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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9권
11. 번뇌론(煩惱論)[1]
11.1. 번뇌상품(煩惱相品)
[논자(論者)의 말]
이미 모든 업을 설명하였으니, 모든 번뇌를 이제부터 설명하겠다.
때 묻은 마음의 행(行)을 번뇌라고 한다.
[문] 무엇을 때[垢]라 하는가?
[답] 만일 마음이 나고 죽음을 계속되게 하면 이것을 때라고 한다.
이 때 묻은 마음의 차별이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 따위가 되며,
이 때 묻은 마음을 번뇌라고 하고 죄의 법이라고도 하며, 퇴폐한 법이라고도 하고 숨는 법이라고도 하고 뜨거운 법이라고도 하고 또한 뉘우치는 법이라고도 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이 때 묻은 마음이 닦고 쌓이면 부림[使]이라고 하며 때 묻은 마음이 생길 때만을 부림이라 하지 않는다.
번뇌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 의심과 교만[貪恚痴疑憍慢]과 다섯 가지의 소견[見]이며, 이 열 가지 차별에는 98종의 부림이 있다.
탐냄은 세 가지 존재[三有=三界]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하며 또한 무유(無有)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이것을 탐냄이라 한다.
마치 경전 중에서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를 말한 것과 같다.
모유는 단멸(斷滅)을 말한다. 중생은 고통에 핍박을 당하는지라 쌓임의 몸[陰身]을 없애려고 하며, 없음[無]으로써 즐거움을 삼는다.
[문] 기쁨과 즐거움은 바로 느낌의 모양이요, 탐냄의 모양이 아니다.
경전 중에서
“지금에도 기쁘고 다음에도 기쁘다는 뜻은 금생에도 즐거움을 느끼고 내생에도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고,
또 “지금에도 근심하고 뒤에도 근심한다는 뜻은 금생에도 고통을 느끼고 내생에도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고 함과 같다.
또 하늘[天]이 묻는 말 중에서 “아들이 있으면 기쁘옵니다”고 하자
부처님은 “아들이 있으면 근심이 되는니라”고 대답하심과 같이 이러한 일들이다.
[답] 탐냄을 기쁨의 갈래[喜分]라 한다.
경전의 말씀에서
“느낌의 원인은 욕망[愛]에 반연하고, 즐거운 느낌 중에는 탐냄의 부림[貪使]이 있다.
단식(揣食) 중에 기쁨이 있다면 탐냄이 있고 기쁨이 다하기 때문에 탐냄도 다한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탐냄은 기쁨의 갈래인 줄 알아야 하리니, 이것이야말로 잘못이 없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경전 중의 말씀에서
“쌓임의 진리[集諦]라 함은 갈애(渴愛)가 그것이다”라고 함과 같다.
무엇을 갈애라 하는가?
내생의 몸을 얻으려 하는 것이 갈애이다.
어떠한 모양인가?
탐냄에 의지하여 갖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문] 만일 내생의 몸을 얻으려는 것을 갈애의 모양이라 한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탐냄에 의지하여 갖가지를 얻으려 한다고 하는가?
[답] 다시 갈애의 모양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갖가지를 얻으려 한다”고 말하면 이것은 대강으로 하는 말이고,
후생 몸을 얻으려 한다 함은 바로 개별적인 설명이다.
욕심을 여윈 사람도 갖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니 목이 말라서 물을 얻으려는 것은 쌓임의 진리에 소속된 것이 아니나 만일 탐냄에 의지하여 후생 몸을 얻으려는 것은 이 갈애는 쌓임의 진리에 소속된다.
[문] 만일 갈애도 기쁨이요, 탐냄도 기쁨이라면 무엇 때문에 탐냄에 의지한다고 하는가?
[답] 처음 생길 때를 갈애라 하고 더욱 자람[增長]을 탐냄이라 한다. 그러므로 의지한다고 말한다.
경전 중의 말에서
“기쁨은 세간을 얽어맨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기쁨은 바로 탐냄이다.
또 경전 중에서
“탐냄과 근심의 모든 착하지 못한 법을 없앤다”고 하였는데,
이 중의 탐냄은 곧 기쁨이요, 근심은 곧 성냄이다.
성냄을 근심이라 한다면, 기쁨은 탐냄인 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8의행(意行) 안에서는 번뇌를 말하지 아니하고 모든 느낌만을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기쁨의 갈래는 바로 탐냄인 줄 알 것이다.
또 범부는 탐냄을 여의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진심을 여의면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며 어리석음을 여의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함을 느끼지 못한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세 번째의 느낌에서 설명되기 때문이다.
범부는 이 느낌 안에서는 쌓임[集]도 알지 못하고 사라짐[滅]도 알지 못하고 맛[味]도 알지 못하고 허물[過]도 알지 못하고 벗어남[出]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는 무명의 번뇌에게 부림을 받는다.
이 범부는 항상 이 다섯 가지 법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느낌 안에서 무명의 번뇌에만 부림을 받는다.
무명의 번뇌라 함은 그것이 곧 알지 못하는 성품[不知性]을 가진 느낌의 행이다.
이와 같이 범부의 괴로움과 즐거움의 마음의 행도 바로 이는 탐냄과 성냄이다.
