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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원문보기 글쓴이: 도안
이 글을 인터넷 사이트에 싣도록 허락해주신 〈미주현대불교〉에 감사드립니다.
채식, 그리고 지속가능한 성장
넷째 마당. 먹는 문제의 윤리적 측면
들어가며
지금부터 약 20년 전 어느 날, 내가 출판사에서 일할 때였다. 사장인 친구가 자신이 기르던 개 한 마리를 내게 주었다. 당시 나는 보신탕 한 그릇만 먹으면 셋끼 중 두끼가 해결될 정도로 개고기가 몸에 잘 받았다. 주저없이 근처 과천으로 가는 언덕길에 있던, 개 잡는 전문 가게로 가서 개를 죽여 집으로 가져와 먹었다..... 그로부터 10년쯤 흐른 뒤 나는 채식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몇 년 더 지나 지금부터 6년 전 어느 날, 과거 내가 남의 손을 빌어 죽여 먹어치웠던 개가 당했을 고통이 아주 사무치게 느껴졌다. 무지(無知)로 인한 나의 어리석음과 식탐(食貪)이 깊이 반성되었다. 1주일 동안 하루 몇 시간씩 염불과 반야심경, 보리방편문을 외며 나름 참회하고 천도제를 올리고서야 비로서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가능하면 채식하고 있는 요즘에도 여전히 그 개한테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개를 좀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 편으로, 개를 키워본 적도, 개와 교감을 나눠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음식으로서만 상대해보았던 것 같다. 내 눈앞의 개란 존재에 대해 항상 깨어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소치였다.
과거 필자에겐 완전히 먹이감밖에 안되어 비명횡사할 수밖에 없었던 개이지만, 개와 관련된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는 보비(Bobby)라는 작은 테리어 종 개를 기념하는 조각상이 하나 서 있다. 보비는 원래 떠돌이 개였다. 쓰레기를 뒤지며 살던 보비에게 조크라는 노인이 어느 날 마을 식당에서 저녁밥을 사주었다. 그 뒤 조크 노인이 죽어 시신을 묘지로 운구하는데 보비가 그 뒤를 따랐다. 이후 14년 동안 보비는 자신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 노인을 기려 거의 묘지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개가 죽자 그토록 헌신적으로 경의를 표했던 노인 곁에 묻어주고 조각상을 세워주었던 것이다.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께서, 방한한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에게 언급했던, 기어가 출연한 영화 「히치이야기」의 주인공 ‘히치’도 보비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일본 개다).
감동을 주는 동물 리스트에 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비 못지않은 역사상 가장 이기심 없는 동물에 페롤루스 잭이라는 돌고래가 꼽힌다. 잭이 보스턴발 스쿠너 범선이 프렌치 수로에 막 들어섰을 때 선원들은 잭을 죽이려 했다. 아, 그런데, 선장 부인의 만류로 죽음을 면한 돌고래가 앞장서 배를 안내해 위험한 수로를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 게 아닌가! 잭의 안내가 너무나 정확하고 신뢰할만 했으므로, 그후부터 지나가던 배들은 잭의 모습이 안보이면 기다렸다 그의 안내를 받고서야 출발하는 정도가 되었다. 이외에도 난파한 배에서 사람을 구해준 바다거북 이야기 등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사실로 확인된, 놀라운 동물 이야기가 많다.
