 갖추고 있으며
무대(無對)이며, [정해진 ‘취’를] 바꿀 수가 없으며
향을 먹으며, 오래 머물지 않는다.
또한 전도된 마음[倒心]으로 애욕의 경계로 나아가지만
습생과 화생의 경우 향(香)과 처소에 염착(染著)하며
천(天)의 중유는 머리를 위로하여 [올라가고], 세 가지는 횡으로 가며
지옥은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기로 떨어진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중유신(中有身)은 어떠한 눈[眼]의 경계대상이 되는 것인가?
동류(同類) 즉 동일한 종류의 눈과 청정한 천안(天眼)에 의해 보인다. 이를테면 중유신은 오로지 동일한 종류의 눈과 그 밖의 청정한 천안을 닦아 획득한 이에게만 보일 뿐으로, 동일한 종류가 아니거나 청정하지 못한 천안으로는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다.
생득(生得)의 천안으로도 능히 볼 수 없는데 하물며 그 밖의 다른 눈으로 어찌 능히 볼 수 있을 것인가?
[계경에서] “지극히 청정한 천안을 가진 자라야 비로소 능히 [중유신을] 볼 수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지옥ㆍ방생ㆍ아귀ㆍ인간ㆍ천의 중유는 각기 순서대로 그 뒤의 것을 제외한 자신과 그 앞의 중유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59)
중유의 행(行)을 능히 막을 수 있는 이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위로는 모든 부처에 이르기까지 능히 그 행을 막을 수 없으니, 온갖 신통 가운데 업의 신통[業通]이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즉 중유는 가장 신속한 업의 신통을 성취하였기 때문으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중유의 업력을 가장 강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어떠한 유정도, 어떠한 가행(加行)으로도 능히 차단하고 억지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신통[通]이란 허공을 마음대로 통과하여 가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신통은 업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에 ‘업의 신통’ 즉 업통(業通)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통은 그 세력과 작용이 신속하기 때문에 ‘빠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즉 중유는 바로 이러한 가장 빠른 업의 신통을 갖추었으니, 온갖 신통으로서 아무리 빨리 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계경에서는]
‘[중유의] 업력이 가장 강성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중유는 [당래 그것이 처할] 지(地)에 따른 온갖 근(根)을 모두 갖추고 있다. 비록 [앞서] ‘중유는 본유의 형상과 같다(유사하다)’고 말하였을지라도 최초의 이숙으로서 가장 뛰어나고 미묘하기 때문에, 또한 존재[有]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갖추지 않은 근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일찍이 ‘붉게 타오르는 쇳덩어리를 쪼개어보니 그 가운데 벌레가 머물고 있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로 볼 때 중유에도 무대(無對)의 뜻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대’란 대애(對礙:연장을 지니는 공간적 점유성)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금강석 따위도 능히 이를 차단 장애할 수 없기 때문에 ‘무대’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것이 [당래 나아가게 될] 계(界)나 취(趣)의 처소는 어떠한 경우라도 바꿀 수 없다. 이를테면 색계 중유가 몰하여 욕계 중의 유정으로 태어나는 일은 결정코 있을 수 없으며, 이와 반대되는 일도 역시 있을 수 없으니, 이것과 생유는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으로, ‘취’의 처소가 바뀌지 않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60)
이러한 [욕계의] 중유신은 단식(段食:혹은 搏食, 분할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에 의해 자조(資助)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바야흐로 욕계의 중유는 향을 먹는데, 복이 많고 복이 적음에 따라 향이 좋기도 하고 향이 나쁘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건달박(健達縛,gandharva)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니,
온갖 자계(字界:즉 어근)에는 그 뜻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것(건달박)의 자계인 알박(頞縛, arva)이 비록 바로 ‘간다[行]’는 뜻일지라도 여기에는 역시 또한 ‘먹는다[食]’는 뜻도 있으니, [중유는] 바로 향을 먹기 때문에 ‘건달박’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알’이] 단음(短音)인 것은 설건도(設建途,śakandhu)나 갈건도(羯建途,karkandhu)의 경우처럼 생략되었기 때문으로, 어떠한 과실도 없다.61)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중유는 향에 의지하여 몸을 지탱하며, 향을 찾아가기 때문에 건달박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중유는 얼마동안 머무르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중유신은 결정코 오래 머물지 않는다.