또 처음에 와서 마음에 있게 되면 느낌이라 하고, 더욱 자라서 명료하여지면 번뇌라 한다.
또 아주 부드러운 마음을 느낌이라 하고, 이 마음이 더욱 자라면 번뇌라 한다.
11.2. 탐상품(貪相品)
[논자(論者)의 말]
이 탐냄은 9결(結) 중에서 세 가지 세계의 두 매임[二繫]에 통한 것을 욕망[愛]이라 하며,
7사(使) 중에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욕탐(欲貪)과 유탐(有貪)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위의 두 가지 세계[上二界]에서 해탈의 모양이 생기는지라 이 때문에 부처님은 그곳을 존재[有]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존재를 나기[生]라고 하며 만일 탐냄이 없으면 나기도 없다. 그러므로 따로 말한 것이요, 욕탐 만은 아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욕탐만을 바로 번뇌라 하고 욕탐을 다하면 해탈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선(禪)의 무형[無色] 중에도 역시 유탐이 있다”고 하시고,
부처님은 그 중에도 미세한 속박[縛]이 있음을 보이셨다. 그 때문에 따로 탐냄을 말씀하셨다.
열 가지 착하지 못한 길과 네 가지 속박[四縛] 가운데서는 탐욕이라 하였으니, 탐욕이란 남의 물품을 얻고자 함을 말한다고 한다.
다섯 가지 덮개[五蓋]와 5하분결(下分結) 중에서는 욕욕(欲欲)이라 하였다. 욕욕이라 함은 탐욕을 바란다 하여 욕욕이라 한다.
다섯 가지 욕심과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 중에서는 탐불선근(貪不善根)이라 하였다. 불선근은 모든 착하지 못한 법을 나서 키운다고 한다.
이 탐냄이 만일 그른 법이라면 악탐(惡貪)이라 한다.
마치 남의 물품을 빼앗고 훔친다거나 내지 탐과 질이거나 스님의 물품을 가져가는 것과 아직 죽지 않은 중생의 살을 먹으려 하거나 혹은 모녀와 자매와 스승의 부인과 출가한 사람 및 자기 아내의 길 아닌 데로 음행을 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을 악탐이라 한다.
만일 자기의 물품을 보시하려 하지 않으면 그것을 아낌[慳]이라 하는데, 바로 이것이 탐냄이다.
만일 실지로 공덕이 없으면서 남으로 하여금 있다고 말하게 하려 하면 이것은 악욕(惡欲)이라 하며,
만일 실지로 공덕이 있으므로 남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면 이것은 발욕(發欲)이라 하며,
만일 많은 보시와 많은 물품을 얻으려 하면 이것은 다욕(多欲)이라 하며,
만일 적은 보시와 적은 물품을 얻더라도 좋은 것을 구하며 싫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만족할 줄 모름[不知足]이라 하며,
만일 씨족과 친족과 이름과 생김새와 재산과 젊음과 수명 등에 깊이 집착하면 이것은 교일(憍逸)이라 하며,
네 가지 공양을 탐내면 이것은 사애(四愛)라고 한다.
또 이 탐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탐(欲貪)이요,
둘째는 구탐(具貪)이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탐(我貪)이요,
둘째는 아소탐(我所貪)이다.
첫째 것은 안을 반연하고 둘째 것은 바깥을 반연한다. 위의 두 가지 세계에서의 탐냄은 언제나 안의 것만 반연한다.
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질에 대한 탐욕[色貪]이요,
둘째는 형체에 대한 탐욕[形貪]이요,
셋째는 닿임에 대한 탐욕[觸貪]이요,
넷째는 위의와 언어에 대한 탐욕[威儀語言貪]이다.
또 물질과 소리와 내음과 맛과 닿임에 대한 탐욕을 다섯 가지의 탐욕[五欲貪]이라 하며,
또 여섯 가지 닿임에 대하여 애착을 내는 것을 여섯 가지 대경의 탐욕[六塵貪]이라 한다.
또 세 가지 느낌 중의 탐욕에서 즐거운 느낌 안에는 얻고자 하는 탐욕 얻고자 하는 탐욕[欲得貪]과 수호하는 탐욕[守護貪]이 있고,
괴로운 느낌 안에는 얻지 아니하려는 탐욕[不欲得貪]과 잃고자 하는 탐욕[欲失貪]이 있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느낌 안에는 어리석은 탐욕[癡貪]이 있다.
또 이 탐욕 중에는 아홉 갈래[九分]가 있다.
마치 대인경(大因經)에서
“욕망으로 인하여 하고 싶은 일마다 구한다”고 함과 같다.
마치 사람이 이 일에서 괴로움을 당하면 다른 일을 구함과 같다.
또 설명하되
“즐거운 이는 구하지 않고 괴로운 이는 많이 구하는데, 이 탐냄의 더욱 왕성함을 구함[求]이라 하고,
구하다가 만일 얻으면 얻었음[得]이라 하고,
욕망을 얻어짐으로 인하여 바로 취할 것인가 취하지 않을 것인가를 헤아려 보다가 마음에 결정되면 이 헤아림[籌量]으로 인하여 욕애(欲愛)라 하고
욕애로 인하여 탐착(貪著)하고, 탐착함을 깊이 사랑한다고 하며,
탐착의 원인은 취득[取]에 반연하고, 취득을 받음이라 하고
받음으로 인하여 아낌[慳]을 내고, 아낌으로 인하여 수호(守護)하고, 수호함으로 인하여 매화 몽둥이와 칼과 창[鞭杖力矟]을 고루 다 받게 된다.
