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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20권
변차별품 ⑫
8.2. 4연의 작용
이증과 교증에 따라 이미 온갖 연에 대해 자세히 분별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온갖 연은 법의 생멸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작용으로 삼는다. 그럴 경우 어떠한 연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 법에 대해 그 작용을 일으키는지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두 가지 원인은 바로 멸하려고 할 때
세 가지 원인은 막 생겨나려고 할 때
나머지 두 가지 연은 이와 반대로
[여과의] 작용을 일으킨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능작인을 제외한] 다섯 가지의 원인을 설하여 인연의 성(性, 즉 종류)이라고 하였는데, 이 가운데 두 가지 원인(구유인과 상응인)은 바로 멸하려고 할 때[正滅時]에 작용한다. 여기서 ‘바로 멸하려고 할 때’라는 말은, 법이 지금 바로 존재하여 그 멸상(滅相)이 현전하는 때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래서 ‘바로 멸하려고 할 때’라고 일컬은 것이다.
즉 구유인과 상응인은 법의 멸상이 현전하는 상태에서 공능을 일으키는데,76) 이러한 상태에서 두 가지 원인이 공능을 일으키는 것을 구생(俱生)의 품류라고 하였다. 따라서 [구생하는 법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할 때에는 그 모두에 작용이 존재하지 않으며, 능히 경계대상을 취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인은 비록 다같이 동시에 취과(取果)하고 여과(與果)할지라도, 여기서는 다만 여과의 공능에 근거[하여 분별]하였다.
[본송에서] 말한 ‘세 가지 원인은 막 생겨나려고 할 때’라고 함은, 이를테면 미래법이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正生位]를 말한 것으로, 그 때 생상(生相)이 현전하기 때문에 ‘막 생겨나려고 할 때’라고 일컬은 것이다. 즉 동류ㆍ변행ㆍ이숙의 세 종류의 원인은 법이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에서 공능을 일으킨다.77)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등류와 이숙의 두 결과는 원인의 힘이 견인하여 생겨나게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즉 동류인과 변행인은 무간에 등류과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것의 결과가 막 생겨나려고 하는 때에 원인은 작용을 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숙의 원인과 결과는 반드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으로, 그 원인이 소멸하여 오래 지나고서 비로소 결과가 생기하는 것인데, 어떻게 결과가 [막] 생겨나려고 할 때 작용이 존재한다고 하겠는가?
과거의 순간[時, 즉 전 찰나]에만 작용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한 ‘작용’의 뜻은 공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러한 두 상(相)의 차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사택(思擇)하였었다.78) [따라서] 원인이 비록 소멸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을 거쳤을지라도 공능을 갖기 때문에 자신의 결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니, [이숙의 업은] 공통되는 원인[共因]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결과가 생겨나려고 할 때 작용은 비록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결과에 대해 공능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작용’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79)
그런데 저 상좌(上座)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 찰나 동안에 이러한 ‘생겨나려고 하는 때’와 ‘소멸하려고 하는 때’를 [분별하여] 설하기는 어렵다. 법은 원인에 의해 먼저 생겨난 후에 소멸하는 것으로, 작대기에 그물(올가미)을 묶어 뱀 구멍 안으로 밀어 넣어 뱀의 목을 낚아채어 밖으로 끌어당겨 그 목숨을 끊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80) 즉 [법]체는 본래 존재하지 않았지만, 원인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도거(掉擧) 즉 들떠서 거들먹거린 희언(戱言)일 뿐이니, 종의로 삼을 수도 없는 천하고도 속된 말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대법자(對法者)도 ‘법은 원인에 의해 먼저 생겨난 후에 소멸한다’는 사실이 뱀의 목을 낚아챈다는 비유와 동일한 것이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연기(緣起)의 이취(理趣)가 법이로서 그러함에 학도(學徒)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 취과와 여과의 작용을 설한 것으로, 결과가 일어나는 데 원인에 공능이 있음을 밝힌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가 한 말은 오로지 도거의 희언만을 북돋울 뿐이다.
또한 그는 “일 찰나 동안에 이러한 ‘생겨나려고 하는 때’와 ‘소멸하려고 하는 때’를 [분별하여] 설하기는 어렵다”고 말하였지만, 그는 항상 살펴 생각하는 것[尋思]이 거칠고 얕아 [본 뜻과는] 다르게 논의하니, 오히려 나이가 이미 과년하여 늙고 쇠퇴[衰耄]한 시기이거늘 어찌 능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젊었을 때 항상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일체지자(一切智, 불타를 말함)가 지극한 이치[至理]의 말을 드러낸 것으로, 미묘한 지혜로 노닐며 종극(宗極)을 닦아 성취하였던 것이다. 비록 일 찰나에 본말(本末)이 일어날지라도 지금 막 일어나려고 하는 때를 일컬어 ‘생겨나려고 하는 때’라고 하였으며, 생겨나 무간에 바로 [과거로] 낙사하여 사라지려고 하는 때를 일컬어 ‘멸하려고 하는 때’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설하기 어렵다고 하겠는가?
설혹 설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설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 부지런히 방편을 더해 가면 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찌 그대들은 힘써 노력하였지만 자기가 설할 수 없다고 하여 다른 이들에게도 역시 무상(無上)의 보리(菩提)를 버리게 하고, 또한 역시 획득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인가? 어찌 획득하기 어렵다고 해서 지극한 추구[至求]를 버릴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자신의 학문에만 갇혀 그러한 [찰나의 생멸]상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법]체는 본래 존재하지 않았지만, 원인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같이 자신의 종의에 위배되는 말을 설하는 것인가? 만약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법]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법]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대법(對法)의 종의에 근거하여 마땅히 이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미래법은 역시 존재하기도 하고 역시 존재하지 않기도 하니, 말하자면 작용은 존재하지 않지만, [법]체는 본래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작용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지만, 먼저 생기하였거나 동시에 생겨나는 온갖 원인에 의해 지금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고.81)
미래세의 비존재[無體]를 설하여 논의하는 종의의 경우,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未生, 즉 미래세의 법]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無]’인데, 어떻게 그것을 [법]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것은 무간에 필시 마땅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법]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과실을 범하는 것이니, [존재하지 않는 법은] 현재와 무간에 필시 마땅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법이] 비존재라고 할 경우, 일체의 법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는 비존재[無]이지만 ‘마땅히 존재할 것[當有]’이기 때문에 [법]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현재에 존재하는 [법]체도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曾無]’이기 때문에 [비존재라고 해야 할 것인데] 어찌 비존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과거 역시 [법]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니,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曾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삼]세의 [차별은] 서로 뒤섞이고 만다.82)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은 추리하여 검토할 것도 없으니, 오로지 대법(對法)의 종의만이 이치상 경도됨이 없는 것이다.