2. 동물과 인간의 가치비교
앞에서 예로 든 동물 이야기는 수많은 동물 중에 극히 예외적이라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이는 어느 정도 일반화될 수 있다고 증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어쨌든 많은 이들에게 음식의 재료로 쓰이는 동물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 위해서는, 동물을 적어도 인간에 견주어 다양한 측면에서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인간과 비교했을 때 동물이 어느 정도로 가치가 있는지를 도덕적 관점에서 제대로 판단하려면, 근본적으로 동물이 어떤 종류의 생물인지부터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이와 관련해 동물의 마음, 즉 동물의 의식이 인간의 그것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가 중요하겠다. 여러 반론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에 따르면 사실 포유류들의 뇌를 자세히 비교하다 보면, 동물의 의식을 오히려 인정하게 된다고 한다. 서로 간에 특별히 다른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아직 의식과 관련한 신경의 원리를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서, 신체 기관과 의식간의 관계 규명은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입증된 것은 아니어도 인간의 뇌와 포유류 뇌 사이에 보이는 상당한 유사성은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앞서 든 일화들은 적어도 최고도로 발휘된 동물의 의식적 행위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의식이라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유연성으로부터 나온 무엇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우리 인간뿐 아니라 여러 종에서도 자연스레 나타난다고 봐야 한다. 생물의 세계에서 어떤 핵심적 특성이 오직 한 종에만 존재하고 다른 종에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더 정확히 말해, 똑같은 특징들이 동물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다. 그 특징이 비행 능력이든, 호흡 능력이든, 시력이든, 면역 체계이든, 혹은 유성 생식이든 관계없이, 자연은 똑같은 해결법을 되풀이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진드기의 뇌와 인간의 뇌 사이에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건 틀림없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인간의 의식과 신경 구조 간의 상관성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드기에게 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으로 인간도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느끼는 고통 및 공포와 관련해 동물은 어떨지를 살펴보자. 필자가 몇 달 전에 재미있게 본 영화 중에 「템플 그랜딘 (Temple Grandin)」이란 영화가 있다. 비학대적인 가축시설의 설계자이자 컬럼비아 주립대학교 축산학과 준교수로서 동물보호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실존인물 템플 그랜딘의 감동적 실화를 담은 영화다. 자폐증으로 인해 동물과 깊이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 같다는 템플 그랜딘은 말한다. “어떤 동물이건 고통의 징후라 믿을 만한 행동 2,3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고기에게 신피질이 없다는 사실이 물고기가 고통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 고양이는 캐리어 안에 들어가야 한다거나 차를 타고 수의사한테 가야 할 때면 미친 듯이 날뛴답니다. 그러다 벌벌 떨거나 용변을 보거나 구석에 웅크리는 행동을 해요.”
이어 본능과 사고력의 측면은 어떨까? 흔히들 동물은 단지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는 동물을 폄하하는 관점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인간의 자질을 동물에게 무비판적으로 투사하다보니 내린 판단이 아닐지 경계해야 한다. 역시 반론도 많지만 엄밀한 과학자들에 따르면, 동물이 사고를 한다는 가정에 원론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심리학자 볼프강 쾰러(Wolfgang Köhler)는 침팬지에게 ‘통찰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높은 곳에 바나나를 달아놓자, 침팬지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지 않고 금세 상자를 쌓아올리더니 막대를 들고 상자 위로 올라가 바나나를 후려쳤던 것이다. 까마귀 또한 생소한 문제가 주어졌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음이 확인된다. 하지만 동물이 사고를 하고 문제의 답을 알아내고 발견을 한다고 해도, 동물이 자기 정신생활에 가장 큰 초점을 두는 것은 여전히 인간과 크게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아직도 인간이 생각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편임을 늘 염두에 두고, 동물에게 인간적 관점을 그대로 적용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음으로 동물의 자아인식 능력을 살펴보자. 역시 인간의 잣대를 들이대는 소위 ‘거울실험’ (거울 속의 자신을 인지하며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을 파악하는 실험)이란 게 동물의 자아인식의 증거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테면, 개로서는 자신의 소변 냄새를 인지하는 것이 자아 인식의 중요한 순간일 테니까 말이다. 한편,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긴 해도, 동물에게 타자의 마음을 인식하는 능력도 있다는 증거가 제시된다. 마크 롤랜즈(Mark Rowlands)는 자신의 저서 『철학자와 늑대(The Philosopher and the Wolf)』에서 한 수컷이 자신의 발기된 생식기를 옆에 있는 암컷에게 내보이면서 동시에 한쪽 앞발을 들어 자신의 다른 쪽 옆에 있는 경쟁 관계의 수컷 눈에 보이지 않게 한다고 말한다. 이 수컷은 자기 시각에서 동료들 각각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 상태일 수 있다.
