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해일륜_26. 허망한 상에 잠결하여 빛이 없고 생각만 있는 것(妄相潛結無色有想)
객이 묻기를,
“무엇을 유색중생이라고 하는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세간의 범부들이 마음이 올바르지(正) 못하여 참마음을 잃고 무슨 귀신의 행상을 그리든지 조성하여 놓고 항상 삿된 마음으로 생전에 복과 수명을 빌며, 사후에 영혼이 천당에 가기를 원하여 마음을 고요히 깊게 생각(潛心)하여 헛된 우상에 전도되어 일생에 정신이 그곳에 생각생각마다(念念) 어둡지 않기(不昧) 때문에, 죽은 뒤에 아는 것(識)이 형상 있는 몸을 받지 않고, 무슨 신당이든지 우상 있는 곳에 의지하는데, 참 애석하도다!”
객이 묻기를,
“그러면 예수교가 참 종교가 아닌가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우상偶像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형상形像 있는 우상이고, 또 하나는 형상이 없는 우상이다. 형상 있는 우상은 오히려 작은 우상이지만 형상이 없는 우상은 참으로 큰 우상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남녀신도가 길을 가다가도 꿇어 엎드려 빌고, 자다가도 빌며,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어디든지 꿇어 엎드려, ‘하나님 생전에 안락하고, 사후에 천당에 가게 하여지이다’ 하니 그 우상은 형상이 없으나 세계와 허공에 가득하여 우상 없는 곳이 없다.
형상이 있는 우상은 산신당山神堂이나 성황당城隍堂이나 화상과 등상이 있는 곳에만 빌고, 우상이 없는 곳에는 빌 생각이 없으니, 그 우상은 참 작은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를 멸하고 복을 얻기 위하여, 형상이 없는 천신을 마음에 하나 만들어 놓고 복된 과보를 희망하여 빌기를 마지아니한다. 세상 사람 보기에는 우상이 없는 듯하나 참으로 버리기 어려운 지독한 우상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그러면 현재 대각교에서 어찌 우상에 예배합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옛날 사람이 성상을 세운 것이지만 그 근본을 알고 보면 천지현격天地懸隔한 것이다. 대각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악화복길흉善惡禍福吉凶이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라고 하시며, 또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한 것이니 일체 우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상 문제는 3천 년 전에 대각께서 가장 먼저 설파한 것이다. 오늘날에 새로운 문제 될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일 빛깔과 형상 있는 것으로 대각을 보고자 하거나,
소리로 나의 명호를 불러서 대각 보기를 구하거나 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끝내 대각을 보지 못할 것이다.’24)
라고 하시니, 이것은 사람마다 자기의 본연각성이 곧 도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각의 제자는 천추에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뜻을 표시하여 성상聖像을 조성하여 엄숙히 위하지만, 일체 천당지옥天堂地獄과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다 나의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며, 또 나의 본연한 성품이 곧 도가 되는 줄로 알기 때문에 성상聖像에 집착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우상에는 다 귀신이 의탁하여 있다고 하니 모든 대각의 성상에도 다 귀신이 의탁하여 있을 것이 아닌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우상을 조성하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성상을 조성할 때에 가지신주加持神呪를 독송하여 사귀邪鬼를 축출하며, 진언眞言을 복장 안에 안치安置하고, 큰 거울을 태양太陽에 견주어 그 광선을 이용하여 성상의 두 눈에다가 바로 비추고 점안點眼법을 행하기 때문에 일체 마왕외도魔王外道와 모든 귀신이 멀리 달아나 일체 삿된 귀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상을 모시는 것은 단지 모범적으로 기념하기 위한 것이며, 다만 공경할 뿐이다. 일체 집착상을 두지 않는 것이다.
원래 이치는 성상을 모셔도 무방하고 아니 모셔도 무방한 것이니, 어찌 집착상이 있겠는가? 다만 사람마다 자기의 본성이 곧 도道인 줄 알면 항상 자기의 본성本性을 닦고, 모든 것에 의뢰심이 없어 천상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높은 것이다. 누구를 의뢰하여 복福을 빌며 수명(壽)을 빌겠는가? 다 복과 수명이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다.