인연의 작용하는 두 때(즉 正滅位와 正生位의 두 때)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두 가지 연(등무간연과 소연연)의 작용은 이와는 반대이다. 즉 등무간연은 법(즉 심ㆍ심소)이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즉 正生位)에서 작용을 일으키니, 그것(후 찰나의 심ㆍ심소)이 생겨나려고 할 때 전 찰나의 심ㆍ심소가 인기하여 개피(開避)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연연의 경우라면 능연(能緣)이 바로 멸하려고 하는 상태(즉 正滅位)에서 작용을 일으키니, 심ㆍ심소는 요컨대 현재시에 비로소 경계대상을 취하기 때문이다.83)
그러나 증상연은 법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모든 상태에서 장애함이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작용은 장애함이 없는 상태에 따라 [정생위든 정멸위든] 어떠한 경우에도 부정되는 일이 없다.84)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구유ㆍ상응인과 소연연은 법이 생기고 나서 비로소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어 이러한 두 가지 원인과 한 가지 연을 설정하는 것인가? 나아가 인연은 요컨대 작용을 가져야 비로소 인연성(즉 인연의 종류)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주장할 것 같으면, 미래세에는 마땅히 인연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래세에 마땅히 인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는 [그대의] 종의에서도 인정하는 바로서, 마땅히 힐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구유ㆍ상응인과 소연연은 법이 생기고 나서 비로소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작용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인과 한 가지 연을 배제한다면, ‘바로 멸하려고 하는 상태[正滅位]’ 중에서, 인기된 제법은 마땅히 어떠한 작용도, 경계대상을 취하는 공능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생기의] 작용을 갖지 않았음에도 역시 ‘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모든 아라한의 최후심 등도 역시 마땅히 등무간연으로 설정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책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소연연은 요컨대 작용을 갖기 때문에 비로소 [연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다’고 설하였는데,85) 어찌 [작용과] 서로 결부시켜 그러한 등무간연을 예로 드는 것인가? 그러한 연은 요컨대 개피(開避)와 견인(牽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현재법에만 적용[安立]할 수 있다. 즉 그러한 [등무간]연은 미래세에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 시에 있어서는, 일찍이 작용을 가졌기 때문에 비록 과거의 법이라 할지라도 역시 [등무간연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연연의 경우, 오로지 현재의 법만이 [소연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체성(體性)을 갖는 것이라면 모두 그러한 [소연]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작용에 의해 설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일부의 경우로서, 일부[의 소연]만이 연을 성취하여 작용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뿐 일체[의 소연]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체성을 갖는 것이면 바야흐로 소연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만약 소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면, 지각[覺]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86)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인(因)으로 설정하고 연(緣)으로 설정하는 데에는 역시 별도의 다른 뜻이 있는 것으로, 요컨대 능히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만이] 아니다. 비록 [결과를] 낳는 작용을 갖지 않았을지라도 역시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예컨대 자신의 상속 상에 결정된 인과를 관찰하건대 다른 상속에 있어서도 이치상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87) 이를테면 계경에서도 “두 가지 원인과 두 가지 연이 정견을 낳는다”고 설하고 있듯이,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하여 능히 [결과를] 낳는 것도, 능히 낳지 않는 것도 다 같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즉 [앞서] 구유(俱有)하는 제법이 화합하여 능히 다른 취집[異聚]의 동일한 결과를 인기하는 것을 일컬어 ‘작용’이라 하였는데, 이와 같은 화합취 중의 한 가지 법이라도 결여하게 되면, 그 밖의 다른 법도 모두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구유의 법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된다.88) 구유인과 마찬가지로 상응인도 역시 그러하여 전전(展轉) [상속]하는 힘만 있어도 능히 소연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능히 [결과를] 낳는 것만 비로소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앞서 이와 같이 말하였던 것인가? “법이 생겨나는 데 의지가 된 것[所賴]이기 때문에 ‘원인’이라 이름하였다”고.89)
원인을 떠나서는 어떠한 법도 생겨날 수 없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말이] 일체법으로서 능히 결과를 낳는 것만 비로소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90) 원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연의 뜻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따라서 [구유ㆍ상응인과 소연연은] 법이 이미 생겨났을지라도 작용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3. 제법의 연생(緣生)관계
온갖 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어떠한 법이 몇 가지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지에 대해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ㆍ심소는 네 가지 연에 의해
두 가지 선정은 다만 세 가지 연에 의해
나머지는 두 가지 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자재천에 의해서가 아니니, 순서대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에 의해’라고 하는 말은 연고[故] 즉 ‘~때문에’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말로서, 이를테면 심과 심소는 네 가지 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먼저 소연연은 마음 등을 낳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별도의 작용을 갖지 않는 것으로, 이를테면 6식신(識身)과 상응법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색 등의 다섯 가지와 일체법을 소연연으로 삼는다.91) 또한 마음 등의 인연은 [능작인을 제외한] 다섯 가지의 원인을 갖추고 있으며,92) 앞서 생겨난 자류(自類)는 [후 찰나의 그것을] 개피(開避) 인발(引發)하니, 이를 마음 등의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또한 마음 등의 증상연은 바로 일체법으로서,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찌 한 가지 연과 두 가지 원인의 작용은 그러한 법이 생겨나려고 할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겠는가?93) 그런데 어떻게 이와 같이 ‘마음 등은 네 가지 연 때문에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며, ‘인연은 [능작인을 제외한] 다섯 가지의 원인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인가?
비록 법이 ‘멸하려고 하는 상태’에서 비로소 그 작용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법이 생겨나려고 할 때 공용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니, 이를 떠나 그러한 법(심ㆍ심소법)은 필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심ㆍ심소는 반드시 소연에 의지하고 아울러 두 가지 원인(구유인과 상응인)에 의탁하여야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법이 그러한 법에 대해 소연이 되었다면, 혹 원인으로서는 잠시 존재하지 않으니, 본론(本論)의 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무심정(멸진정과 무상정)은 소연연을 제외한 세 가지 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니, [이러한 두 선정은] 능연(能緣, 즉 心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의 인연이 되는 것은 다만 두 가지 원인뿐으로, 첫째는 구유인이니, 이를테면 두 선정 상의 생(生) 등의 온갖 상(相)이 바로 그것이며, 둘째는 동류인이니, 이를테면 앞서 이미 생겨난 자지(自地)의 선법(善法)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것의 등무간연이란 입정할 때의 마음과 그 상응법을 말하며, 증상연이란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94)
어찌 무상(無想, 즉 無想果) 역시 세 가지 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심ㆍ심소의 등무간이기 때문으로, 역시 마땅히 마음의 등무간이 된다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95)
[그것은] 다만 마음 등의 가행(加行)에 의해 인기되어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폐(廢)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이러한 무상은 다만 말[聲]에 의해 드러나는 것일 뿐으로, 두 선정처럼 [유심의 상태와] 서로 대응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선정은 어떠한 이유에서 바로 마음의 등무간이면서도 마음(즉 出定心)의 등무간연이 된다고는 설하지 않는 것인가?
[두 선정은] 마음 등의 힘에 의해 인기되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심ㆍ심소의 ‘생’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전 찰나 마음의 ‘멸’에 계속(繫屬)되기 때문에, 색법처럼 그 밖의 다른 마음과 더불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득’ 따위처럼 잡란되어 동시에 현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 따위처럼 그 밖의 다른 법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서 마음의 방편 가행에 의해 인기되어 생겨나기 때문에 마음의 등무간이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마음이 동등하게 일어나는 것[等起]과는 결정코 서로 모순[違害] 되기 때문에 마음 등의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96)
또한 [두 선정이] 이러한 등무간연이 될 경우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수행자는 현행의 심ㆍ심소법을 염오(厭惡)하여 무심정에 들어간다. 그런데 만약 무심정이 다시 이러한 연이 되어 심ㆍ심소를 인기한다면, 수행자는 마땅히 이러한 선정 상에서 어떠한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 채 마음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즉 현행의 심ㆍ심소법을 떠나기 위해 무심정에 드는 것인데, 이것이 다시 심ㆍ심소법을 인기하여 낳는 것이라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지교(至敎)에서도 역시 ‘무심정은 심ㆍ심소의 가행에 의해 인기되어 생겨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니, “일체의 비상비비상처를 초과(超過)하여 상수멸(想受滅)을 몸으로 완전하게 작증(作證)하여 머무는 것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따라서 두 가지 선정은 바로 심ㆍ심소의 가행에 의해 인기되어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곧 마음의 차별에 의해 현전에서 증득되기 때문에, 어떠한 지교에서도 무심정이 능히 이러한 연이 되어 심ㆍ심소를 인기한다고 증명한 일이 없기 때문에 마음 등의 등무간연은 되지 않는 것이다.
두 선정에 있어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전 찰나를 후 찰나의 등무간연으로 설정하지 않는 것인가?
