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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멋들어지게 살아라
상원은 정말로 김 화백이 그린 진영 속에서 경봉스님의 사자후를 들었던 것일까. 과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혹시 낙담하고 있는 김 화백을 위로하기 위해서 상원이 지어낸 말은 아닐까. 그러나 김 화백은 상원의 진정성을 믿었다. 상원이 진영 속의 경봉스님을 가리켜 문수보살의 화현이라고 단언한 것을 보면 진영은 상원의 심혼에 불을 당겨주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문수보살이라 하면 수행자에게 등대 같은 존재이자, 신심을 거듭거듭 솟구치게 하는 지혜의 보살인 것이다.
김 화백은 섬진강 상류에 이르러 지프차를 멈추었다. 문득 작업실에 두고 온 오래 된 합죽선이 생각나서였다. 진영이 완성되고 난 후 명담스님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합죽선을 작업실에 놓고 온 것이다. 경봉스님에게 받은 합죽선의 화두가 어느 정도 풀어진 것도 김 화백의 마음을 여유롭게 했다.
寒梅吐紅古佛心 찬 매화가 고불의 마음처럼 붉음을 토하네.
일찍이 황벽선사가 ‘매서운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던들 매화가 어찌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라고 읊조렸던 것처럼 김 화백 자신이 바로 한매(寒梅)가 되어 살라는 경봉스님의 경책이기도 한 것이다.
명담스님이 얘기한대로 ‘진영을 그릴 때마다 합죽선을 보고서 경봉스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라’는 당부도 가능한 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경봉스님의 진영이 끝난 이제 그 합죽선은 김 화백에게 있어서 한낱 고승이 남긴 유물에 불과한 것이다.
김 화백은 길이 남원 방향과 구례읍으로 갈라지는 화엄사 나들목에서 지프차를 돌렸다. 그러면서 작업실에 또 하나 놓고 온 것을 떠올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로서는 행운의 편지 한 통이었지. 부산 보살이 보내준 편지도 명담스님에게 건네 드리자. 경봉스님을 그리는 나의 작업에 도움을 주고자 보살이 보낸 편지지만 이제는 극락암에서 보관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자애로운 경봉스님의 육성이 생생하게 담긴 편지이니까.’
김 화백이 편지를 받은 것은 지지난 새해 폭설이 며칠째 퍼붓던 두 번째 주였다. 진영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되어 번민으로 몸부림칠 때였다. 편지는 관념적인 지문으로 가득 찬 서술 방식의 문장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재현하고 있는, 마치 소설의 한 토막 같은 인상을 주는 장문의 글이었다. 부산 보살이 편지를 보낸 이유는 경봉스님의 진영을 그리는 김 화백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중요한 사건마다 날짜가 기록된 것을 보면 사실에 충실한 논픽션이라 해도 좋았다. 부산 보살이 보낸 편지의 첫 장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큰스님의 신통력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어 편지 내용을 대충 짐작케 했다. 김 화백이 몇 번이나 읽어 보았던 편지의 사연인즉 이러한 고백이었다.
1975년 음력 10월 3일.
가끔 서늘한 바람이 불어 가을볕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산문을 밖으로 흐르는 물소리도 어느새 차갑게 다가왔고,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랗고 붉은 낙엽이 우수수우수수 떨어져 산길을 덮어가고 있었다.
통도사 보광전에서는 경봉스님의 사형인 구하스님의 추모재가 열리고 있었다. 해제 철이었으므로 빈방이 된 보광선원은 재 지낼 상차림으로 통도사의 노보살과 젊은 보살들이 부산하게 들락거렸고, 선원 별실인 작은 방 밖에는 극락암에서 내려온 경봉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신도들이 줄을 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꺼번에 신도들이 몰릴까봐 시자스님과 보살 한 사람이 방문을 잡고 질서를 유지시키고 있었는데, 일곱 명씩 끊어서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순서를 기다리던 신도들은 경봉스님을 가리켜 ‘도인이시다’고 수군거렸다. 김 화백에게 편지를 보낸 그녀도 경봉스님을 친견하는 일이 처음이었으므로 약간은 어리둥절한 채 낯선 아주머니보살들 사이에 끼어 기다렸다.
이윽고 경봉스님을 친견할 차례가 된 갓 스물 살이 된 그녀는 낯선 아주머니보살들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 인사를 올리게 되었다. 보살들은 익숙하게 오체투지로 경봉스님에게 삼배를 올리고 있는데,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일행 중 다섯 번째에 서서 유가(儒家) 식으로 큰절을 시작했다.
경봉스님은 어린 그녀가 큰절하는 모습을 미소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나이 든 아주머니보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오체투지를 기계처럼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구하스님 재 지내러 왔다가 운 좋게 경봉스님을 친견한 것만도 집에 돌아가면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얘기꺼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절을 하고 일어서다가 경봉스님의 눈과 마주쳤다. 넓은 방에 탑처럼 우뚝 앉아 있는 경봉스님이 인자한 할아버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보통 할아버지와 다르게 스님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존귀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린 그녀는 두려운 생각 없이 경봉스님을 계속 쳐다보았다.