동물들이 드러내는 도덕성을 살펴보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여러 해 동안 실험실에서 침팬지 집단을 대상으로 그들의 상호관계를 연구했다. 드 발은 흰목꼬리감기 원숭이가 공정성(公正性)의 개념을 갖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한 흰목꼬리감기 원숭이가, 동료가 실험자에게 토큰을 주고 먹이를 얻는 것을 관찰하더니, 자신도 토큰을 주고 먹이를 받았다. 그리고 동료가 자기와 동일한 토큰으로 더 좋은 먹이를 받자 항의를 했던 것이다. 사실 도덕적 감정의 원형은 다양한 종에서 나타난다. 한 실험에서 쥐들은 지렛대를 누르면 먹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자기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동료 쥐에게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장면이 눈에 띄자 지렛대를 누르는 행동을 멈췄다. 그러나 곧 배고픔을 못 참고 다시 지렛대를 눌렀다. 그런데 붉은털 원숭이는 달랐다. 한 연구에서 이 원숭이는 사슬을 잡아당겨야 먹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자신이 사슬을 당기면 동료에게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끔찍한 장면을 보고는 5일 동안 사슬을 당기지 않고 참았다. 그 다음에는 12일을 더 참았다. 오히려 이런 실험을 기획해 실행하는 인간이야말로 침팬지보다 윤리적으로 더욱 문제가 많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3. 동물 존중하기
역사상 흑인과 유태인을 상대로 한 인종차별이 있었고, 여성차별이 있었다. 이제 동물에 대한 차별을 염두에 두고 종차별(種差別)이 운위된다. 동물에게 의식이 부족하고 이성이 부족해서 자기 죽음을 인간에게 허락했으며, 신이 동물을 인간의 음식으로 주었다는 등의 관념은 종차별 이데올로기라 할만하다.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의 저자로 오늘날 동물보호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동물보호의 선구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생명의 가치란 개별적으로 달리 정해지는 것이지, 어떤 종에 속했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생명의 가치를 어느 정도 비교는 할 수 있겠지만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다른 동물보다 높은 순위에 두는 편향성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해도, 인간과 가까운 동물을 더 높이 평가하는 편향성은 우리가 피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그것은 대개 유전적으로나 진화적 측면에서나, 인간과 가까운 동물일수록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편향성 때문에 생긴다(개는 인간에게 제법 대접을 받아 특히 서구에서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받지만, 개 못지 않게 똑똑함에도 돼지는 폄하되고 온갖 식재료로 활용된다). 20년 동안의 동물 연구로 이에 대한 반론은 더욱 늘어가고 있다. 이를 테면, 동물학계는 새에 대해 점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으니, 새들이 놀라운 지적 능력과 심지어 언어능력까지 지녔다고 한다. 또한, 코끼리는 사회관계를 맺고, 기억력을 지녔으며, 생사(生死)개념을 가졌다고 한다.
인간과 동물뿐 아니라 동물과 동물 사이에도 차이가 있으며, 이런 점은 동물에 대한 배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각각의 생명들 간의 차이가 곧 자신이 배려받을 수 있는 정도의 차이를 정당화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상당히 냉혹하고 엘리트주의적으로 들릴 것이다. 사실 모든 동물 종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비교 자체를 꺼리는 편이다.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동물들에 대한 개략적인 평가의 척도를 인정하면, (동물을 포함해 난파선에 5명이 탔는데 1명이 내리지 않으면 침몰하는 상황처럼) 생명이 위험할 때나,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할 때, 그 척도가 다른 종의 생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조금씩 바꿔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현실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이 가능해질 것이다. 동물학계의 최고 권위자들이 21세기 동물윤리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칭송했던 『동물에 대한 예의(Animalkind: What we owe to animals)』의 저자 진 카제즈(Jean Kasez)의 목소리는 이런 점에서 큰 울림을 갖는다.