온갖 찰나의 선정[諸念]은 모두 전 찰나의 마음(곧 입정심)에 의해 동등하게 인기된 것으로, 능히 후 찰나[의 선정]을 인기할 수 없으니,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 또한 최후 찰나[의 선정]은 마땅히 결과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출정심을 결과로 삼는다고 한다면,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어찌 이미 설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선정은 마음의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고. 그런데 어떻게 최후 찰나의 선정이 출정심을 결과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출정심은 전정심(前定心) 등의 가행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최후 찰나의 선정에 의해 인기된 결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입정심(入定心) 등은 출정심에 대해 무간으로 멸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출정심을 그것에 대해 ‘등무간’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또 다른] 등무간연이 그 중간을 간격 지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97) 곧 ‘무간’과 ‘등무간’은 의미상 각기 차별이 있으니, 전 찰나의 마음 등의 힘이 후법을 인기하여 낳을 때 후법을 일컬어 전법의 ‘등무간’이라 하며, [다만] 찰나의 간격도 없는 것을 ‘무간’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두 말은 그 뜻이 각기 다르며, 그래서 그같이 말하게 된 것이다.
만약 어떤 법이 마음에 ‘등무간’이 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법은 역시 또한 마음과 ‘무간’에 [생겨나는] 것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마음에 등무간이 되면서 무간이 아닌 경우로서,] 이를테면 무심정에서 나오는 심ㆍ심소와 아울러 제2 찰나 등의 온갖 선정의 찰나가 그러하다.98) 제2구는 [마음과 무간이면서 등무간이 되지 않는 경우로서,] 이를테면 첫 찰나에 일어난 온갖 선정의 [생ㆍ주ㆍ이ㆍ멸]과, 아울러 유심(有心)의 상태에서의 온갖 심ㆍ심소의 생ㆍ주ㆍ이ㆍ멸이 그러하다.99) 제3구는 [마음에 등무간이 되면서 무간인 경우로서,] 이를테면 첫 찰나에 일어난 온갖 선정과 아울러 유심의 상태에서의 온갖 심ㆍ심소가 그러하다. 제4구는 [마음에 등무간도, 무간도 아닌 경우로서,] 이를테면 제2 찰나 등의 온갖 선정의 [생ㆍ주ㆍ이ㆍ멸]과 아울러 무심정에서 나오는 심ㆍ심소의 생ㆍ주ㆍ이ㆍ멸이 그러하다.
만약 어떤 법으로서 마음에 등무간이 되는 것이라면, 무심정과 무간에 [생겨나는 것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앞서 분별한 제3구와 제4구가 지금 여기서는 제1구와 제2구가 되며, 앞서 분별한 제1구와 제2구가 지금 여기서는 제3구와 제4구가 된다.100)
그 밖의 불상응행법과 온갖 색법은 인연과 증상연 두 가지에 의해 생겨나게 된다.
1) 외도의 일인(一因,이를테면 자재천) 생론(生論) 비판
다시 세간의 제법은 오로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임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세간의 제법은] 자재천(自在天)이나 자아(自我), 승성(勝性) 등과 같은 단일한 원인[一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니,101) 순서[次第]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온갖 세간이 만약 자재천 등의 단일한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면, 일체는 마땅히 동시[俱時]에 생겨나야 하며 순서대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원인이 지금 바로 존재[現有]하기 때문으로, 어떠한 법이 장애하여 동시에 생겨나지 않게 할 것인가? 그렇지만 제법을 현견(現見)하건대, 그것은 순서대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단일한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세간은 전후로서 차별되는 자재천의 의욕[欲]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단박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한다면, 마땅히 [세간은] 하나의 단일한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의욕을 제법의 생인(生因)이라고 역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102) 그러나 이러한 의욕에 전후 생멸의 차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 원인(즉 자재천)은 어떠한 변이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곧 원인에 변이가 없다면, 결과에도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니, 요컨대 또 다른 원인에 근거하여야 비로소 결과에 차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03) 혹은 그같이 차별되는 의욕은 마땅히 단박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그것의 원인이 되는 [자재천은] 전후의 어떠한 차별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104) 그럴 경우 제법 역시 마땅히 단박에 생겨나야 할 것인데, 그 무엇이 능히 장애하여 단박에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인가?
만약 자재천의 의욕은 다시 그 밖의 또 다른 원인(단일한 신의 온갖 의욕을 동시에 일어나지 않게 하는 원인)에 근거하여 [세간의 제법을] 전후 순서에 따라 차별하여 낳는다고 한다면, 원인이 되는 법은 마땅히 다시 또 다른 원인에 근거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그 근거가 되는 원인은 마땅히 끝[邊際]이 없어야 하며, 나아가 원인에 끝이 없기 때문에 ‘태초의 시작도 없었다[無始]’는 뜻이 성립하게 된다.105) [따라서] 이는 석문(釋門, 즉 불교)에서 설한 인(因)과 연(緣)의 올바른 이치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으로, 단지 명칭만을 달리하여 자재천을 ‘원인’이라고 설한 것일 뿐이다.
또한 무용(無用)하기 때문에, 마땅히 세간의 제법은 자재천을 원인으로 한다고 그릇되게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106) 즉 자재천이 크나큰 공력[大功力]을 지어 세간의 제법을 낳을지라도 여기에는 어떠한 소용도 없기 때문에 마땅히 자재천을 원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의 환희를 낳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단지 환희만을 낳아야 할 것임에도 무슨 소용이 있어(다시 말해 어떠한 목적에서) 그 밖의 다른 것(즉 괴로움의 세간)도 낳는 것인가? 만약 환희는 그 밖의 다른 방편(이를테면 괴로움의 세간을 낳는 것)에 의하지 않고서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의 환희는 다른 방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므로 자재천은 이에 대해 마땅히 자재(自在)하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107) 그리고 환희에 대해서도 이미 그러하니(자재하지 않으니), 그 밖의 다른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으로, [양자 사이에] 차별의 인연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방편(이를테면 괴로움의 세간을 낳는 것)은 마땅히 그 밖의 또 다른 방편(이를테면 유정의 업)에 의해 생겨났다고 해야 함에도 무슨 소용에서(어떠한 목적에서) 자재천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계탁(計度, 생각)하는 것인가? 만약 그 밖의 또 다른 방편을 떠나 다른 방편만으로도 환희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시 마땅히 [환희는] 다른 방편에 의해 일어난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혹은 [지옥 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괴로움의 도구를 낳아 유정을 핍박하고 해치면서 스스로 환희를 발생시킨다고 할 것 같으면, 참으로 못났도다! 무슨 소용에서 이같이 포악한 자재천을 섬길 것인가?
또한 세간은 오로지 자재천이라고 하는 하나의 단일한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신수(信受)한다면, 세간에서 바로 관찰[現見]할 수 있는 선과 악의 사용과(士用果)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자재천은 그 밖의 다른 인연이 보조적으로 낳은 공능을 근거로 하여 비로소 [세간을 낳는]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면,108) 이는 단지 자재천을 벗하거나 공경[朋敬]하는 말일뿐이니, 그 밖의 다른 인연을 떠나 [자재천만의] 별도의 작용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간ㆍ흙ㆍ물 등의 여러 가지의 인연은 싹 등을 낳는데 직접적인 공능을 갖는 것이니, 싹 등은 그것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생겨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싹 등이 생겨나는데 그러한 공력을 배제할 경우, [자재천만의] 별도의 다른 작용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세간의 제법이 일어나는 경우에 있어서도 자재천을 원인으로 한다고 계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재천이 이미 그러하니, 자아(自我)나 승성(勝性) 등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이에 준하여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法]으로서 오로지 하나의 단일한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앞에서 설한 것처럼 여러 가지의 인(因)과 연(緣)에 의해 일어날 뿐이니, 그 이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極成]이다.