생(生)의 연(緣)과 아직 화합하지 않은 것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대덕(大德)은 “보통은 오래 머물지 않지만 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은 것이라면 오래 머물 수 있으니, 이것의 명근은 별도의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인가?62)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다만 짧은 시간[少時] 머물 뿐이니, 중유 중에서는 항상 생(生)을 희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결정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로 옮겨갈 수 없는 경우라면,63) 비록 그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중유의] 업은 [그들로 하여금] 신속하게 결합하게 한다.
만약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한쪽으로만 옮겨갈 수 있는 경우라면, 비록 지극히 청결한 정절로써 애욕을 꾸짖고 싫어하는 자라 할지라도 다른 경계(즉 異性)에 대한 애염(愛染)을 일으켜 현행하게 하니, 온갖 애염를 일으키는 때를 결정지어 [애염이 일어날] 때가 아니더라도 역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혹은 [만약 결정된 유정의 종류 중에 태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서로 유사한 다른 종류 중에 기생(寄生)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나귀 등의 몸은 말 등과 유사한 것이다.”64)
그리고 기생하는 것은 동분만 다를 뿐이기 때문에 중유와 생유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된다는 사실을 어긴 것은 아니니, 생연(生緣)은 비록 다를지라도 인기된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설혹 서로 유사한 종류에게로 옮겨가 생을 받는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들도 최소한 동류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또한 계(界)나 취(趣)를 완전히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면,65) 비록 종류가 약간 다르다고 할지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즉 [어떤] ‘계’나 ‘취’의 처소로 [나아가는] 업은 결정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외적인 생연이 바뀌더라도 역시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
혹은 업의 종류와 차별은 무변(無邊)이기에 오로지 불세존만이 능히 궁구하여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66)
중유를 바로 결생(結生)시키는 것은 어떠한 마음인가?
염오한 마음으로 [결생하니], 비유하자면 생유의 그것과 같다.
장차 생유로 이어지게 되는 방편은 어떠한가?
중유 중에 머물면서 태어날 곳[生處]에 이르기 위해 마음이 전도(顚倒)됨에 따라 원하는 경계[欲境]로 치닫게 된다. 즉 그것(중유)은 비록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숙세의 업력에 의해 일어난 안근으로써 능히 태어날 곳의 부모가 교회(交會)하는 것을 보고 전도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당래 남성이 되는 중유라면 어머니에 대해 애욕을 일으키고, 아버지에 대해 진에(瞋恚)를 일으키며, 여성이 되는 중유라면 이와 반대된다.
바로 이와 같은 인연에 따라 남성이나 여성으로 생겨나서는 순서대로 어머니에 대해, 아버지에 대해 편애하여 무리를 짓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시설족론』에서도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건달박은 두 가지 마음 가운데 하나를 따라 현행시키니, 이를테면 애욕이든지 혹은 진에이다.”
나아가 그것은 다시 이러한 두 종류의 전도된 마음을 일으킴에 따라 바로 자기의 몸이 사랑하는 이와 결합하였다고 여기며, 내보내는 곳[所遣:즉 배설기관]의 부정(不淨)이 배설되어 태에 이를 때 그것이 바로 자기의 존재라고 여기고 기뻐한다.67)
즉 응당 기쁨을 낳게 되는 상태를 일컬어 ‘모태에 들어갔다’고 말하는데, 최후의 순간에 내보내진 두세 방울의 정혈(精血:아버지의 정액과 어머니의 胎血)을 취하여 갈랄람(羯剌藍)을 성취하게 되니, 정혈과 서로 의지하여 무간으로 머문다.
