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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23
제15장. 사나운 모래를 불어 다 걸러내야 비로소 황금이 나타나리라 (吹盡狂沙始到金)
왕춘생王春生
래불사는 풍부한 역사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사원입니다. 문화대혁명 전에는 사원의 건축은 웅장한 기세와 위엄이 있었고 대단히 장엄하였습니다. 삼존석불三尊石佛은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모두 그 명성이 알려졌으며, 뜰 안의 비석이 숲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천년이나 된 송백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건국 초기에는 다른 여러 국가의 지도자들과 해방군장령들이 래불사를 참관하러 온 적도 있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당시에 주지이셨던 인장印藏법사께서 필양현(泌陽縣: 당시에는 사기현이 아직 성립되지 않았음)의 불교계 대표로서 중국불교협회에서 개최한 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주덕朱德 위원장이 친히 인장법사를 접견接見해주었으며, 또한 군대최고지휘관들과 단체사진을 찍은 적도 있으십니다.(문화혁명기간 중에 훼손되었음)
대흑노화상 역시 래불사에서 2, 3년 동안 지내신 적이 있으십니다. 구체적인 시간은 제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역시 건국 후의 전반의 몇 년입니다. 대흑노화상은 해현노화상의 사형이시며, 두 분의 관계는 대단히 좋으셨습니다. 그 당시 저희들은 하루 종일 대흑노화상께 달라붙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으며, 진실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구변이 매우 뛰어나신 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뜰의 석판石版 위에 가부좌를 하시면 저희들은 빙 둘러서 대흑노화상께서 전대前代의 왕조와 항일전쟁 시기의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흑노화상께서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저희들이 빙 둘러서서 한창 노화상께서 해주시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때, 사원 담 밖에서 무슨 움직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저희들이 말씀드리길, “혹 어떤 손님이 온 것은 아닐까요?” 그러자 대흑노화상께서 말씀하시길, “그를 상관할 필요 없다.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면서 머리 깎아주는 이발사가 이 앞을 지나가는 소리이다.” 그 말을 듣고서 산문 밖을 뛰어나가 보면, 정말로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였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들 노화상께 탄복하여 오체투지하였습니다.
어느 해인가 정월 초하루 이른 아침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래불사에 와서 향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대웅전에서 둥근 모양의 불덩어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동남쪽을 향해 날아갈수록 더욱 멀리 갔습니다. 한참을 지난 후, 그 불덩어리는 또 다시 날아와서는 대웅전 문 앞에 이르러서는 사라졌습니다. 이 일은 저와 나이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이어서 바로 또 기이한 일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한 번은 석가모니불 석상의 손바닥에서 젓가락 크기 만한 작은 뱀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러자 당가사當家師가 보온 솜 덮개로 입구 둘레에 씌워놓은 구리 차 주전자 안에 그 뱀을 넣었습니다. 병자가 있는 집안의 사람이 종이 포장 하나 접어서 작은 뱀에게 약초를 구하면, 그 결과 정말로 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에 당가사가 차 주전자를 열어 보았을 때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주):당가사: 주지스님
또 1966년 정월 초하루, 삼존석불께서 온몸의 위아래에서 밖으로 땀을 내뿜었습니다. 노거사들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면 그 즉시 다시 온몸에서 땀이 났으며, 땀을 닦아낸 손수건을 비틀어 짤 때마다 계속해서 물이 나왔으며, 한 그릇에 받고 또 한 그릇에 계속해서 받아내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원래 이것은 불보살님께서 중생들에게 경각하라고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래불사는 문화혁명시기에 완전히 훼손당하여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텅 빈 벌판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삼존석불 또한 넘어뜨려 때려 부수었으며, 사원의 나무조차도 몽땅 다 베어버려 아무 것도 없게 하였습니다. 사원의 스승님들께서는 모두 생산대에 배치를 받아 노동하셨으며, 해경법사는 당시에 바로 그 속에 계셨습니다. 오로지 시달림과 핍박을 받으면서 노동일만 한다는 것은 정말로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며, 그때에는 걸핏하면 사람들에게 고깔모자(高帽子)를 쓰게 하고서 그들을 끌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투쟁하게 하였습니다(遊鬥) 지금 저희들이 비록 경공의 성취가 이렇게 수승하심을 보고 있지만, 그 어르신께서 얼마나 많은 모욕을 당하고 얼마나 많은 매를 맞고 욕설을 먹었는지 어느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주) 고깔모자(高帽子) :중국에서 계급투쟁 중에 지주 등에게 씌웠던 모자
(주) 遊鬥:문화대혁명 때 죄인을 앞세우고 거리로 다니며 투쟁하게 한 것을 말한다.