“우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동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많이 발전해왔다.
이제 우리는 유대인이 인간과 다른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과 영화를 보고 박물관 전시물을 관람하며 눈물도 흘린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동물은 동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에는 무관심, 멸시, 혐오, 심지어는 증오까지 담겨있다.
그러나 동물들조차 ‘동물에 불과할 뿐’이지 않다.
우리는 동물을 존중할 필요가 있고, 그 존중을 통해 연민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동물을 존중하고 연민을 보내는 것과 지금껏 우리가 동물을 이용해온 문화를 답습하는
것은 별개다.
우리 대부분은 동물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예전과 똑같이 동물을 이용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존중과 연민을 갖는다면, 적어도 동물의 이용을 당연시하지는 않게 될 것
이다.
동굴인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동물을 사냥했지만, 누군가가 동굴인의 잘못을 추궁한다면 나
는 동굴인을 옹호할 것이다.
그러나, 원더버드 새를 무참히 사냥한 사람들(이들은 원더버드의 깃털을 장식품 재료로 팔
아 돈을 번다)은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4. 『자타카』(Jātaka; 본생담 [本生譚]: 붓다의 전생이야기)의 동물 이야기
『자타카』의 동물 이야기를 통해, 붓다는 관대함과 자비심을 드러내는 동물의 비범한 행위를 비롯해 동물에 의해 덕행이 발휘됨을 이야기한다. 또한 붓다는 고통받는 동물의 예를 활용해, 동물을 희생제의에 사용하는 관행을 금지하는 설교를 한다. 붓다는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한 동물도 높이 평가한다.
불교의 동물 이야기는 삶이 하나의 형태에서 다음 형태로 지속된다는 입장을 예증하고 강조한다. 불교의 윤회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를 지지한다. 첫째로, 윤회설에 따라 현재의 삶은 미래의 어떤 형태로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로, 삶이 수많은 윤회를 통해 지속되기 때문에, 존재가 가족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가정해 볼 수 있다. 대승불교 문헌인 『능엄경』에서는 말한다. “윤회의 긴 과정에서 어머니나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딸, 혹은 다른 친척들의 모습을 띠지 않았던 존재는 없다. 생을 취하는 과정과 관련해, 한 존재는 모든 야생동물과 가축들, 새들, 그리고 태생들 모두와 친척이다.” 이와같이 반복되는 생(生)은 연기하는 생명의 망을 낳으며,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에 따르면 그런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동물이 우주적으로 찬미되고 낭만적으로 그려지고 이상화되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약점도 종종 나타난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에게 잔인한 것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더욱이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친절하지만은 않다. 거북이의 살해가 다루어지고, 반복되는 주제로 인간이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행위가 다루어진다.
『자타카』에서 동물들은 동물이라기보다 잠정적인 인간이나,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동물로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붓다가 동물과 아주 친숙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붓다는 보살로 수행하면서 여러 생 동안 동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굶주린 사자에게 자기 몸을 먹이감으로 주었으나 감히 먹지 않자, 붓다의 전신인 보살이 할 수 없이 자신의 몸에서 피를 내었더니 사자가 금수인지라 피냄새에 보살을 먹어치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붓다는 오늘날의 산업화된 사회보다는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가 더욱 유동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살았다. 사실 원숭이나 코끼리, 메추라기, 뻐꾸기 등 다양한 동물들에 대한 붓다의 묘사는 아주 상세하고 정확하다. 동물과 인간의 행동 양자에 대한 붓다의 통찰은 『자타카』를 매우 효과적인 교훈적 장치로 만들고 있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이 ‘하염없이’ 동물들을 바라보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동물들의 단순함과, 목적의식을 가진 그들의 타고난 감각과, 그들의 자기존엄을 이해한다는 의사표시를 한 셈이다. 불평 없이, 무심하게, 소유욕 없이, 동물들은 그들의 존재를 통해 우아하고 편안하게 움직인다. 『자타카』는 이러한 동물들의 가치에 대한 해석을 확고하게 해준다.