바로 [이때] 중유의 온이 멸하고 생유의 온이 생겨나는 것으로, 생유의 색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중유에 의해서이다. 즉 부모의 정혈은 다만 [생유가] 생겨나는데 연(緣)이 되는 것일 뿐으로, 이는 마치 종자가 싹을 낳기 위해 땅이나 거름 등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즉 유정의 색은 무정물(즉 부모의 정혈)을 원인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입태된 중유가] 남성일 경우 태내에 처하자마자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 의지하여 등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있으며, 만약 여성일 경우 태내에 처하자마자 어머니의 왼쪽 옆구리에 의지하여 배를 향해 머물러 있을 것이니, 여성과 남성은 좌우의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며, 숙세에 스스로 분별한 힘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욕계의 중유로서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경우는 없는데, 중유신(身)은 근을 결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태에 들어온 후 혹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이상 욕계의 태생과 난생의 결생(結生)에 대해 논설하였다.
습생과 화생은 향기[香]와 처소[處]에 대해 염착(染著)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다.
만약 습생의 중유라면 향기에 대해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니, 이를테면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어날 곳의 향기를 냄새 맡고서 문득 애염(愛染)을 낳아 그곳으로 가 생을 받는데, 지은 업에 따라 그 향기가 청정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다.
만약 화생의 경우라면 다만 [태어날] 처소에 대해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니, 이를테면 당래에 태어나게 될 처소를 멀리서 관찰하여 알고서 문득 애염을 낳아 그곳으로 가 생을 받는데, 지은 업에 따라 그 처소가 청정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다.
그리고 지옥에 태어나는 중유 역시 업력에 의해 혹 어떤 경우 자신의 몸이 차가운 비바람과 조우하기도 하고, 혹은 뜨거운 바람이나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과 조우하기도 한다.
그러다 추위에 침탈되고 뜨거움에 핍박되어 그 혹독함에 참기 어려우면 따뜻하거나 시원한 것과 만나 그러한 재앙을 제거하기를 희구한다. [그래서] 열(熱) 지옥의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이나 한(寒) 지옥의 회오리치는 차가운 바람을 보면 문득 애염을 낳아 그곳으로 치달아 몸을 던지는 것이다.68)
그러나 어떤 이들은 설하기를
“일찍이 그것(지옥)을 초래할 만한 업을 지을 때 자신과 함께 지었던 도반의 무리[伴類]들을 보고서 애착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낳아 그곳으로 치달아 나아가게 된다”고 하였다.69)
중유가 어떠한 취로 나아갈 때, 그것은 어떠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될 처소에 이르게 되는 것인가?
먼저 천(天)의 중유는 머리를 바로 하여 상승하니, 마치 사람이 몸을 바로 세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과 같다. 인간 등의 세 취(인간ㆍ아귀ㆍ방생)의 중유는 횡(橫)으로 나아가니,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아 다른 곳으로 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지옥의 중유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하여 거기로 떨어지니,
그래서 가타(伽他)에서도 이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질 때에는
발을 위로하고 머리를 밑으로 돌리니
온갖 선인과 적정을 즐기는 이(즉 獨覺)와
고행을 닦는 이(즉 보살)를 헐뜯고 비방하였기 때문이라네.
그리고 무색계 중에서는 가고 오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같은 업이 없기 때문에 필시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만약 목숨을 마치는 처소에서 바로 생을 받는 자라고 할지라도 [이전에 지은 중유를 초래할 만한] 업이 존재하기 때문에 역시 중유는 존재한다.70)
그런데 이러한 중유에는 결정적인 특성[相]이 있다.
이를테면 아직 욕ㆍ색계의 탐을 떠나지 않은 생유는 어떠한 경우라도 중유로부터,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다.
또한 역시 중유와 그것이 나아가게 될 취[所趣]의 생유는 어떠한 경우라도 동일한 업에 의해 견인된 결과이다.
또한 역시 중유는 어떠한 경우라도 능히 무심정(無心定)에 들어 신증(身證)이나 구분해탈(俱分解脫)이 될 수 없으며,71) 아울러 세속의 동분(同分)이 아닌 마음도 일으킬 수도 없다.
또한 어떠한 경우라도 중유 중에 머물면서 근(根)을 바꾸는 일도 없고,
또한 역시 견소단의 번뇌를 능히 끊는 일도 없으며, 아울러 욕계 수소단의 수면을 끊는 일도 없다.
그 밖의 결택(決擇)해 보아야 할 점에 대해서는 『순정리론』 제24권에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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