이것을 탐심의 아홉 갈래라 한다”고 하였다.
또 아홉 가지 갈래가 있다.
이 탐욕은 시기를 따르기 때문에 상(上)과 중(中)과 하(下)가 있는데, 하의 하와 하의 중과 하의 상이며, 중의 하와 중의 중과 중의 상이며, 상의 하와 상의 중과 상의 상이다.
또 탐냄의 세간 것으로 열 가지가 있다.
만일 좋은 물질을 보면 처음에 마음을 내면서 “이것[是]이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욕심을 내며,
세 번째는 소원을 세우고
네 번째는 생각[念]을 내며,
다섯 번째는 배우고 하던 버릇에 따르고
여섯 번째는 부끄러움을 잊으며
일곱 번째는 항상 눈앞에다 두고
여덟 번째는 방일하며,
아홉 번째는 어리석게 굴고 열 번째는 기절하여 죽는다. 이것이 탐냄의 모양이다.
11.3. 탐인품(貪因品)
[문] 이 탐냄은 어떻게 생기는가?
[답] 만일 여색(女色) 따위에서는 이 얼굴과 맵시와 닿임과 거동이며 언어에 대하여 삿된 생각을 내면, 탐냄이 생긴다.
또 눈과 귀 등의 문을 수호하지 아니하면 탐냄이 생기며,
또 음식에 분량을 조절할 줄 모르면 탐냄이 생기며,
또 여자를 친근히 하면 탐냄이 생기며
또 모든 쾌락을 받으면 탐냄이 생기며
또 어리석음 때문에 탐냄이 생기는 것이니,
정결하지 못한 가운데서 정결하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다.
또 나쁜 벗으로 말미암아 탐냄이 생기는 것이니 마치 정결한 옷으로 때 묻고 더러운 것을 싸는 것과 같다.
또 욕심 많은 사람과 일을 같이 하기 때문에 탐냄이 생긴다.
또 몸 등의 네 가지 법에 망녕된 생각을 내면 탐욕에게 끌리게 됨이, 마치 둥글한 병(甁)의 굴러 감을 제지하지 못함과 같고, 꽃에 열매가 없는 것과 같다.
또 게을러서 부지런히 선행을 닦지 아니하면 탐냄이 그 짬을 얻게 된다.
또 가지 아니할 곳에 가게 되면 탐냄의 침해를 당하는 것이니, 마치 음녀의 집과 술집과 백정의 집들로서 매와 비둘기의 비유에서와 같다.
또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보고 그 반연을 무너뜨릴 수 없으면 탐욕은 부림[使]이 된지라 일어나기 쉽다.
또 여색 따위에서는 기뻐하면서 모양을 취하고 여인의 손발과 얼굴과 말하는 것과 웃는 것과 눈짓과 눈물짓는 모양들을 그리고 남자의 생김새를 생각하고 분별하면 이런 뒤에 탐냄이 생긴다.
또 헤아리는 마음이 약하여 대경을 따르면서 억제할 수 없으면 탐냄이 생긴다.
또 만일 탐냄을 내어 참고 받아들이고서 버리지 않으면 차차로 더 늘어서 하에서 중이 되고 중에서 상에 이르며,
또 탐냄 가운데서 이로운 맛만 보고 허물을 알지 못하면 탐냄이 생기며
또 시절관계로 탐냄이 생김은 마치 봄철 따위와 같으며
또 방소[方處] 관계로 탐냄이 생김은 마치 일정한 처소에서 오래 전부터 습관적으로 음욕을 많이 행사하고 있는 것과 같으며,
또 몸에 따라 탐냄이 생김을 마치 나이 젊고 병이 없는데다 생활이 풍족함과 같다.
또 정력이 강하기 때문에 탐냄이 생김은 마치 복약하는 따위와 같으며
또 깨끗하고 아름다운 데서 다섯 가지 욕심을 마음대로 누리면 탐냄의 생김은 마치 좋은 꽃이 핀 못이거나 우거진 숲이거나 맑게 흐르는 샘물이거나 곱게 물들은 구름이거나 번갯불이거나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와 부채질하는 것을 보거나 혹은 뭇 새들이 구슬프게 지저귀거나 여인네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성이거나 행동과 말함을 보고 듣게 되는 것과 같다.
또 업의 인연 때문에 탐냄이 생김은 청정하게 보시한 사람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다섯 가지 욕락을 좋아하고 죄를 지은 사람이면 깨끗하지 못한 것을 좋아함과 같다.
또 동류에 따라서 탐냄이 생김은 마치 사람이 사람을 욕심내는 것과 같다.
또 깊이 거짓 이름을 고집하면 탐욕이 생기는데, 이 사람이 안에서는 남자인 체하면서 밖으로는 여자의 자태와 의복이며 친절한 체한다.