인간 의식은 동물들의 경험에 의해 구체화될 수 있다. 인간 경험의 깊이와 심오함은 동물들의 삶의 방식을 관찰하고 그들과 접촉함으로써 풍부해지고 개선될 수 있다. 동물을 도구시하고 물질시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의 견해와는 반대로, 동물은 인식과 의지, 감정,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있다. 붓다가 말한 것처럼, 동물도 인간처럼 현재 생에서의 삶과 미래의 경험 모두를 좌우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모두가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자타카』에 나오는 동식물을 빈도순으로 열거해본다. 원숭이, 코끼리, 자칼, 사자, 까마귀, 새, 사슴, 물고기, 앵무새, 뱀, 나무의 정령, 말, 거위, 호랑이, 거북, 멧돼지, 염소, 메추라기, 황소, 악어, 개, 소, 목도리뇌조, 공작, 쥐, 대머리수리, 암소, 게, 두루미, 뻐꾸기, 도마뱀, 돼지, 비둘기, 뱀, 딱따구리, 영양, 카멜레온, 병아리, 당나귀, 새매, 물수리, 올빼미, 토끼, 수탉, 독사, 물의 정령, 곰, 딱정벌레, 물소, 고양이, 오리, 독수리, 고라니, 파리, 여우, 개구리, 풀의 정령, 매, 사냥개, 이구아나, 어치, 몽구스, 모기, 생쥐, 수달, 표범, 코뿔소, 뾰족뒤지, 그리고 끝으로 늑대다.
5.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과 제인 구달(Jane Goodall)의 채식 이야기
(『잡식동물의 딜레마』, 『푸드 룰』, 『욕망하는 식물』, 『세컨 네이처』, 『잡식동물 분투기』, 『마이클 폴란의 행복한 밥상』 등) 한국에 번역 소개된 책만 해도 6종에 달하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폴란은, 음식에 대해 의학적 혹은 식품영양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그저 현실을 보여준다. 폴란이 직접 몸으로 부닥치는 체험들은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폴란의 글에는 철학, 생태학, 인류학 등 식(食)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관점들이 녹아있다. 한국식으로 말해 철저히 실사구시적인 마이클 폴란은 언젠가, 피터 싱어가 제기한 “동물이 느끼는 평생의 괴로움과 인간의 미식(美食) 취향”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리하여 폴란은 우리가 먹는 동물이 정말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는지 아닌지 알아보아야겠다는 마음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피터 싱어의 지적처럼 여전히 육식을 하는 한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룰 수 없음을 폴란은 깨달았다. 굳이 피터 싱어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동물에게 관심을 가지면서도 굳이 육식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경향이 있음을 마이클 폴란은 간파했다. 그리하여 폴란은 육식을 계속할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육식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폴란은 9월의 어느 일요일 날, 맛있는 돼지고기 안심 바비큐 요리를 먹고 난 뒤, 못마땅함을 느끼면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폴란은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생활이 길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세계적인 생태운동가인 제인 구달도 어린 시절에는 육식을 즐겨 닭고기, 스테이크, 돼지고기, 베이컨, 생선 등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그러다 구달은 1970년 초에 집약적인 동물 사육장에서 자행되는 온갖 끔찍한 일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을 읽으면서 깨달은 일이었다. 구달은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공장식 사육장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가 진상을 접한 순간, 그 끔찍함에 몸서리를 쳤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닭과 돼지가 처한 비참한 처지를 모두 읽고 싱어의 책을 덮은 채, 구달은 자신이 즐겨 먹던 맛있는 포크첩, 아침마다 프라이팬에 구워지면서 고소한 냄새로 군침이 돌게 만들던 베이컨을 생각해 보았다. 평생토록 즐겁게 먹어 온 로스트치킨, 치킨 캐서롤, 프라이드치킨, 치킨 수프...... 구달은 정신이 멍해졌다. 방금 읽은 책 내용이 눈앞에 그림처럼 떠올라 참을 수 없었다. 그 순간부터 식탁의 자기 접시에 고기가 담겨 나올 때마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떠올려야만 했다. 구달은 우선 고기를 끊었다. 1년 남짓 생선은 계속 먹었다.