1976년 말, 해현노화상은 동백산에서 경공을 보기 위해 저희 마을에 오셨으며, 해원법사가 북경에서 보낸 서신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서신에는 문혁은 이미 끝났으며, 종교에 대한 정책 또한 곧 개방될 것이니, 무너지고 훼손된 도량을 회복시킬 준비를 해도 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들은 후 모두 기분이 대단히 흥분되고 고조되었으며, 그 즉시 당장 래불사를 회복시키는 사업을 계획하여 실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통신이 아직은 매우 낙후하였고, 게다가 저희 이곳은 구석지고 폐쇄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의 새로운 정책을 제때에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량을 중건하는 과정 중에 어려움이 첩첩산중이었습니다.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고 나서야 겨우 마침내 동쪽 건물에 몇 칸의 풀로 엮은 방을 세웠습니다. 불보살의 소상塑像이 없어서 그 즉시 화가에게 청해 흰 무명 위에 삼성상三聖像을 한 폭 그렸습니다.
이 일을 할 때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당시에 제 아내가 하루 종일 병이 나서 여러 의사들에게 보였지만 병이 도무지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하길, “하루 종일 사원을 호지하면서 어째서 아내를 사원에 데리고 가서 보살님께 좀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가?” 그의 말을 듣고서 저는 아내를 데리고 삼성상 앞에 가서 참배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내가 무릎을 꿇자마자, 말하길, “저는 병이 다 나았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고서 일어난 후로 아무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이웃 마을에 역시 의사가 진단하기 쉽지 않는 병을 얻은 어떤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제 아내가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나서 병이 다 나았다는 말을 듣고서 그 부인 역시 제 아내가 한 대로 그대로 따라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무릎을 꿇은 후 마침내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 사람들이 그 부인을 일어나도록 부축하였지만 결국에는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부인이 혼자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그 부인이 말하길, 자신은 천주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며, 이곳에 온 것은 단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일 뿐이지, 결코 불법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그 부인은 스스로 진심으로 신복信服하게 되었으며, 사람들에게 “반드시 불보살님에 대해 진정한 공경심이 있어야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자동차가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전거를 타고 동백산에 가서 해현노화상님께 래불사에 오셔서 도량을 주지해주실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현공께서는 자신은 때마침 탑원사의 원래 모습으로 회복하려고 준비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네 분의 제자를 먼저 래불사에 보내어 상주하게 하였으며, 현공은 단지 이따금 오셔서 잠시 머무셨을 뿐이었습니다. 노화상은 남을 번거롭게 하고 불편을 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탑원사는 래불사와 거리가 대략 120이나 130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 어르신은 언제나 늘 그 먼 길을 걸어서 오셨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도 노화상께서 젊은 사람처럼 몸이 건강하셨을지라도, 그렇다고 해도 어째든 이미 일흔이 훨씬 넘으신 노인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노화상께 말씀드리길, “스승님, 혼자서 걸어오시지 마세요. 어느 때라도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스승님을 찾으면 그때 오십시요.”
그 후로 저희들은 많은 힘든 역경과 고생을 겪으면서 사원을 위해 7,8무畝의 땅을 회수하여 북쪽 건물에 몇 칸의 방을 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대전(大殿)입니다. 현공께서 래불사에 오셔서 상주하신 때는 분명히 1981년일 것입니다.