잠시 후, 경봉스님이 왼편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나이 든 아주머니보살에게 물었다.
“야, 누가 데리고 왔노?”
경봉스님은 대답이 없자 다시 물었다.
“이 아 엄마가 누고?”
보살들끼리 곁눈질하며 대답하라고 채근하는 사이에 노보살이 나섰다.
“스님, 애기보살 엄마는 못 오고 애기보살이 혼자 왔습니다. "
경봉스님은 다시 왼편 가장자리에 앉은 보살에게 말했다.
“추모재 지내고 공양 후에 야 데리고 극락암 내 방에 왔다 가라.”
“큰시님, 오늘 지는 시장일이 바빠서 극락암 갈 시간이 없십니더.”
경봉스님은 보살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말했다.
“이 아가 극락암을 모른다. 시장 일이 바빠도 다른 이한테 부탁하지 말고 야를 데리고 극락암 내 방으로 데려다 주고 부산 가거래이.”
“예”
그러나 경봉스님의 지시를 받은, 시장에서 가게를 하는 보살은 구하스님의 재가 끝나자마자 점심공양을 잽싸게 하더니 어린 보살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함께 온 일행들과 도망치듯 가버렸다.
“나는 니를 처음 보는데 너 엄마가 누고? 니 몇 살이고? 아직 시집 갈 나이도 아닌데 큰시님이 이상하시네. 너거 집이 큰 부자 가? 나는 시장 일이 바빠서 빨리 가봐야 된다. 너 극락암 큰시님 친견하고 싶으면 다음달 음력 초하루 날 너 엄마하고 함께 오너라.”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어린 그녀는 곧 경봉스님을 잊어버렸다. 얼떨결에 친견한 경봉스님의 인상이 뇌리에서 차츰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이후 6년이 흘렀다. 경봉스님을 다시 친견하게 된 것은 대구에 사는 신심이 깊은 선배 때문이었다. 그 선배는 유독 경봉스님을 친견하고 싶어 간절히 기도해 왔는데, 웬일인지 극락암에 혼자서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동행하자고 간청했던 것이다. 그녀는 선배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걸어서 통도사 경내를 지나 땀을 할 줄기 흘리며 극락암으로 따라 갔다.
흐드러지게 핀 옥잠화 향기가 극락암 마당에 은은하게 퍼져 있고, 극락암의 정적을 깨는 매미소리가 시끄러운 한여름이었다. 하안거를 해제한 지 얼마 안 된 호국선원에는 만행을 떠나지 않은 몇몇 선객들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고, 경봉스님은 자신을 찾아와 안거기간 동안 공부했던 바를 점검받고 싶은 선객들을 지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경봉스님을 시봉하는 칠보행 보살의 안내로 삼소굴로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칠보행 보살은 두 사람이 삼배를 올리고 나자, 경봉스님을 대신해서 앉으라고 말한 다음 자신도 한 자리 잡고 앉았다. 가부좌를 튼 경봉스님 앞에 세 사람이 앉게 되자, 작은 방이 더 좁아 보였다. 방벽과 천정은 장작불의 고래연기로 그슬려 누랬고, 보통사람보다 앉은키가 큰 경봉스님은 예전과 같이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물었다.
“니 어디서 왔노?”
“부산에서 왔십니더.”
“부산이 다 너거 집이가?”
“아닙니더.”
“그라먼 어데서 왔노? 부산 무슨 동에서 왔나 말이다.”
“예, 문현동에서 왔십니더.”
경봉스님은 같은 방법으로 대구 선배에게도 물었다.
“니는 어데서 왔노?”
“대구 대명동에서 왔십니더.”
“니 올해 몇 살이고?”
“스물 아홉입니더.”
“니는?”
“스물 여섯입니더.”
가부좌한 경봉스님이 가까이 오라고 하여 두 사람은 아이처럼 좋아라고 하며 스님의 무릎께까지 가서 앉았다. 경봉스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는 순간 어린 그녀의 눈에는 스님의 긴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손인데도 아기살갗처럼 하얗고 고왔다. 어린 그녀는 문득 스님의 손을 만져보고 싶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스님, 손이 너무 고와서 스님 손을 잡아보고 싶습니더.”
경봉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어린 그녀의 두 손바닥 위에 턱 얹어주며 말했다.
“옛다, 잡아봐라.”
그녀는 경봉스님의 오른손을 선배와 달리 겁도 없이 만졌다. 경봉스님이 다시 물었다.
“니 좋아하는 사람 없나?”
“예.”
경봉스님은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를 좋아하는 놈이 없나 말이다. 니 주위에 그놈아가 니를 많이 좋아한다. 니만 좋으면 따라 가거라.”
그녀는 대답을 못하고 경봉스님의 얼굴만 올려보았다.
“와 따라 가기 싫나?”
