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경쾌하고 깔끔하며 달콤하면서 성숙하다. ‘시라노 연애조작단’(9월16일 개봉)은 유난히 독한 영화들이 많았던 올 극장가에서 유달리 산뜻하다. 지독한 폭염과 지겨운 장마 뒤에 불어오는 한줄기 산들바람. 마침내 가을인가 보다.
병훈(엄태웅)은 민영(박신혜) 철빈(박철민) 재필(전아민)과 함께 ‘시라노 에이전시’를 운영한다. 이 회사는 사랑에 서투른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연애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곳. 그러던 어느 날 병훈은 펀드 매니저인 상용(최다니엘)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서 내민 상대 여성 희중(이민정)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오랫동안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던 충무로 로맨틱 코미디의 부활을 선언하는 수작이다. 그간 재능과 성취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어온 김현석 감독은 ‘YMCA 야구단’으로 데뷔한 후 ‘광식이 동생 광태’와 ‘스카우트’를 거쳐 ‘시라노 연애조작단’까지 이르면서 점점 더 흥미롭게 작품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16년 전 썼던 시나리오를 토대로 완성한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김현석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과 정점을 함께 보여준다.
김현석 감독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결국 중요한 것이 작은 디테일이나 소소한 리듬이라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누군가 겪었을 법한 사랑의 소담스럽거나 소슬한 삽화들이 맛깔진 대사와 능숙한 연출에 힘입어 탄력있게 살아 있다. 장면에 따라 과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 전혀 없진 않지만, 김우형 촬영 감독의 카메라는 시종 유려한 터치로 김현석의 작품에 이전엔 찾기 힘들었던 세련미를 부여했다. (카페 안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음악이 격발하는 추억을 카메라가 길어올리는 듯한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따뜻하게 가라앉은 색감은 우아하고, 적절한 스피드를 갖춘 편집은 쫄깃하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진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모티브를 현대적으로 재치있게 변용했다. 각종 연애 기술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흡사 케이퍼 무비(경쾌한 범죄영화)를 보는 듯 날렵하게 표현됐다. 극중 연애조작단의 활동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드는 방식에 대해 언급하는 듯한 내용으로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이 장르 자체에 대한 일종의 메타 영화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차이에 대해 재치있게 요약하는 잠언 같은 대사들을 접하는 재미도 상당하다. (다만 이 영화의 종반부는 불필요하게 길고 부적절하게 과장됐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아쉬움을 남긴다.)
로맨틱 코미디는 여성 관객들에게 좀더 위력적인 장르다. 하지만 김현석의 로맨틱 코미디는 결국 남성 관객들에게 훨씬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떠나간 옛 사랑과 다가오는 새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그의 남자 주인공들은 연애에 대한 무능력을 드러내며 뒤늦게 탄식한다. (반면에 당당하지만 대상화된 여성 캐릭터들은 상대적으로 생기가 덜하다.) 게다가 ‘스카우트’나 ‘시라노 연애조작단’처럼 남자의 죄책감에 토대한 최근작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잘못뿐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실수에 대해서까지도 사과하고 싶어한다. 기본적으로 사랑에 실패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김현석의 연애 영화들에서 (조금 늦었더라도) 적절하게 마침표를 찍는 것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배우들은 장르에 잘 어울리는 사랑스러움으로 호연했다. 최다니엘은 다양한 매력을 발산하며 스크린 안착에 성공했고, 엄태웅은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며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이민정은 로맨틱 코미디의 판타지를 제대로 체현했고, 박신혜는 성실한 연기로 극에 입체감을 만들었다. 그리고 박철민과 김지영은 뛰어난 코미디 연기로 영화를 든든하게 떠받쳤다.
따지고 보면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그렇게 달콤한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에이전시에 지불해야 할 적지 않은 돈이 있어야 하고, 반복 연습을 해서라도 습득해야 할 기술이 있어야 하며, 상대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력까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니까.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 모든 것에 최후의 불을 당기는 것은 진심이라고 끝내 강조한다. 혹시 이것은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한 영화라면 지켜낼 수밖에 없는 습관적 판타지인 것일까. 하지만 결국 사랑을 열매 맺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랑에 산소를 공급하는) 판타지와 (그 사랑을 반복적으로 현실화하는) 습관의 상호작용이 아닌가.
첫댓글 시라노 연애 조작단....만약에 정말 존재한다면 저도 가서 한 번 부탁해볼까요?뭐 물론 농담입니다만, 혹시나 성공하면 ...핫..
연애를 조작한다라... 정말 매력있네여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고 쉽게생각하면 쉬워지는것이 연애라고생각합니다
영화밖에선 과연 일어날수있는 일일까요..? 고민해볼필요가있네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