필자로서도 저명한 두 분과 비슷하게 정신적, 윤리적 계기로 채식생활을 하려 애쓰게 되었다. 특히 청화 큰스님의 말씀이 결정적이었다. 생전의 청화 큰스님은 대중법회 자리나 보살계 수계식, 또는 개인이나 가족 면담시, 예의 능엄경 이야기도 인용하시고, 현대 영양학도 거론하시면서 말씀하셨다. “그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죽어가는 소, 돼지들의 마지막 단발마의 고통이 실려 있는 좋지 않은 에너지의 고기를 먹어 무어 영양이 가겠습니까? 현대 의학은 이런 고기를 먹는 게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 이미 밝혀내고 있잖습니까? 고기란 건 먹어놓으면 소화하는 데도 애를 먹는단 말입니다. 5신채를 먹어도 그렇지만, 고기를 먹어놓으면 우리를 도와주는 선신(善神)들이 그 냄새 때문에 우리한테 가까이 다가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아이들한테는 우선 생선까지만 먹이도록 해보세요.”
6. 다시 한번 더 질문하기: 무엇을 먹을까?
『구사론(俱舍論)』에 보면, 몸에 광명이 있고 원래 식(識)을 음식으로 하던 광명천(光明天)에서 염부제(인간세상)로 내려온 최초의 인간은, 땅거죽에 있는 지미(地味)에 맛들여 푹 빠져버렸는데, 그러자 지미가 이내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물질적인 농도가 더 짙은 떡같은 지피병이 자생적으로 나와 인간을 길렀고, 다음으로 임등(林藤)이 나와 누구나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등이 숨어버린 뒤로 나온 것이 향도(香稻)인데 역시 자생적으로 나온 것으로, 향도를 더욱 더 안 쉬고 먹는다면 몸의 광명이 점차 사라진다고 한다. 삼명육통을 다한 성자가 아니고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법문이지만, 필자로서는 우리 인간이 왜 가능하면 적게 먹고 소박하게 먹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법문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겁(劫)초의 인간은 아무 것도 안먹고 다만 생명 자체인 식식(識食) 뿐이었다는 구사론의 언급은, 수행을 통해 인간이 다다라야 할 삶의 원형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한다. 붓다를 비롯해 역사상 크게 깨달은 분들의 생활 또한 이에 근접하는 생활이었던 것 같다. 붓다가 승려에게 권하셨던 1종식(하루 한끼 식사)이나 ‘식식’은 잠시 미뤄 두더라도, 불자로서 채식 문제나 육식 문제에 대해 정견(正見)을 세우기 위한 근원적 관점 역시 이런 차원에서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채식인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앞서 살펴본 마이클 폴란이 채식인이 된 뒤 겪은 고백을 들어보자. “실험을 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채식주의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고기 없이 만족스런 식사를 하려면, 많은 생각과 수고가 필요했다(특히 자르고 써는 일을 많이 해야 했다). 사실 육식이 훨씬 더 간편했다. 게다가 고기를 먹는 게 훨씬 더 사교적인 일이기까지 했다. 적어도 채식주의자가 여전히 상대적으로 소수인 이 사회에서는 말이다. (『타임』지는 최근 미국에 천만 명의 채식주의자가 있다고 보고했다.) 채식주의 때문에 가장 곤란한 점은, 미묘한 방식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그런 일은 실제로 사회적 경험의 전 분야에서 일어난다.” 채식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UN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전체 개발 도상 국가에서 1억 3700만 미터톤의 육류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그해 선진국에서는 1억 200만 미터톤의 육류가 소비되었다. 개발 도상국가의 수요는 2050년까지 거의 세 배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통계 수치를 보면 채식인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 않을까 회의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UN보고서의 요점은, 지구가 인간이 키우는 짐승 떼로 점점 더 넘쳐나면서 미래에 닥쳐올 환경의 대대적 파괴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땅과 공기와 물이 위험하다. 육류 소비가 가장 많은 지역에서는 비만이나 다른 건강 문제들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숫자들을 보면서 채식인들이 무력감을 느끼기보다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를 인식하고 함께 바꿔나가는 데서 선도적 역할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소수의 인종차별 반대론자와 소수의 여성차별 반대론자가 마침내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근절시켰듯이!