4. 특히 대종과 소조색의 연생관계
[앞에서] 이미 색법은 인연와 증상연의 두 가지 연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하였다. 대종(大種)과 소조색(所造色)을 모두 일컬어 색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대종(大種)과 소조색(所造色)은 [각기]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서로 간에 어떠한 인연이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종은 대종에 두 가지 원인이 되고
소조색에 대해 다섯 종류의 원인이 되며
소조색은 소조색에 세 종류의 원인이 되고
대종에 대해 오로지 한 가지 원인이 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처음에 ‘대종은 대종에 두 가지 원인이 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온갖 대종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다만 구유인과 동류인이 된다는 뜻이니, 구기(俱起)하는 것과 먼저 생겨난 것[前生]을 원인으로 삼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09) 즉 [4대종은] 그 중의 하나만 결여하더라도 나머지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는 것이며, 존재유형[性類]은 비록 다를지라도 [전후의 대종은] 동일한 실체[事]로서 서로를 따르기 때문에 동류인이 되는 것이다.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능히 다섯 가지의 원인이 된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낳고[生], 의지[依]가 되고, 지녀 세우고[立], 상속하고[持], 기르는[養]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소조색은] 비록 [대종과] 동시에 생겨날지라도 그것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으로, 마치 싹이 그림자를 일으키고, 등불이 빛을 발하듯이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원인의 뜻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인은 다만 능작인의 차별일 뿐으로, 대종이 소조색에 대해 능작인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다섯 가지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온갖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으니, 동일한 결과[一果]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대종과 ‘생’ 등의 상은 다같이 소조색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서로를 견주어보면 구유인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 비록 다같이 소조색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시 그 밖의 다른 ‘동일한 결과’의 뜻을 갖는 것이다.
대종과 소조색은 필시 동일한 결과를 갖지 않기 때문에 ‘생’ 등의 예(例)는 이치상 결정코 맞지 않는다. 또한 온갖 대종과 ‘생’ 등의 상은, 설혹 서로를 견주어보면 동일한 결과[同一果]를 [획득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서로에 대해 결과[互爲果]가 되기 때문에 구유인이 될 수 있지만, 대종과 소조색에는 이와 같은 뜻이 없는 것이다.
어찌 마음과 마음의 수상(隨相)은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마음과 [능]상(能相, ‘생’의 4상)은 [서로에 대해] 구유인이 되니, 대종과 소조색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해야 하거늘 어찌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이러한 예증도 일치[等]하지 않으니, 마음과 수상을 다시 서로 견주어보면 비록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수상은 [능상과]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는 법이므로 결정코 마음에 대해서도 서로 결과가 된다는 뜻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마음의 수상과 마음은 동일한 결과를 [획득하기] 때문에 마음과 그것은 구유인이 되지만, 대종과 소조색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기 때문에 대종은 그것에 대해 구유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소조색에는 선과 불선이 존재하지만, 대종은 한결같이 무기성에 포섭되니, 이와 같은 특성으로 구유인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대종은 무기의 소조색에 대해서는 마땅히 구유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선ㆍ불선ㆍ무기라 하여도 소조색으로서 동일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즉 동일한 종류의 색이면서 일부(무기의 소조색)는 대종을 원인으로 하고, 일부(선ㆍ불선의 소조색)는 대종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와 같은 이치는 있을 수 없다. 이는 마치 동일한 종류의 법이면서 일부는 마음과 상응하고 일부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와 같은 뜻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대종은 과거세에 존재하고 소조의 색은 과거ㆍ미래와 통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지금 여기서 [논의하는] 구유인은 이와 같은 이치를 갖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성취가 다르기 때문에 [대종과 소조색 중에는] 이러한 [구유]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 “어떤 경우 온갖 소조색을 성취하더라도 4대종을 성취하지 않는 자가 있으며, 혹은 어떤 경우 능조(能造)의 대종을 성취하더라도 소조색을 성취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110) 구유인은 이와 같은 특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대종과 소조색은 구유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온갖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상응인도 되지 않으니, [대종과 소조색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변행인과 이숙인도 되지 않으니, 대종은 무부무기성이기 때문이며, 동류인도 되지 않으니,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설혹 후시에 일어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동류가 아니기 때문에, 비록 무기로서 동일한 경우라 할지라도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마음과 수(受) 등은 비록 종류가 다를지라도 서로에 대해 동류인이 되는 것처럼 대종과 소조색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수 등과 마음은 비록 종류가 다를지라도 동일한 결과를 [낳기] 때문에 [동류]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뭔가를 설하기 위해서는 도리에 근거해야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본론(本論) 중에도 역시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다섯 종류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문구가 있으니, “어떤 색처는 무기를 원인으로 하지 않는 것이면서 역시 무기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선한 색처가 바로 그것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만약 온갖 대종이 소조색에 대해 다섯 가지 원인 중 어느 한 가지 원인이라도 된다면, 이러한 문구의 뜻은 마땅히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경론(經論)과 서로 어긋나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4대종에 의해 색온을 시설(施設)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본론(本論)에서도 역시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인연과 증상연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111)
이 모두와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생인(生因) 등에 근거하여 이 같은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대종이 소조색에 생인이 된다고 함은, [소조색은] 그것으로부터 생기하였기 때문으로,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 것과 같다. 의인(依因)이 된다고 함은, [소조색은] 그것에 따라 전전(展轉)하기 때문으로, 마치 신하가 왕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다. 입인(立因)이 된다고 함은, 능히 임지(任持)하기 때문으로, 마치 대지가 사물을 지탱시키는 것과 같다. 지인(持因)이 된다고 함은, [소조색은] 그것의 힘에 의해 유지되어 [상속이] 끊어지지 않게 되기 때문으로, 마치 음식물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과 같다. 양인(養因)이 된다고 함은, 능히 증장시키기 때문으로, 마치 나무의 뿌리가 수분에 의해 기름지게 윤택되는 것과 같다. 즉 이와 같은 사실은 바로 대종이 소조색에 대해 생기[起]ㆍ변이[變]ㆍ지탱[持]ㆍ유지[住]ㆍ성장[長]의 원인이 되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112)
혹은 생인이란 일체의 대종이 소조색을 낳는 것으로, 온갖 대종을 떠나 소조색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조색이 생겨나서 동류로 상속하며 끊어지지 않는 상태 중에서는 화대(火大)를 의인으로 삼으니, 능히 건조시켜 문드러지거나 허물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수대(水大)를 입인으로 삼으니, 능히 그것에 배어들어 흩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지대(地大)를 지인으로 삼으니, 능히 그것을 임지(任持)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풍대(風大)를 양인으로 삼으니, 능히 그것을 인발(引發)하여 증장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종은 비록 소조색에 대해 구유인 등의 다섯 가지 종류의 원인의 뜻을 갖지 않을지라도 생인 등 별도의 다섯 종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경론과 서로 모순 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상좌(上座)는 거짓되게 이같이 말하였다. “생인 등의 다섯 원인은 성교(聖敎)의 설이 아니다”고. 즉 그는 “성교에는 일찍이 이 같은 말이 없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종(宗)에서는 무엇을 성교라고 이름하는지 아직 살피지 않았으니, 구마라설마(鳩摩羅設摩)가 지은 문송(文頌)을 [성교라고] 해야 할 것인가,113) 선질략(扇帙略)이 지은 논문(論門)을 [성교라고] 해야 할 것인가?