또 아직 공의 마음을 얻지 못한지라 안으로는 중생을 보고 밖으로는 물질들을 보면 곧 탐냄이 생기며,
또 탐냄의 번뇌가 다하지 못한지라 사랑의 반연이 나타나면 그 안에서 삿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들로 해서 탐냄이 생긴다.
11.4. 탐과품(貪過品)
[문] 탐욕에는 어떠한 허물이 있기에 끊으려 하는가?
[답] 탐욕은 실로 괴로운 것이다. 범부는 뒤바뀐 탓으로 잘못 즐겁다는 생각을 내지만 슬기로운 이는 괴롭다고 보는 것이니 괴롭다고 보면 곧 끊어진다.
또 탐욕을 느끼면서 싫어할 줄 모르는 것이 마치 짠 물을 마시면 따라서 그 갈증만 더하는 것과 같다. 갈증만 더할 뿐이거니 무슨 쾌락이 있게 되겠는가?
또 탐욕을 느끼기 때문에 모든 죄악이 아울러서 모인다. 칼과 몽둥이 따위도 다 탐욕으로부터 있게 된다.
또 경전에서
“탐욕의 죄는 가벼우면서도 진심보다 버리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가벼운 죄라고 하지만 사실인 즉 무겁다.
또 탐욕은 후생 몸의 인연이 된다. 마치
“욕망[愛]의 인은 잡음[取]에 반연하며, 마지막에는 큰 고통의 무더기다”라는 말과 같다.
또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되
“비구는 온갖 고통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은 다 몸으로 인연을 삼고 몸은 애욕으로 인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단식(揣食) 가운데는 기쁨도 있고 탐욕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식이 그 중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욕망이 몸을 받는 인연인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탐욕은 항상 불결한 가운데 행해짐은 마치 여자들과 같은 것이니, 이 여인들의 몸과 마음은 깨끗하지 못하여서 똥을 독사에게 발라 놓으면 쏘기도 하고 더럽히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이 탐욕은 항상 어리석은 가운데 행해진다.
마치 경전에서
“비유하면 개가 피 묻은 마른 뼈를 씹으면서 침과 합쳐지기 때문에 생각에 맛있다고 함과 같다”고 함과 같다.
탐욕이라는 것도 그와 같아서 재미없는 욕심 가운데서도 삿되고 뒤바뀜의 힘 때문에, 재미로 느낀다고 여긴다.
또 토막고기 등의 일곱 가지 비유와 같아서 어떤 사람은 과거와 미래의 일안에서 탐욕을 낸다. 그러므로 항상 어리석음 가운데서 행해지는 줄 알 것이다.
또 중생은 탐욕의 인연 때문에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은 많다. 왜냐하면 부귀한 것은 적으면서 빈천할 때는 많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애욕은 즐거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고루 다 받으며 구할 때에도 괴롭고 지킬 때에도 괴롭고 쓸 때에도 괴롭다.
마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정벌을 하거나 벼슬의 승진 등에서 이를 구할 때에도 괴롭고 지킬 때에도 두려울뿐더러 잃을까도 두렵기 때문에 괴롭고 현재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괴로운 것과 같다.
또 기쁨과 사랑으로 만나는 일은 적고 이별의 고통은 많다. 그러므로 욕심은 허물이 많은 줄 알 것이다.
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애욕에는 다섯 가지 근심이 있다.
첫째는 재미는 적고 허물은 많다.
둘째는 여러 가지 번뇌가 치솟는다.
셋째는 죽을 때까지 싫은 생각이 없다.
넷째는 성인의 꾸짖는 바다.
다섯째는 악행마다 짓지 아니함이 없다”고 하심과 같다.
또 이 탐욕은 항상 중생에게 생사의 흐름을 따르고 열반을 멀리 여의게 한다. 이러한 한량없는 잘못이 있는지라 욕심은 허물이 많은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가 다 탐욕으로 인하여 생김이 마치 몸을 탐내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킴과 같다.
또 애욕의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주자주 괴로움을 받음은 마치 독한 나무를 베지 않으면 항상 사람을 해침과 같다.
또 탐욕은 중생에게 무거운 짐을 걸머지게 한다.
또 경전 중의 말씀에
“탐애는 밧줄이다. 마치 검정 소와 흰 소가 스스로 매어지지는 않고 밧줄로써만이 매어 놓을 수 있듯이 눈은 물질을 매지 않고 물질은 눈을 얽어매지 않되 탐욕만이 그 안에서 얽어맨다”고 하였다.
만일 이 밧줄을 더위잡으면 해탈하지 못하게 된다.
또 경전 중에서
“중생은 무명에 덮이고 애욕의 번뇌에 얽혀져서 생사에 오가면서 생사가 없는 근본 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또 경전에서
“탐욕이 끊어지기 때문에 물질이 끊어지고, 식까지도 끊어진다”고 하였다.
이 탐욕은 무상 등을 관찰함으로써 끊어지며, 이 탐욕을 끊으면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끊어지면 물질이 없어지고 물질이 없어지면 고통이 지며,
식에 이르기까지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탐욕은 견고한 올가미다.
또 탐욕은 도적과 같은데도 중생은 그의 죄악을 모른다.
또 탐욕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문 안에서만 행하여지므로 깊은 죄악이라 한다.
또 중생은 마음이 기뻐지면 탐욕을 일으키고 심지어 모기나 개미에 이르기까지 다 음식과 음욕에서 생겨난다.