또한 채식인을 중심으로 먹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 통찰력과 행동주의가 효과를 보이면서 유럽 농장 동물들의 처우가 개선되었다. 미국의 시위대들은 육용 송아지와 임신한 돼지를 좁은 틀에 가둬 키우는 방식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결국 그러한 부정적 여론은 맥도널드 패스트푸드 체인점을 집중 공략해서 공급업체와 도축장을 바꾸도록 촉구했다. 최근 대형 돼지 고기 및 송아지 고기 회사 중 일부는 축사 크기를 넓히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닭장에 갇혀 지내는 산란 닭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가둬 키우지 않은 닭이 낳은 달걀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비록 적은 수이긴 하지만 일부 닭들을 비참한 운명에서 구해냈다. (이미 영국에서는 닭장에 갇혀 지낸 닭의 달걀을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채식인의 노력이 지구상의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행위의 향상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네 차례의 연재를 통해, 우리는 육식이 인간의 몸에 해롭고, 인류에 족적을 남겼던 성인들과 훌륭한 인물들이 삼가도록 권했으며, 지구환경을 망가뜨리는 중요한 요인이고, 동물들과의 관계에서 일관성 있는 인간의 윤리적 삶을 가로막는 바임을 살펴보았다. 사실 이번 넷째 마당부터 지속가능한 농업의 사례를 다룰 예정이었다. 그러나 계속 필자의 머릿속에서 육식의 윤리적 측면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많았다. 해서 미흡하나마 이런 정도로 육식 문제의 윤리적 측면을 다루고 나니까, 이제 필자로서는 채식이냐 육식이냐의 문제와 관련된 논의를 어느 정도 일단락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연재부터는 지속가능한 농업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어보겠다.
미국을 비롯한 각처에 계신 독자분들, 훈훈한 겨울 맞으시라! 한창호 합장 _()_
<참고문헌>
강성경 <환경윤리와 원불교 은사상>
데미언 키온(Damien Keown) <불교와 생명윤리학(Buddhism & Bioetics)>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 <잡식동물의 딜레마(Omnivore’s Dillema)>
제인 구달(Jane Goodall) <희망의 밥상(Harvest for Hope)>
제임스 서펠(James Serpell) <동물, 인간의 동반자(In the Company of Animals: A Study
of Human-Animal Relationships)>
존 로빈스(John Robins)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Diet for a New America
1,2)>, <음식혁명(The Food Revolution)>
진 카제즈(Jean Kasez) <동물에 대한 예의(Animalkind: What We Owe to Animals)>
청화스님 <원통불법(圓筒佛法)의 요체(要諦)>
피터 싱어(Peter Singer) <죽음의 밥상(The Ethics of What we Eat)>
피터 하비(Peter Harvey) <불교윤리학 입문(An Introduction to Buddhist
Studies-Foundations and Issues)>
하바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편 <불교와 생태학(Buddhism and Ecology)>
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학의 만남>
헬레나 노르베르-호지 외 <지식기반 사회와 불교생태학(Ecology and Buddhism in the
Knowledge-based Society)>
첫댓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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