“.....”
“아무 소리 말고 따라 가거라. 그놈아가 니를 좋아한다. 그것도 많이 좋아한데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경봉스님을 도인이라고 실감했다. 그제야 경봉스님이 신기한 존재로 보였다.
“큰스님, 그래도 집에 이야기해서 부모 형제 허락도 받아야 하고.”
경봉스님은 슬며시 그녀에게 만지라고 했던 오른손을 들어올려 흔들며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니만 좋으면 따라 가거라.”
“스님, 제가 따라 가고 싶고,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비구니스님이라도 따라 갈까예?”
“니 방금 뭐라 했노?”
“스님, 제가 따라 가고 싶고,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비구니스님이라도 따라 갈까예?”
그러자 경봉스님은 얘기를 그만 하고 싶은 듯 화두 같은 말을 던졌다.
“구구는 팔십일이제?”
“예.”
“구구 팔십일을 알아라. 나 누워 잘란다.”
경봉스님은 바로 자리에 눕더니 이불을 펴서 덮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시봉하는 칠보행 보살이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손을 보더니 두 사람에게 ‘큰스님 주무시게 나가자’고 말했다.
경봉스님을 다시 친견하게 된 그녀는 점점 마음이 출가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고 말았다. 다음해 봄에는 절을 찾아가 출가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빌고자 기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찾아간 절의 비구스님은 출가하려는 그녀에게 재가에 남아 보살행을 할 것을 권유하며 극락암 경봉스님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경봉스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고, 열반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으니 어서 친견하고 오라며 재차 삼차 강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경봉스님도 자신의 출가를 만류하며 보살행을 권할 것이므로 극락암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당시 그녀는 출가의 인연이 없다면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극단의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병을 앓는 것처럼 번민하던 5월(음) 초이틀이었다. 그녀에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경봉스님의 신통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녀는 편지에서 경봉스님의 신통력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때 김 화백은 긴가민가하여 반신반의했다. 꿈도 아닌데 과연 그런 일이 실재할 수 있는지 경봉스님의 효상좌이자, 극락암 호국선원 선원장인 명담스님을 당장 찾아가 묻고 싶었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녀는 음력 5월 초이튿날 경봉스님이 자신의 집을 찾아왔다며 그 부분만 푸른 빛깔의 잉크로 표시해 놓고 있었다. 그것도 경봉스님이 노발대발한 모습으로 방문 앞에 우뚝 서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니 지금 뭐하고 있노? 당장 일어나 뒤 따라 오너라.” 그녀는 깜짝 놀라 경봉스님의 대답을 듣겠다기보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말았다.
“큰스님, 저희 집을 어떻게 아시고.”
“입 닫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속히 극락암으로 오너라. 한시가 급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경봉스님은 호통에 가까운 말을 던지고는 번갯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므로 그녀는 스님이 떠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경봉스님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가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몹시 놀란 채 극락암에 가지 않겠다는 고집을 접고 지갑만 챙겨든 채 택시를 불러 타고 달렸다. 벼락을 치듯 호통치고는 떠나버린 경봉스님을 좇아 허둥지둥 뒤따라갔던 것이다.
한두 시간이 흐른 정오 무렵에야 그녀는 극락암에 도착했다. 그러나 삼소굴은 이미 출입금지 구역이 돼 있었다. 승속을 불문하고 스님의 친견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며칠째 미질을 보이는 경봉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낯익은 칠보행 보살에게 통사정을 했다.
“큰스님께 삼배만 올리고 곧바로 나오겠십니더.” 칠
보행 보살은 사정사정하는 그녀를 애처롭게 여겼는지 특별히 허락했다.
“마침 시자스님이 큰절에 내려가셨는지 안 보이는구나. 시자스님이 아시는 날에는 큰일 난다. 시자스님 오시기 전에 얼른 들어가서 큰스님 기력 없어 말씀은 못하시니까 삼배만 올리고 나와라.” 경봉스님은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삼배를 하고 다시 반배를 하려 하자, 경봉스님이 어느새 눈을 뜨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더니 보살에게 몸을 일으켜달라고 한 후, 그녀의 부축을 받고 나서 근엄하게 가부좌를 틀었다.
“니 업장 소멸의 길을 떠나거라.”
“큰스님, 어디로 떠나면 되겠십니꺼?”
“어디라도 가서 49일 지장기도를 하거라. 니 죽어서 지내는 천도재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니 재를 올리라 말이다. 니가 태어나서 27년 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업을 참회하고, 이 몸뚱이 받기 이전의 생에 알게 모르게 지은 업을 참회하고, 과거 무시이래로부터 탐진치 삼업으로 인하여 지어 온 업을 참회하거라. 한시가 급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니가 업장을 소명하겠다는 49일 지장기도를 입재하면 내 즉시 입적에 드마. 49일 기도 중에 내가 열반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니 전생을 알기 전에는 니 있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라. 극락암 찾아올 생각하지 말고 신명을 바쳐야 한다.”