또 이 탐욕은 여러 가지 인연으로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는 것이니,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처자와 그리고 재물 따위가 그것이다.
또 중생은 음식과 음욕 따위의 탐욕이 마음을 가리기 때문에 생사를 받거니와 만일 선정을 탐낸다면 위의 세계에 가서 난다.
또 이 탐욕은 잘 화합한다. 모든 세간에서는 즐겨하는 것이 제각기 다르나, 탐욕의 화합은 마치 마른 모래가 물을 만나면 서로 달라붙는 것과 같다.
또 나고 죽는 가운데서는 탐애로 재미를 삼는다.
마치 물질 중의 맛에 탐착한다고 말함과 같나니, 물질로 인하여 기쁨이거나 즐거움을 내지마는 만일 탐욕이 없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빨리 생사를 끊게 된다.
또 이 탐욕은 해탈과는 서로 반대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다 욕심의 즐거움과 선정의 즐거움을 탐착함으로써 해탈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탐욕들을 끊음에 따라 변하여 즐거움이 되는 것이니 마치
“욕심을 여의게 됨에 따라 더욱더 깊은 쾌락을 얻는다”고 말함과 같다.
또 “만일 모든 쾌락을 얻으려면 응당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온갖 욕심을 버리기 때문에 필경에는 항상하는 쾌락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만일 큰 쾌락을 얻으려거든 조그마한 즐거움을 버려야 하며, 조그마한 즐거움을 버리기 때문에 한량없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또 “슬기로운 사람은 다시 다른 이익이 없다. 탐애하는 마음만 여의라. 마음이 탐애를 여읨에 따라 모든 고통이 사라지리”라고 함과 같다.
또 이 탐욕은 착한 법을 해친다. 왜냐하면 깊이 탐착하는 사람은 계율도 종족도 교법도 위신도 명예도 돌보지 않으며, 교화도 받지 않고 허물도 돌보지 않고 죄와 복도 관찰하지 않고서 미친 듯 취한 듯 좋고 나쁜 줄도 모르며 또한 장님이 복되고 이익되는 것을 보지 못함과 같기 때문이다.
또 “탐욕은 이익을 보지 못하며 탐욕은 법을 분별하지 못함이 마치 장님이 아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함과 같은 것이니, 탐욕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탐욕은 큰 바다이다. 끝도 없고 밑도 없으며 물질이 소용돌이쳐서 깊고 사나운 벌레와 나찰귀도 있다. 이러한 모든 험난한 데는 아무도 건널 사람이 없다.
다만 청정한 계행의 배에 머물러서 바른 소견의 바람을 만나야만 한다.
부처님은 큰 뱃사공이 되어서 능히 모든 바른 길[正道]을 지도하시나니, 말씀대로 닦아 행하면 그 사람은 곧 잘 건너리라”고 하였다.
또 모든 번뇌 중에는 망상으로 분별하는 재미가 탐욕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또 이 탐욕은 가장 끊기 어려운 것이다.
경전 중에서 두 가지 소원은 끊기가 어렵나니,
첫째는 얻는 것이요,
둘째는 오래 사는 것이다”라고 함과 같다.
[문] 탐욕에 이와 같은 허물이 있으면 어떻게 탐욕 품은 사람의 모양을 알아야 하는가?
[답] 탐욕이 많은 사람은 예쁜 여인과 꽃향기ㆍ영락ㆍ풍류ㆍ가무를 좋아하며,
음녀의 집에 가서 먹고, 모이며 대중의 모임과 여러 가지 장난꺼리를 좋아하며,
기뻐하는 대로 듣기 좋은 말을 하며,
마음에 항상 즐거워하며 안색은 온화하고 윤택하면서 불쑥 인사를 하며, 웃음을 머금고 말을 하며,
좀처럼 화를 내지도 않고 쉽게 풀어지며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며,
몸 놀리는 것이 재빠르며, 성질은 거의가 경솔하며 스스로가 깊이 몸을 애착하는 따위이니
이러한 것들을 탐욕이 많은 모양이라고 한다.
이러한 모양은 다 얽매임의 성품과 서로 어울린다. 그러므로 끊기가 어렵다.
또 온갖 탐욕은 필경에는 다 괴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탐애하는 일은 반드시 흩어지고 흩어지는 인연은 반드시 근심과 고통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하늘과 사람은 다 물질을 좋아하고 물질을 기뻐하고 물질에 집착하는지라 이 물질이 파괴될 때에는 근심하고 슬퍼하면서 마음으로 후회하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도 그와 같다”고 말함과 같다.
또 부처님은 여러 가지 경전 중에서 여러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탐욕을 꾸짖었으니,
이른바 혜명(慧命)을 해치기 때문에 독(毒)이라 하고,
마음에 있으면 바로 괴롭기 때문에 가시[刺]라 하고,
선근을 끊기 때문에 칼[刀]이라 하고
몸과 마음을 태우기 때문에 불[火]이라 하고
여러 가지 고통을 내기 때문에 원수[怨]라 하고,
마음속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속의 도둑[內賊]이라 한다.