일체중생의 본성 본심이 나와 같이 평등함을 알아 항상 자비심으로 구호하며, 일체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하며, 자심이 청정하여 삿된 마음이 없으며, 고요히 요동치 아니하여 산란심이 없으며, 지혜가 밝아 우치심이 없으면, 만덕을 성취하여 복을 구하지 아니하여도 복이 오며, 수명이 장원長遠하기를 구하지 아니하여도 장원하여 만사가 안락한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고 공적空寂하며, 광대하여 삼세三世에 간단間斷이 없으며, 시방에 빈자리(空缺)가 없어 천지와 세계를 다 머금었지만 형적이 없으며, 가는 티끌 속에 들어가지만 보이지 아니하며, 밝은 것은 티끌 수와 같은 해와 달보다 많으며, 그의 신변과 조화가 무궁무진하여 남에게 빌 것이 털끝만큼도 없으니 어찌 모든 천신에게 기도하여 천당 가기를 희망하겠는가?
우리는 대각의 진리를 깨쳐서 도덕을 삼기 때문에 설사 성상을 모셔 예배하고 공경하여도 우치한 미신이 아니며, 허공에다가 예배하여도 우치한 미신이 아니며, 만천 년을 예배하지 아니하여도 아만我慢이 아닌 것이다. 다만 정도만 목적함이요, 행리처行履處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객이 묻기를,
“오늘날에 대각께 공양을 올리고(聖供) 예배하는 것을 폐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그대가 인연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배하는 것의 그 실정實情은 나의 진성眞性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 받는 것이지만, 과거의 모든 대각과 인연을 맺은 것이니, 자연히 성인을 만나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삼계만법三界萬法이 다 인연으로 성립된 것이니, 성인에게 인연이 없으면 누가 너를 제도할 것인가? 우리는 대각의 가르침을 믿는 제자로서 우리가 성인을 위하지 않고서 누가 위할 것인가? 우리는 반드시 효순으로써 으뜸을 삼는 것이니, 마치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에 항상 출입함에 고하며, 조석으로 합장하고 안부를 여쭈며(問訊), 의복 음식으로 받들어 섬기는(承事) 것과 같이, 우리가 대각성인이 아니면 삼계고해를 어떻게 해탈할 것인가?
그러하므로 조석에 항상 예배공경하며, 오시午時에 항상 대각께 공양을 올릴(聖供) 것이니 이것이 선생 제자 간에 천고에 내려오는 규율인 것이지 미신이 아닌 것이다. 설사 성인에게 축원기도祝願祈禱를 하더라도 다 내가 건립한 나의 원력이요, 다른 교에서 다만 천신과 신명에게 의뢰하여 복된 과보를 희망하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삼계만법이 다 나의 마음으로 지은 것이니, 나의 마음이 정직하고 지성스러우면, 소원이 스스로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상에게 예경하는 것은 규율적으로 항상 다반예식을 할 뿐이다. 털끝만큼도 염착이 없는 것이니, 저 세간의 외도들이 형상 있는 우상이든지 형상 없는 우상에게 단지 정성을 드리며 기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성전에 예경할 때에 단지 나의 자성을 반조返照하여 일체 경계에 반연치 않고, 오직 마음과 경계가 텅 비어 한 물건도 없고 영지靈智가 밝아 역력히 분명하여 무정無情과 같지 아니하지만 털끝만큼도 의뢰심이 없으면, 그림자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아서 감응함이 헛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미혹한(迷) 사람은 그러하지 아니하여 자기의 마음속에 형상 있는 우상이나 형상 없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허망한 데만 정신을 의탁하여 우상에 전도되기 때문에 팔만사천으로 어지러운 생각(亂想)을 잠결潛結하여 허망되게 자기의 본성을 잃고 우상에 집착되어 색음色陰에 의지하지 않고 삿된 생각(邪想)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허망한 우상 가운데에 형상 없는 알음(知)을 맺어 밝지 못하여 귀신鬼神이 되고 정기情氣가 온전치 못하여 흩어져 정령이 되는데, 그 귀신정령鬼神情靈은 참다운 몸은 없고, 다만 생각만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