바야흐로 불타의 교설[佛敎] 중에도 이러한 개념[名想]이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애(愛)는 사부(士夫)를 낳으며, 애는 그 자체를 낳는다”고 설한 바와 같다.114) 또한 계경에서는 “계(戒)에 의지하고 계에 머물라”거나 “명색은 식(識)에 의지하고 식은 명색에 의지한다”거나 “송(頌, 시)는 문사(文士, 시인)에 의지한다”고 설하고 있다.115) 또한 계경에서는 “4식(食)은 구생(求生)과 이미 태어난 유정을 건립하고 섭익(攝益)한다”고 설하고 있다.116) 또한 계경에서는 “수대(水大)는 대지 등을 유지시킨다”고 설하고 있다.117) 또한 계경에서는 말하기를 “정법을 청문하여 능히 여리작의(如理作意)를 원만하게 하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대들은 신(信)에 의해 가법(家法, 세속의 법)을 버리고 집 아닌 곳[非家]으로 나아가 믿음을 장양시키고 수면력(睡眠力)을 제어하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다.118)
도리어 오로지 그대만이 주장하는 ‘구(舊) 수계(隨界)’라고 하는 원인은 온갖 성교 중 그 어디에서도 설한 곳이 없는 것이다.(이상 대종과 소조색의 연생관계)
온갖 소조색을 자신과 서로 견주어 보면 다만 세 가지 원인이 될 뿐이니, 말하자면 구유인과 동류인과 이숙인이 바로 그것이다.119) 이는 곧 소조색의 종류에 근거하여 세 가지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 일체의 모든 [소조색이 세 가지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여기서 구유인이란 이를테면 수심전(隨心轉)의 신(身)ㆍ어(語)의 두 업(즉 정려율의인 定俱戒와 무루율의인 道俱戒)을 말하는 것으로, 7지(支)를 서로 견주어 보면 전전하여 원인이 되는 것이다. 동류인이란 이를테면 후 찰나의 동류에 대해 먼저 생겨난 일체의 모든 [소조색]의 법을 말한다. 그리고 이숙인이란, 이를테면 능히 이숙과인 안근 등을 초래하는 온갖 불선과 선한 유루의 신ㆍ어의 두 업을 말한다.
나아가 소조색은 대종에 대해 단지 하나의 원인이 될 뿐이니, 이를테면 이숙인이 바로 그것이다. 즉 신ㆍ어의 두 업은 능히 이숙과인 대종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5. 등무간연이 되는 심ㆍ심소법의 상생(相生)관계
제법의 그러그러한 연생(緣生)관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종의에 따라 등무간연의 뜻에 대해 자세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본론 제19권)에서 ‘[아라한의] 최후심을 제외한 온갖 심ㆍ심소법으로서 이미 생겨난 것은 모두 등무간연이 된다’고 전체적으로 논설하였지만, ‘어떠한 마음과 무간에 몇 가지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인가’, 또한 ‘몇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적으로 설하지 않았다. 지금 마땅히 결정적으로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1) 3계 12심
마음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어떻게 그것에 근거하여 결정적으로 논설할 수 있을 것인가?
바야흐로 간략히 설하자면 마음에는 열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무엇이 열두 가지의 마음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에는 네 가지의 마음이 있으니
선ㆍ악과 유부(有覆)ㆍ무부의 무기이고
색계와 무색계에는 악심이 제외되며
무루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욕계에는 네 가지 종류의 마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선ㆍ불선ㆍ유부무기ㆍ무부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색계와 무색계에는 각기 세 가지 마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불선을 제외한 그것으로, 그 나머지는 앞에서 논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종류의 마음을 유루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무루심의 경우라면, 여기에는 오로지 두 가지 종류만이 있을 뿐이니,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같은 유루심과 무루심을] 모두 합하면 열두 가지 마음이 되는 것이다.
2) 12심의 상생관계
이러한 열두 가지의 마음의 상생관계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선심(善心)은 아홉 가지를 낳으며
이것은 다시 여덟 가지로부터 생겨나며
염심(染心)은 열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네 가지를 낳으며
그 밖의 것은 다섯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일곱 가지를 낳는다.
색계의 선심은 열한 가지를 낳고
이것은 다시 아홉 가지로부터 생겨나며
유부무기는 여덟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이것은 다시 여섯 가지를 낳는다.
무부무기는 세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이것은 다시 능히 여섯 가지를 낳는다.
무색계의 선심은 아홉 가지를 낳고
이것은 다시 여섯 가지로부터 생겨나며
유부무기는 일곱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무부무기는 색계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
유학은 네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다섯 가지를 낳으며
그 밖의 것은 다섯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네 가지를 낳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선심은 무간에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낳는다.120) 이를테면 자계(自界)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마음--즉 입정할 때와 속생(續生)하는 상태에서 순서대로 선심과 염심을 낳는다.
어떠한 선심을 낳으며, 그것은 다시 어떠한 지(地)에 포섭되는 것인가?
이것은 첫 번째 상태[初位]에서는 가행심을 낳지만 그 후의 상태에서는 이욕(離欲)의 득(得)을 낳으니, 수순(隨順)하여 머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색계의] 생득(生得)의 선심은 일으킬 수 없으니, ‘생’이 이 사이에 존재하여 능히 그것으로 하여금 일어나 현전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러한 마음은 미지지(未至地)에 포섭된다”고 설하였고, 어떤 이는 “역시 초정려에도 포섭되어 존재한다”고 설하였으며, 어떤 이는 “역시 정려중간에도 존재한다”고 설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존자 묘음(妙音)은 이와 같이 설하였다. “[이러한 마음은] 역시 제2정려에도 존재하니, 예컨대 초정(超定)이 일어날 때 지(地)를 건너뛰어 일어나는 것과 같다.”121)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등인(等引)이 아닌 마음은 능히 지를 뛰어넘는 마음을 견인하여 일으킬 만한 힘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묘음)의 설은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욕계의 선심은 자계(自界)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마음과] 아울러 무색계의 한 가지 마음--즉 속생하는 상태에서 욕계의 선심은 무간에 그러한 [무색계의] 염심--과,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낳으니,122) 수순하여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계의 선심은 무간에 결정코 색계와 무색계의 전(纏, 즉 염심)과 무부무기심을 낳지 않으니, 그것들은 모두 자계(自界)에 계속(繫屬)되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결정코 무색계의 선심도 낳지 않으니, 그것(즉 무색계)은 이것(즉 욕계)에 대해 네 가지의 원격함[四遠]이 있어 멀기 때문으로, 첫째가 소의원(所依遠)이며, 둘째가 행상원(行相遠)이며, 셋째가 소연원(所緣遠)이며, 넷째가 대치원(對治遠)이다.123)
그리고 이러한 욕계의 선심은 다시 여덟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마음--즉 출정(出定)할 때에는 그러한 [색계의] 선심으로부터 일어나며, 초정려의 염오한 선정에 의해 핍박 뇌란(惱亂)될 때에는 그러한 [색계의] 염심으로부터 욕계의 선심이 낳아지는 것으로, 하지의 선에 의해 그것에서 물러나는 것을 방호(防護)하고자 하기 때문이다.124) 아울러 [욕계의 선심은] 유학과 무학[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낳아지니], 이를테면 [무루]관에서 나갈 때이다.
‘염심(染心)’이란 말하자면 불선과 유부무기 두 가지로서, 이것들은 각기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제외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는데, 자계의 네 가지와 색ㆍ무색계의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속생하는 상태에서 상계의 여섯 가지 마음은 모두 명종(命終)하고서 욕계의 두 가지 염심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시 무루에 의해 생겨나는 염오심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유학과 무학의 마음으로부터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욕계 염심)은 무간에 능히 네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로서, 그 밖의 다른 마음은 낳을 리가 없다. 다시 말해 필시 하지의 염심이 무간에 상지와 무루의 마음을 낳는 일은 없는 것이다.
[본송에서] ‘그 밖의 것’이라고 한 것은 욕전(欲纏, 즉 욕계)의 무부무기를 말한 것으로, 이러한 마음은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선심이 바로 그것으로, 욕계의 변화심[化心]은 그러한 [색계 선심]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부무기심은 무간에 능히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즉 선심과 염오심으로서, 입정할 때 욕계의 변화심은 다시 그러한 [색계의] 선심을 낳으며, 속생하는 상태에서 욕계의 무부무기는 그러한 [색계의] 염심을 낳는다--와, 아울러 무색계의 한가지--즉 속생하는 상태에서 이러한 욕계 무부무기심은 능히 그러한 [무색계의] 염심을 낳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욕계의 네 가지 마음이 무간에 다른 마음으로부터 생겨나고, 능히 다른 마음을 낳는 결정적인 내용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이상 욕계4심의 상생관계)
색계의 선심은 무간에 열한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무색계의 무부무기심을 제외한 그것으로, 이숙생의 마음은 자계에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색계의 선심은 다시 아홉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의 두 가지 염오심을 제외하고, 아울러 무색계의 무부무기심을 제외한 그것이다.