뽑기 어렵기 때문에 깊은 뿌리[深根]라 하고
명예를 더럽히기 때문에 진흙탕[淤泥]이라 하고,
착한 길을 장애하기 때문에 방애(防礙)라 하고,
안에서 쑤시고 괴롭게 하기 때문에 화살이 염통에 들어갔다[箭入心]고 이름하고
모든 죄악을 일으키기 때문에 불선근(不善根)이라 하고,
생사의 바다에 흘러들기 때문에 강[河]이라 하고
착한 재물을 훔치기 때문에 도둑[賊]이라 한다.
탐욕에는 이와 같은 따위의 한량없는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끊어야 한다.
11.5. 단탐품(斷貪品)
[문] 탐욕에 이와 같은 허물이 있다면 어떻게 끊어야 되는가?
[답] 부정관(不淨觀)으로써 막고 무상관(無常觀) 등으로 끊는다.
[문] 어떤 사람은 “무상을 깨달았기 때문에 탐욕이 더욱 더 한다”고 하는데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 만일 사람이 모두가 무상한 줄만 알면 탐욕이 없게 된다.
마치 경전 중에서
“무상하다는 생각을 잘 닦기 때문에 온갖 욕심 세계의 탐욕과 형상 세계 및 무형 세계의 탐욕이며 온갖 들뜸과 교만과 무명을 파괴한다”고 함과 같다.
또 사람이 “세간은 모두가 고통이며 고통의 인연은 탐욕이다”라고 보면, 이 탐욕은 끊어진다. 또 사람이 늘 “나는 반드시 생노병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탐욕은 끊어진다.
또 청정한 즐거움을 얻으면 청정하지 못한 즐거움은 버려지는 것은 마치 초선(初禪)을 얻으면 욕심 세계의 애착을 버림과 같다.
또 탐욕의 허물됨을 알면 그것은 곧 끊을 수 있는 것이니, 허물에 관한 것은 앞에서 설명함과 같다.
또 많이 듣는 등의 지혜가 더 늘어나기 때문에 탐욕을 끊는 것이니, 지혜의 성품은 번뇌를 부수기 때문이다.
또 착한 인연이 두루 갖추어지면 탐욕이 끊어지는 것이니, 깨끗하게 계행을 가지는 일과 열한 가지 선정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 도(道)의 진리 중에서 설명하겠다.
또 색지(色智) 등과 범지(法智) 등의 방편이 있다.
부처님을 큰 의사(醫師)로 모시고 여러 동학(同學)을 급사(給使)로 하여 바른 법[正法]을 약으로 삼아 스스로 말씀대로 행하여서 낫게 되면 탐욕의 병은 끊어지리니
마치 병든 사람이 세 가지 일을 두루 갖추면 병은 그 때에야 나은 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문] 경전 중에서
“부정관으로 탐욕을 제거한다”고 하였으니
무엇이 부정관이며 무상관 등인가?
[답] 모든 부처님의 법은 다 모든 번뇌를 부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각기 훌륭한 힘을 지녔다. 처음에는 부정관으로 탐욕을 막고, 다음에는 무상지(無常智)로써 끊는다.
또 부정관으로써 거친 탐욕을 제거하는 일은 많은 사람이 아는 바로되 탐욕의 번뇌만은 세밀하기 때문에 무상관으로써 끊는다.
또 한 경전 안에서만 이렇게 말하였고, 여러 경전 중에서는 또한 그 밖의 법으로도 끊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와 같은 인연이면 탐욕이 끊어진다.
11.6. 진에품(瞋恚品)
[논자(論者)의 말]
성냄의 모양이라 함은 그 사람을 몹시 미워하여 없애버리려 하고 남을 시켜서 때리거나 포박하거나 살해하게 하며 아주 버리면서 영영 보려 하지 아니하면 그러한 성냄을 파라제가(波羅提伽)라 하는데 제일 중한 성냄[重瞋]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다른 사람을 헐뜯고 욕하고 때리려고만 하면 위흔바(違欣婆)라고 하는데, 중간쯤의 성냄[中瞋]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축출하려는 것은 아니고 혹은 처자(妻子)를 미워하거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면 구로타(拘盧陀)라 하는데, 맨 하급의 성냄이[下瞋]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항상 마음만을 더럽히면 마차(摩叉)라 하는데 원한을 갖지 않음[不報恨]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마음에 두어 잊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도를 갚으려하면 우파야가(憂波耶呵)라 하는데 원한을 갚음[報恨]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급작스럽게 한 가지 일에만 고집하여 여러 가지로 풀어 일러도 끝내 버리려 하지 않기를
마치 사자가 강을 건널 적에 저쪽 언덕을 지켜보듯 하면서 죽는 한이 있어도 돌이키지 않으면
그것을 파라타함(波羅陀含)이라 하는데 고집쟁이[專執]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남이 이익 얻는 것을 보고 질투하는 마음을 내면 이사(伊沙)라고 하며,
성을 내되 항상 소송하기를 좋아하여 마음과 말이 억세기만 하면 삼람피[三藍披]라 하는데 분을 내어 소송함[忿諍]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스승과 어른의 훈계에도 거역하면 두화차(頭和遮)라 하는데, 패려(悖戾)하고 사나움[很戾]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조금만 뜻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하여도 마음이 괴롭고 산란해지고 이를 아찬제(阿羼提)라 하는데 참지 않음[不忍]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말이 부드럽지 못하고 항상 찌푸려서 화평한 얼굴이 없으면서 불쑥 말을 하면 아파힐략(阿婆詰略)이라 하는데 기뻐하지 않음[不悅]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동거하면서 항상 꾸짖기를 좋아하면 아소라고(阿搔羅沽)라 하는데 조화하지 않음[不調]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몸과 입과 뜻으로 같이 공부하는 이를 건드리고 괴롭히면 승기(勝耆)라 하는데 괴롭히고 건드림[惱觸]이라는 뜻이다.