어디서 기력을 되찾았는지 한 마디 한 마디를 분명하게 집어가며 자신의 눈을 그녀에게 넣어주려는 듯한 자비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알겠나?”
“예.”
그녀는 앉은 자세로 합장한 채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어서 속히 떠나거라.”
그녀가 일어서서 반배를 하자 ‘어서 떠나라’며 손을 저었다. 그런데 그녀는 바로 지장기도처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을 했다. 업장소멸 기도처를 찾아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갔지만 마땅한 데를 정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서울 부근에서도 기도처를 정하지 못하고, 극락암 경봉스님을 찾아가 한 번 더 친견하든지, 친견이 안 되면 영축산 산내 암자들 가운데 한 곳에서 49일 지장기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부산을 내려가던 중이었다.
하행열차가 천안과 평택을 지나 조치원역에 정차한 후, 막 발차하려는 순간이었다. 예전에 부산 집에서 보았던 것처럼 또다시 경봉스님이 홀연히 나타나 천둥 같은 큰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니 지금 뭐하고 돌아다니노? 젊은 청춘에 요절하고 싶나. 어서 업장소멸기도 입재하거라. 한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
경봉스님이 그녀의 배를 툭 치고 사라진다 싶었는데, 갑자기 그녀는 열차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터져 나올 듯 아팠다.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팥죽처럼 흘렀다. 성하던 고막이 터질 것만 같은 통증 때문에 부산은커녕 대구도 못 가서 내려야 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대전역에서 내려 역전의 병원을 찾아가 응급조치를 받았다. 그리고 난 다음날에야 아는 비구니스님 절을 찾아 노스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하루를 쉴 수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1982년 음력 5월 26일 사시(巳時)에 대전의 그 비구니스님 절에서 업장소멸의 49일 지장기도를 입재하였다.
경봉스님은 당신이 예언한 그대로 그녀가 입재한 다음날 열반에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경봉스님의 열반을 알게 된 것은 6일이 지난 후였다. 절에 우송된 주간신문인 불교신문을 보던 기도스님이 그녀에게 달려와 어찌나 놀랐던지 말을 더듬거리며 알려주었던 것이다.
김 화백에게 보낸 그녀의 편지는 이밖에도 그녀가 지장기도를 회향하고 통도사로 달려가 경봉스님의 49재날 참석했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김 화백이 그녀의 편지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지금까지 버리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었던 이유는 극락암의 누군가가 경봉스님의 일생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편지의 내용은 김 화백이 스님의 진영을 그리는 데도 적잖은 영감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경봉스님을 그릴 때 극락암 선방의 대중들이 선호했던 것처럼 지혜를 주는 문수보살의 이미지에다, 편지를 보낸 그녀의 현생과 전생 업을 참회기도하게 한 지장보살의 자비로운 이미지까지 추가하여 그리게 했던 것이다.(계속)
제2장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10.멋들어지게 살아라
작업실로 돌아온 김 화백이 극락암을 다시 찾은 것은 봄이 다 지나가고 성하(盛夏)가 되어서였다. 시간은 굽이치는 강물처럼 네 달이나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김 화백이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와 <지리산 겨울>이란 제목의 이백호 대작에 몰두한 탓도 있었지만 계절은 단숨에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때 김 화백이 극락암행을 망설였던 것은 합죽선과 부산 보살의 편지를 챙겨놓고서 서두르고 있는 자신의 태도를 문득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환속하여 거사가 된 상원을 만남으로 해서 자신이 그린 경봉스님의 진영에 대한 미련도 버렸고, 합죽선과 부산 보살의 편지는 어느 때라도 명담스님에게 전해 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경봉스님이 열반한 제일(祭日)이 네 달쯤 후였으므로 경봉스님의 신위(神位) 전에 맑은 차라도 한 잔 올릴 겸 날짜를 맞추어 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 것이다.
심연처럼 항상 고요하던 극락암은 경봉스님이 곧 현신할 것처럼 활기가 넘쳤다. 보살들은 과일광주리를 들고 법당과 공양간을 오갔고, 스님들은 경봉스님을 흠모하여 외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하느라고 방마다 바빴다. 모처럼 방사의 댓돌에는 수행자들의 흰 고무신들이 넘쳐났다.
김 화백은 오후 내내 삼소굴 툇마루와 원광재 마루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저녁 공양 시간 후에야 원주스님의 안내로 명담스님을 면담할 수 있었다. 종일 손님을 맞이하느라고 약간은 지쳐 보이는 명담스님은 다관 속의 연둣빛 고운 찻잎을 퇴수 그릇에 쏟아내면서 말했다.
“삼소굴 노장님은 참배하셨습니까?”
삼소굴에 걸린 진영 속의 경봉스님을 친견했느냐는 물음이었다. 퇴수 그릇에 쏟아진 찻잎은 이미 우려진 것인데도 흐물흐물하지 않고 새잎처럼 싱싱했다. 김 화백은 퇴수 그릇에 버려진 찻잎을 감상하며 말했다.