[색계의] 유부무기심은 여덟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욕계의 두 가지 염오심과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여섯 가지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욕계의 선ㆍ불선ㆍ유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색계의] 무부무기심은 세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말하자면 오로지 자계의 세 가지로서, 그 밖의 다른 마음에 의해서는 낳아질 리가 없는 것이다.125)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여섯 가지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욕계와 무색계의 염심이 바로 그것이다.126)
이상 색계의 세 가지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분별하였다.
무색계의 선심은 무간에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욕계의 선심과 아울러 욕ㆍ색계의 무부무기심을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아울러 색계의 선심과,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무색계의] 유부무기심은 무간에 능히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아울러 색계의 선심과 욕ㆍ색계의 염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일곱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ㆍ색계의 염심과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제외한 그것이다.
[무색계의] 무부무기심은 색계의 그것에서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로서, 그 밖의 모든 마음에 의해서는 낳아질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아울러 욕ㆍ색계의 염심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 무색계의 세 가지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분별하였다.
유학(有學)의 마음은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유학의 마음과 아울러 3계의 선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다섯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앞의 네 가지 마음과 아울러 무학의 마음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3계의 염심을 낳지 않는 것은 서로 상위(相違)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온갖 무부무기심을 낳지 않는 것은 그것이 명리(明利)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송에서] ‘그 밖의 것’이라고 한 것은 무학의 마음을 말한 것으로, 이것은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이를테면 3계의 선심과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두 가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네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3계의 선심과 아울러 무학의 마음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유학의 마음을 낳지 않는 것은, 그것은 [무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며, 염심과 무부무기심을 낳지 않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3) 3계 20심
열두 가지의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어떻게 하여 이것이 나누어져 스무 가지의 마음이 되는 것인가?127)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두 가지 마음은 스무 가지의 마음이 되니
이를테면 3계의 선심은
가행(加行)과 생득(生得)으로 나누어지고
욕계의 무부무기는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즉 이숙생(異熟生)과 위의로(威儀路)와
공교처(工巧處)와 통과심(通果心)이 그것으로
색계에는 공교처가 제외되며
그 밖의 수량은 앞(즉 12심)에서 설한 바와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3계의 선심(善心)은 각기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지니, 이를테면 가행득(加行得)과 생득(生得)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28)
욕계의 무부무기심은 네 가지 마음으로 나누어지니, 첫째가 이숙생(異熟生)이며, 둘째가 위의로(威儀路)이며, 셋째가 공교처(工巧處)이며, 넷째가 통과심(通果心)이다.129)
색계의 무부무기심은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공교처를 제외한 그것이니, 상계에는 도무지 여러 가지의 공교한 일을 조작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색계에는 가는[行] 등의 일이 없기 때문에 위의로가 없으며, 섭수지(攝受支)인 삼마지가 없기 때문에 통과심도 역시 없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무색계에서는 색 등을 경계대상으로 삼아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무색]계에는 위의로 등의 두 가지 무기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그는 마땅히 공무변처(空無邊處)의 근분정(近分定)에 위의로 등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으로, 만약 ‘그러한 선정에는 이것(위의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허물도 없다’고 한다면, 앞의 말은 논거가 되지 않을 것이니, 비록 색 등을 경계대상으로 삼아 반연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이를테면 공무변처의 근분정)에도 역시 이것이 있을 수 없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130)
이상과 같은 이치에 따라 욕계에는 여덟 가지의 마음이 있고, 색계에는 여섯 가지의 마음이, 무색계에는 네 가지의 마음이 있으며,131) 여기에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더하여 스무 가지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4) 20심의 상생관계
이와 같은 스무 가지 마음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 것으로, 바야흐로 먼저 욕계에 대해 설해보기로 한다.
[욕계의] 여덟 가지 종류의 마음 중 가행의 선심은 무간에 열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自界)의 일곱 가지--즉 통과심을 제외한 것으로, [통과심의] 자류(自類)는 정정(淨定)과 무간에 생겨나기 때문이다--와,132) 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 가지와,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여덟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즉 두 가지 선심과 두 가지 염오심--와, 색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유부무기심--, 그리고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생득의 선심은 무간에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와, 색계와 무색계의 유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한 가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유부무기심--, 그리고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염오심은 무간에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와,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을 제외한 색계의 네 가지, 그리고 가행의 선심을 제외한 무색계의 세 가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숙생과 위의로의 마음은 무간에 여덟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여섯 가지와, 색계와 무색계의 유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일곱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공교처의 마음은 무간에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일곱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통과심으로부터는 무간에 두 가지의 마음이 낳아지니, 이를테면 자계의 통과심 한 가지와 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두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자계와 색계의 두 가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욕계의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색계의 마음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색계의] 여섯 가지 종류의 마음 중 가행의 선심은 무간에 열두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여섯 가지와 욕계의 세 가지--즉 가행ㆍ생득의 선심과 통과심--와, 아울러 무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가지와,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위의로와 이숙생을 제외한 자계의 네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와, 아울러 무색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유부무기심--와,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생득의 선심은 무간에 여덟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와, 아울러 [무]색계의 유부무기심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유부]133)무기심은 무간에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와 욕계의 네 가지-- 즉 두 가지의 선심과 두 가지의 염오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와 욕계의 세 가지--즉 생득의 선심과 위의로와 이숙생의 마음--와, 아울러 가행의 선심을 제외한 무색계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숙생과 위의로의 마음은 무간에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네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와, 아울러 무색계의 유부무기심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통과심은 무간에 두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두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바로 앞에서 설한 자계의 두 가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색계의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무색계의 마음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색계의] 네 가지 종류의 마음 중 가행의 선심은 무간에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 가지와,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여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오로지 이숙생을 제외한 자계의 세 가지와 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 가지와,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생득의 선심은 무간에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유부무기심 한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유부무기심은 무간에 여덟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유부무기심--와, 아울러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세 가지--즉 생득의 선심과 이숙생과 위의로--와, 아울러 욕계의 세 가지로서, 그 명칭은 색계에서 설한 바와 같다.134)
이숙생의 마음은 무간에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가행의 선심을 제외한 자계의 세 가지와 색계의 유부무기심 한 가지, 그리고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무색계의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무루의 마음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루의] 두 가지 종류의 마음 중 유학의 마음으로부터는 무간에 여섯 가지의 마음이 생겨나니, 이를테면 3계 모두의 가행의 선심과, 욕계 생득의 선심, 그리고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3계의 가행의 선심과 유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무학의 마음으로부터는 무간에 다섯 가지의 마음이 생겨나니,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유학에 의해 생겨나는 여섯 가지 마음 중 유학의 마음 한 가지를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3계의 가행의 선심과,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이상 무루심의 상생관계)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가행의 선심과 무간에는 능히 이숙생과 공교처와 위의로의 마음을 낳으면서도, 그러한 것들과 무간에는 가행의 선심을 낳지 않는 것인가?