(주)무畝:중국의 토지단위
저는 대략 1981년 가을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경작지에 밀을 심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으며, 저는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원에 들렀는데, 현공과 경공 두 분이 그때 마침 들에서 분주하게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분은 쇠스랑을 잡고서 흙을 파내고 계셨고, 한 분은 삽을 잡고서 땅을 파고 계셨습니다. 저는 두 분이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특히 괴로워 당장 그만하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현공께서 말씀하시길, “이쪽에서 서둘러 땅을 뒤집어엎지 않으면, 저들이 저쪽에서 밀을 심는 일에 지장을 주게 돼.” 저는 현공에게 불평하며 말씀드리길, “두 분께서 어떤 일이고 하실 일이 있으시면 저를 찾으세요. 제가 어떻게 두 어르신께서 이렇게 힘든 일을 하시도록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현공께서 말씀하시길, “자네 또한 남인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네를 귀찮게 할 순 없지.” 제가 말씀드리길, “스승님께서는 이후로는 다시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저를 찾아야 합니다. 저는 제 일을 잠시 저쪽에 방치해둘지라도 먼저 스승님을 위해 일을 한 다음 제 일을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앞장서서 스승님을 이곳에 오시게 청하였다는 것을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는데, 결국에는 스승님을 이곳에 오시라고 하고서 힘들게 고생만 하시도록 시킨 꼴이 되게 한다면, 저 이 호법이 어찌 면목이 서겠습니까? 두 어르신 중 어느 분도 다시는 땅을 파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으며, 제가 당장 집에 가서 소를 끌고 와서 땅을 갈겠습니다.”
경공의 인품은 특히 너그럽고 인정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중에 누구에게 일이 있건 상관치 않고서 언제나 마음과 힘을 다해 끝까지 도와주셨습니다. 만약 근면과 검소를 논한다면, 경공은 해현노화상보다 절대 못하지 않으십니다. 그 시절에는 도로가 아직은 전부 흙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한번 내리기라도 하면 흙길이 금방 차바퀴에 뭉개져서 엉망진창이 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경공께서 삽을 들고 길을 보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경공께서는 쓸데없는 말씀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며, 더욱이 스스로 자신이 행하신 공로를 자랑할 줄 모르셨습니다. 만약 일을 마치고 돌아온 시간이 늦었으면 남아 있는 식은 밥을 드셨으며, 어느 때에는 남아 있는 식은 밥조차 없으면 찐빵을 조금 드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 당시의 향鄕정부지도자들은 모두 경공에게 감동하여 회의를 열 때 전국의 향鄕 당원간부들에게 모두 래불사의 해경스승님을 배울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주)향鄕:중국 행정 구역 단위의 하나로 ‘縣’아래에 해당
사원은 이전에는 대단히 청빈하였습니다! 그래서 불보살님의 탄신일과 같은 향절香節이 다가와 만약 사원에 사람들이 많이 오면, 어쩔 수 없이 마을에 가서 바닥에 깔 요와 덮을 이불을 빌려야 했습니다. 경공은 왕생하실 때조차 제대로 된 승포僧袍가 한 벌도 없으셨습니다. 특히 우매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항상 사원에서 소란을 피우면서 요행히 보존하고 있었던 진귀한 문물을 여러 개 훔쳐갔으며, 밭가는 소 역시 훔쳐 갔고, 공덕상자의 자물쇠를 강제로 비틀어 연 것이 몇 번이지를 알지 못합니다. 현공께서 래불사에서 상주하시는 동안 그야말로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다 겪으신 것을 일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거의 십 몇 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이러한 고생에서 벗어나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로 하자면 이 또한 중생의 복덕의 보응입니다. 경공께서는 원만하게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육신을 남기셨으니, 이것이 나타내는 교육적 의의는 매우 큽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약간 해프닝이 벌어진 적도 있습니다. 대략 2000년을 전후하여, 남방에 산다는 몇 사람이 사원에 와서 해현노화상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노화상과 상의하며, 래불사가 너무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은 육신보살을 너무 섭섭하게 하는 일이라 말하면서, 그들은 사원에 5만원(인민폐)을 건네주고서 경공의 육신을 남방의 큰 사원으로 모시고 가서 공양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현공은 대단히 지혜가 있으신 분입니다! 현공은 그들에게 직접 거절하지 않으시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난 처음부터 이 사원에 있던 사람이 아니어서 이 일은 내 마음대로 주관할 수 없소. 그러니 당신들은 마을에 가서 왕춘생거사를 찾으시요. 사원은 그가 주관하여 중건한 것이니, 당신들은 그쪽과 상의해야 할 것이요.” 이 몇 사람은 정말로 노화상의 말씀대로 저와 상의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대답하길, “사원에 5만원(인민폐)을 주겠다고 말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설사 백 원짜리로 가득 채운 저 세 칸 기차를 끌고 와서 우리에게 주어 래불사의 전당을 순금으로 만들게 해준다고 해도, 우리는 경공의 육신을 당신들에게 넘겨드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요. …… ” 후에 또 몇 차례 이와 비슷한 우스운 일들이 벌어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지법사가 이곳의 절 살림을 맡으신 후, 저는 인지법사에게 반드시 경공의 육신을 잘 지켜야 하며, 이러한 파렴치한들이 훔쳐가는 일이 있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되며, 만약 경공의 육신을 잃어버리게 한다면, 사람들이 분명히 인지법사가 경공을 팔아먹었다고 말할 것이며, 거사들이 인지법사를 용서할 리가 없을 것이라고 각성시켰습니다. 참으로 인지법사께 준 정신적 부담이 너무나 큽니다.