“법당에만 들어갔다 왔습니다.”
명담스님이 묻는 말은 그뿐이었다. 그는 물을 끓이고 차를 달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분청의 작은 찻잔에 따르는 차 한 잔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진지한 표정 때문에 김 화백은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야 했다.
“손님이 많습니다. 이 숫자가 오늘밤 이곳에서 다 잡니까?”
“노장님이 열반하신 지 20여 년이 지났습니다만 지금도 노장님 제삿날을 잊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극락암에 올라옵니다. 잠잘 곳을 알고 온 사람들이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명담스님은 김 화백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아니냐는 표정으로 차를 따랐다. 그래서 김 화백은 자신이 극락암을 찾은 용건을 말하고자 바로 합죽선과 부산 보살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경봉스님께서 저에게 주신 합죽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 때가 되면 가져오겠다던 약속을 지키시는군요. 허나 김 화백님이 다시 가져가야 합니다. 노장님께서 주신 합죽선에는 반드시 오의(奧義)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받지 않겠습니다. 편지는 놓고 가십시오. 읽어보고 돌려드리겠습니다.”
김 화백이 난처해하자, 명담스님은 김 화백을 위로하듯 말했다.
“대신 삼소굴 진영 앞에 맑은 차 한 잔을 올리십시오. 촛불이 일렁이는 야반삼경에 노장님의 영가가 내려와 김 화백님께 무슨 얘기를 할지도 모릅니다.” “스님의 영가를 만나다니요.”
“노장님께서는 36세 때 촛불 춤을 보고 대오를 하셨음인지 저희 수좌 대중들에게 늘 화두 들고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부탁입니까?”
“제가 그린 스님의 진영에 맑은 차 한 잔을 올리면 안 되겠습니까?”
“하하하. 그야 안 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허나 늦었습니다. 두 달 전에 상원이가 와서 김 화백께서 그린 노장님의 진영을 가져갔습니다.”
명담스님이 우려낸 차맛은 아주 진했다. 극락암 대중들은 이를 소태처럼 짜다고 말하는데, 김 화백이 보기에는 다관에 한가득 찻잎을 넣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김 화백은 짜디짠 차를 마시다 말고 말했다.
“스님, 제가 그린 경봉스님의 진영 전에 차를 한 잔 올리고 싶었습니다만.”
“그래서 오늘 극락에 오셨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감은 없습니다.”
“상원에게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그래도 김 화백님을 직접 뵈니 진영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 것 같아 흐뭇합니다. 진영의 뜻이 그러하듯 김 화백님은 노장님 영정(影幀)을 통하여 참됨에 이른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장님께서도 그림을 그리되 그림에 걸리지 않는 김 화백님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실 겁니다. 불모가 그린 노장님의 진영을 삼소굴에 걸 수밖에 없는 저를 이해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스님께서는 경봉스님의 임종을 지켜보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 틀림없는 도인의 입적이었습니다. 저도 수행을 잘해서 저렇게 숨을 내려놓아야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열반이었습니다. 스님의 법구는 참으로 편안하게 누운 와불(臥佛)이었습니다.”
명담스님은 경봉스님의 입적 당시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길게 꺼냈다. 김 화백으로서는 처음으로 듣는 경봉스님의 열반 전후의 이야기였다. 명담스님은 입이 마르는지 자꾸 차를 우려내 혀와 목을 적셨다. 때로는 신선한 솔바람을 불러들이려는 듯 창을 열었다가 닫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력이 깊은 선사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데, 경봉도 마찬가지였다. 선사들은 죽음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삶의 일부로 생각하여 몇 년 혹은 며칠 후에 갈 것이니 그리 알라는 식인 것이다.
또한, 선사들에게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 옳았다. 그래서 선사들은 죽음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맑은 차 한 잔 마시듯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이승의 헌옷을 버리고 내생의 새 옷을 갈아입는 것이므로 삶의 종작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또 다른 삶으로 ‘돌아가는’ 행위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처 이래 옛 선사들은 죽음이 두렵기는커녕 죽음을 목전에 두고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잣거리의 세인들은 네 가지의 큰 의혹 속에서 살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경봉이 지효(智曉)의 간청에 의해 범어사에서 영남지방의 신도들에게 설법하면서도 그 점을 강조하여 말했던 것이다. 수행을 통해서만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네 가지 큰 의혹이란 이를 테면 다음과 같았다.
자기를 모르는 것
온 곳을 모르는 것
가는 곳을 모르는 것
죽는 날을 모르는 것.
경봉이 세상과의 인연이 다해가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것은 75세 때의 일이었다. 봄비가 내릴 듯 말 듯한 흐린 날 아침이었다. 벚꽃은 이미 극락암 마당가 그늘에 눈처럼 떨어져 쌓였고, 경봉의 허락을 받은 비구니 삼현(三玄)과 무착(無着), 그리고 재가의 보살 제자들은 경봉의 수의를 짓고 있었다.