먼저 이숙생의 경우, 선행한 업력에 의해 인발(引發)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세력이 약하고 저열하다. 즉 [이숙생의 마음은] 공용(功用)을 조작하여 인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가행의 선심을 인기하지 못하며, 그래서 그것은 능히 가행의 선심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출심(出心, 가행의 선심에서 나오는 마음)은 공용에 의하지 않고도 일어나기 때문에 가행의 선심이 무간에 그것(세 가지 무기심)을 낳는다고 하여도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13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염심은 마땅히 무간에 가행의 선심을 낳지 않아야 할 것이니, 경계에 염착(染著)하여 선에 위배되기 때문이며,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136)
이러한 과실은 없으니, 번뇌가 자주 현전하는 것을 싫어하여 이같이 생각한다. “어떠한 방편을 시설하여 무의(無義)의 무더기[聚, 즉 번뇌]로 하여금 멈추게 하고 행하지 않게 할 것인가? 바로 과실을 일으키는 경계대상을 참답게 알고 능히 공덕을 낳아서 나는 마땅히 일어날 번뇌의 현전(現前)으로부터 벗어나, 살피고 다시 각지(覺知)하여 선을 일으켜 방호하리라.” 바로 이러한 원력에 의해 능히 가행을 일으킬 수 있으며, 염심도 무시(無始) 이래 자주 익혔기 때문에 그 세력이 저열하지 않다. 따라서 염심과 무간에 가행의 선심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욕계의 생득의 선심은 그 행상이 명리(明利)하지만, 뛰어난 공용(功用)에 의해 인발된 것이 아니다.137) 즉 그 행상이 명리하기 때문에, 그것은 유학ㆍ무학의 마음과 색계 가행의 선심(즉 定心)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날 수 있지만, 뛰어난 공용에 의해 인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는 능히 그러한 마음(유학ㆍ무학과 색계 가행선심)이 인기되어 낳아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색계와 무색계의 생득의 선심은 명리하지 않기 때문에, 뛰어난 공용에 의해 인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학ㆍ무학의 마음과 다른 계(界)의 가행의 선심에 의해 무간에 일어나지 않으며, 이것으로부터도 역시 그러한 마음(학ㆍ무학의 마음과 다른 계의 가행선심)을 인기하여 낳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욕계의 생득의 선심은 명리하기 때문에 색계의 염심(즉 味定)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 능히 [물러남을] 방호할 수 있지만, 색계 생득의 선심은 명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색계의 염심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5) 여러 종류의 작의(作意)와 성도(聖道)의 상생관계
작의(作意)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138) 말하자면 자상(自相)ㆍ공상(共相)ㆍ승해(勝解)의 작의로서 차별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컬어 자상작의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색(色)은 변애(變礙)를 자상으로 한다’고 관(觀)하며 내지는 ‘식(識)은 요별(了別)을 자상으로 한다’고 관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따위의 관지(觀知)와 상응하는 작의를 말한다.
무엇을 일컬어 공상작의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16행상(行相)과 상응하는 작의를 말한다.139)
무엇을 일컬어 승해작의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부정관(不淨觀)과 아울러 4무량(無量)ㆍ유색해탈(有色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 이와 같은 따위의 관지와 상응하는 작의를 말한다.140)
즉 이와 같은 세 가지 종류의 작의와 무간에 성도(聖道, 見ㆍ修ㆍ無學의 3道를 말함)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도 역시 능히 이러한 세 가지 작의를 모두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이 같은 설을 주장하게 되면 바로 “부정관과 구행(俱行)하는 염(念) 등의 각분(覺分)을 닦는다”고 한 [계경의] 말을 따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141)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오로지 공상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는 바야흐로 세 종류의 작의를 모두 일으킬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부정관과 구행하는 염 등의 각분을 닦는다”고 말하였을 것인가?
부정관에 의해 마음을 조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능히 공상작의를 인기하여 낳을 수 있고, 이것으로부터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니, 이같이 전전(展轉)한다는 은밀한 뜻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142)
그러나 어떤 유여사는 다시 말하기를 “오로지 공상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도 역시 오로지 공상작의만을 능히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말에는 과실이 있다.
까닭이 무엇인가?
미지정(未至定) 등의 세 가지 지(地)에 의해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증입(證入)하였을 경우에는 성도와 무간에 욕계의 공상작의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니, 욕계 중의 공상작의는 그러한 성도와 떨어져 있을지라도 지극히 먼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43) 그러나 만약 제2ㆍ제3ㆍ제4정려에 의해 정성이생에 증입하였다면, 성도와 무간에 어떠한 작의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욕계의 공상작의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니, [제2정려 등은 욕계와] 지극히 멀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제2정려 이상의] 경지에서는 [어떠한 작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경지에 [공상작의가] 존재한다면 일찍이 획득된 공상작의로서, 일찍이 획득된 순결택분(順決擇分)과 다른 것이 아니다.144) 나아가 모든 성자에게는 순결택분이 더 이상 다시 현전할 수 없으니, 이미 득과(得果)하였으면서 거듭하여 가행도를 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145) 따라서 그는 지금 마땅히 설명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성도 후에 어떠한 공상작의가 현전하여 일어난다는 것인가?
어찌 [별도의 공상작의가 있어] 순결택분에 계속(繫屬)된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역시 그러한 종류의 공상작의를 닦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즉 [가행도의 공상작의에서] ‘제행은 모두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일체법은 모두 무아이며, 열반은 적정(寂靜)이다’고 관찰하였듯이, 성도와 무간에도 그러한 [종류의] 공상작의가 인기되어 현전하는 것이다.146)
이러한 해명도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즉 가행도(즉 순결택분)에서 닦고 거기에 계속(繫屬)된 작의는 득과(得果) 후에 인기되어 현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바로 그러한 종류이기 때문이다.147) 따라서 앞에서 설한 ‘성도와 무간에 세 가지 작의가 모두 현전한다’는 것이 이치상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미지정에 의해 아라한과를 획득한 자라면,148) 그 후 출관(出觀)하는 마음은 혹 어떤 경우는 바로 그러한 경지(미지정의 유루정)이며, 혹 어떤 경우는 바로 욕계(즉 散心)일 것이다. 무소유처에 의해 아라한과를 획득한 자라면, 그 후 출관하는 마음은 혹은 바로 그러한 경지(무소유처의 유루정)이며, 혹은 바로 유정처(有頂處)일 것이다. 만약 그 밖의 다른 지에 의해 아라한과를 획득한 자라면, 그 후 출관하는 마음은 오로지 바로 그러한 자지(自地)일 뿐 그 밖의 다른 경지가 아니다.
다시 욕계 중에는 세 가지 작의가 있으니, 첫째가 문소성(聞所成)이며, 둘째가 사소성(思所成)이며, 셋째가 생소득(生所得)의 작의이다. 색계 중에도 역시 세 가지 작의가 있으니, 첫째가 문소성이며, 둘째가 수소성(修所成)이며, 셋째가 생소득의 작의이다. 즉 [색계에서는] 마음을 움직여 사유하고자 할 때 바로 선정에 들기 때문에 사소성의 작의가 없는 것이다. 무색계 중에는 오로지 두 가지 작의만이 있을 뿐이니, 첫째가 수소성이며, 둘째가 생소득의 작의이다.149)
그럴 때 욕계의 문ㆍ사소성의 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는 세 가지 작의가 모두 일어나 현전한다. 즉 모든 성도는 반드시 가행도에 계속(繫屬)되어 일어나기 때문으로, 생득선(生得善)의 작의와 무간에는 성도가 현전하지 않는다. 또한 색계의 문ㆍ수소성의 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도 역시 그러한 두 종류의 작의만을 일으킬 뿐이다. 무색계의 경우, 오로지 수소성의 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도 역시 수소성의 작의만을 일으킬 뿐 생소득의 작의를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제2정려 이상에 태어나 초정려의 세 가지 식신(識身)을 일으킬 때, 온갖 유정으로서 아직 자지의 염오함을 떠나지 않은 자라면, 그에게는 자지의 선ㆍ염오ㆍ무기의 작의로부터 무간에 두 가지 식신이 현전하며, 세 가지 식신은 무간에 다시 자지의 세 종류의 작의를 낳는다. 온갖 유정으로서 이미 자지의 염오함을 떠난 자라면, 염오의 작의를 제외한 선과 무기의 작의로부터 무간에 세 가지 식신이 현전하며, 세 가지 식신도 역시 무간에 오로지 이러한 두 종류의 작의만을 일으킬 뿐이다.