지금 정공노법사께서 경전을 강설하실 때 래불사에 대해 언급하심으로 인해 래불사의 이름이 금방 삽시간에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인지법사는 사고가 매우 분명하고 깨어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는 말하길, “이것은 바로 이전 사람들이 말씀하신 ‘앞사람이 나무를 심으면 그 뒤의 사람이 그 나무 그늘에서 서늘한 바람을 쐰다.’(前人栽樹, 後人乘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은 덕도 없고 재능도 없으며, 이는 전부 두 분 노화상(경공과 현공)께서 이룩해 놓으신 복덕의 가피이며, 정공노법사의 자비하신 보살핌이십니다! 우리가 만약 스승님의 은혜를 갚고자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대단히 뛰어나다고 여기고, 자기 자신의 이 몸뚱이의 무게가 몇 근 몇 냥이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이번에 래불사가 유명해진 것은 재앙이며, 우리를 전부 산채로 매장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오로지 인지법사께서 언제나 늘 이러한 맑고 분명한 정신과 사고를 유지하여, 설사 사원의 명성이 아무리 커질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전과 똑같이 성실하고 착실하게 수행하여 래불사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해나간다면, 우리 이곳에 있는 중생들은 진실로 복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이상은 말학이 왕춘생거사께서 강술하신 내용에 의거하여 정리하여 수록한 것입니다. 말학은 왕춘생거사께서 강술해주신 말씀을 쫒아서 래불사의 반세기 역사를 회고할 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마치 조수가 출렁이는 것처럼 저도 모르게 당나라 때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년)이 지은 《랑도사浪淘沙》시 중의 한 수가 생각났습니다.
근거 없이 헐뜯는 말이 마치 파도처럼 거세다고 말하지 말며, (莫道讒言如浪深)
좌천당한 관리가 마치 모래처럼 영원히 깊이 가라앉아 있을 것이라 말하지 말라. (莫言遷客似沙沉.)
천 번 만 번 걸러내느라 비록 온갖 고생 다할지라도, (千淘萬漉雖辛苦)
사나운 모래를 불어 다 걸러내야 비로소 황금이 나타나리라. (吹盡狂沙始到金)
래불사가 그동안 겪은 많은 어려움과 고난은 이 한 편의 글속에 전부 다 서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덕 역시 말씀하시길, “여수에서 나오는 아무리 좋은 금일지라도 모두 도야해야 하며, 곤산에서 나오는 아무리 아름다운 옥일지라도 모두 반드시 갈고 다듬어야 한다.”(麗水良金皆待冶, 崑山美玉總須磨)고 하였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취마련성聚魔煉聖” 역시 바로 이러한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공사부상인께서는 일찍이 강설하시길, “불법을 호지한 공덕은 법을 홍양한 공덕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불법을 홍양하는 사람은 보살이고, 불법을 호지하는 사람은 부처이십니다.”(護法的功德要超過弘法的功德, 弘法的是菩薩, 護法的是佛.)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는 모두 왕춘생노거사와 같으신 이러한 대덕들께서 마음과 몸을 다해 정법도량을 호지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불가사의한 승보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학은 이 자리를 빌려 왕춘생노거사님께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올려 찬탄하여 한량없는 공경의 뜻을 조금이나마 표합니다.
23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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