삼현은 범어사 대성암의 비구니 선객인 만성(萬性)의 상좌였는데, 팔방미인으로 무슨 일이든 손에 주어지면 척척 해내고야 마는 만능의 비구니였다. 그래서 경봉은 삼현을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감자수좌라고 불렀다. 경봉은 삼현을 극락암으로 보내어 자잘한 일손을 도와주게 한 만성에게 ‘삼현은 감자수좌라 버릴 게 하나도 없는데, 버릴 게 있다면 방구와 하품’이라는 농담 섞인 고마움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자 비구니 선객 만성은 게송으로 된 편지를 보내왔다.
장마에 심심하십니까?
감자 넣은 송편을 많이 자십시오
백일대적(白日大敵)은 남의 집 살림을 엿봐요
손뼉 치고 하하하.
아무튼 삼현이 극락암에 와서 경봉 자신의 수의를 짓던 날, 경봉은 <삼소굴 일지>에도 무상(無常)의 허허로움이 짙게 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4월 22일 금요일 흐림.
작년에 부산 제자 이대각심(李大覺心)이 나의 수의를 지으려고 지원을 해서 옷감을 비구니 삼현에게 주었는데, 이 달이 윤달이라고 오늘 지었다. 삼현과 서울 김백초성(金百草性) 외 3인, 허법왕화(許法王華) 외 1인, 비구니 무착(無着) 외 1인 등이 모여서 오전에 다 지었다.
의복이라도 수의라고 칭하게 되니 대중의 마음도 이상하게 섭섭한 감이 든다 하고, 나도 생각에 본래 거래생멸(去來生滅)이 없지만 세상 인연이 다해 가는 모양이니 무상의 감이 더욱 느껴진다. 금년 병오년에서 무진년(경봉이 극락암에서 확철대오한 해)을 계산하면 39년간인데 그동안 부고를 타인에게서 받은 것을 대략 쳐보니 6백 40여 명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한번 가곤 소식이 없구나.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古佛也恁마去
今佛也恁마去
來耶去耶
靑山立 流水去
何者非 何者是 돌
夜半三更見燭舞
이후, 무상의 그림자는 경봉의 주변을 더욱 또렷하게 어른거린다. 역시 <삼소굴 일지>에 기록된 글이지만 수의를 지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나 경봉은 새벽예불을 마친 뒤, 삼소굴로 돌아와 잠깐 조는 사이에 토막 꿈을 꾼다. 꿈의 시제는 과거와 미래가 한 데 엉켜 있었다. 꿈속에서 경봉은 무봉사에서 함께 정진했던 사판승 대월과 한 방에 앉아 있었다. 대월은 그때 무봉산 기슭에 사명당 동상 건립을 위해 불철주야로 노심초사하고 있었고, 경봉은 그의 뜻에 동조하여 마음을 보태주었던 것이다.
꿈속에서 책상 위에는 검은 망건을 쓴 사람이 네 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내려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먼저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경봉이 따져 묻지는 않았지만 먼저 갈 사람은 대월을 지칭하는 듯했다.
경봉은 망건 쓴 그 사람을 병풍 뒤로 따라가 은밀하게 물었다. “나는 몇 살에 가겠소?” “그대는 90을 넘기겠소.” 경봉은 꿈에서 깨어나 저승사자와 대화를 나눈 것이 씁쓸하여 미소를 지었다. 대월이 못내 마음에 걸렸으므로 시자를 불러 이른 아침인데도 차를 달이게 했다. 그럴 때 한 잔의 그윽한 차야말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관조하게 하는 방편인 것이었다.
경봉은 차향을 맡으며 꿈속의 저승사자가 바로 마음 안의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자기 자신과 묻고 답한 셈이었다. ‘나는 몇 살에 가겠소?’ 하고 물은 사람도 경봉 자신이었고, ‘90은 넘기겠소.’ 한 사람도 경봉 자신이었던 것이다.
훗날, 15년이 지난 1982년 7월17일(음력 5월 27일).
경봉의 예언은 놀라울 정도로 적중했다. 경봉이 심은 극락영지의 붉고 흰 연꽃들이 다투어 만발한 여름날이었다. 새아기 살갗 냄새 같은 연꽃향기가 바람결에 삼소굴 방안에까지 밀려오고 있는 순간이었다. 경봉은 일찍이 그 자신이 꿈속에서 묻고 답한 대로 91세가 되던 그해 여름날에 숨을 거둬들였던 것이다.
열반에 들기 며칠 전부터 경봉은 벼루와 모지랑붓을 머리맡에 놓은 채 미질을 보였고, 시자(侍者)와 승속의 제자들은 극락암에 모여 밤을 새우고 있던 중이었다. 특히 시자는 기력이 떨어진 경봉의 곁을 한시도 뜨지 않고 수발을 들었는데, 열반일 오후가 되어 노사의 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직감하고 다급하게 물었다고 한다.