6. 12심에 따라 획득되는 마음의 수(數)
그렇다면 앞에서 설한 열두 가지 마음 중에서 어떠한 마음이 현전할 때 획득될 수 있는 마음은 몇 가지인가?150)
게송으로 말하겠다.
3계의 염심(染心) 중에서는
여섯 가지와 여섯 가지와 두 가지를 획득하고
색계의 선심은 세 가지를, 유학의 마음은 네 가지를
그 밖의 것은 모두 자류(自類)의 마음만을 획득할 수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와 색계의 염심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열두 가지의 마음 가운데 각기 여섯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으며,151) 무색계의 염심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열두 가지 마음 가운데 오로지 두 가지 마음만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152)
[그러한 마음은] 일 찰나에 [획득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먼저 욕계의 염오심을 일으킬 때에는, 혹은 계퇴환(界退還), 혹은 속선본(續善本), 혹은 퇴승덕(退勝德)의 세 상태에서 헤아릴 수 있는 가능성에 따라 모두 여섯 가지의 마음을 획득한다고 하였다.153) 즉 계퇴환 시에는 자계의 무부무기를 제외하니, 결정코 자계의 선 등의 세 가지 마음을 획득하며,154) 색계의 염심 역시 획득할 수도 있다. 속선본의 상태에서는 자계의 선심을 획득하니, 의심하는 중에 선근을 상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퇴승덕의 상태에서는 3계의 염심과 유학의 마음을 모두 획득할 수도 있다.
만약 색계의 염오심을 일으킬 때라면, 혹은 계퇴환, 혹은 퇴승덕의 상태에서 헤아릴 수 있는 가능성에 따라 역시 여섯 가지의 마음을 획득한다고 하였다. 즉 계퇴환 시에는 자계의 세 종류를 획득하며, 아울러 욕계의 무부무기심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통과심(通果心)이 바로 그것이다. 퇴승덕의 상태에서는 색ㆍ무색계의 두 가지 염오심과 아울러 유학의 마음을 모두 획득할 수도 있다.
만약 무색계의 염오심을 일으킬 때라면, 단박에 두 마음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유학과 자계의 염오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로지 퇴승덕의 상태만이 존재한다.
색계의 선심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열두 가지 마음 가운데 세 가지의 마음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선심과 욕계와 색계의 무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으로,155) 승진(昇進)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156)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근본정려가 일어날 때에는 세 마음을 단박에 획득하는 것으로,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만약 ‘획득’을 넓은 의미로 설한다면, 이러한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때에는 오로지 뒤의 두 가지만을 획득하니, 앞의 한 종류(자계의 선심)는 이전에 이미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태에서는 유학의 마음도 역시 획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마땅히 ‘네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유학의 마음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열두 가지 마음 가운데 네 가지의 마음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유학의 마음과, 아울러 욕ㆍ색계의 무부무기심과 무색계의 선심이 바로 그것이다.157) 즉 만약 처음으로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증입(證入)하는 경우라면, 그 때 유학의 마음을 획득하였다고 바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성도로써 욕계의 염오심을 떠나 최후로 해탈도가 일어날 때 욕ㆍ색계의 무부무기심을 획득하며, 혹은 성도로써 색계의 염오심을 떠날 때 무색계의 선심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떠난다’는 말은 궁극[畢竟]의 떠남은 아니니, 색계의 염오심을 아직 완전히 떠나지 않았을 때에도 무색계의 선심은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158)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색계의 염오를 완전히 떠날 때 무색계 근본지(地)의 선을 획득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유학의 마음도 역시 획득한다고 설해야 할 것이며, 욕계의 염오를 떠날 때에는 색계의 선심도 역시 획득하므로 마땅히 유학의 마음은 다섯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
[본송에서 말한] ‘그 밖의 마음’이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염오 등의 마음을 제외한 그 밖의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3계의 세 가지 무부무기심과 욕ㆍ무색계의 선심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획득되는 마음의 차별을 설하지 않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한 마음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오로지 자류(自類)의 마음만을 획득할 수 있음을.
[욕계와] 색계의 무부무기심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획득되는 것이 없으니, [무부무기심은] 이전에 이미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그것들은] 모두 자류의 마음만을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으로, 어찌 무학의 마음이 바로 일어나려고 할 때에도 역시 네 가지의 마음--이를테면 3계의 선심--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또한] 최초의 진지(盡智)는 미래의 수(修)이기 때문에 이전에 이미 획득한 것이 아니다. 미래의 수가 존재하는데, 어떻게 이것(무학심)이 오로지 자류의 마음만을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무색계의 선심이 바로 현기(現起)할 때에도 역시 유학의 마음을 획득하는데, 어찌 오로지 자류의 마음만을 획득한다고 하겠는가?
여기서 ‘획득한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마음이] 일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니, 뒤의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따라서 그러한 힐난의 과실은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자류의 마음은 이전에 이미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획득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색계의 선심이 세 가지 마음을 획득하고, 유학의 마음이 네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는 사실도 역시 마땅히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색계 선심과 유학심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마음만 획득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으로, 이러한 뜻을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어떤 이는 다만 “마음에는 열한 가지가 있으니, 유학과 무학은 다같이 무루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즉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전체적으로 논설하였는데, 게송으로 말하겠다.159)
지혜로운 자는 설하기를, 염심(染心)이
현기(現起)할 때에는 아홉 가지 마음을 획득하고
선심 중에서는 여섯 가지 마음을 획득하며
무기심은 오로지 무기심만을 획득한다.160)
즉 욕계의 염심은 계퇴환(界退還)의 상태에서 자계의 무부무기를 제외한 세 가지 마음을 획득하고, 색계의 염심은 계퇴환의 상태에서 자계의 선ㆍ염오심과, 욕계와 색계의 무부무기심을 획득하며, [무]색계의 염심은 무학에서 물러나는 상태에서 자계의 염심과 유학의 마음을 획득한다. 이는 곧 계(界)에 근거하여 획득하는 마음의 다소를 논의한 것이지 지(地)에 근거하여 분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홉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는 것으로, 무색계의 선심은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염심은 열 가지 마음을 획득하니, 무색계 중에서 물러나 하지(下地)에 태어나면 염심이 일어난 상태에서 자계의 선심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비록 마음의 획득을 계(界)에 근거하여 설정한다고 말하였을지라도, 예컨대 무루심의 획득에 대해서도 역시 말할 수 있거늘 지(地)의 선심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설하지 않을 것인가?”
‘선심 중에서는 여섯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정견(正見)에 의해 선근이 속생(續生)할 때 욕계 선심을 획득하며, 욕계 염오를 떠날 때,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욕계와 색계의 무부무기심을 단박에 획득하며, 처음으로 선정(정려와 무색정)에 들 때 상응하는 바대로 색계와 무색계의 선심을 별도로 획득하며, 처음으로 이생위(離生位)에 들어 아라한을 증득할 때는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획득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여섯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말한 것인가?
이는 경주(經主)가 “[선심 중에서는] 마땅히 일곱 가지의 마음을 획득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고 힐난한 것과 같다.161) 그렇지만 유학과 무학은 다같이 무루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마음으로 전체적으로 설하여 ‘여섯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말하더라도 과실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진지(盡智)를 획득할 때 단박에 여섯 가지 마음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3계의 선심과 욕ㆍ색계의 무부무기심과 무루심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비록 다른 시간에 근거하여 역시 여섯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하였을지라도, 여기서는 단박에 획득한다는 사실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때(진지를 획득할 때)를 설한 것으로, 넓게 보면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의 게송의 뜻은 아니지만, 앞의 사실을 포섭하기 위해 다시 게송으로 설하겠다.
[하지에] 탁생(託生)할 때와 입정할 때
그리고 이염(離染)할 때와 거기서 물러날 때
속선위(續善位)에서 마음을 획득하니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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