성을 내되 항상 꾸짖고 비평하기를 좋아하면 등단나타(登單那他)라 하는데 옳게 여김이 없음[難可]이라는 뜻이다.
이 성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혹은 중생으로 인하여 하기도 하고, 혹은 중생으로 인하여 하지 않기도 한다.
중생으로 인하여 함을 중한 죄라 한다.
또 상과 중과 하에서 아홉 가지 분류하기도 하며, 아무 일도 없는데 멋대로 성내는 것을 보태면 그것이 열 번째가 된다.
이러한 것을 성냄의 모양이라 한다.
[문] 성냄은 어째서 생기는가?
[답] 뜻에 맞지 아니한 괴로운 일에서 생긴다.
또 괴로운 느낌의 성품을 똑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냄이 생기며,
혹은 꾸짖고 욕하고 때리는 등의 일로부터 생기기도 하며,
혹은 나쁜 사람과 함께 일을 하면 성냄이 생기는 것이 마치 백정과 사냥꾼 따위와 같다.
혹은 지혜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성냄이 생기기도 함은 마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려짐과 같다.
혹은 오랜 동안 성냄의 번뇌를 익히어 성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성냄이 생기기도 하며,
혹은 백정이거나 사냥꾼이거나 독사에서 왔기 때문에 성냄이 생긴다.
혹은 남의 잘못을 기억하기 좋아하기 때문에 성냄이 생기기도 하는데, 9뇌 중에서 말함과 같다.
혹은 시기 때문에 성냄이 생기기도 함은 마치 10세 정명이 될 때의 사람들과 같다.
혹은 종류 때문에 성냄이 생기기도 함은 마치 독사 따위와 같다.
혹은 지방을 따라서 성냄이 생기기도 함은 마치 강구국(康衢國)의 사람들과 같다.
또 먼저 탐욕이 생기는 인연을 설명하였거니와 만일 그와 반대면 성냄이 생긴다.
또 나라 하는 마음을 헤아리어 교만이 치밀거나 물질에 집착하면 그러한 인연들로서도 성냄이 생긴다.
[문] 이 성냄에는 어떤 허물들이 있는가?
[답] 경전 중에서
“성냄은 탐욕보다 더 죄가 무겁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풀어지기 쉬우면서도 사실은 풀어지기 어렵다고 한다. 다만 탐욕이 오래도록 마음에 따름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성냄은 양편이 다 괴롭다. 제 자신을 몹시 괴롭게 하고 뒤에는 남의 속을 태우기 때문이다.
또 성냄은 결정코 지옥에 간다. 성냄으로부터 업을 일으키어 거의가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성냄은 착한 복을 무너뜨리는 것이니, 보시와 지계와 인욕의 이 세 가지는 다 인자함[慈] 따위로부터 생기는데 성냄은 자비와는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무너뜨린다고 한다.
또 성냄으로부터 업을 일으키면 다 나쁜 이름을 얻는다.
또 성냄으로부터 업을 일으키면 뒤에는 다 마음에 뉘우친다.
또 성내는 이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흉포하다고 한다.
중생은 항상 괴롭기만 한데다가 덮쳐서 성냄이 괴로움까지 있음은 마치 부스럼 위에 불로지지는 것과 같다.
또 경전 중에서 성냄의 허물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성냄이 많은 자는 얼굴빛이 추하며 자나 깨나 불안을 느끼고 마음은 항상 두려워하며 남들에게 불신을 당하는 따위이다.
[문] 성냄이 많은 사람은 어떠한 모양이 있게 되는가?
[답] 마음과 입은 딱딱하여 항상 기뻐하지 않으며, 찡그리고만 있어서 가까이하기 어렵고 얼굴빛은 화평하지 못하며,
분노하기는 쉬워도 풀어지기는 어려우며, 항상 원망하기 좋아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며, 무기를 휴대하고 나쁜 벗과 떼 지어 다니며,
착한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우며 자세히 생각해볼 줄도 모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없는 것 따위이니
이러한 것들을 성냄의 모양이라 한다.
이 모양은 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므로 끊어야 된다.
[문]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답] 항상(慈)와 비(悲)와 희(喜)와 사(捨)를 닦으면 성냄은 곧 끊어진다.
또 성냄의 허물되는 점을 알면 그것이 곧 끊는 것이요,
또 진실한 지혜를 얻으면 성냄은 끊어진다.
또 인욕하는 힘 때문에 성냄은 끊어진다.
[문] 무엇을 인욕하는 힘이라 하는가?
[답] 다른 사람의 꾸짖는 따위의 고통을 참으면 이 사람은 차한 법의 복을 얻으며, 또한 참지 못하는 데로부터 생기는 죄악도 얻지 아니한다. 그것이 인욕하는 힘이다.