“스님, 가신 뒤에도 뵙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 모습입니까?”
경봉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나직이 말하였다. 옹달샘 물이 넘쳐흐르는 듯한 작은 소리였지만 시자의 가슴을 강물처럼 절절하게 적시는 유훈이었다.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짧게 한 마디를 남긴 경봉은 바로 대문의 빗장을 잠그듯 원적(圓寂)의 문 안으로 들어 가버렸다. 삼소굴의 벽시계는 오후 4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동안 방안의 스님들은 눈을 감고 합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경봉의 입은 굳게 닫혔으나 그 닫힌 입에서 한 줄기 법문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임종을 지키던 그들은 편안한 모습으로 열반에 든 경봉노사의 ‘열반의 법문’을 듣고 있었다.
번뇌의 불이 완전히 소멸한 열반의 법문.
그것은 죽음이란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지극히 안락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경봉의 메마른 입술에 불빛이 반사되어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듯도 했다. 비로소 시자들은 하나 둘 눈가에 눈물을 비쳤다. 막막하여 슬프기도 했지만 자신도 저렇게 도인이 되겠다는 신심이 해일처럼 가슴을 휘젓고 있기 때문이었다.
열반 후에도 경봉은 대중들의 가슴을 사무치게 했다. ‘내가 입적한 뒤에 크게 놀랄 일이 있을 것이다’고 했는데, 열반한 지 5일 만이었다. 통도사 연화대 다비장에 놓인 법구에 거화(擧火)한 지 1시간 50분이 지나서였다. 법구를 태우는 불꽃이 맹렬한 기세로 막 치솟을 무렵, 영축산 허공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세상은 장막을 두른 것처럼 어두워져버렸다. 그러더니 회오리바람의 광풍이 머리채를 잡아채듯 다비장 주위의 나뭇가지들을 뒤흔들었다. 생가지가 찢어지고 산 잎이 우수수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뒤이어 뇌성벽력이 쳐댔고 소낙비가 숨을 제대로 못 쉬게 한동안 쏟아져 내렸다. 단숨에 통도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모든 천이 콸콸 넘쳐흘렀다.
부산과 대구에서 달려온 조문객들에게는 불청객 같은 광풍과 소낙비였다. 그러나 경봉을 도인이라고 따르던 무지렁이 농부들에게는 오랜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였다. 조문객들은 소낙비가 멈추고 나서야 ‘큰스님의 자비가 내린다’고 법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합장했다.
다비가 끝나고 한 줌의 재마저 식어버리자, 문도들은 경봉의 가풍에 따라 사리를 줍지 않았다. 다비장에 모여든 제자들은 평소 경봉의 천도 법문을 다시 떠올릴 뿐이었다.
<오는 것도 걸림 없고 가는 것도 걸림 없으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둘 다 갈팡질팡함이 없도다. 이미 오고 감이 없으니 죽고 사는 것이 본래 없도다. 활연히 알겠느냐?
물은 흘러서 원래 바다로 가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네
참으로 돌아가는 곳을 알려는가
가을바람의 맑은 달 가네 할 일할
水流元去海
月落不離天
欲識眞歸處
秋風霽月邊 喝 一喝>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 달이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듯 경봉의 혼백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사리를 줍는 일도 부질없는 짓이 아닐 것인가. 입적 뒤에도 당신을 만나고 싶거든 스님의 유언대로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스님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한밤에도 졸지 않고 늘 깨어 용맹 정진하는 그 자리에 당신이 있겠다는 약속일 터였다.
경봉의 입적에서 49재를 치르는 동안 통도사 산문 밖에서부터 줄을 지어 참배하는 조문객들은 1백만 명을 넘어섰다. 그들은 출가 수행자가 되어 75년 동안 도(道)를 참으로 멋들어지게 굴리고 살았던 경봉의 덕화(德化)가 얼마나 큰지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중생이자 부처들이었다.
명담스님과 차를 여섯 잔째 마시고 난 후였다. 김 화백은 명담스님이 찻잔을 물에 씻는 것을 보고 원광제 방을 나왔다. 다기를 헹구는 것은 김 화백과의 찻자리를 접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긴 경봉스님의 재를 지낸 재주(齋主)인 명담스님에게 더 들을 얘기도 없었다.
김 화백은 극락영지 너머에 있는 해우소를 들렀다가 삼소굴로 갔다. 삼소굴은 모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불모가 그린 경봉스님의 진영에 참배하려는 신도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김 화백은 경봉스님의 진영 앞으로 나아가 삼배를 올렸다. 진영 앞의 촛대에서는 촛불이 방안에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김 화백은 방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예전에 극락암을 찾아와 삼소굴에서 하룻밤을 보낸 날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그때처럼 경봉스님의 가사 장삼 속으로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서너 시간이 한 순간에 지나가버렸다. 차츰 신도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더니 야반삼경이 되니까 인기척마저 사라졌다.