또 인욕을 행하는 사람을 사문(沙門)이라 한다. 인욕으로써 도에 드는 첫 문[初門]을 삼기 때문이다. 사문의 법이란 성내는 것을 성내는 것으로 갚지 아니하고 꾸짖는 것을 꾸짖는 것으로 갚지 아니하며, 몽둥이를 몽둥이로 갚지 아니한다.
또 비구가 능히 참으면 출가하는 법에 보답하는 것이 된다.
또 성내는 것은 출가한 사람의 법이 아니다. 출가한 사람의 법은 인욕 바로 그것이다.
또 비구로서 모양과 의복은 세속과 다르면서 진심 내는 것이 같다면 마땅하지 못한 일이다.
또 인욕을 행하는 이라면 이미 자비의 공덕을 갖춘 것이다.
또 인욕을 닦는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성취한다. 왜냐하면 성을 내는 자는 남을 괴롭히고 해치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해를 받기 때문이다.
온갖 몸과 입으로 남에게 악을 끼치면 제가 얻는 죄악의 과오는 백배 천배가 된다.
그러므로 성냄은 자기에게 큰 손해가 되는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자기와 남이 다 같이 큰 고통과 큰 죄악을 모면하게 하려면 응당 인욕을 행해야 한다.
[문] 어떻게 하면 꾸짖고 욕하는 따위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는가?
[답] 사람이 무상함을 잘 닦아서 모든 법은 생각 생각에 생멸하는 줄 깨달아 알면, 꾸짖는 자와 당하는 자가 다 같이 생각 생각에 사라질 터인데, 그 안에서 어느 것이 성을 내게 하겠는가?
또 공하다는 마음을 잘 닦기 때문에 능히 인욕하면서 생각하기를
“모든 법은 실로 공하다. 꾸짖는 사람은 누구고 욕을 당할 이는 누구냐”라고 한다.
또 실지로 있는 일이면, 당연히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에게 실로 허물이 있다. 저 사람이 사실대로 말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성을 내느냐”고 한다.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그 사람 스스로가 거짓말의 보를 받을 것이므로 “내가 무엇 때문에 성을 내겠느냐”고 한다.
또 만일 욕설을 듣거든 생각하기를
“온갖 세간에서는 다 업에 따라 보를 받는다. 내가 예전에 반드시 이런 욕설의 업을 지었었기에 지금 그것을 받아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성을 내겠느냐”고 한다.
또 나쁜 욕설을 듣거든 스스로가 그의 허물을 자세히 살피되
“나는 이 몸을 받았고 이 몸은 고통의 그릇이기 때문에 응당 욕탐을 당해야 한다”고 한다.
또 인욕을 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만물이 다 여러 가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이 욕설의 고통도 이식[耳識]과 의식과 음성 등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스스로 두 갈래가 있으니, 저 사람은 음성만이 있고 이것은 바로 나의 죄 몫이 많아서다. 무엇 때문에 성을 내겠느냐”고 한다.
또 “나는 이 소리에서 그 모양을 취하여 분별하기 때문에 근심과 괴로움을 낸다. 바로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고 한다.
또 인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성냄 따위의 허물은 중생들의 허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의 마음에 병이 생겼기 때문에 제 뜻대로 할 수가 없음은
마치 귀신을 다루는 사람이 귀신에 홀린 사람을 치료하려면 귀신만을 성내게 할 뿐 병든 사람을 성내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또 이 사람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착한 법을 쌓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모든 부처님과 여러 성현들조차도 오히려 욕설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마치 잘하는 바라문들이 갖가지로 부처님께 욕설을 퍼부움과 같고 사리불 등도 바라문에게서 모든 곤욕을 당함과 같다. 하물며 우리들의 박복한 사람들이겠는가”고 한다.
또 생각하기를
“세간에는 악이 많은지라 내 목숨을 빼앗기지 않은 것만도 큰 다행이거늘 하물며 매 맞고 욕먹는 일쯤이랴”고 한다.
또 생각하기를
“이따위 욕설쯤이야 나에게 고통 될 것이 없다. 쉽사리 참고 받아들일 수 있다.
부처님이 비구에게 가르치듯이
‘설사 쇠톱으로 이 몸을 켜내린다 할지라도 오히려 참고 받아야 한다’고 하셨거늘
항차 이따위 욕지거리 쯤이랴”고 한다.
또 이 수행하는 이는 항상 나고 죽는 일을 싫어하는지라, 만일 헐뜯고 꾸짖음을 당하면 증험이 명료하여 더욱 더 싫증을 더하면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리라.
또 이 사람은 인욕을 하지 않으면 다음에 괴로운 과보 받을 것을 알므로 생각하기를
“차라리 업신여김과 꾸짖음을 당할지언정, 지옥에는 떨어지지 말라”고 한다.
또 이 사람은 깊이 부끄러움을 품고서
“나는 거룩하신 세존의 제자로서 도를 수행하는 사람이거니, 어떻게 짓지 않아야 할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겠느냐”고 한다.
또 인욕을 행한 보살과 제석천 등의 얻은 인욕의 힘을 듣는다. 그러므로 능히 참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