그때 김 화백은 일렁이는 촛불 춤의 오의(奧義) 속으로 빠져 들었다. 경봉스님을 친견한 듯한 희열이 일었다. 김 화백은 소리 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빛을 던지며 자신을 태우는 저 촛불이 바로 경봉스님이다. 자신을 태우면서도 흥에 겨워 춤추는 저 멋들어진 촛불 춤이야말로 경봉스님의 삶이 아닐 것인가.’
삼소굴 뒤편에서 창호에 모래를 흩뿌리는 것처럼 파도소리가 쏴아쏴아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밤바다의 파도소리가 아니라 영축산의 솔바람소리였다. 소나무와 바람이 하나 되어 들려오는 송도활성(松濤活聲)이었다. 김 화백은 삼소굴의 방문이 푸른빛으로 젖어 올 때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김 화백으로서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뜻밖의 하룻밤 용맹정진이었다.
선계(仙界)가 따로 있고 선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나 삼매에 드는 자리가 선계요 선방이었다. 솔바람의 변주 속에서 휘파람새가 노래하고 촛불이 춤을 추는 삼소굴이 바로 극락이었다.<끝>
“집필 끝내고 나니 경봉스님이 더 그립다”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추어라』 작가 정 찬 주 씨
『산은 산 물은 물』의 작가 정찬주 씨가 오랜 만에 큰스님을 모시고 독자들에게 돌아왔다. 올해로 입적 25주기를 맞는 경봉 큰스님이 정찬주 씨의 필봉을 주장자 삼아 성큼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 최근 경봉 큰스님 이야기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를 출간하고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작가 정찬주 씨는 “취재와 집필에 걸린 꼬박 5년 동안 경봉 스님의 가풍에 푹 빠져 있었다”며 “당분간은 이 향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스님에 대한 깊은 여운을 전했다.
근대 스님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성철 스님 이후 처음이다. 특별히 경봉 스님의 일대기를 소재로 집필하게 된 이유는.
전국의 선원장 스님이나 큰스님들을 만날때마다 경봉 스님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특히 경봉 스님을 ‘자비의 화신’으로 추앙하는 모습을 보며 경봉 스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경봉 스님을 생전에 뵈었던 신도분들, 특히 극람심 할머니(2005년 봄 타계)를 통해 전해들은 스님의 생생한 일화를 듣고 집필을 결심했다. 특히 통도사 극락암 선원장 명정 스님이 경봉 스님께서 만해, 용성, 혜월, 효봉, 한암, 청담, 구산 스님 등과 주고받은 서간문을 보여주셔서 큰 도움이 됐다. 취재에 3년, 집필에 2년이 소요됐으니 다른 작품에 비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오랜 시간 준비하며 특별히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무엇인가.
고승을 소재로 한 구도소설에서는 그 스님의 가풍이 무엇인가가 화두다. 그 화두를 풀어야만 한 스님의 모습을 바르게 그려낼 수 있다. 경봉 스님의 가풍은 화엄의 바다라 할 만큼, 불학, 참선, 염불, 기도, 다도 등이 모두 참으로 깊고 넓다. 이러한 가풍은 가히 통불교라할만하다는 점에서 원효 스님과 비슷하다. 나는 경봉 스님이 원효 스님의 통불교적인 가풍을 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로서 접한 경봉 스님은 어떤 분인가.
성철 스님이 지혜를 주신 문수보살 같았다면 경봉은 자비가 무엇인지 알려준 관세음보살 같은 분이다. 경봉 스님은 남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극락암을 찾아오는 이에게 따뜻한 차 한잔과 법문을 주셨다. 마치 인자하신 할아버지 같은 분이다.
이 소설은 어디 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만큼이 소설적 허구인가. 소설속의 화자 김 화백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하는 허구적 인물이다. 하지만 가장 주요한 것은 스님의 인품과 수행을 작품 속에서 훼손되지 않도록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Fact)인 소재를 허구(fiction)의 구성에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팩션(Faction) 소설로 불린다. 명정 스님이 추천사를 통해 “경봉 노사를 다시 뵌 듯 하다”고 하셨으니 작가로서는 가장 기분 좋은 평가다.
현대인에게 경봉 스님은 어떤 의미인가
수행자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해 살아가야할 사람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녀야할 도덕적 덕목을 사람들은 수행자를 통해 발견하게 된다. 경봉 스님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렸던 인간의 덕목을 되찾을 수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요즘 세상을 보면 얼마 못 가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이 위태롭지만 경봉 스님과 같은 분들이 실제로 이 땅에 살아계셨기 때문에 아직 세상은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봉 스님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수행의 목적은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열반경』에도 자비심이 곧 여래라 하지 않았는가. 깨친 후에도 따뜻한 수행자가 못된다면 그것도 큰 문제다. 경봉 스님은 대도를 성취할 때 까지 누구 못지않게 치열한 수행을 했고 도를 성취한 다음에는 당신이 깨달은 바를 중생에게 철저히 회향하셨다. 스님이 존경스럽고 더없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